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철(李思哲) 1405년(태종 5)∼1456년(세조 2). 조선 초기의 문신.
시호: 문안(文安) 學勤好問曰文。寬裕和平曰安。1456년(세조 2) 증시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이 문(文)이고,
너그럽고 넉넉하고 화평(和平)한 것이 안(安)이었다.
봉호: 견성부원군(甄城府院君)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지(誠之). 난(蘭)의 아들이다.
1432년(세종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박사가 되고, 1434년에 집현전부수찬에 승진되었다.
1442년에 장령‧집의를 거쳐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역임하고, 1443년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1447년 좌승지‧도승지를 지내고 《선원록(璿源錄)》‧《종친록(宗親錄)》을 개수하였다.
1450년 이조참판이 되고 이듬해에 예조판서‧이조판서를 지냈다.
1452년(문종 2)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우참찬이 되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원로대신을 살해, 제거하는 이른바 계유정난에 가담하여 협력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1등이 되고, 견성군(甄城君)에 봉하여졌다.
1455년 좌찬성으로서 함길도도체찰사가 되어 함길도에 가서 주현 연혁의 편리 여부를 살펴보았다. 이해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강박하여 왕위를 수선(受禪)하는 일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세조가 즉위하자 우의정에 승진되고, 좌익공신(佐翼功臣)2등이 되었으며, 견성부원군(甄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456년(세조 2) 좌의정이 되었다.
○ 이사철(李思哲)의 시에, “망산(芒山)과 탕산(碭山)의 상서로운 구름기운은 한(漢) 나라의 하늘, 해가 함지(咸池)로부터 나와 사방을 비춰 주네. 자손에게 물려주신 큰 공업(功業)을 이 땅에서 그 기초를 다졌는데, 용이 난 남긴 자취는 그 초년(初年)을 상상하게 한다. 경사는 현조(玄鳥)에 모여 큰 복을 뻗치게 했고, 면과시(緜瓜詩)를 읊어 전파하매 아악(雅樂)을 듣네. 소악(韶樂)을 듣고 이미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었는데, 대풍가(大風歌 한(漢) 나라 고조(高祖)가 지어 읊은 노래)는 마땅히 풍패(豐沛)를 향해 전하리로다.”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함흥부-
○ 이사철(李思哲)은 신체가 뚱뚱하고 컸으며 음식도 남보다 많이 먹어, 매끼에 큰 밥그릇에 밥 한 사발과 삶은 닭 두 마리와 한 주전자의 술을 먹었다. 일찍이 등창을 앓아 죽게 되었을 때 의원이, “독한 술과 삶은 고기를 먹지 마십시오.” 하니, 공이, “먹지 않고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먹고 죽는 것이 낫다.” 하고 술 마시고 고기를 씹기를 평상시와 똑같이 하였으나 결국 병은 나았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부귀한 사람은 음식도 역시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하였다. -해동잡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