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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라대왕과의 십팔번(애창곡) 논쟁
이원우
가방끈이 짧은 게 한(恨)이어서 그랬을까? 대신 K는 이런저런 온갖 일에 손을 대면서 평생을 살아왔다. ‘학력(學歷)’은 발을 달았는지, 긴 그의 삶의 역정(歷程) 중 결정적인 순간에까지 그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
언젠가는 『인명사전(人名事典)』에 프로필을 등재해야 할 참인데, 편집자 측의 강요 하나가 그거(학력 기록)이어서 ‘방송통신대 2년 졸업’이라 쓰려다가 ‘교육대학교 3학년 중퇴’로 대체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어느 소설가를 흉내 내 본 거다. 그 소설가 말이다. 실제는 고졸(高卒)이 최종 학력이고, 어느 대학교 1학년에 잠시 적을 두었을 뿐인데, 책날개엔 ‘대학교 중퇴(中退)’더라.
정말 그럴싸한 발상이다 싶어, 그는 쾌재를 불렀고말고! ‘졸업<중퇴’의 묘한 부등식 탄생의 순간이다. 그도 근간(近刊 한 권 약력에다 ‘교육대학교’ 3학년 중퇴라고 적었겠다? 계절제라는 과정이 있었는데, 거기 잠시 적을 두었다가 그만둔 사건! 그걸 절묘하게 활용한 거다. 감쪽같이 남을 속인 거나 진배없다. 반응이야 각자 다르기 마련이지만 그는 상상했다, 상당수는 고개를 끄덕일 거야. 나더러 4년제 대학교는 문턱에도 못 가봤다고 빈정거리지는 않겠지.
이어지는 그의 혼잣말에 묘한 뉘앙스가 실렸다.
“참, 힘들었어, 지난 말이 말이야. 교사들도 박사 학위를 가진 경우가 많은데, 교장이 초급대학을 겨우(?) 졸업한 걸로 큰소릴 치려니, 알게 모르게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고말고.”
거듭 강조하건대, 앞서의 그 소설가로 말미암아 그는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느낌에 빠졌다. 그는 감탄사를 연신 혼자 내뱉기도 했다. 아하, 세상 이치가 그렇구나!
그 이후로 학력으로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그는 어떤 좌중에서도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그와 비슷한 나이의 교장들은? 글쎄다. 개인차는 있기 마련이니 제삼자로서 거론은 삼가자.
하기야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교사에 임용되었다가, 스물한 살 나이로 교장으로 특진한 뒤 예순다섯에 정년 퇴임한 경우가 있었으니 K 경우는 조족지혈(鳥足之血)…. 그는 그걸 무슨 ‘전가의 보도’처럼 이를 휘두르고 자기 합리화를 시도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들먹이자. 앞서 거론한 그 교장 인사기록 카드를 보았더니 세상에 해주사범학교 졸업이라 버젓이 적혀 있지 않은가! 그분은 한수(漢水) 이북에 가보지도 않았는데…. 비슷한 시기에 교육감을 지낸 어느 인사는 일본에서 대학교를 졸업했다고 내세웠다가(인사기록 카드에), 위조임이 드러나 된통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일본은 항시 조회 가능한데, 북한은 천하없어도 원천 봉쇄. 그야말로 일본이 가깝고도 먼 나라임이 여실히 증명된 하나의 예라 하자.
그 교장이 워낙 K와는 인연이 깊었다. 한 학교에서 5년간 모신 적도 있어서일까? 걸핏하면 그분을 꿈에서 만난다. 어젯밤의 조우(遭遇)도 필연이라는 표현이 그래서 나온다. 아 참, K는 오랫동안 정신의학과 약을 복용하다가 근래 끊었는데, 덕분인지 잃었었던 ‘꿈’(생리적인)을 되찾은 거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 정신의학과에 드나들던 그 기간, 그는 꿈을 꾸는 둥 마는 둥 했다. 뒤죽박죽, 깨어보면 밑도 끝도 없는 그 야말로 황당한 내용이 산산조각이 되어 천장에서 흩어지기 일쑤였던 거다. 한데 지금은 길몽(吉夢) 일변도는 아니되 아름다움이나 재미가 있는 내용이고, 자초지종이 이어지는 거다. 거의 어김없이 교사, 초등학교 제자, 노인 학생, 군 장병(특히 공군)과의 노래, 현충원 영령들과의 떼창 등등과 어울려 지내는 건데 ‘긍정’의 요소만 추출한 듯하다.
