|
역설적 진리 십자가
마가복음 14:32~42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세계의 여러 종교는 신념과 가치, 그리고 역사를 나타내는 고유한 상징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슬람교(Islam)는 초승달과 별 (Crescent and Star)을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음력을 기반으로 사용하는 이슬람인들에게 초승달은 새로운 달의 시작을 상징하고 별은 신의 안내와 지혜를 의미한다고 여겼습니다.
유대교(Judaism)는 다윗의 별 (Star of David)을 택했습니다. 이것은 두 개의 삼각형이 겹쳐져 육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유대 민족의 결속과 신과 인간의 연결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사건을 상징하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희생, 구원, 부활을 의미하며,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상징입니다.
사실 십자가는 은혜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여길 수 없는 극악한 죄인이 양손과 양발이 묶여 처형되는 끔찍한 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십자가는 조롱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를 앞두고 꿈에서 십자가를 봤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전투 전날 밤에 십자가를 상징하는 '이 표지 아래에서 너는 승리할 것이다'(인 호크 시그노 빈체스, In hoc signo vinces)라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이 경험 후,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의 신에게 기도하고, 그가 이끄는 군대의 방패에 십자가를 새긴 후 승리했습니다.
그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황제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대해 신앙의 자유를 부여했습니다. 이 칙령으로 인해 기독교는 절대 불법 종교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십자가는 박해의 상징에서 기독교 승리와 구원의 상징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는 전쟁에서 승리를 안겨주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해주는 것입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과 같이 십자가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은 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극심한 고뇌와 두려움을 느끼시며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왜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게 하셨는지를 살펴보고, 제자들과 함께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신 뜻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무서운 저주의 상징물이 역설적으로 은혜와 사랑의 진리로 다가오게 된 배경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은혜의 징표로 주셨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십자가형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가혹하고 굴욕적인 처형 방법의 하나였습니다. 중범죄로 낙인찍혀 처형된 사람은 장시간에 걸쳐 십자가에서 극도의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을 겪었고, 이 과정을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포를 조성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고통과 수치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구약 신명기 21:23 절에서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나무에서 이루어진 처형 방식이었기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것은 유대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에게 저주받은 자로 인식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더는 저주의 상징이 아니라 은혜의 징표로 변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 이유는 기독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죄에 따르는 형벌의 엄중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죄는 저주의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됩니다.
죄는 씻을 수 없는 형벌을 가져옵니다.
이로 인하여 영원한 사망의 자리인 지옥으로 떨어지게 만듭니다.
죄는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사망에 이르게 하는 데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죄인에 자리에 서게 될 때 무서운 형벌이 임하여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됨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아들이라도 예외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어떤 긍휼도 자비도 없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자리가 죄를 가지고 태어난 저와 여러분이 있어야 할 곳이었습니다. 이를 데 없는 수치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해야 하는 자리에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나를 대신하여 나가셨습니다. 거기서 많은 사람의 조롱을 견디셔야 했고 고통을 견디셔야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단절한 자리에 놓였습니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음을 강조합니다. 즉, 죄로 인해 저주받은 인류를 대신하여 그 저주를 자신이 짊어지셨고, 그 결과 인류는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인간이 가장 멸시하고 혐오하는 상징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겸손을 드러내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자신을 낮추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심지어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그분이 얼마나 낮아지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사랑과 겸손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하게 하셨고, 이를 통해 인간에게 참된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역설적인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성경은 “약한 자를 통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고린도전서 1:27) “사람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어리석게 만드셨다”고 가르칩니다. 십자가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치욕스럽고 패배의 상징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심으로써 인간의 생각과 상식을 뛰어넘는 구원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승리와 영광의 상징으로 변모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셨고, 그분의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주었습니다. 십자가는 절대 저주나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구원과 승리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 이유는,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기 위함이며,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생각과 가치관을 뛰어넘는 구원의 계획을 보여주셨고, 가장 치욕적이고 패배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를 승리와 영광의 상징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막 14: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겟세마네’(Gethsemane)라는 이름은 아람어 또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했으며, ‘기름 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겟세마네 동산이 주로 올리브 나무가 있는 장소였고, 그곳에서 올리브 기름을 짜내는 틀(기름 틀)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쥐어짜듯 한 기도를 드린 것과 연상되는 지명입니다. 겟세마네는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감람산(올리브 산, Mount of Olives) 기슭에 있는 동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자리에 제자들을 모두 데리고 가셨지만, 그중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더 가까이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따로 데리고 가신 이유는 그들이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었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깊은 영적 교훈을 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초대 교회의 중요한 리더로 세워질 인물들입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수장으로,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각각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미리 경험하고, 이를 통해 영적으로 단련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겪으시는 고뇌와 기도를 가까이에서 목격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명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신들의 미래 사역에 대한 준비를 하도록 인도받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후, “조금 나아가사”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조금 나아가사”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돌을 던질 만큼 멀리 나아가사” 기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돌을 던질 만큼”이라는 표현은 대략 몇 미터 정도의 거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막 14: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신 이유는 자신이 체포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에서 제자들이 큰 시험과 유혹을 겪게 될 것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예로,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체포와 고난 앞에서 두려워할 것을 알고, 그들이 그 시험을 이기기 위해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41절에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는 있었지만, 그들의 연약한 육신과 두려움 때문에 시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한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만 이러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막 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이 단순히 육체적 고난 이상의 영적인 전쟁임을 아셨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통한 영적 힘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겟세마네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써 다가오는 고난을 감당할 힘을 구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같이 영적으로 준비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체포와 고난이라는 육신의 사건 너머에 있는 영적 싸움을 준비하도록 예수님은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단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세워갈 동역자들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고난의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 기도로 동참함으로써, 그분의 사역에 동행하고 고난의 시간에도 함께하길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잠들었고, 이는 그들이 아직은 영적으로 준비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과 기도로 자신의 사역에 더욱 깊이 동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는 다가올 시험과 유혹에 대비하여 그들이 영적으로 준비되어 있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들이 신앙의 시험을 이겨내고, 믿음을 유지하며,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 기도로 동참함으로써 고난의 시간에도 그분의 사역에 함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세 번째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밤이 맞도록 고뇌에 찬 기도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이유는 그분이 다가오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극심한 고뇌와 두려움을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와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막 14:35~36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이 잔’은 그분이 겪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이 고통을 피하고 싶어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의 인간적 바람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의지를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사명, 즉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길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결단하셨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결심을 굳히셨고, 십자가를 지기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기도 후, 막 14: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시면서 담대하게 앞으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이유는 다가올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느낀 고뇌와 두려움을 하나님께 아뢰기 위해서였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한 본보기이기도 합니다. 이 순간은 예수님이 인간적인 두려움을 넘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신앙적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세상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뀌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기도에 힘입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에 놓여 있는 인간이 영생을 얻고 죄인이 의인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고,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순을 진리로 바뀌게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