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새해는 왈츠로 밝습니다. 섣달 그믐날 밤 자정,聖 슈테판 성당의 종이 울리자 TV,라디오에서 일제히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곡이 흘러 나오면서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죠.
정월 초하루 아침 비엔나 필하모니가 樂友협회의 무직페라인 홀에서 여는 신년 음악회에서는 반드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연주되고 이 연주회는 전 유럽과 미국의 TV에 위성 중계되어 세계의 10억 가까운 인구가 새해를 비엔나 왈츠로 축복됩니다.
新正뿐 아니라 비엔나의 1월과 2월은 무도의 계절입니다. 웬만한 연주회장이나 큰 건물들은 모두 왈츠의 무도회장이 되어 내내 온 도시가 출렁입니다. 그 중 2월 중순 국립 오페라극장에서의 7천명이 참가하는 격식 높은 무도회가 하이라이트입니다.
* 빈 필의 신년 음악회
이런 무도회에서 연주되는 곡목으로서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단연 인기가 있습니다.
왈츠가 비엔나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초였습니다. 당시는 한창 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였는데도 온 도시에 춤바람이 불어 댄스 홀이 자꾸 생기고 악단들은 여기저기 끌려 다녔습니다.나폴레옹 전쟁 이후지만 쇼팽도 1829년에 쓴 한 편지에서 "비엔나는 모두 왈츠에 미쳐 있다"고 했습니다.
비엔나 왈츠가 이렇게 갑자기 성행하게 된 것은 오랜 유럽의 동란에서 시민들이 위안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종래의 춤이 남녀끼리 일정한 거리를 두고 추는 것인데 반해 왈츠는 서로 껴안고 빙빙 도는 데 매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행을 타고 나타난 악단의 하나가 요제프 라너의 것이었고,이 악단에서 독립한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비엔나 왈츠를 확립했으며, 그 이후 요한 슈트라우스 2세로 이어지면서 왈츠의 '슈트라우스 王朝' 시대가 이룩됩니다.
* 어린 슈트라우스가 왈츠를 처음 작곡한 집
연초가 아닌 때에 비엔나를 찾은 사람들은 본바닥에서 자칫하며 왈츠 구경을 못하고 지나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판을 벌이고 있는 곳이 한 군데 있습니다.
비엔나에 많은 것이 카페와 기념상이지만, 그 많은 기념상 중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것은 시립공원에 세워진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상입니다. 연미복을 입은 슈트라우스가 바이올린을 켜는 동상이 하얀 대리석 아치를 등에 지고 서서 호화롭습니다.
*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동상
이 동상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공원의 한 쪽 끝에 '쿠어살론 휘브너'라는 카페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여기가 비엔나 왈츠의 관광센터입니다. 옥내에서 또는 여름에는 옥외에서, 매일 저녁 수백 쌍이 어울리는 왈츠의 춤판이 벌어집니다. 누구나 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쌍쌍의 관광객들이고 프로 댄서가 시범을 보이기도 합니다.
* 쿠어살론 휘브너(연주장 겸 카페)
전문가들에 의하면 왈츠는 비엔나의 오케스트라라야 제 맛을 살릴 줄 알지, 외국의 악단들은 도저히 흉내를 못낸다고 합니다. 왈츠는 출렁이는 것 같은 느낌과 주저주저하는 것 같은 기분이 생명인데 이것은 조그만 악센트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악보대로 정확히 연주한다고 해서 되지 않는 다는 것이죠.
비엔나 시민치고 왈츠를 못 추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남자라면 연미복 한 벌, 여자는 하얀 드레스 하나쯤 대개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비엔나 시민들을 들뜨게 만드는 것이 각각 '왈츠의 아버지'와 '왈츠 왕'으로 불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父子요, 왈츠곡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인 것입니다.
왈츠왕 요한 슈트라우스(이하 모두 아들을 이름)는 슈베르트와 마찬가지로 비엔나에서 태어나 비엔나에서 죽은 비엔나 토박입니다. 그가 태어난 집은 제7구의 레르헨펠더 슈트라세 16번지. 당시는 시외였으나 1805년 시내로 편입된 곳입니다. 집은 1890년 허물어지고 새 건물로 바뀌었습니다. 그 때는 요한 슈트라우스가 살아 있을 때라 65세의 노음악가는 이 현장에 와서 생가의 도괴를 한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 슈트라우스가 태어난 장소라고 알려주는 명판
비엔나의 변두리, 살만스도르프라는 아직도 시골 냄새가 나는 동네에는 비엔나 숲으로 들어가는 언덕 길가에 요한 슈트라우스가 6세 때 첫 왈츠 곡을 썼다는 집이 남아있습니다. 슈트라우스家는 1829년부터 1836년까지 간간히 여름을 외조부집이던 이 곳에서 지냈습니다. 슈트라우스의 첫 왈츠곡은 <첫 생각>이란 곡목으로 1861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가 오페레타 <박쥐>를 쓴 집이 또한 비엔나 13구의 히칭이라는 지역에 현존합니다. 얌전한 2층짜리 빌라입니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45세 때인 1870년 이 집으로 이사 왔다가 1878년 첫번째 부인 헨리에테가 여기서 죽자 집을 팔아 버렸습니다.
