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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권 영조조 6
16년(경신, 1740)
○ 1월. 팔도와 양도(兩都)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 2월. 대왕대비에게 존호 '광선(光宣)'을 가상(加上)하였는데, 국모로 임한 지 39년이 됨에 종신(宗臣)과 정신(廷臣)이 청한 것이었다. 상이 인정전에 나아가 백관을 거느리고 책보(冊寶)를 올리고, 진하(陳賀)와 반교(頒敎)를 거행하였다. 대신과 삼사 및 의금부와 형조의 당상을 희정당(熙政堂)으로 불러 죄수를 너그러이 처결하였는데, 석방된 자가 수백 명이었다.
○ 4월. 《전록통고(典錄通考)》를 속성(續成)하도록 명하였는데, 우의정 유척기(兪拓基)의 말을 따른 것이다. 상이 유시하기를,
"창업(創業)과 중흥(中興)을 이룩한 임금은 관대함을 숭상하기 때문에 나라의 복조(福祚)가 면면히 이어질 수 있으나, 유체(遺體)를 이어받아 지켜내는 임금들은 애써 각박하게 하기 때문에 자손이 곧 망하는 것이다. 이 책을 편집하는 자는 이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 5월. 경자(?刺)의 기구를 태워버리도록 명하였다. 상이 각도의 계장(啓狀)을 열람하다가 '자자(刺字)'라는 말이 나오자, 지금까지 경열(?涅)의 형벌이 남아 있는 줄 의심하게 되었다. 이에 우의정 유척기에게 물으니, 유척기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대명률(大明律)》을 따라 쓰는데, 《대명률》에, '절도(竊盜)한 자는 자자(刺字)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에 오늘날 죄를 평의(評議)하는 자들이 그 문구를 인용합니다만, 일찍이 실제로 그 법을 쓴 적은 없었습니다."
하자, 경연 신하가 아뢰기를,
"우리나라 경자의 법은 그 팔뚝에 자자하는 것이지 그 얼굴에 자자하는 것이 아니어서 일찍이 그 형벌을 쓴 적이 없었는데, 형벌 기구는 아직까지 형조에 남아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체 발부는 똑같이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훼상(毁傷)할 경우 얼굴이나 팔뚝이 한가지이다. 한번 훼상한 뒤에는 혹 스스로 새로워지려고 한다 해도 어찌 보통 백성과 같이 될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승지를 보내어 형조에 가서 그 기구를 가져다가 다 태워버리도록 하였다. 또 각도에 있는 것은 도신으로 하여금 거두어 태워버리도록 하고, 명령을 어기고 다시 사용하는 자는 중한 법률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법률을 견주어 인용함에 있어 비록 실제가 없이 이름만 따오는 것이라 해도 이후에 혹 그 이름대로 실제 형벌을 시행할 자가 없으리라 어찌 보장할 수 있겠는가. 이 이름도 없애고 칭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비로소 향축(香祝)을 친전(親傳)하였다. 모든 제사의 향축을 전함에 있어서는 비록 재계(齋戒) 때를 당한다 하더라도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기신(忌辰)의 향축을 전할 때는 무양흑원령포(無揚黑圓領袍)를 입도록 명하였다. 또 향을 전하는 차례는 먼저 태묘(太廟), 그 다음 영녕전(永寧殿), 그 다음 각전(各殿), 그 다음 능침(陵寢)과 묘묘(墓廟)로 하도록 하였다. 향축을 배행(陪行)하는 자는 비록 동가(動駕)를 위해 결진(結陣)하고 있는 때라 하더라도 본영으로 하여금 진(陣)을 열어주도록 하여 정로(正路)를 경유하여 가며, 태묘 문 안에는 향
○ 6월. 올해의 전세(田稅)를 줄여주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상이 백성의 일을 염려하여 대동(大同)의 반을 줄여주고자 하였는데,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대동을 줄여주는 것은 전세를 줄여주는 것만 못합니다."
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아, 내가 덕이 부족하여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여 백성들이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다. 생각건대, 저 민간의 백성들은 넓은 궁전의 청량함이나 따끈한 방의 온기를 모르고 있다. 대동을 반으로 줄여주는 것은 한 문제(漢文帝)에 비교하였을 때 오히려 부족한 감이 있다. 백성을 고르게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큰 정사를 어찌 가벼이 할 수 있겠는가. 올해의 전세를 모두 줄여주어 나의 백성들로 하여금 실제 혜택을 고르게 입을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지금 전세를 줄여주도록 명한 것은 곧 위기를 전환하여 잘 다스려지는 기회로 삼으려는 것이니, 군신 상하가 보잘것없는 옷, 하찮은 음식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마음먹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일을 해 나가게 되면 처음 말들을 할 때와 같이 해 나가지 못하니, 우리나라의 습속이 그러하다. 비용을 낭비하는 데 관계된 모든 일들을 일체 줄이고, 모든 영선(營繕)도 특별히 중지시키도록 하라. 내년 삼명일(三名日)에 진상할 갑주(甲?)도 봉진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구준(丘濬)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하였다. '옥사(獄事)를 판결하는 것은 오직 어진 사람이라야 할 수 있다.'는 글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예전에 송 태종(宋太宗)이 비로소 유사(儒士)를 등용하여 사리 판관(司理判官)으로 삼았다. 경술(經術)을 가진 선비를 써서 그들로 하여금 옥사를 심의하게 하였기 때문에 공평하고 합당한 효과가 나타날 수 있었으니, 이 도를 쓴다면 지금도 옛날과 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이어 형조 낭관을 특별히 고르도록 명하였다. 법률을 평의함에 있어 율관(律官)에게만 전적으로 맡기지 말고 장관을 맡은 자도 그 능력을 살펴 전최(殿最)하여 부지런히 힘쓰도록 신칙하게 하였다.
○ 효종대왕에게 '명의정덕(明義正德)'이라는 시호를 가상하였다. 상이 태묘에 친제(親祭)하고, 책보(冊寶)를 올렸다. 어전(御殿)으로 돌아와 백관의 하례를 받고 사면령을 내렸다.
○ 윤6월. 종신(宗臣)들이 상의 공덕(功德)을 내세워 존호를 올리도록 상소하여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경재(卿宰)들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에 모여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잠저(潛邸)에 계실 때부터 타고난 효성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우애가 매우 순수하고 돈독하였는데, 왕세자에 올라 지존(至尊)으로 등극함에 이르러 여러 차례 어려운 때를 만나 지극한 행실이 더욱 드러났습니다. 근래에 와서 종묘의 빠뜨린 전례(典禮)를 다 거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선조의 공렬이 더욱 드러나고 성상의 효성이 더욱 빛나게 되었습니다. 자애로운 은택을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도록 하고 크게 공평한 마음으로 아랫사람들을 한결같이 보며, 무신년(戊申年)의 난리를 평온하게 안정시킨 공렬은 실로 지난 역사에 거의 없던 일입니다. 신들이 몇 글자의 표(表)로써 들어올려 천백대 이후에까지 밝게 내보이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굳이 사양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백관과 종신들이 10여 일 동안 정청(庭請)하여 호소하니, 자전이 이 소식을 듣고 상에게 애써 받도록 권면하였다. 상이 먼저 대비의 존호를 올리고자 하여 신하들에게 물으니, 원경하(元景夏)가 대답하기를,
"송 인종(宋仁宗) 천성(天聖) 2년에는 존호를 받고 나서 이어 태후(太后)의 호를 올렸으니, 이것이 전례가 될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마침내 자전에게 들어가 아뢰면서 그대로 청하였다. 이어 예관에게 명하여 의절을 강구하여 정하도록 하였는데, 자전의 책보 이외에 옥책(玉冊)을 동(銅)으로 꾸미고 비단 보자기를 명주로 대신하고 금(金)으로 표면을 입히거나 그림을 그려넣는 일들을 일체 없애 후세에 법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게 하였다. 방물
"옛날에는 금니(金泥)촹옥검(玉檢) 등의 말이 있었으니, 옥책을 동으로 꾸며서는 안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금니와 옥검은 바로 봉선(封禪)을 할 때의 일로, 삼대(三代)의 예가 아니니, 나는 따르지 않겠다."
하였다.
○ 7월. 대왕대비전에 존호 '현익(顯翼)', 상에게 존호 '지행순덕 영모의열(至行純德英謨毅烈)', 중궁전에 존호 '혜경(惠敬)'을 올렸다. 상이 명정전(明政殿)에서 백관의 하례를 받고 사면령을 내렸다. 다음날, 승지는 도성 백성들의 고질적인 폐단을 물어오고 각도 도신은 백성들의 폐단을 찾아 묻도록 명하였다.
○ 통영(統營) 및 각도의 수영(水營)에 명하여 해골선(海?船)을 만들도록 하였다. 당초 우리나라의 전선(戰船)은 모두 3층의 판옥(板屋)과 4면의 순창(楯窓)을 설치하여 몸체가 커 둔하기 때문에 바람을 만나면 파선하기 쉬웠다. 이때 이르러 전라 좌수사 전운상(田雲祥)이 《무경(武經)》의 절요서(節要書)를 상고하여 해골선을 처음 만들었다. 그 제도는 앞이 크고 뒤가 작아 송골매의 모양과 같고, 뱃전의 좌우에 부판(浮板)을 설치하여 송골매의 양쪽 날개 모양을 나타냈다. 이에 바람을 두려워할 것이 없는데다 또 매우 가볍고 빨랐다. 안에서는 밖을 엿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어 노군(櫓軍)과 사수(射手)가 모두 몸을 숨기고서 노를 젓고 총포를 쏠 수 있었다. 이에 연유를 갖추어 계문(啓聞)하니, 상이 따르고 마침내 각 수영에서도 따라 행하도록 명한 것이다.
○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인쇄하여 올리도록 하였는데, 세종조에 명을 받고 편찬한 책이기 때문이었다.
○ 고(故) 충신 조헌(趙憲)촹송상현(宋象賢)촹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을 녹용하고, 동래(東萊)의 전투에서 싸우다 죽은 장사(將士)들의 무덤을 수리하고 비를 세워 정표(旌表)하였다.
○ 관서(關西)에 사는 김영준(金英俊)의 마을에 정표(旌表)하도록 하였다. 김영준은 곽산(郭山)사람으로 4대가 함께 살고 있었다. 경연 신하가 그 상황을 아뢰었는데, 이때 김영준의 아들 김익필(金益弼)이 수문장으로 서울에 있었다. 상이 불러서, 어떻게 함께 사는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의 할아비는 자손들로 하여금 똑같이 입고 먹도록 하기 때문에 다툴 것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지금 사대부들은 문호(門戶)를 나누고 갈라 서로 싸우고 있으니, 유독 속으로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어 도신에게 명하여 '사세가 동거함에 돈목함을 포장하노라[四世同居 褒?敦睦]' 여덟 글자를 특별히 써서 그 마을에 정표하도록 하고, 김영준을 첨지중추부사에 제수하고, 김익필에게 활을 내려주었다.
○ 상이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의 5세손 조혁(趙?)을 불러 보았다. 이어 선정의 사적을 물으니, 조혁이 매우 자세하게 대답하였다. 선정의 문집(文集)이 남아 있는지 다시 물으니, 대답하기를,
"있습니다만, 힘이 부족하여 아직 간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자, 교서관에서 인쇄하여 반포하도록 명하였다.
○ 8월. 비로소 석채(釋菜)를 친행하였다. 이전에 열조(列朝)에서 알성(謁聖)촹작헌(酌獻)촹시학(視學)의 예는 친행하였지만, 석채를 친행한 것은 성종 6년과 현종 2년 때뿐이었다. 이때 이르러 상이 석채를 친행하였는데, 직접 소지(小識)를 짓고 '보편적이고 편당하지 않는다는 말이 책에 적혀 있지 않은가[周而不比 豈不載書]' 여덟 글자를 친히 써서 아울러 향관청(享官廳) 벽에 걸도록 하였다. 또 어제시(御製詩) 1수(首)를 제생(諸生)에게 내보였다. 석채례가 끝나자, 명륜당에 나아가 과거를 설행하여 선비를 취하였다. 대사성에게 명하여 한 달에 3번씩 태학에 와서 제생들에게 권과(勸課)하도록 하였다. 또 《주례(周禮)》의 주(州)에서 태학으로 올라오도록 하는 법을 본떠 식년(式年)마다 각도로 하여금 각각 오경(五經)에 능통한 한 사람을 추천하여 태학에 들어오게 하도록 하였다.
○ 상이 제릉(齊陵)과 후릉(厚陵) 두 능을 전알(展謁)하러 가는 길에 파주(坡州)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길에서 선정신 성혼(成渾)의 묘를 보고는 교자(轎子)에서 경의를 표하였다. 또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는데, '지
"조금 전에 우계(牛溪)의 - 성혼의 별호(別號)임 - 묘를 보았는데, 지금 선정의 옛 정자를 보니 덕스러운 모습을 접하는 듯하다."
하였다.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는데, '지금 나의 고심은 바로 선정의 마음이다. 저 강가의 정자를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슬픈 마음이 깊어지노라[今予苦志 卽先正心 瞻彼江? 不覺愴深]' 네 구절을 제문에 첨가하도록 명하였다.
송도(松都)에 이르러 곧장 추궁(楸宮)으로 - 태조의 옛 궁임 - 가서 숙묘(肅廟)의 어제시(御製詩)가 새겨진 비(碑)를 어루만지며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화운(和韻)하였다. 만월대(滿月臺)에 나아가자, 관리사(管理使)가 군례(軍禮)로 뵈었다. 상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성곽이 빙 둘러싸고 궁전의 자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유지(遺址)가 완연하다. 그런데 필경 꼴베고 나무하는 장소가 되어 버렸으니, 고려 태조가 창업할 때 어찌 오늘과 같이 될 줄 알았겠는가. 자손된 자들이 조종(祖宗)의 어렵게 이룬 서업(緖業)을 생각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여 그 서업을 실추시키는 데 이르렀으니, 군신 상하가 서로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면 또한 고려와 같이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 9월. 상이 송도에서 어가를 출발하여 장차 두 능으로 가려 할 때, 예방승지에게 명하여 대제학 오원(吳瑗)과 함께 만월대에서 시사(試士)하여 시권(試券)을 거두어놓고 어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도록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부조현(不朝峴)을 지나게 되자, 시신(侍臣)을 돌아다보고 그렇게 이름을 붙이게 된 뜻을 물었다. 이에 대답하기를,
"태종이 본도(本都)에 과거를 설행하였는데, 고려의 대족(大族) 50여 가가 과거에 응시하려 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이름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말세에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땅을 쓸어버린 듯 사라졌도다. 지금 부조현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비록 백세가 지난 시점인데도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듯이 두렵게 한다."
하였다. 마침내 '부조현' 세 글자를 친히 써서는 이를 새겨 그 빈터에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어 두 능으로 가서 의례대로 전배(展拜)하고, 돌아오는 길에 송도에 이르러 남문루(南門樓)에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이곳은 다섯 성조(聖祖)께서 머물렀던 곳이다."
하고, 부로들을 불러 위로하여 유시하였다. 또 고질적인 폐단을 물어, 묵은 환곡 및 오래된 공채(公債), 대소미(大小米) 7천여 석과 목면 5천 필을 면제해 주도록 명하였다. 이어 만월대로 나아가 문무과의 방방(放榜)을 가져다가 왕씨의 후손인 왕제도(王濟道)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승지를 보내어 고려 태조의 능에 치제하였다. 성균관에 들러 선성(先聖)을 알현하고 이어 학사(學舍)를 두루 살펴보았다. 탄식하기를,
"훌륭하도다, 이 터여. 고려가 불교를 좋아하고 유교를 좋아하지 않아 끝내 망하는 데 이르렀으니, 애석하도다."
하였다. 다시 명륜당으로 나아가 제생을 불러 보고 '존성도(尊聖道)' 세 글자를 써서 내리면서 벽에 걸도록 명하였다. 또 사서(四書) 삼경(三經) 각각 한 부씩을 내려 존경각(尊經閣)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선조(先朝) 계유년에 옛 도읍지로 행행하여 시학(視學)하고자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단지 양조(兩朝)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면포(綿布)만 내려주었다. 이번에도 면포 1백 필을 내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목청전(穆淸殿)으로 가서 봉심하였는데, 이는 태조의 잠저(潛邸)이다. 선죽교(善竹橋)에 들러 군
"초 장왕(楚莊王)은 오랑캐의 군주였는데도 오히려 아랫사람의 허물을 관대히 넘겨준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 그냥 두고 묻지 말라."
하였다.
○ 11월. 수차(水車)를 만들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효묘(孝廟)가 심양(瀋陽)의 관소(館所)에 있을 때 수차로 물을 끌어 논밭에 대주는 것을 보았는데, 힘은 적게 들이고 많은 효과를 내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 양식(樣式)을 가지고 와서 호조로 하여금 그 양식대로 만들도록 하여 장차 그 양식을 각도로 반포하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고, 그 유제(遺制)만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비국의 상신(相臣) 유척기(兪拓基)와 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로써 아뢰니, 상이 다시 만들어 반포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의논하는 자들이, 이는 시골 백성들이 만들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끝내 반포되지 못하였다.
○ 포백척(布帛尺)을 서울과 지방에 반포하였다. 이에 앞서 우의정 유척기가 아뢰기를,
"세종조에 만든 황종척(黃鐘尺)촹영조척(營造尺)촹예기척(禮器尺)촹주척(周尺)촹포백척(布帛尺)이 모두 전해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듣건대, 삼척부(三陟府)에 아직까지 세종조에 만든 포백척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에 어떤 사람이 양식대로 나무로 만들어 온 것을 보니, 그 뒷면에, '정통(正統) 11년(세종 28, 1446) 12월에 포백척을 상정(詳定)하여 새로 만드노라' 하였습니다. 지금 이 척(尺)을 직접 가져오고 《경국대전》도량형조(度量衡條)에 실려 있는 바에 의거하여 솜씨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각 척을 나누어 만들도록 하여 서울과 지방에 반포한다면 또한 도량형을 한 가지 기준으로 통일하는 뜻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세종조에 제작한 바가 참으로 훌륭하다. 그 척이 지금의 척과 비교하였을 때 어떠한가?"
하니, 유척기가 아뢰기를,
"지금 쓰고 있는 포백척과 비교하였을 때, 긴 것은 1치를 줄이고 짧은 것은 5푼을 줄여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호조에 명하여 이를 가져다 비교하여 각 척을 만들어 반포해 쓰고 부건(副件)을 호조에 보관해 두도록 하였다.
○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은 회양(淮陽)에 은광(銀?)을 설치하도록 청하고, 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은 영월(寧越)에 동광(銅?)을 설치하도록 청하고,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은 수안(遂安)에 동광을 설치하도록 청하였다. 상이 모두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이런 물건들은 배가 고플 때 먹을 수 없고 추울 때 입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후세의 임금들이 이를 인하여 사치스런 마음을 열게 된다면 어찌 큰 폐단이 되지 않겠는가. 게다가 회양은 곧 나라의 산맥이니 더욱이 뚫어 파서는 안 된다."
하였다.
17년(신유, 1741)
○ 1월.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 관동(關東)에 기근이 들었다. 어사 홍상한(洪象漢)을 보내어 진휼을 감독하도록 하고,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의 군포를 면제해 주고, 우심(尤甚)한 고을은 아울러 대동 신포를 면제해 주었다. 이때 관북(關北)에도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동북도(東北道)의 방물(方物)촹물선(物膳)촹삭선(朔膳)을 가을 추수 때까지 모두 면제해 주었다.
○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하교하기를,
"덕이 부족한 소자가 삼가 어렵고도 큰 자리를 이어받아,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덕이 나라를 다스리기에 부족하고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명령이 조정 신하들에게 시행되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하나만 해당되어도 두려울 것인데, 더구나 겸하여 해당하는 경우인데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옛말에, '그 형체를 보지 못하면 그 그림자를 살펴보라.' 하였다. 예전 병자년(숙종 22년, 1696)에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변고를 그림으로 그려 궁중에 놓아두도록 하였으니, 선왕께서 경계를 드리운 바가 깊고도 절실하다."
하고, 마침내 10일 동안 감선(減膳)하도록 명하였다.
○ 2월. 양양(襄陽)의 문관 최규태(崔逵泰)가 청옥규(靑玉圭)를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임진란 때 강릉(江陵)에 유진(留陣)했던 곳에서 이 규를 얻었습니다." 하였는데, 조현명이 이 말을 아뢰었다. 상이 이를 가져다 보고 경연 신하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서전(書傳)》과 《주례(周禮)》에서는, 환규(桓圭)는 길이가 9치이고 신규(信圭)와 궁규(躬圭)는 길이가 7치이고 너비는 모두 3치이고 두께는 모두 반 치이고 윗부분의 좌우로 깎아낸 것이 모두 반 치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고금의 예기(禮器)를 가지고 그 규를 재어 보니, 길이는 과연 7치인데 너비가 채 2치가 안 되고 두께와 깎아낸 부분도 다 다릅니다."
하였다. 상이 상의원에 명하여 옛 제도에 의거하여 청옥으로 제후 및 세자의 규를 만들되, 주척(周尺)으로 길이 9치, 너비 3치, 두께 5푼이 되게 하도록 하였다. 이는 대개 명 나라 성제(成帝)가 하사한 제도를 본뜬 것이었다.
○ 3월. 김진상(金鎭商)을 발탁하여 대사헌으로 삼았다. 김진상은 시골로 내려가 살면서 모든 관직을 의리를 이끌어대어 사양하고 한마디도 시사(時事)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상이 그의 욕심없이 깨끗하고 편당을 짓지 않는 점을 칭찬하여 이르기를,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이에 이렇게 명하게 된 것이다.
○ 개성부에 불이 났다. 경신년의 규례대로 본부의 창고에 유치해 두었던 곡식을 나누어주어 구휼하도록 하였다.
○ 부절(符節)을 찬 장신(將臣)은 성 밖에서 지내지 못하도록 명하고, 이를 정식으로 삼도록 하였다.
○ 유생(儒生)이라 이름하는 자에게는 도적 다스리는 형벌을 시행하지 말도록 명하고, 이를 정령으로 삼도록 하였다. 처음에 전 참판 이춘제(李春?)가 아들의 관례(冠禮)를 치르면서 서제(庶弟) 이하제(李夏?)로 하여금 성찬(盛饌)의 마련을 담당하도록 하고, 공경(公卿)과 위포(韋布)들을 두루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잔치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중독(中毒)되어 돌아가 죽었고, 죽지 않은 경우도 병이 들었다. 이에 많은 원통한 사람들이 신문고를 두드리고, 이하제의 죄를 다스려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한 번 원통함을 씻게 해 달라고 하였는데, 상이 불쌍히 여겨 허락하였다. 이에 많은 원통한 사람들이, 형조 관원의 보통 형문(刑問)으로는 자복을 받아내기에 부족하니 포도청으로 보내라고 청하였다. 그에게 치도형을 뒤섞어 시행함에 이하제가 마침내 포도청에서 죽게 되었다. 이때 이르러 상이 관학생(館學生)에게 친시(親試)를 보이게 되었는데, 하교하기를,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을 보여서는 안 된다. 이하제는 일찍이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 뜰에 들어왔던 자인데 그를 포도청으로 보내어 도적 다스리는 법률을 시행하였으니, 이는 포도청이 유생을 다스린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서 비롯되었으니 뒤를 잇는 임금들이 어찌 본받지 않겠는가. 지금부터는 유생이라 이름하는 자에게는 도적 다스리는 법률을 시행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어 이를 정식으로 삼도록 한 것이다.
○ 친림(親臨)하여 서계(誓戒)할 때는 이조 판서가 서계문을 읽고 형조 판서가 이에 임석(臨席)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상이 이미 친림 서계의 의례를 정하여 유사가 의절을 지어 올렸는데, 승지로 하여금 서계문을 읽게 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이르러 홍문관이 상차하여 아뢰기를,
"《주례》 천관(天官)에는, '태재(大宰)의 직책은 백관의 서계를 관장하는 것으로 기일이 되기 10일 전에 집사를 거느리고 날을 잡아 마침내 서계한다.' 하였고, 추관(秋官)에는, '대사구(大司寇)는 서계하는 날 임석하여 백관을 서계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승지가 서계문을 읽고 형조 판서가 서계하는 데 임석하지 않는 것은 옛 예에 어긋납니다."
하니, 상이 옛 예를 따르고 이를 정식으로 삼도록 명한 것이다.
○ 경기촹황해촹강원 세 도의 기민(飢民)으로서 서울로 흘러 들어온 자가 1400여 명이었다. 상이 이를 듣고, 안집(安集)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세 도의 도신에게 문책성 유시를 하였다. 이어 진휼청에 명하여 죽을 쑤어 진휼하도록 하였다.
○ 4월. 관학생은 예전대로 홍단령(紅團領)을 입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거재(居齋)하거나 전시(殿試)에 응시하는 유생은 모두 홍단령을 입었는데, 유생들이 이를 불편하게 여겨 《시경(詩經)》의, '푸르고 푸른 그대 옷깃이여[靑靑子衿]'라는 문구를 인용하여 청색옷을 입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대사성이 이 일을 아뢰자, 상이 대신과 유신들에게 물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아뢰기를,
"《경국대전》의, '제학(諸學) 생도(生徒)는 단령(團領)을 입는다.'는 문구 아래의 주석에, 청금(靑衿)을 입는다고 하였고, 《시경》의 주석 및 자서(字書)에는, '영(領)은 금(衿)이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혹 홍색옷에 청색깃을 다는 것인 듯합니다. 게다가 고 판서 이수광(李?光)이 지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우리나라 유생은 사사로이 출입할 때에도 홍직령(紅直領)을 입었는데 명묘(明廟) 말년에 잇따라 국휼(國恤)을 만나 흰옷을 입는 것이 익숙해져서 이내 습속이 된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홍색옷이 조종조의 옛 제도임에 틀림없습니다. 조정 선비들의 옷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중한 곳에서는 흑색옷을 입고 중하지 않은 곳에서는 홍색옷을 입습니다. 유생이 성묘(聖廟)에 들어갈 때는 청색옷을 입고 식당(食堂)에 들어가거나 재회(齋會) 때는 홍색옷을 입는 것은 뜻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 말대로 하도록 명한 것이다.
○ 전랑(銓郞)의 통청법(通淸法) 및 한림(翰林)의 회천법(回薦法)을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전랑의 통청과 한림의 회천으로 다툼의 단서를 서로 일으켰다. 상이, 조정의 붕당은 모두 청선(淸選)을 다투는 데서 일어난다고 여겨 경장(更張)하려는 뜻을 가졌는데, 송인명(宋寅明)촹조현명(趙顯命)촹원경하(元景夏) 등이 힘껏 찬동하였다. 이에 상이 마침내 용단을 내려, 전랑은 통청의 권한을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고, 한림은 회천을 없애고 회권(會圈)을 하되 송 나라 조정의 관직(館職) 규례에 의거하여 소시(召試)를 보인 뒤에 부직(付職)하도록 하였다.
○ 5월. 상이 경연 신하에게 이르기를,
"북도(北道)의 오국성(五國城)에 황제총(皇帝塚)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과연 고실(故實)에 밝은 노인들이 서로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 고려(高麗)에 길을 빌리려 하였다면 오국성이 북도에 있었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 이미 황제의 무덤이라 하니 도신으로 하여금 꼴베고 나무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 《오례의》에 나오는 궁(宮)촹전(殿)촹문(門)촹교(橋)의 이름이 현재 쓰는 것과 달라 예를 행하는 데 불편하였다. 이에 전 대제학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바로잡도록 하고, 책이 완성되면 영남 감영으로 보내 간행하도록 하였다.
○ 7월. 영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하니, 상이 예조 판서 및 승지에게 명하여 향실(香室)로 가서 바로잡도록 하였다.
○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궤장(?杖)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박필성은 효묘조(孝廟朝)의 부마(駙馬)인데, 이때 이르러 90세가 되었다. 궤장을 내리는 날 선온(宣?)하도록 명하고 어제시(御製詩)를 내려 영광스럽게 해주었다. 이어 봉조하(奉朝賀)의 예에 의거하여 크고 작은 조회(朝會)에 궤장을 가지고 다니도록 명하였다.
○ 태학생을 광달문(廣達門) 밖에서 불러 찬(饌)과 술을 내려 먹였는데, 숙묘(肅廟)의 고사를 따른 것이었다. 선유문(宣諭文)에 이르기를,
"저 태학을 바라보니 선성(先聖)이 문묘에 있음에 십철(十哲)이 위의 있게 나열해 있고 육현(六賢)이 충만해 있도다. 예전의 현관(賢關)에는 푸른 옷깃이 가득 성대하였는데, 오늘날의 태학은 근본을 버리고 말단만을 힘쓰고 있다. 방책(方冊)이 앞에 있는데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태만한 마음뿐이니, 안자(顔子)와 증자(曾子)가 앞뒤에 있은들 어디에 훈계가 있겠는가. 너희들은 이 유시를 고요히 듣고 성인을 높이고 근본에 힘써 모두 바른 데로 돌아오도록 하라. 지난날의 일을 뒤미처 따라 금중(禁中)에서 선유하니, 아, 너희 제생들은 대사성에게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8월. 상이 희릉(禧陵)에 전알하고 이어 효릉(孝陵)으로 가서 친히 제사를 지냈다. 제사가 끝나고 나서 재실(齋室)로 갔는데, 벽에 인묘(仁廟)가 궁관(宮官) 김인후(金麟厚)에게 내린 묵죽(墨竹)의 인본(印本)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어제시 1절(絶)을 써서 내려, 벽에 함께 붙이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궁궐과 여염은 하늘과 땅처럼 떨어져 있다. 이에 옛날에는 밤에 숙위 군병에 대해 물었던 훌륭한 일이 있었다. 상번(上番)하는 정병(正兵)이 비록 지척에서 숙위를 하고 있지만 아랫사람의 실정을 어찌 넌지시 위로 아뢸 수 있겠는가. 옛 규례를 따라 중사(中使)와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백성들의 고질적인 폐단을 살펴 묻도록 하여, 그 가운데 늙었는데도 역(役)에서 제외되지 않은 경우나 한몸에 여러 가지 역을 지고 있는 자가 있을 경우 각도에 신칙하여 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 9월. 관동에 큰물이 나서 민가 1천여 호가 물에 떠내려 갔다. 휼전(恤典)을 시행하고 제단을 설치하여 빠져 죽은 백성들에게 제사를 지내주도록 명하였다.
○ 10월. 대훈(大訓)을 친히 지어 태묘에 고하고, 이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교서를 반포하였다. 이조 판서 서종옥(徐宗玉)과 병조 판서 김성응(金聖應)을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오늘 처분한 이후로 다시는 서로 대립하지 말라. 인재를 쓰고 버리는 것을 공변되게 하느냐 사사롭게 하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전조(銓曹)에 달려 있으니 각각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 11월. 북관(北關)에 크게 기근이 들었다. 상이 밤에 대신 및 북도의 구관 당상을 불러 진구할 계책을 강구하였다. 이에 영남의 대동미 2만 곡(斛)과 군작미(軍作米) 1만 곡과 세태(稅太) 1만 5천 곡, 호남의 위태(位太) 5천 곡을 전에 구획한 잡곡 5만 곡과 아울러 도합 11만 곡을 북관으로 들여보내고, 박문수(朴文秀)를 진휼사(賑恤使)로 삼아 진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이에 끝내 굶어죽은 백성이 한 사람도 없었다.
63권 영조조 7
18년(임술, 1742)
○ 1월.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조정 신하로서 나이 90세가 된 자는 문(文)촹음(蔭)촹무(武)를 막론하고 아울러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는데, 노인을 공경하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북로(北路)로 곡식을 운반하던 배가 파손되어 싣고 가던 것이 다 썩고 사람들이 대부분 물에 빠져 죽었다. 상이 이를 듣고 놀라 이르기를,
"이는 남을 찔러 죽이고서,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칼이 죽인 것이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영남촹관동촹관북에 향과 축문을 보내어 도신으로 하여금 정성껏 바다에 제사를 지내 잘 건너게 해주기를 기도하도록 하라."
하였다.
○ 3월. 상이, '보편적이고 편당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변된 마음이고 편당하고 보편적이지 않은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뜻이다[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라고 친히 썼다. 이를 비에 새겨 반수교(泮水橋)에 세우도록 명하였다.
○ 4월. 상이 시학(視學)하였다. 당초에 해조(該曹)가 강서관(講書官)을 뽑고 대사성이 경전에 능통한 유생을 뽑도록 명하였다. 이때 이르러 상이 선성(先聖)에게 작헌례를 올리고 명륜당에 나아가 강서관 및 유생들을 불러보고 차례대로 진강(進講)하였다. 상이 글뜻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이어 시강관에게 명하여 반복해서 토론하도록 하였는데, 밤이 늦어서야 파하였다.
○ 5월. 초하룻날 일식이 있었다. 상이 구식례(救食禮)를 친히 행하였다. 예전 규례에는 관상감의 관원이 때에 따라 아뢰었는데, 이때 이르러 상이 제조에 명하여 보고하게 하고 이를 정식으로 삼도록 하였다. 또 지금부터는 기일에 앞서 하루 동안 재계하고, 각사의 구식관(救食官)도 본사에서 하루 동안 청재(淸齋)하도록 명하였다.
○ 8월. 이연덕(李延德)을 장악원 정으로 삼아 악기(樂器)를 상고하여 바로잡도록 하였다. 나라가 난을 겪은 이후 악기가 흩어지고 없어져 생(笙)촹소(簫)촹관(管)촹금(琴)이 갖추어지지 않고 음율과 곡조가 대부분 뒤섞여 질서가 없었다. 이때 이르러 상이 하교하기를,
"귀신을 감통(感通)시키는 것은 오로지 음악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순(舜) 임금 때 봉황이 위의 있게 날아왔던 것도 감통되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오늘날 아악(雅樂)은 장단(長短)과 절주(節奏)가 조화롭지 못하여 이를 들으면 사람의 마음을 심난하게 한다. 만약 아악이 본래 이와 같다면 공자가 어찌 석 달 동안 고기맛도 모르고 심취할 수 있었겠는가."
하고, 이어 이연덕이 음률을 자못 안다고 하여 필선 겸 장악원 정으로 삼았다. 또 악기도감(樂器都監)을 설치하고 이연덕을 겸낭청으로 삼아 감독하여 만들어내도록 하였다. 이때 마침 사직의 악기 창고 및 비변사의 우물에서 석경(石磬) 24매(枚)를 얻었다. 그 가운데 계축년이라 새겨진 것이 15매였는데, 이는 곧 세종 15년 박연(朴堧)이 만든 것이었다. 상은 세종이 고종경(古鐘磬) 32매를 우물에서 얻어 비로소 아악을 만들었는데 지금 창고와 우물에서 또 석경을 얻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여겼다. 이에 개연히 다시 아악을 새롭게 할 뜻을 갖게 된 것이었다. 이에 재자관(齎咨官)을 북경에 보내어 생황(笙簧) 만드는 법을 사오도록 하고, 또 장악원 제조에게 신칙하여 상벌(賞罰)로 악생(樂生)들을 권면하고 징계하여 실효가 나타나게 하도록 하였다.
○ 상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전알하였는데, 왜창(倭槍)을 잡고 있는 위사(衛士)를 보게 되었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이 두 능의 변고는 지금까지도 가슴 아픈 일이다. 삼가 전알하게 된 날 비록 창검(槍劍)의 이름이라 해도 왜 자가 붙은 것은 또한 차마 볼 수 없다."
하고, 다 치워버리도록 명하였다.
○ 교서관에 명하여 《병장도설(兵將圖說)》을 간행하도록 하였다. 《병장도설》은 바로 세조 대왕이 병조
○ 팔도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신포(身布)와 적곡(?穀)을 면제해 주도록 명하였다. 경연 신하가, 허실이 뒤섞이기 쉽다고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가령 그들에게 속는다 할지라도 차라리 백성들에게 속는 잘못을 짓는 것이 나으니 또한 무슨 해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도성 백성 가운데 전염병을 앓고 있는 자가 많았는데, 상이 두 의사(醫司)에 명하여 훌륭한 의원을 골라 약물을 가지고 구해 치료하도록 하였다.
○ 9월. 11월과 12월에 계복(啓覆)을 행하도록 명하였다. 당초에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열성조(列聖朝)의 계복 월차(月次)를 상고하도록 하였는데, 승지가 아뢰기를,
"선조조(宣祖朝)에서는 봄 가을에 구애받지 않고 2, 3월에 행하였으며 인조조와 효종조에서는 대부분 10월에 행하였고, 선조(先朝)에서도 9월과 10월에 행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마침내 명하기를,
"지금부터는 계복을 11월과 12월에 행하는 것으로 정하라."
하였다.
○ 영남에 큰물이 나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사신(詞臣)에게 제문을 짓도록 명하고, 도신에게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 11월. 근시(近侍) 10인을 팔도와 양도에 나누어 보내어 여제(?祭)를 행하도록 하였다. 이때 겨울 날씨가 봄처럼 따뜻하여 전염병이 크게 치성하여 각도의 사망한 백성에 대한 계문이 계속 잇따랐기에 이렇게 명한 것이다.
○ 사정 당상(査正堂上) 서종옥(徐宗玉)이 아뢰기를,
"충의위(忠義衛)는 모두 훈신(勳臣)의 적장자입니다. 일찍이 숙묘조 때 조정 신하와 유현(儒賢)에게 수의(收議)하여 대왕손(大王孫)과 마찬가지로 9대(代)로 정하였는데, 그 후 또 5대로 바꾸었습니다. 장차 어느 것을 따라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근래의 규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신하들의 후손이 장차 군역을 면치 못하게 될지 어찌 알겠는가. 후한 쪽을 따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훈신의 후예는 선조(先朝)의 하교에 의거하여 9대로 정하라."
하였다.
○ 관학 유생의 제강 절목(製講節目)을 정하였다. 이에 앞서 거재(居齋) 유생은 항상 200인을 정원으로 하였는데, 그 사이 경비가 부족하여 75인으로 줄였다. 이때 이르러 상이 100인으로 늘려 돌아가며 거재하고 50점이 되면 반시(泮試)에 응시할 수 있게 하도록 명하였다. 마침내 절목을 완성하자, 태학에 명하여 이를 따라 행하도록 하였다. 다음날 태학생을 숭문당(崇文堂)에서 불러보고 이르기를,
"선조(先朝)가 이 당을 세운 것은 대개 문(文)을 숭상하는 뜻에서였다. 지금 내가 그대들을 이 당에서 친히 시험보이는 것도 문을 숭상하려는 뜻이니, 그대들은 이러한 뜻을 깊이 유념하라."
하였다. 마침내 제생에게 선온(宣?)하고 이어 어제시(御製詩)를 내려주었다.
○ 12월. 하교하기를,
"양기(陽氣)가 생기고 있는데, 나의 백성들은 여전히 곤궁하니, 이 어찌 왕정(王政)이라 하겠는가. 한 해 동안 부지런히 힘써 일하고 겨울이 된 뒤에나 몸을 쉬어야 비로소 저 술잔을 드는 즐거움이 있는데, 겨울에 비록 창고를 봉해 두었더라도 봄에 오히려 적곡(?穀)을 바친다 하니, 아, 나의 백성이 언제나 편히 쉴 수 있겠는가. 이에 생각이 미치면 내 몸이 아픈 듯하다. 비국으로 하여금 각도 도신에게 신칙하여 백성을 위하는 나의 뜻을 깊이 유념하여 때를 놓치지 않게 하여 이러한 폐단을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19년(계해, 1743)
○ 1월. 초하룻날 상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인정전 계단에 나아가 대왕대비 전에 진하(陳賀)하였다. 예가 끝나자, 계단을 올라와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이는 성묘(成廟)의 고사를 따르고, 송 인종(宋仁宗)이 태후에게 친히 하례를 올린 의절을 참고로 한 것이다.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하고, 조정 신하의 부인으로서 90세가 된 자들을 특별히 봉작(封爵)하도록 허락하였다.
○ 정시(庭試)에 초시(初試)를 설행하여 부(賦)와 표(表)로 나누어 시험하여 1천 인을 취하도록 명하였는데, 과거장이 혼잡하기 때문이었다.
○ 곡식 4천 곡을 경기 감사에게 주어 일곱 고을을 진휼하고, 영호(嶺湖)의
미곡 2만 곡을 함경 감사에게 주어 기민(飢民)을 진휼하도록 하였다.
○ 2월.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에게 명하여 《수교집록(受敎輯錄)》을 속찬(續纂)하도록 하였다.
○ 3월. 찬선 박필주(朴弼周)를 불렀다. 이르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막 알현하기를 청하였으나 구경(九卿)의 차서는 어진이를 높이는 것이 대신을 공경하는 것 위에 있다. 이에 먼저 경을 불러 만나보려 한 것이다."
하고, 이어 묻기를,
"삼대(三代) 이후 다시는 삼대와 같은 시절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박필주가 대답하기를,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행하지 않는 것인가?"
하니, 박필주가 아뢰기를,
"기품(氣稟)이 누를 끼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 선왕(齊宣王)도 맹자(孟子)에게 대답하면서 재화와 여색을 좋아하는 것을 숨기지 않았는데, 내 어찌 유독 경에게 숨기겠는가. 나는 좋아하고 노여워하는 것이 항상 중도를 잃고 있다. 비록 스스로 병통인 줄 알지만 고치지 못하고 있다."
하니, 박필주가 대답하기를,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병통인 줄 알면 이와 같이 하지 않는 것이 약이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그 병통을 아는데 어찌 고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렵다."
하니, 박필주가 대답하기를,
"성의가 부족하여 스스로 속이는 것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훌륭하도다, 이 말이여. 내가 스스로를 속인 지 이미 반생이 지났다. 지금부터는 마땅히 스스로를 속이지 않도록 힘쓰겠다."
하였다. 박필주가 얼마 있다가 소장을 진달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 4월. 상이 태묘에 제향을 올렸다. 돌아오는 길에 인조(仁祖)의 옛 궁을 바라보다가 인조가 훙기한 지 120년이 되어 세 번째로 계해년을 맞게 되었음에 감격하여 마침내 들렀다 가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진(陣)이 제대로 열을 짓지 못하여 의장(儀仗)과 시위가 대부분 질서를 잃었다. 이에 장령 윤식(尹
"전하께서 태묘에서 나올 때까지 명하지 않다가 도중에 명을 내리신 것은 아랫사람들이 간하여 못하게 하는 것을 억제하려 하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억제하려 했다는 것은 실정에 어긋난다. 그러나 말은 옳다. 내 마땅히 받아들여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윤식을 발탁하여 통정계(通政階)로 올렸다. 또 정사 공신(靖社功臣) 김류(金?)촹신경진(申景?)촹이귀(李貴)촹이서(李曙)촹구굉(具宏)에게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 당초 상이 태묘에 친제할 때 백관의 제복(祭服)이 제도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홍문관에 명하여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상고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면복(冕服)의 훈상(?裳)이 현의(玄衣)의 안에 가려지니 상의원으로 하여금 그 제도를 고치되 그 길이를 줄여 현의를 위에 입고 훈상을 아래에 입는 뜻을 나타내도록 하라. 백관의 제복은 의상(衣裳) 이외에 관(冠)촹대(帶)촹홀(笏)촹패옥(佩玉)촹후수(後綬)촹폐슬(蔽膝)을 아울러 조복(朝服)으로 통용하고, 혹 구차하고 간략한 자가 있을 경우 제용감(濟用監)의 제복을 편의에 따라 쓰도록 하라. 홀은 4품 이상은 상아를 쓰고, 5품 이하는 나무를 사용하여, 정규 제도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 윤4월. 비로소 대사례(大射禮)를 성균관에서 행하였는데, 성묘(成廟)의 고사를 따른 것이다. 상이 문묘에 나아가 선성(先聖)에게 작헌례를 올리고 명륜당에 임하여 시사(試士)하였다. 이어 하련대(下輦臺)에 나아가니, 사악(思樂)이 연주됨에에 승시(乘矢)를 쏘아 3발을 명중시켰다. 이어 시사관(侍射官) 30명이 차례대로 짝을 지어 활을 쏘았는데, 명중한 자도 있고 명중하지 못한 자도 있었다. 명중한 자는 표리(表裏)로 상을 주고 명중하지 못한 자는 술로 벌을 주었다. 활쏘기가 끝나자, 향관청의 동쪽에 각(閣)을 세워 활과 화살, 기물과 제복을 보관하도록 하고, 문형(文衡)으로 하여금 그 일을 기록하여 명륜당에 걸도록 하였다. 다음날 진하(陳賀)는 하지 않았다. 성묘조 때 궁궐 안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인 예에 의거하여 태학생들을 숭문당(崇文堂)에 불러 술과 찬을 내려 주었는데, 찬은 다섯 그릇이었고 술은 세 순배를 돌렸다. 하교하기를,
"이 예는 곧 200년 이래 처음 행한 것이다. 서울과 지방에서 한결같이 해야 할 것이니, 양도(兩都)와 팔도의 출신(出身) 및 장교를 도신과 수신으로 하여금 시취(試取)하고 수석을 차지한 자를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라. 다섯 군문의 장관(將官)은 각기 그 군문에서 시사(試射)하고 수석을 차지한 자를 보고하고 그 나머지도 시상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묘의 악장(樂章)을 다시 정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태묘에는 이미 각실의 악장이 있으니 각실은 그 실의 악장을 쓰는 것이 예의 뜻에 마땅할 것인데, 열조(列朝)의 악장을 12실에 순환하여 쓰고 있다. 예를 들면 제1실에서 제4실까지는 영녕전(永寧殿) 사조(四祖)의 악장을 연주하고 제5실은 제1실의 악장을 연주하며 목묘실(穆廟室)에 이르러서는 도로 사조의 악장을 연주한다. 나라에 있어 제향보다 더 중한 것이 없고 제향의 의문(儀文)에 있어 악장보다 더 앞세울 것이 없는데, 악장이 이처럼 문란하다. 예조로 하여금 대신 및 예를 아는 유신에게 문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며칠이 지난 뒤 영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예조 낭관이 태묘 악장을 정리하는 일로 명을 받들고 와서 물었는데, 이는 대충대충 헌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례의》와 《종묘의궤(宗廟儀軌)》를 두루 살펴보니, 세종조에 악장을 제작할 때 신관(晨?) 및 삼헌(三獻)의 악장은 각각 인입(引入)과 인출(引出)을 빼고 아홉 절로 만들었는데, 그 8장에서 목조(穆祖)로부터 태종 및 원경왕후(元敬王后)까지의 공덕을 차례로 서술한 다음 제9장에서 총괄적으로 서술하여 끝을 맺었으니, 이것이 그 음악을 제작한 은미한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조조에 이르러 신하들이 종묘 악장을 아홉 절로 한 뜻을 깨닫지 못하고 마침내 실마다 그 악장을 각각 하나씩 만든 것이라 하여 선묘(宣廟)의 악장을 뒤미처 제작하여 그 아홉을 열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악사(樂師)가 또 그 이치를 모르고서 또한 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나 선조(宣祖)의 악장을 지금 없앨 수는 없다. 태종실의 현미장(顯美章)과 원경후실의 정명장(貞明章)을 하나의 시(詩)로 합하여, 아홉 절로 하였던 숫자를 어기지 말도록 하라. 또 오늘 정리한 시말을 의궤(儀軌)에 상세히 기재하여 훗날 상고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 5월. 상이 사직단에 기우제를 지냈는데 비가 오지 않았다. 다시 북교(北郊)에 기도를 하려 할 때에 근신에게 이르기를,
"기우제를 지내러 갈 때 연(輦)을 타지 않는 것이 옛 예이다. 일전에 원로 대신들이 애써 간쟁하기에 할 수 없이 타고 갔는데, 이와 같이 하고서 어찌 하늘과 귀신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보여(步輿)로 북교에 이르러 제사를 지내고 나자 비가 내렸다. 상이 한데에 앉아 있다가 한참 만에야 돌아왔다. 창의문(彰義門)의 누각에 임하여 정사 훈신(靖社勳臣)의 성명을 새겨 걸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후세의 임금으로 하여금 이곳을 지나다가 성조(聖祖)의 고난을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 7월. 강도(江都)의 외성(外城)을 벽돌로 쌓았는데, 유수 김시혁(金始?)의 청을 따른 것이다. 이에 앞서 숙종조 때 의논하는 자가 개펄의 흙을 구워 성을 쌓으면 돌처럼 단단하니 강도의 외성을 개펄의 흙을 구워 쌓도록 청하였다. 이때 이르러 김시혁이 연경(燕京)의 성곽 제도를 본떠 벽돌을 포개어 쌓고 석회로 채워 성을 만들도록 청하니, 상이 허락한 것이다.
○ 9월. 신하들이 성상의 나이가 오순(五旬)이 되었다는 이유로 숙묘(肅廟) 경인년의 고사를 인용하여 진연(進宴)하도록 청하였다. 상이 허락하지 않자, 대신과 경재(卿宰)가 마침내 대왕대비전에 진연하도록 청하였다. 대왕대비전이 언문 교서를 내려 윤허하고, 다시 상에게 권하여 외정(外廷)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도록 하였다. 마침내 탄미절(誕彌節)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음악은 아악(雅樂)을 쓰고 술은 현주(玄酒)를 쓰고 찬품(饌品)은 숫자를 줄이도록 하였다. 의금부와 형조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고 각도의 묵은 포흠을 면제해 주도록 명하였다.
20년(갑자, 1744)
○ 1월.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 제주(濟州)에 기근이 들었다. 나리포(羅里?)의 곡식 5천 곡을 배로 운반해주어 진휼하도록 명하였다.
○ 2월. 《소학 훈의(小學訓義)》가 완성되었다. 상이 유신 등에게 이르기를,
"《소학》 한 책은 내가 평생 존숭하여 믿는 책이다. 나는 세종조 때 사정전(思政殿)에 모여 훈의(訓義)를 냈던 것을 본떠, 음훈(音訓)의 사실을 선유(先儒)의 성명 및 출처(出處)와 함께 집해(集解) 아래에다 나누어 설명하여 보기에 편하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어 밤낮으로 유신들을 불러 친히 참고하고 증거를 대어 세상에 간행하게 된 것이다.
○ 하교하기를,
"조정에서 관작을 중히 하여야 외방의 교화가 바르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일찍이 도백(道伯)을 지냈던 사람을 다시 그 도의 수령으로 임명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관방(官方)이 무너지고 외방에서는 교화가 손상되고 있다. 이후로는 전에 감사나 병사(兵使)를 지낸 자는 다시 그 도의 수령으로 제수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정식으로 삼도록 하라."
하자, 병조가 아뢰기를,
"경상도의 좌우 병사와 함경도의 남북 병사는 구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단지 해당 관하(管下)에만 차임하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 《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을 중간(重刊)하고, 그 판(板)을 춘추관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 6월. 예조 정랑 이맹휴(李孟休)에게 명하여 《춘관지(春官志)》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 7월. 동래부(東萊府)를 독진(獨鎭)으로 만들고 수성장(守城將)을 두었는데, 예전에 병영(兵營)에 속했던 본부의 속오(束伍)촹아병(牙兵)촹별기위(別騎衛) 및 기장(機張)과 양산(梁山) 두 고을의 군병을 모두 본부로 소속시키도록 하였다.
○ 8월.《속오례의(續五禮儀)》가 완성되었다. 이에 앞서 세종이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오례(五禮)를 편성하고, 세조조에 미쳐 다시 오례를 인하여 더하고 덜어내 오례의(五禮儀)를 만들었다. 성종조에 이르러 비로소 책으로 완성하여 서울과 지방의 크고 작은 상례(常禮)와 변례(變例)의 의절을 모두 《오례의》를 상고하여 행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여러 조정을 거치면서 바꾸고 손질하여 지극히 번다해져 한갓 해조(該曹)의 장고(掌故)를 실은 책으로서 문호(門戶)의 구분이 없어졌다. 이때 이르러 상이 대제학 이덕수(李德壽)와 예문제학 이종성(李宗城)을 증수 당상(增修堂上)으로 삼고, 수찬 윤광소(尹光紹)를 낭청으로 삼았는데, 속집(續輯)하여 책을 만들어 올렸다. 상이 불러보고 선온하였다. 서문(序文)을 친히 짓고, 교서관에 명하여 간행하도록 하였다.
○ 하교하기를,
"예전에 한 문제(漢文帝)는 유조(遺詔)에, '산의 원형을 따라 능(陵)을 만들고 잘 재량하여 물이 그대로 흐르게 하라.' 하였는데, 마음으로 항상 이를 흠모해 왔다. 그러나 요순(堯舜)을 본받고자 하면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할 것이니, 어찌 한 나라의 임금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우리 태종조에서는 사방석(四方石) 1편(片)을 2편으로 만들었고, 우리 성조(聖祖)는 병풍석(屛風石)을 없앴고, 우리 성고(聖考)에 이르러 능 위의 석물(石物)을 후릉(厚陵)의 제도에 따르도록 명하였으니, 검소한 덕이 지극하였다. 이후로 능(陵)과 원(園)의 석상(石象) 설치는 한결같이 이 제도를 따라 한 자 한 치라도 더하지 못하도록 하라. 이를 정식으로 삼아 영원히 후세에까지 끼쳐주도록 하라."
하였다.
○ 동소문(東小門)과 서소문(西小門)에 예전에는 망루가 없었는데, 금위영의 영(營) 서소문 문루의 편액을 '소의문(昭義門)', 어영청 영 동소문 문루의 편액을 '혜화문(惠化門)'이라 하도록 명하였다.
○ 《속대전(續大典)》이 완성되었다. 이에 앞서 세종이 국조(國朝)의 전헌(典憲)을 모으고 《주례(周禮)》를 본떠 《육전(六典)》을 만들었는데, 세조조에 이르러 《육전》을 절충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만들었다. 그 후에 바꾸고 손질한 바가 많았으니, 성종조에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중종조에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을, 숙종조에 《전록통고(典錄通考)》를 만들었다. 모두 《경국대전》을 보충하는 것이었으나, 각각 한 권의 책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참고하여 증거로 삼는데 어지러웠다. 이때 이르러 상이 찬집청(纂輯廳)을 설치하도록 명하고, 형조 판서 서종옥(徐宗玉), 호조 판서 김약로(金若魯),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 전 참판 이일제(李日?)와 김상성(金尙星), 전 승지 구택규(具宅奎) 등 6인으로 하여금 6전(典)을 나누어 관장하도록 하고, 낭청 9인을 차임하였다. 속록류(續錄類)와 《전록통고》 및 각사의 장고(掌故)를 적은 책을 가지고 한결같이 《경국대전》의 범례(凡例)와 규모를 따라 분류하여 책을 만들도록 하였다. 상이 날마다 여러 당상을 인견하여 더하고 덜며 버리고 취할 기준을 강구하고, 또 때때로 술과 안주를 내려 위로하였다. 책이 완성되자 상이 '한 마음으로 공변되게 하며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고르라[一心乃公 爲官擇人]', '공부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용도를 절제하여 힘을 축적하라[均貢愛民 節用蓄力]', '오례를 닦아 거행하여 예전 전례를 실추시키지 말라[修擧五禮 毋墜舊典]', '무사를 사랑하고 보살펴 입직과 숙위를 엄히 하라[愛恤武士 以嚴直衛]', '크게 공변되게 하도록 삼가하여 법문을 힘써 지키라[大公欽哉 勉守法文]', '직임에 부지런히 하여 백공을 신칙하라[勤於職任 飭勵百工]'는 것을 친히 써서, 각각 두 구절로 6전의 머릿말을 삼도록 하였다. 또 십여 줄의 윤음을 지어 후손을 면계(勉戒)하여 따라 지키도록 하였다.
○ 전가 사변(全家徙邊)의 율을 없앴다. 이에 앞서 상이 전가 사변의 율에서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한 집안
"이 법이 중국에는 없고 우리나라에만 있습니다. 아마도 국초에 변방을 채우기 위하여 설행한 것인 듯합니다."
하였다. 이때 이르러 형전(刑典)을 찬집하게 되었는데, 상이 형조 판서 서종옥에게 이르기를,
"육형(肉刑)은 한(漢) 나라 조종(祖宗)의 법이었는데도 문제(文帝)는 이를 없앴다. 나는 전가 사변의 율을 없애 관대함으로 후손에게 끼쳐주고자 하는데, 되겠는가?"
하니, 서종옥이 대답하기를,
"이는 성탕(成湯)이 그물을 풀어주었던 것과 같은 어짊입니다. 신이 일찍 이 호남을 안찰하고 있을 때, 어떤 백성이 나쁜 일을 많이 하고도 뉘우쳐 고치지를 않아 이 율을 써서 그 전가(全家)를 북쪽 변방으로 이사시킨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함경감사가 되어 순시를 하다가 길에서 바가지를 들고 구걸하는 한 사람을 만났는데, 얼굴이 매우 낯익기에 불러 물어보니 과연 신이 전가사변의 율을 시행하였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온 집안 사람이 다 죽고 그 사람 하나만 남아 구걸을 하고 다니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그를 불쌍히 여겨 찬(饌)을 거두어 그에게 주도록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신은 도(道)를 다스리면서 이 전가 사변의 율을 쓴 적이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충직하고 순후하다. 임금과 신하가 충직하고 순후한 마음으로 이 율을 없앤다면 또한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다."
하고, 마침내 형전에서 이 율을 속히 없애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동래(東萊)와 의주(義州)의 잠상(潛商)에 대한 본래의 율은 전가 사변이었는데, 근래 효시(梟示)로 변하였습니다. 지금 전가의 율을 낮추면 정배(定配)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너무 가볍습니다. 게다가 세곡(稅穀)에 물을 섞는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사람에 대해서도 효시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지금 만약 율을 낮춘 것만 싣고 그 효시의 법을 싣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법을 범하는 자가 필시 많아질 것입니다."
하자, 서종옥이 아뢰기를,
"효시는 군율(軍律)로서, 오형(五刑)이 아닙니다. 동래와 의주의 잠상은 이미 변방의 일에 속하니 그 율을 병전(兵典)에 붙이고, 세미(稅米)에 물을 섞는 것은 이미 조세(漕稅)에 속하니 그 율을 호전(戶典)에 붙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이에 앞서 각도의 곤수(?帥)를 전에 방어사(防禦使)를 지냈던 사람으로 통의(通擬)하였는데, 변지(邊地)의 규식을 정한 뒤 모두 전에 변지 방어사를 지냈던 자를 비의(備擬)하도록 명하였다.
○ 9월. 상이 태조와 숙종의 고사를 따라 기사(耆社)에 들어갔는데, 종신(宗臣)과 경재(卿宰)의 청을 따른 것이다. 상이 창덕궁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을 알현하고 마침내 기로소(耆老所)로 행행하여 영수각(靈壽閣)에 배알하고 기둥 안으로 나아가 기첩(耆帖)을 친히 썼다. 예관이 궤장(?杖)을 올리니, 상이 친히 받았다. 이어 육상묘(毓祥廟)에 나아가 한 고조(漢高祖)의 풍패(?沛) 고사를 따라 본동의 부로(父老)를 불러보고 쌀과 포를 나누어주었다. 다음날 경현당(景賢堂)에서 기사의 신하들을 인견하여 선온하고 어제시를 하사하였다. 이어 은병(銀甁) 1구(具)를 내려주며 이르기를,
"이는 성고(聖考)의 기해년 고사이다."
하고, 다시 어첩(御帖)의 자서문(自序文)을 친히 지었다.
○ 10월. 대왕대비전에 진연(進宴)하였다. 상이 친히 가사(歌詞)를 지어 기쁘게 해드렸는데, 이르기를,
저 보각을 바라봄이여/ 瞻彼寶閣兮
궤장을 받아왔다네/ 受?杖來
예연을 크게 열었도다/ 禮筵大開
구릉처럼 장수하기를 송축함이여/ 頌祝岡陵兮
만수를 비는 잔을 드리노라/ 獻萬壽杯
하였다. 매우 즐겁게 잔치를 하고 나서 끝냈는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어버이가 살아계시면 늙었다고 하지 않는 법이다. 영수각에서 받은 궤장을 동조의 자리 오른쪽에 올려놓고 이 가사를 노래하여 색동옷을 입고 즐겁게 해 드리는 효도를 대신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 3일이 지난 뒤 숭정전(崇政殿)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시경(詩經)》녹명장(鹿鳴章)의 '나에게 큰 도를 보여주라[示我周行]'는 것 및 양로(養老)와 걸언(乞言)의 뜻을 써서 기사(耆社)의 신하들에게 앞으로 나오도록 하여 노성한 의논을 자문하였다. 끝날 때가 되어 예방 승지와 진연청(進宴廳)의 당상에게 명하여 어선(御膳)을 받들도록 하였는데, 향당악(鄕黨樂)이 연주되자 기사의 신하들을 앞에서 인도하여 영수각까지 이르러 밤새도록 즐겁게 마셨다.
○ 11월. 제릉(齊陵)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제릉의 신도비는 예전 임진왜란 때 훼손되어 오랫동안 중건되지 않고 있었는데, 이때 이르러 종신(宗臣)이 상소하여 청함에 따라 영건도감을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열성지장(列聖誌狀)》 가운데 권근(權近)이 지은 비문(碑文)을 돌에 새기도록 하고, 봉조하 이의현(李宜顯)에게 그 아래에 추기(追記)하도록 하여 세운 것이다.
○ 상이 경연에서 《주례(周禮)》를 강하였다. 영사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주례》는 곧 희씨(嬉氏) 주(周) 나라가 천하를 다스리던 큰 원칙이자 법이었습니다. 주공(周公)이 제작한 훌륭함을 이에서 볼 수 있는데, 이후의 제왕 가운데 이를 행한 자가 없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특별히 명하여 진강하시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공의 마음으로 몸소 행하신다면 제도하여 다스리는 데 보탬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경과 서로 잘 알았는데, 임금과 신하가 함께 늙어 이제 백발이 되었다. 어렸을 때의 일이 마치 전생(前生)처럼 멀리 떨어진 옛일인 듯 느껴지는데, 이제까지 크게 방종하는 데 이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학문의 힘에 의지한 탓이다. 나는 처음에는 이 책이 명물(名物)과 도수(度數)에 관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반복하여 익숙히 뜻을 음미해봄에 지극한 이치가 들어 있으니, 주공의 뜻이 넓고도 깊도다. 매일 고요한 밤에 깊이 뜻을 연구해 보면 나도 모르게 춤을 추며 뛸 듯이 기뻐진다."
