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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96
12월1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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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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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isLYA9e_3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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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자녀다운 신뢰와 존경은 바람직한 기도 생활의 두 기둥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제자 교육을 이수한 72제자들이 사목 실습을 마치고 돌아와 실습의 결과를 보고하는데, 완전 축제 분위기입니다. 넘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보고를 드렸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복음 10장 17절) 기쁨으로 충만한 제자들의 모습 앞에 예수님 역시 크게 기뻐하시며 대견스러워하셨습니다.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고 허세로 가득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순수하고 소박한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 즐거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복음 10장 21절) 참으로 가슴 훈훈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공적인 사목 실습의 결과물을 안고 환한 얼굴로 달려온 제자들, 제자들의 성공을 자신의 일보다 더 기뻐하시는 스승님의 모습... 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충만한 기쁨이 그 자리에 흘러넘쳤습니다.
성공적인 복음 선포 여행의 결과로 인한 흘러넘치는 충만한 기쁨! 그것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주님의 날의 특징입니다. 그 기쁨은 사탄에 대한 주님의 승리로 인한 기쁨입니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감을 통해서 얻는 기쁨입니다. 짧지만 진심이 담긴 예수님의 감사 기도가 돋보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복음서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기도는 모두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이 표현은 어린이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정겹게 부를 때 사용하던 아람어 ‘아빠’(Abba)라는 단어의 번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 지극히 친근하고 다정한 어조로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하느님이란 존재는 꽤나 멀리 계시고, 무척이나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감히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 하느님은 너무나 편안하고 따뜻한 아버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라는 친근한 인사말에 ‘하늘과 땅의 주님’이란 존경으로 가득 찬 호칭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니 예수님의 기도에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애정과 존경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자녀다운 신뢰와 존경은 바람직한 기도 생활의 두 기둥입니다.
예수님 시대 학벌을 자랑하면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처하며, 여기저기 떠벌이고 다니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콧대 높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철부지들과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보여주셨습니다. 너무나 은혜롭고 감사한 예수님의 선택에 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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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하는 선행, 철부지가 하는 선행>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SnVDtyBD-8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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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예수님도 “철부지 어린이”입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 ‘모든 것’을 받으셔서 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철부지라고 하는 대상은 또한 지금까지 복음을 선포하고 온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주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보고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오늘 이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철부지들이 받는 상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그 복음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되기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통로인데 그 통로는 내가 주는 것으로 차게 되어있습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요즘 남을 행복하게 하려다가 많은 이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혜민 스님’입니다. 이분은 자신이 깨달은 행복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전해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전해주는 행복이 자기 생각에 오염이 되고 말았습니다.
혜민 스님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법정 스님께서 무소유가 가능하셨던 것은 책 인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도나 주지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해도 살 수 있어야, 그리고 또 어느 정도 베풀 능력이 되어야 아이러니하게도 무소유도 가능해진다.”
무소유가 행복임을 주장하였지만, 점점 돈이 많아지자 무소유라는 개념을 자신의 식대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법정 스님은 모든 인세를 대학생들 등록금 후원하는 등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인은 진정 가난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어떤 유튜브 분석을 보니 근 10여 년간 혜민 스님은 책 인세 약 50억, 강연 약 50억, 애플리케이션 등 부수입이 약 50억 정도 벌었다고 합니다. 기부 형식으로 받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세금도 내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자신이 주지로 되어있는 절의 소유로 된 건물에 살면서 세 들어 산다고 말하며 4억이 넘는 외제 차를 탄다고 자랑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번 돈을 자신이 쓰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평소에 무소유를 주장하며 많이 갖는다고 행복한 것이 아님을 강연 때마다 하고 다녔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에 그를 믿었던 많은 사람이 분노를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 지금은 혜민 스님도 그리 행복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의 복음을 전함이 아니라 마치 철부지 어린이처럼 부모로부터 받은 것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부모의 행복을 먼저 생각합니다.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부모의 행복을 위해 공부하기 싫어도 공부하러 유치원에 가고 학교에 갑니다. 그리고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부모가 좋아하면 부모를 더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더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런 삶이 나중에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바탕이 됩니다. 이것이 큰 가치를 만듭니다.
어떤 유튜브에 보니 이런 모습의 혜민 스님과 정반대의 삶을 사는 종교인을 소개하는데 성남에서 무료급식소와 안나의 집, 청소년 쉼터 등을 운영하는 김하종 신부가 나왔습니다. 김하종 신부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해 30년 동안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였습니다. 난독증으로 어렸을 때부터 많은 상처를 지니고 있었고 커서는 사제가 되어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해주고자 했습니다. 지금도 오래된 다마스 차를 끌고 다니며 남들에게 구걸해가며 노숙자들과 가출 청소년들을 돕고 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로 문을 닫는 급식소가 늘어나자 더 많은 이들이 한 끼를 때우기 위해 안나의 집을 찾습니다. 안나의 집도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봉사자도 줄고, 후원도 줄기 때문입니다. 가장 힘든 것은 동네를 노숙자들로 더럽힌다고 말하는 주위 사람들의 민원과 항의입니다. 그런데도 꿋꿋이 매일 도시락을 700여 분에게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일기 형식으로 적은 책, 『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에서 김하종 신부는 가난한 이들을 친구라고 부르며 “그리스도의 아픈 상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자신의 무언가를 전하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런 행위가 그리스도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치유해주려는 노력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철부지 어린이입니다. 그리스도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살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밤마다 몸이 부서질 듯 아프기도 하지만 또 친구들이 도시락을 받아가는 것을 보며 매일 행복해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하는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하는지가 좋은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참 행복으로 이끄는 것인지, 안 좋게 끝나게 하는지를 결정합니다. 우리는 철부지 어린이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믿으면 오류에 빠지고 오염된 복음을 전하다 자신도 오염되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고 하여도 나의 것이 아닌 아버지의 것을 받아서 나누는 철부지 어린이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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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0,21-24 :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신다.