비엔나에 요한 슈트라우스가 지나간 흔적은 이렇게 더러 있지만, 정작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작곡가를 참배하기 위해 각국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안내할 祠堂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엔나市는 이것이 안타까워 왈츠 왕이 바로 그 대표곡을 쓴 집을 오랜 교섭 끝에 당시의 주인으로부터 빌려 1978년 기념관으로 개관했습니다.
* 슈트라우스 기념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이제 자기 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영화 <제3의 사나이)에 나오는 대회전대를 구경하기 위해 프라터 유원지로 가는 사람들은 프라터 슈트라세 큰길 가 54번지에 있는 이 기념관 앞을 지나가게 됩니다. 기념관은 전시실로, 가구며 악기들의 진열품이 상당히 충실합니다.
비엔나 시는 오래 전부터 요한 슈트라우스의 유물들을 사 모았고, 기념관으로 결정하면서 문짝 하나 마루바닥 하나까지 원상대로 복원했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1863년부터 1870년까지 이 집에 살았고, 히칭의 <박쥐>를 쓴 집으로 이사 가고 나서도 여러 해 동안 이 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명곡이 태어난 방에서 멋쟁이 요한 슈트라우스를 생각합니다. 그는 늘 주름이 빳빳이 잡힌 바지에 구두는 반짝거리고 머리에는 실크 해트를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넥타이는 최신 유행의 것을 매고 다녔고 아무리 마음에 드는 것도 댓번 매고 나면 버렸습니다. 집에 있을 때도 모자만 벗을 뿐 정장을 풀지 않았다고 합니다.
* 기념관 내부, 그가 사용하던 악기가 보입니다
그러고 보면 요한 슈트라우스는 멋의 작곡가였습니다. 그의 왈츠곡들은 멋이 춤을 추는 무도곡인 셈이죠.
비엔나 시민치고 왈츠 춤을 못 추는 사람이 없다고 했지만 단 한 사람 있었습니다. 왈츠 왕 자신이었습니다. 한 여성한테 춤추러 끌려 나가면 못 추는 춤을 따라 추는 척하면서 오케스트라 쪽으로 유인해서는 제1바이올린에게 여성을 슬그머니 맡기고 자신이 바이올린을 쥐었습니다. 온 세계인을 춤추게 해 놓고는 혼자 가만히 서 있는 反語의 멋이 또한 왈츠 왕답습니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1866년 오스트리아가 이웃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국민들이 의기새침해져 있을 때 그들의 기분을 일신시키고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작곡된 곡입니다. 구원의 음악이었습니다. 그 이래 이 곡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명곡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곡은 오스트리아의 제2의 國歌로 나라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연주됩니다.
* 도나우강이 흘러가는 모습의 지도
비엔나에서 이 곡 때문에 더 유명해진 것으로 도나우 강이 있습니다. 南獨에서 발원하여 오스트리아 등 8개국을 거쳐 흑해로 흘러 들어가는 유럽 제2의 이 강은 비엔나를 지나가면서 흐름이 완만해집니다. 舊 도나우라 하여 옛날의 물길을 막아 보트,서핑 등의 놀이장이 되었고 新 도나우의 물길이 회색으로 도도히 흐릅니다. 아름다울망정 적어도 '푸른'도나우는 아닙니다.
도나우 강은 베토벤의 산책로가 있는 하일리겐슈타트를 돌아 올라가 칼렌베르크 언덕의 전망대에 올라서며 전망이 좋습니다. 일의대수(一衣帶水), 고운 선율같은 한 줄기 띠가 은빛으로 빛나며 광대한 숲을 끼고 돌아 나갑니다. 이 숲이 또한 요한 슈트라우스의 다른 왈츠 명곡 <비엔나 숲 속의 이야기>로 유명해진 것입니다.
* 칼렌베르크 언덕에서 보는 비엔나 교외
멋쟁이 요한 슈트라우스는 또한 겁쟁이이기도 했습니다. 고독을 겁냈고 늙음을 겁냈고 태양이 불안하여 비오는 날이 좋았고 자연한테조차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선율을 낳게 한 비엔나 숲이건만 작곡자 자신은 한 번도 이 숲에 가 본 일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시내의 폴크스가르텐은 1823년에 생긴 비엔나 최초의 공원입니다. 1899년 6월 3일 슈트라우스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습니. 오케스트라가 갑자기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피아니시모로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으로 청중들은 왈츠 왕의 죽음을 알았습니다.
* 슈트라우스의 묘지
요한 슈트라우스가 7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집은 이름이 요한 슈트라우스 가세로 바뀐 길의 4번지에 있었으나 2차 대전 때 파괴되어 새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안뜰에 바이올린을 든 요한 슈트라우스가 석상으로 옛 터를 지킬 뿐입니다. 그의 마지막 방 모습은 기념관이 된 집에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당대의 베스트셀러 작곡가이던 왈츠 왕의 장례식에는 10만 명이 모였다니 그의 인기가 짐작됩니다. 요한 슈트라우스도 당연히 비엔나 중안 묘지의 악성들 묘지인 '특별 명예 구역'에 묻혔습니다 .1901년에 제막된 묘비에는 도나우 강의 妖精이 새겨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