하였다.
21년(을축, 1745)
○ 1월. 초하룻날 상이 숭정전에 나아가 대왕대비전에 진하하고, 이어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또 서울과 지방에 명하여 백성의 폐단을 자세히 살피고, 옥에 갇힌 죄수를 속히 처결하도록 하였다.
○ 심리사(審理使)를 팔도로 나누어 보냈다. 처음에 상이 심리사를 파견하려 하였는데, 조정 신하들이 대부분 편리하지 못하다고 아뢰었다. 상이 따르지 않고, 관서 심리사 이일제(李日?)에게 이르기를,
"경이 가서 풍환(馮驩)의 일을 본받아 행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듣건대, 영변(寧邊)의 두 면(面)이 새로 육상묘(毓祥廟)의 절수(折受)에 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개 영변의 백성들은 대부분 이 두 면에 의지하여 살고 있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도 이곳이 절수에 들어갔는데, 고(故) 재상 조상우(趙相愚)의 아룀을 인하여 숙묘(肅廟)가 특별히 내주기를 허락하였습니다. 고 재신 조명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창덕'이란 말을 듣고서 내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조가 백성을 구휼하였던 정성을 추모하고 지난날 삼갔던 덕을 몸받아 특별히 청한 바를 윤허한다. 이후로 영변의 절수를 도로 중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일어나 절하여 하례를 올렸다.
○ 3월. 비로소 제기(祭器)를 살피고 희생(犧牲)을 살피는 제도를 정하였다. 상이 장차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친히 행하려고 하였는데, 예관과 유신을 불러 하교하기를,
"이번 태묘 전알(展謁) 이후에는 이어 면복(冕服) 차림으로 제기를 살피고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희생을 살필 것이다. 이에 의거하여 의주를 만들어 갖추도록 하라."
하였다. 하향 대제 때에 미쳐 하교하기를,
"난도(?刀)라는 것이《오례의》에는 있는데 오랫동안 폐하여 쓰지 않고 있다. 지금부터는 예대로 만들어 쓰도록 하라."
하였다.
○ 7월. 태묘의 제사에 쓰는 희생으로 양 1마리와 돼지 1마리를 늘리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태묘의 각 위(位)마다 등갱(?羹) 3그릇과 형갱(?羹) 3그릇을 올리는데 모두 쇠고기만을 써왔다. 이때 이르러 대신이 아뢰기를,
"이는 소는 넉넉하고 양과 돼지는 부족한 데 연유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바로잡도록 명한 것이다.
○ 12월. 하교하기를,
"우리나라의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은 포은(圃隱)이 창도한 것이니, 아조(我朝)는 포은을 종주(宗主)로 삼아야 한다.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여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감흥을 일으킨 뜻을 붙이도록 하라. 듣건대, 두문동(杜門洞)의 자손들이 모두 장사치가 되었다 하니, 별도로 수습하도록 하라."
하였다.
22년(병인, 1746)
○ 1월. 초하룻날 상이 대왕대비에게 진하하였는데, 대왕대비의 보령(寶齡)이 육순(六旬)이 되어서였다. 조정 신하로서 나이 70세 이상인 자, 사(士)촹서(庶)로서 나이 80세 이상인 자, 연로한 왕증손부(王曾孫婦)와 왕외손부(王外孫婦)에게 아울러 쌀과 고기를 내려주고, 연로한 조사(朝士)의 부녀, 사촹서의 부녀에게도 아울러 선조(先朝) 병술년의 예에 따라 차등있게 선물을 내렸다. 마침내 수서(手書)로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이어 선혜청과 호조에 명하여 도성의 공인(貢人)들을 돌보아주도록 하였다.
○ 제주에 기근이 들었는데, 어사 한억증(韓億增)을 보내어 진휼하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 경자년에 본주의 백성이 선조의 끼친 은혜를 추념하여 바다를 건너와 능역(陵役)에 노고를 바쳤다. 이에 우리 자성(慈聖)께서 특별히 쌀과 반찬을 내려주었다. 지금 본주에서 잇따라 기근을 알리고 있으니 몸은 비록 대궐에 있으나 음식이 어찌 목으로 넘어가겠는가. 아, 어사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여 우리 섬 백성을 구제하라. 진휼을 마친 뒤 활쏘기 시험을 보이고, 문사(文士)로서 재주있는 자 및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을 보고하도록 하라.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거나 효행과 절의가 뛰어난 사람도 일체 살펴 찾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진헌하는 물선(物膳)을 가을까지 반으로 줄여주고 공마(貢馬)도 정지시키도록 명하였다.
○ 2월.《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이 완성되었다. 처음에 상이 덕성합(德成閤)에 나아가 유신을 불러 이르기를,
하고, 마침내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을 친히 저술하였다. 이철보(李喆輔)촹원경하(元景夏)촹조명리(趙明履) 등을 편차인(編次人)으로 삼고 날마다 입시하여 교정하도록 하였다. 이를 이름하여《자성편》이라 하였는데, 내편은 신심(身心)을 주로 하고 외편은 감계(監戒)를 주로 하였다. 교서관에 명하여 간행하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부터 언동(言動)과 정령(政令) 가운데《자성편》에 어그러지는 것이 있으면 《자성편》으로 진계(陳戒)하라."
하였다.
○ 3월. 상이 열읍의 첨정(簽丁) 가운데 혹 임신부로서 성책(成冊)에 오른 경우가 있다는 것을 듣고 하교하기를,
"정명진(程名振)은 당(唐) 나라의 장수에 불과했는데도 젖먹이는 부인을 놓아보냈었다. 더구나 임금이 되어 나의 백성의 뱃속에 든 음양도 모르는 아이를 대번에 군정(軍丁)의 성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어사가 아뢴 바를 인하여 이러한 폐단을 듣게 되었는데, 왕정(王政)에 있어 차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비국으로 하여금 도신을 엄히 신칙하여 열읍에 만일 임신부로서 성책에 오른 자가 있을 경우 즉시 없애게 하고 이후에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 나타나는 즉시 무겁게 다스리도록 하라. 이를 점령으로 삼으라."
하였다.
○ 4월. 하교하기를,
"《주례》에, 현능(賢能)한 사람에 대한 글을 왕에게 올리면 왕이 두 번 절하고 받아 천부(天府)로 올린다고 하였다. 한(漢) 나라 때 현량(賢良)을 천거하였던 것도 대개 이 예를 따른 것이었다. 비국으로 하여금 자급에 구애받지 말고 시임촹원임 대신은 각각 방백을 감당할 만한 사람 둘씩을 천거하고 여러 재신(宰臣)은 각각 수령을 감당할 만한 사람 하나씩을 천거하도록 하라. 그리고 예전 대주첩(代柱帖)의 예를 따라 나열해 적어 첩(帖)을 만들어서 올리도록 하라. 내가 항상 책상 위에 두고서 전조(銓曹)가 잘 받들어 행하도록 신칙하고 천거된 사람이 부지런히 하는지 살필 것이다."
하였다.
○ 문채나는 비단을 연경(燕京)에서 사오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땅에서 재화가 생산되는 것은 한계가 있는데 군국(軍國)의 수요는 매우 번다하다. 한 사신이 다녀오는 데 은(銀) 10만 냥을 소비하여 왕과 공경(公卿)촹대부(大夫)촹필서(匹庶)가 필요로 하는 능라(綾羅)를 충당하고 있다. 궁벽한 시골에서까지 다투어 사치를 숭상하여 온 나라의 재화를 다하여 한때의 사치를 돕고 있으니 한탄스러운 마음 가눌 수 없다. 아, 위에서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그보다 더 심하게 나타나는 법이다. 올해의 절사(節使)부터는 곤의(袞衣), 연여(輦輿), 적의(翟衣), 조신(朝臣)과 명부(命婦)의 장복(章服), 군문의 기치(旗幟)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 이외에 기교한 무늬가 있는 것은 일체 사오지 못하도록 엄금하라. 만약 범하는 자가 있으면 서장관(書狀官)에게는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벌을 시행하고 시민(市民)은 곧장 사형에 처하고 역관(譯官)과 장사치는 의주(義州)에서 참수한 뒤 아뢰도록 하며, 무역 물품은 책문(柵門) 밖에서 불태우도록 하라. 이를 정식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밤 승지와 옥당을 불러 이르기를,
"내 평소 올이 굵은 베와 비단을 쓰려는 뜻을 가지고 먼저 궁중에서부터 앞장서고자 하였으나 위로 자성을 받들고 있기 때문에 감히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마침 자성께 분명하게 진달하니, 자성께서 기뻐하며 이르시기를, '검소를 밝히는 것은 열조(列祖)의 훌륭한 일이었다. 상이 만약 뜻을 둔다면 무슨 어려울 것이 있겠
하였다.
○ 5월. 주(州)촹부(府)촹군(郡)촹현(縣)의 학교에서 아울러 송조(宋朝)의 4현(賢) 및 우리나라의 12현을 향사(享祀)하도록 명하였다. 16현을 모두 향사하는 것은 법전(法典)의 제례조(祭禮條) 소주(小註)에 실려 있는데, 작은 고을에서는 대부분 따라 행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렇게 명한 것이다.
○ 단군(檀君)부터 고려의 여러 왕릉(王陵)에 이르기까지 도신으로 하여금 가을이 되거든 수리해 다듬도록 하고, 예조에서 향(香)을 내려주어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 영희전(永禧殿) 친제의(親祭儀)를 비로소 정하였다. 상이 영희전의 여섯 차례 제향 가운데 한 번을 친히 행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이《오례의》에 실려있지 않았다. 이에 예관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문의하도록 하니, 대신이, "처음 시작하는 데 관계되는 일이라 의문(儀文)과 품절(品節)에 있어 혹 구애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며 어려워하였다. 상이 원(園)촹능(陵)의 친향(親享)을 두루 대조하여 의주(儀註)를 만들어 정식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 근시(近侍)를 보내어 팔도에 여제(?祭)를 나누어 설행하였다.
○ 7월. 하교하기를,
"지난해 친경(親耕) 때 백묘(百畝)에 구곡(九穀)을 파종하라는 뜻으로 하교하였는데, 지금 잘못된 습속을 그대로 답습하여 구곡을 파종하지 않고 밭을 논이라 하고 명아주를 심고는 곡식을 조세로 내도록 하니, 종묘와 사직의 제사에 쓸 막중한 곡식을 이처럼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게다가 친경을 하려고 해도 또한 민전(民田)을 취하여 친경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기성(箕聖)이 제창한 정전제(井田制)를 복고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이번 기회를 인하여 왕성(王城) 동문(東門) 밖에 정전제를 모방하여 마을을 정하고 묘(畝)를 계산하여 함께 공전(公田)에서 힘써 일하도록 한다면 또한 우리 공전에 먼저 비가 내리기를 빌었던 뜻에 맞게 될 것이다. 태상시(太常寺)로 하여금 절목을 강구하여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태상시가 절목을 올리며 아뢰기를,
"정전(井田)은 900묘인데, 가운데의 100묘를 공전으로 삼고 밖의 800묘를 사전으로 삼아 백성들로 하여금 함께 공전을 갈도록 하는 것이 구일(九一)의 법입니다. 지금 친경전 100묘를 공전으로 삼고 동적전(東?田) 11일경(日耕)을 사전으로 삼아 백성에게 세금을 줄여주고 힘써 공전을 갈도록 하며, 공전의 곡식 종자는 본 적전에서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얼마 후 태상시 도제조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친경전 8일경을 거름주고 갈고 김매고 수확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매우 많으니 11일경의 사전으로는 감당하기에 부족합니다. 옛날에는 사전이 9분의 8이었는데 지금은 공전이 10분의 8이니, 백성들이 원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청컨대, 16일경을 사전으로 삼고 함께 친경전을 갈도록 한다면 이는 2분으로 1분을 도와 갈도록 하는 것이니, 비록 정전제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백성 가운데 혹 원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 상이 '현영소덕왕묘(顯靈昭德王廟)' 여섯 글자를 친히 썼는데,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액자를 만들어 걸도록 명하였다.
○ 9월. 조태구(趙泰?)촹유봉휘(柳鳳輝)촹최석항(崔錫恒)촹정해(鄭楷)촹권익관(權益寬)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상이 대사헌 박필주(朴弼周)를 초치하여 이조 판서로 승진시키고,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에 대해 자문을 구하였다. 이에 박필주가 소매 속에 넣어온 차자(箚子)를 올려, 먼저 신축년과 임인년 역적들의 죄를 바루도록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대신과 충분히 의논하여 처분할 것이다."
하였다. 이때 이르러 삼사가 아뢰기를,
신축년에 저위(儲位)를 세운 것은 바로 우리 경묘(景廟)가 숙고(肅考)의 남긴 뜻을 깊이 유념하고 자성(慈聖)의 밝은 명을 이어받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수서(手書)를 직접 주어 처분이 분명하였는데도 유봉휘는, '황급하고 엉성하여 누가 시킨 듯 독촉한 듯하였다.' 하였고, 종묘와 사직을 부탁하게 되어 팔도가 함께 기뻐하였는데도 유봉휘는, '인심이 의혹을 품어 오랫동안 안정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인신의 예가 없었다[無人臣禮]'는 것은 한(漢) 나라 때 어사(御史)가 황제의 폐립(廢立)을 탄핵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경묘에게 끝내 후사(後嗣)가 없었던 것을 유독 그만 몰랐을 리가 없는데도 자손이 번성하는 경사를 우러러 바란다는 말을 하였으니, 이는 질병을 숨기고 드러내지 말자는 논의가 비롯된 바입니다. 청컨대, 유봉휘의 관작을 추탈하소서."
하였다. 또 논핵하기를,
"이광좌(李光佐)가 무옥(誣獄)을 꾸며냈다는 것은 백망(白望)의 초사에서 다 드러났습니다. 역적 김일경의 교문이 나온 뒤 병조 판서로 의망하여 마치 노고에 보답하는 것처럼 하였고, 이잠(李潛)의 흉언을 역적 김일경이 무릉(茂陵)에 비교하였는데 이광좌가 이를 답습하여 포증(褒贈)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남태징(南泰徵)과 이사성(李思晟)의 무리는 모두 이광좌가 끌어들여 육성한 사람들인데, 무신년에 난을 일으킨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최석항(崔錫恒)이 무옥을 주장한 것은 조태구와 똑같은 흉악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무옥이 성사되고 나자 기어코 역적 목호룡을 녹훈(錄勳)하도록 청하고 또 중국에 주문(奏聞)하여 힘을 빌려 위협하려 하였습니다. 박상검(朴尙儉)의 옥사를 지체시켜 연루자를 지레 죽도록 한 것은 자세히 캐물을 길을 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대리 청정을 전선(傳禪)에 비교한 것은 말뜻이 흉참하였습니다.
조태억(趙泰億)이 지은 교문의 말뜻은 김일경과 서로 표리를 이루는 것으로, '정책 국로(定策國老)'니 '문생 천자(門生天子)'니 하는 말은 당 나라 때 환관(宦官)들이 어리석은 임금들을 옹립한 일을 인용한 것입니다. 게다가 김일경의 교문에 나오는 '접혈(?血)'이니 '행배(行杯)'니 하는 등의 말을 당연하게 여겨 여기저기 전파되게 놓아두었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관작을 추탈하소서."
하니, 따르고, 이광좌와 조태억에 대해서는 적용한 율이 너무 많다고 하여 따르지 않았다. 이어 '결신충군(潔身忠君)' 네 글자를 직접 쓰고는 승지에게 명하여 고 봉조하 이태좌(李台佐)의 집에 전하도록 하면서 이르기를,
"이는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 써서 고 봉조하 최규서(崔奎瑞)에게 내렸던 것과 같은 뜻이다."
하였다.
○ 승지를 보내어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의 영당(影堂))에 치제하고, 그 봉사손(奉祀孫)을 녹용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그의 화상(?像)을 가져다 보고서 그 공로에 감동되어 명하게 된 것이다.
○ 생원과 진사에게 명하여 복두(?頭)촹난삼(?衫) 차림으로 방방(放榜)에 나오도록 하고, 마침내 정식 제도로 삼았다. 이에 앞서 상이 중국 진사과(進士科)의 복두촹난삼촹대연화(戴蓮花)촹문희연(聞喜宴) 등의 제도를 복구하고자 하였으나 난삼의 정식을 알지 못하였다. 이때 경연 신하가 아뢰기를,
"고 이조 참판 김륵(金?)이 신종(神宗) 황제 때 사신의 임무를 띠고 중국에 조회를 하러 갔는데, 황제가 복두와 난삼 및《대학연의(大學衍義)》1부를 선사하였습니다. 김륵이 돌아와 복두와 난삼을 안동(安東)의 학사(學舍)에 보관하였고,《대학연의》에도 어보(御寶)의 진적(眞蹟)이 있는데 지금 병조 정랑 권만(權萬)이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권만은 바로 충정공(忠定公) 권벌(權?)의 후손이 아닌가. 예전에 우리 중묘(中廟)께서 재추(宰樞)와 더불어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상화연(賞花宴)을 벌였는데, 파하고 나자 내시가 주운 수진본(袖珍本)《근사록(近思錄)》을 중묘께 올렸다. 이에 중묘가 하교하기를, '이는 필시 권벌이 소매 속에 넣고 다니는 것일 것이다' 하고 돌려주도록 명하였으니, 이는 또한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훌륭한 일이었다. 아, 정원은 영남 감영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두 책과 의관(衣冠)을 두 신하의 후손으로 하여금 가져오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권만과 김륵의 손자 김홍운(金弘運)이 가져 왔다. 마침 상이 편찮았는데도 억지로 일어나 낯을 씻고 머리를 빗고 옷을 입고 관을 쓰고서 앉았다. 두 사람을 불러보고 이르기를,
"추로(鄒魯)의 선비를 대접하는데 한 고조가 두 다리를 뻗고 앉아 거만히 맞이한 것을 본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중국 조정에서 하사한 옛 물건은 더욱 존경해야 할 것인데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삼경(三經)촹《근사록》촹《대학연의》를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소관하는 관사에 신칙하여 복두와 난삼을 그 식대로 만들고 그 옛 물건은 도로 김홍운에게 돌려주도록 하였다. 이에 생원과 진사의 의관이 모두 명 나라의 제도로 회복되었으나, 대연화와 문희연은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이내 중지하였다.
○ 12월. 관서(關西)에 기근이 들었다. 임박(任璞)을 위유 어사(慰諭御史)로 삼아 그로 하여금 진휼하여 안집시키도록 명하였다.
○ 단종조의 상신(相臣) 고(故) 김종서(金宗瑞)촹황보인(皇甫仁)촹정분(鄭?)의 관직을 회복해 주도록 명하였다. 당초 황보인과 김종서의 후손이 상언(上言)하여 억울함을 씻어주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정난 훈신(靖難勳臣)에 광묘(光廟)가 간여되어 있다는 이유로 어렵게 여겼다. 광묘의 훈사(訓辭)를 읽게 됨에 미쳐, '나는 고난을 당하겠지만 너는 태평하게 될 것이다.'는 하교에 이르러 세 번이나 감탄을 하면서 이르기를,
"아, 김종서 등의 일을 가리키는 듯하다. 마치 귀에 대고 직접 명하시는 것과 같다."
하고, 마침내 세 사람의 관직을 회복해 주도록 명하였다. 이어 교서관으로 하여금 광묘의 훈사를 간행해 올리도록 하였다.
○ 회양부(淮陽府)를 방수사(防守使)로, 이천(伊川)촹평강(平康)촹통천(通川)촹고성(高城)촹흡곡(?谷) 다섯 고을을 방수장(防守將)으로 삼고, 묘당에 명하여 절목을 의논해 정하여 급한 일이 있을 때 수비할 수 있게 하도록 하였다. 회양은 철령(鐵嶺)을 신지(信地)로, 평강은 국사당(國師堂)을 신지로, 이천은 방장(防墻)을 신지로, 고성은 유점(楡岾)과 장항령(獐項嶺)을 신지로, 통천은 추지령(楸池嶺)을 신지로, 흡곡은 비운령(飛雲嶺)과 상음천(霜陰遷)을 신지로 삼도록 하였다.
23년(정묘, 1747)
○ 1월. 초하룻날 상이 인정전 뜰에 나가 백관을 거느리고 대왕대비에게 전문(箋文)을 올려 진하하였는데, 대왕대비의 회갑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정경(政經)》을 간행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경연 신하에게 이르기를,
"숙고(肅考)께서 손수 쓰신《언지(言志)》한 책이 동조(東朝)에 있었는데, 내가 평소 차마 받들어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제 우러러 자전께 청하여 펼쳐 읽어보니, 그 가운데 《정경》의 찬(贊)과 소서(小序) 및 시(詩)가 있었다. 보묵(寶墨)이 새로운 듯하여 슬픈 마음 가눌 길이 없었다. 교서관으로 하여금 간행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 경상 우병사가 고인(古印) 1과(顆)를 올리면서 아뢰기를,
"진주(晉州) 사람이 남강(南江) 물가에서 얻은 것이니 바로 임진란 때 병사 최경회(崔慶會)가 안고 와서 물에 던진 것입니다. 전적(篆跡)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데, 위에 만력(萬曆) 연호가 적혀 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를 살펴보고는 감탄하여 관원을 보내어 창렬사(彰烈祠)에 치제하고 최경회의 후손을 녹용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追憶往事
백여 년이 흘렀네/ 百有餘年
다행히 남강에서 찾았는데/ 幸得南江
새겨진 글자가 완연하네/ 印篆宛然
촉석루에서의 뛰어난 의열/ 矗石義烈
상상함에 슬픈 마음 앞서네/ 想像愴先
영남의 병영에 남겨두도록 하여/ 命留嶺?
충절을 세우도록 하네/ 以?忠焉
하였다. 이어 이를 본영으로 내려보내 보관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의복은 조촐하게 입어도 제복(祭服)만은 아름답게 꾸몄던 것이 우(禹) 임금의 훌륭함이었다. 태묘(太廟)에는 무늬가 없는 물품을 쓰는데, 나의 의장(儀仗)에는 무늬가 있는 것을 쓰니, 옛날을 본받는 데 어긋난다. 이후로 홍양산(紅?傘)은 무늬 없는 것을 쓰고 일산(日傘)은 방주(方紬)를 쓰고 연여(輦輿)와 의장도 이 예에 의거하라."
하였다.
○ 2월. 예관 및 상의원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면복(冕服)의 제도를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였다. 상의원에 예전부터 면복도(冕服圖)가 있었는데, 중국 조정에서 반포하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면복은 조수(組綏)와 패대(佩帶)가 모두 연경(燕京)의 시장에서 사온 것이어서 대부분 격식에 맞지 않았다. 이때 이르러 상이 도식(圖式)에 의거하여 정하도록 명한 것이다.
○ 생원촹진사의 장원(壯元)을 물색(物色)하는 규정을 없애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생원촹진사 회시(會試)의 합격자 명단을 발표할 때 시관(試官)들이 먼저 합격한 200명의 봉미(封彌)를 엿보아 그 가운데 지벌(地閥)과 문망(文望)이 있는 사람을 골라 장원으로 올려놓았다. 그런데 생원시에서 3등을 하고 진사시에서 6등을 하여 속칭(俗稱) 이 차서를 차지한 사람이 명이 짧아 일찍 죽었기에 또 이름도 모르는 시골의 천한 선비를 골라 채워넣었다. 이때 이르러 감시(監試) 회시(會試)를 보인 일소(一所)와 이소(二所)의 시관들이 대궐에 나아가 갑(甲)이니 을(乙)이니 다투어 날이 기울도록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지 못하였다. 상이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어보니, 도승지 홍상한(洪象漢)이 그 상황을 아뢰었다. 이에 상이 시관들에게 시권(試券)을 가지고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마침내 어필(御筆)로 생원시의 3등 허증(許增)을 장원으로 발탁하였는데, 허증은 송도(松都) 사람이었다. 이어 하교하기를,
"지금부터 소과(小科)도 대과(大科)의 방(榜)에 의거하여 원래의 등수로만 등급을 매기도록 하라. 봉미를 뜯기 전에 엿보는 자가 있을 경우 과장(科場)에서 사정(私情)을 쓴 율로 다스릴 것이다."
하였다.
○ 대왕대비에게 존호 '강성(康聖)'을 올렸다. 명정전(明政殿)에서 친히 책보(冊寶)를 올리고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교문(敎文)을 반포하고 대사면을 내렸다. 선조(先朝)의 예전 규례에 의거하여 조신(朝臣) 4품 이상으로 나이 70세가 된 자, 사(士)촹서(庶)로서 나이 80세가 된 자를 가자(加資)하되, 대신 및 자궁(資窮)이 된 자는 음식물을 내려주고 안부를 묻도록 하였다.
○ 3월. 상이 경연 신하에게 이르기를,
"동조께서 범연히 집상전(集祥殿)의 예전 보관물들을 점검하다가 옥대(玉帶) 하나를 발견하시고는 나에게 내려주셨다. 이는 곧 선묘(宣廟)가 차시던 것으로, 숙묘(肅廟) 을해년에 이 대를 차고 조참(朝參)을 열었고 언문(諺文)으로 전후의 일을 대갑(帶匣)에 자세히 적었던 것인데, 지금 홀연히 얻었으니 또한 기이한 일이다."
하고, 다음날 마침내 옛 옥대를 매고 선원전(璿源殿)에 분향(焚香)하였다. 이해 가을에도 이 대를 매고 근정
○ 노량(露梁) 육신묘(六臣墓)에 비(碑)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 5월. 비로소 동적전(東籍田)에서 관예(觀刈)하였다. 돌아와 유신에게 이르기를,
"내가 친경(親耕)은《대학연의》를 보고서 행하였고, 관예는 명 나라의 고사(故事)를 써서 행하였다."
하고, 이어 태상시에 명하여 친경과 관예를 할 때가 되면 초기(草記)하여 여쭙도록 하였다.
○ 무격(巫覡)의 부정한 제사를 금하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예전에는 이목(李穆)의 올곧음을 가상히 여겨 장려하였는데, 지금은 주저하며 머뭇거리는 것이 풍조를 이루고 있다. 이목(耳目)의 관직에 있는 자 가운데 누구에게 이목과 같은 기풍이 있는가. 한성부를 신칙하여 일체 엄히 금하도록 하여 세상을 의혹케 하고 백성을 속이는 폐단을 영원히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 이에 앞서 국릉(國陵)의 봉표(封標)한 땅에 아직 장사지내지 않은 경우는 장사를 지내지 못하도록 하고 이미 장사지낸 경우는 옮기도록 하되, 이미 장사지낸 사대부의 것은 논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이때 이르러 승지가 아뢰기를,
"봉표한 지역 80 가운데 사대부가 범장(犯葬)한 것이 이미 30입니다. 나라의 복조(福祚)가 멀리 이어져 장차 몇백 대가 될지 모르니 80도 너무 작은데 더구나 50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사대부로서 범장한 경우도 옮기도록 하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 광무제(漢光武帝)는 스스로, '해를 넘길 수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 하였는데도 장구하게 나라를 향유하였고, 진 시황(秦始皇)은 반드시 만세(萬世)에 전하고자 하였는데도 이세(二世)에서 마침내 망하였다. 나라의 복조가 길고 짧은 것은 오직 백성을 어떻게 보호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어찌 명산(名山)의 많고 적음을 말하겠는가. 진실로 50을 다 쓰도록 하는 것도 너무 많은데, 어찌 반드시 그 봉표를 넓혀서 백골(白骨)에까지 피해가 미치도록 하겠는가. 그냥 두도록 하라."
하였다.
○ 7월. 하교하기를,
"반영(繁纓)은 하찮은 물건인데도 공자(孔子)는 아까워하였다. 더구나 초헌(?軒)을 타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후로는 한성부의 좌윤과 우윤, 돈녕부의 동지사를 지낸 사람이 아니면 감히 초헌을 타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정식으로 삼으라. 또 좌윤과 우윤은 공신(功臣)으로 녹훈된 자와 음관(蔭官) 이외에는 반드시 전에 정(正)을 지낸 사람으로 통의(通擬)하도록 하라."
하였다.
○ 8월. 하교하기를,
"주남(周南)의 교화는 강한(江漢)에까지 미쳤는데도 오히려 강포(强暴)한 것에 더럽혀질까 두려워하였다. 예전에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가 대사헌이 되자 남녀가 길을 달리하여 다녔다. 선정은 신하였는데도 교화를 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였다. 그런데 덕이 부족한 내가 임금이 되어 세도(世道)가 날로 낮아져 음란한 풍속과 어그러진 행실을 서울과 지방에서 보고해 오는 것이 많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학교의 정사가 실추되어 세상에 《소학》의 가르침이 없어서인 것이다. 서울과 지방에 신칙하여 가르칠 때 반드시 《소학》을 중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 9월.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관직을 회복해 주었는데, 김종서와 황보인 등에게 적용한 예를 쓴 것이다.
○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좌의정 조현명에게 이르기를,
"내 일찍이 풍릉(?陵)에게, '조제론(調劑論)이 필경에 당(黨)을 형성하게 될지 어찌 알겠는가.' 하였는데, 지금 보면 내 말이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부터 오직 인재만을 등용하고자 한다. 이 당이니 저 당이니 하
하니, 조현명이 대답하기를,
"성상께서 뜻하시는 바를 신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갑(甲)은 갑쪽의 사람만을 등용하고 을(乙)은 을쪽의 사람만을 등용하면서 스스로 오직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라 한다면 전하께서 어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성상의 분부가 훌륭하긴 하나 마땅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과 같다면 장차 당이 없어질 때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시경(詩經)》에, '사람이 덕을 잃는 것은 밥 한 덩이를 나누어주지 않아 허물이 됨에 말미암는다.' 하였습니다. 등용하고 버리는 즈음에 혹 편벽되게 하는 바가 있으면 다툼의 단서가 이를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지금 조제(調劑)로 목표를 세워 이 논의를 주장하는 자들로 하여금 널리 쓰여질 수 있도록 책임을 지운 후에야 이 시기를 구제할 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 10월. 하교하기를,
"형벌은 대부(大夫) 이상에게는 미치지 않도록 하는 법이다. 아침에 조정의 반열에서 시종하던 사람을 저녁에 감옥에서 장(杖)을 치는 것은 시종신을 중시하는 뜻에 어긋난다. 이후에 일찍이 시종신을 지낸 사람은 장오(贓汚)에 관계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공죄(公罪)로 조율(照律)하여 장(杖)은 속전(贖錢)으로 대신 받도록 하라. 이 또한 여형(呂刑)에서, '돈으로 형벌을 속바치도록 한다.'고 한 뜻이 될 것이다."
하였다.
24년(무진, 1748)
○ 1월.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 태묘에 관지통(灌地筒)을 새로 설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대축(大祝)을 한 사람 더 차임하도록 하였다. 대신과 경연 신하의 말을 따른 것이다.
○ 선원전(璿源殿)에 받들고 있던 숙묘의 어진(御眞) 면부(面部)에 점점이 흠이 생겼는데, 상이 동조에 여쭈고 대신에게 의논하여 어진을 선정전(宣政殿)으로 옮겼다. 화사(?師)에게 모사(摸寫)하도록 명하고 상이 직접 작업을 감독하여 10일 만에 완성되자 구본(舊本)은 도로 선원전으로 봉안하였다. 마침내 영희전(永禧殿)의 제4실을 넓혀 모사한 신본(新本)을 봉안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두 도감의 당상과 낭청 및 신련(神輦)을 시위한 승지와 사관이 경현당(景賢堂)에 입시하니, 제사를 물리고 난 음식을 내려주고 헌가(軒架)를 연주하도록 하여 위로하였다. 상이 노래를 지었는데, 이르기를,
삼가 영정을 받듦이며/ 敬奉影幀兮
전중에 모셨도다/ 展安殿中
회가함에 기뻐 축하함이여/ 回駕慶賀兮
우리 동방 만세에 이어지리/ 萬世吾東
어찌 이어받들꼬/ 何以繼述兮
백성과 함께 즐겨야 하리/ 樂與民同
하고, 신하들에게 명하여 그 자리에서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이어 서울과 지방의 가장 오래된 포흠(逋欠)을 면제하고, 의금부와 형조의 가벼운 죄수들을 풀어주도록 하였다. 교리 윤광소(尹光紹)와 김상철(金尙喆) 등이 상차하여 아뢰기를,
"하례와 연회를 베풀 때가 아닌데 궁정에서 음악을 베푸는 것은 교훈을 남겨 몸소 가르치는 뜻에 어긋납니다."
"순(舜) 임금이 칠기(漆器)를 만들자 간쟁하는 사람이 10인이었다. 임금을 훌륭하게 만들려는 뜻이 매우 가상하다. 각각 숙마(熟馬) 한 필씩을 내리되 친수(親受)하도록 하라."
하였다.
○ 신라 경순왕릉(敬順王陵)에 고려 왕릉들의 예에 의거하여 무덤을 수위하는 사람 다섯을 두도록 명하였다.
○ 무신(武臣)에 대해 문신의 예에 의거하여 무경(武經)을 전강(殿講)하도록 하였다.
○ 5월. 상이 호조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흥인문(興仁門) 안과 광화문(光化門) 밖에 모두 종(鐘)이 하나씩 있는데, 종면(鐘面)에 광묘(光廟)와 내전(內殿)의 휘호(徽號)를 새긴 데다가 어제(御製)까지 있다. 각각 한 칸의 집을 지어 보관하도록 하라."
하였다.
○ 9월. 전에 홍문관의 관직을 지냈던 사람을 봉상시 정으로 차출하여 함께 시호(諡號)를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응교 홍경원(洪景源)의 말을 따른 것이다.
25년(기사, 1749)
○ 1월.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 왕세자에게 명하여 기무를 대리(代理)하도록 하였다. - 의절은 한결같이 정유년의 고사를 따랐다. -
○ 4월. 오군문(五軍門)과 선혜청에 명하여 회계법(會計法)을 행하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용도를 절약하여 저축을 넓히는 것은 임금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하여 홍수와 가뭄에 대비하고 군대를 유지하려는 것이다.《주례(周禮)》에, '왕에게는 회계가 없고 유사(有司)에게는 회계가 있다.' 하였다. 안으로는 호조와 병조, 밖으로는 각도에 모두 회계가 있는데, 오직 오군문은 중간에 창설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규례가 없다. 선혜청은 나라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곳인데, 그 회계한 바는 몇 장의 단자(單子)로 입계(入啓)할 뿐이어서 이내 휴지가 되어버리고 마니, 한결같이 호조와 병조의 예에 의거하여 회계안(會計案)을 만들어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 5월. 충청 감사 이일제(李日?)가 서맥(瑞麥)을 올렸으나, 퇴각시켰다. 청주(淸州)에서 나는 보리에 혹 두 개의 이삭, 혹 세 개의 이삭이 달린 것이 있었는데, 이일제가 이를 상자에 담아 올리며 아뢰기를,
"명 나라 태조 홍무(洪武) 3년, 섬서성(陝西省) 보계현(寶鷄縣)에 보리의 이삭이 두 갈래로 익은 상서로움이 있었는데, 홀연히 이러한 일이 우리나라에서 나타나게 되었으니 오늘의 일은 범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아름다운 상서는 성세(聖世)에서 귀하게 여길 바가 아니니 퇴각시켜 받아들이지 않아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 6월.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이조 참의는 네 명 이상의 후보자를 정하여 그 가운데서 차임하고, 홍문록(弘文錄)도 한림 소시(翰林召試)의 규례와 같이 하여 서로 알력을 일으키는 폐단을 그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유컨대 물을 막는데 동쪽을 막으면 서쪽으로 터지는 것과 같으니, 어찌 법을 바꾸어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더구나 홍문관은 임금이 강학(講學)하여 도움을 구하는 곳이니 소시(召試)를 시행할 수 없다."
하였다.
○ 8월. 명 나라 태사(太史) 초횡(焦?)의《양정도해(養正圖解)》를 간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궁중에《양정도해》가 있었는데, 숙묘가 찬(贊)을 지었다. 이때 이르러 상이 유신에게 내보였는데, 그 책의 머릿글에 '왕휼사민(王恤四民)'이라 적혀 있다 하여 한성부에 명하여 곤궁한 백성들을 골라 보고하도록 하고, 홍화문(弘
○ 각도에 병으로 죽은 소가 많아 사람을 써서 대신 논밭을 갈았다. 이에 예조에 명하여《오례의》의 제선목례(祭先牧禮)에 의거하여 각 고을은 중앙에 단(壇)을 설치하고 서울은 마조단(馬祖壇)에 나가 아울러 목신위(牧神位)를 설치하여 제사하고 기도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는 서울과 지방에 신칙하여 도살을 금하도록 하였다.
○ 9월. 사대부의 관례(冠禮)와 친영(親迎)을 예대로 행하도록 신칙하고, 국혼(國婚)부터 사대부의 혼인에 이르기까지 동뢰연(同牢宴)의 상(床)에 유밀과(油蜜果)를 금하도록 하였다.
○ 11월. 북로(北路)에 기근이 들자, 도신이 장계를 올려 영남의 곡식을 옮겨와 진휼해 주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천 리의 파도치는 바닷길에 만일 파선이 된다면 곡식이야 아까울 것이 없지만 인명이 어찌 가엾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북도의 사람들은 백성을 진휼해주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남도의 사람들은 백성을 진휼하게 할까 두려워하니, 죽음을 싫어하는 데 있어서는 한가지이다. 교제창(交濟倉)의 곡식으로 진휼하고, 창고에 유치해 둔 환곡(還穀)의 3분의 1을 빌려주도록 하라. 또 공명첩(空名帖) 800매를 내려주어 납속(納粟)하여 진휼 밑천에 쓸 수 있게 하라."
하였다.
○ 12월. 권학문(勸學文)을 지어 내려, 서울과 지방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64권 영조조 8
26년(경오, 1750)
○ 1월.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 상이, 풍속을 바르게 하려면 먼저 어진이를 숭상해야 한다고 하고, 이내 관원을 보내어 고(故) 찬성 정제두(鄭齊斗)와 박필주(朴弼周), 고 찬선 김간(金幹)에게 치제(致祭)하고, 전 집의 민우수(閔遇洙)와 박필부(朴弼傅)를 통정계(通政階)로 발탁하였다.
○ 고 정언 조성복(趙聖復)의 아들을 녹용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조 판서 원경하(元景夏)의 말을 따른 것이다.
○ 하교하기를,
"전염병의 기운이 치성하여 사망자가 잇따르고 있다. 아, 나의 백성이 친척과 형제를 잃고 고아가 되고 과부가 되어 울부짖으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이에 생각이 미치면 나도 모르게 측은해진다. 서울과 지방에 분부하여 죽은 자는 거두어 묻어주고 산 자는 구해 살리도록 하고, 올봄의 수륙(水陸) 조련은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귤(橘) 한 쟁반을 정원에 내려주었다. 귤을 다 들자 어제시(御製詩)를 내리고, 입직한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는 문종조의 고사를 쓴 것이다. 이어 야대(夜對)를 행하고, 술과 찬을 내려주었다.
○《병장도설(兵將圖說)》을 팔도의 병사(兵使)와 수사(水使)에게 나누어 주었다.
○ 3월. 송 나라 신국공(信國公) 문천상(文天祥)을 영유(永柔)의 와룡사(臥龍祠)에 배향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사은 정사(謝恩正使) 조현명(趙顯命)이 북경에서 신국공의 유상(遺像)을 구해가지고 돌아와 상에게 바쳤다.
상이 이르기를,
"문 승상의 정충(精忠)과 의열(義烈)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심을 일으키게 한다. 전에 듣건대, 육진(六鎭)에 황제총(皇帝塚)이 있다 하니, 이제 문천상과 육수부(陸秀夫) 두 사람을 사당을 세워 배향하여 두 황제로 하여
하고, 마침내 대신에게 문의하였는데, 대신이 불편하게 여겼다. 상이 하교하기를,
"와룡사는 바로 선묘(宣廟)가 의주로 가 계실 때 감흥이 일어 세우도록 명하셨던 것인데, 악무목(岳武穆)을 뒤미처 배향하도록 한 것 또한 예전에 크게 감동한 성의(聖意)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와룡(臥龍)은 한(漢) 나라 황실을 회복하고자 하였고, 악무목은 송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를 맞아오려 하였고, 신국공은 송 나라의 국조(國祚)를 보존하고자 하였으니, 세 어진이의 충성은 한가지이다. 신국공를 와룡사에 함께 배향하라."
하고, 이어 제문을 친히 짓고 근시를 보내어 치제하였다. 이어 어필(御筆)로 사액(賜額)하여 '삼충사(三忠祠)'라 하였다.
○ 5월 하교하기를,
"올해의 전염병은 병란을 겪는 것보다 더 심하다. 모든 공헌(貢獻)은 바로 백성들의 고혈(膏血)이다.《주례》에, 크게 전염병이 돈 해에는 임금도 음식을 갖추어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서울과 지방에서 올리는 것을 가을까지 정지하여 물리고, 올해의 탄일(誕日)에 진헌하는 각도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도 동조에 올리는 것 이외에는 아울러 봉진을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 형조 관원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의논한 뒤 옥안(獄案)을 가지고 입시하도록 명하였는데, 상이 정섭(靜攝)하여 오랫동안 계복(啓覆)을 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9월. 하교하기를,
"가을 장마가 벼곡식을 손상시키고 있으니, 오늘부터 5일 동안 감선(減膳)하도록 하고, 이번 탄일에 정부에서 올릴 물선도 그만두도록 하라. 서울과 지방의 용도도 절약하도록 힘써 저축을 늘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모든 영선(營繕)을 중지하고 궁녀 45인을 놓아보내도록 명하였다.
○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였다. 처음에 숙묘가 양역(良役)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여 여러 차례 신하들에게 다각도로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호포론(戶布論)촹결포론(結布論)촹유포론(遊布論)촹정전론(丁錢論)이 서로 각기 다른 주장을 고집하여 끝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상이 즉위함에 미쳐 양역청(良役廳)을 설치하여 당상(堂上) 몇 사람을 골라 임명하여 전념해서 강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좋은 계책을 얻을 수가 없어 이윽고 혁파해 버렸다. 그러나 상이 끝내 폐단을 바로잡는 데 대한 생각을 잊지 못하고 연연해하여 반드시 1필(疋)을 줄여주고자 하였으나 경상 비용을 채울 방도가 없었다. 이때 이르러 홍계희(洪啓禧)가 여러 차례 계책을 내어 좌의정 조현명에게 간청하였는데, 조현명이 그 말을 좋아하여 상에게 보고하였다. 홍계희가 충청 감사로 부임하기 위하여 하직 인사를 하면서 양역에 관한 일을 자세하게 진달하니, 상이 부임한 뒤 백성들의 실정을 자세히 살펴 장계로 논하여 청하도록 하였다. 오래지 않아 홍계희가 결포(結布)를 행하도록 장계로 청하면서 호서(湖西)의 결포론을 책자로 만들어 올렸으나, 그 숫자로는 경상 비용의 반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이에 상이 홍화문에 나가 오부(五部)의 백성들을 불러 편리한지의 여부를 물으니, 모두 호포(戶布)가 편리하다고 하였는데, 결포가 편하다고 하는 자도 또 열에 둘셋은 되었다. 상이 마침내 비국촹육조촹삼사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가령 호포나 결포를 모두 행할 수 없다면 1필을 결단코 줄이지 않으면 안 되니 경들이 급대(給代)의 대책을 강구하여 정하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를 만나려 하지 말라."
하고, 이어 특별히 1필을 줄여주도록 하교하였다. 영의정 조현명, 좌의정 김약로(金若魯),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청하기를,
"관청을 설치하여 이름을 균역청(均役廳)이라 하고, 삼공(三公)이 구관(句管)하고, 신만(申晩)촹김상로(金尙魯)촹김상성(金尙星)촹조영국(趙榮國)을 당상으로 삼으소서. 또 충청 감사 홍계희를 내직으로 옮겨 당상을 삼아 주관하여 강구하게 하소서."
1. 관청 설치. 구(舊) 수어청(守禦廳)을 균역청이라 이름하여, 비축하였다가 보충하여 지급해 주는 곳으로 삼는다.
2. 결미(結米). 서도와 북도 이외 6도의 전결(田結)에서 1결당 쌀 2두 혹은 돈 5전(錢)을 거두는 것을 정식으로 한다.
3. 여결(餘結). 관북 이외 7도에서 보고한 여결의 숫자가 모두 2만여 결인데, 경오년조(庚午年條)부터 본청으로 세금을 납부하여 양포(良布)를 반으로 줄인 숫자를 보충하도록 한다.
4. 해세(海稅). 각도의 어염세(漁鹽稅)는 균세사(均稅使) 및 감사가 분정(分定)한다.
5. 군관(軍官). 양민(良民)으로서 교생(校生)이나 장관(將官)으로 투입된 자는 따로 군관수포(軍官收布)를 만들어, 줄인 필(疋) 수를 보충하도록 한다.
6. 이획(移劃). 필 수를 줄인 뒤 선혜청의 저치미(儲置米) 및 해서(海西)의 상정미(詳定米) 도합 1만 섬을 새 저치미로 본청에 이획하여, 줄인 포필(布疋)의 대신으로 지급하도록 한다.
7. 감혁(減革). 군문 및 해사(該司)의 예전 제도는 대략 변통을 하고, 외방 영(營)촹읍(邑)촹진(鎭)의 각종 명색을 형편에 따라 줄여, 줄인 포필의 대신으로 지급하도록 한다.
8. 급대(給代). 급대의 숫자는 나열해 적어두는 것을 정식으로 삼아, 매년마다 규례를 살펴 거행할 수 있도록 한다.
9. 수용(需用). 본청의 쌀과 목면은 급대하는 것 이외에는 조금도 다른 용도에 쓸 수 없다. 따라서 낭관(郎官)은 실직(實職)에 있는 사람이 와서 겸임하도록 하고, 이예(吏隸)도 본래의 요미(料米)가 있는 사람을 옮겨 차임하도록 한다.
10. 회록(會錄). 1년 간의 급대의 나머지 숫자를 각도로 하여금 봉류(捧留)하였다가 매해 말에 나열해 적어 본청에 보고하도록 하여, 흉년에 대비할 밑천으로 삼는다.
○ 균세사(均稅使)를 팔도로 나누어 보내어 어염세(漁鹽稅)와 은루결(隱漏結)을 정리하도록 하였다.
○ 수어경청(守禦京廳)을 혁파하고, 광주 부윤(廣州府尹)을 유수 겸 수어사로 승진시키고 경력(經歷) 1원을 두도록 하였다.
○ 상이 문묘(文廟)에 나가 작헌례를 행하고, 명륜당에서 선비들을 시험보였다.
○ 상이 온양(溫陽)의 온천으로 행행하였는데,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행궁(行宮) 욕실(浴室)의 단청과 포진(鋪陳)은 바로 양조(兩朝)의 구물이니 다시 새롭게 만들지 말도록 명하였다. 선조(先朝) 정유년의 예에 의거하여 연로(輦路)에 지나게 되는 대신과 유현(儒賢)의 묘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충청도와 경기의 연로의 사(士)촹서(庶)로서 나이 80세 이상인 자는 아울러 가자하도록 하고, 온양의 옥에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고, 올해의 전세(田稅)를 줄여주고, 문사와 무사를 친림(親臨)하여 시취(試取)하였다. 어가가 돌아옴에 미쳐 다시 의금부와 형조의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도록 명하고, 쌀 700곡(斛)을 경기와 충청 두 도에 도신으로 하여금 다스리는 도의 백성들에게 고르게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 10월. 우레의 변고가 있어 10일 동안 감선(減膳)하였다.
27년(신미, 1751)
○ 1월. 초하룻날 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왕대비에게 진하하였는데, 대왕대비가 국모로 임어(臨御)한 지 50년이 되기 때문이었다.
○ 2월. 사복시의 연여(輦輿)들에 금박(金箔)으로 그리지 말도록 명하였다.
○ 대왕대비에게 존호 '정덕(貞德)'을 가상(加上)하였다. 상이 명정전에 나가 백관의 하례를 받고 대사면을 내렸다.
○ 북로에 기근이 들었다. 영남의 쌀과 콩 2만 섬 및 삼명일(三名日) 방물과 물선의 가미(價米)를 내려주고,
○ 양남 진보(鎭堡)의 절목을 정하도록 명하였다. 영남의 감포(甘浦)촹칠포(漆浦)촹축산포(丑山浦)촹영등포(永登浦)촹상주포(尙州浦)촹흥포(興浦)촹풍덕포(?德浦) 7진을 혁파하고, 호남의 위도(蝟島)촹법성포(法聖浦)촹가리포(加里浦)촹군산(群山) 등 진의 첨사 및 영남의 산산(蒜山)촹포항(浦項), 호남의 흑산도(黑山島) 등 진의 별장은 아울러 오랫동안 재임하는 자리에 속하게 하였다.
○ 고려 두문동(杜門洞) 72인의 충신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는데, 유수 서종급(徐宗伋)의 청을 따른 것이다.
○ 12월. 조령(鳥嶺)에 별장(別將)을 두고, 수성 절목(守城節目)을 의논해 정하였다.
28년(임신, 1752)
○ 5월. 대왕대비에게 존호 '수창(壽昌)', 상에게 존호 '장의홍륜 광인돈희(章義弘倫光仁敦禧)', 왕비에게 존호 '장신(莊愼)'을 가상(加上)하였는데, 상에게 신(神)을 감동시켜 상서를 불러들인 응험이 있어서였다.
○ 6월. 경기에 큰물이 났다. 물에 떠내려 간 호구가 수백에 이르러 깔려 죽은 자가 30여 명이었는데, 보호해 돌보아 안집시키도록 명하였다.
○ 9월. 원손(元孫)이 탄생하였다. 상이 매우 기뻐하며 이르기를,
"이제 나라의 근본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먼저 호칭을 원손(元孫)이라 정하고, 고묘(告廟)와 반교(頒敎)는 7일이 지난 뒤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원손궁의 장태사(藏胎使)를 종 2품으로 차하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29년(계유, 1753)
○ 1월. 초하룻날 상이 태묘에 나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다.
○ 이에 앞서 상이 궐문에 임하여 공시민(貢市民)들을 불러 고질적인 폐단에 대해 묻고 나서 박문수(朴文秀) 등에게 명하여 절목을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이르러 공시 당상(貢市堂上) 2인을 차출하여 구관(句管)하도록 하였는데, 비국에 공시 당상이 있게 된 것이 이때 시작된 것이다.
○ 균역청을 선혜청에 소속시키고, 두 낭청을 더 차출하여 균역청과 상진청(常賑廳) 두 관청을 겸하여 살피도록 명하였다.
○ 적전(?田)을 친경(親耕)하였다. 술을 내려주고 과거를 설행하고 상을 베풀어주는 것은 하지 않고, 오직 서민(庶民)과 기민(耆民)에게 노주례(勞酒禮)만 베풀었다. 이는 정묘년의 관예(觀刈) 규례에 의거하여 거행한 것이었다.
○ 선천(宣川) 동림산성(東林山城)을 수축하였다. 동림은 곧 고려 때의 옛 성지(城址)로서 관서(關西)의 직로(直路)에 자리한 관방(關防)이었다.
○ 5월. 크게 가물자, 상이 북교(北郊)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초헌(初獻)을 하고 나자 쏴하고 바람 소리가 나니, 장막을 거두도록 명하였다. 비가 내렸는데도 끝까지 서서 일을 마쳐 면불(冕?)이 다 젖었다. 3일이 지난 뒤 비가 충분하지 못하다 하여 다시 선농단(先農壇)에 친히 기우제를 지냈는데, 시원스럽게 내리게 된 뒤에야 중지하였다.
○ 6월. 숙빈 최씨(淑嬪崔氏)에게 시호 '화경(和敬)'을 추상(追上)하고, 소녕묘(昭寧廟)를 소녕원(昭寧園)으로, 육상묘(毓祥廟)를 육상궁(毓祥宮)으로 고쳤다. 수위관(守衛官), 수복(守僕), 수호군(守護軍)을 두고 제향을 한결같이 궁원(宮園)의 예대로 하도록 하였다. 이는 숙빈을 봉작한 지 60년이 되어서였다. 상이 예조 판서에게 이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이후 중국 조정에서는 모두 낳아준 부모를 추숭(追崇)하였는데, 아조(我朝)는 가법이 엄한 데다가 성고(聖考)의 하교까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일찍이 추숭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오직 이 한 가지 일은 여러 가지를 참작하여 알맞게 하려 한 것인데, 바깥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필시 아직까지 남은 일이 있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 7월. 상이 강민(江民)의 폐단을 정리하도록 명하였는데, 일을 맡은 자가 절목을 만들어 올린 가운데 '촘촘한 그물'이란 말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성탕(成湯)은 그물을 터주었고, 맹자(孟子)도, '촘촘한 그물을 웅덩이에 집어넣지 않는다.'고 하였다. 촘촘한 그물을 쳐서 강을 가로막는다면《예기》의 둥우리를 엎지 말라는 뜻에 어긋난다. 예전에《예기》월령편(月令篇)을 인하여 내국(內局)으로 하여금 청둥오리[靑頭鴨]를 받들어 들이지 말도록 하였으니, 이는 바로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할 부분이다. 엄히 금하도록 신칙하고, 이후로 이러한 그물을 만드는 자는 도배(徒配)에 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 8월. 장악원에 명하여 이원(梨園)을 칭하지 말도록 하였다. 상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원은 바로 당 나라 때의 바르지 못한 이름이다.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옛 강서원(講書院)에 능엄경(楞嚴經)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는 후손들을 가르칠 도리에 어긋나니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중흥사(重興寺)로 보내 보관하도록 하라."
하였다.
○ 11월. 상이 일찍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처음 춘궁(春宮)에 들어갈 때 풍원군(?原君) 조현명(趙顯命)이 설서(說書)였는데, 사약(司?)에게 말하기를, '송 영종(宋英宗)은 번저(藩邸)에서 올 때 행장은 단출하고 오직 책이 몇 상자였는데 지금 저하(邸下)는 행장이 어찌 이렇게 많은가.' 하였다. 나는 그 충심에 감동하여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 선혜청이 아뢰기를,
"홍부미(紅腐米)를 너무 오랫동안 쌓아두어 도리어 새 쌀을 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그 값을 싸게 매겨 경기 백성들에게 팔아 쓸모없는 것을 유용하게 만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다. 그러나 먹을 수 없는 것이라면 어찌 백성을 속여서야 되겠는가. 내가 백성들을 위하여 먼저 맛볼 것이니, 속히 홍부미를 가져오도록 하라."
하였다.
○ 12월. 숙종대왕에게 시호 '유모영운 홍인준덕(裕謨永運洪仁峻德)'을, 인경왕후(仁敬王后)에게 '선목(宣穆)'을, 인현왕후(仁顯王后)에게 '숙성(淑聖)'을, 대왕대비에게 존호 '영복(永福)'을 가상(加上)하였다. 진하(陳賀)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이는 내년이 인현왕후가 중전의 지위를 다시 바룬 해이자, 상이 주갑(周甲)을 맞이하는 때여서였다.
30년(갑술, 1754)
○ 1월. 상이 태묘(太廟)와 영희전(永禧殿)에 전알하고, 이어 영수각(靈壽閣)으로 가서 전배(展拜)하였다. 이는 성수(聖壽)가 주갑을 맞이하여 태조가 기사(耆社)에 들어간 해와 같은 때를 맞아서였다. 마침내 팔도와 삼
○ 호서의 유생 이희운(李熙運)이 글을 올려 소녕원(昭寧園)을 추숭하도록 청하였다. 상이 엄한 하교로 심하게 꾸짖고, 마침내 쫓아보내도록 명하였다.
○ 과거 시험장에 책을 끼고 들어오는 것을 금하도록 신칙하였다.
○ 3월. 홍문관에 명하여《치평요람(治平要覽)》을 널리 구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교서관에 명하여《치평요람》을 간행하도록 하였는데, 책이 모두 산일(散逸)되어 한 질(帙)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명한 것이다.
○ 6월. 상이 무신년의 공신(功臣)을 불러보고 사찬(賜饌)하였다. 마침내 노래를 지었는데, 이르기를,
훈신을 얻어 마음이 일치하니/ 得勳契合兮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도다/ 寧邦國
임금과 신하가 함께 늙으니/ 君臣俱老兮
오늘에 모이게 되었도다/ 會此日
거에 있을 때를 잊지 않으니/ 毋忘在?兮
앞으로 반석처럼 튼튼하리라/ 將磐石
하였다.
○ 7월. 북도의 영흥(永興)과 함흥(咸興) 두 고을의 전조(田租) 및 내년의 신역(身役)을 줄이도록 명하였다. 이는 성조(聖祖)가 도읍을 정한 해를 맞이하여 풍패(?沛)에 대해 감흥이 일어나서 명한 것이다.
○ 8월. 상이《위장필람(爲將必覽)》을 친히 짓고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간행하여 무신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상이 상신(相臣)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원손(元孫)이 놀이를 하면서 항상 궁료들과 강학(講學)하는 모습을 흉내낸다 한다. 자질을 하늘에서 타고나 바로 교육을 시키기에 좋으니, 경들이 서로 의논하여 보양관(輔養官)을 뽑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에 민우수(閔遇洙)와 남유용(南有容) 두 사람을 보양관으로 삼았다.
○ 10월. 상이 경연 신하에게 이르기를,
"예전 제도에, 금군(禁軍)으로 입직하는 자는 3일마다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참알(參謁)하는데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그 활과 화살과 군복을 점열(點閱)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선조(先朝) 임신년에 특별히 그 제도를 없애도록 하면서 이르기를, '중관으로 하여금 권력을 갖게 할까 두렵다.' 하였으니, 그 염려가 깊고도 원대한 것이었다. 신축년 환국(換局) 때 중관이 무예청(武藝廳)으로 하여금 각문을 호위하도록 하였던 것을 경들은 아는가?"
하니, 모두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어떤 사람이 금군의 참알법을 복구하자고 청하였는데, 내가 짐짓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참알을 없앤 뒤 군장(軍裝)이 소홀해졌으니, 느즈러진 상태를 긴장시킬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 이후로 매년 사중삭(四仲朔) 10일 이전의 다른 일이 없는 날에 병방 승지가 입직 금군의 군장을 점열하겠다고 곧장 아뢰고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로 나아가 병조에서 지급한 군장을 하나하나 점열한 뒤 돌아와 아뢰도록 하라."
하고, 이를 정식으로 삼도록 하였다.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이 완성되었다. 이에 앞서 세조가《병장도설》을 지었는데, 국초의 오위(五衛)의 제도만을 다루어 방진(方陣)촹원진(圓陣)촹곡진(曲陣)촹직진(直陣)촹예진(銳陣) 다섯 가지의 진법(陣法)을 펼쳐 나타내었다. 그러나 중엽 이후 5군문(五軍門)을 설치하게 됨에 미쳐서는 오로지《병학지남(兵學指南)》을 가지고 훈련을 하게 되었으니, 영사(營司)의 제도와 조련의 방법이 크게 달랐다. 이에《병장도설》을 간행하도록 명하긴 했어도 실제 쓰이는 바가 없었다. 이에 상이 5군문의 장신(將臣)들에게 명하여 한번 품지하여 오늘날의 영제(營制)에 근거하여《속병장도설》을 짓도록 한 것이었다. 이어 간행하여 5군문에 돌리도록 명하였다.
○ 병조 판서에게 명하여 5영(營)을 총괄하도록 하여 대중군(大中軍)으로 삼고 용호영(龍虎營)만을 거느리도
○ 사산 감역(四山監役)을 고쳐 참군(參軍)으로 삼았다. 이를 무신으로 차임하여 4군문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 11월. 공주촹옹주촹대군촹왕자를 친진(親盡)하여도 조천(?遷)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 임진(臨津)에 돈대(墩臺)를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어 지키도록 하였다. 이는 임진이 경기를 둘러싸고 있는 요지이기 때문이었다.
31년(을해, 1755)
○ 1월. 상이 상원일(上元日)이라 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대왕대비에게 진하하였다. 이는 내년에 대왕대비의 보령이 칠순(七旬)이 되기 때문이었다.
○ '태조대왕 탄생구리(太祖大王誕生舊里)'라는 8글자를 상이 직접 쓰고 또 음기(陰記)를 지어 영흥(永興) 흑석리(黑石里)에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처음에 영흥 유생 조동빈(趙東彬)이 선원전(璿源殿)이 바로 태조가 탄생한 옛터인 줄을 몰랐는데 건원릉(健元陵)의 지문(誌文) 가운데, "올해 10월 11일에 영흥 흑석리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과,《여지승람(輿地勝覽)》가운데, "부(府)의 동남쪽 13리에 있는 흑석리가 바로 태조가 탄생한 곳이다."라고 한 글을 보고 상서(上書)하여 비석을 세워 기념하도록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착오가 있는지의 여부를 막론하고 이미 흑석리라 불리는 마을이니 지금 비를 세워도 손상될 것이 없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비를 세우고 조동빈을 참봉직에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 '태조대왕 재상왕시 구궐유지(太祖大王在上王時舊闕遺址)'라고 직접 쓰고 양주(楊州) 풍양(?壤)에 비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광릉(光陵)에 행행하다가 풍양에서 주정(晝停)하면서 감동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 상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원손이 이제 겨우 네 살인데 체모와 기상이 서너 살의 아이들과는 크게 다르니, 하늘이 장차 우리나라에게 복을 내리려고 그런 것인 듯하다."
하고, 내시에게 명하여 원손을 데려오도록 하였는데, 절하고 무릎꿇고 시좌(侍坐)하는 것이 보통 사람과는 크게 달랐다. 상이 책을 읽고 글자를 써보도록 명하니, 원손이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글귀를 외우고 또 '부모(父母)' 두 글자를 크게 썼다. 상이 기뻐 이르기를,
"원손을 신하들에게 보이는 것은 또한 나라를 위하려는 뜻이다. 아무쪼록 잘 보도하도록 하라."