제자들의 전도사업의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찬가를 부르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21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란 이방의 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점성사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즉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로부터 전승을 물려받은데 반해 예수님은 하느님께 모든 계시를 전해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아드님만이 서로를 알고 계시며, 또한 예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택하신 제자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바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적을 보기 때문에 복되다는 것이다. 이미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 13,16-17)라고 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님의 본 모습이다. 스승님은 우리를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여 죽음으로 몰고 갔다. 얄팍한 지식으로 신앙을 논하며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신앙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도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태양 앞에 등불을 켜 놓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 등불을 가지고 그냥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결국은 그 빛을 거부하는 결과를 만들고 만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흠숭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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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예로부터 성군은 두 가지 중요한 직무를 수행해야 하였습니다. 첫째는 자기 백성을 원수들에게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백성을 정의롭게, 억눌리고 가난한 이들이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도록 공정하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불충한 임금들 때문에 남북으로 갈라져 각각 아시리아와 바빌론에게 패망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서 새로운 희망이 떠오릅니다. 특별히 구약의 위대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다윗 임금에게 내렸던 축복을 새로운 표현으로 언급합니다. 바로 ‘메시아사상’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메시아의 출현을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나무의 표상을 사용합니다. 사실 햇순과 그루터기는 드문 표현인데, 아시리아와 페니키아 말로 ‘왕홀’을 뜻합니다. 새싹이라는 용어도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여 그 나라의 왕권을 완성할 후손을 가리킵니다. 지혜와 슬기와 경륜은 다스림의 필수 요소이자 임금의 기본 자질로, 무엇보다 지혜는 하느님의 영에 결부됩니다. 용맹은 백성을 보호하는 평화의 군왕을 상기시키며, 지식과 주님을 경외함은 하느님에 대한 앎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림 시기에 하느님 나라를 평화와 번영으로 이끄실 분을 기다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와 유다의 임금들이 간절히 원하였으나 그들에게는 감추셨던 최고의 특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철부지라면 악하고 패덕하게 행동하기보다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을 가득 채울 주님에 대한 앎으로 응답해야 마땅하고 옳은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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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그 구원에는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교만한 위선자들은 잘난 체 하면서 예수님을 안 믿었고,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자들인데, 사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겸손하고 단순하고 진실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철부지들’이라는 말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철부지들’이라는 말은 나쁜 뜻으로 사용된 말이 아니라, 어린이처럼 순수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좋은 뜻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감사기도를 드리신 것은, 겸손하고 순수하지만 사회적으로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는 소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만한 위선자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드리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 됩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아무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먼 곳에서 와서 예수님께 경배를 드린 ‘동방박사들’을 대표적인 ‘철부지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동방박사들이 그 당시에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아니었겠지만, 그들의 순수한 마음과 믿음과 열정은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철부지들’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동방박사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헤로데 임금, 수석 사제들, 율법학자들은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교만한 위선자들입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동방박사들로부터 메시아 탄생 소식을 들었고, 또 자신들의 성경 지식으로 메시아께서 태어나신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메시아께 경배를 드리러 가지 않았습니다.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헤로데는 경배하러 가겠다고 거짓말을 했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방박사들만 받아들이시고, 헤로데와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만났고, 원하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아서 못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는 분인데, 그 은총은 받아들이는 사람만 받게 되고, 안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기들이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교만과 위선으로는 만날 수 없는 분, 겸손하고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만 만날 수 있는 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탄절은 겸손하고 순수한 사람들의 축제입니다. 교만한 위선자들이 자기들끼리만 어울려서 세속적으로 흥청망청 즐기는 성탄절은 아무것도 아닌 날입니다. 진정한 성탄절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이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만이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통로라는 뜻이기도 합니다.(요한 14,6-7) 그런데 예수님은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으로, 즉 세상에서 제일 가난하고, 약하고,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는커녕 사람들의 보호를 받아야 할 가냘프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천사는 그 아기가 ‘구원자’ 라고 선포합니다.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코린 1,27-31)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하느님 앞에서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잘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끄럽게 된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은 ‘가장 낮은 곳’이고, 나를 낮추어야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왜 그렇게 오셨는지,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 세속의 명예와 권력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하느님 앞에서 전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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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지난 11월 1일 위령성월이 시작되는 첫날이었습니다. 제가 미사를 도와드리고 있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에는 같은 날 유아세례와 연도가 있었습니다. 태어난 지 10개월 된 아이를 위한 유아세례였습니다. 코로나19로 미사 참석 인원이 10명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아이는 코로나19를 모를 것입니다. 아이는 해맑게 웃으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아이가 세례를 받으면서 가족들도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 한 아이의 세례가 닫혀있던 가족들의 신앙을 다시 열었습니다. 아이의 앞날에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유아세례를 마치고 세상을 떠나신 고인을 위하여 장례식장으로 갔고 연도를 바쳤습니다. 손에는 묵주를 들고 평온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고인을 보았습니다. 고인의 큰 딸은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해 주신 교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이제 아픔도, 고통도, 슬픔도 없는 곳에서 잘 지내시기를 바란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 아이는 축복 속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한 영혼은 기도를 받으며 천상의 영원한 나라로 가셨습니다. 생(生)과 사(死)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 같았습니다.
