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여성들의 건강한 마음과 믿음생활
문은희_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 소장, 심리학박사
어느 교회든지 여성들의 수가 많다. 셋 가운데 두 명이 여성들이다. 그러나 신앙의 틀을 잡는 신학자나 교회의 결정권을 가진 이들 가운데 여성의 수는 터무니없이 적다. 예수님이 사신 때 (여성을 총인원에 넣지 않았어도) 성서에 기록된 몇 안 되는 여성들을 눈여겨보면 여성들이 만만치 않게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난 여성들은 그와 당당하게 대화했다(요 4: 4∼28). 예수님께 칭찬을 듣기도 하고(눅 21: 1∼4; 마 26: 6∼13), 예수님 마음을 바꾸시게도 했던(막 7: 24∼30) 것이다. 예수사람(제자) 되는 데는 남녀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오늘의 여성들이 오히려 (남자)목사님들과 (남자)신학자들의 말을 잘 들으며, 아버지와 남편을 따르다가 후에는 아들을 따르고 있다(삼종지도가 유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개혁신앙이란 하나님 앞에 철저히 홀로 서는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남자들의 그늘에 숨어 몇 발자국 뒤떨어져 걷듯 따라가는 믿음생활을 왜 해야 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거듭남 없이, 물려받듯 부모의 신앙을 아무 생각 없이 따르기도 하고, 결혼해서 남편 따라 천주교로, 불교로 개종하기도 한다. 우리와 달리 서구 개신교 문화권 여성들 가운데에는 남편과 다른 교파의 신앙을 지키면서도 부부가 서로의 신앙을 존중하며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심하게는 목사 부인과 목사 딸이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을 보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달리 신앙생활을 하고 있나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믿음은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정수를 점하고 있어야 한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을 일관성 있게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일’과 ‘내 교회 울타리’에 한정된 교회생활이 아니라 매순간 어디서나 마음속에 하나님나라가 이미 있는 체험의 삶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자기의 독자성을 갖추고 책임있는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한다. 2007년 한 해 동안 <새가정>에서 우리네 여성들의 신앙을 향한 건강한 마음가짐을 궁금해하며 함께 고민하기로 하자.
<남다른 우리 마음의 틀> 나는 여성들의 아픈 마음을 들어주는 일을 천직이라 여기고, 섬기고 있다. 젊은 시절, 보이지 않는 느낌과 생각이 들어있는 행동을 연구하는 서구 심리학을 공부하며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고 여겼다. 우리나라에 돌아와 상담하며, 우리네 여성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그 이론의 틀로 해석해보려 했다. 그런데 그럴듯해 보이던 이론이 현실에서 제대로 우리를 아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보기를 들어 “아이들을 독립적으로 길러라” 하면서도 내 아이들을 두고 해보려면 간섭하게 되고 실천할 수 없었다. 뒤늦게 다시 서구사회에 가서 공부하면서 서구 여성들과 우리를 깊이 비교해볼 기회를 가졌다. 그 연구결과, 우리를 보는 눈이 조금 밝아졌다. 우리는 서구인들과 다른 행동의 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우리와 그들은 다 같은 사람들이다. 마음을 담고 있는 머리를 하나씩만 가지고 있고, 그 속에 있는 뇌의 구조와 뇌세포 수에도 차이가 없다. 다른 것이 있다면 뇌에 담긴 내용이 다를 뿐이다. 서구인들과 우리는 다른 삶의 체험, 다른 사회문화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틀은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다. 상담을 하면서 여성들이 바뀌고 자라고, 성숙해지고 건강해지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마음의 건강은 아주 희망적이다.
우리가 서구인들과 어떻게 다른가? 서구인들은 행동의 단위가 개인이다. 우리도 겉보기에는 혼자 행동하는 것 같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머리 속의 구조가 다른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함께 ‘지니고’ 살고, 움직인다. 나는 이런 현상을 ‘포함’의 단위로 설명한다. (괴물이 연상되겠지만) 머리는 하나인데 그 안에 많은 머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다. 서구인들은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이들도 자기와 분리해서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따로 떼어두고 생각하지 못한다. 한창 정신없이 사랑에 빠져있을 신혼여행지에서도 친정어머니, 시어머니에게 전화하는 것은 우리만의 풍습이다(어느 쪽부터 전화했나 암투가 있다). 아이가 고3이면 엄마도 고3병에 걸린다는 것을 서구 엄마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아이가 공부를 못해도 엄마의 책임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내가 뒷바라지를 못해서…”라며 엄마가 노래방 도우미를 해서라도 학원비를 대려 한다는 것은 그냥 단순한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어느 누구도 똑같은 사람이 없다고 서구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믿는다. 서구 심리학의 바탕도 개인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서로 내면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러기 위해 의사소통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속에 포함한 사람이 자기 식으로 이해된다고 우기듯 생각한다. 초록으로 덮인 아일랜드 상공을 날면서 조니 캐쉬(Johnny Cash, 1932-2003, 미국의 가수)가 ‘마흔두 가지 결의 초록’을 노래했는데, 우리는 아주 간단히 ‘초록은 동색’이라 한다. 내 아이의 다른 점을 알고 이해하고 격려하려 하지 않고, 한 줄로 서서 ‘튀지 않게’ 다른 아이들과 같아질 것을 요구한다.
<개인 단위, 포함 단위> 서구인들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할 때 그 스트레스가 개인의 문제로 생기지만, 우리의 경우는 남편, 시댁 식구, 아이들의 문제가 온통 자기를 짓눌러서 생긴다. 자신이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분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인으로 분명하게 체험하지 못하는 믿음생활도 포함의 단위로 설명할 수 있다. 포함한 사람들로 해서 생기는 문제들도, 분화되지 않은 채 엉켜있어 해결하는 것도 간단하지 않다. 그러니 이유가 분명치 않은 속병이 여성들에게 많을 수밖에 없다. 여성자신만 고통을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엄마들이 자녀를 자기에게 포함하고 아이들을 가만두지 않는다는 데서 문제가 심각해지고, 또 문제를 대물림하게 된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엄마가 생각하는 대로 아이를 흔들어댄다. 자기마음속에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엄마가 너를 제일 잘 알아”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식으로 허깨비 알듯 알고 있을 뿐이다. 아이는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좋다는데, 엄마는 “펜대 돌리며 사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힘없고 조그만 아이가 엄마의 말을 거역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아이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엄마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이에게, 의도하지 않았지만 굉장한 폭력을 쓴 것이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 자기가 느끼는 이유 모를 불행의 뿌리에 엄마가 휘두른 ‘사랑의 폭행’이 있었음을 상담과정에서 비로소 알아차리게 된다.
아이뿐 아니다. 남편에게 내조한다면서, 남편에게 맞추어 살아서 억울하다 하면서, 실은 자기마음에서 남편이 원하는 것이라고 짐작한 대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 상담과정에서 드러난다. 자기는 희생적으로 잘해왔는데 남편에게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를 듣고 보면 돈 벌어 오느라 애쓴 남편을 쉬게 하려고, 아이들을 자기가 독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을 위해 선의로 했다는 것이 남편을 외톨이로 만들어, 집에 들어오고 싶지 않게 하고 바깥으로 나돌게 만든 것이다.
아이나 남편 등 포함한 사람의 몫을 남겨두지 않고 가까운 이들을 침범하는 문제뿐 아니라 그들 뒤에 가려진 자기의 몫을 찾지 못하고 사는 여성의 문제도 심각하다. 앞으로 이런 여성들의 마음을 함께 좇아가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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