하였다.
○ 북방 백성의 무의전(無依錢) 수만 꿰미를 면제해 주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함경도 관찰사가 교제창(交濟倉)의 돈을 민간에 빚으로 나누어주고 이자를 취하여 용도에 쓰도록 하였다. 그런데 백성들이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납부하지 못하여, 독촉에 짓눌려 처자식을 팔거나 스스로 목매어 죽는 자까지 나와 끝내 징수할 만한 백성이 없게 되었다. 이에 이를 무의전이라 이름하였다. 이때 이르러 어사 서명응(徐命膺)이 돌아와 이 일을 아뢰니, 상이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한 문제(漢文帝)는, '무슨 낯으로 고묘(高廟)에 들어갈까.' 하였는데, 북방의 백성들이 이를 인하여 보존하지 못한다니 내가 무슨 낯으로 풍양(?壤)의 땅을 한 걸음이라도 밟을 수 있겠는가."
하고, 즉시 다 면제해 주도록 명하였다.
○ 3월. 윤지(尹志)촹이하징(李夏徵) 등을 복주(伏誅)하였는데, 윤지는 윤취상(尹就商)의 아들이다. 이에 앞서 을사년 국옥(鞫獄) 때 윤취상은 고문을 받다가 죽고 윤지는 나주(羅州)로 유배를 갔는데 밤낮으로 나라를 원망하며 그 아들 윤광철(尹光哲)로 하여금 나주의 이임(吏任)촹향임(鄕任)과 관계를 맺어 계(?)를 만들도록 하고, 대중을 모집해 불궤(不軌)를 도모하여 객관(客館)에 글을 내걸어 인심을 흔들었다. 이에 감사 조운규(趙雲逵)
○ 5월. 춘당대(春塘臺)에서 역적을 토벌한 것을 기념하는 정시(庭試)를 베풀었는데, 상이 친히 임하여 선비를 시험보였다. 시권(試券) 하나에 어지러운 말을 적어 올린 것이 있었고, 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상변서(上變書)가 있었는데 말이 매우 불측하여 시권의 뜻과 같았다. 마침내 심정연(沈鼎衍)을 찾아내 체포하여 국문하니, 심정연은 바로 무신년 역적 심성연(沈成衍)의 동생이었다. 흉서(凶書)는 그가 짓고 윤혜(尹惠)가 썼으며 김도성(金道成)과 신치운(申致雲)이 모의에 참여하였다고 공초하였는데, 윤혜는 바로 윤지의 친족 동생이고, 김도성은 곧 김일경의 종손(從孫)이고, 신치운은 곧 김일경과 박필몽(朴弼夢)이 길러낸 자였다. 차례대로 체포하여 국문하였는데, 윤혜의 문서 가운데 너무도 흉하고 어그러진 일이 적혀 있었고, 신치운은 감히 부도한 말을 멋대로 하였다. 국옥(鞫獄)에 참석한 신하들이 모두 분해하며, 궐문에 임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청하였다. 마침내 숭례문(崇禮門)의 누각에 나아가고 백관이 차례대로 서 있는 가운데 법전대로 사형에 처하고 처자식까지 주륙하였다. 그 나머지 역적들도 아울러 역률(逆律)을 실시하였다. 역적 윤혜의 죄상은 다른 역적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다시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였다. 또 대신(臺臣)들의 청을 인하여 국(局)을 열어 역변의 시말(始末)을 기록하였는데, 이름을《천의소감(闡義昭鑑)》이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황후를 시해한 곽광(?光)의 처 곽현(?顯)과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면 부인까지 주벌하는 것은 신중히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지금부터는 역적의 처에게 사형을 시행하지 말도록 하라. 잡직(雜職) 양반 이상은 비록 살인을 범하여 사형을 당하였다 하더라도 검시(檢屍)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6월. 인빈(仁嬪) 김씨(金氏)에게 시호 '경혜(敬惠)'를 추상(追上)하고, 사판(祠版)을 원묘(元廟)의 옛 저택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송현(松峴) 본궁(本宮)의 궁은 '저경궁(儲慶宮)' 묘(墓)는 '순강원(順康園)'이라 하였다.
○ 12월. 숙빈(淑嬪) 최씨(崔氏)에게 시호 '휘덕(徽德)'을 가상(加上)하였는데, 자전의 하교를 인한 것이었다.
32년(병자, 1756)
○ 1월. 대왕대비에게 존호 '융화(隆化)', 상에게 존호 '체천건극 성공신화(體天建極聖功神化)', 왕비에게 존호 '강선(康宣)'을 가상하였는데, 책보를 올리고 책보를 받았다.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또 감옥을 열어 죄수들을 석방하고, 조정 신하로서 나이 70세 이상인 자와 사(士)촹서(庶)로서 나이 80세 이상인 자를 아울러 가자하도록 하고 백성들의 8년 이상 묵은 예전 포흠을 면제하고 올해의 모든 영선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 상이 중관(中官)들을 매우 엄하게 거느려 조금이라도 범하는 것이 있으면 용서해주는 바가 없었다. 일찍이 경연 신하에게 이르기를,
"부자와 형제 사이를 얽어 이간하는 것은 반드시 환관과 내시들이다. 내가 즉위한 지 30년이 되는 동안 참소하는 말에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질정하여 말할 수 있다. 어제 협시(挾侍) 내관의 제복(祭服)과 패옥(佩玉)을 보았는데, 이 무리들이 어찌 조정 신하와 같이 한단 말인가."
○ 2월.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종사(從祀)하였다.
○ 승지를 보내어 기자묘(箕子廟)에 치제(致祭)하였다.
○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손자를 녹용하였다.
○ 사직에서 친히 기곡제(祈穀祭)를 올렸다. 상이 행사를 치르려 하는데 현기증이 일어났다. 악차(幄次)로 부축을 받고 들어와 인삼차를 들고 조금 나아졌다. 대신과 신하들이 섭행하기를 힘껏 청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내가 기곡제를 지내려 하는데 풍년이 들게 된다면 비록 이 몸으로 대신한다 하더라도 유감스러울 게 없다."
하고, 다시 제단으로 나아가 일을 끝마쳤다. 대왕대비에게 근심을 끼칠까 염려하여 경덕궁(慶德宮)으로 가서 조리를 하고 다음날 환궁하였다.
○ 상이 시학(視學)하였는데, 먼저 오성(五聖)에게 작헌례(酌獻禮)를 올리고 명륜당으로 물러났다.《대학》서문(序文)을 친히 읽고 강서관(講書官), 성균관 관원 및 유생에게 차례대로《시전(詩傳)》과《중용(中庸)》을 읽도록 명하였다. 권학(勸學)의 윤음을 내려 제생들에게 선유하였다. 다시 포은(圃隱)이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시조라 하여, 승지를 보내어 그의 묘에 치제하도록 하였다.
○ 4월. 전라 감사가 장계를 올려 대동(大同)을 정퇴(停退)해 주기를 청하였다. 묘당에서 정공(正供)이라는 이유로 어렵게 여기니,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열성(列聖)의 어제(御製) 가운데 숙묘(肅廟)가 부로(父老)를 위로하여 유시한 윤음을 가져다 읽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날의 성대한 덕이 이와 같았는데, 내 어찌 우러러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청한 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 석담 서원(石潭書院) 및 유거(幽居)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도록 명하였는데,《성학집요(聖學輯要)》를 인하여 감동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 7월. 상이 대왕대비의 칠순을 맞이하여 기사(耆社)의 신하들을 불러 선찬(宣饌)하여 경사를 함께하였다. 대왕대비도 상이 육순을 맞이하였다 하여 세 가지 찬을 마련하여 내려주었다. 신하들이 취하여 돌아가고 나자 상이 대왕대비에게 가서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어 대왕대비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는데, 물러나게 되니 하늘이 벌써 밝아 있었다. 법복(法服)을 벗지 않고 곧장 정당(正堂)으로 가서 유신들을 불러《중용》을 강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 기사(耆社)의 신하 및 종친촹문무 경재로서 나이 60세 이상인 자들을 거느리고 대왕대비에게 하례를 올렸다. 이윽고 또 사(士)촹서(庶)와 기쁨을 함께 하기위하여 기로과(耆老科)를 설행하여 유생과 무인으로서 나이 60세 이상인 자들을 시험보였는데, 규례대로 탁호(?號)와 창명(唱名)을 하였다.
○ 8월. 하교하기를,
"대군과 왕자에게 모두 사부(師傅)가 있고 내시와 동몽에게도 모두 교관(敎官)이 있는데 왕손만 가르쳐 길러주는 관원이 없다. 관직을 붙여 학교에 나가기 전에 동몽 교관의 예에 의거하여 그 스승을 두어 왕손 교부(王孫敎傅)라 하고 관청을 강학청(講學廳)이라 부르도록 하라."
하였다.
○ 11월. 각도의 유민(流民)으로서 서울까지 온 사람들을 선혜청에서 죽을 쑤어 진휼하도록 명하였다.
33년(정축, 1757)
○ 1월. 팔도와 삼도(三都)에 윤음을 내려, 농사의 권면을 부지런히 하고 묵은 밭을 개간하고 진제(賑濟)를 잘 하라는 세 가지 조목으로 신칙하였다.
○ 사(士)촹서(庶)로서 혼인 시기를 놓친 자들을 서울과 지방에서 돌보아 도와주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만물이 봄을 맞이하여 모두 결실하게 될 것인데, 아, 혼기를 놓친 백성들이 초목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나의 간절한 뜻을 깊이 유념하여 실효가 나타나도록 하라."
○ 이때 팔도에 흉년이 들었는데, 관동의 회양(淮陽)과 금성(金城)이 심하여 유민들이 대부분 서울로 들어왔다. 상이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돌아가고자 하는 자들을 불러 보고 선혜청으로 하여금 옷과 식량을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구윤명(具允明)을 관동 안집사(關東安集使)로 삼아 그로 하여금 안집시키도록 하였다. 회양과 금성 및 강릉, 삼척 등 고을의 공세(貢稅)도 면제해주고, 또 호서의 재앙을 입은 고을에 대해 대동(大同)의 반을 정지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 2월. 계복(啓覆)하도록 명하였다. 죄인 복도함(卜道咸)에 대해 사형을 감하여 정배하도록 하였다. 복도함은 복도의 백성으로서 처가 계모에게 순종하지 않는다고 구타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하고는 스스로 자살한 것이라 둘러댔다. 상이 그 죄안을 살펴보고서 하교하기를,
"아들이 계모를 위하여 그 처를 때리고 어미가 아들을 위하여 그 흔적을 없앴는데 불효한 며느리를 위하여 그 지아비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어찌 왕정(王政)이라 하겠는가, 특별히 등급을 줄여주도록 하라."
하였다.
○ 왕비 서씨(徐氏)가 승하하였다. 상이 상례(喪禮)를 검약하게 하여 상설(象設)은 갑신년에 정한 규례대로 하고 각도의 군정(軍丁)도 애써 줄이도록 명하였다. 인산(因山) 이전에는 사가(私家)의 폄장(?葬)을 금하지 말고 공제(公除) 전후에는 사가의 상담(祥?)을 금하지 말도록 하였다.
○ 3월. 두 진청(賑廳)을 설치하여 기민(饑民) 2만여 명을 나누어 진휼하도록 명하였다.
○ 대왕대비 김씨(金氏)가 승하하였다. 처음에 대비가 편찮아 한 달이 지나도록 더욱 위독해지자 상이 몸소 약을 올리고 밤에도 관대를 풀지 않은 채 지냈는데, 혹 난간에 기대어 잠깐 잠이 들었다가도 태의(太醫)가 배꼽에 뜸을 떠야 한다고 말하면 상이 먼저 자신의 손에 뜸을 떠 보았다. 조금 나아지자 매우 기뻐 칭경(稱慶)하고 각도의 묵은 포흠을 면제해 주고 친히 죄수들을 너그러이 처결하여 사죄(死罪) 이하를 용서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비가 다시 위독해지자 상이 관원을 보내어 산천에 기도하도록 하고 즉시 뜰에 내려와 엎드려 울부짖으며 하늘에 기도하여 자신이 대신하기를 빌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그 슬픔에 감동하였다. 대비가 승하하자 상이 그지없이 사모하여 그 당을 영모당(永慕堂)이라 이름하였다.
○ 5월. 가뭄이 들었다. 상이 자신을 꾸짖어 감선(減膳)하고, 장(杖)을 지나치게 때리는 것을 금하도록 신칙하였다. 또 관원을 보내어 산천에 기우제를 지내고 나니 이내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 7월. 인원왕후(仁元王后)를 명릉(明陵)에 장사지내었다. 크고 작은 일 할 것 없이 상이 몸소 점검하여 반드시 정성스럽고 미덥게 하도록 하였다. 왕후의 뜻을 따라 능전(陵殿)의 비용을 경자년의 3분의 1로 줄이고, 경기의 결전(結錢) 및 북도의 전조(田租)도 3분의 1을 면제해 주고, 7도와 삼도(三都)의 묵은 포흠도 면제해 주도록 하였다.
○ 상이 엄려(嚴廬)에 있으면서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원손이 군주(郡主)를 거느리고 짚자리를 가지고 와서 빈전(殯殿)에 망곡(望哭)하였는데, 이 마음을 확충한다면 우리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다. 이로써 스스로 위안을 삼는 바이다."
하였다.
○ 8월. 전조(銓曹)에 명하여 고 재상 노수신(盧守愼)의 후손을 녹용하도록 하였는데,《숙흥야매잠주해(夙興夜寐箴註解)》를 강하다가 감동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 9월. 우레의 변이가 있었다. 대신과 정원이 차자를 올려 권면하니, 상이 가상이 여겨 받아들였다. 이어 12가지 일로 자책하였는데, 이르기를,
"나라의 형세가 점차 못해지고, 기강이 날로 실추되고, 백성들이 거꾸로 매달린 듯하고, 이목(耳目)의 관원들이 머뭇거리기만 하고, 정당(政堂)에 먼지가 쌓이고, 서각(書閣)에 책이 안 보이고, 빈대(賓對) 때마다 정지하도록 여쭙는 일이 많고, 승정원이 공사(公事)를 아뢰지 않고, 경박하고 불성실함이 날로 심해지고, 사치의 기풍이 날로 치성하고, 민간의 금주(禁酒)가 효과를 나타내지 않고, 조정의 인사(人事)가 날로 승하고 있다. 그 이유를 궁구해 보면 곧 나 한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 10월. 당초 인원왕후의 인산(因山)에 제주(濟州) 백성 40인이 바다를 건너 서울로 올라와 부역하였다. 상이 불러보고 위유하였는데, 한 사람이 표고(?古)를 바쳤다. 상이 연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일찍이 권민가(勸民歌)를 보니, '미나리를 바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도 이러한 뜻입니다."
하니, 상이 마침내 빈전에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때 이르러 제주 목사가 부임하기 위하여 하직 인사를 하니, 상이 불러보고 이르기를,
"사람이라면 어버이의 상례에 은혜를 입은 사람에 대해 감사하면서 보답하기를 생각해야 한다. 지금 제주의 백성들이 능역(陵役)에 달려왔으니, 그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대가 만약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하루를 굶주리게 하는 일이 있다면 이는 곧 나로 하여금 하루 동안 굶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때 제주도에 거듭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상이 하교하여 언급한 것이다. 이어 제주의 삼명일(三名日)과 가을 겨울의 방물을 정지하도록 명하고, 진휼 밑천 6000석을 주고 어사를 보내어 감독하여 운반하도록 하였다.
○ 호피(虎皮)를 원손의 사부 남유용(南有容)에게 내려주었다. 상이 원손을 불러 대답하는 말을 어떻게 하는지 시험해 보려고 남유용을 가리키며 누구냐고 물으니, 남유용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상이 기뻐 이르기를,
"네가 여섯 살에 이미 임금 앞에서는 신하를 이름으로 지칭하는 예를 아는구나."
하고, 이어《동몽선습(童蒙先習)》을 외우도록 하였는데, 한 글자도 잘못 외우는 것이 없었다. 상이 이르기를,
"읽는 소리가 쨍쨍하여 금석(金石)과 같다."
하고, 남유용에게 이르기를,
"원손의 덕성이 점차 자라나 진보하고 있으니, 이는 종묘 사직의 다행이다. 이는 경의 덕분이다."
하고, 마침내 호피를 내려주며 이르기를,
"지금 내려주는 것은 경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종묘 사직을 위하는 것이다."
하고, 이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 전조(銓曹)를 신칙하여, 적체되어 있는 인물들을 소통시켜 등용하도록 하였다.
○ 종신(宗臣)은 역적으로 주벌을 당한 자의 자손과 지손(支孫)이라 하여도 몰수하여 노비로 삼지 말도록 명하였다.
○ 관원을 보내어 성삼문(成三問) 등 여섯 신하의 사당에 치제하였는데, 구갑(舊甲)이 거듭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 12월. 인종(仁宗)의 시책(諡冊)을 개수하여 인종실(仁宗室)에 봉안하였다. 시책은 책보(冊寶)와 함께 반드시 태묘(太廟)의 당실(當室) 옆에 봉안하도록 되어 있는데, 인종의 시책은 유실되어 전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 이르러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우주(虞主)를 태묘의 뜰에 묻으려고 땅을 파다가 옥찰(玉札) 한 조각을 얻어 자세히 조사해 보니, 바로 인종의 시책이었다. 상이 매우 기이하게 여겨 친히 전문(全文)을 베껴쓰고, 옥에 새겨 합해서 완전한 편(篇)으로 만들어 인종실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 상이 덕종실(德宗室)의 축문(祝文)에도 '효증손사왕(孝曾孫嗣王)'이라 칭해야 한다고 여겨 대신들에게 물어 의논하니, 모두 그렇게 하도록 아뢰었다. 마침내 축문의 규식을 바로잡도록 명하였다.
○ 당하관(堂下官)의 홍포(紅袍)는 한결같이《경국대전》을 따라 청록(靑綠)으로 바꾸고, 융복(戎服)은 그대로《속대전》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34년(무인, 1758)
○ 1월. 면포(綿布)에 푸른색 물을 들여 태묘의 문장(門帳)을 치도록 명하였다. 이때 경연 신하가 청포(靑布)는 연경(燕京)에서 사와야 하기 때문에 전민(廛民)들의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다고 아뢰니, 상이 면
"이 또한 사치를 금하는 한 가지 일이 될 것이다."
하였다.
○ 2월. 정성왕후의 상담(祥?)이 끝나려 함에 예로 볼 때는 그대로 휘녕전(徽寧殿)에 봉안하여 사시(四時) 및 납일(臘日)의 향사(享祀)를 한결같이 종묘에 제향을 올릴 때의 의식과 같이 해야 할 것이었으나, 사용할 음악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대신들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상이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을축년 영소전 헌의(永昭殿獻議)를 가져다 열람하고 마침내 선정의 의논대로 음악을 쓰지 말도록 명하였다. 그 의논에,
"《시경》의 아송(雅頌)에 후비(后妃)를 위하여 음악을 만든다는 글은 없고 오직 옹송(?頌)에 문모(文母)의 음악에 관한 글이 있는데 열고(烈考)에 통틀어 보면 문모를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닙니다.《주례(周禮)》에, 노래하고 춤추어 선비(先?)에게 바친다는 글이 있는데, 정현(鄭玄)이, '선비는 강원(姜嫄)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자와 주자는 모두 정현의 설을 그르게 여겼습니다. 대개 종묘의 음악은 모두 훌륭한 덕의 형용을 아름답게 꾸며 그 성공을 신명(神明)에게 고하는 것이니, 후비에게는 마땅하지 않은 듯합니다."
하였다.
○ 호조에 명하여 세종조 때 만든 자[尺]로 유곡(鍮斛)을 만들어 서울과 지방에 나누어주도록 명하였다.
○ 3월, 상이 관상감에 하교하기를,
"지금 실록을 상고하건대, 광묘(光廟)와 여러 대군 및 왕자의 태봉(胎封)이 함께 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으니, 이 또한 본받아야 할 조종의 제도이다. 지금부터는 세대의 멀고 가까움에 구애받지 말고 태를 한 산에 보관하되, 서로의 거리가 두세 걸음을 넘지 못하도록 하고 언덕이 다 메워질 때까지를 한도로 삼으라. 그리고 적자(嫡子)촹중자(衆子)촹원손(元孫)촹군주(郡主)도 이와 같이 하도록 하라."
하였다.
○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및 고 상신 이덕형(李德馨)에게 치제하고 그 사판(祠版)을 모두 조천(?遷)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 5월. 해서(海西)에 요녀(妖女)가 있었는데 스스로 생불(生佛)이라 칭하였다. 시골 사람들이 휩쓸려 받들어 믿었는데, 요녀가 신사(神祠)를 철거하게 함에 고을 백성들이 급급하게 철거하였다. 양서(兩西)의 무녀(巫女)들이 영도(靈刀)와 신령(神鈴)을 저버리고 모두 요녀의 명을 따르게 되었다. 상이 이를 듣고 하교하기를,
"신사는 시골 백성들이 지나치게 믿는 바이고 무녀는 내가 금지하기 어려운 바인데, 요녀의 한 마디 말에 도내의 백성들이 휩쓸렸다 하니 예사로운 요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바로 옛날의 징이(徵貳)와 징칙(徵則)이자 근세의 용녀부인(龍女夫人)이다."
하고, 마침내 어사 이경옥(李敬玉)을 보내어 결안(結案)을 받들어 효수하고 온 도 안에 그 머리를 돌려보여 세상을 미혹하게 한 죄를 바로잡도록 하였다.
○ 6월, 판중추부사 이종성(李宗城)이 자신의 이름이 인조(仁祖)를 범하였다고 피혐하여 상소해서 이름을 고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상이 허락하지 않고 마침내 휘설(諱說)을 지어내렸는데, 그 대략에,
"한유(韓愈)의 휘변(諱辯)의 대의는 실로 말세에 피혐하는 길이 크게 넓어져 이름을 휘혐하는 자가 많아짐에 항상 개연하게 여긴 것이었다. 동진(東晉) 때 부자(父子)의 이름이 형제와 같았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국초(國初)의 습속도 이와 같은 경우가 많았다. 고 판서 이성룡(李聖龍)은 처음 이름이 운룡(雲龍)이었고 고 참의 이양신(李亮臣)은 처음 이름이 종신(宗臣)이었는데, 두 사람이 이름을 바꾼 것에 대해서 나는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이후로는 이러한 이유로 휘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10월. 제문을 친히 짓고 대신을 보내어 장릉(莊陵)에 제사를 올렸다. 도신에게 명하여 육신(六臣)의 창절 서원(彰節書院)을 수리 보수하도록 하고, 모두 정경(正卿)을 증직하고 시호를 내렸다. 증 참의 엄흥도(嚴興道)도 아경(亞卿)을 증직하고 똑같이 치제하도록 하였다. 이어 전조(銓曹)에 명하여 육신 및 엄흥도의 후손을 녹용하도록 하고, 김종서(金宗瑞)촹황보인(皇甫仁)촹정분(鄭?)도 아울러 시호를 내려주도록 하였다. 이상은 단종
○ 영종 첨사(永宗僉使)를 독진(獨鎭)으로 삼되, 그대로 방어사(防禦使)를 겸하도록 하였다.
○ 상이 기사(耆社)의 신하들을 불렀는데, 일어나서 맞이하였다. 이어 함께 강독하고 토론하였는데, 이름하여 '기로강(耆老講)'이라 하였다.
○ 11월. 인열왕후(仁烈王后)가 탄생한 터에 비(碑)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그 터는 원주부(原州府) 동쪽에 있다. 당초 선묘(宣廟) 계사년에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이 원주 목사로 제수되었으나 병란을 겪고 난 뒤 부사(府舍)가 다 불에 타버려 촌가(村家)에 붙여 지내고 있었는데, 다음해인 갑오년에 성후(聖后)가 탄생하였다. 이 일이 모두 읍지(邑誌) 및 서평기문(西平記文)에 실려 있었는데, 이때 이르러 상이 듣고서 '원주 인열왕후 탄생구기 비(原州仁烈王后誕生舊基碑)' 11글자를 친히 쓰고, 도신에게 명하여 새겨넣어 비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35년(기묘, 1759)
○ 3월. 관서(關西)의 도신에게 명하여, 채권(債券)을 모두 태워버리고 강계(江界)에서 사들이는 삼(蔘)의 가격을 더해주도록 하였다.
○ 4월. 관동(關東)에서 바치는 삼공(蔘貢)의 반을 줄여주도록 명하였다. 서울에서 작공(作貢)하고부터 관동의 삼공이 백성들의 고질적인 폐단이 된 지 오래되었다. 상이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는 자 가운데 관동의 백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보고를 듣고 하교하기를,
"관동의 삼공은 춘등(春等)과 추등(秋等) 둘로 나누어 그 반은 서울에서 작공하고 본도에서 상납해야 할 것도 쌀로 가격을 더해주어 관동 백성들의 거꾸로 매달린 듯한 위급함을 풀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절목을 정하여 반포해 내렸다.
○ 상이 검암발참기(黔巖撥站記)를 사관(史官)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앞서 신축년, 상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8월 15일이 숙묘의 탄신일이라 명릉(明陵)을 배알하고서 고령(高靈)의 농사(農舍)에 머물러 있었는데, 5일 만에 대궐로 돌아가 안부를 살피기 위하여 저물녘에 출발하여 덕수천(德水川)에 이르렀을 때였다. 밤이 깊은데다가 불도 없어 검암 발참에서 쉬고 있었는데, 얼마 후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앞의 개울을 건너고 있었다. 시종하던 자가 상에게, 도둑이라고 고하자, 상이 발참장(撥站將) 이성신(李聖臣)에게 이르기를,
"저 사람은 흉년이 들어 춥고 배고파 할 수 없이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농사짓는 사람이 소가 없으면 어떻게 경작할 수 있겠는가. 발참장이 비록 낮은 벼슬이긴 해도 또한 직책이다. 그대가 잘 처리하도록 하여, 소는 주인에게 돌려주고 도둑은 관가에 고하지 말라."
하자, 이성신이 곧 상의 말대로 하였다. 새벽녘에 상이 서울의 잠저로 돌아오니, 학가(鶴駕)가 잠저의 문 밖에 위의를 갖추고 있었다. 이미 저위(儲位)로 세워진 것이었다. 이성신이 마침내 이 일을 기록하여 참(站)의 벽에 붙였는데, 병자년 봄에 상이 명릉으로 행행하면서 검암 발참의 건물에서 주정(晝停)하다가 벽에 적혀 있는 것을 보고는 베껴쓰도록 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이때 이르러 상이 경연 신하에게 그 일의 전말을 이야기하고, 사관에게 알려 넘겨주었던 것이다.
○ 5월. 인원왕후(仁元王后)를 태묘의 숙종실(肅宗室)에 부묘(?廟)하였다. 처음에 부묘도감을 설치하였는데, 상이 왕후의 뜻을 깊이 유념하여 연여(輦輿)와 의장(儀仗)은 예전 것을 그대로 고치지 않고 쓰고, 안에서 내린 은자(銀子) 및 선미(膳米) 100석을 도감에 넘겨주어 경상 비용에 보태도록 하였다. 예가 끝나자, 정전(正殿)에 나아가 사면령을 내렸다. 헌가(軒架)는 벌여만 놓고 연주하지 말도록 하고 이르기를,
"예전에 부자(夫子)는 자장(子張)과 자하(子夏)에 대해 모두 군자(君子)로 인정하였는데, 아조(我朝)의 결채(結綵)와 가요(歌謠)는 성조(聖祖)께서 없애고 앞뒤의 고취(鼓吹)는 성고(聖考)께서 벌여만 놓고 연주하지 말도록 하였으니, 감히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이 또한 예(禮)일 뿐이다."
하였다.
○ 6월. 초하룻날 상이 정전에 나아가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는데, 상이 봉작(封爵)된 주갑(周甲)을 맞이하였기 때문이었다.
○ 김씨(金氏)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가례(嘉禮)를 행하려 할 때, 상이 모든 일을 힘써 검약하게 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동뢰연(同牢宴) 이외의 대탁(大卓) 및 연상(宴床)의 대소선(大小膳)은 모두 준화(樽花)와 함께 없애도록 하라. 교명(敎命)과 책보(冊寶)의 상(床)은 새로 만들지 말고 수리 보수할 때도 금화(金花)로 장식하지 말며, 옥대(玉帶)는 안에서 내린 것으로 쓰고, 패옥규(佩玉圭)는 호조와 상의원에 있는 것으로 쓰고 연여(輦輿)도 예전 것을 그대로 쓰고, 화룡촉(?龍燭)은 홍촉(紅燭)으로 대신하도록 하라."
하였다.
○ 윤6월. 서울과 지방에서 시기가 지나도록 혼인하지 못한 자에 대해 관가에서 도와주었다.
○ 하교하기를,
"물을 뿌리고 먼지를 쓸며 응대(應對)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것의 근본이다. 내가 비록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긴 하였지만 지금까지도 이어 쓰는 것이 바로 한 부의《소학》이다. 지난번 경연 신하가 아뢴 바를 들으니, 외방에서는 오히려 이 책을 강하고 있는데 서울에서는 근래 다시 해이해졌다고 한다. 알고도 신칙하지 않는다면 어찌 군사(君師)의 도리라 하겠는가. 신칙해 장려하게 하여 실제적인 효과가 나타나도록 하라."
하였다.
○ 원손을 책봉하여 왕세손(王世孫)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원손으로 칭호를 정한 뒤 상이 동조에 여쭈고 진전(眞殿)에 고하여 이미 세손으로 봉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마침내 책례(冊禮)를 거행한 것이다. 16글자를 써서 내려주고, 하교하기를,
"예전에 주 무왕(周武王)은 면복(冕服)으로 사상보(師尙父)에게 단서(丹書)를 받았는데, 지금 나의 이 유시도 단서를 내려준 것과 같은 뜻이다."
하였다. 예를 행하게 되자, 왔다갔다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동작이 자연스럽고 절도에 맞았다. 상이 매우 기뻐하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노성(老成)한 사람이라 해도 이와 같지 못할 것이다. 바깥 사람들이 필시 내가 가르쳐 이와 같다고 할 것이나 내 실로 가르친 적이 없었다. 이는 빈궁(嬪宮)이 잘 가르쳐 인도한 소치이다."
하였다. 다음날 또 상신(相臣)에게 이르기를,
"나는 세손으로 하여금 법강(法講) 및 빈대(賓對)에 시좌(侍坐)하도록 하여 임금 노릇 하는 것의 어려움을 알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 7월. 상이 문묘(文廟)에 작헌례를 올렸다. 하교하기를,
"한 고조(漢高祖)가 400년 왕업의 기반을 닦은 것은 그 근본이 태뢰(太牢)로 공자(孔子)를 제사한 데 있었다."
하고, 마침내 사성위(四聖位)에도 아울러 친히 작헌례를 올리고, 계성사(啓聖祠)에서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 승지에게 명하여《서전》주서(周書)의 무일편(無逸篇)을 베껴 써서 병풍을 만들어 올리도록 하였다.
○ 9월. 하교하기를,
"과장(科場)의 폐단은 선비들의 잘못이 아니다. 시관(試官)이 공정하게 선비를 뽑고 부형(父兄)이 자제(子弟)의 부정을 금한다면 어찌 이러한 폐단이 일어나겠는가. 이후로는 명경과(明經科) 및 알성시(謁聖試)와 관무재(觀武才) 이외의 증광 초시 뒤에는 임강(臨講)을 제하고 삼경(三經) 가운데 스스로 원하는 책 하나를 해석을 제하고 배강(背講)하도록 하여 조(粗) 이상을 취하며, 중시 대거 정시(重試對擧庭試)도 이 규례에 의거하도록 하라. 알성시에서 선비를 뽑는 것은 5인을 넘지 말고, 관무재 정시와 중시 대거 정시도 모두 3인을 넘지 말도
하였다. 또 명하기를,
"소과 초시 뒤에는 조흘강(照訖講)을 제하고《소학》으로 해석을 제하고 배강하여 조(粗) 이상을 취해 한결같이 대과(大科)의 규례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 남한 유수(南漢留守)를 혁파하여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고 수어사(守禦使)를 경청(京廳)에 두어 예전처럼 남한 유영(南漢留營)을 통괄하도록 명하였다.
○ 10월. 하교하기를,
"작상(爵賞)은 임금이 세상을 다스리는 큰 권한이니, 바로잡지 않으면 금관자(金貫子)와 옥관자(玉貫子)를 붙인 사람이 나라 안에 가득하게 될 것이다. 명관(名官)이 군기(軍器)와 관사(官舍)를 수리한 내용으로 장문(狀聞)하여 자급이 오르고, 명무(名武)가 잡기(雜技) 및 호랑이를 잡은 것으로 자급이 오르니, 명기(名器)가 무겁지 못함이 이보다 더 지나칠 수 없다. 이후로는 이와 같은 자는 청직(淸職)을 허락하지 말고 납속(納粟)하여 가선(嘉善)의 품계를 받은 자도 실직(實職)을 허락하지 말라. 그리하여 관방(官方)을 중히 여기고 지나친 작상을 막으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12월. 하교하기를,
"옛날에는 나례(儺禮)촹춘번(春幡)촹애용(艾俑) 등이 있었는데, 예전에 아울러 없애도록 명하였다. 세말(歲末)에 행하는 정료(庭燎)도 내가 없애도록 명하였는데, 교년(交年)과 경신(庚申)은 그 근본을 알 수 없어서 어제 비로소 상세히 보도록 명하였더니 모두 떳떳지 못한 것으로 부엌귀신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에 가까웠다. 아, 항상 경계하여 두려워한다면 신에게 기도할 것이 뭐 있겠는가. 문왕(文王)은 날이 기울도록 쉴 겨를이 없었고 주공(周公)은 앉은 채로 아침을 기다렸으니, 이러한 뜻으로 잠을 자지 않는다면 어찌 이날뿐이겠는가. 나는 360일이 모두 경신일과 같을 것이다. 이후로는 경신일에 촛불을 올리는 것과 교년일에 거행하는 것은 한결같이 그만두도록 하여, 떳떳한 도리를 지키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65권 영조조 9
36년(경진, 1760)
○ 1월. 팔도와 양도(兩都)에 윤음을 내려 이르기를,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나의 마음은 오로지 전야(田野)에 쏠려 있으니, 이 마음을 깊이 유념하여 실제적인 효과가 나타나도록 하라. 도신은 한도의 전준(田畯)이고 수령은 한 고을의 전준이니, 내 그 근만(勤慢)을 염찰(廉察)할 것이다. 뜻을 두고 백성들을 권면하여 간절한 하교를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는데, 왕세손이 입시하였다. 상이 왕세손에게 명하여《소학》서제(書題)를 강하도록 하였는데, 빼어난 소리가 자연 절주(節奏)에 들어맞아 경연에 참석해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귀기울여 들었다. 상이 매우 기뻐하며, 물뿌리고 먼지를 쓰는 것의 뜻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쓸기에 앞서 물을 뿌리는 것은 먼지가 어른을 더럽힐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지가 어른을 더럽히면 어떠한가?"
"공경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칭찬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물뿌리고 먼지를 쓰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어른을 위하여 힘쓰는 것을 익혀 멋대로 행동할 염려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제왕가(帝王家)에서는 더욱 방종하기 쉬우니, 두려운 마음으로 경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 2월. 개천(開川)을 파서 쳐냈다. 개천은 백악(白岳)촹인왕(仁王)촹목멱(木覓)의 물과 합하여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동쪽으로 오간수문(五間水門)으로 나가고 또 동쪽으로 영제교(永濟橋)가 되고 동남쪽으로 중량천(中梁川)과 만나 한강(漢江)으로 들어온다.《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이른바 개천(開川)이 이것이다. 세종 때, 이현로(李賢老)가, 오물을 던져넣지 못하도록 하여 명당(明堂)의 물을 맑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집현전 교리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여 실행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반대하였다. 세종이 어효첨의 말을 옳게 여겨 이현로의 말을 채용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300여 년이 흐르도록 다시는 개천을 파서 쳐내는 문제에 대해 염려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에 개천이 점점 막혀 거의 제방의 높이와 맞먹게 되니, 장마 때마다 범람할까 근심하게 되었다. 상이 은(殷) 나라의 반경(盤庚)이 경(耿)에서 박(?)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설득하였던 고사(故事)를 써서 여러 차례 궐문에 임하여 대중에게 물으니, 모두들 파서 쳐내는 것이 온당하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비록 백성을 위하는 것이긴 해도 어찌 백성들의 힘을 번거롭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내 돈 수만 꿰미를 덜어내어 정부(丁夫)를 고용하여 파서 쳐냈다. 재촉하지 말도록 경계시켰는데도 한 달이 채 못 되어 일을 끝마쳤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여 병조 판서와 한성부 판윤, 삼군문의 대장으로 준천사 당상을 겸하도록 하고 도청 낭청 각 1인을 두었다. 매년마다 개천을 파서 쳐내어 상례(常例)로 삼도록 하였다.
○ 6월.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형조의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고, 어사를 보내어 경기의 옥안(獄案)을 심리하도록 하였다. 윤음을 내려 열 가지 허물로 자책하고, 감선(減膳)촹철악(撤樂)을 하고, 정전(正殿)에 기거하지 않았다. 남단(南壇)에 친히 기도하고, 우단(雩壇)에까지 기우제를 지냈는데, 비가 내리게 되어서야 중지하였다.
○ 10월. 상이 홍문관에 친히 나아가《강목(綱目)》을 강하였다. 다음날 유신(儒臣)들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니, 상이 '서궐임서 남영사롱(西闕臨署 南楹紗籠)' 여덟 글자를 써서 내렸다. 하교하기를,
"내 이제 노쇠하였다. 유신들은 나의 어릴 적 벗이었다. 오늘의 이 거조는 하루에 세 번씩 경연을 열어 노고하였던 것을 보답하려는 뜻이다."
하고, 마침내 찬(饌)을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 이 해에 기근이 들었다. 상이 흥화문(興化門)에 친히 임하여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는 자 100여 명을 불러 죽을 쑤어주었는데, 그 죽을 한 그릇 가져오라고 명하여 친히 맛보았다. 이어 하교하여 팔도와 양도(兩都)를 신칙하였다.
○ 12월. 상이 대사성에게 명하여 제생(諸生)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도록 하였다. 또 입직(入直)한 유신과 체직(替直)한 유신도 아울러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군사(君師)의 책임에 대해 내 감히 그렇게 말하지만 늙은 나이에 기어코 한 달에 세 번 《중용》을 강하여도 실제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경들 및 제생들과 함께 묻고 논란하여 얕은 학문에 보탬이 되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에 천인(天人) 성명(性命)부터 존양(存養) 성찰(省察), 출유(出幽) 입미(入微)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진지하게 토론하였다. 강이 끝나자 경연 신하들이 같은 목소리로 청하기를,
"인재를 만드는 데에는 강설(講說)이 가장 중대하니, 공자(孔子)나 주돈이(周敦?), 정호(程顥), 정이(程?)에게서 살펴보면 증험할 수 있습니다. 이번의 거조는 본보기로 보고 감화되는 바가 실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다. 대사성이 국자생(國子生)과 더불어 한 달에 세 번씩 명륜당에 모여 강하되, 장구(章句)나 짓지 말고 오로지 이치와 의리를 중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37년(신사, 1761)
○ 1월. 상이 창덕궁(昌德宮)으로 행행하였는데, 왕세손으로 하여금 수가(隨駕)하도록 하였다. 운종가(雲從街)에 이르렀을 때 연(輦)을 멈추어 임금의 행차를 보러나온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세손을 보도록 하였다. 이내 선원전(璿源殿)에 전배(展拜)하고, 휘녕전(徽寧殿)에 들렀다가 환궁하였다. 건명문(建明門) 밖에 이르렀을 때 상이 연을 돌리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내 세손이 교(轎)를 탄 모습을 보고자 한다. 사관은 이러한 뜻을 세손에게 가서 전하여 교를 타도록 하라."
하였는데, 사관이 돌아와 세손의 말로 아뢰기를,
"어련(御輦)이 마주 보이니 감히 교를 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방(義方)으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하고, 즉시 연을 돌렸다. 숭현문(崇賢門) 밖에 이르러 연에서 내려 세손에게 명하여 입시하도록 하였다. 상이 묻기를,
"오늘 임금의 행차를 보러나온 자가 많았다. 그들이 너에게 바라는 것이 무슨 일이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착해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착해질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옛사람의 책을 읽고 옛사람의 일을 행한다면 바로 착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네가 이미《소학》촹《대학》촹《논어》를 읽었는데, 착해지기가 쉽겠느냐 어렵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쉽습니다."
하였다. 상이 유선(諭善) 서지수(徐志修)와 익선(翊善) 박성원(朴聖源) 등에게 묻기를,
"쉽게 여기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쉽게 여긴 이후에야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높고 멀어서 행하기 어렵다고 여긴다면 필시 장차 진보할 가망이 없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크게 기뻐하며 하교하기를,
"머리가 하얗게 센 노년에 칠순을 한 해 남겨두고 있는데, 세손과 더불어 함께 하리라고는 실로 생각지 못하였다. 어찌 기쁨을 표시하는 도리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어 유선에게는 말을 내려주고 좌우 익선은 가자(加資)하며 찬독(贊讀) 이하는 차등있게 시상하도록 명하였다. 유선 당상(諭善堂上)의 자리를 특별히 설치하여 박성원(朴聖源)을 단부(單付)하였다.
○ 상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하였다. 세손에게 입시하도록 명하니, 강서원(講書院) 관원들
"아름답도다, 소리여. 악사(樂師) 지(摯)가 처음 벼슬하였을 때 연주한 소리가 양양(洋洋)하게 귀에 가득하다고 한 공자(孔子)의 말과 같은 심정이다."
하였다. 이어 묻기를,
"하늘은 높은데 요(堯) 임금은 어떻게 본받았는가?"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도(道)의 극치에 나아가 하늘과 덕(德)이 합쳐졌던 것입니다."
하자, 상이 얼굴빛을 바꾸며 칭찬하였다. 또 묻기를,
"아홉 사람이 있을 뿐이었는데 부인(婦人)이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아홉 사람 및 부인을 합하여 십란(十亂)이었으니, 더불어 무왕(武王)의 통치를 이루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재를 얻기 어렵다고 한 데서 인재는 재주가 덕보다 나은 인재를 말하는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인재를 얻기 어렵다고 한 데서의 인재는 덕을 아울러 말하는 것입니다. 재주가 덕보다 낫다고 한 데서의 재주는 재주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순(舜) 임금과 같은 성덕(聖德)을 지닌 분이 어찌 신하가 다섯 명뿐이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가장 어진 사람만을 들어서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네가 어진 신하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얻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진 신하가 너의 좌우에 있으면서 항상 너에게 게을리하지 말고 탐닉하지 말도록 권한다면 괴롭지 않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진 사람이 나에게 어질게 되도록 권한다면 이로써 나에게 보탬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순 임금이나 무왕에게 미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힘써 행한다면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감탄하면서 이르기를,
"지금 세손의 강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학문이 몰라보게 진보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잘 다스려질 듯하다."
하니, 경연 신하들이 모두 대답하기를,
"종묘 사직의 무궁한 복입니다."
하였다.
○ 2월. 팔도와 양도(兩都)에 윤음을 내려,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면하고 감옥의 죄수들을 잘 보살피도록 권면하였다.
○ 3월. 왕세손에게 명하여 입학례(入學禮)를 행하도록 하였다. 처음에 상이《오례의》의 입학례는 너무 소략하다 하여 대사성 서명응(徐明膺)에게 명하여 의절(儀節)을 고쳐 만들도록 하였는데, 예를 이룬 뒤 태학에 보관하여 뒷날의 정식으로 삼도록 하였다.
입학의(入學儀)는 다음과 같다.
○ 왕세손이 작헌례를 마치고 나면 익선(翊善)이 왕세손을 인도하여 문묘 문을 나와 명륜당 대문 동쪽에 이르러 서쪽을 향해 서게 한다. 이어 편차(便次)로 가서 학생복(學生服)으로 - 연건(軟巾)을 뒤로 드리우고 청금포(靑衿袍)촹세조대(細條帶)촹흑화자(黑靴子)를 착용한다.- 갈아입는다.
○ 집비자(執?者)가 폐백을 -모시[紵] 3필- 광주리에 담고, 집준자(執尊者)가 단술을 - 2곡(斛) - 술동이에 담고, 집수자(執脩者)가 포[脩]를 - 5정(?) - 안(案)에 놓는다. 이를 각각 편차의 서남쪽에 있는 탁상에 올려 놓고 북쪽을 향해 서쪽을 위로 하여 서서 지킨다.
○ 박사 찬홀(博士贊笏)은 박사(博士)의 왼쪽 조금 뒤에 서쪽을 향해 서 있는다.
○ 왕세손 찬홀(王世孫贊笏)은 편차 앞의 왼쪽에 북쪽을 향하여 서 있는다. - 왕세손이 편차를 나와 예를 행할 때에는 항상 왕세손의 왼쪽 조금 앞에 서 있고, 왕세손이 당(堂)에 오른 뒤에는 당 아래에 서 있는다. -
○ 박사가 막차(幕次)로 - 명륜당 동쪽 담장 안쪽에 있다. - 나아가 공복(公服)을 - 복두(?頭)촹홍포(紅袍)촹금대(金帶)촹상홀(象笏)촹흑석(黑?) - 갖추어 입는다.
○ 동서재(東西齋)의 장의(掌議)가 유생을 인솔하여 좌우로 나누어 명륜당 뜰의 동쪽과 서쪽에 차례대로 서되, 서로 마주보고 북쪽을 위로 한다.
○ 주시관(奏時官)이 편차 앞으로 가서 엎드려 입학 정시(正時)가 되었음을 고한다.
○ 왕세손 찬홀이, "익선은 왕세손을 인도하여 편차 앞에 서쪽을 향해 서도록 하시오." 하면, 필선(弼善)이 꿇어앉아 편차에서 나오도록 청한다. 왕세손이 의례대로 한다.
○ 박사 찬홀이 "찬인(贊引)은 박사를 인도하여 명륜당 동쪽 계단 위에 서쪽을 향해 서도록 하시오." 하면, 박사가 의례대로 한다.
○ 왕세손 찬홀이, "장명자(將命者)는 나와 문의 서쪽에 동쪽을 향해 서서, '감히 일을 청합니다.'라고 하시오." 하면, 장명자가 의례대로 한다.
○ 왕세손 찬홀이, "왕세손은 조금 앞으로 나와 예를 갖추어 청하시오." 하면, 왕세손이 조금 앞으로 나와, "아무개가 선생께 수업(受業)하기를 원합니다." 한다.
○ 왕세손 찬홀이, "장명자는 들어가 고하시오." 하면, 장명자가 박사 앞으로 들어가, "세손(世孫) 아무개가 선생께 수업하기를 원합니다." 하고 고한다.
○ 박사 찬홀이, "박사는 읍(揖)하고 답하시오." 하면, 박사가 읍하고. "아무개는 부덕(不德)합니다. 왕세손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해 주소서." 하고 답한다.
○ 박사 찬홀이, "장명자는 나가서 고하시오." 하면, 장명자가 왕세손 앞으로 나가 의례대로 고한다.
○ 왕세손 찬홀이, "왕세손은 고청(固請)하시오." 하면, 왕세손이, "아무개가 선생께 수업하기를 원합니다." 한다.
○ 왕세손 찬홀이, "장명자는 들어가 고하시오." 하면, 장명자가 박사 앞으로 들어가, "세손 아무개가 선생께 수업하기를 원합니다." 하고 고한다.
○ 박사 찬홀이, "박사는 읍하고 답하시오." 하면 박사가 읍하고, "아무개는 부덕합니다. 청컨대 왕세손께서는 자리로 나아가소서. 아무개가 감히 뵙겠습니다." 하고 답한다.
○ 박사 찬홀이, "장명자는 나가서 고하시오." 하면, 장명자가 왕세손 앞으로 나가 의례대로 고한다.
○ 왕세손 찬홀이, "왕세손은 삼청(三請)하시오." 하면, 왕세손이, "아무개가 감히 빈객(賓客)으로 볼 수 없습니다. 청컨대 끝내 뵙게 해 주소서." 한다.
○ 왕세손 찬홀이, "장명자는 들어가 고하시오." 하면, 장명자가 박사 앞으로 들어가, "세손 아무개가 감히 빈객으로 볼 수 없으니 끝내 뵙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 박사 찬홀이 "박사는 읍하고 답하시오." 하면, 박사가 읍하고, "아무개가 사양하여도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니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고 답한다.
○ 박사 찬홀이 "장명자는 나가서 고하시오." 하면, 장명자가 왕세손 앞으로 나가 의례대로 고한다.
○ 왕세손 찬홀이, "집비자는 광주리를 가지고 동쪽을 향하여 왕세손에게 올리시오." 하면, 집비자가 의례대로 한다.
○ 왕세손 찬홀이, "왕세손은 광주리를 잡으시오." 하면, 왕세손이 광주리를 잡았다가 광주리를 다시 집비자에게 준다.
○ 박사 찬홀이, "박사는 동쪽 계단 아래로 내려와 서쪽을 향해 서서 기다리시오." 하면, 박사가 의례대로 한다.
○ 왕세손 찬홀이, "익선은 왕세손을 인도하여 문으로 들어와 왼쪽으로 가서 서쪽 계단의 남쪽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해 서도록 하고, - 집비자가 앞 줄에 서고 산선(?扇)과 배위(陪衛)는 문 밖에서 정지한다. 협시(挾侍) 3인과 사약(司?) 1인이 따라 들어온다. - 집사자는 단술 병과 수안(脩案)을 받들고 따라와서 왕세손의 서쪽에 남쪽 가까이로 동쪽을 향해 북쪽을 위로 하여 서시오." 하면, - 집비자는 광주리를 왕세손에게 올리고 물러나 뒤로 선다. - 왕세손이 의례대로 하고, 집사자가 의례대로 한다.
○ 왕세손 찬홀이, "왕세손은 무릎을 꿇고 광주리를 올려 놓고 두 번 절하시오." 하면, 집비자가 광주리를 드리고, 왕세손이 무릎을 꿇고 올린다.
○ 왕세손 찬홀이, "일어나 몸을 구부려 절하고 일어나 몸을 펴시오." 하면, 왕세손이 의례대로 한다.
○ 박사 찬홀이, "박사는 답배(答拜)하시오." 하고, 또, "몸을 구부려 절하고 일어났다가 다시 절하고 일어나 몸을 펴시오." 하면, 박사가 의례대로 한다.
○ 왕세손 찬홀이, "왕세손은 무릎을 꿇고 광주리를 취하여 일어나 조금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박사에게 드리고, 단술과 포수를 받든 자는 무릎을 꿇고 단술과 포수를 박사 앞에 올리시오." 하면, 왕세손이 의례대로 하고, 집사자가 의례대로 한다.
○ 박사 찬홀이, "박사는 무릎꿇고 광주리를 받아 집사자에게 주고, 집사자는 무릎을 꿇고 단술과 포수를 받아 물러나시오." 하면, 박사 및 집사자가 의례대로 한다.
○ 왕세손 찬홀이, "왕세손은 일어나시오." 하면, 왕세손이 일어난다.
○ 박사 찬홀이, "박사는 일어나시오." 하면, 박사가 일어난다.
○ 왕세손 찬홀이, "익선은 왕세손을 인도하여 계단 중간에 서서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시오." 하고, 또, "몸을 구부려 절하고 일어났다가 절하고 일어나 몸을 펴시오." 하면, 왕세손이 의례대로 한다.
○ 왕세손 찬홀이, "익선은 왕세손을 인도하여 편차로 나가 기다리도록 하시오." 하면, 왕세손이 명륜당 서쪽 협실(挾室)의 기둥 밖 소치(小次)로 들어간다.
○ 박사 찬홀이, "찬인은 박사를 인도하여 막차로 들어가 상복(常服)으로 - 오사모(烏紗帽)촹흑단령(黑團領)촹품대(品帶)촹화자(靴子) - 갈아 입도록 하시오." 하면, 박사가 막차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다.
○ 박사 찬홀이, "찬인은 박사를 인도하여 당으로 올라가 자리로 -자리는 명륜당 동벽(東壁)에 서쪽을 향하여 두고 자리는 세 겹으로 한다. - 나가시오" 하면, 박사가 의례대로 한다.
○ 왕세손 찬홀이, "소차에서 나와 서시오." 하면, 필선이 소차 앞으로 가서 소차에서 나오도록 무릎을 끓고 아뢴다. 왕세손이 소차에서 나와 선다.
○ 왕세손 찬홀이, "필선은 왕세손을 인도하여 서쪽 계단에서 올라와 박사 앞으로 나가도록 하시오." 하면, 왕세자가 의례대로 한다.
○ 박사 찬홀이, "집사자는 당으로 올라가 박사 앞으로 나가 무릎꿇고 안(案)을 설치하고 나서 물러나 계단 아래에 서시오." 하면, - 박사 집사는 동쪽 계단으로 오르내리고 왕세손 집사는 서쪽 계단으로 오르내린다. - 집사자가 의례대로 한다.
○ 왕세손 찬홀이, "집사자는 왕세손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자리를 설치하고 나서 - 자리를 설치함에 있어 거리는 한 자리 정도의 사이를 두도록 하니 이른바 함장(函丈)이 이것이다. - 물러나 계단 아래에 서시오." 하면, 자리를 설치하는 자가 의례대로 한다.
○ 박사 찬홀이, "집사자는 무릎꿇고 박사 앞의 안(案) 위에 강할 책을 놓고 나서 물러나 계단 아래에 서시오." 하면, 협책자(挾冊者)가 의례대로 한다
○ 왕세손 찬홀이, 왕세손은 자리로 나아가 동쪽을 향하여 무릎을 꿇으시오." 하면, 왕세손이 의례대로 한다.
○ 왕세손 찬홀이, "집사자는 무릎꿇고 강할 책을 왕세손 앞에 놓고 나서 물러나 계단 아래에 서시오." 하면 협책자가 의례대로 한다.
○ 박사 찬홀이, "왕세손은 책을 강하시오." 하면, 왕세손이 책을 강한다.
○ 박사 찬홀이, "박사는 뜻풀이를 하시오." 하면, 박사가 뜻풀이를 한다.
○ 박사 찬홀이, "안(案)과 책을 치우시오." 하면, 협책자가 무릎꿇고 책을 거두어 일어나고, 집안자(執案者)가 무릎꿇고 안을 거두어 일어난다. 모두 계단 아래로 내려와 선다.
○ 왕세손 찬홀이, "일어나시오." 하면, 왕세손이 일어난다.
○ 왕세손 찬홀이, "익선은 왕세손을 인도하여 편차로 나가시오." 하면, 왕세손이 의례대로 한다.
○ 박사 찬홀이, "찬인은 박사를 인도하여 명륜당의 동쪽 협실로 나가시오." 한다.
○ 왕세손이 내엄(內嚴)과 외비(外備)를 하여 올 때의 의례대로 궁으로 돌아온다.
이때 태학에 다리를 빙 둘러싸고 구경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세손이 오르내리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데 있어 절도에 맞지 않은 것이 없고, 강하는 소리가 우렁찬데다 묻고 논란하는 것이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자, 뜰에 가득 찬 유생들이 모두 귀를 기울였다. 예가 끝나 궁으로 돌아오자, 상이 세손과 신하들을 함께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대제학 김양택(金陽澤) 등이 상황 설명을 해 드리자, 상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이는 실로 하늘이 우리나라에 복을 내려 준 것이다." 하고, 이어 규례대로 시상(施賞)하도록 명하였다.
○ 왕세손의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사관에게 명하여 세손의 관례의를 태백산(太白山)에 보관되어 있는 실록(實錄)에서 상고해 보도록 하였는데, 열조(列朝)에 모두 이러한 예가 없었다. 마침내《오례의》의 왕세자 관례의를 가지고 참작하여 행하였다.
○ 9월. 상이 왕세손에게 명하여 태묘를 알현하도록 하였다. 이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오자,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정일 집중(精一執中)은 아조(我朝)의 가법(家法)이니, 네가 깊이 유념하여 행해야 할 것이다. 중(中)은 치우치지도 의지하지도 않으며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 하니, 대답하기를, "삼가 기억하겠습니다." 하였다.
○ 11월. 연여(輦輿)에 금(金)을 쓰던 것을 모두 동(銅)으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 12월. 하교하기를,
"우리나라의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은 중국에 비견되니, 모두 기성(箕聖)이 끼친 은택이다. 특별히 중신(重臣)을 보내어 기성의 묘에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 곤수(?帥)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하는 것도 시종신(侍從臣)의 규례에 따라 속형(贖刑)으로 논죄하도록 명하였다.
○ 제주(濟州)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내년의 공마(貢馬)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38년(임오, 1762)
○ 1월. 하교하기를,
"문왕(文王)은 사민(四民)에 대한 정책을 우선으로 하였다. 지금 새해를 맞이하여 이것을 놓아두고 무엇을 먼저하겠는가. 홀아비와 과부, 자식이 없는 늙은이로서 나이 80세 이상인 자와 고아로서 10세 이하인 자를 궐문
하였다.
○ 3월. 상이 왕세손과 더불어 경현당에서 회강(會講)하였다. 상이 세손에게 이르기를,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이라 해 놓고 또 어찌하여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 한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명명덕과 신민은 반드시 지극히 선한 데 그친 후에야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자, 상이 칭찬하였다. 또 묻기를,
"그 성(性)을 다한 후에야 억조 창생의 군사(君師)가 될 수 있다면,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이후에는 어찌 그 성을 다하지 못한 자들이 임금이 된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세상에 그 성을 다할 수 있는 자가 없었는데, 임금의 자리는 비워둘 수 없기 때문에 하늘도 어쩔 수 없이 명한 것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어떻게 하면 공성(孔聖)의 도를 실천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욕(私慾)을 이기면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향당편(鄕黨篇)을 읽었는데, 그렇게 해 나갈 수 있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은 후에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다시 묻기를,
"8세에 비로소 사양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어째서이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양은 예(禮)의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하자, 상이 크게 기뻐하며 이르기를,
"네가 오늘 대답한 말은 사관이 옆에서 기록하였다. 만에 하나 훗날에 행하는 바가 오늘 말한 것과 전혀 딴판이라면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너는 자나깨나 삼가 오늘을 잊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소지(小識)를 친히 짓고, 입시한 신하들의 성명을 나열해 적어 판에 새겨 인쇄해 장정하여 상에게 올리고 신하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사각(史閣)에 보관하고 강서원(講書院)에 편액(篇額)으로 걸도록 명하였다. 강이 끝나고 나자, 상이 경연 신하에게 이르기를,
"오늘 세손이 대답한 글뜻은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다. 비록 노사 숙유라도 이와 같지 못할 것이다."
하고, 이어 왕세손의 회강을 사계절의 첫째 달에 행하고 예조로 하여금 의주(儀註)를 만들어 올리도록 명하였다.
○ 4월. 한성부와 오부(五部)에 신칙하여, 어려서 부모를 잃고 다른 성(姓)을 가칭하다가 이를 성으로 붙인 자를 각각 스스로 진고(陳告)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60여 명이 모두 그 성을 회복하였다.
○ 5월. 상이 친히 제문을 짓고 고려 태조의 능에 치제하였다. 유수에게 명하여 그 능석(陵石) 및 정자각(丁字閣)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 8월. 세종조에 편집한《구황촬요(救荒撮要)》를 인쇄, 서울과 지방에 반포하여 민간에 널리 깨우쳐주어 각자 구황의 방도를 도모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 10월. 경기와 삼남에 기근이 들었다. 안집사(安集使)를 나누어 보내어 안집시키고 진휼하도록 하였다.
○ 남한산성(南漢山城)과 북한산성(北漢山城) 및 강도(江都)의 어공미(御供米)를 없앴다.
○ 탐라(耽羅)의 삭선(朔膳)을 4등(等)으로 나누어 올리도록 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았다. 상이 경연 신하에게
"대내에 진배(進排)하는 물품을 자성(慈聖)께서 대부분 헤아려 줄이셨다. 나도 우러러 본받고자 하니, 이로써 달마다 바다를 건너와야 하는 폐단을 없애주도록 하라."
하였다.
39년(계미, 1763)
○ 1월. 팔도와 양도(兩都)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 부제학 정존겸(鄭存謙) 등이 상차하여, 언로(言路)를 열고, 노성한 신하에게 자문을 구하고, 청렴하고 강직한 사람을 장려하고, 산림(山林)을 불러오고, 진휼의 대책을 의논하라는 것으로 진달하여 권면하였다. 상이 직접 써서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 상이 태묘를 알현하고, 선원전(璿源殿)에 전배(展拜)하였다. 이어 영수각(靈壽閣)에 나아가 어첩(御帖)에 소지(小識)를 친히 지었다. 마침내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고, 사면령을 내렸다. 이는 성수(聖壽) 70에, 즉위한 지 40년이 되어서였다. 전조(銓曹)에 명하여 80세가 된 자들에게 은혜를 미루도록 하여, 동지중추부사에 부직된 자가 200여 명이었다.
○ 김종정(金鍾正)을 영남의 감진어사(監賑御史)로, 윤사국(尹師國)을 양호(兩湖)의 독운어사(督運御史)로, 정창순(鄭昌順)을 호서의 감운어사(監運御史)로 삼았다. 유서(諭書)와 절목(節目)을 주어 진제(賑濟)하도록 신칙하였다.
○ 상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육전(六典)으로 육관(六官)을 신칙하였는데, 이르기를,
"'인재를 등용할 때는 반드시 공(公)을 따르도록 하며, 수령을 고를 때에는 반드시 고을을 위하여 하라'는 것으로 이방 승지가 이조를 신칙하라. '우리 백성이 거꾸로 매달린 듯 위급한 상황에 나라의 저축이 바닥났으니 재물을 쓸 때 절약하도록 힘쓰라'는 것으로 호방 승지가 호조를 신칙하라. '사전(祀典)이 불결하니 어찌 신기(神祇)를 감동시킬 수 있겠으며, 예문(禮文)이 문란하니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다'는 것으로 예방 승지가 예조를 신칙하라. '군정(軍政)에 관한 중대사가 소홀하기 그지없으며 먼 지방의 무사(武士)들이 거의 만 명 가깝게 침체되어 있다'는 것으로 병방 승지가 병방을 신칙하라. '법금(法禁)이 해이해져 감옥이 거의 꽉차 있는데 판결이 적체되어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상태에 놓인 죄수가 많음에 화기(和氣)를 범하여 상하게 하고 있다'는 것으로 형방 승지가 형조를 신칙하라. '한만한 관부라 하지 말라. 공장(工匠)도 백성이다. 데면데면하게 넘기지 말고 더욱 직사를 닦도록 하라'는 것으로 공방 승지가 공조를 신칙하라."