1968년도에 스탠리 큐브릭에 의해서 제작된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머나먼 우주에서 생을 마감하는 주인공은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서 지구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영화는 철학적인 주제를 영상으로 담았습니다. 플라톤의 철학, 니체의 철학을 담아냈습니다. 표범을 피해서 동굴 속에 있던 유인원은 밖으로 나왔고 도구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구를 가진 유인원은 표범을 이길 수 있었고, 물을 차지하려는 다른 유인원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유인원이 도구를 이용하게 된 것은 동굴 속에 있던 ‘모노리스’였습니다. 모노리스는 유인원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존재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모노리스는 유인원의 지적인 능력을 향상시켰습니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우리는 허상을 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동굴에서 나오면 참된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그의 저서에서 ‘초인(超人)’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초인이 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른 세상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육사는 그의 시 ‘광야’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큰 江(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엇다. 지금 눈 나리고 梅花香氣(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천고)의 뒤에 白馬(백마)타고 오는 超人(초인)이 있어 이 曠野(광야)에서 목노아 부르게 하리라.”
도구를 이용한 인류는 문명과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도구는 예술이 되었습니다. 성당과 사원이 되었습니다. 인류의 이성과 감성은 도구를 만나면서 화려한 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구는 총과 칼이 되었고, 비행기와 군함이 되었고, 대포와 미사일이 되었습니다. 도구를 선점한 인류는 유인원과 다른 생명을 하급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 원주민도 하급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였고, 아름다운 지구는 식민지 쟁탈의 싸움터로 변하였습니다. 도구는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내는 축복이었지만 도구는 욕망과 야만을 드러내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허상이 가득한 동굴에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여전히 폭력과 전쟁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지구를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습니다. 가난해서, 병들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피부색 때문에 차별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교, 신념, 세대, 민족의 갈등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가 욕망과 야만의 동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초인의 눈에는 우리들 또한 저급한 존재로 여겨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겸손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충분히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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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생 수녀님이 전화를 하였습니다. 어머니에게 육포를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알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전에 어머니와 함께 홍콩과 마카오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마카오에는 육포를 파는 거리가 있었고, 어머니는 그곳의 육포가 입맛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명동에는 마카오서 볼 수 있었던 육포를 파는 가게가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육포를 좋아하시는지도, 명동에 육포를 파는 가게가 있다는 것도 잘 몰랐습니다. 어머니에게 육포를 보내드리면서 잠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육포를 드시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들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은 아닐까!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경륜과 슬기의 영이 함께 하면 고목에서도 아름다운 꽃이 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아름답게 꽃을 피울 것이라고 합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돌보아주고, 가난한 이, 아픈 이, 굶주린 이들이 위로를 받고,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낙원’을 이야기합니다.
1988년 저는 군대를 제대한 후에 ‘돈 보스코 직업 훈련원’에서 잠시 일을 했습니다. 그곳에는 멀리 외국에서 오신 신부님과 수사님들이 계셨습니다.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밤에는 방송통신 고등학교 과정을 배우게 하고, 틈틈이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영어와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낮에는 용접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학생들을 위해서 후원회원들을 만나기도 하셨고, 재미있는 강론으로 학생들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수사님들은 직접 기술을 가르쳐 주셨고, 점심 식사 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농구를 하셨습니다. 권위적인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늘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사랑과 관심을 주셨습니다. 존경받는 사제, 권위적인 사제, 엄한 사제들을 보았던 제게는 새로운 경험이었고,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사제가 된 후에 신부님과 수사님들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만주에 있는 ‘직업 훈련원’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한국은 이제 잘 살게 되었기 때문에 더 어려운 곳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70이 넘은 연세에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려는 신부님의 열정을 존경합니다. 수사님들은 멀리 아프리카로 가셨다고 합니다. 역시 더 어렵고, 가난한 곳을 찾아서 떠나셨다고 합니다. 신부님과 수사님들께서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를 ‘가별’이라고 불러주셨던 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쉽고 편안한 길이 있지만 굳이 힘들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셨던 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좋은 집,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차, 더 좋은 것들을 얻으려고 공부를 합니다. 출세와 성공이 삶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또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가치를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책을 자주 읽고, 나는 누구인지를 고민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며,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나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얻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해하기 때문에 이해받을 수 있고, 용서하기에 용서받을 수 있고, 사랑하기에 사랑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에게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그런 세상은 분명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이태석 신부님, 오웅진 신부님은 그런 세상을 꿈꾸었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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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안다는 것>
루카 10,21-24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안다는 것>
그가 되기 전에는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있어도
그를 알 수는 없지요
그가 되는 만큼
그를 알 수 있지요
그를 안다는 것은
그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되기 전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어도
그것을 알 수는 없지요
그것이 되는 만큼
그것을 알 수 있지요
그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이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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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알몸으로 주님 맞이하기>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과 함께 예수님의 즐거움을 이른 아침부터 함께 느끼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값진 사명을 수행하고 기뻐하며 돌아온 일흔두 제자를 맞이하신 후에, 비록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곧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못 배운 철부지 같은 제자들이 당신을 믿고 따름에 대해서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올리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 슬기롭다는 자들, 그리고 철부지들, 모두 예수님을 만나지만 같은 마음, 같은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상에서의 우리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성찰해보면, 작은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나’와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가 있습니다. ‘경험으로서의 나’, ‘지식으로서의 나’, ‘지위로서의 나’, ‘재물로서의 나’, ‘무엇 무엇으로서의 나’가 그것들 입니다.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는 내가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가 누군가를 간절히 만나려고 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가 아니라 ‘나 자신’이 다른 이들을 만날 때, 그 만남은 순수할 수 있습니다. 만나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는 나의 삶의 지평을 넓혀주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담았던 맑고 순수한 마음의 눈을 가리고 왜곡된 시선으로 다른 것들을 보도록 이끌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나를 둘러싼 껍데기를 벗어야 합니다. 조금만 게으르면 어느 새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가 나의 자리에 비집고 들어와 마치 자신이 진짜 ‘나’인 것처럼 행사하기 쉽습니다.
철부지 어린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또 다른 자신’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것들을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물들, 사건들과 있는 그대로 직접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는 늘어갑니다.
자신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것들을 보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는 그 반대입니다. 점점 더 코끼리를 만지는 소경 꼴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의 존재를 알게 되고, 쉽게 이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혹시 유혹에 넘어갔다 하더라도, 이내 그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대림 시기는 나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나에게 오시지만, 내가 꼭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주님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꼭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내’가 이 만남을 방해할 수 있고, 나에게 오시는 주님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왜곡되고 편협한 시선으로 보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대림 시기는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를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벗겨내고 마지막 알몸뚱이인 ‘나 자신’이 남을 때, 비로소 나는 나에게 오시는 주님을 온전히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시는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이번 대림 시기는 주님을 정성껏 맞이하겠다는 이유로 오히려 이 것 저 것 또 다른 나로 나를 치장하여, 결국에는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좀 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금은 부끄럽겠지만 벗님들께서 입고 계시는 거추장스러운 옷들을 모두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주님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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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곽용승 요셉 신부님]
여러분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오래 전에 글에서 본 통계에 관한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 통계는 많이 배운 이들과 자신이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만하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과 비교했을 때 도박과 사기에 잘 빠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의 인식 틀 안에 어떤 사실이 수용되어 들어오게 되면, 그것이 가지는 가치와 공동의 선에 대한 구현 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욕심의 충족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어 실현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탕주의에 가까운 도박과 대박의 달콤한 유혹인 사기에 쉽게 빠져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확률적 계산과 가능성의 범위를 논리와 이성으로 포장하면 많이 배운 이들, 똑똑하다고 자만하는 이들은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많이 배우지 못한 이들은 그것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타당성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서 맞갖지 않으면 그것을 수용하는데 직관적으로 거부하고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사람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반성이 깃들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만하는 이와 스스로 부족하다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많이 배우지 못한 이들과의 더 뚜렷한 차이는 만족과 감사의 태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많이 배웠다는 사람과 똑똑하다고 자만하는 이들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만족과 감사가 상대적으로 많이 배우지 못한 곧 오늘 복음에서 언급한 “철부지” 이들과 비교해 볼 때 적다는 것입니다. 이는 많이 배운 사람들,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만하는 그들의 삶에 욕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가지려고 하고, 더 누리려고 하고, 더 안락한 삶을 영위하길 바라는 탐욕에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향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배우지 못하고 주변에 머물렀던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에 대한 주님의 따뜻한 시선을 담고 있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많이 배우지 못하고 스스로를 슬기롭지 못한 이들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하는 이들에게서는 욕심의 위험이 드리우지 않고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곧 그들은 세상의 욕심에서 자유로 왔고,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과 감사의 태도가 있음을,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선택하고 주님께 믿음을 두며, 주님의 말씀에 희망과 애정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제1독서에 이사야 예언자가 표현하는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는” 평화와 기쁨의 나라를 체험할 것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축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역시도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과 희망의 토대로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행복의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 삶을 더욱 겸손하게 주님께 의탁해야 할 것이며, 주님으로 인해 충만함으로써 감사와 비움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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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모 토마스 모어 신부님(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마르코는 왜 선교 여정 도중 하차했을까?>
바오로 일행은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가고,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사도 13,13)
파포스에서 성공적인 선교 활동을 마친 선교팀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하여 배를 타고 소아시아를 향해 나아간다. 여정을 보면 파포스에서 페르게로 그 다음이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다. 그런데 페르게에서 조수로서 선교팀에 합류했던 마르코가 복음 선교를 중단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본문에 나오는 요한이 바로 마르코다. 마르코는 왜 선교 여정 도중 하차했을까? 우선 심심치 않게 제시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를 소개한다.