하였다.
○ 상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는데, 왕세손이 입시하였다. 상이 세손에게 묻기를,
"하(夏) 나라는 충(忠)을 숭상하고, 은(殷) 나라는 질(質)을 숭상하였는데, 주(周) 나라는 어찌하여 문(文)을 숭상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문과 질이 겸비하여 찬란해진 후에야 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 나라는 두 대를 거울삼았기 때문에 문을 숭상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과 질만을 말하고 충을 말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충은 문과 질 가운데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漢) 나라의 문제(文帝)와 무제(武帝) 가운데 누가 더 어진가?"
"문제가 어집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비 사막 남쪽에 왕정(王庭)이 없어졌으니, 무제가 유독 호걸한 군주가 아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융적(戎狄)은 요순이라도 복종시키기 어려웠는데, 전쟁에 있는 힘을 다 들여 함부로 일으키는 것이 가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 2월. 상이 어진(御眞) 2정(幀)을 경현당 동쪽 벽에 걸도록 하고, 왕세손 및 신하들에게 우러러보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계축년에 어진을 모사(模寫)한 뒤에 10년마다 한 번씩 다시 모사하도록 하였는데, 갑자년의 세 본(本)은 태녕전(泰寧殿)촹만녕전(萬寧殿)촹육상궁(毓祥宮)에 봉안하고, 정축년의 두 본은 육상궁과 장보각(藏譜閣)에 봉안하였다. 이에 이르러 또 한 본을 모사하였는데, 이미 기사(耆社)에 들어간 이후라는 이유로 궤장(?杖)을 좌우에 그려 넣도록 하였다. 상이 왕세손에게 묻기를,
"왼쪽에 궤를 놓고 오른쪽에 장을 두는 뜻을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궤를 왼쪽에 놓는 것은 기대기에 편하게 하려는 것이고, 장을 오른쪽에 두는 것은 부지(扶持)하기에 알맞기 때문입니다."
하자, 상이 칭찬하였다. 또 삼무사(三無私)의 뜻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하늘은 사사로이 덮어주는 것이 없고, 땅은 사사로이 실어주는 것이 없고, 해와 달은 사사로이 비추어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어떻게 하면 사람이 또한 하늘과 땅, 해와 달처럼 사사로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욕(私慾)을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 사사로운 마음을 막아내면 사사로움이란 염려할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일어났다가 엎드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심법(心法)으로 전하셨으니, 신들은 삼가 탄복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 3월. 호남의 도신이 장계하여, 기민(飢民)이 48만 3700여 명이고 죽은 자가 450여 명이라 하였는데, 상이 불쌍히 여겨 하교하기를,
"옛날에 이윤(伊尹)은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살아나가지 못하면 이를 자신의 잘못으로 여겼는데, 더구나 임금이 되어 한 도의 백성을 살리지 못하여 죽은 자가 500명에 가까우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는 하늘과 조종(祖宗)을 저버리는 것이니, 스스로 경계함이 없다면 어찌 우러러 답할 수 있겠는가. 오늘부터 특별히 3일 동안 감선(減膳)하겠다. 수령들도 만약 소홀히 지나친다면 어찌 우리나라의 신하라 할 수 있겠는가. 비국으로 하여금 경기와 삼남을 신칙하도록 하고, 이어 굶어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어 관가에서 장사지내는 것을 도와주도록 하라."
하였다.
○ 4월. 이에 앞서 양사(兩司)를 패초(牌招)할 때는 모두 명패(命牌)를 사용하는데 홍문관에 대해서만 분패(粉牌)를 사용하였다. 이때 이르러 상이 하교하기를,
"나는 옥당의 관원들을 어릴 적 친구로 여기고 있다. 예로 대우함에 있어 어찌 양사보다도 낮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마침내 똑같이 명패를 사용하도록 명하고 이를 정식으로 삼았다.
○ 내국(內局)에 명하여, 제사지내는 신농씨(神農氏)의 위판(位版)을 넣을 장독(欌?)을 대청(大廳)에 설치하여 공경을 다하도록 하였다.
○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및 신라촹백제촹고구려 시조(始祖)의 능을 보수
하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남쪽의 포항(浦項)과 북쪽의 교제(交濟)는 바로 남북이 서로 구제하게 하려는 뜻으로 만든 것인데, 올해의 곡식 운반은 몇 달째 마음을 태우게 하고 있다. 서로 괴롭게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남쪽 곡식으로는 남쪽을 구제하고 북쪽 곡식으로는 북쪽을 구제하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후로는 남북에 창고를 설치하되 한결같이 상평창의 예에 의거하고, 이름을 '제민창(濟民倉)'이라 하라. 그리고 비국으로 하여금 각도를 신칙하여 창고의 곡식에 혹 축나는 것이 있으면 도신과 지방관을 나리포(羅里?)의 예에 의거하여 무겁게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영남에 제민창을 설치하여 곡식 6만 곡(斛)을 비축하고, 호서와 호남에는 갑신년 가을에 이 창고를 설치하여 각각 곡식 3만 곡을 비축하였다.
○ 5월.《어제경세문답(御製警世問答)》이 완성되자, 교서관에 명하여 인쇄해 올리도록 하였다.
○ 6월. 상이 동궁(東宮)을 경계하는 글을 친히 짓고 춘방(春坊) 관원들을 불러 유시하기를,
"나에게 비록 배울 만한 일은 없다 하더라도 백성을 위하고 세신(世臣)을 위하는 마음은 지극하다. 이를 가져다 세손에게 전하고 이어 진계(陳戒)하되, 위아래가 주고받은 말을 문자로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춘방 관원이 기록하여 아뢰게 되자, 상이 세손의 문답이 정미롭고 절실함을 가상히 여겼다. 마침내《군감(君鑑)》한 편을 지어 내리고, 또, '이《군감》으로 너의 뛰어나게 총명함을 상주노라[將此君鑑賞爾穎悟]' 여덟 글자를 친히 써서《군감》의 맨 앞에 붙였다. 이를 왕세손에게 가서 전하도록 명하였다.
○ 8월. 하교하기를,
"예전에 송 인종(宋仁宗)이 귀비(貴妃)를 보고, '머리 가득 흰빛이 분분(紛紛)하구나.' 하자, 귀비가 두려워 주옥(珠玉)을 다 떼어내니 인종이 크게 기뻐하며 모란을 잘라 하사하였다. 이에 며칠 되지 않아 경성(京城)의 주옥 값이 크게 떨어졌으니, 그 효과가 이처럼 빠르다. 내가 문단(紋緞)을 좋아하지 않아 이미 없애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주옥의 소비가 문단보다 더 심하다 하니, 이후로는 왜관(倭館)에서 주옥을 사는 자는 잠상률(潛商律)로 시행하도록 하라. 나라 안에서라도 감히 서로 팔지 못하도록 하여 내가 중국에서 사오는 문단을 금하고 왜관에서 사들이는 주옥을 금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억계잠(抑誡箴)》한 편을 친히 지었는데, 위 무공(衛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뜻을 본뜬 것이었다. 그 잠에 이르기를,
"작은 이 한몸이 삼재(三才)에 끼었으니, 귀한 이나 천한 이나 타고난 바는 똑같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이(理)를 따르느냐 욕(慾)을 따르느냐로 갈리니, 털끝만한 차이로 성인(聖人)과 광인(狂人)으로 판가름되는 것이다. 잡아 보존하고 버려 잃는 것을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아, 노년에 접어들었으니 더욱 철저히 삼가해야 할 것이다. 옛사람에게서 찾아보면 위 무공이 억시(抑詩)를 지었다. 이에 잠(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니 밤낮으로 자리 곁에 붙여 놓고 본다."
하였다. 이어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해 지어 올리도록 명하였다.
○ 9월. 장릉(莊陵)의 향축(香祝)을 다른 능의 예에 의거하여 본릉의 관원으로 하여금 배진(陪進)하도록 명하였다. 또 영월(寧越) 청령포(淸?浦)는 장릉이 살던 옛터인데, 도신으로 하여금 비를 세워 이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는 봉심하고 온 예조 당상 이은(李?)의 말을 따른 것이다.
○ 관동에 큰물이 나고 기근이 들었다. 어사 윤면헌(尹勉憲)을 보내어 위유하고 안집시키도록 하였다. 또 도신에게 명하여 정협(鄭俠)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기민(飢民)의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도록 하고, 일곱 고을의 결전(結錢) 및 군포미(軍布米)를 면제해 주고, 본도의 삭선(朔膳) 및 삼명일(三名日) 물선(物膳)을 정지
○ 상이 강연이나 차대(次對)를 행할 때마다 반드시 세손으로 하여금 시좌(侍坐)하여 글뜻을 강론하도록 하였다. 일찍이 세손에게 묻기를,
"어진이는 알아내기가 쉽지 않고 사악한 사람도 분별하기 어렵다. 오직 아첨하는 사람은 알아내기가 쉬운데, 겉으로는 강직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참소와 이간을 하려는 자는 더욱 분별하기가 어렵다.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를 분별하고자 한다면 오직 스스로 자신의 앎을 밝게 하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거울은 밝기 때문에 사물을 비출 수 있는 것이다."
하고, 또 묻기를,
"《대학》 한 책에 있어서는 무엇부터 힘을 써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명명덕(明明德)을 우선으로 해야 할 것인데, 명명덕은 또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우선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대학》의 종지(宗旨)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경(敬) 한 글자입니다."
하자, 상이 번번이 칭찬하였다. 이때 이르러 상이 소대(召對)하여 《송감(宋鑑)》을 강하였는데, 왕세손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칠십에 역사를 강함에 글을 인하여 강개한 마음이 일어나 특별히 너를 불러 직접 신칙하노라. 아, 원우(元祐) 소성(紹聖)은 거울삼을 만하다 하겠다. 너는 오늘의 하교를 명심하여 잊지 않도록 하라.[七十講史因文興慨特召爾面飭嗚呼元祐紹聖可謂鑑戒爾將今日之敎銘心不忘]' 33글자를 직접 써서 세손에게 하사하였다. 인하여 목이 메어 하교하기를,
"지금 《송감》을 강하였다. 송 나라의 규모(規模)가 우리나라와 비슷한데, 영종(英宗)이 번저(藩邸)에서 들어와 대통을 이은 것도 나와 유사하다. 영종이 막 들어오려 할 때 사인(舍人)에게, '나의 집을 잘 지키도록 하라. 위로 적사(適嗣)가 있으면 내가 다시 여기로 돌아올 것이다.' 하였다. 내가 저위(儲位)를 이을 때도 이 말을 하였는데, 끝내 황형(皇兄)에게 후사가 없어 내가 마침내 차례를 잇게 되었다. 30여 년 동안 고심한 것은 오직 조정을 조제(調劑)하는 데 있었는데, 전에 이 말은 너에게 여러 차례 한 바 있었다. 송 나라의 신종(神宗)은 또한 뛰어난 임금이라 할 수 있으나 그 당시 사마광(司馬光)촹범중엄(范仲淹)촹정자(程子)촹소옹(邵雍) 등이 모두 등용되지 못하고 왕안석(王安石)만이 등용되어 청묘법(靑苗法)을 행하였는데,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아니었으면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 이후 철종(哲宗)이 다시 혜경(惠卿) 무리의 일번인(一番人)을 등용하여 송 나라가 마침내 쇠퇴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 세상에도 희풍(熙?)의 당(黨)으로서 틈을 엿보는 자가 있을까 두렵다. 네가 반드시 굳게 지켜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어 협시 중관을 둘러보며 이르기를,
"이 무리들이 두려워할 만하니 피부로 스며드는 참소는 모두 이들을 통하여 들어온다. 내가 너를 철종에 비기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우(禹)가 순(舜)임금을 경계시킬 때에도 단주(丹朱)를 가지고 말하였다. 신하가 임금에게 고하는 말도 오히려 이러한데, 더구나 내가 너에게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이어 궁료들에게 하교하기를,
"희풍의 당이 틈을 엿보는 데 대한 이야기는 현재의 폐단에 딱 들어맞는다. 강연 때 미루어 부연하여 진달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 12월. 함경도의 상정법(詳定法)을 다시 정하였다. 이어 삭저(朔猪)의 진공(進供)을 줄여주고, 영원히 정식으로 삼도록 하였다.
66권 영조조 10
40년(갑신, 1764)
○ 1월. 상이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글을 지어 신하들에게 유시하기를,
"부덕한 내가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었는데, 나이도 여든을 바라보는 일흔하나가 되었다. 오늘 조참을 연 것이 어찌 그저 나를 바라보게 하기 위한 것이겠는가. 아, 나의 대소 신하들은 40년 동안의 고심을 깊이 이해하고, 새해와 더불어 함께 새로이 마음을 가다듬어 나의 말년 정치를 돕도록 하라."
하였다. 또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면하고 진휼을 부지런히 하도록 각도에 신칙하여 유시하였다. 선조(先朝)를 섬기던 갑오(甲午) 제신(諸臣)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 고(故) 현감 이현필(李顯弼)에게 직첩(職牒)을 주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이현필이 과거에 응시하여 대책(對策)을 보는데 정직한 체하여 급제하려고 실상에 어긋나는 말을 많이 하고 글도 격식에 어긋나게 지었는데, 대신(臺臣)이 논죄하여 그 급제를 취소해 버렸다. 이때 이르러 상이 인일제(人日製)를 설행하여 선비들을 시험보였는데, 임금의 잘못에 대하여 언급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상이 이내 하교하기를,
"근래의 책문(策問)에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은 다 이현필에게서 비롯되었다. 아, '단주(丹朱)처럼 오만하지 말라.'는 우(禹)의 말을 순 임금은 받아들였고,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만 인의(仁義)를 베푼다.'고 한 급암(汲?)을 한 무제(漢武帝)는, '고지식하다.'고만 하였다. 이현필의 대책이 비록 뜻은 아름답지 않았지만 대신의 청을 인하여 지나치게 처분한 점이 있었다. 이에 사기(士氣)가 꺾이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까마귀와 소리개가 알을 깨뜨려버리자 봉황(鳳凰)이 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현필에게 특별히 직첩을 주어 나의 자강(自强)하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수재(守宰)로서 10번의 고과(考課)에서 10번 상(上)을 맞은 사람을 뽑아 첩(帖)을 만들어 올리도록 명하였는데, 이름을 '속대주첩(續代柱帖)'이라 하였다. 이는 숙묘(肅廟)의 고사를 따른 것이었다.
○ 대신(臺臣)이, 강 연안의 파수가 엄하지 않다는 것으로 상소하여 군졸을 점검하여 살피고 요로를 나누어 지키도록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방수하는 군졸을 생각할 때마다 내 몸이 추워지는 것 같다. 이전의 일이야 덜어주기 어렵다 하더라도 뒤폐단을 어찌 차마 열 수 있겠는가. 게다가 변방을 엄히 금하는 것은 군졸의 숫자가 많은 데 달려 있지 않다."
하였다.
○ 2월. 상이 종친 및 문무 2품 이상으로서 나이 70세인 사람들과 더불어 건명문(建明門)에서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다. 상이 4발의 화살을 쏘아 연달아 두 발을 맞추었다. 웅후(熊帿)를 거두어 육일각(六一閣)에 보관하고 상이 쏜 활과 화살은 영수각(靈壽閣)에 보관하도록 명하였다. 다시 미후(?帿)를 설치하여 기신(耆臣)에게 쏘도록 명하고, 맞춘 자는 상을 주고 맞추지 못한 자는 벌주기를 의례대로 하였다.
○ 적전(?田)을 친경(親耕)하였다. 이에 앞서 새해 초에 예조가 선농단(先農壇)에 친제(親祭)하는 예 및 친경 등의 예에 대해 계품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작년의 농삿일이 또 뜻과 같이 되지 못하였다. 나이는 비록 여든을 바라본다 하더라도 어찌 다섯 번 밀어주는 것을 사양할 수 있겠는가. 선농제(先農祭)는 계유년의 예대로 섭행하도록 하고, 친경은 의례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이때 이르러 친경례를 행하고 관경대(觀耕臺)로 도로 거둥하여 서민들에게 노주(勞酒)를 내려주고 또 종경관(從耕官)들에게 찬(饌)을 내려주었다. 이내 하교하기를,
"어제 대사례를 행하고 오늘 친경례를 행하니 거의 태고의 의례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하례(賀禮)를 명하지 않
하였다.
○ 왕세손을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삼아 종통(宗統)을 잇게 하도록 명하였다.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상이 창덕궁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을 전알하고 물러나 재전(齋殿)으로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입시하였다. 시임촹원임 대신, 2품 이상, 삼사에게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내 종국(宗國)을 위하여 이미 진전(眞殿)에 아뢰었다."
하고, 이어 아뢴 글을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대략에,
"신에게 세자(世子) 둘이 있었는데, 효장(孝章)이 형입니다. 충자(沖子)로 하여금 효장을 이어 장통(長統)을 순히 계승하도록 하는 것은 의리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지금 그 근본을 바르게 해 놓지 않으면 이 이후에 다시 삿되고 괴이한 말들이 우리나라를 어지럽힐 것이니, 세신(世臣)을 위하는 도리에 있어 어떠하겠습니까. 이 일은 비록 송 나라 범진(范鎭)과 같은 충성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말을 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신축년에 저위(儲位)를 세워 대리(代理)하도록 한 것은 이미 국조(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 일이었는데도 신하의 절개가 없다는 죄과에 내몰렸는데, 더구나 이 일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비록 훗날 청하는 바가 있어도, '세자가 둘 있었는데 모두 일찍이 죽었기 때문에 장자를 따라 이었다.'고 한다면 말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하지 않았다가 뜻밖의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종국에 있어서 어찌하겠으며, 소자(小子)에 있어 어찌하겠습니까. 이는 아랫사람에게 물을 것도 아니며, 옛 전례를 널리 찾아볼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에 동궁과 함께 예를 행하고, 특별히 대신과 2품 이상, 삼사를 진전 문 밖에 불러 이 뜻을 선유할 것입니다. 충자(沖子) -금상(今上) 어휘(御諱)- 를 효장의 후사로 삼아 먼저 《보략(譜略)》에다 효장과 충자에 사(嗣) 자를 잇따라 쓰도록 하였으니, 지금부터는 종통이 중간에 끊어졌다는 탄식이 없게 되고 우리나라에는 반석과 같은 견고함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충자로 하여금 사도묘(思悼廟)에 대하여 낳아준 부모에 대한 것과 같은 도리를 다하도록 한다면 충자에 있어서도 한스러울 것이 없을 것이고 뒤폐단을 막아 세신(世臣)을 보존할 수도 있을 것이니, 또한 양쪽이 다 제대로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아뢰다 보니 눈물이 적삼을 적십니다."
하였다. 대신과 신하들이 받들어 읽고 나서 한 목소리로 아뢰기를,
"나라의 중대한 일을 성상께서 결단하셨는데, 아랫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내 세손에게 이르기를,
"훗날 신하들 가운데 혹 이것을 가지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옳겠는가, 그르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자이겠는가, 소인이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소인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사관을 둘러보며 이르기를,
"너희들이 자세히 기록해 두라."
하였다. 마침내 아뢴 바의 글을 사각(史閣)에 보관하고 또 이를 반교문(頒敎文)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다음날 상이 왕세손을 거느리고 육상궁(毓祥宮)을 배알하고 창의궁(彰義宮)에 들러 세손에게 명하여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이어 보첩(譜牒)에, '모년모월일 이왕세손 특명사효장세자(某年某月日以王世孫特命嗣孝章世子)'라 쓰도록 명하고, 마침내 종부시(宗簿寺)로 내려 이로써 보첩에 수록하도록 하였다. 환궁하고 나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왕세자가 또한 입시하였다. 상이 친히 글을 지어 세손을 위유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를 인하여 훗날 삿된 말로 소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이는 우리 종통을 어지럽히는 것일 뿐만이 아니
하고, 이내 사관으로 하여금 청사(靑史)에 기록하도록 하고, 정원에서 이를 조지(朝紙)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 상이 왕세손을 거느리고 옥서(玉署)에 들러 선찬(宣饌)하고, '구름이 옥당에 따르는데 세손이 곁에서 모시고 있도다. 특별히 어물을 내리고 이어 사양하지 말도록 명하노라.[雲從一堂世孫侍傍特賜魚物仍命勿謝]' 네 구절을 써서 내렸다. 세손을 둘러보고 하교하기를,
"나에게 있어 옛일을 상고할 근거는 옥당(玉堂)이고, 너에게 있어 옛일을 상고할 근거는 춘방(春坊)이다. 너도 춘방에 들러 글뜻을 강론하도록 하라."
하였다.
○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후사(後嗣)를 세워 그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명하였다.
○ 3월. 함경도 남북의 수신(帥臣)에게 명하여 각각 무사(武士) 1인을 천거하도록 하였다.
○ 하교하기를,
"변방을 엄히 금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 총(銃)에 달려 있지 않다. 아, 북도의 백성들이 고기잡이도 하지 못하고 사냥도 하지 못한다 하니,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집에 총을 간직해 둔 채 북방의 건아(健兒)들로 하여금 무기(武技)를 익히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니, 제대로 된 계책이라 할 수 없다. 금령을 해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 동몽교관에게 명하여 동몽(童蒙)을 거느리고 입시하도록 하였다. 왕세손에게 글뜻을 질문하도록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자(程子)는 준수(俊秀)한 대부(大夫)촹사(士)와 더불어 태자(太子)가 놀게 하도록 청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이 뜻을 대략 본뜬 것이다."
하고, 이어 동몽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려주었다.
○ 상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과거에 응시한 수령들을 불러보고 유시하기를,
"그대들은 서울로 올라온 뒤에도 백성들이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는가? 고려 공민왕(恭愍王)에게 왕자가 없었는데, 고황제(高皇帝)가, '왕이 만약 백성을 사랑하면 반드시 왕자를 낳게 될 것이다.'라고 하교하였다. 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데 따른 효과도 이와 같은데 더구나 수령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렇지 못하고 백성을 잊고 있다면 과거에 응시한다 하더라도 아무 보탬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 4월.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도록 명하였다.
○ 5월. 상이 《조훈(祖訓)》을 친히 지어 왕세손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책 가운데 권학장(勸學章)이 가장 마음에 들게 지어졌다. 이는 필시 조종(祖宗)과 하늘이 세손을 위하여 나를 흥기시켜 이 글을 짓게 한 것일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글뜻을 인하여 천체(天體)에 대하여 세손에게 물으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천체는 밤낮으로 지체(地體)의 밖을 주행(周行)하니, 계란의 흰자위가 노른자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하늘은 밤낮없이 주행하여 잠시도 정지하여 쉬는 일이 없으니, 임금도 하늘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요(堯)와 순(舜) 가운데 누가 더 어진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성인의 등품(等品)을 논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니, 대답하기를,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지위입니다."
하였다.
○ 6월. 적의(翟衣)와 명복(命服)을 만드는 데 쓰는 우리나라에서 짠 비단은 아울러 무늬있는 것을 쓰지 못하게 금하도록 명하였다.
○ 8월. 상이 명릉(明陵)을 배알하러 가려 하자 세손이 교외(郊外)에서 지영(祗迎)하기를 힘껏 청하였는데, 상이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였다. 어가가 돌아옴에 미쳐 상이 세손의 막차(幕次)로 들어가 세손의 손을 잡았는데, 기쁨이 천안(天顔)에 어렸다. 사언(四言) 사구(四句)를 친히 짓고, 즉석에서 화답하여 올리도록 명하였다. 또 수가(隨駕)한 신하들에게도 명하여 화답하여 올리도록 하였는데, 대개 기쁨을 표하려는 것이었다.
○ 10월. 사대부의 친영례(親迎禮)를 행하도록 신칙하였다. 이는 《시경》 제풍(齊風)을 강하다가 감흥이 일어나서 하교한 것이었다.
○ 장단(長湍)의 방어영(防禦營)을 파주(坡州)로 옮겼다. 이는 파주가 강을 낀 천연의 요해처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절목(節目)은 다음과 같다.
임진(臨津) 일대는 곧 경기 우도의 첫째 가는 요해처이기 때문에 전에 이미 임진에 관(關)을 설치하고 이어 장산(長山)에 돈(墩)을 축조하였는데, 이번에 또 장단의 방어영을 파주로 옮겨 설치하게 되었다. 수원(水原)의 예를 대략 본떠 신둔(新屯)을 획급(劃給)하여 군수(軍需)를 전적으로 준비하도록 하였다. 장단도 삼도(三道)의 요충지이므로 그대로 영장(營將)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하여 전영(前營)으로 만들어 강을 사이에 두고 나누어 지켜 기각(?角)의 형세를 이루도록 한다면 견고한 요해처의 방비로 뜻밖의 사태에 대한 대비가 이에 완비될 것이다. 거행 조건(擧行條件)은 아래에 나열해 적는다.
1. 경기 우도의 8고을을 둘로 나누어 고양(高陽)촹교하(交河)촹적성(積城)은 파주에 소속시키고, 삭녕(朔寧)촹마전(麻田)촹연천(漣川)은 장단에 소속시키되, 장단이 영장을 겸하니 모든 사례(事例)를 한결같이 남양(南陽)의 예대로 시행하도록 한다.
1. 군무(軍務) 가운데 총융청(摠戎廳)에서 관할하는 것은 본청에 나아가 의논하고, 본도에서 관할하는 것은 순영(巡營)에 나아가 의논한다. 혹 경계할 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계문(啓聞)해야 한다. 봄가을의 순력(巡歷) 때 속읍 수령 가운데 군령(軍令)을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 당상(堂上)이면 계문하고 당하(堂下)면 장(杖) 이하로 스스로 처치한다. 난리에 임하게 되면 군율(軍律)과 종사(從事)를 한결같이 다른 방어영의 예대로 시행한다.
1. 임진과 장산 두 진(鎭)의 별장(別將)은 예전대로 방어사의 절제(節制)를 받는다.
1. 방어영을 변통한 뒤 총융청에서 관할하는 바 3영(營)이 이제 4영의 제도로 되니, 봄가을의 습조(習操)는 남북의 각 2영이 돌아가면서 거행한다.
1. 습조를 정지할 때 순점(巡點) 등의 일은 방어사 및 영장이 각각 그 소속 고을에서 거행한다.
1. 장단이 비록 방어영을 파한다 하더라도 이미 영장을 겸하니, 자연 체모가 있는 것이다. 관하 각 고을의 거행 범절을 한결같이 남양의 예대로 시행한다.
1. 방어사 및 겸영장의 인신(印信) 각 1과(顆)를 해조로 하여금 만들어 보내도록 한다.
1. 방어사가 거느리는 군관(軍官)은 《속전(續典)》에 의거하여 3원(員)으로 정하고, 영리(營吏) 등 원역(員役)은 다른 방어영의 예대로 정해 보낸다.
1. 방어영의 중군(中軍)은 이력이 있는 자 가운데 자망(自望)으로 골라 차임한다.
1. 방어사가 거느리는 군관 및 중군의 요미(料米)와 노복(奴僕) 및 마필(馬匹)의 요태(料太)는 다른 방어영의 예대로 상진(常賑)의 모곡(耗穀)으로 회감(會減)한다.
1. 방어영을 설치하고 나서 마병(馬兵) 군제 가운데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서 별효사(別驍士) 2초(哨)를 설치하되, 건장하고 무예에 숙달한 자를 각별히 골라 정한다. 매년 한 차례씩 3가지 무예로 방어영에서 시취(試取)
1. 방어영의 장교를 구근(久勤)하여 천전(遷轉)시키는 일 및 50개월의 근무 기간이 차서 승부(陞付)시키는 일 등은 한결같이 전례대로 시행한다. 장단의 장교로서 구근한 자는 한결같이 남양의 예대로 시행한다.
1. 파주는 이미 우방어영(右防禦營)이니 도임(到任)할 때 및 왕래할 때 역마 타는 일을 좌방어영의 수원과 다르게 해서는 안 된다. 연로의 공궤(供饋)와 군무의 품보(稟報)를 한결같이 수원의 예대로 거행한다.
1. 방어영의 군총(軍摠)은 2부(部) 4사(司)로 정하여 한 영의 제도로 삼는다. 다만 고양촹교하촹적성 소재 5초(哨) 이외에 15초는 본주에 있는 각 군문과 각 아문에 미포(米布)를 납부하는 군사 및 각처의 산직(山直) 등 잡명색(雜名色)을 한결같이 아울러 나누어 정하여 액수를 채우도록 한다.
○ 12월. 납일(臘日)에 산 토끼를 진공(進貢)하는 것을 없애도록 명하였다.
41년(을유, 1765)
○ 1월. 상이 왕세손을 거느리고 기곡제(祈穀祭)에 쓸 향(香)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는데, 농사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려 한 것이었다. 이날 밤 보여(步輿)로 자극문(紫極門)에 나아가 사단(社壇)에서 예를 행하는 것을 바라보았는데, 예가 끝나자 이내 돌아왔다.
○ 대신과 예조 당상이 성수(聖壽)가 여든을 바라본다 하여 연회를 베풀어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왕세손이 상소를 손으로 베껴써서 올리니, 상이 수서(手書)로 답하기를,
"너의 간곡한 글을 보고 너의 마음을 잘 알게 되었다. 네가 이제 숙성하여 이러한 거조(擧措)를 하게 되니, 우리나라가 거의 잘 될 것임에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 아, 한 귀퉁이에 자리한 청구(靑丘)에서 할아비는 손자에게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지금 너의 소장을 보고 어찌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다만 나의 뜻은 한편으로는 선조를 추모하고 한편으로는 충자(沖子)를 위하려는 것이다. 지금 이 소장은 백잔의 술을 대신할 만하다. 네가 이미 손수 썼기에 나도 손수 써서 답하는 바이다. 이를 천백년 물려준다면 어찌 술잔을 올리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4백 년 내려온 종국(宗國)이 오직 너에게 의지하여 있다.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덕을 닦아 선열(先烈)을 실추시키지 않음으로써 네 할아비의 마음에 대해 후세에 할 말이 있도록 하라. 그 큰 효성으로 이를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 도승지에게 명하여 세손에게 가서 유시하도록 하였다. 세손이 정성과 예를 펴지 못하게 되었다고 울적하여 네 끼를 들지 않았다. 이에 신하들이 모두 감격하여 울고, 상도 염려해 마지않다가 애써 따르겠다고 하였다. 마침내 상원일(上元日)에 진하를 받고 교서를 반포하되, 각도의 방물(方物)은 정지하고 전문(箋文)만 봉진(封進)하도록 하였다.
○ 상이 석강(夕講)을 행하였는데, 왕세손이 입시하였다. 《서경》 무성(武成)을 강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묻기를,
"어떻게 하면 요순(堯舜)이 팔짱을 끼고서 이룬 정치와 같은 것을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요순의 도는 효제(孝悌)일 뿐입니다."
하자, 상이 칭찬하였다.
○ 윤2월.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거느리고 남교(南郊)의 성경대(省耕臺)에 이르러 춘경(春耕)을 살피고, 경기 백성들의 종자 곡식을 보조해 주었다. 입직한 유신에게 명하여 서교(西郊)로 가서 파종하는 것을 살펴보도
○ 팔도의 도신과 수령에게 명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읊은 시(詩)를 지어 올리도록 하고, 소서(小序)를 친히 지어 첩(帖)의 첫머리에 싣도록 하였다. 주(周)의 사적(史籍)에서 국풍(國風)을 채집하였던 일을 인하여 명하게 된 것이었다.
○ 3월. 상이 왕세손을 거느리고 문묘에서 작헌례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세손으로 하여금 성묘(聖廟)를 중히 여기는 뜻을 알게 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
○ 4월. 상이 왕세손을 거느리고 태묘(太廟)의 하향(夏享)을 행하였다. 《대명집례(大明集禮)》를 본떠 이번부터 제사에 쓸 명수(明水)를 점검하고 희생(犧牲)을 삶을 가마솥을 살펴보는 예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 5월. 경복궁 위장이 옛 궁궐의 옆에서 석함(石函) 하나를 발견하여 올렸다. 상이 살펴보았는데, 바로 태(胎)를 봉한 석함이었다. 그 겉에 '왕자 을사 오월 일 인시 생(王子乙巳五月日寅時生)'이라 새겨 있었는데, 상이 이내 하교하기를,
"국초(國初) 헌릉(獻陵)의 사방석(四方石)을 성조(聖祖)께서 양편(兩片)으로 고쳐 만들게 하셨는데, 국릉(國陵)의 지석(誌石)을 내가 지난 정축년에 검소한 덕을 우러러 본받아 도자(陶磁)로 대신하도록 하였다. 막중한 곳도 오히려 이렇게 하는데, 더구나 그 버금가는 곳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태(胎)를 보관하는 데 따른 폐단을 내가 잘 알고 있다. 옛 규례를 고치기 어려워하여 지금 옛 궁궐에서 태를 넣은 석함을 발견하였으니, 이는 중엽 이후의 일이다. 지금부터는 태를 보관할 때 반드시 어원(御苑)의 정결한 곳을 골라 도자기 항아리에 넣어 묻도록 하라. 이를 예조에 기록해 두어 정식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왕세손과 더불어 영제(?祭)에 쓸 향(香)의 지영례(祗迎禮)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당 태종(唐太宗)은 어원(御苑)에서 곡식 베는 것을 보다가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데 대한 교훈을 남겼고, 주공(周公)의 칠월편(七月篇)도 성왕(成王)으로 하여금 농삿일의 어려움을 알게 하려 한 것이었다. 지금 내가 세손에게 이를 행하도록 명한 것도 백성과 농사를 중히 여기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였다.
○ 상이 차대(次對)를 행하였는데, 왕세손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전에 한 광무(漢光武)는 명제(明帝)의 하남(河南)과 남양(南陽)에 대한 대답을 듣고서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내가 지금 충주(忠州)의 포흠(逋欠)을 진 관리에 대한 일을 세손에게 물어 어떻게 대답하는지 보고자 한다."
하고, 이내 세손에게 묻기를,
"신하들이 왕법은 굽혀서는 안 되며 나라의 비축은 축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그 말이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대답하기를,
"십여 명이나 되는 관리의 목숨을 살려주셨으니, 이는 천지와 같이 살리기를 좋아하는 큰 덕입니다. 어찌 묵은 포흠을 징수하여 받아들이는 데 비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전에 노(魯) 나라의 임금이 부세(賦稅)를 더하고자 하였는데, 공자(孔子)의 제자들이 반드시 부세를 면제해 주고자 하였다. 임금은 경비를 걱정하는데 신하는 적게 거두려 하는 것이 어떠하다고 여기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백성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이 어찌 부족하겠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면 백성들을 부유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다시 백성을 사랑하는 방도에 대해 물으니, 대답하기를,
"아무 보탬도 없는 일을 하여 백성의 농사 때를 빼앗지 않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칭찬하였다. 마침내 각도의 묵은 포흠을 모두 줄여주도록 명하였다.
○ 8월. 상이 왕세손을 거느리고 영수각(靈壽閣)에 이르러 기사(耆社)의 신하들을 불러 선찬(宣饌)하고 각각 그 연기(年紀)를 진달하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경들은 각각 자신의 나이를 세손에게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기사의 신하들이 세손 앞으로 나아가 절하고 그 나이를 아뢰자, 여우볕이 내리쬐었다. 매우 즐겁게 놀다가 파하였다.
○ 9월. 고려 왕릉의 금표(禁標)를 준수하라는 내용의 수교(受敎)를 인쇄하여 다섯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고, 개성(開城)촹강화(江華)촹경기 감영에 반포하여 백성들이 금표 안에서 경작하고 장사지내는 것을 금하도록 하고, 범하는 자가 있으면 아울러 지방관을 처벌하도록 명하였다.
○ 10월. 상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수작(受爵)하였다. 처음에 을유년이 국초에 한양(漢陽)을 수도로 정한 해라 하여 춘추관의 당상과 낭청을 보내어 강화에서 실록을 상고해 오도록 하였다. 그 결과, 태종 5년 을유년 9월 10일에 연회를 베풀어 태상전(太上殿)에 헌수(獻壽)하고, 11월 20일에 또 헌수하고, 21일에도 헌수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대신 이하가 성상이 너무 지나치게 겸양한다는 이유로 즉시 옛 규례를 인용하여 연회를 베풀도록 청하였다. 왕세손이 이내 상소하였는데, '조신(朝臣)들의 청이 적막하기만 하다'는 말이 있었다. 이에 궁료(宮僚)가 청하기를,
"신하들이 필시 이 때문에 황송해 할 것입니다."
하자, 세손이 이르기를,
"여기에서 나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끝내 고치지 않았다. 상이 수서(手書)로 답하기를,
"내가 나라를 위하여 마음으로 기쁜 것이 세 가지이다. 첫째는 너의 단충(丹忠)이고, 둘째는 문리(文理)가 숙성(夙成)한 것이고, 셋째는 주창(主?)을 맡길 바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즉시 허락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 봉환(奉歡)하였던 것을 추억하면 온갖 생각이 다 식어버리고, 지금의 나라 형세를 둘러보면 진수 성찬도 달갑지 않다. 더구나 인애(仁愛)하는 하늘이 이즈음에 간절하게 명하여 두려운 마음이 매우 절실한데, 어찌 감히 복선(復膳)하겠다고 하여 조금이라도 마음을 느슨하게 할 수 있겠는가. 정을 억누르고 그만 청하여 여든을 바라보는 너의 할아비로 하여금 편안히 침식(寢食)할 수 있게 해 주기 바란다."
하였는데, 왕세손이 다섯 번 상소하여 진청(陳請)하고 음식을 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에 대신이 경재(卿宰)를 거느리고 빈계(賓啓)하고, 또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니, 상이 부득이하여 애써 따랐다. 태조대왕이 탄신일에 행한 수작례(受爵禮)에 의거하여, 찬(饌)은 5품(品)을 쓰고 헌(獻)은 다음(茶飮)을 쓰고 음악은 아음(雅音)을 쓰도록 하고, 세손촹종친촹대신촹구경(九卿)촹의빈(儀賓)이 각각 한 잔씩 올리는 것으로 하였다. 상이 계태강악장(戒太康樂章)을 친히 짓고, 악공(樂工)이 노래하도록 명하였다. 노인을 모시고 사는 신하들에게 고기와 쌀을 내려주어 돌아가 각기 노인에게 헌수(獻壽)하도록 하였다.
○ 고(故) 상신(相臣) 김종서(金宗瑞)의 옛집을 사들여 그 후손에게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이는 위징(魏徵)의 집을 사들여 돌려주었던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었다.
○ 12월. 왕세손이 오랫동안 편찮자, 상이 매우 근심하여 이르기를,
"종묘 사직을 어찌하란 말인가."
하였다. 마침내 세손이 기거하는 방에 나아가 병풍을 사이에 두고 지냈다. 하교하기를,
"나는 12세에 책을 읽은 바가 없었는데, 세손은 이미 많은 책을 읽었다. 그래서 책읽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항상 기뻤다."
"세손이 기뻐하더냐?"
하여, 기뻐하더라고 대답하면 상도 기뻐하였다.
○ 삼성묘(三聖廟)에 독(?)을 설치하고, 이어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성종조에 구월산(九月山)에 삼성묘를 설치하고 위판(位版)을 흙으로 조성하였는데, 오래되자 훼손이 되었다. 이에 예조 판서 심수(沈?)가 아뢰니, 상이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을 불러 삼성(三聖)의 고적(故蹟)을 물었다. 서명응이 갖추어 대답하기를,
"삼성은 환인(桓因)촹환웅(桓雄)촹단군(檀君)이고, 구월산은 사서(史書)에서 이른바 아사달산(阿斯達山)입니다."
하고, 또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이 나라를 세운 것이 을유년이었다고 아뢰었다. 상이 마침내 예관을 보내어 삼성 위판에 나무로 독을 만들도록 하고, 이어 삼성 및 동명왕묘에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42년(병술, 1766)
○ 1월. 팔도와 양도(兩都)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종신(宗臣)으로서 나이 70세인 자를 가자(加資)하고, 기민(耆民)으로서 나이 100세가 넘은 자에게 각각 옷감과 음식물을 나누어주도록 명하고 이어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 대사성에게 명하여 태학의 유생들을 거느리고 입시하도록 하였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쌀과 고기를 내려주어 새해 초에 선비들을 공궤(供饋)하는 데 보태도록 하였다.
○ 《어제소학지남(御製小學指南)》이 완성되었다. 교서관에 명하여 인쇄하도록 하여 신하들에게 나누어주고,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나누어 보내어 판목에 아름답게 새겨 길이 전해질 수 있게 하도록 하였다.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의 사판(祠版)을 친진(親盡)하더라도 조천(?遷)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고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를 공신(功臣)으로 대우하였던 예를 따른 것이었다.
○ 3월. 상의 환후가 회복된 데 따라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당시 왕세손의 환후가 회복된 것을 진하(陳賀)하려 하였으나 상이 편찮아 오랫동안 행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 이르러 또 함께 설행하도록 하였다. 공인(貢人)의 묵은 유재미(遺在米) 2000석을 탕감해 주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 5월. 가사(家舍)와 노비를 고(故) 신풍부원군(新?府院君) 장유(張維)의 후손에게 내려주도록 명하였는데, 훈척(勳戚)의 집안으로서 가난하게 살고 있어서였다.
○ 상이 경연에 나아가 《소학》을 거듭 강하였는데, 왕세손이 입시하였다. 삼공(三公) 및 동몽교관이 동몽을 거느리고 또한 입시하였다. 상이 《소학》 제사(題辭)를 강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한 글자를 잘못 읽었다."
하고, 다시 전편(全篇)을 읽고 나서 하교하기를,
"오늘 다시 《소학》을 배우는 동자(童子)의 일을 행하였다."
하였다. 이어 왕세손에게 명하여 1장(章)을 강하도록 하고, 삼공 이하가 각각 1장을 강하여 글뜻을 토론하고 나자, 동몽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와 《소학》의 맨 앞 장을 강하도록 하였다. 상의 환후가 회복된 뒤 처음 연 강연이라 하여 삼공과 지사(知事), 특진관에게는 각각 말을 내려주고, 옥당 이하 상하번, 예방 승지는 가자하고, 사관(史官)은 승진 서용하도록 명하였다.
○ 입직하고 있는 선전관(宣傳官)에게 명하여 입시하여 《병학지남(兵學指南)》을 강하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무신(武臣) 가운데 세력이 없는 자는 막힘없이 강하여 외우는데, 부귀(富貴)한 부류들은 제대로 하지를 못한다. 이 어찌 능마아강(能?兒講)을 설치한 뜻이겠는가. 제대로 하지 못한 자는 진법(陣法)을 다 외운 뒤에 체직
하였다.
○ 상이 왕세손과 더불어 소대를 행하여 《소학》을 강하였는데, 옥당과 춘방이 아울러 입시하였다. 상이 세손에게 묻기를,
"물뿌리고 쓸며 응대하는 것이 어찌하여 치국 평천하의 근본이 되는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물뿌리고 쓰는 것은 《소학》의 일이며, 치국 평천하는 《대학》의 일입니다. 《소학》의 일을 다하면 치국 평천하를 하는 데 근본이 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습여지장(習與智長)이란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려서부터 습관을 들여 점차 아주 익숙해지면 어그러질 염려가 없도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아기가 어미의 뱃속에 있는데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아기를 밴 사람의 동정(動靜)이 모두 선하면 배고 있는 아기도 감동하여 선해지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이달은 내가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기 시작한 달이다. 그런데 73세에 15세의 충자(沖子)와 더불어 다시 《소학》을 강하게 되었으니, 어찌 범연한 일이겠는가."
하고, 입시한 승지와 옥당, 춘방과 한림(翰林)촹주서(注書)에게 각각 현궁(弦弓)을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 6월. 바다를 건너던 왜역(倭譯) 현태익(玄泰翼) 등이 풍랑을 만나 배가 파손되어 종행(從行)하던 100명에 가까운 사람과 아울러 모두 익사하였다. 상이 이를 듣고 측은히 여기면서 하교하기를,
"의관(衣冠)을 차린 사람이 왕의 일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듣기에 매우 참혹하다. 휼전(恤典)을 거행하되, 혹 어버이가 살아 있는 자는 특별히 음식물을 나누어주고 그 아들은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복(服)이 끝나기를 기다려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그 나머지 함께 갔던 사람들은 서울과 지방으로 하여금 휼전을 거행하도록 하고, 그 처자들도 보살펴주도록 하라. 아, 사내 하나가 제대로 생활을 못 해나가는 것을 가지고도 이윤(伊尹)은 부끄러워하였는데, 차왜(差倭) 6인이 함께 익사하였으니 또한 매우 측은하다. 특별히 수왜(守倭)에게 휼전을 주어 그로 하여금 그 처자에게 전해주도록 하라."
하고, 이어 동래부(東萊府)에 명하여 해변에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주어 외로운 영혼을 달래도록 하였다. 또 차원(差員)과 통제사(統制使)를 아울러 정배(定配)하도록 하였다.
○ 8월. 진연(進宴)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원량(元良)이 6삭(朔) 후에 배연(陪宴)하였으니, 또한 드문 일이다.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의 관원을 아울러 일체 전(殿)으로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진연이 끝나고 나자, 팔도의 가장 오래된 포흠을 석(石) 수를 계산하여 고르게 줄여주고, 공인(貢人)의 묵은 유재(遺在)도 기묘년의 예에 따라 탕감해 주고, 시민(市民)의 삭세(朔稅)도 헤아려 줄여주도록 하였다. 또 사족(士族)으로서 나이 80세, 서민(庶民)으로서 나이 90세 이상인 자를 아울러 가자하고, 종친과 문무관으로서 나이 70세 이상인 자에게 음식물을 제급(題給)하도록 하였다.
○ 하교하기를,
"왕세손의 덕성과 그릇이 성취된 것은 바로 남유용(南有容)과 박성원(朴聖源)이 가르쳐 인도한 힘이다. 아울러 한 자급씩 더하도록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하고, 마침내 한성부에 명하여 환과고독(鰥寡孤獨) 사민(四民) 및 서민(庶民) 기로(耆老)를 뽑아 아뢰도록 하였다. 상이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입시하였다. 사민(四民)을 뽑아 아뢰니, 차등있게 쌀을 내려주었다. 또 승지에게 명하여 서민 기로에게 네거리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도록 하였는데, 잔치에 참석한 노인들이 각자 배불리 먹고 마시고는 함께 궐 밖으로 와서 절하고 축원하고는 춤을 추었다. 상이 기로에게 명하여 《오례의(五禮儀)》에 의거하여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도록 하였다. 또 관현(管絃)을 내려주어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 9월. 우레의 변이가 있자, 상이 3일 동안 감선(減膳)하도록 명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하늘에 응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신실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백성을 걱정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실제적인 혜택을 강구해야 합니다. 낭비의 요소를 막아 경상 비용을 지탱하고, 희로(喜怒)의 표현도 삼가서 요행의 길을 막아야 합니다. 원기(元氣)를 배양하여 곧은 말이 들려오도록 하고, 사령(辭令)을 삼가서 공정(公正)하도록 해야 합니다. 잗단 일에 얽매이지 말고, 시일(時日)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어찌 재앙을 전환하여 길상으로 바꿀 큰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때에 맞추어 바로잡아주려 하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어찌 감히 노쇠하였다 하여 스스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문관도 상차하여 진계(陳戒)하니, 너그러이 비답하였다.
43년(정해, 1767)
○ 1월.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 2월. 지금부터 우사(雩祀)의 6신(神)에게 모두 씨(氏) 자를 더하고, 이를 정식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우사의 축식(祝式)에 있어서 6신에게 모두 씨 자를 칭하지 않았는데, 유독 사한제(司寒祭)의 축식에만 현명씨(玄冥氏)라 칭하였다. 이때 이르러 상이 우사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면서 그 다른 규례에 대하여 듣고 이렇게 명한 것이었다.
○ 상이 왕세손의 서연(書筵)에서 이미 《시경》의 빈풍(?風)을 다 강하였다는 보고를 듣고, 마침내 명하여 경연과 서연을 경현당에서 같이 베풀었다. 이에 옥당과 춘방이 아울러 입시하여, 상은 《소학》을 강하고 세손은 빈풍을 강하였다. 상이 다시 빈풍의 칠월(七月)을 강하고는 세손에게 이르기를,
"만수무강(萬壽無彊)을 내가 너를 위하여 축원하여, 나에게 효도하는 너의 독실하고 지극한 정성에 보답하고자 한다."
하였다.
○ 상이 왕세손을 거느리고 적전(?田)을 친경(親耕)하였다. 처음에 상이 《주례(周禮)》의 글을 인하여 예조에 명하여 헌종의(獻種儀)를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하루 전에 왕비가 의례대로 헌종(獻種)하였다.
왕비 헌종의는 다음과 같다. 하루 전에 상침(尙寢)이 그 하속(下屬)을 거느리고 전하의 자리를 편전(便殿) 북쪽 벽의 조금 동쪽에 설치하고, 왕비의 자리를 편전 안 북쪽 벽의 조금 서쪽에 설치하는데, 모두 남쪽을 향하도록 한다. 향안(香案) 두 개를 편전 밖의 좌우에 설치한다. 혜빈(惠嬪)의 배위(拜位)를 전정(前庭) 길 서쪽에 설치하고, 왕세손의 배위를 길의 동쪽에 조금 남쪽으로 설치하고, 왕세손빈의 배위를 혜빈 자리의 뒤에 설치하고, 명부(命婦)의 배위를 그 뒤에 설치하는데, 모두 동쪽을 위로 하여 자리를 다르게 겹줄로 설치하되 다 북쪽을 향하도록 한다. 그날 상공(尙功)이 푸른색 상자에 곡식 종자를 담아 안(案) 위에 놓고 먼저 편전의 동쪽 조금 남쪽에 설치한다. 3각(刻) 전에 명부가 각각 예복(禮服)을 갖추고 모인다. 2각 전에 혜빈이 예복을 갖추
그날 상이 왕세손과 더불어 동적전(東?田)에 갔다. 상은 다섯 번 밀어주는 예를 행하고, 왕세손은 일곱 번 밀어주는 예를 행하고, 종실과 대신, 이조 판서 이하가 모두 아홉 번 밀어주는 예를 행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수령과 변장(邊將)들에게 명하여 밭두둑에 나열해 서도록 하고, 바라보고서 돌아가 농사를 권면하도록 하였다. 3일이 지난 뒤 상이 세손과 더불어 남교(南郊)의 성경대(省耕臺)에 행행하였는데, 세손에게 명하여 몸소 밭두둑에 나가 농사짓는 일에 대해 묻고 힘들게 일하는 상황을 살피도록 하였다. 이어 팔도에 하유(下諭)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있고 없는 것을 서로 구제해주고 일을 나누어 서로 도와가며 하도록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동교로 나아가 친경하고, 남교로 나가 성경하였는데, 어찌 바라보게만 하려 한 것이겠는가. 옛사람이 봄에 농경을 살펴 부족한 것을 도와주었던 뜻을 본받으려 한 것이다. 현재 봄농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으니, 각도로 하여금 그 종자 곡식을 도와주고 게을리하지 않게 신칙하도록 하라. 아, 천승(千乘)의 존귀한 몸으로 밭을 밟아보는 것은 실로 백성을 위하는 것이다. 이윤(伊尹)과 제갈(諸葛)도 몸소 농사를 지어 감히 스스로 편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다. 고 재상 김육(金堉)은 밭두둑에서 책을 읽어 지위가 의정(議政)에까지 이르렀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백성을 위하여 대동법(大同法)을 설행할 수 있었겠는가. 옛날 경강(敬姜)은 문백(文伯)의 어미였는데도 몸소 길쌈을 하였다. 그런데 지금 외방의 하는 일 없이 놀면서 입고 먹는 백성들은 지아비는 농사를 짓지 않고 처는 누에치기를 하지 않으니, 이 어찌 경강이 그 아들을 가르친 뜻이겠는가."
하였다.
○ 3월. 왕비가 비로소 친잠례(親蠶禮)를 행하였다. 이에 앞서 친잠례가 《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은데, 국조(國朝)에서는 성종조에 세 번 이 예를 행하고 중종조에 두 번 행하고 선조조에 한 번 행하였으나 문적(文蹟)이 없어져서 증거를 댈 만한 것이 없었다. 이때 이르러 춘추관 당상과 낭청에게 명하여 3조(朝)의 실록을 강화에서 상고해 오도록 하고, 《대명집례(大明集禮)》로 참조하여 상이 친히 절충하였다. 하교하기를,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충자(沖子)와 더불어 친경하였다. 내전(內殿)의 친잠(親蠶)도 예문을 따라야 할 것이나 《오례의》에 관계된 내용이 없으니 지금 뜻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조신(朝臣) 명부(命婦)들의 경우, 지난 무진년에 자의대비(慈懿大妃)에게 진연(進宴)할 때에도 들어와 참석한 규례가 없으니 지금 논할 수는 없다. 혜빈과 세손빈, 옹주와 군주(郡主)들, 왕손부(王孫婦)는 들어와 참석하도록 하라. 공자(孔子)가, '음악 음악 이르
중종조의 예에 의거하여 경복궁의 어원(御苑)에 단(壇) 두 개를 설치하되, 하나는 유문(?門)에 설치하여 내전이 친제(親祭)를 행하고, 그 아래 단은 관경대(觀耕臺)의 규례에 의거하여 내전이 내명부와 외명부를 거느리고 채상(採桑)을 하도록 하라. 하루 전에 내전이 혜빈궁 및 내명부촹외명부와 더불어 먼저 경복궁 재실(齋室)로 가서 한결같이 중국의 고사(故事)대로 내전이 모두 삼헌(三獻)을 행하라. 예의사(禮儀使) 이하 여러 집사(執事)는 옛 규례에 의거하여 여관(女官)으로 임명하라. 진폐찬작관(進幣瓚爵官), 전폐찬작관(奠幣瓚爵官), 천조관(薦俎官)은 안에서 차임할 것이다. 이로써 분부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친잠례는 3월 상사일(上巳日)에 거행하되, 11일에 서릉씨(西陵氏)의 제향에 쓸 향을 먼저 숭현문(崇賢門) 안에서 전하라. 내전, 혜빈, 세손빈, 내명부와 외명부가 수행하라. 축문(祝文)의 머리말은 '조선국왕비 모씨(朝鮮國王妃某氏)'라고 칭하라."
하였다. 이에 친잠을 행하였는데, 하루 전에 왕비가 경복궁에 나아가 선잠(先蠶)에게 제향을 올리고 이어 채상례(採桑禮)를 의례대로 행하였다.
친잠의(親蠶儀)는 다음과 같다.
그날 상침(尙寢)이 왕비의 채상 욕위(採桑褥位)를 단(壇) 위 조금 동쪽에 동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혜빈과 왕세손빈의 채상위(採桑位)를 단 아래에 북쪽 가까이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채상할 내명부와 외명부의 채상위를 단 아래에 남쪽 가까이 북쪽을 향하여 설치하는데, 모두 위치를 다르게하여 겹줄로 서쪽을 위로 하여 설치한다. 왕비가 쓸 갈고리와 광주리를 잡고 있을 자의 자리를 혜빈 자리의 서쪽에 조금 남쪽으로 서쪽을 위로 하여 설치한다. 상공(尙功)이 갈고리를 잡고, 전제(典製)가 광주리를 잡는다. 또 단 위에 왕비가 쓸 갈고리와 광주리를 잡고 있는 자의 자리를 왕비 채상위의 북쪽에 조금 동쪽으로 남쪽을 향하여 서쪽을 위로 하여 설치한다. 혜빈 이하가 쓸 갈고리와 광주리를 잡고 있는 자의 자리를 각 자리의 뒤에 설치한다. 여사(女史) 1인이 갈고리를 잡고 1인이 광주리를 잡는다. 여시(女侍)가 잠종(蠶種)촹갈고리촹박(箔)촹광주리촹시렁 및 양잠(養蠶)에 필요한 기물들을 상전(尙傳)에게 주면, 상전이 받아서 갈고리와 광주리를 잡고 있을 자 및 잠모(蠶母)에게 주고, 왕비가 작헌(酌獻)하기를 기다린다. 예가 끝나면 도로 악차(幄次)로 들어온다. 작헌의(酌獻儀)는 이러하다. 상궁(尙宮) 이하가 각각 복장을 갖추고, 상기(尙記)가 보(寶)를 받들어 모두 악차 앞으로 나아가 사후(伺候)한다. 채상할 시간이 되면, 상의가 악차 앞에 나아가 몸을 구부리고 무릎을 꿇고서 중엄(中嚴)을 계청한다. 혜빈과 왕세손빈 및 채상할 내명부와 외명부가 각각 복장을 갖추면, 전빈이 혜빈과 왕세손빈 및 채상할 내명부와 외명부를 인도하여 모두 단 아래의 자리로 나가도록 한다. 갈고리와 광주리를 잡고 있는 자들이 각각 자리로 나간다. 상의가 몸을 구부리고 무릎을 꿇고서 예를 행하도록 계청한다. 왕비가 상복(常服)으로 갈아입고 나오면 상궁이 앞에서 인도하여 채상할 단으로 나가는데, 남쪽 계단으로 올라가 채상 위로 나아가 동쪽을 향하여 서고, 갈고리와 광주리를 잡고 있는 자가 북쪽 계단으로 올라와 자리로 나아간다. 전빈이 상공과 전제를 인도하여 상위(桑位)로 나아가 서쪽을 향해 서도록 한다. 상공이 갈고리를 받들어 올리면 왕비가 갈고리를 받아 뽕을 따는데, 전제가 광주리를 받들어 받을 뽕을 올리면 왕비가 다섯 가지[條]의 뽕을 따고 그친다. 갈고리를 상공에게 주면 상공이 갈고리를 받고, 전제가 광주리를 받들어 모두 내려와 단 아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상궁이 왕비를 인도하여 도로 자리로 돌아온다. 전빈이 혜빈과 왕제손빈 및 내명부와 외명부를 인도하여 단의 남쪽 자리로 나아가서 혜빈 이하가 채상하는 것을 본다. 처음에 왕비가 채상하면 여사(女史)가 각각 갈고리를 혜빈과 왕세손빈 및 채상할 내명부와 외명부에게 준다. 왕비가 채상을 끝내면 전빈이 혜빈과 왕세손빈 및 내명부와 외명부를 인도하여 차례대로 채상하도록 한다. 광주리를 잡고 있는 자가 혜빈과 왕세손빈에게 광주리를 주면 각각 일곱 가지씩 딴다. 내명부와 외명부는 각각 아홉 가지씩 딴다. 여사가 갈고리를 받아 광주리를 잡고 있던 자와 함께 물러나 자리로 돌아온다. 전빈이 혜빈과 왕세손빈 및 내명부와 외명부를 인도하여 도로 자리로 돌아온다. 전빈이 혜빈과 왕세손빈 및 내명부와 외명부를 인도하여 잠실(蠶室)로 나아간다. 처음에 채
이날 상도 경복궁에 행행하였다. 왕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근정전(勤政殿) 바깥뜰에서 치사(致詞)를 올려 진하(陳賀)하고, 또 안뜰에서 진하하였다. 상이 왕비와 더불어 강녕전(康寧殿)에 나아가 혜빈과 세손 이하의 조현례(朝見禮)를 받았다. 서울과 지방의 묵은 포흠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다.
○ 전주(全州)의 성 안에 불이 나서 2300여 호가 불에 탔다. 선미(船米) 2300여 섬을 특별히 지급하고, 결전(結錢) 1만 냥을 빌려주었다. 처음에 도신이 경기전(慶基殿)에까지 불이 번질까봐 어용(御容)을 향교(鄕校)로 옮겨 받들었는데, 상이 보고를 듣고 그 자리에서 예조 판서에게 명하여 달려가 고유(告由)하고 환안(還安)하도록 하였다.
○ 4월. 왕비가 비로소 수견례(受繭禮)를 행하였다.
왕비의 수견의(受繭儀)는 다음과 같다.