그것은 마르코가 인간적인 유약함 때문에 도중하차 했다는 견해다. 마르코는 처음 사촌형 바르나바가 선교 여행을 함께 떠나자고 했을 때 사명감보다 호기심에서 따라 나섰다. 호기심에서 떠났기에 어려움이 밀려오자 쉽게 도중하차 했다는 것이다. 마르코가 인간적 유악함에서 도중하차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마르코가 가졌던 어려움을 세 가지로 얘기한다.
하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저택에서 누렸던 윤택한 환경에 대한 그리움이다. 마지막으로 선교팀이 페르케에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가려면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그 산맥을 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마지막 두려움을 보다 자세히 설명한다.
타우루스 산맥은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산들로 이뤄졌다. 우리로 치면 대관령 (842미터)이나 한계령(1004미터) 보다 훨씬 높다. 산세가 험악하고 급류가 흐르기에 언제 어디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마르코가 어머니가 그립고, 큰 저택의 윤택한 삶이 그립고, 험한 타우루스 산맥을 넘는 것이 두려워서 도중하차했다는 것은, 마르코를 인내심과 용기가 전혀 없는 겁쟁이로 비하시킨다.
하지만 마르코는 부모님으로부터 담대한 신앙을 물려받은 사람이다. 예수님이 지명 수배된 상태에 있는데도 예수님이 파스카 만찬을 드실 수 있도록 집을 제공했던 사람이 마르코의 아버지이고, 야고보 사도가 목이 잘리고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신자들이 함께 모여 베드로 사도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집을 제공했던 사람이 마르코의 어머니다. 이런 부모를 둔 마르코가 인간적 약함에서 선교 여정을 중도에 그만두었다는 것은 그를 모독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마르코가 선교 활동을 중도에 그만둔 진짜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바오로가 갑자기 선교팀의 리더로 나선 것에 대한 항의였다. 선교팀의 리더는 본시 바르나바였는데, 파포스를 떠날 때부터 바오로가 선교팀의 리더 역할을 하자 반발하여 떠났던 것이다. 바오로가 선교팀의 리더가 되었다는 증거는 위 본문에 나온다. '바오로 일행'을 그리스 성경에서 직역하면 '바오로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자들'이다. 바오로가 중심 인물이고 바르나바와 마르코는 변두리 인물이다.
애초 안티오키아 공동체가 선교팀을 파송하면서 팀의 리더로서 바르나바를 세웠기에, 마르코는 바오로가 중도에 리더처럼 행동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마르코가 선교 여정을 중도에 그만둔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바오로의 개방적인 복음 정책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바오로가 어떤 율법 준수의 조건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하나만으로 이방인들을 교회 안에 받아들이고, 그들과 식탁친교를 갖는 것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이 점은 마르코의 이름 변화를 통해 추적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그가 처음 등장할 때에는 마르코 요한으로 불렸다.(사도 12,12) 마르코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유다식 이름이다. 그가 선교팀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두 이름이 다 같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가 선교팀에 합류하고 나서는 달랑 유다식 이름인 요한만 언급된다. (사도 13,5.13) 이는 바오로가 다마스쿠스 회심 사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유다식 이름인 사울을 사용하다가 파포스에서 바오로란 로마식 이름을 사용한 것과 정반대다.
선교 여정에서 요한이란 유다식 이름으로 언급된 것은, 그가 갖고 있는 유다 보수주의적 태도를 알려주고, 바오로의 개방적인 복음 정책에 그가 반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한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고, 율법도 지키지 않아도 신앙 하나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바오로의 선교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아가 유다인들은 이방인들과는 함께 식사를 할 수 없는데, 선교팀은 신자가 된 이방인들과 식탁친교를 나누었다. 마르코는 선교팀의 이런 파격적인 행위를 예루살렘 교회가 알게 될 경우 어떤 비난이 쏟아질지 두려웠다. 그래서 더 이상은 선교 여정을 계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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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나라에서 한때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참가자들은 평가단 앞에 나와 한껏 자신들의 실력을 뽐냈었지요. 그리고 평가하는 심사위원들 앞에서 심사평을 들으면서 합격과 불합격 판정을 기다립니다.
사실 이 심사평이 의외인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너무나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심사의원은 엉망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과 별 차이 없이 뻔한 노래인 것 같은데, 심사위원은 저와 반대로 극찬을 합니다. 전문가니까 당연히 저와 차이가 있겠지요.
그러나 이들의 안목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디션에서 우승한 사람보다 중간에 탈락했음에도 대중들로부터 더 큰 인기를 누리는 경우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도 정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부족함을 가지고 있으므로, 때로는 실수도 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의 판단에 주저앉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버리면서 고유한 ‘나’를 만들어가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께서도 우리를 함부로 판단하시고 곧바로 벌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시간을 주십니다. 세상의 관점과 주님의 관점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오늘 주님께서 바치시는 기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바치는 부분인데, 어떤 점이 감사하다고 말씀하십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심에 감사하다고 하십니다. 결국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자들보다 어린아이들이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음을 감사의 기도로 고백하십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뽑은 제자는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부족함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제자로 뽑으셨고, 그들에게 마귀들을 쫓아내고 나병 환자를 깨끗이 하고 죽은 이를 일으키는 하느님 나라의 권능을 주십니다.
이 하느님의 권능은 많은 예언자와 임금도 받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관점보다 주님의 의지로 주어지는 큰 사랑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세상의 기준을 내세우면서 감사할 이유가 없다고 한탄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받은 것이 없다면서 불평 불만할 것도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면서 감사할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철부지와 같은 내 모습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고 있다면 감사할 이유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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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만족도가 올라갈 때>
삶의 만족도가 올라갈 때는 언제일까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는, 그래서 스트레스가 없는 순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때만이 만족도가 올라갈까요?
저 역시 어렸을 때는 그럴 것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충족된다고 해서 만족도가 올라가는 것이 아님을 저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오히려 약간의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을 때, 또 비록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이라도 해도 그 안에서 집중하고 있을 때 삶의 만족도는 올라갔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필립 스톤 교수는 삶의 만족도를 올리기 위해 사회적 지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지를 위해 사회적 관계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합니다. 이를 위해 타인에게 친절해야 하며, 인간관계 강화를 자기 습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뢰의 삶이 중요합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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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보는 눈, 들을 수 있는 귀>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게 됩니다. 같이 보거나 들어도 자기 시선으로 보고 듣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을 낳게 마련입니다. 기왕이면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말을 꼭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들이 먼저 알아보고
듣게 된다(루카10,22)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온갖 추측과 추정, 상상을 다 합니다. 그러나 철부지는 잔머리를 굴리며 셈을 할 줄 모릅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만 따로 얘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3-24). 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과연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을까요? 혹 마음은 콩밭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만을 보고 예수님의 육성만 들었다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사실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확인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에는 분주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데는 인색합니다.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감실을 찾고 주님을 영접하는 미사참례는 소홀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 속에 있습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볼 것을 보지 않는데, 눈이 좋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귀가 밝으면 뭐합니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는데….
요즘 세상의 현실을 보십시오, ‘코로나19’로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는데 여전히 자기주장만 하고
자기가 최고라고 고집을 피우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이들이 제발 백성을 위한다는 소리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만이라도 하느님 앞에 철부지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성령의 도움을 청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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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꿈꾸는 대로 된다>
-하느님 꿈의 현실화; 이사야, 예수님-
꿈을, 길을, 시를 잃은 시대입니다. 꿈을, 길을, 시를 잃어버린 시대보다 불행한 시대는 없습니다. 꿈이, 길이, 시가 있을 때 그 인생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참으로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음은 꿈이, 길이, 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꿈, 무슨 길, 무슨 시입니까?
하느님이, 바로 하느님의 현존이자 화신인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의 꿈이요 길이요 시입니다. 꿈꾸는 대로 됩니다. 평생 하느님을 꿈꿨던, 하느님의 꿈이 되었던, 하느님의 꿈을 실현한 예언자 이사야요 예수님입니다. 예언자는 거의 대부분 시인이자 하느님을 꿈꿨던 신비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서도 당신의 꿈이 실현되기를 바라십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평생 하느님을, 예수님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어제 지인으로부터 사진을 전송받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충격의 여운이 지금도 생생하며 여기서 착안한 강론 주제 “꿈꾸는 대로 된다-하느님 꿈의 현실화; 이사야, 예수님-”입니다. 참 아름다운 ‘하느님 꿈의 사람’이 이사야,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병상에 누워계신 암투병중의 80대 중반의 노 주교님이셨습니다. 예전 젊으셨을 때는 정말 키크고 인물 좋았던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 되셨던 분인데, 그분의 미래가 이런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누구도 이런 미래를 꿈꾸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주변에서 보면 피하고 싶은 인생 노년의 분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이 또한 우리의 미래일 수 있습니다. 의지대로, 뜻대로, 마음대로 되는 미래 인생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느님의 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을 꿈꾸며 사는 것입니다. 이래서 은총의 대림시기 선물입니다. 이의 빛나는 모델이 예수님이요, 이사야를 비롯한 무수한 예언자들이요 성서와 교회의 무수한 성인성녀들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꿈을 실현한 아름다운 꿈의 사람들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꿈은 절정의 완성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파스카의 예수님은 우리의 하느님 꿈의 영원한 모델입니다. 20여녀전 참 많은 시를 썼고 제 시의 소재중 ‘꿈’도 꽤 많습니다. ‘꿈있어야 산다’라는 시를 나눕니다.