하루 전에 상침(尙寢)이 그 하속(下屬)을 거느리고 전하의 자리를 편전(便殿) 북쪽 벽의 조금 동쪽에 설치하고, 왕비의 자리를 편전 안 북쪽 벽의 조금 서쪽에 설치하는데, 모두 남쪽을 향하도록 한다. 향안(香案) 두 개를 편전 밖의 좌우에 설치한다. 혜빈(惠嬪)의 배위(拜位)를 전정(前庭) 길 서쪽에 설치하고, 왕세손의 배위를 길의 동쪽에 조금 남쪽으로 설치하고, 왕세손빈의 배위를 혜빈자리의 뒤에 설치하고, 명부(命婦)의 배위를 그 뒤에 설치하는데, 모두 동쪽을 위로 하여 자리를 다르게 겹줄로 설치하되 다 북쪽을 향하도록 한다. 그날 상공(尙功)이 대나무 상자에 누에고치를 담아 안(案) 위에 놓고 먼저 편전의 동쪽 조금 남쪽에 설치한다. 3각(刻) 전에 명부가 각각 예복(禮服)을 갖추고 모인다. 2각 전에 혜빈이 예복을 갖추고 수규(守閨)가 앞에서 인도하여 자리로 들어가도록 하며, 왕세손은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전빈(典賓)이 앞에서 인도하여 자리로 들어가도록 하며, 왕세손빈은 예복을 갖추고 수규가 앞에서 인도하여 자리로 들어가도록 하며, 전빈이 명부를 인도하여 자리로 들어가도록 한다. 때가 되면, 상의(尙儀)가 무릎꿇고 중엄(中嚴)을 계청하고, 조금 있다가 또 외판(外辦)을 아뢴다. 상이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상궁(尙宮)이 앞에서 인도하여 나와 자리로 오른다. 왕비가 예복을 갖추고 상궁이 앞에서 인도하여 나와 자리로 오른다. 노연(爐煙)이 오르고, 산선(?扇)과 시위(侍衛)는 평상의 의례대로 한다. 의장(儀仗)은 전교를 인하여 설치하지 말도록 한다. 사찬(司贊)이, "사배(四拜)" 하면, 전찬(典贊)이, "국궁(鞠躬) 사배(四拜) 흥(興) 평신(平身)" 하고 창(唱)한다. 전찬이 창하는 것은 모두 사찬의 말을 받아서 하는데, 뒤에도 이와 같이 한다. 혜빈과 왕세손, 왕세손빈 이하 명부가 몸을 구부려 네 번 절하고 일어나 몸을 편다. 상공이 상자를 받들어 전하의 자리 앞에 이르면 전하가 서고 상공이 받들어 보인다. 그 뒤 왕비의 자리 앞에 나아가 올리면 왕비가 서서 받았다가 상의에게 준다. 상의가 무릎꿇고 받아 상복(尙服)에게 준다. 전하가 자리로 오르고 왕비가 자리로 오른다. 사찬이, "사배" 하면 전찬이, "국궁 사배 흥 평신" 하고 창한다. 혜빈과 왕세손, 왕세손빈 이하 명부가 몸을 구부려 네 번 절하고 일어나 몸을 편다. 상의가 당좌(當座) 앞으로 나가 몸을 구부려 무릎꿇고 예가 끝났다고 아뢰면, 전찬이 또 창한다. 전하가 자리에서 내려오고 왕비가 자리에서 내려와 내전으로 돌아온다. 수규와 전빈이 각각 혜빈과 왕세손, 왕세손빈
누에고치를 의정부, 중추부, 종친, 도위(都尉), 예조와 호조 판서, 정원, 옥당, 입시 사관, 약방 제조, 양도(兩都) 유수(留守), 팔도 도신, 광주 부윤(廣州府尹), 양주 목사(楊州牧使)에게 나누어주니, 신하들이 모두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였다. 이해 가을 상이 석전(釋奠)을 친행하였는데, 돌아와 대신에게 이르기를,
"이번 예를 행할 때 입은 면복(冕服)과 대대(大帶)가 바로 내전이 친잠(親蠶)하여 짠 옷감으로 만든 것이다."
하니, 대신이 대답하기를,
"실로 삼대(三代) 이후의 성대한 일입니다."
하였다.
○ 이박(李?)을 지중추부사로 삼았다. 이박이 당시 100세였는데, 시골에서 부름을 받고 올리와 이 직에 제수된 것이었다. 사은(謝恩)함에 미쳐 입시하도록 명하였는데, 자리를 하사하고 선찬(宣饌)하였다. 상이 묻기를,
"어떻게 소일하고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때때로 《소학》을 외우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늙은 임금과 늙은 신하가 서로 더불어 강송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상이 먼저 《소학》의 맨 앞 장을 외우자, 이박이 이어 강하였다. 특별히 표리(表裏)와 잔치 물품을 내려주어 영광스럽게 해 주었다.
○ 6월. 호남의 조운선(漕運船)이 파선되어 쌀 2만 섬이 물에 빠져버렸다. 도신이 선격(船格) 400여 명을 다 가두고, 법에 비추어 처벌하도록 장계로 청하였다. 상이 어사 서명선(徐命善)에게 명하여 가서 조사하도록 하였는데, 고의로 파선시킨 것이 아니었다. 마침내 하교하기를,
"주사(周史)에 이르지 않던가, 거센 바람이 파도를 일으킴이 없다고. 덕이 부족한 내가 왕위에 있으니 바람이 순조롭고 비가 알맞게 내리는 것은 감히 바랄 수 없다 하더라도 어찌 지난번의 바람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400명의 선격은 바로 나의 어린 자식들이니, 범한 바가 있어 처벌하더라도 오히려 불쌍할 것이다. 더구나 어사가 아뢴 바를 듣건대 수천명의 그 가족이 북쪽을 바라보며 울부짖고 있다 하니, 마치 직접 듣고 있는 듯하다. 각 배의 도사공(都沙工)은 당초 머뭇거린 죄로 도신으로 하여금 형문하여 유배보내도록 하고, 그 나머지 사격(沙格)은 아울러 풀어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어어 법성진 첨사(法聖鎭僉使)를 자급과 이력이 있는 자로 골라 보내도록 명하였다.
○ 7월. 백두산(白頭山)을 북악(北嶽)에 질사(秩祀)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국조(國朝) 오악(五嶽)의 제사에 있어 정평(定平)의 비백산(鼻白山)을 북악으로 삼았다. 이때 이르러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아뢰기를,
"백두산은 바로 우리나라의 조종산(祖宗山)인데, 북도(北道)는 또 국조의 발상지(發祥地)입니다. 북악의 제사를 이제 백두산으로 옮겨 설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대신에게 물으니, 봉조하(奉朝賀) 유척기(兪拓基)가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산들이 모두 백두산에서 맥이 시작하는데, 산의 근방이 또 열성(列聖)의 발상지입니다. 나라를 세운 지 400년 가까운데 아직까지 높여 제사지내지 않았으니, 궐전(闕典)인 듯합니다. 게다가 큰 장백산(長白山)이 이미 경성(鏡城)과 길주(吉州)의 경계에 있으니, 이로써 북악을 삼지 않고 장백산 남쪽으로 900리나 떨어진 비백산을 북악으로 정하는 것이 실로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백두산에 제사지내는 일에 대해 신은 다른 의논을 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함경도 도신에게 명하여 갑산부(甲山府)에서 8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운총보(雲寵堡) 북쪽 망덕평(望德坪)에 땅을 골라 각(閣)을 세워 백두산에 망사(望祀)를 지내도록 하고, 비백산의 제사도 파하지 말도록 하였다.
○ 8월.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아뢰기를,
"근래 농사가 여러 해 동안 풍년이 들었으니, 이러한 때 곡식을 비축해 두는 것이 실로 급선무입니다. 청컨
하니, 따랐다.
○ 9월. 상이 왕세손과 더불어 문묘에 작헌례를 행하였다. 상이 정위(正位)에 작헌하고, 왕세손이 배위(配位)에 작헌하였다. 예의사(禮儀使)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하였는데, 기쁨을 표시하려 한 것이었다.
○ 11월. 임진일에 동지(冬至)가 들었다. 윤음을 내려 신하들을 신칙하였다.
○ 서북의 수신(帥臣)에게 하유하여, 파수(把守) 군졸들의 노고를 위문하도록 하였다.
○ 12월. 하교하기를,
"근래 《고려사(高麗史)》의 제사 의식을 보니, 집사관(執事官)으로서 관직에 있는 자는 본사(本司)에서 청재(淸齋)하고 산직(散職)에 있는 자는 모여서 청재하였다. 지금부터 집사관은 대소를 막론하고 제향을 지내기 위하여 향을 받기 하루 전에 각기 본사 및 공공 관청에서 청재하도록 하라."
하였다.
○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다.
○ 상이 왕세손 및 대신과 국구(國舅)를 거느리고 덕유당(德游堂)에서 소작(小酌)을 설행하였다. 악생(樂生)에게 명하여 피리를 불어 흥을 돋우도록 하였다. 태종조의 고사를 따른 것이었다.
67권 영조조 11
44년(무자, 1768)
○ 1월. 윤음을 내려 대소 신하들을 신칙하였다.
○ 하교하기를,
"《주례(周禮)》에, '왕에게 민수(民數)를 올리면 왕이 절하고 받는다.' 하였으니,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 식년(式年)에 단자를 받들어 가감(加減)을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한성부가 무자 식년 호구수를 올렸는데, 서울의 오부(五部) 및 팔도의 호(戶)는 167만 9865이고, 인구는 700만 6248명이었다. 대개 효종 8년 정유년의 판적(版籍)과 비교하였을 때, 호는 102만이 늘어나고 인구는 480만 명이 늘어났다. 조세를 경감하여 여유있게 만들어주고, 백성을 기르고 재물을 모아 국력을 양성하는 것이 이에 성대하였다고 하겠다.
○ 강계(江界)에서 진공(進貢)하는 인삼의 숫자를 줄여주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송 나라는 화석강(花石綱)으로, 명 나라는 과은(課銀)으로 백성의 마음이 떨어져 나갔으니, 어찌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부분이 아니겠는가. 인삼이 생산된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 가격이 날로 올라 동서의 백성이 지탱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이에 관동의 인삼은 이미 상정(詳定)으로 만들고 또 경공(京貢)으로 만들었다. 지금 관서 도신의 소장을 보니, 강계의 백성이 남녀를 막론하고 말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하니, 직접 보고 듣는 듯하다. 이제 숫자를 줄여주고자 하는데, 우선 어공(御供)으로 더 정한 3근(斤)부터 특별히 없애주도록 하라. 내국(內局)도 이와 같이 하는데, 더구나 다른 데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진달한 소장 가운데 여러 건(件)을 조목별로 나열하였는데, 대신과 비국 당상이 소상하게 회계(回啓)하고 등대(登對)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호조의 경상사(京上司)에서 연례(年例)로 별무(別貿)하는 인삼 가운데 헤아려 줄여준 것이 매우 많았다.
○ 상이 선정신 조광조(趙光祖)의 사판(祠版)이 시골에서 강교(江郊)로 올라온다는 보고를 듣고, 호조에 명하여 가사(家舍)의 값을 도와주도록 하고, 제문을 친히 지어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 6월. 고 충신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을 녹용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좌의정 한익모(韓翼謨)가 아뢰기를,
하였는데, 영의정 김치인이 아뢰기를,
훈신(勳臣)은 조천하지 않지만 충신에게는 이러한 규례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김치인의 말을 옳게 여겨, 그 봉사손(奉祀孫)을 녹용하라고만 명하였다.
○ 나리포(羅里鋪)의 절미(折米) 2000석을 그 지역의 배로 제주(濟州)까지 운송하도록 명하였는데, 제주에 흉년이 들어서였다.
○ 7월. 선정신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의 후손을 녹용하도록 명하였다.
○ 호남에 가뭄이 들고 황충(蝗蟲)이 일어났다. 포제(?祭)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요숭(姚崇)이 한 것처럼 황충을 태워버리는 것이 비록 눈 앞의 급선무라 하더라도 노회신(盧懷愼)의 말도 의견이 없지 않다. 벌레가 곡식을 갉아먹는 것은 진실로 부덕한 나에게 말미암는 것이다. 저것이 비록 미물(微物)이지만 한번 호령하여 태워버린다면 이것이 사람에게 사람을 죽이도록 권해놓고 또 법으로 그를 죽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후로 도신을 신칙하여 모아들인 벌레를 구덩이를 파서 묻어버려, 태워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80에서 90세까지의 노인들을 불러보았다. 지팡이를 짚으며 자제(子弟)가 따라 들어오도록 특별히 허락하였다. 상이 일어서서 맞이하고, 쌀과 비단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 12월. 대신과 예관이 성수(聖壽)를 이유로 진연(進宴)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장례를 치르기 전이다. 어찌 나로 하여금 두거(杜擧)의 기롱을 불러들이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대개 이때 고 영의정 윤동도(尹東度)가 졸하여 장사를 지내지 않은 상태였다.
○ 탐라(耽羅)에서 진공(進貢)하는 귤을 실은 배가 파선되어 선원이 물에 빠져 죽었다. 상이 명하여 휼전(恤典)을 더하도록 하였다. 이어 올해의 당유자(唐柚子)는 천신(薦新)하는 숫자 이외에는 다시 봉진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 고 상신 정분(鄭?)의 후손을 녹용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단종조의 세 대신에 대해 복관(復官)하도록 명하였으나, 정분의 경우 누가 후손인지 알 수가 없어서 아직까지 후손에 대한 은전을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장흥(長興)에 사는 정씨 성을 가진 자가 산지(山地)를 쟁송(爭訟)하였는데, 관가에서 그 선묘(先墓)를 파서 검사하다가 지석(誌石) 두 조각을 발견하였다. 곧 정광로(鄭光露)의 묘였는데, 정광로는 정분의 아들로서 시사(時事)가 어려울 것을 미리 알고 미친 척하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죽음에 미쳐 그 아들이 사실을 갖추어 지석에 새겨 묻고는 훈계를 남겨 내력을 비밀히 감추도록 하였다. 이때 이르러 지석을 인하여 비로소 그 세파(世派)를 상세히 알게 되었는데, 과연 정분의 후손이었다. 경연 신하가 이 일을 아뢰니, 상이 기이하다 이르고 이렇게 명한 것이었다.
45년(기축, 1769)
○ 1월. 상이 체후가 편찮다는 이유로 기곡제(祈穀祭)를 섭행(攝行)하도록 명하고, 마침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그 밤을 새웠다. 하교하기를,
"구성(九成)의 음악에 지극한 이치가 담겨 있는데, 친향할 때와 섭행할 때 그 소리의 빠르기가 아주 다르다. 만약 순식간에 연주해 버린다면 어찌 감통(感通)할 수가 있겠는가. 아악(雅樂)과 속악(俗樂)을 아울러 신칙하라."
하였다. 이어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 관서 감영과 병영의 자모전(子母錢) 10여만 냥을 면제해 주도록 하니, 대신이 경비의 부족을 이유로 어렵게 여겼다. 상이 이르기를,
하고, 마침내 각도의 식리(殖利)하는 폐단을 금하도록 명하였다.
○ 대사성에게 명하여 유생을 거느리고 입시하여 십잠(十箴)을 강하도록 하였다.
○ 선전관에게 명하여 경기의 진휼하는 고을로 달려가 진휼의 정사를 살피도록 하였다.
○ 공시인(貢市人)을 불러 고질적인 폐단을 물었다. 궁척(宮戚)의 집안으로서 공시의 돈을 갚지 않은 자를 모두 죄주도록 하고, 이어 공시 당상(貢市堂上)을 삭직(削職)하였다.
○ 상이 숭정전에 나아가 진연(進宴)을 행하였다. 신하들이 술잔을 들어 축수를 올리고 나니, 상이 슬퍼하며 이르기를,
"흉년이 든 해에 진연을 받으니, 너무 태평한 것 아닌가. 내가 굶주린 백성들을 생각하게 되니, 이 마음을 어찌 억제할 수 있겠는가. 지금, '풍년이 들기를 축원하다'는 말로 팔도의 백성을 위하여 송축하노라."
하였다.
○ 5월. 상이 관경대(觀耕臺)에 나아가 보리 베는 것을 보고, 마침내 수맥례(受麥禮)를 행하였다.
친수 예곡의(親受刈穀儀)는 다음과 같다.
하루 전에 액정서(掖庭署)가 전하의 판위(版位)를 편전 뜰 가운데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왕세손의 시좌위(侍坐位)를 판위의 동쪽에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그날 예조 판서 및 경적사(耕?使)와 적전령(?田令)이 모두 흑단령(黑團領)으로 동적전(東?田)으로 나아가 전민(田民) 40명을 거느린 채 상복(常服)에 청건(靑巾) 차림으로 곡식을 벤다. 이것이 끝나면 적전령의 감시 아래 푸른색 상자 두 개에 담는데, 하나는 자성(?盛)에 대비하는 것이고 하나는 장종(藏種)에 쓰도록 올릴 것이다. 이것을 가자(架子)에 받들어 푸른색 목면 보자기로 덮는다. 인로(引路)가 청건(靑巾) 차림으로 가자군(架子軍)과 함께 먼저 가고, 그 다음으로 가자가 가고, 그 다음으로 적전령, 그 다음으로 경적사와 예조 판서가 간다. 좌우로 나누어 대궐로 나간다. 가자는 정문(正門)을 통하여 들어와 임시로 합문(閤門) 밖에 두는데, 기일에 앞서 차(次)를 설치한다. 수맥(受麥)할 때가 되면 승지와 사관 및 시위할 관원이 각각 복장을 갖추는데, 승지와 사관은 흑단령을 차려 입고 시위는 기물과 복장을 차려 갖춘 채 모두 합문 밖으로 나아간다. 좌통례(左通禮)가 무릎꿇고 중엄(中嚴)을 계청하고, 조금 있다가 또 외판(外辦)을 아뢴다. 전하가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나오면 좌우 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뜰 가운데 판위에 이르러 남쪽을 향해 서도록 한다. 산선(?扇)과 시위는 보통 때의 의례대로 한다. 왕세손이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뒤를 따라 나와 시좌위로 나아가 서쪽을 향해 선다. 적전령이 자성(?盛)으로 쓸 보리를 담은 상자를 받들어 무릎꿇고 경적사에게 주면, 경적사가 무릎꿇고 받아서 근시에게 주고 근시가 무릎꿇고 받아서 올린다. 찬의(贊儀)가, "궤(?)" 하고 창하면, 좌통례가 무릎꿇도록 무릎꿇고 계청한다. 전하가 무릎꿇고 받는데, 임시로 안(案)을 설치하여 다시 근시에게 주면 근시가 무릎꿇고 받는다. 찬의가, "흥(興)" 하고 창하면, 좌통례가 일어나도록 무릎꿇고 계청한다. 전하가 일어나면 근시가 상자를 경적사에게 주고, 경적사가 무릎꿇고 받아 적전령에게 주고, 적전령이 무릎꿇고 받아 나간다. 임시로 합문 밖에 두었다가 장종(藏種) 상자 안에 넣는다. 그 뒤에 가자에 담아 태상시(太常侍)로 가져가 받들어 보관한다. 좌통례가 당좌(當座) 앞으로 나아가 몸을 구부리고 예가 끝났다고 아뢴다. 찬의가 또 창하면 전하가 내전으로 돌아간다. 왕세손이 뒤따라 들어가고, 승지와 사관 이하가 물러난다.
창덕궁(昌德宮)으로 나아가 진전(眞殿)에 바쳤다.
○ 왕비가 장종례(藏種禮)를 행하였다.
왕비의 장종의(藏種儀)는 다음과 같다.
하루 전에 상침(尙寢)이 그 하속(下屬)을 거느리고 전하의 자리를 편전(便殿) 북쪽벽의 조금 동쪽에 설치하고, 왕비의 자리를 편전 안 북쪽벽의 조금 서쪽에 설치하는데, 모두 남쪽을 향하도록 한다. 향안(香案) 두 개를 편전 밖의 좌우에 설치한다. 혜빈(惠嬪)의 배위(拜位)를 전정(前庭) 길 서쪽에 설치하고, 왕세손의 배위를 길의 동쪽에 조금 남쪽으로 설치하고, 왕세손빈의 배위를 혜빈 자리의 뒤에 설치하고, 명부(命婦)의 배위를 그 뒤에 설치하는데, 모두 동쪽을 위로 하여 자리를 다르게 겹줄로 설치하되 다 북쪽을 향하도록 한다. 그날 장
○ 하교하기를,
"《서경》 순전(舜典)에, '율(律)촹도(度)촹양(量)촹형(衡)을 같게 한다.'고 하였는데, 요순(堯舜)을 본받고자 하면 조종(祖宗)을 본받으라 하였다. 지금 정해년의 실록(實錄)을 상고해보니,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에서 조세를 거둘 때 대두(大斗)로 거듭 거두어들이는 폐단을 금하도록 명하였다.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이 그 법은 하나이다. 관부에서 대두로 거두어들여 소두(小斗)로 나누어주며, 시전(市廛)에서 대두로 사서 소두로 파는 것을 비국과 평시서로 하여금 엄히 금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적전(?田)에서 수확한 서속(黍粟)을 친히 받았다. 이어 하직 인사하러 온 수령들을 불러보고 하교하기를,
"말년에 접어들어 어린 자식들을 그대들에게 부탁하니, 정신을 가다듬어 힘써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숭정전에 나아가 《대학》을 강하였다. 대사성에게 명하여 유생을 거느리고 입시하여 《논어》를 강하도록 하였다. 숭정전 뜰에 태학 식당(食堂)을 설치하였는데, 상이 1반(盤)을 들었다.
○ 상이 숭정전 월대(月臺)에 나아가 기구(耆舊)의 조참(朝參)을 행하였는데, 신하들이 나이 순으로 나열해 섰다. 상이 좋은 말을 해 달라는 뜻으로 온 뜰에 가득한 노신들로 하여금 각각 생각하고 있는 바를 진달하도록 하였다. 이어 영수각(靈壽閣)에 나아가 기로(耆老) 신하들과 함께 《소학》을 강하였다.
○ 동짓날에는 환곡을 받아들이지 말고, 이를 정령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이날엔 관문(關門)을 닫았던 뜻을 따른 것이다.
○ 상이 글을 지어 왕세손을 경계시켰는데, 그 글에,
"아, 시헌력(時憲曆)의 신서(新書)가 이미 나왔는데, 네 할아비의 나이가 이제 77세이다. 한 해도 저물어가고
하였다. 이어 교서관에 명하여 인쇄하여 동궁에 들이고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 12월. 사한제(司寒祭)를 행하였다. 이때 겨울 날씨가 따뜻하여 얼음이 얼지 않았다. 상이 근심하여 특별히 유신(儒臣)을 보내어 제사를 행하도록 하였다. 밤 3고(鼓)에 상이 자정전(資政殿)에 나가 땅에 자리를 깔고 엎드려 이르기를,
"《춘추》에서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는 것을 기롱하였다. 납제사(臘祭祀)가 머지않은데 겨울 날씨가 따뜻하여 이상하니 근심스러워 편안히 있을 겨를이 없다."
하고, 인시(寅時)경이 되어서야 내전으로 돌아왔다. 새벽이 되자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면서 살을 에는 듯한 날씨가 되더니 강물이 꽁꽁 얼어붙게 되었다.
46년(경인, 1770)
○ 1월.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 상이 궐문에 임하여 사민(四民)을 구휼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해 택수재(澤水齋)가 문왕(文王)이 사민을 구휼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내가 일찍이 우러러보았다. 지금 새해 초를 맞아 강연의 유신이 진달한 '진대(賑貸)' 두 글자는 감흥을 일으킬 만하다. 예전에 주 나라 문왕은 여상(呂尙)의 말을 듣고 하루를 넘기지 않고 실행하였는데, 더구나 새해를 맞이하였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한성부로 하여금 사민을 뽑아오도록 하라."
"사민이 너무 많으니 아마도 함부로 받는 자가 있는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똑같이 나의 어린 자식이다. 비록 함부로 받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손상될 것이 뭐 있겠는가."
하였다. 이날 밤 야대(夜對)를 행하였는데, 이르기를,
"진서산(眞西山)이, 야대가 주방(晝訪)보다 낫다고 하였는데, 진실로 격언이다."
하였다. 각도에 명하여 효행이 드러난 자를 천거해 보고하도록 하였다.
○ 하교하기를,
"김창흡(金昌翕)은 도의를 믿고 지켜 곤궁함을 편안히 여기고 책을 읽어 산림(山林)에 뜻을 두었고, 이병태(李秉泰)는 청렴 고결하며 강직하여 굶주린 채 생을 마쳤다. 아울러 치제(致祭)하여 내가 말년에 드러내어 장려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2월. 무과(武科) 출신(出身) 가운데 어버이의 나이가 70인 자에 대해 부방(赴防)과 납미(納米)를 면제해주고, 한 호(戶)에서 3, 4인이 군역을 지고 있는 경우 1인을 감하여 주도록 하였다. 이를 정식으로 삼았다.
○ 상이 왕세손과 더불어 광명전(光明殿)에서 《중용》을 강하였다. 상이 천명(天命)의 뜻을 물으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하늘이 만물을 화생(化生)하는데 기(氣)로써 형태를 만들고 이(理)도 부여하니, 마치 그 명령을 행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다시 수도(修道)의 뜻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성(性)은 성인과 범인이 비록 같다 하더라도 기품(氣稟)은 지나치고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를 닦은 연후에야 그 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다시 품절(品節)의 뜻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높은 사람을 높이고 친한 사람을 친히 하는 것이 모두 이른바 품절입니다."
하자, 상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어 시(詩)를 친히 짓고 화답하도록 명하니, 세손이 그 자리에서 화답하여 올렸다. 상이 더욱 기특하게 여겨 춘방과 계방의 관원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 5월. 《문헌비고(文獻備考》가 완성되었다. 국조(國朝)의 전장(典章)에 관한 책으로는 《오례의》와 《속오례의》, 《경국대전》과 《속경국대전》, 《여지승람(輿地勝覽》,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이 있다. 그러나 문호(門戶)가 과(科)를 달리하여 자세하고 간략함이 서로 보완해 주면서도, 아직까지 한 부(部)로 회통(會通)하는 책이 없었다. 그러므로 노사 숙유라도 그 연혁을 아는 사람이 없어 육관(六官)의 뭇 관직들이 모두 서사(胥史)의 전하는 말만을 의뢰하여 이리저리 잘못되어 점차 그 옛모습을 잃게 되었다. 이때 이르러 상이 편집청(編輯廳)을 설치하고 당상 10인과 낭청 9인을 차출하여 국조의 공사(公私) 기실(紀實)의 책을 널리 모으도록 명하였는데,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를 모방하되 그 규모를 조금 고치도록 하였다. 책이 거의 완성되자, 또 시임촹원임 대신으로 하여금 같이 고증하여 바로 잡도록 하였다. 이름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라 하였는데, 상위(象緯)촹여지(輿地)촹예(禮)촹악(樂)촹병(兵)촹형(刑)촹전부(田賦)촹재용(財用)촹호구(戶口)촹시적(市?)촹선거(選擧)촹학교(學校)촹직관(職官) 등 모두 13개 문(門)에 총 100권이었다. 이로부터 나라에 일이 있어 고찰해 의거할 때는 대부분 이 책을 의뢰하였다.
○ 측우기(測雨器)를 나누어 주었다. 상이 세종조 측우기의 제도를 열람하고, 호조에 명하여 이를 제조하여 두 궁궐과 관상감에 설치하고 또 양도(兩都)와 팔도에 나누어 보내 비가 내릴 때마다 몇 자 몇 치로 보고하도록 하였다. 상위고(象緯考)를 편집한 것을 인하여 이렇게 명한 것이었다.
○ 주(州)촹부(府)촹군(郡)촹현(縣)의 학교에 명하여 한결같이 태학의 규례에 의거하여 아울러 송 나라의 육현(六賢)을 전(殿) 안에 배향하도록 하였다. 학교고(學校考)를 편집한 것을 인하여 이렇게 명한 것이었다.
○ 포도청의 난장형(亂杖刑)을 영원히 없애도록 명하였다. 형고(刑考)를 편집한 것을 인하여 이렇게 명한 것
○ 윤5월. 객성(客星)이 나타났다. 상이 밤에 편집청의 신하들 및 관상감의 사력(司曆)을 불러 이것이 없어지게 할 방책을 강구하였다. 매일 밤 몸소 월대에 나와 측후하며 이르기를,
"원컨대 백성과 나라로 옮겨가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이렇게 3일을 하자 객성이 사라졌다.
○ 태복시(太僕寺)가 아뢰기를,
"제주의 전 판관이 진공(進貢)한 말 3필이 모두 보잘것없고 수척하니, 잡아다 처치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흉년이 들면 말에게 곡식을 먹이지 않는다고 《예기(禮記)》에 나와 있지 않은가. 백성들이 이렇게 굶주리고 있는데 말이 수척한 것을 어찌 논하겠는가. 특별히 묻지 말도록 하라. 올해의 공마(貢馬)는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 이에 앞서 의정부가 부속(府屬)의 늠료(?料)를 위하여 시민(市民)에게 빚을 놓고 그 이자를 거두어 그 비용에 충당하였다. 이때 이르러 상이 공시인(貢市人)의 고통스러운 점을 묻다가 이에 대하여 듣고 하교하기를,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에서 정부가 부속의 늠료를 위하여 백성과 더불어 이끗을 다툰단 말인가. 그 채권을 태워버리도록 하라."
하였다.
○ 7월. 상이 왕세손을 거느리고 홍문관에 행행하여, 강학(講學)하고 선찬(宣饌)하였다. 상이 세손에게 이르기를,
"옛사람이, '순(舜)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였다. 사람이 순과 같이 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범인(凡人)은 뜻을 세우는 것이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신하들이 모두 너의 대답을 들었으니 오늘의 말을 깊이 유념하여 뜻 세우기를 반드시 견고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 입시한 유신(儒臣)에게 이르기를,
"훗날 충자(沖子)를 잘 보도하여 오늘의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 11월. 제주에 기근이 들었다. 나리포(羅里?)의 쌀 5000섬을 지급하고, 삼명일(三名日) 방물(方物)의 봉진을 내년까지 정지하고, 삭선(朔膳)도 반으로 줄이도록 명하였다.
○ 팔도와 양도의 묵은 포흠 4만 섬과 공인(貢人)의 유재미(遺在米) 2000섬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는데, 특지(特旨)였다.
47년(신묘, 1771)
○ 1월. 기곡제(祈穀祭) 때에는 비록 친향(親享)하는 것이 아닐 경우에라도 이틀 동안 산재(散齋)하고 하루 동안 치재(致齋)하며, 이를 정식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 4월. 왕세손이 손으로 써서 상소하기를,
"대덕(大德)이 우뚝히 넓으며 보령(寶齡)이 더욱 높아 칭송이 강릉(岡陵)에 오르고 경사가 구우(區宇)에 넘칩니다. 오늘날의 신하 가운데 누군들 기뻐 춤을 추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신의 마음에 있어 기쁨을 표현하고 경사를 드날릴 방도를 생각함이 끝이 없었습니다만, 성지(聖志)가 겸양하는데 절실하고 신의 마음도 그냥 따르게 되어 그럭저럭 침묵한 채 오늘날에까지 이르렀으나 평소 억울하여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고 있었습니
하니, 상이 답하기를,
"네가 평소 침묵을 지키고 있던 것을 내 이미 알고 있다. 민자(閔子)와 같이 효성스럽다는 칭송은 나도 너에게 기대하는 바이다. 양로연이라 해놓고 자연스레 네 할아비에게 칭상하려고 이렇게 청하였으니, 뜻이 또한 깊도다. 국초의 양로연은 《오례의》에 실려 있는 바로 300년을 내려온 고사(故事)이니 또 선조를 이어 따르는 도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쾌(快)' 자와 '족(足)' 자는 네 할아비가 깊이 경계하는 바이다. 종고의 소리와 관약의 소리는 전(殿)에 임하거나 대가(大駕)가 거둥할 때도 억지로 듣는데, 더구나 양로연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 하교하기를,
"황구(黃口)는 그래도 그 사람이 있는 것이지만 백골(白骨)은 어디에 징수를 한단 말인가. 설령 한 현(縣)에 1구(口)씩이라 하더라도 360주(州)로 말하면 이는 360명의 이미 죽은 뼈에 징수하는 것이다.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는 것으로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이번 이 하교는 비국에서 팔도와 양도(兩都)에 반포하여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 5월. 가뭄이 들었다. 상이 여섯 가지 일로 자신을 꾸짖고 감선(減膳)하도록 명하였다. 비가 내리게 되자 예조가 복선(復膳)하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각도에 고르게 내렸는지 알 수 없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 장연 부사(長淵府使)에게 영장(營將)을 겸하여 장산(長山) 남쪽의 읍(邑)과 진(鎭)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장산곶(長山串)은 수로(水路)가 매우 험하여 산 남쪽 읍과 진의 수군(水軍)은 장산을 지나 북수영(北水營)으로 조련(操鍊)을 하러 다녔는데, 이따금 돛대가 부러져 물에 빠져죽는 일이 있었다. 이때 이르러 대신이 이를 아뢰자, 마침내 장연부사가 수군 영장을 겸하여 장산 남쪽의 다섯 읍과 세 진의 수군을 나누어 조련하여, 장산을 지나 모여 조련하는 데 따른 폐단을 없애도록 명하였다.
○ 8월. 정업원(淨業院)에 비(碑)를 세웠다. 정업원은 흥인문(興仁門) 밖 연미정동(燕尾汀洞)에 있는데, 단종왕후 송씨(宋氏)가 손위(遜位)한 뒤 지냈던 옛터이다. 이때 이르러 특별히 각(閣)을 세우도록 명하고,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다섯 글자를 친히 써서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또 '동망봉(東望峯)' 세 글자를 친히 써서 정업원에서 마주보이는 봉우리의 돌 위에 새기도록 하였는데, 그 봉우리는 곧 왕후가 올라가 영월(寧越)을 바라보던 곳이다.
○ 10월. 조경묘(肇慶廟)를 전주(全州)에 세웠다. 처음에 7도(道)의 유생 이득리(李得履) 등이 상소하여, 국조(國朝) 시조(始祖) 사공(司空)의 사당을 세우도록 청하였다. 상이 예조 판서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는데,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다시 조정 신하들을 불러 물었는데, 조정 신하들이 모두 대답하지 못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禮)는 인정(人情)을 따르는 것이다. 지금 조선의 사대부들은 오히려 그 시조(始祖)를 높이 공경하여 그 예를 꾸미는데, 더구나 나라의 시조이겠는가. 고구려와 신라에도 모두 시조묘(始祖廟)가 있으니, 예에는 본래 풍
하였다. 이에 유사(有司)를 보내어 묘를 전주 경기전(慶基殿) 북쪽에 세웠다. 세손에게 명하여 사판(祠版)의 제사(題辭)를 쓰되, '선공(先公)'이라 칭하도록 하였다. 자정전(資政殿)으로 받드는 날 곤면(袞冕)을 갖추고 전배(展拜)하였는데, 대신과 예조 판서에게 명하여 받들어 묘까지 가져가 안치하도록 하였다. 제례(祭禮)와 묘관(廟官)은 다 경기전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다. 호남 11고을의 결전(結錢)과 선무포(選武布) 및 묵은 포흠을 면제해 주었다. 경기와 호서의 신련(神輦)이 지나간 고을도 이에 따랐다.
○ 11월. 신문고(申聞鼓)를 건명문(建明門) 밖에 세우도록 명하였다. 국초에 신문고를 설치하여 억울함을 지닌 백성들로 하여금 북을 쳐서 알리도록 하였는데, 그 법이 폐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상이 《보감(寶鑑)》에 대해 언급하다가 마침내 복구하도록 명하였다. 북을 울리는 자가 있으면 병조에서 해조(該曹)로 내려 추문(推問)하도록 계청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도록 하였다.
48년(임진, 1772)
○ 1월.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 상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태학 유생을 불러보았다. 하교하기를,
"예전에 당(唐) 나라의 양성(陽城)이 국자 사업(國子司業)으로 있을 때 제생(諸生)들에게 깨우쳐 준 바가 있었는데, 더구나 임금이 되어서 제생들을 효(孝)로써 권면하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새해를 맞이하여 어버이는 고을 문에 기대어 자식을 기다리고 자식은 고향을 바라다 보게 될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를 뵙고자 하는 자는 즉시 허락해 주도록 태학에 분부하라."
하였다.
○ 의승(義僧) 영규(靈圭) 및 칠백의종(七百義●)에 사제(賜祭)하도록 명하였는데, 바로 임진란 때 금산(錦山)에서 절개를 지켜 죽은 자들이다.
○ 2월. 상이 덕유당(德游堂)에서 의정부의 진찬(進饌)을 받았다. 왕세손이 잔을 드리고 계단을 내려와 천세(千歲)를 불렀는데, 시임촹원임 대신과 경재(卿宰)도 그 예처럼 하였다. 중추부와 도총부, 기사(耆社)와 주원(廚院)이 차례대로 진찬하여 5일 만에 두루 다하였다. 국초의 고사를 따른 것이었다. 서울과 지방에 명하여 사(士)촹서(庶)로서 어버이의 나이가 70, 80세인 자에게 특별히 잔치 물품을 내려주어 그 어버이에게 헌수(獻壽)하도록 하였다.
○ 11월. 상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입시하였다. 상이 시임촹원임 대신, 구경(九卿), 삼사(三司)를 불러, 현종대왕이 왕업을 이어받아 지키고 경사를 길러냈는 바 세실(世室)로 모셔야 마땅하다는 뜻으로 물으니, 모두들 옳다고 하였다. 왕세손이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숭릉(崇陵)에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려 하시는데, 신도 감히 전하에 대해 청합니다."
하였다. 대개 내년이 성수(聖壽) 팔순(八旬)이 되기 때문이었다. 뭇 신하들이 이어 번갈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에 현종대왕에게 휘호 '소휴연경 돈덕수성(昭休衍慶敦德綏成)'을, 명성왕후(明聖王后)에게 '희인(禧仁)'을, 상에게 존호(尊號) '대성광운 개태기영(大成廣運開泰基永)'을, 정성왕후(貞聖王后)에게 '공익(恭翼)'을, 중궁전에 '예순(睿順)'을 올렸다. 상이 세손과 더불어 태묘에 나아갔는데, 세손에게 명하여 봉심례(奉審禮)와 상책보례(上冊寶禮)를 행하도록 하였다. 상이 지영(祗迎)하여 사배(四拜)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세손이 또 상과 중궁전에 책보를 올렸다. 상이 숭정전에 나아가 친히 지은 반사문(頒赦文)을 선포하였는데, 이르기를,
"아, 성조(聖祖)께서 심관(瀋館)에서 왕업을 열어 대대손손 천만억년을 이어가도록 하셨다. 지난 두 해에 비록 세실(世室)에 봉안하려 하였으나 참으로 겨를이 없어 아직까지 편치 못한 마음이 맺혀 있었다. 오르내리시는 조종(祖宗)의 지도가 인정과 예의에 진실로 부합하였다. 어찌 뭇사람들의 청을 기다리겠는가. 최근에야 크게 깨달았다. 올해가 무슨 해인가. 옛날에 입학(入學)을 한 해와 같은 갑자이니, 전후의 임진년이 어제처럼 어슴푸레하다. 이 어찌 범연한 일이겠는가.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선조를 빛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
하였다. 왕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치사(致詞)와 전문(箋文)을 올려 칭하(稱賀)하였다.
49년(계사, 1773)
○1월. 상이 숭정전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하였다. 성수(聖壽) 팔순에, 즉위한 지 50년이 되어서였다. 상이 선조(先朝) 계사년 1월 10일에 진하를 받았던 고사에 감동되어 이날 받았다. 80세 이상의 기로(耆老) 58인을 흥화문(興化門)에서 불러보고, 옷감과 음식물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 어진(御眞)을 그리도록 명하였다. 선조(先朝) 때 이 해에 어진을 그렸던 것에 감흥이 일어 명한 것이었다. 완성되자, 초본(初本)과 정본(正本) 2정(幀)을 자정전(資政殿) 서쪽 벽에 내걸고 도감의 당상과 낭청을 불러 선찬(宣饌)하였다. 왕세손이 술잔을 올리고 천세(千歲)를 부르니 전상(殿上)의 신하들이 일제히 천세를 불렀다.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세손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다."
하였다. 어어 초본과 정본 두 개 가운데 어느 것이 나은지 물으니, 모두 초본이 낫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초본은 육상궁(毓祥宮)에 봉안하고 정본은 태녕전(泰寧殿)에 봉안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친히 시를 지었는데, 이르기를,
예전과 지금 나의 생각은 실로 천만이로다/ 昔今予懷誠千萬
팔십에 상을 그리니 선조를 잇는 데 뜻이 있도다/ 八十圖像意繼述
하니, 왕세손이 그 자리에서 화답하여 올리기를,
팔순의 영정이 천만년 빛을 드리우는도다/ 八旬影幀光垂萬
계사년이 거듭 돌아오니 또 잘 이어받았도다/ 癸巳重回又善述
하였다.
○ 윤3월. 상이 숭정전에 나아가 진연(進宴)을 행하였다. 3일이 지난 뒤 다시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양로연을 행하였다. 처음에 왕세손이 상소하기를,
"우리 성상께서는 5기(紀) 동안 다스리면서 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면려하여 치도가 이루어지고 제도가 정해져 교화가 두루 미치고 가르침이 퍼졌습니다. 한당(漢唐)에도 없었던 일이며 삼대(三代)에도 들을 수 없던 일이니, 당요(唐堯) 우순(虞舜)과도 짝할 만한 아름다움입니다. 황천(皇天)과 조종(祖宗)이 돌보아 보살피며 오르내려 대덕(大德)으로서 장수를 누리게 되었으니, 한 번 대궐 뜰에서 진하하는 것으로 어찌 미미한 정성을 조금이나마 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시경》 행위장(行葦章)에, '자리 펴고 잔치 베푸니 혹은 노래하고 혹은 북을 친다.' 하였고, 천보장(天保章)에, '산과 같이 구릉과 같이 만수무강하소서.' 하였습니다. 경사가 있으면 반드시 잔치를 베푼 것은 명철한 임금들도 일찍이 행하였던 바입니다. 더구나 삼대를 뛰어넘는 덕과 팔순에 접어든 보주(寶籌)는 태운(泰運)의 계제이자 장수의 경지라는 것으로는 형용하기에 부족하니, 행위의 잔치와 천보의 송축을 어찌 헛되이 지연할 수 있겠습니까. 날을 아끼는 성심이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았겠습니까만, 올해에는 더욱 간절합니다. 성수(聖壽)를 축원하는 정성이 어느 때인들 간절하지 않았겠습니까만, 이때 더욱 절실합니다. 그러니 북두(北斗)에 술을 부어 남산(南山)처럼 장수하기를 빌고자 하는 것은 인정과 천리로 헤아려볼 때 자연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경성(景星)이 나타나 몰래 내리비치고 수성(壽星)이 빛나 두루 비추어 위로 조정에서부터 아래로 민간에 이르기까지 집집마다 장수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니, 기자(箕子)
하니, 상이 그 정성을 거절하기 어렵다 하여 즉시 그 청을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이윽고 하교하여 진연을 행하는 날은 보리가을 이후로 잡도록 하니, 왕세손이 다시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길일을 골라 의절(儀節)을 행하려 하고 있는데, 이렇게 물려 정하라는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으나 또한 항상 힘쓰고도 미치지 못할 것처럼 하시는 우리 성상의 추모하는 효성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인(聖人)이 윤월(閏月)을 둔 것은 단지 세공(歲功)을 고르게 하려고 한 것이고, 예(禮)에서도 윤월로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오늘 인용하여 비유하신 바가 어찌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윤달을 넣어 사오십 일이 남은 것도 신은 멀다고 여기는데, 더구나 보리가을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충정이 연연하게 가슴에 맺혀 짧은 소장을 무릅쓰고 올립니다. 부디 조금 전에 내린 전교를 중지하도록 하여 소자의 지극히 간절한 마음에 따라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허락하였는데 어찌 빠르고 늦은 것을 가지고 말하는가. 이번 너의 소장은 갑진년에 내가 동궁에 있을 때 자교(慈敎)를 인하여 소장을 진달한 것과 같으니, 50년을 전후하여 서로 들어맞는다. 자성(慈聖)의 뜻을 본받아 눈물을 삼키며 애써 따르겠다."
하였다. 이때 이르러 두 연회를 의례대로 행하였다. 양로연을 벌이고 있을 때, 상이 세손의 손을 잡으며 기구연회가(耆?宴會歌) 여섯 구절을 쓰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이는 한 고조(漢高祖)의 대풍가(大風歌)를 본뜬 것이다."
하자, 세손이 그 자리에서 화답하여 올렸다. 즐겁게 놀다가 파하였다. 팔도와 양도의 묵은 환곡 및 공인(貢人)의 묵은 포흠, 시민(市民)의 요역을 면제해 주도록 명하였다.
○ 6월. 개천(開川)에 돌로 제방을 쌓았다. 이에 앞서 개천을 쳐서 파내고도 양쪽 언덕이 큰비에 무너지고 터져 개천을 막게 되는 것을 문제로 여기고 수양버들을 심어 막도록 하였으나, 여전히 견고하고 완전하게 할 수 없었다. 이때 이르러 상이 돌로 제방을 쌓되 견고하고 정밀하게 하여 삼가 왕이 지내는 곳과 같은 모습으로 완성하도록 명하였다. 준공되고 나자, 상이 왕세손과 더불어 광통교(廣通橋)에 나아갔다. 상이 세손을 둘러보고 이르기를,
"뜻이 있는 자는 일이 끝내 완성된다.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은 먼저 뜻을 세우고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 10월. 상이 왕세손과 더불어 경운궁(慶運宮)에 행행하였다. 선묘(宣廟)가 용만(龍灣)으로부터 이 궁에 환어(還御)한 연월일과 같은 날이어서였다. 상이 즉조당(卽?堂)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의정부와 육조가 진찬(進饌)하였다. 마침내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선조(宣祖)의 외예(外裔) 및 호성(扈聖)촹정사(靖社) 공신의 후손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상이 이내 노래를 지었는데, 이르기를,
"우리 동국(東國)이 훌륭한 임금의 교화를 거듭 입어 천만억년 대대로 계승하게 되었도다. 계사년을 세 번째 맞으니 이 어찌 꿈엔들 생각했던 바이겠는가. 재주도 덕도 부족한 사람이 깊은 연못 얇은 얼음을 대하듯 하였는데 어언 팔순이 되어 이제 오늘을 만나게 되었도다. 모두들 경사라 하는데 나는 스스로 목이 메어 우노라. 이 어찌 내가 만든 일이리오. 양조(兩朝)의 성덕(盛德)으로 우연히 금세(今世)에 이렇게 뜻을 이어받게 되었도다. 이번의 이 거조를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었으리오. 뜻이 깊은데 또한 어찌 감히 억제할 수 있었으리오. 이미 그 글로 유시하고 그 부족한 부분의 맨 앞에 붙이노라. 앉아서 울며 베끼노니 만백년에 편안함을 경계하노라."
하였는데, 왕세손이 화답하여 노래하기를,
하였다.
○11월. 계해일에 동지가 들었다. 상이 자정전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았는데, 황세손이 청한 바였다. 손으로 써서 상소하기를,
"《오례의》에 실려 있는 동지의 하례는 바로 경사를 축하하고 기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오르내리는 황천(皇天)의 돈독한 도움을 받아 경사스럽고 하례를 올릴 만한 일이 역사에 이루 다 쓰지 못할 정도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영절(令節)에 천세를 외치는 것은 어느 절기엔들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만 이 절기가 더욱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성상께서 5기(紀) 동안 태평스레 다스리셨고 또 망구(望九)에 버금가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근래 경연 석상에서 다음달부터 음악을 연주하지 않도록 하려는 뜻을 여러 번 보이셨습니다. 혹 명하시는 바가 있게 되면 대소 신료들이 필시 도로 취소하시도록 힘껏 청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또한 기쁨을 드러내도록 해 달라는 청을 지레 먼저 우러러 떠들썩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이때에 미쳐 욕의(縟儀)를 거행하는 것은 결코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구절마다 정성스럽고 글자마다 진실하다. 목석 같은 마음이 아닌데야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 의당 자정전에서 진하를 받아 너의 마음에 부응할 것이니, 너는 더욱 힘쓰도록 하라. 조선의 공고(鞏固)한 왕업이 억만년 이어지리로다."
하고, 마침내 그날 진하하도록 명하였다.
50년(갑오, 1774)
○ 1월.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 상이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나아가 등준시(登俊試)를 설행하였는데, 국초의 고사를 따른 것이었다.
○ 2월. 상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올려 칭하(稱賀)하였다. 성수(聖壽)가 망구(望九)에 이르고 환후가 회복되어서였다.
○ 왕세손에게 명하여 저경궁(儲慶宮)의 제사를 섭행하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예는 백년 이후 처음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크고 작은 향사(享祀)는 모두 왕세손에게 명하여 섭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3월. 비공법(婢貢法)을 혁파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노비의 법은 기성(箕聖)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성은 다만 이를 설치하여 절도(竊盜)를 막으려 한 것일 뿐, 애당초 대대로 자손들을 노비로 삼게 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또 더구나 조용조(租庸調)의 법에는 남자는 역(役)이 있어도 여자는 역이 없는데, 지금 사내종과 계집종은 아울러 역을 지고 있으니 매우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고, 31년에 노공(奴貢)은 1필, 비공(婢貢)은 반 필로 줄여주도록 명하였다. 이때 이르러 비공은 시비(寺婢)촹역비(驛婢)촹공천(公賤)촹사천(私賤)을 막론하고 다 없애주도록 명하고, 그 필요한 경상 비용은 적곡(?穀)으로 대신 채우도록 하였다.
○ 상이 왕세손과 더불어 옥당과 춘방에 행행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함께 강하였다. 이어 시강(侍講)
○ 5월. 가뭄이 들었다. 상이 관원을 보내어 기우제를 지냈다. 마침내 열 가지 일로 자신을 꾸짖고, 곧은 말을 구하고, 가벼운 죄수들을 풀어주자, 비가 내리게 되었다.
○ 9월. 상이 숭정전에 나아갔는데, 왕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하였다. 처음에 왕세손이 상소하기를,
"올해의 경사는 바로 우리나라에 다시 없을 경사입니다. 보령(寶齡)이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것이 올해에 시작되고, 시탕(侍湯)하시던 훌륭한 일이 구갑(舊甲)을 맞이하는 것이 올해이고, 탕약(湯藥)을 쓰지 않을 기쁨도 올해에 거듭되고, 왕위에 오르신 지 5기(紀)가 되는 것도 올해이고, 가례(嘉禮)를 치르신 지 올해로 16년이 되는데다 탄신일도 이번달에 있습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 경사가 있는데도 뛰며 춤추고자 하는 뭇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도 펴게 하지 못한 채 잠깐 청하였다가는 바로 중지하여 어영부영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진실로 신의 효성이 얕은 소치이니, 답답하게 맺혀 있는 마음이 어찌 감히 잠시 잠깐이라도 풀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다행히도 성상께서 크게 감동하여 욕의(縟儀)의 길일을 잡게 되었으니, 신은 너무도 기뻐 손가락을 꼽으며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삼가 내리신 전교를 보니, 하례 의식의 날짜를 뒤로 물려 정하고 진찬(進饌)은 도로 중지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신은 이에 놀랍고도 답답하여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랐습니다. 종전에 한 번 하례드리고 한 번 연회를 올린 것은 모두 우러러 선조의 뜻을 계승하시는 성의(聖意)에 사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이번의 절약하여 줄인 의절(儀節)은 엉성하게 미비하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경사를 지나치게 꾸며 드러내는 거조에 근사하겠습니까. 이미 내린 명을 어찌하여 다시 번복하신 것입니까. 엊그제의 비망기(備忘記)에 이미, '12일에 고유(告由)하라.'고 분부하셨으니, 밝으신 황천(皇天)과 조종(祖宗)이 필시 광대한 가운데 굽어살피셨을 줄로 압니다. 보려 해도 형체가 없고 들으려 해도 소리가 없는 성상의 효성으로 응당 신의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선뜻 우러러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날을 아끼는 깊은 정성으로 간절히 하늘에 호소하다 보니 두서없는 글이 되었습니다. 황송하고도 황송합니다."
하였다. 세손이 상소를 담은 상자를 춘방이 관원에게 주어 정원에 올리도록 하고, 이어 계단을 내려와 비답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상이 춘방의 관원을 불러보고 그 연유를 듣고는 웃으며 이르기를,
"금석(金石)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 해도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 고유(告由), 진하(陳賀), 반사(頒赦)를 처음에 하교한 대로 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이르러 의례대로 진하를 받았다. 각도 적곡(?穀)의 10분의 1을 줄여주고, 모든 영선(營繕)을 중지하고, 공시인(貢市人)의 묵은 포흠 및 요역을 면제해 주고, 사(士)촹서(庶)로서 나이 80세 이상인 자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이윽고 세손과 더불어 창의궁(彰義宮)에 행행하여 기사(耆社)의 신하들 및 나이 80세 이상의 동민(洞民)들을 불러보고 비단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68권 영조조 12
51년(을미, 1775)
○ 1월. 왕세손에게 명하여 선원전(璿源殿)에 전배(展拜)하도록 하였다. 궁궐로 돌아온 뒤 백관을 거느리고 집경당(集慶堂)에서 진하하였다.
○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려 농사를 권면하도록 신칙하였다.
○ 하교하기를,
"겨울이 가고 봄이 와 길형(吉亨)의 상이 열림에 만물이 모두 새로우니, 바로 임금된 자가 생육(生育)의 덕을 본받아 인(仁)을 행해야 할 때이다. 지금 《예기》를 보니, '태사(太史)가 봄을 알리면 동가(動駕)를 명하여 동교(東郊)에 나아가 봄을 맞이한다.' 하였는 바, 실로 옛 선왕의 뜻이다. 지금은 비록 이러한 예가 없지만, 대신(臺臣)이 청한 바 농우(農牛)에 관한 일은 근본에 힘쓰는 것이라 이를 만하다. 제언(堤堰)과 관개(灌漑)도 농정
하였다.
○ 강화 유수가 묵은 포흠을 징수하여 받아들일 곳이 없다는 이유로 장문(狀聞)하여 대죄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예전에 조간자(趙簡子)가 진양(晉陽)에 대해, '보장(保障)이로다.' 하였다. 더구나 이제 말년에 접어들어 보장이라고 인정하여 명할 만한 곳이 없으면 유독 조간자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묵은 포흠 가운데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아울러 탕감하라."
하였다.
○ 4월. 상이 왕세손과 더불어 홍문관에 나아가 《소학》과 《대학》을 강하였다. 이때 상이 시력이 나빠져 글자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경연을 할 때면 반드시 상이 평소 외우던 《대학》과 《소학》을 강서(講書)로 삼았다.
이때 이르러 상이 먼저 《소학》을 외우고 왕세손이 다음으로 《소학》을 강하였다. 상이 세손에게 묻기를,
"애연(?然)히 사단(四端)이 감(感)을 따라 나타난다.' 하였는데, 감이란 뜻이 무엇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어린아이가 우물로 빠지려 하는 것을 감지하면 측은한 마음이 애연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仁) 한 가지를 들어 말하였으니, 나머지는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물 뿌리고 쓸며 응대하는 것은 지극히 작고 치국 평천하는 지극히 큰 일이다. 지극히 작은 것이 어찌 지극히 큰 일의 근본이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작은 것으로부터 말미암아 큰 데 이르는 것은 일의 당연함이며, 아래로 배워 위로 통달하는 것이 학문의 순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다시 《대학》을 외우고, 왕세손이 다시 《대학》을 강하였다. 상이 세손에게 묻기를,
"본말(本末)과 종시(終始)란 무슨 말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명덕(明德)이 본이고 신민(新民)이 말이며, 지지(知止)가 시이고 능득(能得)이 종입니다. 본과 시가 앞서고 말과 종이 뒤에 합니다."
하였다. 상이 세손에게 명하여 춘방에게 질문하도록 하였다. 세손이 묻기를,
"물(物)에 대해서는 어찌 본말이라 하고, 일에 있어서는 어찌 종시라 하오? 또 물에 있어서는 어째서 본을 먼저하고 말을 뒤로하며, 일에 있어서는 어째서 종을 먼저하고 시를 뒤로하오?"
하자, 상번(上番) 유의양(柳義養)이 대답하기를,
"물에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본말이라 하고, 일은 운용(運用)하기 때문에 종시라 합니다. 그러나 시종(始終)이라 하면 종(終)에 그칠까 혐의하여 종시라 하는 것입니다. 종시란 끝났다가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다시 춘방에 명하여 세손에게 질문하도록 하였다.
유의양이 묻기를,
"명덕(明德)은 심(心)에 속하는 것입니까, 성(性)에 속하는 것입니까?"
하니, 세손이 이르기를,
"성이라 말하면 정(情)을 빠뜨리게 되고, 정이라 말하면 성을 빠뜨리게 되오. 선정(先正) 율곡(栗谷)이 이른바 본심(本心)의 설이 치우치지 않소."
하였다. 세손이 또 하번(下番) 조상진(趙尙鎭)에게 묻기를,
"'명덕(明德)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자'라 하였는데, 누가 밝히는 것이오?"
하자, 조상진이 대답하기를,
하였다. 상이 매우 기뻐하여 옥당과 춘방의 관원에게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다음날 옥당과 춘방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기쁨을 표해야 할 일이다."
하고, 태학의 아침 식당의 도기(到記) 유생(儒生)을 숭정전에서 시강(試講)하였다.
○ 7월. 상이 왕세손과 더불어 홍문관으로 가서 회강례(會講禮)를 행하였다. 상이 《대학》을 외우고, 세손이 《성학집요》를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 나서 세손이 잔을 올리고 천세를 외쳤다. 영사(領事) 이하 옥당과 춘방의 신하들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잔을 올리고 천세를 외쳤다. 상이 '조손회강 초추입오(祖孫會講初秋卄五)' 여덟 글자를 친히 쓰고, 새겨서 본관에 걸도록 명하였다.
○ 8월. 상이 왕세손을 거느리고 경복궁 경회루(慶會樓)의 옛터에 나아가 국초의 창업 공신 및 무신년 양무 공신(揚武功臣)의 후손으로서 관직에 있는 자들을 불러 특별히 법온(法?)을 내려주었다.
○ 10월. 상이 왕세손에게 명하여 태묘에 대향(大享)을 행하도록 하였다.
○ 윤10월. 상이 왕세손에게 명하여 감(柑)을 선원전(璿源殿)에 천신(薦新)하도록 하였다.
○ 11월. 상이 《자성편(自省編)》과 《경세문답(警世問答)》을 동궁에게 진강하도록 하였다. 이때 상의 춘추가 이미 여든을 넘어 지기(志氣)는 쇠하지 않았지만 혈기(血氣)는 달로 날로 달라지고 있었다. 일어나 앉을 때에도 반드시 세손에게 부축하도록 하고 부축하여 앉을 때에도 반드시 세손에게 의지하였기 때문에 세손이 감히 잠시라도 곁을 떠날 수 없었다. 겨울에 접어들어 상의 환후가 더욱 위태로워져 담(痰)이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일찍이 상참(常參)을 명하여 명령을 내릴 준비가 다 되었는데, 세손이 중지하도록 청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내가 꿈속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이미 명하였다. 그 말대로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고, 마침내 좌우에게 명하여 부축하도록 하여 나왔다. 그러나 자리로 오르려 하자 어지럼 증상이 일어나 내전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세손에게 이르기를,
"너에게 대리 청정(代理聽政)하게 하고자 한 지 오래되었다. 사전(祀典)을 섭행하도록 한 것은 그 전조(前兆)였다."
하고, 또 '지금부터는 꿈속에서 한 말은 네가 선포하지 않아도 좋다.'고 경계시켰다. 얼마 있다가 하교하기를,
"오늘 진하할 백관은 집경당(集慶堂)에 들어와 예를 행하라."
하였다. 이때가 이미 밤 5고(鼓)였는데, 중관(中官)이 곧장 정원에 전하였다.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이 반드시 전지(傳旨)를 선포하고자 하니, 세손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홍인한에게 이르기를,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담(痰)이 내리면 다시 여쭈어 이 전교를 반포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하였는데, 홍인한이 끝내 듣지 않고 마침내 밤에 백관들을 독촉하여 대궐 아래로 모이도록 하니, 도성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의혹스러워하면서 조정을 비난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백성들이 모두 나를 망녕든 임금이라 하겠구나."
하였다. 이에 세손에게 여쭙지 않았다고 하여 중관을 죄주었다. 이어 예를 행하고 나서 백관들을 보내도록 명하였다. 이로부터 상이 더욱 대리 청정할 뜻을 굳히고, 세손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나는 너에게 왕위를 전하여 물려주고 싶다. 내가 자색(紫色) 옷을 입고 너에게 임하고 네가 홍색(紅色) 옷을 입고 나를 섬기면 즐겁지 않겠는가. 그러나 너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 두려워 차선책을 생각하여 너로 하여금 대리 청정하게 하고 싶다. 그러나 대리 청정을 하게 되면 반드시 대조(大朝)에 여쭈어야 하니 도리어 더욱 번거로워질 것이다. 나는 대리 청정을 인하여 너에게 나랏일을 다 맡기고자 한다."
하였다. 이때 이르러 상이 집경당에 누워 시임촹원임 대신들을 불러 하교하기를,
"내가 기운이 날로 떨어져 많은 기무를 다 수응(酬應)할 수가 없다. 나랏일을 생각하면 밤에도 잠을 잘 수가 없다. 예전에 나의 황형(皇兄)은, '좌우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는가, 세제(世弟)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는가.' 하는 분부를 내린 바 있다. 지금을 황형의 그때와 비교하면 백배 더 어려운 상황이니, 나는 두 글자로 -바로 선
하자, 홍인한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하기를,
"동궁이 이판과 병판을 알 필요가 없고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더욱이 조정의 일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탄식하고 문지방을 두드리며 이르기를,
"경들은 진실로 개탄스럽다. 내가 지금 담이 올라 헛소리가 나온다. 문득 심해져 혹 한밤중에 쪽지를 내어 경들을 불렀는데 내가 영상이 누군지 좌상이 누군지도 분간을 하지 못한다면 장차 나랏일을 어떤 지경에 놓겠는가. 그러나 경들과 이 일을 논할 것은 못 되니, 나로 하여금 심법(心法)을 내 손자에게 전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고, 마침내 《자성편》과 《경세문답》을 춘방에 내리고, 동궁에게 명하여 소대하여 진강하도록 한 것이다. 처음에 홍인한이 세손의 외당(外黨)으로서 뜻을 두어 바라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세손이 항상 그 위인이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지식이 없는 것을 비루하게 여겨 일찍이 얼굴빛을 좋게 하여 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홍인한이 이로 말미암아 불만스레 원망하였다. 그런데 화완옹주(和緩翁主)의 후사(後嗣)로 들어간 정후겸(鄭厚謙)이 요사스럽고 위험한 인물로 그 어미와 더불어 상의 어묵(語?)을 엿보아 이를 가탁하여 위복(威福)을 부렸다. 홍인한이 마침내 정후겸 모자에게 붙어 안팎으로 얽어 맺어 서로 의지함으로써 성세(聲勢)를 삼았다. 그리고는 세손의 영명함으로 훗날 죄가 불측한 지경에 이르게 될까 두려워 홍지해(洪趾海)촹윤양후(尹養厚) 등과 더불어 사당(死黨)을 맺고 밤낮으로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어 저위(儲位)를 위태롭게 하려 하였다. 대리 청정에 관한 하교를 듣고 나서는 놀랍고 두려워 이렇게 온갖 방책으로 막으려 하였던 것이다.
○ 순감군(巡監軍)에게 명하여 동궁으로 들어가 점하(點下)하도록 하였다. 이비(吏批)와 병비(兵批)가 여쭌 다음에 동궁으로 들어가 점하하였다. 상이 상참(常參)을 행하려고 세손에 의지하여 앉았는데, 려창(?唱)이 끝나기도 전에 도로 침상에 누웠다. 이르기를,
"나의 기운을 알 수 있다. 대신이 이런데도 쟁론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대신들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오도록 하여 누누이 하교하였다. 이에 홍인한이 앞으로 나서며 힘껏 쟁론하고는, 물러나겠다고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교를 내릴 것이니 경들은 물러나지 말라."
하고, 이어 승지에게 명하여 쓰도록 하고 이르기를,
"긴요하지 않은 공사(公事)는 동궁에 들이도록 하라. 며칠 더 있다가 이에 더하는 하교가 있을 것이다."
하자, 홍인한이 손을 내저으며 저지하여 쓰지 못하게 하고 말하기를,
"누가 감히 이러한 하교를 쓴단 말인가."
하니, 상이 노해 꾸짖어 이르기를,
"경들은 속히 물러나라."
하였다. 물러나고 나자, 마침내 순감군의 점하에 관한 하교를 내렸다. 홍인한이 다시 대신들을 부추겨 면대를 청하여, 내리신 명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근자에 시력이 나빠져 정망(政望)에 점을 찍을 수도 없어 중관이 대신 부표(付標)를 하는 형편이다. 만일 중관이 나의 명령을 전도되게 한다 해도 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내 손자에게 맡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한익모(韓翼謀)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위에 계시는데 이 무리들이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게다가 지금 성상의 기후가 전날보다 나아져 빠뜨리는 일이 없으니, 우려할 것 없습니다."
하자, 상이 다시 탄식하며 이르기를,
하니, 홍인한이 아뢰기를,
"안에서 하시는 것이야 신들이 굳이 쟁론할 것 없겠습니다."
하였다. 이날 밤 상이 중관에게 명하여 대보(大寶) 및 계자(啓字)를 동궁으로 보내도록 하니, 세손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사양하여 아뢰기를,
"대보나 계자가 어찌 조정 신하나 나랏사람들이 모르게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상소를 초하여 아뢰기를,
"신이 비록 불초하나 어찌 우러러 우리 성상의 지성스럽고 슬퍼하는 뜻을 깊이 유념할 줄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너무도 불안한 바가 있으니, 실로 두 대신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바와 같습니다. 신의 나이 아직 어리니 조정의 일을 알 필요가 없고, 성상의 기후가 더욱 나아지고 있으니 좌우의 중관은 우려할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신은 더욱 감히 받들어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궁료(宮僚)로 하여금 베껴쓰도록 하였다. 채 마치기도 전에 중관이 와서 성상의 환후가 다시 심해졌다고 고하니, 세손이 창황하게 입시하였다. 조금 차도가 있게 되자, 세손에게 이르기를,
"내 기력은 네가 아는 바이다. 저 대신들과 다투기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부득이한 거조를 하게 된 것이다. 내가 너에게 비록 안에서 준다 하더라도 후세에 어찌 비난할 자가 있겠는가. '당시의 재상들에게 죄가 있다.'고 하는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너의 뜻을 분명하게 해 놓아야 할 것이다."
하고, 마침내 정원에 하교하기를,
"충자가 소장을 진달하면 두 글자의 하교를 내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세손이 소장을 진달할 수 없었다.
○ 12월. 지난달에 대리 청정하도록 하겠다는 하교를 내린 뒤 이때 이르러 10여 일이 지났는데, 대리 청정의 일을 위아래가 서로 버텨 아직까지 반포하지 못하여 인심이 흉흉하고 삿된 말들이 멋대로 퍼지고 있었다. 이에 전 참판 서명선(徐命善)이 상소하기를,
"우리 성상께서는 50년을 왕위에 계시면서 하루같이 부지런히 노고하셨습니다. 번거로운 기무(機務)는 편안히 조리하는 데 방해가 되므로 선조(先朝)의 고사를 이어 오늘날의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그 지성스럽고 슬픈 마음은 신명(神明)을 감동시키고 돼지와 물고기까지 믿게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지난달 20일에 입시하였을 때 좌의정 홍인한이 감히, '동궁은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을 멋대로 진달하였다 합니다. 저군(儲君)을 불능(不能)하다고 하면 의당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 무엄하고 방자함이 극에 달하였다 하겠습니다. 또 상참 때 전 영의정 한익모는, '좌우는 우려할 것이 없다.'는 말을 또 어찌 망녕되이 한단 말입니까. 수상(首相)의 자리에 있으면서 중관의 일을 질정하여 말하였으니, 옛날 대신에게도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까. 그날 아뢴 바, '안에서 하는 일은 신이 굳이 쟁론할 것 없겠다.'는 말은 더욱 너무도 놀랍습니다. 이번의 이 하교가 나라에 있어 얼마나 큰일입니까. 그런데도 궁위(宮?)의 안에서 비밀스레 하고 심엄(深嚴)한 가운데서 행하여 백성들이 알지 못하고 팔도가 듣지 못한다면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 전하의 오늘날의 거조는 밝고 바르고 크고 환하여 천고에 뛰어난 것으로, 정성스런 마음과 측은해 하는 뜻이 분부하신 가운데 무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저 관직만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헛되고 가식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하여 오로지 미봉만을 일삼아 전하의 괴로운 마음과 지극한 덕이 감춰져 드러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제갈량(諸葛亮)이,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모두 일체이다.'고 하였습니다. 작은 일에서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이와 같이 막중한 일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나랏일이 이와 같고 대신이 또 이와 같은데도 거리낌없이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신은 너무도 통탄스러워 깊은 한숨이 나옵니다. 이에 직접 소장을 봉진하게 되었으니, 부디 밝은 명을 내려 속히 대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소장을 들이니, 상이 서명선을 불러 입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그 소장을 읽도록 하였는데, '동궁이 알 필요가 없다.'고 한 말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접때 내가 이런 아룀을 들었다. 또한 어떠한가?"
"신하로서 감히 이런 말을 낸단 말입니까."
하였다. 상이 다시 묻기를,
"'안에서 하는 일은 신이 굳이 쟁론할 것 없겠다.'고 한 것은 누구의 말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인한(麟漢)입니다."
하였다. 상이 마침내 대신과 대간에게 명하여 입시하도록 하였다. 영중추부사 김상복(金相福)이 아뢰기를,
"그때 연석(筵席)에서 아뢰는 말을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서명선은 필시 어디서 들은 데가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그것을 서명선에게 물었다. 서명선이 대답하기를,
"신이 궁관(宮官)의 말을 듣건대, 동궁이 이 일로 소장을 진달하려 하였으나 미처 올리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동궁의 소장을 들여와 읽어 아뢰도록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연 이런 말이 있었구나."
하였다. 대사헌 송형중(宋瑩中)이 아뢰기를,
"알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은 색목(色目)을 가리켜 말한 것인 듯합니다."
하자, 상이 묻기를,
"명선의 상소는 옳은가, 그른가?"
하니, 송형중은 아뢰기를,
"너무 꼬치꼬치 따진 글입니다."
하고, 김상복은 모호하게 대답하였다. 이에 상이 서명선에게, '단단(斷斷)한 혈충(血忠)'이라 칭찬하였다. 이내 하교하기를,
"이 사람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고 있다. 이번의 이 일은 마음 가득한 진심어린 정성으로 백관이 머뭇거리고 대신이 주저하는 가운데 비분 강개하여 앞에 나서서 능히 그 부형(父兄)을 생각하였으니, 바로 집안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한 것이라 하겠다. 고(故) 판서(判書)는 훌륭한 아들을 두었다 할 만하고, 말년에 또한 훌륭한 신하를 얻었다 하겠다. 예전에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은 일개 임사홍(任士洪)을 탄핵하여 이름이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의 말편(末編)에 올랐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비록 살았을 때 정문(旌門)을 세워주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한 번 의례적인 가자만 하고 그쳐서야 되겠는가. 서명선을 특별히 도총관에 제수하여, 구차히 주저하는 세계로 하여금 모두 그 충성을 알도록 하라. 제문(祭文)을 지어내려 살았을 때 정려(旌閭)하는 것에 대신하며, 승지를 보내 고 판서 서종옥(徐宗玉)에게 치제하여 말세에 백관을 권면하는 뜻을 보이라. 고 판서의 영령이 알 수 있다면 반드시 눈물을 삼킨 채 북쪽을 바라보며 사례할 것이다."
하였다. 다시 전 영의정 한익모, 좌의정 홍인한, 영부사 김상복, 대사헌 송형중에게 아울러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법전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 상이 왕세손에게 명하여 뭇 정사를 대리 청정하도록 하였다. 처음에 상이 장문(狀聞)하여 품청(稟請)하는 것은 동궁으로 들이도록 명하니, 세손이 재차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그런데도 허락하지 않고, 세 번째 상소를 함에 미쳐 하교하기를,
"일은 이름이 바르게 된 뒤에야 말이 순하게 되는 것이다. 청정은 광명 정대한 것으로 전례가 분명하게 있으니, 해조(該曹)는 그리 알라."
하고, 이어 세손의 상소에 답하기를,
"이제 이름이 바루어지고 말이 순하게 되어 우리나라가 다시 편안하게 되었으니, 충자(沖子)는 열조(列朝)의 성덕(聖德)을 본받도록 하라. 아, 할아비와 손자가 서로 의지하다가 장차 당(堂)에 임하여 조참(朝參)을 받는 거조를 보게 되었으니, 나에게 있어서도 천만 다행이고 너에게 있어서도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해 드릴 일이라
하였다. 마침내 대신과 예관을 부르고, 종묘와 사직에 지낼 고유제의 제문을 친히 짓고, 사면령을 반포하고, 서울과 지방에 과거를 설행하여 규례대로 선비를 취하도록 명하였다. 다시 정부에서 정유년의 고사에 의거하여 절목을 지어올리도록 명하였다.
청정 절목은 다음과 같다.
1. 청정 절목은 전교에 의거하여 정유년의 사례로 마련한다.
1. 청정 처소(處所)는 경현당(景賢堂)으로 하되 평소의 인접(引接)은 존현각(尊賢閣)에서 하도록 명하셨으니, 이로써 따라 행한다.
1. 청정 때의 좌향(坐向)은 역대(歷代) 및 본조(本朝)의 전례에 의거하여 서향(西向)으로 한다.
1. 처음 청정할 때 조참(朝參)은 한 번 하고 상참(常參)은 일이 없을 때 간간이 한다.
1. 빈청(賓廳)하는 날 대신과 비국 당상이 입대(入對)할 때 및 서연(書筵) 이외의 인접 때 승지 1원(員)과 한림촹주서 각 1원이 나와 참석하고, 춘방 관원이 춘추(春秋)를 겸하여 당직(當直)한 사람이 따라 들어와 일을 기록한다.
1. 종친 및 문무 신하로서 1품 이상은 뜰 아래에서 재배(再拜)하고 왕세손이 답하지 않으며, 오직 종실의 백숙(伯叔) 및 사부(師傅)는 먼저 당(堂)에 올라 재배하고 왕세손이 답배(答拜)한다. 대신(大臣)은 일의 체모가 자별하므로 사부와 마찬가지로 먼저 당에 올라 재배하고, 빈객(賓客)은 조하(朝賀) 때는 뜰 아래에서 절하고 서연 때는 예전 규례대로 행한다.
1. 종묘촹사직촹능(陵)촹원(園)촹전(殿)촹궁(宮)의 제향은 왕세손이 모두 품지(稟旨)하여 대행한다. 제를 행할 때의 모든 일은 한결같이 친제(親祭)의 규례와 마찬가지로 하되, 축문(祝文)은 섭행의(攝行儀)에 의거하여 '근견(謹遣)'이라 쓴다.
1. 용인(用人)촹형인(刑人)촹용병(用兵) 세 가지 일은 아울러 옛 규례에 의거한다. 양전(兩銓)의 제배(除拜), 대소 관원의 체파(遞罷), 의금부와 형조의 대벽(大?) 처결 이외 병조의 서울과 지방 군병의 상번(上番)촹습조(習操), 서울과 지방의 전최(殿最), 양전(兩銓)의 세초(歲抄), 숙위의 체대(遞代), 군호(軍號)와 생기(省記), 궁문(宮門)과 성문(城門)의 개폐(開閉) 등의 일은 아울러 입계(入啓)한다.
1. 대소 소장(疏章)과 삼사(三司)의 차계(箚啓), 번곤(藩?)의 장문(狀聞), 각사의 초기(草記)는 모두 동궁으로 들이되, 변경의 중대한 일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위로 보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곧장 입계한다. 그 밖에 서울과 지방의 신문목(申聞目) 가운데 중대한데 관계되는 일로 재단하기 어려운 일은 우러러 상전(上前)에 여쭈도록 정원에 하령(下令)하여 거행한다.
1. 명령의 출납은 옛 규례에 의거하여 청정하는 날부터 왕세손이 명령하고 정원이 주관하되, 시강원이 일찍이 거행했던 바는 본원이 거행한다. 전지(傳旨)는 휘지(徽旨), 계의윤(啓依允)은 달의준(達依準), 계사(啓辭)는 달사(達辭), 장계(狀啓)는 장달(狀達), 계본(啓本)은 신본(申本), 계목(啓目)은 신목(申目), 상소(上疏)는 상서(上書), 백배(百拜)는 재배(再拜), 상전개탁(上前開?)은 세손궁개탁(世孫宮開?), 근계(謹啓)는 근달(謹達), 계문(啓聞)은 신문(申聞), 복후교지(伏候敎旨)는 복후휘지(伏候徽旨), 품지(稟旨)는 품령(稟令), 상재(上裁)는 휘재(徽裁)라 칭하며, 소차(疏箚) 말단의 규식은 예전 규례대로 한다.
1. 문서를 입달(入達)하여 거행할 일은 정원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초록하여 계문한다. 연례(年例)로 응당 행해야 할 일은 아울러 써서 들이되, 어람(御覽)하기에 번거로운 점이 있으면 이것은 하지 않도록 한다.
1. 영패(令牌)는 청패(靑牌)를 사용한다.
1. 조하(朝賀) 등의 의주(儀註)는 예조로 하여금 정유년 예를 의거하여 참작하여 규식을 정하도록 하되, 의장(儀仗) 및 숙위 군사는 병조로 하여금 정유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숫자를 더하여 거행하도록 한다.
1. 조참 및 진하를 받을 때의 음악 연주는 바야흐로 직숙(直宿) 중에 있으니 정유년 예에 의거하여 정지한다.
1. 미진한 조건(條件)은 추후에 마련한다.
1. 능(陵)과 전(殿)에 올릴 제문을 계(啓)한 것이면 봉교경의장함(奉敎敬依長銜)이라 하고, 달(達)한 것이면 봉령경의장함(奉令敬依長銜)이라 한다. 묘(廟)와 묘(墓)에 올릴 제문을 계한 것이면 봉교가장함(奉敎可長銜)이라 하고, 달한 것이면 봉령가장함(奉令可長銜啣)이라 한다. 계목(啓目)은 신목(申目)이라 하되, 계목에 '하여(何如)'라는 말이 있으면 계의 윤단함(啓依允短銜)이라 하고, 신목에 '하여'라는 말이 있으면 달의준단함(達依準短銜)이라 한다. 계목에 '하여'라는 말이 없으면 계의소계시행(啓依所啓施行)이라 하고, 신목에 '하여'라는 말이 없으면 달의소달시행(達依所達施行)이라 한다.
1. 장계(狀啓)는 장달(狀達), 계본(啓本)은 신본(申本), 회계(回啓)는 회달(回達), 계사(啓辭)는 달사(達辭)라고 칭하되, 계사이면 전왈의계(傳曰依啓)라 하고 달사면 영왈의달(令曰依達)이라 한다.
1. 복후상재(伏候上裁)는 복후휘재(伏候徽裁)라 칭하되, 상재(上裁)라 했으면 봉교장함(奉敎長銜)이라 하고 휘재(徽裁)라 했으면 봉령장함(奉令長銜)이라 한다.
1. 상소(上疏)는 상서(上書)라고 칭하되, 소(疏)이면 근백배상언(謹百拜上言)이라 하고 서(書)이면 근재배상서(謹再拜上書)라 한다. 전왈윤(傳曰允)은 영왈의(令曰依)라 하고, 전왈불윤(傳曰不允)은 영왈부종(令曰不從)이라 하거나 혹 물번(勿煩)이라 한다. 전왈지도(傳曰知道)는 영왈지도(令曰知道)라 하고 비답(批答)은 하답(下答)이라 칭하되, 소(疏)이면 성소구실(省疏具悉)이라 하고 서(書)이면 남서구실(覽書具悉)이라 한다. 2품 이상의 것은 답왈(答曰)을 써주고, 3품 이하의 것은 답왈을 써주지 않는다.
1. 승지전유(承旨傳諭)는 승지왕유(承旨往諭), 견사관전유(遣史官傳諭)는 사관왕유(史官往諭)라 칭한다.
1. 중엄(中嚴)은 내엄(內嚴), 외판(外辦)은 외비(外備), 제사예비(諸司預備)는 제사예대(諸司預待)라 칭한다.
1. 교지(敎旨)는 휘지(徽旨), 교서(敎書)는 영서(令書)라 칭한다.
1. 대신(大臣)의 정사(呈辭)에 있어 세 번 이전에는 불윤비답(不允批答)을 불허하답(不許下答)이라 하고, 세 번 이후에는 혹 돈유(敦諭), 혹 별유(別諭), 혹 안심조리(安心調理)라 한다.
1. 대신 및 전에 수릉관(守陵官)을 지낸 자, 숭품(崇品)의 종신(宗臣), 숭품의 도위(都尉)가 소분(掃墳)하기 위하여 정사(呈辭)하거나 가토(加土)하기 위하여 정사할 때는 말미를 주고 말과 요전상(?奠床)을 갖추어 준다. 전(傳)은 영(令), 전지(傳旨)는 휘지(徽旨)를 받든다.
1. 조신(朝臣)이 패초(牌招)를 어겨 봉지(奉旨)할 때 특교(特敎) 및 정패(政牌)가 내린 경우는, 파직에 대해서는 전지(傳旨)를 받들고 추고(推考)에 대해서는 휘지(徽旨)를 받든다. 하령(下令) 및 의례적인 패초의 경우는 체파(遞罷) 이상에 대해서는 아울러 영지(令旨)를 받든다.
1. 번곤의 장문(狀聞) 가운데 시급한 변방의 정세 및 용병에 관계되는 것은 아울러 다 입계한다.
1. 서울과 지방의 전최(殿最), 양전(兩銓)의 정망(政望) 및 세초(歲抄), 각도 군병의 세초, 삼군문(三軍門)의 습조(習操)에 관한 단자(單子), 각도의 습조에 대해 취품(取稟)하는 장문(狀聞), 형조의 계복(啓覆) 문안(文案)은 아울러 입계한다.
1. 신하들의 입시(入侍)는 입대(入對), 대신과 비국 당상의 인견(引見)은 인접(引接)이라 칭한다.
절목이 입계되자, 또 하교하기를,
"세손이 대리하게 되었으니, 이는 막대한 효이다. 부탁함에 알맞은 사람을 얻었으니, 어찌 세손만이 하례를 받을 일이겠는가. 나에게 있어서 어찌 사양하겠는가. 그날 경현당 앞에서 어찌 전례대로만 따라할 수 있겠는가. 헌현(軒懸)을 설치하는 일을 의주(儀註)에 첨가해 넣어 그 할아비로 하여금 기쁨을 표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윽고 또 명하기를,
"청정 때 조참(朝參)을 하게 되면 법가(法駕)를 사용하고, 의장(儀仗)은 수정장(水晶杖)과 금부월(金斧鉞)을 설치하라. 하례를 받을 때는 백관이 조복(朝服)을 입고 예를 행하고, 태묘에 전배(展拜)할 때는 전정(殿庭)에서부터 여(輿)를 타고, 성 밖으로 나갈 때 수여(隨輿)하는 군병은 아울러 훈련도감촹금위영촹어영청으로 하여금 배종(陪從)하게 하라. 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니 이와 같이 한 연후에야 인심이 안정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왕세손이 상소하기를,
아, 신은 나이도 어리고 학문도 얕으며 식견도 보잘것없고 재주도 데면데면한데 저위(儲位)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더욱 두려운 마음 간절합니다. 오직 시봉(侍奉)하는 기쁨과 재롱부리는 즐거움만을 알 뿐으로, 비록 예사로운 자구(字句)에 있어서라도 끝내 감히 지극한 교화의 통치를 우러러 도울 수가 없습니다. 이는 또한 성상께서 분명히 알고 계신 것인데도 어찌하여 이러한 막중한 하교를 하신 것입니까. 장문(狀聞)으로 품청(稟請)하는 일도 감히 받들 수가 없습니다. 두번 세번 상소를 올리며 그칠 줄 모르는 것은 진실로 이리저리 돌아보며 생각해 보아도 전혀 받들어 감당할 가망이 없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더구나 이 중요한 민국(民國)과 번다한 기무(機務)를 대번에 조금도 머뭇거림없이 주셨으니 어떠하겠습니까. 또 삼가 생각건대, 전하는 신에게 있어 하늘이자 아버지입니다. 자애롭게 덮어주는 지인(至仁)으로 어찌 소자의 타는 듯 절박한 정성을 헤아리지 않고 예사롭지 않은 거조로 명하신 것입니까. 밤새 깊이 생각한 끝에 마음을 가다듬고 정성을 모아 대략 고충을 드러내어 우러러 성상께 아뢰게 되었습니다. 부디 미미한 정성을 굽어살펴 이미 내리신 명을 속히 중지시켜 주소서. 그러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손자가 어찌 할아비를 이렇게까지 곤란하게 만드는가. 이보다 더 큰 유시를 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 상이 경현당에 나아가 왕세손이 청정하게 된 데 따른 하례를 받았다. 기쁨을 나타내는 노래를 친히 짓고 악사(樂師)에게 명하여 계단을 올라와 노래 부르도록 하였다. 또 두 구절의 시를 친히 짓고, 왕세손과 입시한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하도록 하였다. 또 반사문(頒賜文)을 친히 지었는데, 이르기를,
"왕위에 오른 지 5기(紀)에 또 1년을 더하게 되었고, 나이를 물으면 80에 또 3년을 더하게 되었다. 매양 할아비는 손자에게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에게 의지한다고 하였는데, 이제 헌현(軒懸)을 뜰 가운데 특별히 설치하고 충자(沖子)가 경현당에서 조참(朝參)을 받게 되었다. 나라에 백대를 이어 나갈 안정이 싹터 나의 백성이 만세에 이어질 경사를 누리게 되었다. 아, 충자가 할아비를 위한 효성을 능히 깨달았도다. 이번 나라의 경사는 한당(漢唐)에도 없던 일로, 주창(主?)할 알맞은 사람을 얻게 되었으니 조선(朝鮮)이 거의 잘 되어 나갈 것이다. 그 글을 친히 지어 먼저 종묘와 사직에 고하였다. 아, 충자가 먼저 당(堂)에 올라 조참을 하고 지팡이에 기댄 할아비가 애써 자리에 올라 하례를 받게 되었으니, 오늘의 이 예를 내 어찌 사양할 수 있었겠는가. 아, 경운(慶雲)이 장차 당 앞에 모여들고 만백성이 모두 나라 안에서 기뻐하게 되었도다."
하였다. 선포하고 나자, 왕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네 번 절하고 천세(千歲)를 외치고는 당에 올라 시좌(侍坐)하였다. 상이 공시인(貢市人)의 묵은 포흠 및 요역을 면제해 주고, 환과고독(鰥寡孤獨)에게 쌀을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일을 마치고 나서 왕세손이 당에 자리하여 청정 조참을 행하고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이를 마치고 나자, 상이 다시 당에 거둥하니, 왕세손이 시좌하여 진찬(進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일은 천고에 드문 일이라 할 만하다. 기쁨을 표하는 도리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고, 마침내 구작례(九爵禮)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왕세손이 술잔을 올리니, 헌수악(獻壽樂)이 연주되었다. 상이 어탁(御卓)의 꽃을 거두어 신하들로 하여금 머리에 꽂도록 하였다. 세손을 둘러보고 매우 즐거워하니, 신하들이 모두 천세를 불렀다.
○ 왕세손이 태묘에 전알하였다. 이어 창덕궁(昌德宮)으로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전배(展拜)하였다.
○ 상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진연(進宴)을 행하였다. 왕세손이 청한 것이었다.
○ 심상운(沈翔雲)을 절도(絶島)로 유배보냈다. 심상운은 본래 심사순(沈師淳)이 후사(後嗣)로 삼은 아들 심일진(沈一鎭)의 아들인데, 심사순은 또 심익창(沈益昌)의 손자로서 심정보(沈廷輔)에게 후사로 들어간 사람이었다. 심익창은 일찍이 역환(逆宦) 박상검(朴尙儉)의 숙사(塾師)가 되어 신축년 때를 당하여 김일경(金一鏡)촹윤
"충신과 역적에 관계되는 일이니 흐지부지 미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대신이 상에게 보고하니, 상이 이르기를,
"역적 놈의 손자가 감히 이렇게 하였단 말인가."
하고, 고문한 뒤 흑산도(黑山島)로 천극(?棘)하며 그 동생과 아울러 영원히 서민(庶民)이 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얼마 있다가 찬배(竄配)하도록 명하였는데, 소조(小朝)의 재단(裁斷)이 내렸던 것이었다.
52년(병신, 1776)
○ 1월. 초하룻날 상이 집경당에 거둥하니, 왕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하였다.
○ 팔도와 양도에 윤음을 내렸다. 묵은 포흠 10만 섬을 면제해 주고, 공시인(貢市人)의 요역도 헤아려 줄여주도록 하였다.
○ 숙종대왕에게 존호 '배천합도 계휴독경(配天合道啓休篤慶)', 인경왕후(仁敬王后)에게 '혜성(惠聖)', 인현왕후(仁顯王后)에게 '장순(莊純)', 인원왕후(仁元王后)에게 '휘정(徽靖)'을 추상(追上)하였다. 상에게 존호를 올리도록 청한 것을 인하여 특교(特敎)로 행하게 된 것이었다. 또 상에게 존호 '요명순철 건건곤녕(堯明舜哲乾健坤寧)', 정성왕후(貞聖王后)에게 '인휘(仁徽)', 중궁전에 '성철(聖哲)'을 올렸는데, 왕세손이 상소하여 청한 것이었다. 다시 특교를 인하여 저경궁(儲慶宮)과 육상궁(毓祥宮)에 존호를 올렸다. 왕세손이 책보(冊寶)를 올리고 규례대로 진하하였다.
○ 2월. 왕세손에게 명하여 효장묘(孝章廟)로 나아가 옥인(玉印)과 죽책(竹冊)을 올리도록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이번 나라의 경사는 종국(宗國)을 위한 만세(萬世)의 계책이 될 만하니, 나라의 중대한 일이 반석(盤石)처럼 안정스럽게 되었다. 그러나 추측하기 어려운 것이 세상일이다. 장릉(章陵)에 대하여 흥헌왕(興獻王)의 고사를 인용한 자가 있었다. 종통(宗統)을 바로잡는 도리에 있어서 이번 나라의 경사를 당하여 만세토록 길이 공고히 할 뜻을 정하는 것만한 일이 없다.
이는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것이 아니다. 효장(孝章)은 효장(孝章)이라 칭하여 세자(世子)의 종통을 잇고 효순(孝純)은 효순(孝純)이라 칭하여 세자빈(世子嬪)의 종통을 잇게 하라. 옥인과 죽책을 만들어 주고, 종통을 바로잡는 뜻으로 삭제(朔祭)에 고유(告由)를 겸하여 팔방에 반포해 보이도록 하라. 이미 종통을 바르게 하였으니, 효장과 효순의 기신제(忌辰祭)에 행하는 모든 일은 국기(國忌)의 예에 의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 왕세손이 상소하기를,
아, 임오년의 처분은 바로 우리 성상의 종묘와 사직을 위한 부득이한 거조였습니다. 대성(大聖)의 마음으로 달권(達權)의 도를 행한 것이니, 우리나라의 대소 신민(臣民) 가운데 누군들 감히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목숨을 보전하여 오늘날에 이를 수 있던 것도 모두 전하의 큰 은혜에 힘입은 것입니다. 높은 하늘과 두터운 땅, 큰 산과 깊은 바다로도 이 감격을 비유하기에는 부족하니, 신이 보답할 길은 오직 사시(四時)처럼 미덥게 하고 금석(金石)처럼 지켜 만세를 전하도록 폐단이 없게 하는 데 있습니다. 가령 괴이하고 착하지 못한 무리들이 감히 틈을 엿보려는 마음을 먹고 멋대로 추숭(追崇)의 논의를 냄에 신이 종용을 받아 망녕되이 의리(義理)를 옮겨 바꾸고자 한다면 이는 실로 전하의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전하의 죄인이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장차 종묘 사직의 죄인이자 만고(萬古)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황천(皇天)의 상제(上帝)가 위에 계시고 종묘의 신령(神靈)이 옆에서 질정하고 계시니, 신이 어찌 감히 속이겠으며, 신이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로 말하면, 그 당시의 사실을 모두 다 기록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고 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본 사람이 전하고 들은 사람이 의논하여 온 세상에 유포되고 사람들의 이목에 다 들어왔으니, 신의 애통한 마음이 마치 돌아갈 곳 없는 곤궁한 사람과도 같습니다. 민간의 보통 백성 가운데도 매우 비통한 사정이 있는 자는 종신토록 통한을 품어 살고자 하지 않는 것처럼 합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습니다만, 또한 이러한 일단의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 이극(貳極)에 높이 임하여 백관을 삼가 대하게 되었는데, 어찌 마음에 통한이 없겠으며 어찌 이마에 땀이 나지 않겠습니까. 만약 신의 애통함이 혹 전하의 처분에 구애되어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 전하의 처분은 천리(天理)의 공정함에서 나온 것이고 심의 애통함은 인정(人情)의 궁극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처분은 처분이고 애통함은 애통함이니, 진실로 이른바 나란히 가서 어그러지지 않으며 둘 다 보존되어 다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또 만약 일기가 없으면 처분에 대해 증거를 대어 믿게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국조(國朝)의 전고(典故)는 모두 간첩(簡牒)에 실어 금궤(金?)에 담고 석실(石室)을 마련하여 명산(名山)에 보관하여 천고 만대에 옮길 수 없도록 하고 있으니, 또 어찌 일기를 쓸 것이 있겠습니까. 아, 일기가 보존되느냐 보존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전하께서 어떻게 처분하시느냐에 달려 있는데, 신이 스스로 처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저위(儲位)를 사양하여 피하고 종신토록 숨어 지내며 오직 하루에 세 때 공손히 문안을 여쭙는 직분을 닦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까지 말을 하게 되니, 저도 모르게 참담한 심정이 들어 어떻게 하늘에 호소할 수가 없습니다. 부디 전하께서 불쌍히 여기고 굽어살펴 신에게 청정하도록 하신 명을 속히 거두고 이어 신의 저이(儲貳)의 임무를 없애, 자애롭게 덮어주시는 은혜를 끝까지 온전히 하여 주시길 빌어 마지않습니다."
"임오일기(壬午日記)는 승지와 주서(注書)가 함께 창의문(彰義門) 밖 차일암(遮日?)에 나아가 실록(實錄)의 예대로 세초(洗草)하라. 세손이 진달한 소장은 전교와 함께 사고(史庫)에 보관하라. 내일 아침 세손은 수은묘(垂恩墓)에 전작례(奠酌禮)를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네가 이번에 나가는 것은 바로 무군(撫軍)하기 위한 것이다. 회가(回駕)할 때 경기 감사라도 참현(參現)하도록 하라."
하였다. 세손이 수은묘에 나아가 의례대로 예를 행하였는데, 목이 메어 울어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니, 좌우에 있는 자들도 모두 감동하여 울었다. 예가 끝나 궁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상이 도승지 서호수(徐浩修)에게 이르기를,
"나는 세손이 너무 슬퍼하여 몸을 상할까 염려된다. 경이 내국(內局)을 겸하고 있으니, 가서 세손의 기후를 묻고 돌아와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서호수가 중간쯤 달려왔을 때 세손이 말에서 내려 삼가 명을 받들고 서호수에게 이르기를,
"경이 먼저 돌아가 아뢰어 성상께서 염려하지 않으시도록 하라."
하였다. 마침내 성상의 하교에 의거하여 병조 판서 서명선(徐命善) 이하가 모두 군례(軍禮)로 참현하였다.
○ 하교하기를,
"내 나이 21세에 유서(諭書)와 도상(圖象)을 받았는데, 그 유서에, '네가 여덟 달 동안 옆에서 시중들어준 노고를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아, 시탕(侍湯)하는 것은 자식의 도리로서 당연한 것인데도 이렇게 막대한 은혜를 내려주셨다. 더구나 할아비와 손자가 서로 의지하였으니, 세손의 진정한 정성은 바로 종묘 사직 삼백 년에 있어 막대한 경사이다. 예전에 태종은 소헌왕후(昭憲王后)에게 효부은인(孝婦銀印)을 주고 또 효부도(孝婦圖)를 내려주었다. 지금 내가 예전 일을 추상하여 내 손자에게 '지효세손(至孝世孫)'이라는 호를 내릴 것이니, 은인(銀印)과 죽책(竹冊)을 호조와 공조로 하여금 도감을 설치하여 만들도록 하라. 오늘 친히 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백성과 초목, 곤충들로 하여금 모두 세손의 지극한 효성을 알게 하리라."
하자,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아뢰기를,
"세손에게 호를 내려주는 것은 옛 전례가 없으니 신은 감히 우러러 찬성할 수 없습니다. 유서(諭書)로 타고난 예효(睿孝)를 드러내는 것이 실로 인정과 예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방금 전에 명한 것을 즉시 중지시켰다. 마침내 유서를 친히 지었는데, 이르기를,
"왕은 이르노라. 아, 해동(海東)의 삼백 년 역사를 지닌 조선의 83세의 임금이 25세의 세손에게 의지하는구나. 오늘 종통을 바로잡아 나라에 태산과 반석 같은 안정이 깃들게 되었다. 또 진달한 소장을 보니 말과 뜻이 엄정하여 천백세에 드리울 만하였는 바, 일기를 세초한 것은 실로 너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또 어제 묘에서의 거조를 들으니, 듣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게 할 만하였다. 국초에 보인(寶印)을 만들어준 고사를 따라 '지효'라는 호를 너에게 내려주려 하였는데, 너의 스승인 영의정의 충언이 나를 감동케 하여 비록 그 명을 중지시키기는 하였지만, 어찌 그 자취를 후세에 없어지게 해서야 되겠는가. 특별히 '효(孝)'한 글자로 그 마음을 금세(今世)에 드러내고 그 일을 내세(來世)에 나타낸다면 비록 해동의 초목 곤충이라 하더라도 어느 것인들 알지 못하겠는가. 특별히 정전에 임하여 선유하고, 이어 하례를 받을 것이다. 할아비와 손자가 서로 의지함이 오늘날에 광명 정대하도다.
아, 세손은 네 할아비의 뜻을 깊이 유념하여 밤낮없이 삼가서 나의 삼백 년 종묘 사직을 보존하도록 하라. 내가 즉위한 지 52년이 되고 나이 83세가 된 때에 25세의 세손에게 유시하노라."
하였다. 이어 김상철에게 명하여 유서를 써서 올리도록 하였다. 다음날 상이 '효손(孝孫)' 두 글자를 친히 쓰고, 호조에 명하여 은인(銀印)을 주조하도록 하였다. 3일이 지난 뒤 상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고취(鼓吹)로 유서와 은인을 배진(陪進)하였다. 도승지 서호수에게 명하여 왕세손에게 받들어 올리도록 하니, 세손이
○ 3월. 상의 병환이 크게 위독해지자, 왕세손이 관원을 보내어 종묘 사직과 산천(山川)에 두루 기도하였다. 이내 대보(大寶)를 왕세손에게 전하도록 고명(顧命)하였다. 5일 묘시(卯時)에 상이 경희궁(慶熙宮)의 집경당에서 승하하였다. 하례(下隷) 노소(老小)가 대궐 아래로 밀물처럼 달려와 울부짖으며 눈물을 쏟고, 사부(士夫) 부녀(婦女)가 각기 집에서 곡하여 그 소리가 거리까지 울렸다. 멀리 떨어진 외딴 지역에서도 국상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날, 남녀 노소가 모두 어린 세손을 위하여 추모하였다. 6일이 지난 신사일에 왕세손이 즉위하였다. 신하들이 상의 덕행과 공업을 의논하여 시호 '익문선무희경현효(翼文宣武熙敬顯孝)'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영종(英宗)'이라 하였다. 이해 7월 27일 원릉(元陵)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지내었는데, 바로 건원릉(健元陵)의 서쪽 언덕이다. 이에 앞서 기해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대신 정태화(鄭太和)와 김수흥(金壽興) 등이 효종을 받들어 여기에 장사지내었는데, 술자(術者)가 모두,
"장려(壯麗)하고 명수(明秀)하기가 태조와 같으면서도 오히려 더 나을 것이다."
하였다. 계축년에 천릉(遷陵)하게 되어서는 민정중(閔鼎重)이 몸소 봉축(封築)하면서 역자(役者)들을 경계시키며,
"잘 다루도록 하라. 뒤에 반드시 국릉(國陵)이 될 것이다."
하였다. 갑신년에 상이 경묘(景廟)를 여기에 봉안하고자 하였으니 이의가 있어 중지해 실행하지 못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마침내 상의 능이 되었다.
상이 일찍이 경연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로 하여금 영(英) 자의 묘호를 얻게 해 주면 족할 것이다."
하였고, 또 일찍이 왕세손에게 이르기를,
"나의 50년 동안의 치법(治法)과 정모(政謨)는 한 부의 《보감(寶鑑)》으로 만들어 두어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모두 상의 뜻대로 되었다.
69권 정조조 1
정조 경천명도 홍덕현모 문성무열 성인장효 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
휘는 성(?)이요 자는 형운(亨運)이다. 임신년(영조 28, 1752) 9월 22일(기묘)에 창경궁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탄생하고, 24년간 재위하였으며, 경신년(1800) 6월 28일(기묘)에 승하하였다. 수는 49세였고, 건릉(健陵)― 수원(水原)에 있음 ―에 장례지냈다.
즉위년(병신, 1776)
○ 영종대왕(英宗大王) 52년(병신) 3월 병자(5일)에 영종대왕이 경희궁(慶熙宮)의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하고, 그로부터 6일째 되는 신사일에 왕세손이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예순성철왕비(睿順聖哲王妃) 김씨(金氏)를 왕대비로 높이니,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계승하였으므로 할아버지가 아버지 자리가 되는 뜻을 따른 것이었다. 빈(嬪) 김씨(金氏)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상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백부(伯父)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영종이 명하여 상으로 효장의 계통을 잇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효장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시호를 온량예명 철문효장(溫良睿明哲文孝章)으로 올렸으며, 묘호(廟號)는 진종(眞宗)이라 하고 능은 영릉(永陵)이라 하였다. 빈 조씨(趙氏)를 왕후로 삼고 시호를 휘정현숙효순(徽貞賢淑孝純)으로 올렸다.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추상(追上)하고, 수은묘(垂恩墓)를 높여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으며, 묘(廟)를 경모궁(景慕宮)이라 하였다. 혜빈(惠嬪) 홍씨(洪氏)를 혜경궁(惠慶宮)으로 높였다. 종묘에 고하고 하례를 받았
신미년(영조 27, 1751) 겨울에 장헌세자가 신룡(神龍)이 구슬을 안고 잠자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깨어나서 그 형상을 벽에다 그려 놓았었는데, 탄생함에 미쳐 울음소리가 큰 종소리와도 같았고, 우뚝한 콧날, 튀어나온 미골(眉骨), 움푹 들어간 눈, 큰 입 등 관상이 특이하였다. 영종이 직접 와서 보고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혜빈을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를 얻었으니 종사에 근심이 없겠다."
하고, 손으로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여기가 나를 빼어 닮았구나."
하였다. 그리고는 그날로 원손(元孫)이라는 칭호를 정하였다. 백일이 되지 않아서 서고 돌이 채 못 되어 걸었으며, 말을 하지 못할 때부터 글자를 보면 좋아하는 표정을 짓곤 하였다. 효자도(孝子圖)와 성적도(聖蹟圖) 보기를 좋아하였고, 항상 공자(孔子)가 조두(俎豆)를 늘어놓았던 의식을 흉내내었다. 계유년(영조 29, 1753) 겨울 인원성모(仁元聖母)의 존호를 올릴 때 상이 포화(袍靴)를 갖추고 예를 행하였는데, 절하고 꿇어앉는 데 유모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을해년(영조 31, 1755) 봄에 비로소 주자(朱子)의 《소학》을 배웠다. 영묘(英廟)가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원손이 겨우 네 살인데 기상이 보통 아이들과 다르니, 하늘이 장차 우리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기묘년(영조 35, 1759) 봄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신사년 봄에 치학(齒學)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박사(博士)에게 학업을 청하였는데, 《소학》제사(題辭)에서 집어내어 묻기를,
"밝은 명[明命]이 내 몸에 있다는 것은 어떤 경지를 가리킨 것이며, 그것을 환희 알고자 한다면 어떤 공부를 해야 합니까?"
하니, 박사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교문(橋門)을 둘러싸고 구경하던 수만 명의 인파가 서로 돌아보며 성인이라고 하였다. 영묘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이르기를,
"이는 실로 하늘이 우리 동방에 복을 내려 주신 것이다."
하였다. 이달에 관례를 행하고 임오년 2월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윤5월에 장헌세자가 세상을 떠났는데, 상은 너무나도 슬퍼하여 몸까지 수척해졌으므로 시중드는 자들이 차마 고개를 들고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낮에는 늘 영묘의 곁에 있다가 밤이 되면 영빈(暎嬪)의 곁으로 가서 따뜻하게 위로하곤 하였다. 이때 혜빈이 창덕궁에 있으면서 슬픔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자주 몸이 편찮았는데, 상은 이 소식을 들을 때마다 침식을 전폐하고 매번 글을 올려 편안하다는 답을 들은 후에야 수라를 들었다.
7월에 명하여 세손을 동궁으로 삼았으며, 빈대(賓對)와 강연 때에 시좌(侍坐)하도록 명하여 경전의 뜻을 변론하게 하거나 조정의 정사를 참여하여 듣도록 하였다. 계미년 봄에 찬선 송명흠(宋明欽)을 불러서 접견하였는데, 이때 《맹자》를 진강하고 있었다. 송명흠이 《맹자》의 종지(宗旨)를 우러러 묻자, 상이 이르기를,
"인욕(人慾)을 막아 천리(天理)를 보존시키는 것입니다."
하고, 송명흠이 입지(立志)에 대하여 묻자, 상이 이르기를,
"바라는 바는 요순이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송명흠이 자리에서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총명하고 영특하여 상지(上智)의 자질을 갖추셨으니 동방의 복이요."
하였다.
을미년에 영종이 상에게 명하여 서정(庶政)을 대리로 처리하게 하자 상이 세 번 상소하여 간절한 뜻으로 아뢰었고, 정사를 처리하게 되어서는 매사를 반드시 대조(大朝)에 여쭙고 감히 독자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급기야 영묘가 승하하자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시도 곡을 그치지 않았다. 예조가 사위절목(嗣位節目)을 올리고 대신과 신하들이 며칠 동안 정청(庭請)하였으나 계사가 이르기만 하면 곡을 하였고, 성복일(成服日)에 이르러서야 마지못해 따르면서 하교하기를,
"뭇사람들의 뜻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오르기는 하겠지만, 면복(冕服)을 입고 예를 행하는 것은 내 마
하였다. 신하들이 고례(古禮)이자 국가의 제도라는 말로 힘껏 청하니, 상이 눈물을 흘리면서 따랐다.
○ 윤음을 내리기를,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을 중요하게 여기시어 나를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도록 명하셨지만, 전에 선대왕께 올린 상소를 보면 근본을 둘로 할 수 없다는 나의 뜻을 크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엄히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인정 또한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향사(饗祀)의 절차는 응당 '대부(大夫)로서 제사지내는 예'를 따라야 하겠으나 태묘(太廟)와 동일하게 할 수는 없으며, 혜경궁에도 경외에서 공물(貢物)을 진헌하는 의식이 있어야 하겠으나 대비와 동등하게 할 수는 없다. 유사로 하여금 절목을 강정하여 아뢰게 하라. 그러나 도깨비처럼 불량한 무리가 이를 빙자하여 추숭(追崇)의 논의를 내세운다면 선대왕의 유교가 있으니, 응당 해당되는 형률로써 논하고 선대왕의 신령께 고할 것이다."
하였다.
○ 환시(宦侍)와 액속(掖屬) 108 자리를 감하도록 명하고, 또 대전(大殿)의 궁인을 혁파하였다.
○ 장헌세자에게 시호를 올린 후에 개제주(改題主) 의식 절차를 마련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주(題主)하던 때에 선대왕께서 친필로 쓰셨으므로 지금 감히 고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였다.
○ 이광좌(李光佐), 조태억(趙泰億), 최석항(崔錫恒)의 관작을 추탈(追奪)하도록 명하였는데, 을해년의 처분을 우러러 따른 것이었다.
○ 김상로(金尙魯)에게 소급해서 역률(逆律)을 시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정축년(영조 33, 1757) 12월 25일 공묵합(恭?閤)에 입시하였을 때 김상로가 감히 망측하고 부도한 말로 어전에서 우러러 대답하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신하 노릇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차마 양궁(兩宮) 사이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선대왕께서는 그를 풍도(馮道)에 비교하셨다. 임오년에 다시 동궁을 설치하고 나에게 하교하시기를,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 내가 강제로 치사(致仕)하게 한 것은 천세 후세에 내 마음을 드러내 보이려는 것이었다. 임오년 5년 전부터 5년 후인 임오년의 조짐을 만들어낸 것은 김상로 하나뿐이었다.' 하셨는데, 나는 머리 조아려 명을 들으며 가슴속에 새겨 두었었다. 응당 역률을 소급해서 시행하여 군신(君臣)의 대의를 바로잡아야 하겠으나, 법률을 소급해서 적용하는 것은 이미 선조(先朝)의 금령이 있는데 내가 어찌 새로 만들겠는가. 우선 관작을 추탈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노적(?籍)의 형전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 4월. 이덕사(李德師)촹조재한(趙載翰)촹박상로(朴相老) 등을 국문하였는데, 조재한 등이 임오년의 일을 징토하는 의리에 가탁하여 이덕사의 상소가 있기까지 한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이는 선왕을 무고하는 역적이다."
하고, 마침내 모두 법으로 바로잡았다.
○ 직접 국문하는 때에 신장(訊杖)의 획수(?數)를 법식대로 하지 않은 율관(律官)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신장의 획수는 인명의 생사와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장전(帳殿)의 위엄과 노여움만을 보고 멋대로 낮추거나 높였으니, 율관을 정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 고 판서 이재(李縡)의 손녀가 김상로의 자부(子婦)로서 연좌되어 노비가 될 참이었는데, 하교하기를,
"국가의 법을 굽힐 수는 없지만, 어진이의 후손 또한 돌보아주지 않을 수 없다. 개정하여 정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나라에 이롭고 백성에게 이로운 일이라면 살갗인들 어찌 아까워하겠는가. 이것은 우리 선왕께서 일찍이 과
하니, 호조가 궁결(宮結)을 환납(還納)한 데 대한 별단을 올렸다. -전지가 6110결(結) 84부(負)였다.-
○ 동 경연사 이의철(李宜哲)이 상소하기를,
"예경(禮經)에 '장례지내기 전에는 상례(喪禮)에 관한 글을 읽는다.'고 하였고, 열조의 고사에는 또 산릉(山陵)을 마치기 전이라도 강연을 폐지하지 않은 규례가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경의 박학함에 대해서 듣고 경을 시강관으로 삼고자 하였었다. 경이 상소에서 청한 바가 옳다."
하고, 이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예기》의 상례에 관한 편(篇)들을 베껴 진강하게 하였다.
○ 하교하기를,
"작년 동짓날 선대왕께서 감옥의 죄수들을 심리하라고 여러 도에 명하셨는데, 청정(聽政)한 이후로 미처 재결하지 못하였다. 우러러 몸받아야 할 나의 도리로 보아 양암(諒闇)이라고 해서 구애될 수는 없겠으니, 지금 내리는 신본(申本)에 대해 형관(刑官)으로 하여금 품계하게 하라."
하였다.
○ 법을 범한 액례(掖隷)를 정원에서 곧바로 가두어 다스리도록 하고, 궁방의 하속(下屬)으로서 "분판(粉板)에 서계하겠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경외의 관아에서 살펴 신칙하도록 명하였다.
○ 5월. 새로 만든 신부(信符)와 한부(漢符)를 나누어 주어 대궐문의 출입을 금하는 제도를 다시 밝히라고 명하였다.
○ 즉위한 초기에는 전례대로 도감을 설치하여 연(輦)촹여(輿)촹평교자(平轎子)를 새로 만들었는데, 상이 그만두게 하면서 이르기를,
"선조(先朝)께서 타시던 것을 내가 타고자 한다. 그리하여 항상 그리워하는 나의 마음을 부치겠다."
하였다.
○ 만녕전(萬寧殿)에 봉안하였던 영묘의 어진(御眞)을 장녕전(長寧殿)으로 옮겨 봉안하였는데, 영묘의 유지(遺旨)를 따른 것이었다.
○ 도승지 서호수(徐浩修)가 아뢰기를,
"은전군(恩全君) 이찬(李?)은 대궐에 출입할 때 근수(?隨)를 수십여 명씩이나 데리고 다닙니다. 국가의 입법(立法)은 귀척(貴戚)으로부터 지켜져야 하니, 이찬과 병조의 당상, 낭청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강을 세우는 도리가 종친과 외척에서부터 시작될 뿐 아니라, 그를 가르치고 경계시키기 위해서라도 추고하는 것으로 그칠 수 없다. 이찬을 삭직하고 입직한 당상과 낭청을 파직 시키라."
하였다.
○ 새로 재실(齋室)을 세우고 '도수연(陶遂椽)'이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이는 선조(先朝) 때 편액의 명칭을 공묵합(恭?閤)으로 했던 뜻을 따른 것이었다.
○ 여러 도의 노비 추쇄에 내수사에서 관리를 차견하지 말고 해도(該道)와 해읍(該邑)에서 선조 을해년(영조 31, 1755)의 총수(總數)에 따라 수봉(收捧)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나중에 또, 선두안(宣頭案)을 승정원을 통하여 계문하는 것을 적어서 절목으로 만들어 팔도에 반포할 것을 명하였다.
○ 선조의 명을 받았던 제주(濟州)의 감진어사(監賑御史)가 이때에 이르러 일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었다. 하교하기를,
"이는 선대왕께서 밤낮으로 근심하시던 일이다. 수만 명의 섬 백성이 다행히도 구덩이에서 뒹굴지 않게 되었고, 명을 받든 어사도 만리 길을 탈없이 돌아오게 되었다. 조정으로 돌아온 후에 어사의 자급을 올려주고 수
하고 어사 유강(柳?)은 가자하고 목사 유혁(柳爀)에게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대정(大靜)과 정의(旌義)의 두 원에게 현궁(弦弓)을 하사할 것을 명하였다.
○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하교하기를,
"덕 있는 이를 존경하는 마음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진 본연의 병이(秉彛)이니, 선정(先正)을 효종의 묘정에 배향하는 데 대해서는 필시 한마디 말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는 과인이 우리 열성조의 정책과 공렬을 대양(對揚)하고 우리 유학(儒學)의 연원에 빛을 더하는 일에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였다.
○ 6월. 부사직 조명정(趙明鼎)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일은 점진적으로 해나가는 것이 귀중하고, 경계할 바는 마음이 통쾌한 것에 있습니다. 성명께서는 더욱 부지런히 자문하시어 먼저 현재의 법을 적용하여 편리한 대로 바로잡으셔서 당장의 급한 폐단을 바로잡도록 하소서. 그리고 크게 경장하고 대대적으로 변통하는 것은 우선 성학(聖學)이 더욱 고명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하게 서서히 의논하시어 지당한 데로 귀결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자전의 탄일에 조정 관원이 대전에 문안드리는 것을 규정으로 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예조가 경모궁(景慕宮)과 영우원(永祐園)의 향사 절목(享祀節目)을 올렸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
1. 오향제(五享祭)는 춘분. 하지. 동지. 납향(臘享)에 거행하고, 속절(俗節)의 제사는 정조(正朝)촹한식촹단오촹추석에 예전과 같이 거행하고, 삭망제(朔望祭)도 설행한다.
2. 친제(親祭) 때는, 상은 면복을 갖추고, 여러 향관(享官)은 제복(祭服)을, 백관은 4품 이상은 조복(朝服)을, 5품 이하는 흑단령(黑團領)을 입는다. 섭행(攝行)할 때는 제관(祭官)도 제복을 입는다.
3. 친제 때는 아헌관과 종헌관을 정1품으로 하고, 섭행할 때는 초헌관은 종1품으로, 아헌관은 종2품으로, 종헌관은 당상 정3품으로 한다. 삭망제, 속절제 및 고유제의 헌관은 종2품으로 차정한다. 종신(宗臣)이나 의빈(儀賓) 중에서 차정할 때는 직품에 구애되지 않는다.
4. 오향제를 친행할 때는 산재(散齋)를 3일, 치재(致齋)를 2일간 하고, 속절의 제사 및 작헌례(酌獻禮) 때는 산재를 2일, 치재를 1일간 한다. 섭행할 때는 향을 받는 날만 재계하고, 속절의 제사 및 고유제 때는 향을 받는 날 금형(禁刑)만 한다.
5. 뇌(牢)는 소와 양을 쓰고, 음악은 3장을 연주하고, 등헌(登軒)과 가무(架舞)는 6일(佾)을 쓴다. 친제 때는 태뢰(太牢)를 쓴다.
6. 오향제의 기수(器數)는 변(?)이 10, 두(豆)가 10, 증(甑)이 3, 형(?)이 3, 보(?)가 2, 궤(?)가 2, 조(俎)가 2, 작(爵)이 3, 비(?)가 1, 간료증(肝?甑)이 1이며, 모혈반(毛血盤)은 친제 때만 쓴다.
7. 삭망제와 속절의 제사 및 고유제의 기수는 변이 2, 두가 2, 보가 1, 궤가 1, 조가 1, 작이 1이고, 시성(豕腥)만을 쓰며, 고유제에는 폐백을 쓴다.
8. 오향제의 친행 및 향의 친전(親傳)은 의식대로 취품하되, 공의(恭依) 혹은 섭행한다.
9. 봄가을의 전배(展拜)는 의식대로 취품한다. 복색은, 상은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백관은 흑단령을 입는 것으로 마련한다.
10. 친제 때는 희생을 살피고 제기를 살피는 등의 절차를 마련하고, 섭행할 때는 헌관이 규례대로 거행한다.
11. 습의(習儀)는 문묘(文廟)의 규례에 따라서 향관들이 하루 전에 향소(享所)에서 하며, 친행할 때라도 이 예에 따라 거행한다.
12. 봉심(奉審)은 매년 봄가을에 본조 당상이 거행한다.
13. 각 제사의 축문은 예문관으로 하여금 짓게 하고, 악장문(樂章文)도 상시봉원도감(上諡封園都監)에서 거행하게 한다.
15. 친제 때는, 상은 참포(?袍)를 갖추고 여러 향관과 백관들은 천담복(淺淡服)을 입는다. 섭행할 때는, 기신제에는 천담복을 입고 속절의 제사 및 고유제에는 흑단령을 입는다.
16. 친제 때는 아헌관과 종헌관을 정1품으로, 섭행 때는 종2품으로 차정한다. 종신이나 의빈 중에서 차정할 때는 직품에 구애받지 않는다.
17. 친제 때는 산재를 2일, 치재를 1일간 하고, 기신제에는 하루 전 및 당일에 재계한다. 섭행할 때 및 고유제에는 향을 받는 날만 금형한다.
18. 기신제의 제물(祭物) 수는, 중계(中桂) 4좌, 산자(散子) 4좌, 다식(茶食) 4좌, 실과(實果) 5기(器), 탕(湯) 2기, 병(餠) 6기, 맥(麥) 1기, 작(爵) 3으로 마련한다.
19. 속절 및 고유제의 제물 수는 약과(藥果) 4좌, 병 3기, 채(菜) 2기, 반(飯) 1기, 맥 1기, 실과 4기, 개장(芥醬) 1기, 작이 3이며 고유제 때는 작만 1이다.
○ 7월. 하교하기를,
"발인 하루 전에 혼백 상자(魂帛箱子)로 조조(朝祖)하는 것이 《상례보편(喪禮補編)》에 실려 있으니, 우리 선대왕께서 다함이 없는 효성스런 마음으로 의리에 부쳐 일으켜 놓은 의절(儀節)인 것이다. 《예기》단궁편(檀弓篇)에, 부하(負夏)의 주인이 이미 조조한 후에 널을 밀어 되돌아오자 자유(子游)가 예를 잃었음을 비난하였다. 더구나 혼백 상자를 받들어 하직하는 것은 크게 구애되는 절차가 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문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논의가 일치되지 않자 상이 이르기를,
"고례(古禮)를 이미 회복할 수 없다면 차라리 국가에서 이미 행해온 예를 따르는 것이 낫다. 조조의 절목은 《오례의(五禮儀)》대로 따르라."
하였다.
○ 영종대왕을 원릉(元陵)에 장사지냈다. 상이 발인 행차를 따라가려고 하다가, 신하들이 예전에 이러한 예가 없었다면서 힘껏 간쟁하자 그제서야 흥인문 밖에서 절하고 하직하였다. 영가(靈駕)가 멀어진 후에도 그대로 선 채로 울부짖으며 통곡하였는데, 슬픔에 찬 곡성이 사람을 감동시켜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 하교하기를,
"우리 선대왕의 문장(文章)과 보묵(寶墨)은 모두 소자를 가르치기 위해 엮으신 것이었다. 높이고 믿고 공경하고 삼감을 어찌 심상히 간직하는 간찰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전각 (殿閣) 하나를 세워 송 나라 조정에서 경건히 받든 제도를 따라야 하겠다. 광묘조(光廟朝)와 숙묘조(肅廟朝)에 규장각이라는 명칭은 있었으나 건물을 세우지는 않았으니, 내가 열조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여야 하겠다."
하고, 규장각을 내원(內苑)에 짓고, 열성조의 신장(宸章)과 보한(寶翰)은 별도로 봉모당(奉謨堂)에 봉안하였다. 영묘조에 어제(御製)를 편차(編次)했던 사람이 일은 하면서도 그에 걸맞는 관직을 갖지 못했다 하여, 송 나라 용도각(龍圖閣)의 학사와 직학사를 모방하여 제학과 직제학을 설치하였다. 또 직각과 대교를 두고, 직서(直署)를 창덕궁의 도총부로 옮겨 설치하였으며, 친필로 '이문지원(?文之院)'이라는 편액을 써 걸었다. 후에 또 직제학을 설치하도록 명하고, 문원(文苑)의 권점에 든 사람을 상의 뜻을 기다려 의차(擬差)하고, 시임 제학이 재상으로 임명되면 승부(陞付)하도록 하였다.
○ 제주목(濟州牧)에 하유하여 백성들을 산릉(山陵) 역사에 동원시키는 규정을 없애게 하였다.
○ 홍인한(洪麟漢)과 정후겸(鄭厚謙)을 사사(賜死)하였다. 그들의 죄악이 환히 드러나 대신(大臣)과 삼사가 번갈아가며 극률(極律)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법(公法)은 굽힐 수 없고 여론은 막을 수 없다."
하고, 이렇게 명한 것이다.
○ 8월. 진묘(眞廟)를 추숭할 때의 복색은 길복(吉服)을 입도록 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과 예관의 논의를 따른 것이었다.
○ 경모궁에 시호를 올릴 때의 복색을 홍문관으로 하여금 널리 조사하게 하고, 또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예관이 모두 아뢰기를,
"시호를 올리는 것은 추숭하는 일과는 차이가 있으니 길복을 입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따랐다.
○ 유사에게 명하여 각 전궁(殿宮)의 공선(貢膳)에 대한 정례(定例)를 바로잡도록 하고, 이를 팔도와 양도(兩都)에 반포하였다. 하교하기를,
"이것이 비록 한 가지 일에 불과하지만 백성들의 고충을 중요하게 여기는 뜻이다."
하였다.
○ 내시(內侍)로서 녹봉을 받는 자를 월말에 이조가 계문하도록 명하였는데, 총재(?宰)가 모든 것을 도맡아 다스리는 《주례(周禮)》천관(天官)의 뜻을 붙이고자 함이었다.
○ 9월. 여러 도에 있는 각 궁방(宮房)의 결세(結稅)를 본 고을에서 곧장 호조로 바치면 호조가 궁방으로 나누어 보내도록 하고, 궁방에서 도장(導掌)을 뽑아 조세를 징수하러 보내는 것을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묘당에 명하여 절목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 결안(結案)되지 않았는데 역률(逆律)을 쓰는 법, 당사자가 이미 죽었는데 노적(?籍)의 율을 소급해서 시행하는 법, 차율(次律)로 결안되었는데 극률을 더 쓰는 법을 없앨 것을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법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다. 임금의 존엄함을 가지고도 털끝만큼의 사사로운 뜻을 뒤섞어서 내리거나 올릴 수 없으며, 그 죄의 크고 작음을 보아 그에 따라 법을 적절히 적용해야 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죄(死罪)로 단안된 자가 죽지 않았을 경우에는 결안을 받들고 죽었을 경우에는 반드시 율문(律文)에 준해서 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우리 조정에서 400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해온 상법(常法)인 것이다."
하였다.