-“밖에서는 모른다/살았는지 죽었는지
잎들 다 진/겨울나무가 그렇다
그러나 보라!/살아있지 않은가
봄되니/피어나는 꽃들/짙어져 가는 신록들
아! 꿈있어야 산다/꿈있어 겨울 추위 견뎠다
꿈없으면 죽는다/꿈있어야 산다/꿈은 생명이다
가슴에 담았던 생명의 꿈/활짝 피어내니/꽃이요 신록이다/아름다운 생명이다”-2001.5.6.
그러고 보니 흡사 나뭇잎들 다 진 겨울나무들이 아름답게 빛나는 생명의 추억들 가득 담고 봄꿈을 꾸는 나무들 같습니다. 마침 눈덮인 뜨락을 보며 겨울에 써놨던 ‘봄꿈’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창문 밖/가난한 뜨락
보랏빛/은은했던/제비꽃 그 자리에
샛노란/민들레꽃/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눈/덮여있다
흰눈덮인 하얀 땅
보랏빛/샛노란빛/봄꿈을 꾸고 있겠지”-1998.1.22
이슬 방울 영롱한 빛을 발하는 아침 풀잎들을 보며 쓴 ‘별꿈’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풀잎들/밤새/별꿈 꾸며 뒤척이며 잠못이루더니
아침/풀잎마다 맺힌/영롱한 별무리/이슬 방울들”-2000.10.1
대림시기 전례가 참 고맙습니다. 추위중에도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꿈꾸면서 동화같은, 시같은 따뜻한 영적 분위기에서 지낼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잃었던 하느님 꿈을 회복하기에 절호의 기회가 기쁨과 설렘의 대림시기입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 촛불이 우리 영혼에 꿈의 불을 붙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말씀 배치는 얼마나 절묘한지요! 정말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꿈꿨던, 꿈의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11.1-10절까지 시보다 아름다운 시를 본적이 없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성령에 감도되어 하느님의 평화의 꿈을 노래한 이사야 예언자임이 분명합니다. 예전 신학교 교수님의 언급도 잊지 못합니다. 역사상 혁명가들에게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오늘 1독서 이사야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명연설도 분명 이사야 말씀의 영향이었을 것입니다.
“그날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바로 그날은 대림시기의 오늘이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실현되는 이사야의 꿈, 하느님의 꿈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그대로 하느님 평화의 소망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하느님 꿈의 내용들입니다. 우리의 죽었던 감성을, 꿈을 살리는 정말 성령충만한 시같습니다. 성령의 인도따라 살 때 하느님을 꿈꾸는 사람, 하느님 꿈의 사람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꿈을 실현하라 주어진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하느님의 꿈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그 바로 생생한 결정적 증거가 주님 성탄 대축일 밤미사 전 독서기도시 노래로 바치는 독서가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이사야의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었음을 경축하는 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바치는 예수님의 참 아름답고 깊은 감사기도는 그 분위기가 그대로 아버지와 일치의 탈혼상태에서 하느님을 꿈꾸며 바치는 기도같습니다. 세속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철부지 당신 제자들인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심을 감동과 감격의 마음으로 감사기도를 바치는 주님이시며, 아버지와의 일치를 새롭게 확인하시는 아드님 예수님이십니다.
다음 말씀은 당시의 제자들은 물론 은총의 대림시기 하느님을 꿈꾸며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행복 선언임을 깨닫습니다.
“너희가 보는 분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듯지 못하였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꿈꾸는, 하느님 꿈의 사람들로 변모시켜줍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미사은총입니다. 꿈을, 하느님의 꿈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잃으면 영혼은 시들어 죽습니다. 치매에 걸립니다. 하느님을 꿈꾸는 아름답고 건강한 영적 노년 인생을 위해 매일미사 은총 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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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아는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아버지께 말씀하십니다. 일흔두 제자가 파견에서 돌아온 직후의 일이지요. 각자 다양한 삶을 살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여든 일흔두 제자는 유대교의 정식 제도 안에 속하지 않은 이들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소위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아니었지요.
율법 전문가나 사제 계급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들, 평범하다 못해 단순하고 무지한 철부지들에게 어떻게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능했을까요? 그건 "앎"이 주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당신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선하신 뜻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누군가 주님을 알게 된다면, 그건 예수님께서 그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당신처럼 아버지도 알기를 예수님께서 간절히 원하신 덕이지요. 예수님의 지향 안에 그가 들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가 세상 눈에는 잘난 구석 하나 없어 보일지라도 주님 눈에는 특별하고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복음 환호송)
볼 수 있도록, 알 수 있도록, 깨달을 수 있도록 눈을 밝혀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지금은 희미하고 흐릿하더라도 그분께서 오시면 보다 더 선명히, 확실히 아버지를 뵙고 알게 될 것입니다. 그날, 주님과 우리 사이에 가리워진 그 신비의 장막이 걷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메시아 시대에 이루어질 평화가 눈에 보이듯 그려집니다.