○ 내국(內局)에서 올리는 여러 도의 생복(生鰒)과 건복(乾鰒)을 모두 감해서 받아들이고 한겨울과 삼복 더위에는 전부 감면할 것을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한 개를 따는 데 포구 백성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어찌 소양(燒羊)의 뜻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 하교하기를,
"'우르르' 하는 우레 소리가 수장(收藏)의 때에 갑자기 일어났다. 인애(仁愛)한 하늘이 이렇게 경고하니, 두려운 마음이 배나 더하여 편안히 지낼 겨를이 없다. 본원(本原)에 뜻을 더 쏟고자 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함양(涵養)의 공부가 지극하지 못하고, 기무(機務)에 정신을 가다듬으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에 대한 효과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잘못은 실로 내게 있고, 재앙을 그치게 할 방도도 나의 마음에 달려 있다. 그런데 어찌 감히 나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 살펴서 하늘의 견책에 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부터 3일 동안 반찬 수를 줄이도록 하라. 아, 너희 삼사와 가까이 있는 신하들은 이렇게 두려워하는 뜻을 체득하여 나의 과실과 현재의 정사에 대해 조목조목 숨김없이 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 11월. 하교하기를,
"전교에 대신(大臣)의 이름자를 쓰지 않고 안에서 내리는 문서에 대신의 이름을 쓰지 않는 것도 열성조의 수교(受敎)에 있는 일이다. 오늘 정사(正使)에게 하사하는 물건에 이름자를 멋대로 쓴 것이 작은 일이기는 하지만, 조짐을 키워서는 안 되겠으니 중관의 사판(仕版)을 삭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말을 듣는 것은 임금이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고, 말을 올리는 것은 조정 신하들이 우선적으로 힘써야 할 일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어찌하여 전혀 말을 들을 수 없는 것인가. 과인에게 한 가지 허물도 없어서 애당초 경계시킬 일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또 과인이 자신의 잘못을 듣기 싫어해서 그런 것인가. 때아닌
하였다.
○ 경공삼(京貢蔘) 10근을 임시로 줄이고 강계(江界) 삼호(蔘戶)의 호역(戶役)을 견감할 것을 명하였다.
○ 일찍이 병사(兵使)를 지낸 사람을 남병사(南兵使)에 의망해 들이도록 명하였는데, 관방(關防)의 측면에서 중요한 지역인 때문이었다.
○ 동북도(東北道) 유민(流民) 가운데 서울에 머물러 있는 자에게는 쌀을 지급하고 떠나려는 자에게는 돌아갈 양식을 지급할 것을 명하였다.
○ 12월. 포항창(浦項倉)의 조(租) 1만 곡(斛)을 북관(北關)에 더 지급하여 진휼 밑천에 보태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년(정유, 1777)
○ 1월. 팔도와 양도(兩都)에 유시하여 권농(勸農)의 정사를 신칙하였다. 하교하기를,
"금년 세수(歲首)는 바로 내가 즉위한 첫해의 설날이다. 백성을 보살펴주는 정사와 백성을 안정시키는 도리로 보면 우리 열성조께서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신 덕을 몸받아야 하겠는데, 민산(民産)의 측면에서 아주 절실하고 방본(邦本)에 가장 깊이 관계되는 것은 오직 농사뿐이다."
하였다.
○ 정언 정지검(鄭志儉)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신 이후로 문무 관원들이 직무를 태만히 하여 조정의 기상이 느슨해지고 말았습니다. 전선(銓選)하는 자리에는 공도(公道)가 펴지지 못하고 논의하는 마당에는 곧은 말은 들리지 않으니, 실로 그에 대한 근본 원인을 찾는다면 전하께서 다스림을 구하기는 부지런히 하지만 입지(立志)가 굳지 못한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하교하기를,
"선대왕께서 진달드린 것은 신하로서의 분의(分義)이나, 나에게는 진달하는 것은 차마 제기하지 못하고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일 뿐만이 아니니, 역적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겠다. 또 나의 역적일 뿐만 아니라 선대왕의 역적이며 경모궁의 역적이기도 하다. 오늘 윤숙(尹塾)을 부제학에 의망한 것을 보고 특별히 낙점한 것은, 바로 선대왕께서는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한광조(韓光肇)에게 제사를 지내 주었으나 나는 한광조를 엄히 형신한 뜻이고, 또한 내가 선조(先朝) 때 글을 올리자 선대왕께서 또 '이후로 감히 제기하는 자가 있으면 이는 역적이다.'라고 하교하신 뜻이다. 이것이 어찌 의리를 밝히고 시비를 바로잡는 하나의 큰 관건이 아니겠는가. 전조(銓曹)에서 이미 검의(檢擬)한 것을 보면 조정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병조 좌랑 윤숙을 부교리에 제수하라."
하였다.
○ 운보검(雲寶劍)과 담통개(擔筒箇)는 대왕의 국휼(國恤) 때라 할지라도 포(布)로 싸지 말도록 명하였는데, 선조 무인년(영조 34, 1758)의 수교(受敎)를 따른 것이었다.
○ 하교하기를,
"오늘은 재계하는 날인 관계로 소대(召對)를 행하려 하였는데, 경악(經幄)의 직책을 맡은 자들이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대궐에 나왔다. 날이 이미 어두워져서 구두를 분변하지 못할 정도이니, 강연을 부지런히 하려는 본래의 뜻이 절대 아니다. 입시한 옥당을 엄중히 추고하라."
하였다.
○ 4월. 가뭄으로 인해 창경궁의 수리 역사를 정지할 것을 명하였는데, 옥당 조시위(趙時偉)가 아뢴 때문이었
○ 《사기평림(史記評林)》을 진강하였다. 시독관 박재원(朴在源)이 아뢰기를,
"대개 욕(欲)이라는 글자의 해가 가장 큰데, 그 중에서도 귀촹눈촹입촹코의 욕구는 해가 더욱 큽니다. 그것을 방지하고 절제하는 것은 예(禮)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예기》에 이른바 '한 번 술을 올리고 백 번 절한다.'는 것은 바로 술의 화를 막기 위한 것이니, 예로써 귀촹눈촹입촹코의 욕구를 막아야 한다는 것을 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임금이라는 지위는 이 모든 것이 충분히 제공되는 자리이니, 반드시 한 칼에 결단을 내려 마음에 싹이 트지 않게 해야만 이러한 염려가 없어집니다."
하니,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5월. 날이 가물자 반찬 수를 줄이고 자신에게 책임을 돌렸다. 하교하기를,
"아, 과인에게 죄가 있으니 재앙이 내 몸에 닥쳐야 할 것인데, 불쌍한 저 백성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한 마음은 다스림의 근원이 되건만 존양(存養)이 독실하지 못하였고, 칠정(七情) 가운데 가장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 노여움이건만 성찰(省察)을 지극히 하지 못하였다. 언로(言路)가 막혀 침묵하는 것이 습관화되고, 재정이 고갈되어 남아 있는 저축이 없다. 성의와 예가 모자라서 산림의 선비가 마음을 돌릴 가망이 없고, 일의 형세상 어쩔 수 없어서 토목 공사를 일으킨 혐의가 있다. 기상이 점차 해이해져서 생업의 터전을 마련해 주지 못한다. 이 몇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있더라도 재앙을 부르고 이변을 초래하기에 충분할 것인데, 이러한 것이 모두 있는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였다. 옥당이 연명으로 상차하여 경계할 것에 대해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심껏 인도해야 할 직책에 있으면서 교지에 응해 말을 진달하여 가뭄을 안타까워하고 도움을 구하는 나의 뜻에 부응하였다.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기니, 각각 후궁(帿弓)을 1장(張)씩 하사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혹심한 가뭄이 너무나도 안타까우니, 몸을 희생 대신 바치고서 직접 비를 비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다."
하고, 사직단으로 가서 비를 빌고 직접 죄수를 소결(疏決)하였다. 상이 기우제 제문을 보고 하교하기를,
"축문에 자신에게 죄를 돌리는 뜻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고쳐 짓도록 하라."
하였다.
○ 정원이 반찬 수를 줄이는 동안은 시사(視事)를 정지할 것으로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선묘(宣廟)께서 정전을 피하셨을 때 비현각(丕顯閣)이 좁아서 법연(法筵)을 열지 못하게 되었는데, 선정(先正) 율곡(栗谷) ㅡ이이(李珥)의 별호(別號)임ㅡ 이 '강연의 인원을 줄일 수는 있지만 법연을 정지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더구나 반찬 수를 줄이는 것과 정전을 피하는 것은 차이가 있지 않은가. 수성(修省)하는 때에는 의당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니, 이후로는 반찬 수를 줄이고 정전을 피하는 때에 강연을 규례대로 품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 단종조(端宗朝)에 절개를 지키다 죽은 신하 하위지(河緯地)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주라고 명하였는데,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처음에 숙종이, 경외(京外)의 살인 사건을 조사할 때 시체를 파내어 검험(檢驗)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수십 년 동안 판결받지 못한 채 감옥에서 죽은 자가 있다고 하여, 파내어 검험하는 일을 일체 《무원록(無寃錄)》에 따르게 할 것을 명하였다. 영종이 또 "주(周) 나라 문왕(文王)은 오히려 뼈를 묻어주게 하였으니, 백골(白骨)을 검험한다면 재차 죽임을 당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몰래 묻은 경우에는 검험하고, 이미 공식적으로 매장한 경우에는 검험하지 말라."고 하교하였다. 그런데 유사가 파내어 검험하는 일을 금지하는 것으로 잘못 알아서 경외가 감히 파내어 검험하지 못하였다. 조정의 신하가 누차 말하자 상이 양조(兩朝)의 수교를 가져다 보고 나서 하교하기를,
"선조의 하교 가운데 '이미 매장한 경우에는 검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파내는 것을 금지한 것이 아니라 백골
하였다.
○ 상이 금려(禁旅)는 선발을 신중히 하고 재목을 가려뽑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내금위와 겸사복 가운데 1번(番)을 선천(宣薦)의 자리로 정해서 초사(初仕)의 계제(階梯)로 삼게 할 것을 명하였다.
○ 북관(北關)에서 진휼 정사를 마쳤다고 보고해 왔다. 감진어사(監賑御史) 신응현(申應顯)과 경원 부사(慶源府使) 이동엽(李東燁)을 가자하도록 명하였는데, 진휼하는 정사에 마음을 다한 때문이었다.
○ 북관의 떠내려간 곡식 및 10개 고을의 전세(田稅)와 노비 신공(身貢)을 탕감할 것을 명하였다.
○ 대사헌 정창순(鄭昌順)이 상소하였다. 그 내용은, 1. 풍습을 변화시켜 조정의 기상을 바르게 할 것, 2.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민생을 소생시킬 것, 3. 성상의 뜻을 확고하게 세워 기강을 진작시킬 것, 4. 대간의 선발을 신중히 하여 언로(言路)를 열 것, 5. 관방(官方)을 아껴서 명기(名器)를 중하게 할 것, 6. 선비의 기상을 진작시켜 인재를 양성할 것 등이었다. 상이 가상히 여겨 특별히 녹비를 하사하였다.
○ 9월. 관동(關東)이 수해를 입었다. 부사과 심풍지(沈豊之)를 위유어사(慰諭御史)로 차견하여, 유서(諭書)를 선포한 다음에 그대로 민정(民情)을 살펴보게 하였다.
○ 진주(晉州) 등 수십 개 고을에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가옥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상이 감사의 장계를 보고 크게 놀라서 진휼의 방책을 조목조목 진달하도록 감사에게 신칙하였다. 또 안변(安邊) 등 고을의 수재로 인해, 수재를 입은 자에 대해서는 환자곡과 군포(軍布)를 정봉(停捧)하고 죽은 자에 대해서는 탕감할 것을 명하였다.
○ 10월. 하교하기를,
"어사가 갈 때에 나이 100세 이상 된 사서인(士庶人)을 찾아 아뢰도록 특별히 명한 것은 나이 많은 사람을 존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관서 어사가 보고한 사람만도 몇 명이나 되니, 이는 희귀한 일이다. 가자하도록 하고, 본도로 하여금 음식물과 옷감을 넉넉히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 11월. 대사헌 이휘지(李徽之)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대장(大匠)이 집을 짓는 것과 같으니, 먼저 집터를 닦아 놓아야만 기둥과 주추를 안정시켜서 집을 완성시킬 수 있는 법입니다. 임금의 마음은 집터와 같고, 규모는 기둥과 주추와 같으며, 정령(政令)은 집과 같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잘 다스리고자 하는 전하의 뜻이 요도(要道)를 얻지 못하여 강기(綱紀)가 세워지지 않고 덕화가 다 펴지지 못한 듯합니다. 얼마 전 과거 제도의 변통에 대해 특별히 하문하신 것과 애초에 원당(願堂)의 혁파를 명하셨던 것은 매우 거룩한 조처였습니다. 그러나 중도에 그만두어 예전과 같게 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신은 실로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고, 이어 절약해 써서 비축하는 도리에 대해 진달하였다.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형조에 하교하기를,
"대역부도(大逆不道) 및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죄를 지은 자의 경우에는 대신이 임하여 국문하고 삼사가 옥안(獄案)을 조사하여 오히려 상세히 복심하는 뜻이 있으나, 부대시참(不待時斬)할 죄수의 경우에는 일개 율관(律官)이 옥안을 엮어서 옥관(獄官)에게 올리면 옥관이 삼가서 서명할 뿐이다. 어찌하여 때를 기다려야 할 죄수에 대해서는 신중히 하고 부대시참 할 죄수에 대해서는 소홀히 한단 말인가. 지금부터 경의 조(曹)에서 평의(評議)하여 의정부에 보고하면 의정부에서 상세히 복심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 무녀(巫女)들이 성문 안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시키라고 명하였다.
○ 《대학》을 다달이 고강(考講)하는 규정을 거듭 밝혔다.
2년(무술, 1778)
○ 1월. 좌의정 정존겸(鄭存謙)이, 험준한 고개의 정해진 구역 안에 나무를 키우는 법을 거듭 밝히기를 청하니, 따랐다.
○ 《흠휼전칙(欽恤典則)》이 이루어졌다. 이에 앞서 하교하기를,
"송(宋) 나라 때 예조(藝祖)는 옥리(獄吏)에게 명하여 5일에 한 번씩 감옥을 점검해 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감옥을 청소하고 형구(刑具)를 세척하게 하는가 하면 가난한 자에게는 먹을 것을 지급하고 병든 자에게는 약을 지급하며 작은 죄를 지은 자는 즉시 소결해서 보내도록 하였으니, 송나라가 수백 년 동안 면면히 기업을 이어간 것은 여기에서 그 기틀이 잡힌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아, 너희 유사의 직책을 맡은 신하들은 마땅히 두려워하라. 승지를 법부(法府)와 법조(法曹)로 보내어 태(笞)촹장(杖)촹가(枷)촹축(杻)이 규정과 같지 않은 것을 살펴보게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장에 대소(大小)가 있고 가에 후박(厚薄)이 있는 것은 죄의 경중에 따라서 쓰기 위함이다. 근래에 옛 법이 점차 해이해져서 죄의 경중을 논하지 않고 경사(京司)와 외방에서 모두 대장(大杖)과 후가(厚枷)를 쓰기 때문에 포학한 관리가 인명을 마구 해치는 폐단이 없지 않다. 이것이 어찌 옛 선왕들이 조심하고 삼가던 뜻이겠는가. 군문(軍門)의 곤장으로 말하자면 그 제도가 극도로 두텁고 크므로 곤장을 쓰는 때에 사람을 해치기 쉽다.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니, 경외의 형구 및 각 영문의 곤장 제도를 비교해서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제도를 정하여 반포하였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
○ 태와 장은 《대명률(大明律)》을 쓴다. 태는 길이가 3척 5촌이고, 대두(大頭)는 지름이 2푼 7리이며 소두(小頭)는 지름이 1푼 7리이다. 작은 가시나무로 만들되 마디의 눈을 깎아버리고, 관(官)에서 내린 교판(較板)을 가지고 법대로 교감하며, 힘줄 같은 것들을 박아넣지 못하게 한다. 결장(決杖)해야 할 자는 소두로 볼기를 맞게 한다. 장은 길이가 3척 5촌이고, 대두는 지름이 3푼 2리이며 소두는 지름이 2푼 2리이다. 큰 가시나무로 만들되 역시 마디의 눈을 깎아버리고, 관에서 내린 교판을 가지고 법대로 교감하며, 힘줄 같은 것들을 박아넣지 못하게 한다. 결장해야 할 자는 소두로 볼기를 맞게 한다.
○ 신장(訊杖)은 《대전(大典)》의 법을 쓴다. 길이는 3척 3촌이고, 위쪽 1척 3촌은 둘레의 지름이 7푼이 되고 아래쪽의 2척은 넓이가 8푼, 두께가 2푼이 되게 한다. 하단(下端)으로 무릎 아래를 때리되 겸인(??)에 이르지 않게 하고, 한 차례에 30대를 넘지 않게 한다. 영조척(營造尺)을 쓰되 길이는 《대명률》에 따라 3척 5촌을 쓴다. - 위쪽에 2촌을 더하였다.-《속대전(續大典)》에, 추국할 때의 신장은 넓이가 9푼, 두께가 4푼이고, 삼성(三省)의 신장은 넓이가 8푼, 두께가 3푼인데, 모두 영조척을 쓰도록 되어 있다. 의금부는 이를 준용하되 길이는 《대명률》에 따라 3척 5촌으로 쓴다. 삼성의 신장은 외방이라 할지라도 이대로 시행한다.
○ 가는, 《대명률》에, 길이가 5척 5촌이고 두활(頭闊)이 1척 5촌이며 마른 나무로 만드는데, 사죄(死罪)는 무게가 25근, 도류(徒流)는 무게가 20근, 장죄(杖罪)는 무게가 15근이며, 길이와 무게를 그 윗면에다 새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경국대전》과 《속대전》에는 모두 가의 제도가 없다. 지금 만약 《대명률》대로 시행하자면 큰 장애가 있을 것이므로 품지하고 경중을 참작해서 별도로 규정을 만들어 기록하였다. 길이가 5척 5촌, 두활이 1척 2촌이며, 사죄는 무게가 22근, 도류는 무게가 18근, 장죄는 무게가 14근이다. 마른 나무로 만들고 무게를 그 위에 새긴다.
○ 축은, 《대명률》에, 길이가 1척 6촌이고 두께가 1촌이며 마른 나무로 만드는데, 남자로서 사죄를 범한 자는 축을 쓰고 도류 이하 및 부인으로서 사죄를 범한 자는 쓰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ㅡ우리나라 근래의 예는 도류 이하일 경우 쓰지 않는다.ㅡ
○ 철삭(鐵索)은, 《대명률》에, 길이가 1장이고 철로 만들어 가벼운 죄를 범한 자에게 쓰는 것으로 되어 있다.
○ 요(?)는, 《대명률》에, 고리를 잇대어 꿴 사슬의 총 무게가 3근이고 철로 만들며, 도죄를 범한 자는 요를 채운 채 일을 시킨다고 되어 있다. 우리 나라는 철삭료(鐵索?)를 쓰지 않았다. ≪경국대전》에 항쇄(項鎖)와 족쇄(足鎖)라는 글이 있으나 척수와 모양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법사에서 쓰는 제도에 따라 기록한다. 목에 채우는 쇠사슬은 길이가 4척이고, 발에 채우는 쇠사슬은 길이가 5척이다.
○ 수금(囚禁)은, 《경국대전》에, 사형 죄수는 가와 축을 쓰고 발에 쇠사슬을 채우며, 도류 죄인 이하는 가와 축을 쓰고,-근래의 예에 축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위에 보인다.ㅡ장죄에는 가를 쓴다. 의친(議親), 공신 및 당상관, 사족(士族)의 부녀자로서 사죄를 범한 자는 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당하관과 서인의 부녀는 목과 발에 쇠사슬을 채우며, 장죄는 목에 쇠사슬을 채운다.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죄수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으며, 특교(特敎)에 해당되는 경우도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 곤은, 새로 정한 절목에, 중곤(重棍)은 길이가 5척 8촌이고 넓이가 5촌이고 두께가 8푼이며 버드나무로 만든다. 이것은 군중(軍中)의 곤장으로 사죄를 범한 자를 다스리는 데만 사용하며 대퇴부를 때린다. '중곤'이라는 두 글자와 길이촹넓이촹두께를 상단에 새긴다. 병조 판서, 군문의 대장, 유수, 관찰사, 통제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가 사용하되, 사죄가 아닌 자에게는 쓰지 않는다.
○ 행용(行用)하는 대곤(大棍)은 길이가 5척 6촌이고 넓이가 4촌 4푼이고 두께가 6푼이며 버드나무로 만든다. 죄를 범한 자에게 사용하며 중곤과 마찬가지로 글씨를 새긴다. 군문의 도제조, 병조 판서, 군문의 대장과 중군, 금군 별장, 포도청, 유수, 관찰사, 통제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토포사 및 군무 사성(軍務使星) 2품 이상이 사용한다.
○ 행용하는 중곤(中棍)은 길이가 5척 4촌이고 넓이가 4촌 1푼이고 두께가 5푼이다. 내병조, 도총부, 군문의 종사관, 군문의 별장과 천총, 금군장, 좌우 순청, 영장, 겸영장, 우후, 중군, 변지 수령, 변장, 사산 참군(四山參軍) 및 군무사성 3품 이하가 사용한다.
○ 행용하는 소곤(小棍)은 길이가 5척 1촌이고 넓이가 4촌이고 두께가 4푼이다. 군문의 파총과 초관, 첨사, 별장, 만호, 권관(權管)이 사용한다.
○ 치도곤(治盜棍)은 길이가 5척 7촌이고 넓이가 5촌 3푼이고 두께가 1촌이다. 도적을 다스리는 데만 사용하지만 변정(邊政) 및 송정(松政)에 관계되는 자를 다스리는 데도 사용한다. 포도청, 유수, 관찰사, 통제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토포사, 겸토포사, 겸포도사, 변지 수령, 변장이 도적 및 변정과 송정에 관계되는 자를 다스리는 데 사용한다.
경외가 이를 준칙으로 삼아 감히 어기지 않도록 한다.
또 하교하기를,
"당(唐) 나라와 송(宋) 나라 때는 모두 5일에 한 번씩 녹수(錄囚)하였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10일에 한 번씩 녹수하고 있으니, 옛날의 제도가 절대로 아니다. 10일의 간격을 둔다면 비록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어떻게 스스로 진달하겠는가. 지금부터는 5일마다 녹수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 2월. 정빈(靖嬪)의 묘소를 봉원(封園)하여 수길원(綏吉園)이라 하고, 사당을 연호궁(延祜宮)이라 하였으며, 제례(祭禮)는 저경궁(儲慶宮)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정빈과 영빈(暎嬪)을 봉원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조정이 의논드리기를,
"궁원의 의식에 대해서는 선대왕께서 정하신 법제가 있는데, 대왕의 사친(私親)에게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지금 정빈을 봉원하는 것은 실로 행해야 할 전례(典禮)입니다만, 영빈의 봉원은 정해진 법제와 상응하지 않습니다."
하니, 마침내 그 논의에 따랐다.
○ 부교리 남학문(南鶴聞)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는 타고난 품격이 탁월하시나 지나치게 고원(高遠)한 병통이 없지 않고, 성학(聖學)이 꿰뚫어 통하셨으나 지나치게 살피는 단점이 더러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호령을 내실 때에 반드시 신중히 생각하고 빈틈없
하니,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고(故) 상신(相臣) 김창집(金昌集)을 영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할 것을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계책을 결정한 대의(大義)와 목숨을 바친 충성은 실로 선대왕의 묘정에 배향하기에 합당한데, 미심쩍어 하고 어렵게 여긴 것은 단지 미처 섬기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가까이 고 중신(重臣) 민진후(閔鎭厚)의 예가 있으니, 빈청으로 하여금 모여 논의하게 하라."
하였다.
○ 3월. 예조에 명하여 저경궁(儲慶宮)촹순강원(順康園)촹연호궁(延祜宮)촹수길원(綏吉園)의 향사(享祀) 의절(儀節)을 바로잡게 하였다. 궁의 경우 사중삭(四仲朔)의 제사에는 삼헌(三獻)하고 고유제(告由祭)에는 단헌(單獻)하며, 원의 경우 기신제(忌辰祭) 및 사명일(四名日)에 모두 단헌하도록 하였다.
○ 4월. 병조 판서를 노부사(鹵簿使)로 삼도록 명하였다.
○ 정성왕후(貞聖王后)에게 '단목장화(端穆章和)'라는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였다.
○ 상의원 제조 홍낙성(洪樂性)이, 혜경궁(惠慶宮)의 복색을 홍문관으로 하여금 널리 조사하게 하기를 계청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니,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등이 의논드리기를,
"혜경궁의 의장(儀仗)에 관한 모든 절차에 다 흑색을 쓰고 있으니, 예복에 있어서도 달리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혜경궁께서 입으실 적의(翟衣)의 복색(服色)은 전례가 없는 것이다. 자색으로 하면 이존(貳尊)의 혐의가 있게 되고, 흑색으로 하면 제도를 달리하는 뜻이 없으며, 홍색과 남색은 각각 쓰이는 곳이 있다. 심청색(深靑色)만이 가장 근사하니 이로써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 5월. 이때 대상(大祥)과 담제(?祭)가 이미 끝난 상황이었는데, 상이 대궐 뜰에 헌현(軒縣)을 베풀어 놓은 것을 보고 하교하기를,
"패옥(佩玉)을 차고 진의(袗衣)를 입는 것이야 감히 그만두지 못하더라도 종고(鐘鼓)와 관약(管?)을 어찌 차마 대번에 들을 수 있겠는가. 《예기》에 이르기를, '대상이 지나면 호관(縞冠)을 쓰고 시월(是月)에 담제를 지내며 사월(徙月)은 음악을 연주한다.' 하였고, 맹헌자(孟獻子)가 담제에 악기를 매달아 놓기만 하고 연주하지 않은 것을 공자(孔子)가 허여했다고 하였다. 해석하는 자 가운데 어떤 사람은 '사월에 대상의 달을 넘기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자(朱子)의 《가례(家禮)》가 이루어짐에 왕숙(王肅)의 주장은 논리성이 부족한 것으로 여겨졌으니, 후세에 《예기》를 보는 자는 정현(鄭玄)의 학설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예기》의 '시월담'이란 '시일곡(是日哭)'이라는 것과 같으니, '사월악(徙月樂)'도 의당 담제의 달을 넘겨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였다. 마침내 이달이 다할 때까지 설치해 두고 연주하지 않았다.
○ 조참(朝參)에 대하여 매달마다 품지하도록 명하였는데, 연신(筵臣)이 고례(古例)를 인용하여 진달하면서 청한 때문이었다.
○ 왕대비의 '장희(莊僖)'라는 존호를 올리고 혜경궁에게 '효강(孝康)'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이에 앞서 하교하기를,
"왕위를 계승하여 동조(東朝)께 존호를 올리고 부묘(?廟)하기를 기다려서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올리는 것은 예법이다. 과덕(寡德)하고 우매한 내가 왕위를 계승하여 자전을 왕대비로 받들자 유사가 존호를 논의하기를 고례(古禮)대로 하였다. 그러나 자궁(慈宮)에 대해서만은 한 글자의 존호도 올리지 못한다면, 정으로 보나 예로 보나 편치 않고 서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일이 이미 이존의 혐의가 없고 또 양명(揚名)의 의리에 맞는 것이라면 성대한 전례를 거행하고 아름다운 존호를 올리는 일을 어찌 늦추겠는가. 자전께 존호를 올릴 때에 자궁께도 존호를 올리는 것이 합당한지를 대신에게 묻고 구경(九卿)과 삼사(三司)에게도 물어본 결과 여러 사람의 논의가 일치했으니, 또한 의리에 어긋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제주(濟州)는 아득한 바다 밖에 있는 섬이다. 근래에 흉년이 들어 대다수의 백성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므로 생각할 때마다 늘 내가 당한 것처럼 마음이 아팠었다. 차라리 어공(御供)을 줄일지언정 어찌 우리 백성을 수고롭힐 수 있겠는가. 연례적으로 진공하는 회전복(灰全鰒)을 영구히 감하도록 하라. 이는 대개 선대왕의 유지(遺旨)이다."
하였다.
○ 6월.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과인이 열성조의 큰 사업을 이어받아 깊은 연못 가에 선 듯이, 살얼음을 밟은 듯이 밤낮으로 두려워해 온 지 이제 3년이 되었다. 우리 영종대왕의 부묘(?廟) 의식을 이미 마쳐 의문(儀文)이 길례(吉禮)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에 곤룡포와 면류관에다 음악을 갖추고서 삼가 태묘에 배알하고 뭇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으니, 이 예는 선왕의 예이다. 나 소자가 선왕의 지위에 올라 선왕의 백성을 다스리면서 감히 선왕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고 선왕의 정사로 정사를 베풀어 우리 선왕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민산(民産)촹인재(人材)촹융정(戎政)촹재용(財用)에 있어서 선왕의 제도를 강구하고 선왕의 옛 법을 수복(修復)하여 우리 선왕이 부여하신 책임을 저버리지 않기를 함께 다스려나가는 밝은 신하들에게 깊이 기대하는 바이다.
아, 조정에 있는 뭇 신하들은 집안을 걱정하듯이 나라를 걱정하여 성심을 다해 과인을 인도하도록 하라. 동반촹서반 및 시위 군사들도 생각이 있으면 모두 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 악원(樂院)에 하교하기를,
"성음(聲音)은 치도(治道)에 크게 관련이 된다. 성음의 가르침은 말단적인 음률(音律)에 있는 것이 아니건만, 후세에 와서 예악이 무너져 이미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다 또 말단마저도 다루지 않아 성음의 절주(節奏)가 구슬프고 음란하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길게 탄식하고 뽑아 늘어뜨려 더디고도 오래도록 지속되는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만약 빠른 것을 변화시켜 느리게 하고 촉급한 것을 고쳐서 더디게 한다면 쇠세(衰世)의 음악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을 맡은 우리의 모든 관원은 완만한 절주를 익히고 가락의 촉급함을 제거하여 간사한 소리에 가깝지 않게 함으로써 화음(和音)을 회복하도록 하라."
하였다.
○ 왕대비가 언서(諺書)로 대신에게 하교하여, 사족(士族)을 간택해서 빈어(嬪御)의 자리에 두어 저사(儲嗣)를 넓히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헌납 박재원(朴在源)이 상소하기를,
"이번에 내려진 간택의 명은 고례(古禮)에 질정하여도 의심할 것이 없고 성조(聖朝)에 상고하여도 근거할 곳이 있는 일입니다. 더구나 자전께서 하교하신 일이니, 조정의 신하들은 실로 받들어 따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 양암(諒闇)의 상제(喪制)를 마치시어 예법으로 보아 의당 침실을 회복하시게 되었으므로 팔도의 신민들이 목을 길게 늘이고서 우리 중궁 전하께서 자손을 생산하는 큰 경사가 있기를 간절히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건강이 좋지 않으시어 많은 자손을 기필할 수 없다는 분부를 받들게
신은 중궁 전하의 환후가 어떠한 증상이어서 자손을 생산하시고 기르는 데 지장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본말(本末)을 상세히 살피고 증상을 빈틈없이 알아낸 다음 훌륭한 의원을 널리 맞이하고 좋은 약을 두루 쓴다면 어찌 방도가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조정의 일을 처리하시는 여가에 때때로 몸소 진찰하고 상세히 물으시며, 나오셔서는 약원의 신하들을 만나시어 성의와 의술을 다하여 부지런히 치료하게 하소서. 일을 하루라도 늦추어서는 절대로 안 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가 진달한 것을 내 어찌 생각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의약으로 치료할 병이 아니다. 이미 자전의 하교가 있었으니, 궁중의 일은 그대가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이때 홍국영(洪國榮)의 누이가 빈선(嬪選)에 응하였다. 홍국영이 그 상소 내용에 노하여 공석(公席)에서 욕을 하며 반드시 중상(中傷)하려고 하였으나, 상이 그의 충성을 깊이 살폈으므로 박재원이 끝까지 죄를 면할 수 있었다. 후에 특별히 부제학을 추증하고 정려하였다.
○ 윤6월. 풀어주고 풀어주지 않을 죄인에 대해 비국에서 회계하는 규정을 혁파할 것을 명하였다.
○ 9월. 노량(露梁)에서 대대적으로 열무(閱武)하였다.
○ 승려들을 금지하여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 하교하기를,
"경비를 절약하는 것은 궁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관(大官)이나 추인(酋人)의 지공이라 할지라도 쓸데없는 것이면 절약하여 줄여야 할 것인데, 궁중의 경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궁인의 공억(供億)을 처음 즉위하여 먼저 바로잡았으므로 대전(大殿)에는 궁인의 명목이 없으나, 여러 조정을 통해 유래되어 온 궁인으로서 자전에 소속된 자들은 아직 혁파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한 때에는 절약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이니, 계축년에 이속(移屬)된 궁인의 공억을 영구히 혁파하여 경비에 보태도록 하라."
하였다.
○ 10월. 하교하기를,
"종묘 사직의 제향(祭享) 때 기일에 앞서 행하는 재계와 맹서는 대중들에게 쉽게 행할 수 있는 도리로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지 않다면 도리어 명을 어기는 일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서령문(誓令文) 중의 '불음주(不飮酒)'라는 구절을 예문(禮文)에 따라 '부종주(不縱酒)'로 바로잡으라."
하였다.
○ 성문(城門)의 개폐(開閉)를 그대로 유보할 때는 선전관의 표신(標信)으로 거행하도록 명하고, 병조로 하여금 이를 법식으로 삼게 하였다.
○ 12월. 겨울 날씨가 따뜻하여 얼음이 얼지 않았으므로 원도(遠道)에서 얼음을 채취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날씨가 시절과 맞지 않는 것은 나의 부덕(否德)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로 인해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은 절대로 수성(修省)의 본뜻이 아니다."
하고, 각전(各殿)의 진상은 반을 감하고 그 나머지는 적절히 감할 것을 명하였다.
70권 정조조 2
3년(기해, 1779)
○ 1월. 하교하기를,
"처음으로 대간의 자리에 들어와서 하루에 17번을 아뢰었는데, 말이 모두 강개(慷慨)하고 절실하였으며 임금
하였다.
○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에게 치제(致祭)하였다.
○ 2월. 승지를 보내어 단군묘(檀君廟)와 기자묘(箕子廟)에 치제하였다.
○ 3월. 내각(內閣)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영종대왕의 어제(御製)를 편집, 교정해서 열성의 어제에 붙여 간행하게 하였다.
○ 4월. 하교하기를,
"내 어찌 '강신(降神)한 이후로는 보고 싶지가 않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축문을 읽고 제사를 지내는 때에 분주히 주선하는 반열에 있는 자들이 비스듬히 서고 기대거나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는 등 개탄스러운 일이 없지 않았다. 종묘의 친향 제문은 6구(句)로, 영녕전(永寧殿)의 섭향 제문은 4구로 지어 들이라."
하였다.
○ 명하기를,
"친국(親鞫) 및 정국(庭鞫) 때에 비가 오거나 날씨가 너무 더울 경우에는 초둔(草芚)으로 집을 만들어서 숨을 차리고 기운을 가라앉혀 실정을 다 털어놓고 말하게 하라. 이것을 법식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 5월. 상이 영우원(永祐園)의 기신(忌辰) 때마다 10일간 재계하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달 13일부터 21일까지는 시사(視事)를 여쭙지 말라고 명하였다.
○ 7월. 영릉(寧陵)에 행행하였는데, 성조(聖祖)께서 승하하신 해인 때문이었다. 광나루[廣津]에 이르러 용주(龍舟)에 오르고 나서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내가 지금 배를 타고 백성들을 대하고 보니 더욱 두려운 마음이 든다. 옛날에 성조께서 주수도(舟水圖)를 만들고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명(銘)을 짓게 하신 것은 이러한 뜻이었다."
하였다. 남한산성에 머물면서 예관을 보내어 온조왕묘(溫祚王廟)와 현절사(顯節祠)에 치제하고, 또 험천(險川)촹북문(北門)촹쌍령(雙嶺) 등 전사(戰死)한 여러 곳에 사제(賜祭)하였다.
○ 8월. 환궁하는 길에 이천(利川)에 머물면서 광주(廣州), 이천, 여주(驪州)의 부로(父老)에게 윤음을 내려 하유하고, 대가가 지나는 주변 고을의 1년치 조세를 감면하였다. 부사직 김양행(金亮行)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경은 산림(山林)의 숙덕(宿德)으로 크나큰 명망을 받고 있는데, 지금 능을 배알하는 행차가 경이 거처하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나를 저버리지 않고 얼른 마음을 돌려 등대(登對)하였으니, 기다리던 끝에 실로 기뻐 어쩔 줄 모르겠다."
하였다. 남한산성의 시소(試所)에서 과거를 설행하여 대가가 지나간 여러 고을 유생에게 급제를 내렸다.
○ 경기 유생이 상소하여 청한 것을 인하여 여주에 있는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사당에 '대로(大老)'라는 편액을 하사하고, 어제(御製)촹어필(御筆)로 된 비(碑)를 뜰에 세웠다. 후에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청심루(淸心樓) 위에서 선정(先正)의 시를 보았는데, '앉았자니 달이 지고 능의 송백 어두워져 어느 곳에 꿇어앉아 아뢸 줄 모르겠네[坐久月沈陵栢暗 不知何處??辭]'라는 구절이 있었다. 선정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었으므로 나도 모르게 슬픈 감회가 일었다. '대로'라는 두 글자는, 옛날에 '천하대로(天下大老)'라는 글이 있었다. 연전에 선정의 문집 속에 들어가지 못한 구절을 수집하여 《대로유고(大老遺稿)》라고 제목을 붙였으니, 대개 이 뜻을 취한 것이었다."
하였다.
○ 10월. 하교하기를,
하였다.
○ 11월.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 호서(湖西) 6개 고을의 조운(漕運)을 수운 판관(水運判官)이 담당하도록 한 규정을 혁파하고, 좌도(左道) 수령을 차원(差員)으로 정하여 봉납을 감독하고 조운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것은 호조 판서 김화진(金華鎭)의 말을 따른 것이다.
4년(경자, 1780)
○ 1월. 내원(內苑)의 동쪽에 월근문(月覲門)을 세웠는데, 승여(乘輿)와 시위를 간략하게 하여 수시로 경모궁에 전알하기 위한 것이었다.
○ 경연에 나아가 《논어》를 진강하였다. '익자삼우(益者三友)'에 이르렀을 때 상이 이르기를,
"임금은 벗의 도리를 신하에게 부치는 법이다. 나라를 다스리고 몸을 다스리는 것은 본래 두 가지 일이 아니다. 정직하고 신실하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이롭고 아첨을 잘 하고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사람이 해로운 것은 벗의 도리에 있어서도 실로 그러하지만 신하의 경우는 더욱 심한 점이 있다. 벗의 도리로써 오늘을 본다면 해로운 자이겠는가, 이로운 자이겠는가? 어제 책문(策問)으로 유생에게 물은 것은 정직하고 신실한 논의를 듣고자 함이었건만 한 사람도 임금의 잘못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대각도 오직 침묵만을 일삼아 관원들끼리 서로 바로잡아주는 뜻까지 없애 버리고 말았으니, 이것이 아첨을 잘 하고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데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2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동천묘(東泉廟)에 비를 세우도록 명하였는데, 부사직 김효대(金孝大)가 상소하여 청한 것이었다.
○ 옥당에 명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을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 가지 정사를 처리하는 여가 시간이나 밤기운이 청명한 때에 유신으로 하여금 사기(史記)를 읽게 하고서 시왕(時王)의 득실(得失)과 시정(時政)의 치부(治否)에 대해 가만히 듣는다면 천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뒤미처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니, 이 또한 도움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4월. 하교하기를,
"제주(濟州)의 자제(子弟)들이 낯선 바다에 표류하였다가 살아 돌아온 것은 기이한 일이다. 진공(進貢)하는 물종이 유실된 것을 어찌 논하겠는가. 잡아서 가두어둔 자는 즉시 풀어보내게 하고, 빠져 죽은 자는 본 고을로 하여금 휼전을 지급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여러 도에는 다 불타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에 대해서 보고하고 휼전을 지급하는 규례가 있는데, 제주의 경우에는 전혀 들어보지 못하였다. 이는 감사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그쳐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부터는 휼전을 다른 도의 규례에 따르도록 하되, 바다 건너에서 해조의 복계를 기다리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니 먼저 거행한 후에 장계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5월. 경상감사 조시준(趙時俊)이 장계하여 수로왕릉(首露王陵)의 비를 고쳐 세우기를 청하였다. 상이 따르고, 이어 치제(致祭)를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하였다.
○ 형조의 관원이 감옥에 전염병이 대단한 기세로 번지고 있다고 아뢰니, 중죄수를 모두 보방(保放)하도록 명하고, 양의사(兩醫司)에 신칙하여 구료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사형에 처할 죄수라 할지라도 지레 죽게 만드는 것은 왕정(王政)이 아니다." 하였다.
○ 7월. 상이, 의금부에서 죄수를 심문할 때 죄인이 곧이곧대로 공초한 후에도 정해진 형장의 댓수를 다 채우는 것은 죄상을 빠짐없이 조사하려는 뜻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고 여겼다. 명하기를,
"지금부터 정해진 형장을 다 채우지 않고서 곧이곧대로 공초한 자에 대해서는 형장을 정지하고서 보고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 10월. 뇌변(雷變)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10월에 하늘이 세 차례 경고를 보였으니, 재이가 이른 것이 어찌 과인이 불러들인 바가 아니겠는가. 과인이 재앙을 만나는 날에 이미 불안해 하며 수행(修行)함으로써 재이를 소멸시켜 상서를 만들지도 못하였고, 재앙이 없는 날에는 또 힘써 공경하며 덕을 닦아 하늘의 뜻을 기쁘게 해드리지도 못하였다. 때문에 조정의 기상과 국가의 일이 날로 쇠약하고 퇴락하는 데로 치달리게 되었다.
아, 굳건한 기강이 확립되지 못한 것이 나의 허물이고, 염치의 기상이 펼쳐지지 않은 것이 나의 허물이며,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는 것이 나의 허물이고, 국가의 경비를 이어대지 못하는 것이 나의 허물이며,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한 것이 나의 허물이고, 인재가 흥기하지 않는 것이 나의 허물이며, 사치스러운 풍속이 고쳐지지 않는 것이 나의 허물이고, 탐람한 풍조가 그쳐지지 않는 것이 나의 허물이며,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의 원통함을 풀어주지 못하는 것이 나의 허물이고, 시비가 공정하지 못한 것이 나의 허물이다. 염려스럽고 아슬아슬한 형세가 여기저기서 나타나 위태로움이 눈앞에 닥쳐 있는데도 과인이 일찍이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어찌 가엾이 여겨 이렇게 빈번하게 경고를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너희 뭇 신하들은 품고 있는 생각을 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 11월. 초계문신(抄啓文臣)의 전강(殿講)과 제술(製述)에 대한 규정을 정하였다. 상이, 문신의 전경 전강(專經殿講)과 월과 제술(月課製述)을 하다가 말다가 하는 것이 권면하여 이루어주는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정부에 명하여 괴원(槐院)의 참상(參上)과 참외(參外)로서 37세 이하인 사람을 뽑아 아뢰게 하고, 내각으로 하여금 전강과 제술의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다달이 경사(經史)로 전강을 치르고 10일마다 정문(程文)으로 시험보여 우열을 매겨 상벌을 행하였으며, 항상 가르치는 데 지성을 다하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신축년에 선발한 이후로 모두 열 차례에 걸쳐 선발하였는데, 후의 공경대부가 태반은 이 선발에 들었던 사람일 정도로 문학의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5년(신축, 1781)
○ 1월. 원릉(元陵)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는데, 영종이 저위(儲位)를 계승한 해이기 때문이었다. 협력하여 익대(翊戴)한 고 상신 김창집(金昌集)촹이이명(李?命)촹조태채(趙泰采)촹이건명(李健命)의 충성을 추념(追念)하여, 승지를 보내어 사충사(四忠祠)에 치제하였다.
○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렀다. 이어 장신(將臣)을 보내어 동관왕묘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제사를 올렸다. 또 삼국(三局)의 대장은 겸당상(兼堂上)의 규례에 따라 모든 일을 관할하여 검속할 것을 명하였다.
○ 3월. 이문원(?文院)에 행행하였다. 내각의 신하들을 불러 《근사록(近思錄)》을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
"《근사록》은 학문의 요지인데, 《태극도설(太極圖說)》이 책을 펼쳤을 때의 첫번째 의리가 되니, 먼저 이 장을 읽도록 하라."
하니, 심염조(沈念祖)가 읽고 글뜻을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한 당(堂)에서 자문하는 것이 어찌 단지 글을 이야기하고 경(經)을 설명하기 위한 것일 뿐이겠는가. 위로 과인의 잘못과 시정(時政)의 득실로부터 아래로 백성들의 고락(苦樂)과 전대(前代) 왕의 치란(治亂)에 이르기까지 말하지 않는 일이 없게 함으로써 위아래가 서로 보탬이 되게 하고자 함이다. 대개 강설(講說)은 말로 인해 의문을 일으키고 의문으로 인해 의문을 풀어 중국에는 사람의 선한 마음을 감발(感發)시키는 데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朱子)와 육상산(陸象山)은 의리가 같지 않고 문로(門路)가 제각기 달랐는데도 육상산이 백록동(白鹿洞)에서 강설할 때에 강설을 듣는 주자의 문인(門人) 가운데 왕왕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던 것이니, 말이 사람을 감격시키는 것이 이와 같다."
하니, 신하들이 모두 일어나 절하고 명을 받았다. 이어 홍문관에 행행하여 경연의 신하들과 더불어 《심경(心經)》을 진강하였다. 대궐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촛불이 켜져 있었다.
○ 4월. 승지를 보내어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옥산서원(玉山書院)과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치제하였다. 이어 그 터를 그림으로 그려 올릴 것을 명하였다.
○ 윤5월.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가 관예례(觀刈禮)를 행하고, 이어 노주례(勞酒禮)를 행하였다. 팔도와 양도(兩都)에 거듭 유시하기를,
"제왕이 몸소 적전(?田)을 가는 것은 위에서 자성(?盛)을 마련하여 만백성의 본보기가 되고자 함이다. 다만 갈기만 하고 수확하지 않는다면 예(禮)에 결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선왕께서 의(義)를 일으켜 관예의 의식을 만드시어 여름에서 가을까지 모두 세 차례 임하셨던 것인데, 기축년에는 보령(寶齡)이 이미 칠순을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나 소자가 이어받아야 할 한 가지 일이 아니겠는가.
중하(仲夏)의 성대한 시절에 적전의 보리가 익었음을 보고해왔다. 그러므로 대신을 보내어 먼저 선농에 제사지내고, 새벽같이 동가(動駕)하여 관예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과인은 등극 이후로 한결같이 백성들이 먹을 양식을 생각하여 감히 편안히 쉬지 못하였다. 상신(上辛)에 풍년을 빌고 원조(元朝)에 농사를 권면하는 것을 나는 계술(繼述)이라고 여기며, 오늘의 관예를 나는 또 계술이라고 여긴다.
올해 팔도의 보리도 이 보리처럼 알찬 결실을 맺었는지 모르겠다만, 대개 인정(人情)은 풍족하면 해이해지기 쉬운 법이다. 혹시라도 지대가 낮은 땅까지 알찬 수확을 거둔 것만 보고 이듬해를 대비해서 비축할 것을 생각하지 않아 일손을 놓은 채 놀고 먹으며 노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밭이 있는데도 개간하지 않고 잡초가 있는데도 김매지 않는다면, 하늘이 비록 풍년을 내려주고자 한들 땅이 저절로 개척되고 벼가 저절로 자라겠는가.
백성들은 질박하여 날로 쓰면서도 흥기할 줄을 모르니, 권농은 장리(長吏)에게 달려 있다 하겠다. 부지런히 하거나 게을리 하는 것에 따라 내가 상을 주고 벌을 줄 것이다."
하였다.
○ 큰비가 와서 사문(四門)에 영제(?祭)를 지냈다. 한성부에 신칙하기를,
"국가를 다스리는 자의 근심은 홍수, 가뭄, 도적에 있다. 그러므로 위에 보고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위에 있는 사람은 항상 두려워하여 감히 교만하고 방종한 마음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하였으니, 이 문정(李文靖)의 말은 참으로 좋다. 나는 이 말을 일찍이 깊이 음미하였다.
근래에는 꺼리고 숨기는 것이 습속이 되어 유사가 한 번도 보고한 적이 없었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인물(人物)이 다치거나 죽은 일, 가사(家舍)가 떠내려가거나 소실(燒失)된 일을 각각 해부에서 한성부에 보고하면 그때마다 별단으로 계문하도록 하라. 도성 백성의 기쁨과 슬픔은 더욱 중요한 일에 관계된다. 혹시라도 근심거리나 괴로운 일이 있는데도 내가 듣지 못한다면 이 어찌 훌륭한 임금을 만드는 뜻이겠는가."
하였다.
○ 어정(御定) 《팔자백선(八子百選)》이 완성되었다. 상이 문체(文體)의 수준이 날로 못해지는 것을 염려하
○ 6월. 제주(濟州)의 세 고을에 윤음을 반포하고 민폐에 대해 물었다. 응교 박천형(朴天衡)을 어사로 삼고, 이어 과거를 설행하여 시취(試取)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섯 가지 고역(苦役)의 윤회(輪回)를 혁파한 일, 각 산장(山場)의 횡축(橫築)을 창시한 일, 구점군(驅點軍)에 대한 예전의 규정을 영구히 없앤 일, 우마감(牛馬監)에 대하여 권상(勸賞)을 새로 정한 일도 예전보다 잘 참작해서 처리하고 있는지, 그 밖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 7월. 하직하는 곤수(?帥)와 수령을 불러 보았다. 하교하기를,
"금년 농사가 흉작으로 예상되니, 너희 수령들은 진념하는 내 뜻을 체념(體念)하도록 하라. 환자곡을 받아들이는 때에 분수를 범하지 말고, 형구도 규정을 어기지 말도록 하라. 지금 이 수령들의 성명을 벽에 붙여놓고 치적(治績)과 근만(勤慢)을 살펴볼 것이다."
하였다.
○ 직접 제문을 짓고 승지를 보내어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소현서원(紹賢書院)에 치제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문성공의 학문을 깊이 사모하였으니, 크나큰 감회가 실로 깊다."
하였다.
○ 영남 감사가 가뭄이 염려스럽다는 뜻으로 아뢰었는데, 장계 가운데 '광풍대취(狂風大吹)'라는 말이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과거 선조(先朝) 때는 한 연신(筵臣)이 '악풍(惡風)'이라는 말을 한 것만으로도 견책을 가했었으니, 하늘을 경외하는 성의(聖意)를 헤아릴 수 있다."
하고, 이어 영남 감사를 추고할 것을 명하고, 원 장계를 고치도록 하였다.
○ 8월. 명릉(明陵)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였다. 검암(黔巖) 비각(碑閣)에 머물렀는데, 비문은 상이 직접 지어 공적을 기록한 것이었다. 하교하기를,
"선대왕께서는 백성을 사랑하고 남을 아끼는 덕이 지극하였다. 지금 내가 돌에 새겨서 후세에 고하는 것은 성덕(聖德)을 만분의 일이라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후세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를 거울삼고 법삼게 하고자 함이다."
하였다.
○ 증 대사간 조성복(趙聖復)에게 정경(正卿)을 가증(加贈)하고 시호를 하사하였는데, 영의정 서명선(徐明善)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승지를 보내어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에게 치제하였다. 하교하기를,
"국모(國母)로 임어하신 60년 동안 종묘 사직을 태산 반석처럼 안정되게 한 것은 모두가 성후(聖后)께서 내리신 은덕이었다. 그리고 성후의 사친(私親)으로서 왕실에 마음을 다하고 음공(陰功)을 은밀히 도와 외부 사람들이 그 한계를 엿보지 못하게 하였던 것은 또 전고의 인척들에게서 듣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였다.
○ 9월. 어진(御眞)을 모사(摸寫)하였다. 대신과 각신(閣臣)을 불러 우러러보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는 대개 선조(先朝) 때 10년 간격으로 어진을 모사했던 규례를 따른 것이다."
하고, 규장각의 주합루(宙合樓)에 봉안하도록 명하였다.
○ 영남에 큰물이 졌다. 전 감사 조시준(趙時俊)을 위유사로 삼아 윤음을 가지고 가서 어루만지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빠져 죽은 백성이 400여 명이고 물에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가옥이 만여 채나 된다고 하니, 나는 이 보고를 듣고 그들이 불쌍해서 가슴이 아팠다. 이미 지방관에게 신칙하였다만, 죽은 자에게 휼전을 베풀고 산 자를 어루만져주도록 해야 할 것이며, 국가의 일정한 휼전 이외에도 적절한 조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유랑
하였다.
○ 부사과 서용보(徐龍輔)를 팔강 선유어사(八江宣諭御史)로 삼아서 병폐를 물어 보고하게 하였다.
○ 11월. 하교하기를,
"종신(宗臣) 집안의 혼수(婚需)를 지급하는 것은 본래부터 있었던 법식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호조의 명목뿐인 장부가 되고 말았으니, 유사에게 신칙하여 옛 법칙을 회복하게 하라. 안에서는 호조, 밖에서는 제도(諸道)가 매년 세수(歲首)에 종친의 후예로서 나이가 차도록 혼인하지 못하거나 장례를 제때에 치르지 못한 자를 찾고 물어서 즉시 도와주도록 하고, 매년 세찬 문서(歲饌文書)와 함께 정리해서 올려보내게 하라."
하였다.
○ 내의원이, 강원도에서 진공(進貢)한 삼(蔘)의 품질이 형편없다면서 삼을 퇴각하고 당해 감사를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곧이어 감사를 파직시키지 말고 삼을 퇴각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관동 지방 백성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몸에 고통이 있는 듯하였다. 지금 만약 개색(改色)하여 봉진하게 한다면 형세로 보아 민간에서 재차 징수해야 할 것이니, 이는 실로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하였다.
○ 양서(兩西) 관찰사를 보내어 평양(平壤)의 숭령전(崇靈殿)과 문화(文化)의 삼성사(三聖祠)에 치제하였다. 하교하기를,
"선조(先朝) 때 삼성사의 일로 인하여 감사로 하여금 치제하게 했었으니, 이 또한 추술(追述)하는 한 가지 일이다."
하고, 또 삼성사의 제품(祭品)과 제식(祭式)을 바로잡아 일체 옛 제도를 회복하게 하였다.
○ 12월.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납향(臘享)을 행하였다. 영묘의 어제시(御製詩)를 써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는 무진년에 선대왕께서 이 전(殿)에 행행하셨을 때 지으신 것이다."
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성대한 예 이루어져 나라 경사 새로운데/重禮順成邦慶新
날이 좋고 시각 좋아 더없이 다행이네/辛深日吉又良辰
이때에 소자 마음 기쁨이 충만하니/此時小子中心喜
훗날에 면복 입고 탑전에서 뫼시리라/他歲冕衣侍榻親
하였다. 상이 공경히 차운(次韻)하고 아울러 소서(小序)를 썼다. 이르기를,
"옛날 우리 영고(寧考)께서 을유년 한식일에 남전(南殿)에서 제향을 올리던 때에 소자가 배제(陪祭)하여 아헌(亞獻)을 행하였다. 17년이 지난 지금 몸소 납향을 올리기 위해 전날 밤에 재계하노라니 감회와 추모(追慕)의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공손히 벽 위의 어제시 운에 화운(和韻)하니, 이때는 소자가 왕위에 오른 지 5년째 되는 신축년이다."
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십 년 전에 있었던 일 기억이 새로운데/十年前事?如新
남전에서 정성 펴니 날이 또 이 날일세/南殿伸誠又此辰
소자가 어찌 감히 계술한다 말하리오/小子敢言能繼述
선왕께선 팔순에도 손수 제향 올리셨네/先王八?享猶親
하였다. 이어 대가를 수행한 신하들로 하여금 화운하게 하였다.
○ 각신(閣臣)에게 명하여 《일성록(日省錄)》을 정리하게 하였다. 상이 춘저(春邸)에 있던 때부터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기록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기거주(起居注)에 잘못되거나 빠진 부분이 많다고 하여 별도로 엮어 기록할 것을 명하였다. 이것은 증자(曾子)가 날마다 세 가지 일로 자신을 반성하였던 뜻을 취한 것이었다. 춘저 일기(春邸日記) 중에는 매일 한 과독(課讀)과 겸독(兼讀)의 번수(番數)를 써 놓았는데, 상이 각신에게 가리켜 보이면서 이르기를,
하였다.
6년(임인, 1782)
○ 3월.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하루 전에 명륜당(明倫堂)에서 재숙(齋宿)하고 뜰 앞에 식당(食堂)을 설행하였는데, 국조(國朝)에서 처음 있는 성대한 의식이었다.
○ 5월. 몸소 우사단(雩祀壇)에서 비를 빌었는데, 상이 대차(大次)에 있을 때 유막(油幕), 병풍, 산선(傘扇), 산개(傘蓋)를 설치하지 않았다. 반열에 참여한 대신 이하 백관을 불러 바른말을 구하였다. 하교하기를,
"여러 도의 가뭄 중에서도 경기가 가장 심하고, 경기 중에서도 도성 안이 더욱 혹심하니, 거리의 원근(遠近)에 따라 재앙의 천심(淺深)이 있는 것에서 나의 부덕함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과인의 궁실(宮室)이 사치스러워서 그런 것인가? 복용(服用)이 화려해서 그런 것인가? 화리(貨利)를 증식시키지 않는 일을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아름다운 비단이나 애완하는 물건이 뜻을 상하지 않게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이런 점들을 내가 항상 경계하고는 있지만, 그렇더라도 어찌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묘당의 위에서 훌륭한 정책을 듣지 못하니, 내가 믿어서 팔다리로 여기는 자들이 이와 같고, 대각의 신하가 임금의 잘못에 관계되는 일은 숨겨도 될 듯이 여기고 말이 혹 관사(官師)에 관계되면 두려워하거나 언짢아하니, 내가 믿어서 귀와 눈으로 여기는 자들이 또 이와 같다.
내가 바야흐로 두려움에 마음이 편치 않아 상선(常膳)을 줄이고 법악(法樂)을 철거하였으며, 교외에서 재숙하고 몸소 희생(犧牲)을 대신함으로써 신령의 은혜를 맞아들이고자 한다. 그래서 이렇게 열 줄의 교지를 내려 한마디 도움의 말을 구하는 것이다."
하였다. 환궁하는 길에 혜정교(惠政橋)에 나아가 대신, 의금부와 형조의 당상을 불러 보고 갇혀 있는 죄수를 소결(疏決)하였다. 환궁한 후에도 난간에 임하여 곤룡포를 벗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얼마 있다가 과연 비가 내렸다.
○ 6월. 가뭄으로 인하여, 경기촹해서(海西)촹삼남(三南) 및 여러 도의 피해를 본 고을에 대해서 정해진 조세를 감면해주도록 명하였다.
○ 처음에는 각도에서 불에 타 죽은 자, 물에 빠져 죽은 자,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자가 100명이 넘더라도 한 고을에서 3명이 되지 않으면 휼전(恤典)을 시행하지 않았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백성들을 구휼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고, 한 고을에서 3명이 되어야만 휼전을 시행하는 규례에 구애되지 말 것을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가옥이 10채 이상 불탄 경우와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거나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자가 5, 6명 이상인 경우에는 정원에서 찌를 붙여 들여서 원 휼전 이외에 더 시행하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 양전(兩銓)에 신칙하여 서북인(西北人)을 수용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왕자(王者)는 삼무사(三無私)를 받들어 정치를 하는 법이다. 우리 나라 국토 수천여 리 안은 멀건 가깝건 모두가 나의 신하이다. 서쪽 지방은 기성(箕聖)의 옛 도읍이고 북쪽 지방은 왕업을 일으킨 옛 터인데, 풍속이나 인물이 어찌 갑자기 다른 도보다 뒤떨어지게 되었겠는가. 그런데 근세에 와서 점차적으로 배척하고 쓰지 않아서 마침내는 대부분 스스로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이는 실로 조정의 잘못이다."
하였다.
○ 11월. 《국조보감》이 완성되었다. 처음에 세조(世祖)가 대제학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태조조, 태종조, 세종조, 문종조의 《보감》을 편찬하게 했었는데, 그 후로는 숙묘조(肅廟朝)에` 이단하(李端夏)가 편찬한 《선묘보감(宣廟寶鑑)》과 영묘조에 이덕수(李德壽)가 편찬한 《숙묘보감(肅廟寶鑑)》이 있을 뿐이었다. 신축
"선대왕께서 50년 동안 이루신 성대한 덕망과 업적은 사관이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방대한 것이었다. 실록은 석실(石室)과 금궤(金櫃)에 넣어 그 보관을 반드시 비밀히 하는데, 《보감》은 비사(秘史)와 조금 달라서 오로지 덕과 아름다움을 기술하는 데 주안점을 두니, 나는 지금 《보감》을 편성했으면 한다."
하니, 신하들이 한목소리로 찬성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열두 조정의 《보감》이 아직까지 없으니 아울러 편찬해야 하겠다."
하고,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분담하여 편집하게 하였는데, 원임 문형(文衡) 이복원(李福源)과 서명응(徐命膺) 교정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책이 완성되니, 모두 68권이었다. 신하들이 전문(箋文)을 갖추어 올리자 상이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직접 받았다. 하교하기를,
"열성조에는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주(周) 나라가 사당에 보기(寶器)를 진열하고 송(宋) 나라가 전(殿)에 옥첩(玉牒)을 보관한 고사를 모방하여 반드시 모두 종묘에 모시는 때에 봉안했었다. 《보감》은 공덕을 드러내고 후손에게 가르침을 남기는 측면에서 실로 서서 대훈(西序大訓)과 마찬가지이다. 비록 완염(琬琰)의 뛰어난 아름다움과 옥새(玉璽)의 밝은 법도라 할지라도 그 중대함을 비유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하고, 옥책과 금보를 올리는 의절을 모방하여 종묘와 영녕전에 직접 올리고, 각실(各室)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 영종대왕을 높여 세실(世室)로 삼앝다. 종친촹문무 백관에게 하유하기를,
"우리 영고(寧考)이신 영종대왕께서는, 자품은 하늘로부터 타고났고 학문은 날로 새로워졌으며 행실은 신명(神明)을 꿰뚫었고 마음은 정일(精一)을 전수받으셨다. 험란하고 어려운 과정을 모두 겪으셨으나 구가(謳歌)와 송옥(訟獄)이 귀결되었고, 조심하고 공순하고 삼가고 두려워하시느라 한가히 지낼 겨를이 없으셨다. 나라를 향유하신 52년 동안 이룩하신 성대한 덕업은 다 기술(紀述)할 수가 없지만, 그 중 한두 가지 큰 것을 들어 말하자면, 독실히 행하신 것, 학문에 힘쓰신 것, 하늘을 경외한 것, 민사(民事)에 부지런하신 것, 의리를 밝히신 것, 예를 돈독히 하신 것, 형벌을 신중히 하신 것, 검소한 덕을 밝히신 것, 무예를 강구하신 것, 풍속을 인도하신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리하여 큰 경사를 수각(壽閣)에서 계승하고 백성들을 춘대(春臺)로 이끌어 올리니, 예악(禮樂)이 밝게 빛나고 백성들이 즐겁게 생활을 영위하였다. 크나큰 정책을 홀로 운영하고 후손에게 남겨줄 계책을 크게 빛내어 태산 반석과 같은 공고함을 더하고 영원히 국가의 명을 의탁하도록 한 것으로 말하자면, 종묘 사직의 장구함이 끝내 여기에 힘입게 될 것이다. 이는 나 소자의 지나친 찬미가 아니라 실로 나라 안 사람들의 공통된 칭송인 것이다. 천묘(遷墓)하지 않는 예는 역대를 고찰해 보더라도 대부분 미리 정하였으니, 모름지기 제각기 헌의하여 중대한 의식에 부족함이 없게 하라."
하였다.
○ 12월. 임인년에 억울하게 죽은 심진(沈?)촹유취장(柳就章)을 증직하고, 이상집(李尙●)촹백시고(白時考)촹김시태(金時泰)에게 시호를 내리고, 선비로서 화를 당한 홍철인(洪哲人)촹홍의인(洪義人) 형제도 일체 증직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는 우의정 김익(金?)이 아뢴 것을 따른 것이었다.
○ 직접 제문(祭文)을 짓고 각신을 보내어 서원(西原)의 화양서원(華陽書院)과 해주(海州)의 석담서원(石潭書院)에 치제하였다. 하교하기를,
"호서(湖西)와 해서(海西)는 모두 선정(先正)을 제사지내는 고장이며 선정이 생활하였던 곳이다. 불행하게도 근래에 잘못된 것을 잘못된 채로 답습하고 의심스러운 사실을 의심스러운 채로 전하여서 정도(正道)를 보호하고 사도(邪道)를 물리치는 효과를 보지 못했으니, 이는 오직 내가 군사(君師)의 자리에 있으면서 아랫사람에게 가르침을 미덥게 하지 못한 소치이다. 이 어찌 도내 한두 명 인사의 죄이겠는가. 내가 바야흐로 반성하고 탄식하고 있는 중이지만, 만약 선정이 세상에 살아있었다면 도가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이때에 크나큰 감회를 더욱 금하지 못하겠다."
71권 정조조 3
7년(계묘, 1783)
○ 1월. 기로 대신(耆老大臣)과 각신(閣臣) 및 종신(宗臣)의 집에 세찬(歲饌)을 더 보내도록 명하였다.
○ 전조(銓曹)에서 학문을 갖춘 선비를 발탁하고 각도의 감사가 경서에 밝고 행실이 닦인 사람을 천거하도록 신칙하였다. 하교하기를,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는 것은 바로 우리 조가(朝家)의 법이다. 열성(列聖)께서 계승해 오는 동안 이것을 우선적인 일로 여기지 않은 분이 없었다. 내 비록 부덕하지만 또한 유학의 쇠퇴와 융성이 실로 국가의 흥망 성쇠에 관계된다는 것을 알기에 현자(賢者)를 얻어서 함께 다스릴 것을 생각하였다. 근래에 정초(旌招)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이 어찌 적임자가 없어서 그런 것이겠는가. 열 가구밖에 되지 않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는 법이다. 선비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인재를 배양할 방도를 묘당과 삼사가 강구하여 보고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근래에는 공경(公卿)과 모든 집사가 침묵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지금 《보감(寶鑑)》을 직접 올렸는데, 계술하는 도리로 보면 자문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을 것이다. 내일 대궐문에 임할 것이니 대신과 삼사로부터 모든 관료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훌륭한 계책을 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 사직서 영 윤광유(尹光裕)를 불러 보고, 본 사직서의 의궤(儀軌)를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이 아뢰기를,
"선정(先正) 조헌(趙憲)의 사판(祀版)을 부조(不?)하였으나 이어갈 자손이 없습니다. 그 후사를 정해 주게 한다면 실로 어진이를 드러내는 정사에 부합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국조보감》을 진강하였다. 검토관 엄사만(嚴思晩)이 아뢰기를,
"세종대왕께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일을 과단성 있게 처리하라.'는 두 가지 가르침을 남기셨으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더욱 힘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智)촹인(仁)촹용(勇) 세 가지는 어느 하나도 폐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와 인은 반드시 용으로부터 해나가야 한다."
하였다.
○ 하교하기를,
"효행과 지조가 있는 자에 대해 정려(旌閭)하고 급복(給復)하는 것이 비록 응당 행할 전례인 듯하기는 해도 분발시키고 권면하는 측면에서는 관계됨이 작지 않다. 다시 더 뽑도록 한 것은 뜻하는 바가 있어서였으니, 지금부터 매 식년(式年) 정월 10일 이전에 초계(抄啓)하도록 하라."
하였다.
○ 직제학 정지검(鄭志儉)이 상차하기를,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각신이 등연(登筵)했을 때 성상의 말씀이 의리(義理)촹경사(經史)촹치법(治法)촹정모(政謨)에 미친 것을 삼가 기억했다가 각자 기재하게 하고, 이것을 《정관정요(貞觀政要)》와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예에 따라 매년 본 규장각에 보관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 해부터 경신년에 이르기까지 모아서 책을 만들어 어제(御製)에다 편입하고 《일득록(日得錄)》이라고 이름붙이니, 곧 송(宋) 나라 효종조(孝宗朝)에 날마다 황제의 말을 기록했던 뜻이었다. 상
"《일득록》은 멀리 송 나라의 고사를 모방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내가 이것으로써 반성하는 계기를 삼고자 한 것이다. 지금 만약 지나치게 찬미하는 쪽만을 따르려 한다면 훗날 이 기록을 보는 자들이 오늘날을 두고 뭐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 2월. 하교하기를,
"월성도위(月城都尉)의 상(喪)을 당하자 화순귀주(和順貴主)가 10여 일 동안 물과 곡기를 입에 대지 않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선대왕께서 직접 집으로 가셔서 위로하고 권하였으나 끝내 억지로 하지 못하셨다. 이는 실로 부모의 명을 따르는 효도보다 지아비를 따라서 죽는 의리가 더 크다고 여긴 때문이었으니, 참으로 굳센 절개라고 하겠다. 옛날 어느 제왕의 집안에서도 없었던 일이 우리 집안에만 있었으니, 어찌 집안의 아름다운 규범을 빛냄이 있지 않겠는가. 유사로 하여금 그 문에 '열녀'라고 정표(旌表)하게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영남은 산천(山川)과 풍기(風氣)가 팔도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 두세 명의 선정(先正)이 도학(道學)을 창도하여 일으키기까지 하였으니, 명현(名賢)의 배출과 풍속의 돈후함은 실로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고 참찬 이상정(李象靖)이 한 도에서 아름다운 명망을 받고 있기에 별도로 시험해보고자 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의 아우 이광정(李光靖)이 곤궁함을 견디면서 독서하여 자못 그 형의 기풍이 있다고 하니, 전조는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서 조용하도록 하라. 또 전 주부(主簿) 최흥원(崔興遠)은 자신의 재물을 덜어 가난한 집을 도왔고,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창고를 두어서 이웃 사람들이 일정한 부세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며, 또 향약(鄕約)으로 권면하고 가르쳤다고 하니, 또한 승직(陞職)시키도록 하라. 이러한 사람들을 반드시 만나보고자 하니 신칙하여 올라오게 하라."
하였다.
○ 약원(藥院)에게 신칙하기를,
"옛날의 의관(醫官)은 본청이건 의약청(醫藥廳)이건 할 것 없이 모두 의술에 정통하고 밝았는데, 근래의 의관은 구이지학(口耳之學)에 목숨을 맡겨 약을 명하는 때에 향방을 알지 못하니, 일이 엉성하기로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이 일은 변통이 없어서는 안 되겠으니, 도제조와 제조가 이를 잘 알아서 전처럼 구차하지 않게 하라."
하였다.
○ 3월. 하교하기를,
"소자가 근심과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온 지 이제 몇 년이 되었다. 근본에 보답하고 선대를 드러내고자 하는 나의 정성을 펼 수 없었던 것은, 실로 전례(典禮)는 지극히 중요하여 나 한 사람이 감히 함부로 변경하거나 억측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보첩(譜牒)을 편찬하는 일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데, 다시 또 정을 억누르고 고통을 감내한다면 눈을 감지 못할 한이 될 것만 같다."
하였다. 이어 대신과 재상들에게 물어, 왕대비에게 '혜휘(惠徽)'라는 존호를 가상(加上)하고, 장헌세자(莊獻世子)에게 '수덕돈경(綏德敦慶)'이라는 존호를 추상(追上)하고, 혜경궁(惠慶宮)에게 '자희(慈禧)'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 4월. 하교하기를,
"중대한 의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여 정리와 예절을 조금이나마 폈으니, 팔도의 신자(臣子)들도 국가에 경사스러운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에게도 은혜가 미치겠지' 하며 목을 늘여 바라고 있을 것이다. 지금 만약 실질적인 은혜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대로 넘겨버린다면 과연 실망함이 없겠는가."
하였다. 이어 공인(貢人)의 묵은 유재(遺在) 3000곡(斛), 영남촹호남촹호서촹경기 통영(統營)의 묵은 환자곡 6만 2000여 곡, 양서(兩西)와 동북(東北) 네 도의 묵은 환자곡 2만 곡을 탕감하게 하고, 경사(京師)의 발매(發
○ 영중추부사 김상철(金尙喆) 등이 예조 당상을 데리고 입시하였다. 존호를 올릴 것을 청하기를,
"전하께서 어려움을 갖추 겪으시면서 재차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셨으니, 신령스러운 공과 성스러운 덕은 천고에 드문 것입니다. 그러니 신하된 자가 어찌 공덕을 선양(宣揚)하여 후세에 남기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말을 들으면 내 마음이 더욱 비통해진다. 더구나 내가 근래에 존호를 올린 일로 인하여 한층 더 비애를 느끼고 있는데, 경들은 어찌 내 마음을 더욱 슬프게 하는가."
하였다.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이 아뢰기를,
"이는 오늘날 처음 행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열성조에 이미 행하였던 규례입니다. 그런데 완강히 거부하기만 하면서 아랫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으시면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열성조의 성대한 때와는 시대가 다르다. 지금 나의 정사(情事)로는 절대로 이를 할 수 없다."
하였다. 좌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아뢰기를,
"전하의 공덕이 저와 같고 군정(群情)을 막을 수 없음이 이와 같은데 어찌 선양하는 거조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정(人情)과 천리(天理) 밖에 어찌 이른바 군정이 있겠는가."
하였다. 신하들이 또 누누이 우러러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이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된다 하더라도 절대로 할 수 없다. 또 오늘뿐만 아니라 나의 일생 동안은 절대로 할 수 없다. 경들이 이렇게까지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할 줄은 몰랐다. 내가 대리로 청정하고 왕위에 오른 것은 실로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 일은 처지가 너무나 다르다. 지금 이 말을 듣는 것은 단지 사람의 마음만 어지럽게 하는 것이다. 내가 국가와 한몸이 된 신하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것이 매우 부끄럽다."
하였다.
○ 영남 유생의 상소와 관련하여 하교하기를,
"주재성(周宰成)의 충의(忠義)와 그 아들 도복(道復)의 효행(孝行)은 뛰어나다고 할 만하다. 녹용(錄用)하라는 명을 행여라도 지체하지 말도록 하고, 정표(旌表)를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효자와 열녀인데도 증직되지 않고 급복(給復)되지 않아 상을 시행할 수 없는 사람에게 특별히 음식물을 제급하도록 명한 것은, 대개 당사자가 이미 죽었다 하더라도 그 집에 처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 5월. 하교하기를,
"진휼을 시행한 고을 수령을 논상하는 방법에는 가자(加資)하는 것, 새서표리(璽書表裏)를 내리는 것, 표리(表裏)를 내리는 것, 준직(準職)을 주는 것, 숙마(熟馬)를 체급(帖給)하는 것, 승서(陞敍)하여 조용(調用)하는 것, 아마(兒馬)를 체급하는 것 등 모두 일곱 등급이 있다. 그런데 새서 표리의 은전은 이름만 있고 실질이 없으니, 지금부터 새서 표리의 경우에는 그의 실적을 넣어서 유서(諭書)를 지어 옥새를 찍은 다음 가지고 가서 전하도록 하고, 새서가 없는 표리의 경우에는 유지(有旨)로써 마첩(馬帖)을 만들어 보내라."
하였다.
○ 6월.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도목정사(都目政事)를 하였다. 하교하기를,
"일 년 중에서 도목을 일컬어 대정(大政)이라고 하는 것은 온갖 부류가 다 모여들고 나라 안이 모두 바라보기 때문이다. 어진이를 등용하고 인재를 뽑는 일, 선을 장려하고 공에 보답하는 일, 적체를 해소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드러내는 일이 모두 여기에 달려 있다. 이 몇 가지 일 중에서 하나라도 놓쳐버리는 것이 있
하였다.
○ 7월. 겸춘추 김건수(金健修)를 보내어 경기 고을의 농사 형편을 두루 살펴보게 하였다. 가뭄이 심한 곳에는 다른 곡식을 대신 파종하도록 해서 행여 때를 놓치는 일이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 가뭄으로 인해 반찬수를 줄이고 바른말을 구하였다. 이튿날 비가 내리자 예조가 반찬수를 평소대로 회복하기를 청하였는데, 하교하기를,
"비가 내렸다고 해서 수성(修省)하는 마음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는가. 도움을 구하던 끝에 훌륭한 말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니, 여러 신하는 즉시 뜻에 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재(卿宰) 이하로서 소를 올린 자가 모두 40여 명이었다.
○ 수어영과 총융청의 군사 훈련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큰 흉년을 막 겪어 피해 입은 백성들이 미처 소생되지도 못한 마당에 지금 또 가뭄이 들었으니, 지금의 급선무는 백성을 동요시키지 않는 데 있다 하겠다. 오랫동안 정지했다 해서 곤란해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니,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 의금부와 형조에서 심리한 옥안(獄案)을 주요한 것만 추려서 월말에 녹계(錄啓)하였다가 매년 12월에 성책하여 보고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상이 일찍이 내원(內苑)의 와린평(臥麟坪)을 지나다가 토실(土室) 하나를 가리키면서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이곳은 옛날에 북사옥(北寺獄)이라고 불렸던 곳으로, 궁중에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가두어 두었었다. 내가 궁중과 부중(府中)이 일체임을 생각해서 모든 죄인을 유사에게 회부하여 처벌하게 하고, 토실을 폐지한 채 쓰지 않고 옛터만 남겨둔 것이다."
하였다.
○ 삼남(三南) 지방의 가뭄을 근심하여 대궐 안의 수리 역사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삼남 지방의 민사(民事)가 밤낮으로 마음에 걸려 대궐이 무너지는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다."
하였다.
○ 영희전(永禧殿)을 수리하는 역사가 있었는데 상이 친림하여 감독하였다. 하교하기를,
"과거 선조(先朝)에는 묘전(廟殿)을 개수하는 역사가 있을 때마다 의복을 정제(整齊)하고 이안청(移安廳) 앞에 임어하셨다가 도로 봉안하고 나서야 소차(小次)로 들어가셨다. 이는 소자가 일찍이 흠앙해오던 일이니, 지금 어찌 감히 한가하고 편안히 지내면서 계승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사가 끝나 영정을 도로 봉안한 후에 그대로 작헌례를 행하였다.
○ 상이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갔다. 환궁하기에 앞서 작은 언덕에다 어좌(御座)를 설치하였다. 시신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언덕에 앉아서 멀리 바라보니 시야가 툭 트였다. '태산(泰山)에 올라서 천하를 작게 여기고 동산(東山)에 올라서 노(魯) 나라를 작게 여겼다.'고 한 성인(聖人)의 말씀은 참으로 깊은 맛이 있다. 또 왕도(王都)가 팔도의 중앙에 자리잡아 산천(山川)의 기세가 충만하여 꿈틀거리는데, 길이 아홉 갈래로 뻗은 가운데 종묘가 왼쪽에 있고 사직이 오른쪽에 있는 것은 우리 태조께서 창업하신 크나큰 규모이고, 100년을 휴양(休養)하여 조정이 앞에 있고 저자가 뒤에 있는 것은 우리 열성조께서 수성(守成)하신 큰 계책이다. 교목(喬木)의 그늘이 교차하고 인가(人家)가 매우 분잡하니, 천만 대(代)를 점친 것은 주가(周家)에서 겹욕(??)에 도읍을 정했던 것과 같고, 기름진 땅을 택한 것은 한실(漢室)에서 관중(關中)에 자리잡은 것과 같다. 나와 뭇 신하들은 우리 조종께서 부탁하신 무거운 책임을 생각하여 그 뜻과 사업을 계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신하들이 모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 8월. 상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갔다. 태학(太學) 유생을 불러 강을 하고 나서 식당(食堂)을 베풀었다. 신
"정자(程子)는 승사(僧舍)에 모여 앉아 먹는 것을 보고도 삼대(三代)의 위의가 있다고 감탄했으니, 대학의 식당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북을 쳐서 나아가고 나이 순서로 앉은 것이 질서 정연하여 볼 만하기에 내 기꺼이 유생들과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다. 나물 반찬이 비록 초라하나 내주(內廚)의 진수성찬보다 나으니, 경들은 각각 배불리 먹도록 하라."
하고, 이어 원점(圓點)의 법을 신칙하였다.
○ 9월. 홍충도 병마절도사가 곰이 사람을 잡아먹었다고 아뢰었는데, 하교하기를,
"사냥해서 붙잡아 백성의 해를 제거하라. 그러나 사냥하는 군사가 민간에 끼치는 폐는 도리어 곰보다 심함이 있으니, 이런 뜻으로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 이해에 여러 지방에 기근이 들었다. 상이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날마다 유사(有司)의 신하를 불러 황정(荒政)을 강구하였다. 이때 탄신(誕辰)이 다가왔는데, 상이 이르기를,
"변방의 장수와 지방관들이 전문(箋文)을 올려 경하하였지만, 내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근심하는 것은 우리 백성일 뿐이다. 백성이 현재 신음하는데 무슨 축하를 한단 말인가."
하였다.
○ 10월. 경기촹삼남촹관동 지방에 흉년이 들고 북관(北關)에 큰 기근이 들었다. 상이 진휼 곡식을 조처하여 지급하도록 명하고, 또 내탕고의 은 1천 냥, 돈 2만 민(緡), 호초(胡椒) 500두(斗), 단목(丹木) 1000근을 내려서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진휼에 보태게 하였으며, 상방(尙方)에 비축된 어의(御衣)와 초피(貂皮)를 일체 나누어주게 하였다. 여러 도의 감사에게 하유하기를,
"소민(小民)은 스스로 진휼에 의뢰할 수나 있다지만, 전함(前啣) 조관(朝官)과 사대부 및 빈궁한 양반 가문 부녀자의 경우는 드러내 놓고 나와 앉지 못하기 때문에 누락되곤 한다. 수령이 몸소 나누어주어 한 사람이라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또 하유하기를,
"흉년이 들어 진휼한 사례가 예로부터 어찌 한정이 있었겠는가마는, 반드시 익주(益州)의 기근을 다스린 한기(韓琦)와 청주(靑州)의 수재를 구제한 부필(富弼)을 일컫는 것은 그들이 성심(誠心) 하나로 백성들의 실정을 철저하게 살폈기 때문이다."
하였다.
○ 호남에 하유하기를,
"호남은 바로 국가의 근본이 되는 지역이다. 군국(軍國)의 수요와 공사(公私)의 비용을 전적으로 이곳에 의지하고 있는데, 크게 흉년이 든 해를 당하여 견감하지도 정퇴하지도 않고서 잔혹하게 거두어들인다면 이것이 심육(心肉)을 베어내고 동고(童?)를 내놓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감사가 장계로 청한 9개 조항이 절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는 실로 미진한 점이 있다. 백성이 있은 후에 나라가 있는 법인데 어찌 경상비를 걱정하겠으며, 백성이 있은 후에 병력이 있는 법인데 어찌 군자(軍資)를 걱정하겠는가. 경상비나 군자(軍資)조차도 그러한데 더구나 내수(內需)이며 궁장(宮庄)이겠는가. 이 밖에도 백성들을 품어주고 보호해주는 방도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이 있다. 내구(內廐)의 좋은 말도 덜어낼 수 있는데 공상하는 말과 기르는 말을 덜지 못하겠으며, 어주(御廚)에서 늘 올리던 음식을 견감하는 일도 어려울 것이 없는데 삭선(朔膳)과 방물(方物)을 견감하지 못하겠는가. 백성의 형세가 간두(竿頭)처럼 위태로운 마당에 죽력(竹瀝)과 같은 약료(藥料)를 어찌 논하겠는가. 이것은 내가 거듭 청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별도로 미진한 부분을 시행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어 탐라(耽羅)의 공마(貢馬)를 전부 면제하라고 명하였다.
○ 관동에 하유하기를,
"옛사람이 채소(菜蔬) 그림에다 쓰기를, '백성들이 이런 얼굴색을 띠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백성들이 굶주려 채소빛을 띠게 되는 것은 임금의 수치이다. 지금 너희 9개 고을 백성들이 장차 구덩이에 뒹굴게 될 판
하였다.
○ 호서에 하유하기를,
"조정에서 어찌 호서에 대한 생각을 하루라도 잊어버린 적이 있겠는가. 연로의 들판에 거듭 흉년이 들어 공사(公私)의 비축이 모두 동나고 말았으니, 백성들의 황급한 형세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더구나 호서는 사대부의 고을이다. 사대부가 어렵게 생활하는 것은 대장장이나 장사꾼처럼 자기 한 몸을 위해 교묘하게 도모하지 않고 그저 농토에 부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 농토에 흉년이 들었으니, 공곡(公穀)을 내어 적절히 빌려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목숨을 이어가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겠는가.
얼마 전 진대의 밑천으로 획급한 것이 곡물 9만여 포에다 전화(錢貨)도 만 금(金)에 이르렀으나, 이것을 가지고 쓸 곳에 견주어 보면 끝내 당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내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침식도 잊은 채 가슴을 태워 병이 날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경상비를 수습하지 못한다는 것을 내가 모르지 않지만, 이런 흉년에 어떻게 상규(常規)에 구애될 수 있겠는가. 본도의 결작전(結作錢), 어세(漁稅), 염세(鹽稅), 선세(船稅)로 들어올 돈 2만 3000냥 전부를 특별히 더획급해주어 편리한 대로 진휼에 보태게 하라."
하였다.
○ 북관(北關)에 하유하기를,
"북관 한 도는 왕업(王業)의 터전이 된 곳이고 능침(陵寢)을 받들어 모신 곳이니, 바로 우리 조가(朝家)의 풍패(?沛)이다. 우리 열성조로부터 돌보아주고 은택을 베푸는 정사를 항상 이곳에 먼저 하였다. 그리하여 몸에는 부리(夫里)의 포(布)를 견감하고 전지에는 십일(十一)의 조(租)를 감해주었으니, 융숭하고 두터운 은택이 하늘처럼 끝이 없었다.
과덕하고 몽매한 내가 왕위를 계승한 이래로 오직 선대의 뜻을 받들고 계술할 것만을 생각하여 밤이건 낮이건 한결같은 생각으로 북쪽 지방을 돌보는 데 힘을 기울여 왔다. 올해는 비가 지나치게 많이 내려 바닷가의 염분이 많은 땅에는 거의 곡식이 나지 않았으니, 배가 고파 울부짖으며 나뒹구는 형세로 보면 어찌 모두 굶어죽는 데까지 이르고 말지 않겠는가. 너희들이 그대로 살고자 해도 먹을 곡식이 없고 흩어지고자 해도 갈 곳이 없으니, 그 형세가 실로 궁하고 그 실정이 실로 가련하다.
돌아보건대, 지금 관동 지방에 기근이 들고 기전에 기근이 들고 호서와 호남 지방에도 기근이 들었으니, 비록 흩어지고자 한들 어디로 가겠는가. 국가의 비축이 비록 고갈되었지만 나누어 진대할 수도 있고 환자곡을 배봉(排捧)할 수도 있다. 너희들은 이를 믿고서 두려워하지 말고 길이 삶의 터전을 지켜갈 생각을 하라."
하였다. 승지 이재학(李在學)을 감진사(監賑使)로 임명해 보내어 윤음을 선포하고 어루만지고 진휼하게 하였다. 특별히 열읍(列邑)의 신구(新舊) 환자곡을 모두 수를 나누어 정봉(停捧)하도록 명하고, 대동세와 전세 및 각양의 미(米)촹포(布)촹전(錢) 가운데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모두 탕감하도록 하였다. 또 삭선(朔膳), 명일(名日)의 물선(物膳)과 방물(方物) 및 자전(慈殿)과 자궁(慈宮)의 진헌을 정지하여 진휼 밑천에 보태게 하였고, 또 돈 3000민(緡)과 포 300필을 내탕고에서 내주어 진대 이외의 별순(別巡)에 대비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실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살갗인들 어찌 아끼겠냐고 하신 말씀을 얼마 전 남쪽 지방 백성을 위해서 외었었다. 그런데 북쪽 지방 백성들에게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듬해 진휼 정사가 끝났음을 보고하자, 하교하기를,
"수고가 실로 기록할 만하니, 이재학을 발탁하여 가선의 품계에 제수하라."
하였다.
○ 이때 삼도(三道)에 곡식을 옮기는 정사가 있었는데, 영묘 임술년(1742)의 성교(聖敎)를 우러러 따라 각각 도내의 해독신(海瀆神)에게 제사지내어 순조롭게 건너게 해달라고 빌도록 명하였다.
○ 전주(全州)에 내수사의 전지 160여 결이 있었는데, 감사가 아뢰기를,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문권이 있고 없고를 논하겠는가. 우리 백성에게 관련된 일이면 정세(正稅) 조차도 감면할 수 있는데, 내수사에 쓰여지는 것이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백성에게 전부 주도록 하라."
하였다.
○ 11월. <자휼전칙(字恤典則)>을 인쇄하여 경외에 나누어 주었다. 윤음을 내리기를,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해에 누렇게 떠서 나뒹구는 우리 백성 치고 어느 누가 왕정(王政)의 측면에서 구제해야 할 사람이 아니겠는가마는, 그 중에서도 가장 가련한 것이 어린아이들이다. 길가에 내다 버려 죄없이 죽어가기까지 하니, 천지(天地)가 만물을 만든 뜻이 어찌 실로 그러했겠는가. 광제원(廣濟院)과 육영사(育?社)의 좋은 법은 옛날과 지금의 사정이 달라서 하루아침에 두루 시행할 수 없지만, 남아 있는 규정을 대략 모방하여 팔도의 표준이 되는 서울부터 먼저 시작한다면 실로 인정(仁政)의 시작이 될 것이다. 유사로 하여금 절목을 만들게 하여 중외에 반포하라."
하였다.
절목(節目)은 다음과 같다.
○ 구걸하는 아이는 10세까지로 한정하고, 버려진 아이는 3세까지로 한정한다. 오부(五部)에서 듣고 보는 대로 진휼청에 첩보하면 진휼청에서 유양(留養)하되, 구걸하는 아이는 흉년에 한해서만 맥추(麥秋)까지 유양하고, 버려진 아이는 풍년이나 흉년에 구애되지 않는다.
○ 구걸하는 아이는 부모와 친척이 없고 주인이나 의지할 사람이 없는 부류를 기준삼고, 해부(該部)의 이례(吏隷)나 해리(該里)의 임장(任掌)이 거짓으로 고하는 사례가 있으면 엄중히 다스리고 시행하지 않는다. 유양한 후라 하더라도 부모, 친척, 주인집에서 찾으러 온 경우에는 가까운 이웃에게 공초를 받아 내력을 자세히 조사한 후에 해부에서 날짜를 문서에 기록하고 다짐을 받고서 내준다. 만약 그 친척 및 주인집의 형세가 그런대로 접제(接濟)할 만한데도 전혀 돌보지 않고서 일부러 구걸하게 한 때에는 별도로 조사한 후에 엄중히 신칙해서 돌려주어 또다시 떠돌며 구걸하는 폐단이 없게 한다.
○ 구걸하는 아이를 유양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진휼청 밖이나 창고 문 밖의 공한지(空閑地)에 별도로 토우(土宇)를 설치하여 머물러 지내는 장소로 삼는다. 양식의 지급은 진휼청의 규정을 참조하여, 10세에서 7세까지는 하루에 1인당 쌀 7홉과 장 1홉과 미역 2입(立)을, 6세에서 4세까지는 하루에 1인당 쌀 5홉과 장 1홉과 미역 1입을 지급하되, 해청의 고직(庫直)으로 하여금 주관하여 궤향을 마련하게 한다.
○ 버려진 아이는 해부에서 발견하는 대로 보고하게 하였으나, 외떨어진 거리나 깊은 벽지, 교외에서 조금 먼 곳의 경우에는 부의 관원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더라도 듣게되는 것이 있으면 찾아서 주워다가 진휼청으로 보낸다. 대개 강보(襁褓)의 아이를 길가에 버린 것은 특별한 사고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일 것이다. 측은함으로 볼 때 살릴 방도를 급히 마련해야 할 것이니, 부의 관원만 탐문할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눈으로 보았으면 즉시 이임에게 맡겨 진휼청으로 보낸 다음 해부에 통지한다.
○ 버려진 아이를 유양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돌아다니며 구걸하는 여인 중에서 젖이 나오는 자를 택해서 한 사람에게 아이 둘을 나누어 맡기고, 젖먹이는 여자에게 매일 1인당 쌀 1되 4홉, 장 3홉, 미역 3입을 지급한다. 비록 돌아다니며 구걸하는 자가 아니더라도 기르기를 자원하는 사람이 있는데 가난하여 먹지 못하여서 젖을 먹이기 어려울 때에는, 아이 하나만을 맡기고 하루에 쌀 1되, 장 2홉, 미역 2입을 지급한다.
○ 구걸하는 아이나 버려진 아이를 막론하고 거두어 기르기를 자원하는 자가 있으면 《속전(續典)》의 사목(事目)에 따라 진휼청에서 입안(立案)을 만들어주고, 자녀로 삼기를 원하는 자와 노비로 삼기를 원하는 자는 각각 원하는 대로 시행하되, 양인(良人)이나 공사천(公私賤)을 따지지 않고 모두 허락한다. 거두어 기르는 자가 데리고 있은 지 60일이 채 되지 않아 그만두려고 하는 경우에는 시행하지 않는다. 그 부모나 친척이 3개월 전에 추심하는 때에는 거두어 기르는 데 든 곡물을 배상하면 추심해 가도록 허락한다. 구제하여 살려준 후에 싫어하여 기피하는 자는 반주(叛主)로 논죄하고, 위세(威勢)로 도로 빼앗는 자는 왕법(枉法)으로 논죄한다.
○ 구걸하는 아이 및 버려진 아이에게 죽을 먹이고 젖을 먹이는 것에 대해서는, 매달 말에 해청의 낭관이 아이가 살쪘는지 수척한지, 그 사람이 부지런히 하는지 게을리하는지를 살펴서 죽을 잘 먹이지 않은 고직과 젖을 잘 먹이지 않은 여인은 매번 경책한다. 해부의 관원이 보고하지 않거나 해청의 낭관이 유양하는 데 힘쓰지 않다가 현장에서 발각되는 때에는 진휼청에서 논죄한다.
○ 구걸하는 아이 및 버려진 아이 중에 옷이 없는 부류는 진휼청의 규례대로 만들어 지급하고, 젖먹이는 여인이 옷이 없는 때에는 발견되는 대로 일체 만들어 지급한다. 질병이 있는 부류는 해청에서 혜민서에 분부하여 구료하게 한다.
○ 외방의 경우에는 면임(面任)과 이임이 발견되는 대로 본관에 보고하면 본관에서 그 허실(虛實)을 자세히 살핀 후에 구걸하는 아이는 진휼을 설치한 고을에서만 유양하고 버려진 아이는 진휼을 설치했건 하지 않았건 무조건 시행한다. 죽을 먹이고 젖을 먹이는 절차와 머물려 접제하고 거두어 기르는 법은 일체 서울의 절목에 따라 시행한다. 곡물은 상진곡(常賑穀)으로 회감(會減)하고 장과 미역은 본관에서 담당하되, 매달 말에 사람 수와 곡식 수량을 감영에 보고하면 감영에서 고을별로 조목조목 열거하여 장계하고 일체 성책하여 진휼청에 올려보내어 증빙할 수 있게 한다. 각 고을 수령이 만약 사목을 어기거나 잘 거행하지 않으면 경청(京廳)의 예에 따라 감사가 장계로 보고하여 논죄하고, 암행어사가 염탐할 때 일체 적간하여 무거운 쪽으로 처벌한다.
○ 상이 거리에 굶어 죽은 송장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한성부 당상을 불러 보고 문책하기를,
"지척(咫尺)의 성 안에 이렇게 구덩이에 나뒹구는 일이 있는데도 즉시 흙으로 덮어주지 않고 위에 보고하지도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내 탓이 아니고 흉년 탓이다.'는 것과 다르겠는가. 그러나 이 모두 내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문제인데 경들을 탓할 겨를이 있겠는가."
하였다.
○ 12월. 연사례(燕射禮)를 행하기 위해 춘당대(春塘臺)에서 습의(習儀)하였다. 신하들에게 하교하기를,
"주(周) 나라 제도에는 천자와 제후의 활쏘기가 세 가지 있었다. 택궁(澤宮)에서 활쏘는 것을 대사(大射)라 하고, 교외에서 활쏘는 것을 빈사(賓射)라 하고, 연침(燕寢)에서 활쏘는 것을 연사(燕射)라 하였는데, 모두 덕행(德行)을 보고 예양(禮讓)을 익히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나라에는 택궁과 연침의 활쏘기를 통틀어 대사라고 하였고, 그 의문(儀文)도 대부분 인습한 것이어서 주 나라의 제도에 다 맞는다고 할 수 없다. 연전에 각신에게 명하여 《의례(儀禮)》 및 《대례(戴禮)》를 널리 조사하여 참작하고 가감하도록 한 것은 내년 봄에 연사를 다시 설행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므로 특별히 경들을 불러 이 예를 행하는 것이다."
하였다.
8년(갑진, 1784)
○ 1월. 상이, 사직단의 제향 음악이 예스럽고 심오하여 귀에 익지 않기 때문에 익히는 일이 거의 없어서 음률(音律)이 대부분 틀리게 되었다고 하여, 장악원 당상과 낭관을 회경문(會慶門)으로 불러 악생(樂生)과 무공(舞工)을 데리고 뜰에서 음악을 익히게 하고서 직접 임하여 보았다.
○ 유신(儒臣)을 불러 보았다. 하교하기를,
"오늘 소대는 성심을 다하여 인도하게 하려는 것일 뿐만이 아니다. 내일이 조참(朝參)인데, 근래에 말하기를 꺼려 임금의 과실을 지적하고 관원의 잘못을 바로잡는 말이 전혀 들리지 않으니, 이것이 맑은 조정의 큰 수치가 아니겠는가. 《상서(尙書)》에 '신하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면 묵형(墨刑)으로 처벌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대들은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훌륭한 선비가 없다면 나라가 제대로 되겠는가. 선비는 국가의 원기(元氣)이니, 윗사람이 아름다운 나무처럼 배양하고 어린 싹처럼 보호하면 훌륭한 재목으로 자라기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종은 저절로 울리
하였다.
○ 2월. 고려(高麗) 시중(侍中)인 충정공(忠靖公) 우현보(禹玄寶)를 숭양서원(崧陽書院)에 배향하도록 명하고 이어 사제(賜祭)하였는데, 경기와 해서 유생이 상소하여 청한 것을 따른 것이었다. 우현보는 좨주 우탁(禹倬)의 손자이다. 집안의 학통을 이어받았고 또 문경공(文敬公) 안축(安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몽주(鄭夢周)와 마음을 합해 강구하여 상제(喪制)를 복구하고 족혼(族婚)을 금지하고 학교를 일으키고 제도를 만들었으니, 그의 순수한 충성과 도덕은 정몽주와 다름이 없었다.
○ 하교하기를,
"지금 기근이 거듭 들어 내가 바야흐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있는데, 이때 혜성이 출몰하는 변고와 땅이 흔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아, 지금이 어떤 때인가.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분발하여 수성(修省)의 도리를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온갖 병폐의 근본 원인이 모두 언로(言路)가 막힌 것에 연관되어 있다. 내가 듣고자 하는 것은 바로 과인의 허물과 시정(時政)의 잘못된 점이다. 삼사의 신하들은 각각 바로잡고 구제하는 말을 진달하라."
하였다.
○ 영남의 곡식을 운반하는 배가 무사히 도착했다고 하여, 독운어사(督運御史) 김재인(金載人)을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 형조에 명하여 사형 죄수를 심리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옥사(獄事)가 성립된 후 완결되지 않은 부류가 그대로 몇 해를 넘기면서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한 채 질곡(桎梏)에서 뒹구는 것이 어찌 화기(和氣)를 저해하는 한 가지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천서(天序)가 발생(發生)의 절기에 속하니, 때에 맞추어 만물을 기르는 일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된다. 당상들이 본조에 직숙하면서 정신을 가다듬어 상세히 열람하여 풀어줄 만한 자와 그대로 가두어 두어야 할 자들을 구별해서 여쭈어 처리하라."
하고, 이어 여러 도에 신칙해서 비록 이미 완결된 옥사이더라도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재심리하여 아뢰게 하였다.
○ 이때 도성 백성들에게 발매(發賣)를 행하였다. 상이, 얼고 굶주린 백성들이 추위에 떨 것을 염려하여, 당해 당상이 아침 일찍 관청에 나가서 처음 나누어줄 때부터 끝마칠 때까지 잠시도 자리를 뜨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신칙하였다.
○ 3월. 수찬 성종인(成種仁)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의 학문은 보양(保養)이 돈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령(辭令)을 내는 데는 형식에 지나친 폐단이 있고, 사업(事業)을 하는 데는 몸소 행하는 공부가 부족합니다. 전후로 선비들이 올린 상소 가운데 어찌 임금의 잘못이나 정치의 현안에 대해서 두루 논한 것이 없었겠습니까. 전하께서 윤허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윤허하신 효험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거만한 태도를 보여 말을 막는 것보다 더 해로우니, 때문에 곧은 논의를 들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기근이 거듭 들어 백성들의 생업이 극도로 궁색해지자 근심 걱정하며 경영하고 계획하는 데 최선을 다하셨지만, 백성을 구제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오히려 지엽을 따르고 근본을 버리는 폐단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왜이겠습니까. 사치 풍조가 미처 다 개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가장 먼저 말한 학문하는 일에 대해서는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말을 하지 않는 폐단에 대해서는 내가 실로 나의 잘못임을 인정한다."
○ 상이 선정문(宣政門)에 나아가 빈대(賓對)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춘궁기를 당하여 중외의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 천재(天災)의 유행(流行)이 어느 나라인들 없겠는가마는, 품어주고 보호해주는 책임은 오로지 인사(人事)에 달려 있다. 옛날 선조(先朝) 때는 매번 도성 백성이 버려지거나 병드는 것을 진념하여 병폐를 물어 편리한 방도를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돌보아주는 덕이 따뜻한 봄날과도 같았으니, 이는 내가 우러러본 바였다. 발매(發賣)하는 곡식을 한 차례 더 지급하고 대궐문에 나가서 공계(貢契)와 시전(市廛) 백성들에게 하문한 것도 계술(繼述)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진실로 백성에게 보탬이 된다면 어떤 재물인들 아끼겠으며 무슨 일인들 하지 않겠는가. 내가 앉은 채로 아침을 기다리고 밥 먹는 순간조차도 편하게 여기지 못하는 것은 단지 도성 백성들이 차별없는 은혜를 입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빌려주는 정사와 거두고 펴는 방책에 대해 스스로 어려워 말고 숨김없이 다 진달하라."
하고, 이어 각영(各營)과 각사(各司)의 돈 15만 민(緡)을 풀어 공계와 시전 백성에게 빌려주라고 명하였다.
○ 윤3월. 영묘(英廟) 정묘년의 수교(受敎)에 따라 대신과 전조(銓曹) 당상이 빈청에 모여 경연관을 논의해서 천거할 것을 명하였다. 김이안(金履安)촹민이현(閔彛顯)촹김두묵(金斗?)촹조림(曺霖)이 선발되었는데, 상이 하유하여 김이안을 부르기를,
"호명중(胡明仲)은 문정(文定)의 아들이고 사마강(司馬康)은 단명(端明)의 아들이었으니, 이런 아버지가 있고 이런 아들이 있었던 것이 지금까지도 유문(儒門)의 거룩한 일로 전해지고 있다. 그대는 대가(大家)의 후예이니 지행(志行)과 경술(經術)에 대해 듣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고 찬선(贊善)의 아들이며, 더구나 문정(文正)촹문충(文忠)촹충헌(忠獻)촹문간(文簡)이 도덕과 명절(名節)로써 나라와 함께하였으니, 그대가 비록 교목(喬木)의 의리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은거하려는 뜻을 이루고자 한들 되겠는가."
하고, 하유하여 민이현 등을 부르기를,
"모두 명현의 아들이나 손자로서 가장 먼저 선발에 들었으니, 어찌 국가를 위해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6월. 도목정사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국가가 유지되는 것은 충현(忠賢)이 있기 때문이다. 충현의 후예를 돌보아주고 녹용하는 것이 어찌 그 사람만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교화를 수립하고 유학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다."
하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후손을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 8월. 고 봉조하 홍봉한(洪鳳漢)의 시호를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 대사성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본 성균관 비천당(丕闡堂)의 서편에 벽입재(闢入齋)가 있는데 얼마 전 화재를 겪었습니다. 현묘(顯廟) 갑진년(1664)에 두 이원(尼院)을 철거하고 그 재목을 옮겨다가 이 재를 세우고서 이로써 명명(命名)하였으니,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이단을 물리친 성조(聖祖)의 거룩한 뜻을 몸받은 것이었습니다. 마침 갑진년이 다시 돌아왔으니 이때에 맞추어 중건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호조로 하여금 중건하게 하였다.
○ 영릉(永陵)에 전배하였다. 각신을 보내어 파주(坡州) 풍계사(?溪祠)에 치제하였는데, 바로 고 충신 박태보(朴泰輔)촹오두인(吳斗寅)촹이세화(李世華)를 함께 배향한 곳이다.
○ 승지를 보내어 월산군(月山君)의 묘소에 치제하고, 사손(祀孫)을 조용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대군의 집이 언제 전매(轉賣)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풍월정(風月亭)이라는 편액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선릉조(宣陵朝)의 우애롭던 지극한 은총이 지금까지 전송(傳誦)되고 있으니, 대군(大君)의 자손으로 하여금 하사받은 집을 대대로 지키지 못하게 한 것이 어찌 결함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호조로 하여금 사서 돌려주게 하라."
하였다.
○ 대신(大臣) 정존겸(鄭存謙)이 아뢰기를,
"박중림(朴仲林)은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아비로서 박팽년과 같이 순절(殉節)했습니다. 직품이 정경(正卿)이었으니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 행행할 때 결진(結陣)한 곳과 영접(迎接)한 곳, 대가가 주필(駐?)하였을 때 길가의 벼가 손상된 곳을, 지방관이 살펴보고 나서 조세를 견감해 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전배하고, 이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백관의 조참(朝參)을 받았다.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선유(宣諭)하기를,
"금년 오늘은 바로 우리 선대왕께서 등극하신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중원(中元)의 상로(霜露)가 바야흐로 땅을 적시는데 등극하신 그날이 다시 돌아오니, 옛날을 생각하노라니 감회와 그리움이 간절하기만 하다.
아, 신축촹임인년의 일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나라의 형세가 마치 무너지려는 집처럼 위태로웠는데, 두세 명의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들이 목숨을 걸고 맹세하여 우리 종묘 사직을 구해내었다. 천지의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할 바 없는 의리와 무서운 형벌도 태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충성으로 음흉한 자들을 소탕하고 선대왕을 떠받들어 마침내 이 해와 이 날이 있게 된 것이다. 관작의 높고 낮음은 비록 다르지만 나라가 있는 줄만 알고 자신의 몸이 있는 줄은 모른 채 우리 선대왕을 위해 충성을 바치고 용맹을 세운 점에 있어서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 ?命),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 충헌공(忠獻公) 이정숙(李廷?)의 집에 근시(近侍)를 보내어 치제하라.
증 참판 김성행(金省行)은 참혹한 고문을 받고 죽으면서도 굳센 충의(忠義)를 굽히지 않았으니, 더욱 뛰어난 점이 있다. 특별히 정려하라. 충간공(忠簡公) 조성복(趙聖復)은 죽으면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은 것이 김성행과 다를 바 없으니, 일체 정려하라. 충정공(忠定公) 이홍술(李弘述), 경무공(景武公) 이우항(李宇恒), 충민공(忠愍公) 윤각(尹慤), 충목공(忠穆公) 이상집(이상●), 충장공(忠莊公) 백시구(白時?), 충의공(忠毅公) 김시태(金時泰), 고 병마절도사 심진(沈?)의 집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하고, 고 무신 양익표(梁益杓)촹우홍채(禹弘采),고 훈도(訓導) 이봉명(李鳳鳴)은 모두 증직하라. 아, 백발(白髮)의 단심(丹心)을 귀양지에서 일으켜 의리를 밝히고 징토를 엄히 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겼던 사람으로는 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와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을 들 수 있으니, 사손(祀孫)을 녹용하라. 포의(布衣)로서 상소하여 윤리가 추락되지 않게 하고 흉적(凶賊)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을 나는 이의연(李義淵)에게서 보았다. 특별히 가자하고 증직하라.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의 사손(嗣孫)이 독한 칼날에 가장 먼저 해를 입은 것은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었다. 부원군의 집에 근시를 보내어 치제하라. 충숙공(忠肅公) 이만성(李晩成)은 당시 일을 한 번씩 생각할 때마다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한다. 봉사손의 이름을 물어 아뢰도록 하라. 충간공(忠簡公) 홍계적(洪啓迪)은 지금까지 선시(宣諡)하지 않았다 하니, 별도로 전조(銓曹)의 낭관을 보내어 선시하게 하라."
하였다.
○ 9월.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치제한 집안의 자손을 불러 보았다. 이어 춘당대에 나아가 칠언절구를 직접 지어 내리고 화운(和韻)하여 올리게 하였다.
○ 이에 앞서 하교하기를,
"근본에 보답하는 도리에 있어서 선조(先祖)를 선양(宣揚)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다.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은 문왕(文王)촹무왕(武王)의 계책과 공렬을 드러내고 높여서 배천(配天)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군자(君子)가 지나치다고 여기지 않았다.
우리 조정을 살펴보면 이 예를 더욱 중요하게 여겨 숙조(肅祖)께서 태조와 태종의 휘호를 추상(追上)하시고 영고(英考)께서 효종촹현종촹숙종의 휘호를 추상하셨다. 아, 금으로 인장을 만들고 옥에다 송덕문(頌德文)을 아로새기는 것으로 어찌 해와 달과 같은 공덕을 만분의 일이나마 묘사할 수 있겠는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크나큰 덕화(德化)를 드러내어 국가를 안정시킨 계책을 후손에게 남겨줄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돌보아주신 은혜와 가슴에 품은 슬픔이 과인과 같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천승(千乘)의 봉양을 펴려 하여도 천지(天地)에 미칠 수 없고, 단지 하루 세 번 문안드리는 예를 행하기만 할 뿐 자궁(慈宮)의 마음을 위로해드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몸을 어루만지며 남몰래 슬퍼하니, 이 무슨 사람이란 말인가. 간절한 마음은 오로지 현호(顯號)를 추가(追加)하여 크나큰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데 있다. 아,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실로 감히 하지 않겠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또 어찌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일이 더할 수 없이 중대하기에 도리상 두루 물어보아야만 하겠다. 경모궁에 존호를 추상하고 혜경궁에 존호를 가상하는 일을 대신, 경재(卿宰), 관각(館閣),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각각 의견을 갖추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는데, 신하들의 논의가 모두 일치하였다. 영종대왕에게 '배명수통경력홍휴(配命垂統景歷洪休)'라는 존호를, 정성왕후에게 '소헌(昭獻)'이라는 존호를 추상하고, 왕대비전에 '익렬(翼烈)'이라는 존호를 가상하고, 장헌세자(莊獻世子)에게 '홍인경지(弘仁景祉)'라는 존호를 추상하고, 혜경궁에 '정선(貞宣)'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 10월. 상소에 대한 비답이 3일이 지나도록 내려지지 않을 때는 정원이 완곡히 여쭙는 것을 법식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 11월. 예전에 덕원(德源) 등 3개 고을 해창(海倉)에 곡식을 비축하고 이름을 교제창(交濟倉)이라 하였는데, 관동과 영남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었다. 상이 북관(北關)에도 아울러 설치하도록 명하니, 비국이 절목(節目)을 지어 올렸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
○ 길주(吉州)촹명천(明川)촹회령(會寧)촹경흥(慶興)촹부령(富寧) 등 5개 고을에는 모두 3, 4개의 해창이 있어서 쌓아두기에 유리하고, 또 부근에 면리(面里)가 많아서 거두고 풀기에 편리하니, 모두 그 해창에 봉류(捧留)한다. 온성(穩城)촹경원(慶源)촹종성(鍾城)촹경성(鏡城)은 해변에 있기는 하지만 면리의 거리가 먼데다가 민호(民戶)도 적으므로 재를 넘어 운송하려면 일에 장애가 많을 것이니, 4개 고을은 수량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평창(平倉)과 해창에 나누어 둔다. 무산(茂山) 한 고을은 해창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읍에 있으니, 지경을 넘어 드나들며 조적(??)하는 것은 도리어 폐단이 될 것이므로 우선 그냥둔다.
○ 교제곡을 해창에 봉류하는 것은 전적으로 배에 싣기 편리한 곳이기 때문이다. 해창을 전격적으로 둔 고을은 먼저 배를 대기 편리하고 창고가 넓은 곳을 택하여 봉류하는 장소로 정하고, 평창과 해창을 나누어 둔 고을은 거리의 멀고 가까움과 창고의 크고 작음을 헤아려 먼저 해창부터 봉류한 후에 나머지를 평창에다 봉류하되 반드시 바다에서 가까운 곳을 위주로 한다. 평창이나 해창을 막론하고 교제곡을 두는 곳에는 모두 '교제창'이라고 써 걸어서 구별하는 뜻을 보이고, 평창에는 창고 하나를 비워 별도로 비축해서 다른 환자곡과 섞이지 말도록 한다. 그리고 교제곡의 실제 수량 및 행해야 할 절목을 응당 나누어주어야 할 사(社)와 리(里)에 미리 배포하여 백성들이 모두 법의 엄중함을 알게 한다.
○ 오래도록 보관하는 법은 남관(南關)의 예에 따라 시행하되, 각 고을에 회부(會付)한 12만 석 중에서 8만 석은 항상 창고에 두고 4만 석은 민간에게 나누어주어 3년 내에 돌아가며 개색(改色)한다. 불시에 배로 운반해야 할 때가 있으면 명을 들은 즉시 출발하고, 곡(斛) 안에 수량이 축나거나 곡식 빛깔이 거친 등의 폐단이 있으면 당해 수령은 장계로 보고하여 처벌하고 감관(監官)과 색리(色吏)는 본도에서 경중에 따라 엄히 처벌한다.
○ 창고를 열고 창고를 봉하는 것은 모두 영문(營門)에 관유(關由)한다. 창고를 열 때는 먼저 순영에다 '올해는 아무 창고의 아무 해 조를 나누어주었다가 거두어들일 차례인데, 명색은 아무 곡식이다.'라고 상세히 하나
○ 이 곡식은 이미 예기치 못한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어서 체모의 중요함과 사례의 엄중함이 군향(軍餉)과 다를 바 없으니, 비록 흉년을 만났다 하더라도 한 되, 한 홉도 받아들이지 않아서는 안 되며, 혹 정퇴(停退)하는 때를 만났더라도 뒤섞어 거론해서는 안 된다. 순영의 번고(反庫)나 경사의 적간 때에 봉납하지 못한 것과 축낸 것을 막론하고 50석 이상인 수령은 군향의 예대로 논죄하고, 감관과 색리는 붙잡아 감영의 감옥에 가두어 남김없이 받아들인 후에 엄히 형신하여 정배하며, 50석 이하의 감관과 색리는 형신하고 수량대로 받아들여 채워 넣는다.
○ 지금 이 조항들은 대부분 남관의 전례에 따른 것이지만 상략(詳略)의 차이가 없지 않다. 혹 고을의 형세와 백성들의 실정에 애로점이 있어서 온편하지 못한 경우에는, 큰 문제는 장계로 아뢰어 명을 청하고 작은 문제는 비국에 논보(論報)하여 십분 정당하게 해서 길이 폐단이 없게 하되, 앞으로 부득이해서 변통해야 할 경우에만 이대로 시행한다.
○ 탐라(耽羅)에서 고을에 기근이 들었다고 보고하였다. 나리창(羅里倉)의 곡식을 기일에 맞추어 독운(督運)하도록 명하고, 공물로 바치는 물종(物種) 및 백성들이 관에 바치는 모든 것들을 어공(御供)과 어약(御藥)까지 아울러 별도로 감면하였다.
9년(을사, 1785)
○ 1월. 하교하기를,
"근래에 듣건대, 여러 도에서 사직단을 대부분 보수하지 않아 제단을 두른 담장은 떨어져나가고 홍살문은 썩고 기울어져서 제사를 받드는 곳이 궁색하게도 나무하고 소먹이는 장소가 되었다고 하니, 일의 체모가 이보다 더 소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너지고 황폐한 곳은 즉시 수리하고, 수호하는 군사를 두어 수시로 소제할 것이며, 경계 표식을 정하여 경작을 금지하도록 하라. 매달 제사가 있는지 없는지를 순영에 보고하면 순영이 다시 예조에 보고하게 해서 근만(勤慢)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호서와 호남에서 조운(漕運)할 때 시일이 많이 걸리거나 배가 전복되어 민읍(民邑)이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여, 대신과 신하들에게 물어 경강선(京江船)의 작대법(作隊法)을 설치하고 사진 별장(四津別將)으로 하여금 관할하여 단속하게 하였다. 거리를 헤아려서 기한을 정하되 두 차례로 조운을 배정하고 각 창고별로 나누었다. 그리하여 농간을 부려 차지하는 비용을 줄이게 하고, 호송하는 규례에 관해 다시 신칙하였다. 비변사로 하여금 이에 관한 절목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 2월. 제주(濟州)의 삼성묘(三姓廟)에 사액(賜額)하였다.
○ 주강(晝講)하였다. 《맹자(孟子)》를 진강하였다. 시독관 이경일(李敬一)이 아뢰기를,
"안자(顔子)가 3개월 동안 인(仁)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3개월이 넘으면 문득 순전한 천리(天理)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자는 아성(亞聖)이니 대성(大聖)을 가지고 논하겠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내가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고, 30세에 확립하고, 40세에 의혹되지 않고, 50세에 천명을 알고, 60세에 귀로 듣는 것이 마음에 거슬리지 않고, 70세에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하였다. 생지 안행(生知安行)의 성인이면서도 오히려 공부하는 데 이러한 절차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이어 방심(放心)을 구하는 방도를 물으니, 이경일이 아뢰기를,
하였다.
○ 5월. 이에 앞서, 내승(內乘)이 조마(調馬)에 대해 취품할 때와 선전관에게 순번패(巡番牌)를 내주고 받을 때 중관과 대화하지 못하게 하고 사알을 통하여 여쭙게 하는 것으로 규정을 정하라고 신칙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또 무신에게 신칙하여 하유하기를,
"남아(南衙)와 북사(北寺)는 한계가 엄격하니, 한 번이라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국가의 상법(常法)으로 다스리겠다. 환시가 남의 집안과 나라에 화를 끼친 것은 또한 참혹하다고 하겠다. 홍현(弘顯)이 정권을 농락하자 한(漢) 나라 왕실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고, 보국(輔國)이 권력을 독점하자 당(唐) 나라의 국운이 마침내 옮겨졌다. 아, 열조(列朝)께서 이 무리들을 철저히 억제하여 문을 지키고 명을 전하는 이외에는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셨고, 우리 선조(先朝)에 이르러서는 이들에게 더욱 엄격하셨으니, 이는 우리 조정의 가법(家法)인 것이다. 전후의 역모 사건 때마다 너그러운 쪽을 따르려고 생각하면서도 환시에게 관계되는 일은 한 번도 용서해준 적이 없었으니, 이러한 사리를 외정(外廷)에서도 명심해야 하겠으나 무신(武臣)은 특히 더 주의해야 할 것이다. 연전에 환시와 내통한 자를 역률(逆律)로 논죄하였던 것은 제각기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절대로 범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하였다.
○ 6월. 교리 신기(申耆)를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찰어사(安察御史)로 삼아, 군기(軍器)와 향곡(餉穀)을 점검하고 백성들의 고충과 승려의 폐단을 알아내어 보고하게 하였다.
○ 7월. 하교하기를,
"일식과 월식의 구식(救蝕)에 관한 법의 뜻은 지극히 엄중하다. 《오례의(五禮儀)》에, '백관이 각각 본사(本司)에서 청사(廳事) 앞에 북을 설치하고 해를 향하여 두 줄로 선다.' 하였으니, '두 줄'이라는 두 글자는 분명히 각사의 관원들이 모두 참석한다는 증거이다. 근래에 듣건대, 친림하지 않을 경우에는 단지 입직한 낭관만이 구식한다고 하니, 일의 체모가 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는 참석해야 할 관원에 대해서 일정한 규정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 이 밖에 기계(器械)도 재량하여 정함으로써 전처럼 설만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 8월. 《궁원의(宮園儀)》가 완성되었으므로 상이 경모궁에 나아가 직접 올렸다.
○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예기(禮記)》에 '녹봉이 농사짓는 것을 대신할 만하다.'는 말이 있으니, 우리나라의 직전(職田)과 늠전(?田)이 이것이다. 직전은 종친과 문무 관원이 차등 있게 항상 받는 것이고, 늠전은 목(牧)촹부(府)촹군(郡)촹현(縣)이 차등 있게 받는 것이다. 임진년 이후로 경계가 문란해져서 직전이 폐지되었으며, 늠전은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한 이후로 영관(營官)의 수요가 되었는데, 고 상신 김수항(金壽恒)이 직전에 대해서 건의하였으나 조정의 논의가 일치되지 않아서 시행하지 못하였다. 충신(忠信)으로 대해 주고 녹을 후하게 주는 것은 어진이를 권면하기 위한 것이건만, 경직(京職)에 있는 관원들은 직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늠록(?祿)마저 변하여 산료(散料)가 되고 말았다. 지금과 같은 경비를 가지고 옛 제도를 회복시킬 수는 없겠지만, 궁방(宮房)의 절수(折受)와 긴요하지 않은 아문의 둔전(屯田)은 의당 금지시켜야 하겠다."
하였다.
○ 관학 유생(館學儒生) 민치겸(閔致謙) 등이 상소하여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를 고암서원(考巖書院)에 배향하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려 허락하였다. 이르기를,
"서원에 배향하는 규례가 없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문순공을 문정공(文正公)의 서원에 배향하는 것을 누가 안 된다고 하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정학(正學)이 황폐해져서 강구해 밝히려는 선비들의 노력이 부족한 형편이 아닌가."
○ 9월. 관원을 보내어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의 서원에 치제하고 사액(賜額)하였는데, 이조가 호남 유생의 말로 인하여 청한 때문이었다. 문익점은 고려말 사람이다. 사명을 받들고 원(元) 나라에 들어가서 공민왕(恭愍王)을 위하여 충절(忠節)을 다하다가 검남(劍南)으로 유배되었다. 돌아올 때에 목면(木綿)을 몰래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직조(織組)를 가르쳤으니, 그가 백성을 이롭게 한 것이 이와 같았다. 세상을 떠난 후에 백성들의 의생활(衣生活)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하여 강성군(江城君)에 봉하여졌다.
○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완성되었다. 상이,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속대전(續大典)》이 따로 되어 있어서 참고하여 증거로 삼기가 어렵다 하여 이전(二典) 및 고금의 수교(受敎)를 합쳐서 한 책으로 만들게 하였다. 중신(重臣) 김노진(金魯鎭) 등이 찬집(纂輯)하고 대신(大臣) 김치인(金致仁) 등이 일을 총괄하였는데, 책이 완성되자 중외에 나누어주었다. 연신에게 이르기를,
"《통편》에 새로 첨가한 조항은 내가 어렵게 여기고 신중을 기한 것이다. 일이 사율(死律)에 관계된 것은 감히 한 조항도 첨가하지 않았다."
하였다.
○ 《병학통(兵學通)》을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서울의 각 군영(軍營)의 습진(習陣), 남한산성의 성조(城操), 통어영의 수조(水操)를 모두 이에 따라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 12월. 사조어제어필비(四朝御製御筆碑)를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