"그날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이사 11,1)
오늘 독서 대목의 전반부는 메시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사이의 아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아는 주님의 영과 함께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펼칠 것입니다.
"늑대와 새끼 양, 표범과 새끼 염소,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어린아이, 암소와 곰, 사자와 소, 젖먹이와 독사, 젖 떨어진 아이와 살무사"
후반부에서는 메시아 시대를 아름답고 훈훈하게 묘사합니다. 약육강식의 생태계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커플들이 등장하네요. 자신이 살기 위해 타자를 해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그린 것이 아닐까요? 구약의 백성이 갈망하는 메시아 시대는 이처럼 평화와 공존, 조화와 상생, 화목과 존중, 상호적 보호와 돌봄이 피어나는 시대일 겁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우리가 고대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 11,9)
누구도 타자를 해치지 않는 상태는 "주님을 앎"에서 기인한다고 하십니다. 주님을 경외하고 알고 사랑하는 이는 타인을 혹독히 대하거나 그에게 악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아는 이는 악에 대해 무능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누군가 사람, 짐승, 자연 등 타자인 피조물을 착취하거나 공격하거나 소외시킨다면 그는 주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혹 종교의 이름으로 하더라도 그는 실상 자신의 절대자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겁니다. 주님을 아는 이는 절대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험한 세상살이에서 주님을 진정으로 아는 이는 철부지로 분류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약지도 못하고 잔꾀도 없고 타인을 밟고 올라서지도 못하는 이들, 어려운 이를 외면하거나 제 이익을 위해 타인을 후려치는 일은 꿈도 못 꾸는 이들이 곧 철부지들이니까요.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화답송)
시편 저자와 함께 이 기도를 바칩니다. 철부지라도 좋으니 이 세상이 그런 이들로 가득 넘쳐서, 주님께서 바라시는 정의와 평화가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철부지라도 좋으니 누구도 굶지 않고 소외되지 않고 낙오되지 않는 세상을 위해 작은 힘들이 모였으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3)
철부지인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권세가와 재력가들이 보지 못하는 주님의 신비를 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높이와 넓이과 숫자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다 버리신 주님과 마음을 나누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약삭빠른 손짓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주님의 평화를 추구하는 철부지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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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2티모 3,16-17)
♣성경에 쓰인 문자는 죽어 있지만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 머물러 살게 되면 우리 안에 성령의 감도로 써졌기에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참조) 우리 안에 살아 힘을 갖고 역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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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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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대림시기”을 시작하면서 <복음>는 예수님의 감사와 기쁨을 노래합니다. 이는 우리가 “대림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지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견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도를 드리십니다. 마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하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러니, 기도는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드리는 찬미와 감사기도입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대림시기”에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 뜻 안에서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그렇습니다. 오로지 아드님이신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아시며,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이들이 알게 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드러내주시기에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해서, 모두가 알게 되거나, 모두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라야 알아듣고, 또한 받아들이는 만큼만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뜻”의 이루어짐이 제자들에 대한 행복선언으로 드러납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계시를 받은 복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보고자 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그들에게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로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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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루카 10,21)
주님!
지혜롭다는 자에게서 감추시니, 믿음 안에 저를 가두소서!
철부지에게서 드러내시니, 신비 안에 저를 가두소서!
아버지의 뜻 안에 저를 가두시어, 신뢰하고 의탁하게 하게 하소서.
감사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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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루카10,21)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 예수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을 굳게 믿고 희망하며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은총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요, 대림절에 믿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분, 곧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시는 분', '우리를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신원(정체)은 '천주교인'인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천주교인의 모습,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천주교인인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따라가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육화/성탄),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산전수전'을 다 겪어내신 그런 분입니다. 온갖 모욕과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신 분, 마침내는 십자가의 죽음과 고통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우리 역시 산전수전을 겪을 수밖에 없고, 때로는 고통과 시련에 허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어내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도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고, 다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성령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코로나19와 같은 고통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메시아의 도래'를 전하고 있는 오늘 독서인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11,1-10)이 우리에게 그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이사11,10)
'이 또한 지나가리라!'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간직하셨던 믿음과 희망 안에서 모든 것을 이겨내고, 성령 안에서 즐거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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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JFx1-eGfE&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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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 21)
예수 성탄의
기쁨으로
초대하는
성탄 성월이다.
하나하나
소중한
12월의
시작이다.
선하신 뜻은
선하신
만남으로
이어진다.
선하신 뜻이
길을 만든다.
선하신 뜻이
우리의 교만을
허문다.
선하신 뜻이
빛이다.
끝내 어둠을
이긴다.
사랑으로
소중한 형제가
되게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다.
선하신 뜻안에
이루어지는
참된 사랑이다.
선하신 뜻이
있는 곳에
신비가 있고
구원이 있다.
선하신 뜻은
선하신 실행으로
드러난다.
선하신 뜻은
먼저 우리를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신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낸
사랑의
신비이다.
신비는
감추어져 있기에
신비롭다.
신비는
선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인정하는
거기에서
다시 뜨겁다.
다시 사랑하는
법을 가장
낮은 곳에서
가르쳐주시는
사랑의 선하신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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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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