많은 이가 듣고 웃을 수 있는 그의 꿈 한 토막. 어제는 옛날의 그 교장이 나타났다. 약간 각색하여 적어 본다.
그분은 첫 부인과 사별했다. 자식들은 다 장성하여 따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분이 혼자 살 아무 까닭이 없었다. 정년이 몇 해 남았고, 학교 울타리 곁의 제법 큰 집을 사서 살았으며 재력도 있었으니까. 가끔은 정력도 은연중 자랑하기가 예사여서 독신의 딱지를 떼는 건 시간문제라고 누구든 짐작하였다. 과연 그분은 재혼했다. 24년 차이가 나는 초등학교 제자와…. 한 해 만에 득남했다. 얼마나 기뻤겠는가? 주위에서도 박수를 보냈다. 다시 아이가 돌을 맞았다. 아이는 정말 귀여웠다. 이런 광경은 이웃과 동료 직원들이 박수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가끔은 엄마와 함께 샛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가 그분을 보면,
“아빠, 아빠, 아빠!”
하고 큰 소리로 부르는 거다. 우셋거리? 예순이 넘은 ‘할아버지’가 한 살 아들에게 듣게 되는 ‘아빠’의 함수로 정의하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건 되레 노익장을 대변하는 아름다운 경우여서, K의 뇌리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동료들 틈에서 그 광경에 취해 박장대소하다가 꿈에서 깨어난 거다. 참 노래도 불렀지. ‘학교 종’!
그런 꿈? 옛날 같으면 어림없었다. 그땐 그 근처에도 못 갔으니 말이다. 대부분이 흉몽인 데다, 잠에서 깨서 그 내용의 일부라도 기억해 보려 해도 허사로 끝나고 마는 것이었다. 단순한 나이 탓인가 싶었지만, 뒤늦게 약(정신의학과)의 과량 복용이 원인임을 알게 된 것이다.
어쨌든 K가 모신 그분은 자격지심(自激之心)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모르되, 사자성어(혹은 고사성어) 쓰기를 좋아했다, 하기야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한 그분인지라, 당신에겐 그게 비장의 무기였을지 모른다. 젊은 교사들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의도로 그러지는 않았지만, 논리도 정연했고 설득력이 있는 언변에 교사들은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어느 날 종회가 끝날 무렵 퇴근 시각이 한참이나 남았던 터였다. 그분이 일어서더니 칠판 앞으로 가서 분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달필(達筆)로 다섯 개의 사자성어를 휘갈겨 썼다. 老馬之智/ 犬馬之勞/ 走馬加鞭/ 走馬看山/ 施罰勞馬…….
말줄임표를 정확하게 찍은 건 다음에 또 있다는 뜻이다. 그분이 입을 연다.
“내가 말띠라서 말 ‘마(馬)’ 자를 좋아합니다. 막내도 말띠, 띠가 같습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다섯 개의 사자성어는 여러분 모두에게 익은 것들일지 모르겠습니다. 자! 한 번 따라 읽어볼까요? 노마지지, 견마지로, 주마가편, 주마간산, 시벌노마!”
직원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왁자지껄했다. 부부와 늦둥이 중의 늦둥이, 세 사람이 띠동갑이란 우연의 일치도 기가 막힌다. 마지막 ‘시벌노마’를 큰소리로 같이 부르짖으니, 이건 영락없는 욕 중의 욕 아닌가 말이다. 그분은 잠시 뒤 말을 이어나갔다.
“욕으로 보니 욕이지요. ‘시벌(施罰)’은 벌을 가한다는 겁니다. ‘노마(勞馬)’는 일하는 말이지요. 일하는 말을 채찍 따위로 때린다면 안 됩니다. 주마가편과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매로써 어린이들을 가르치지 말라는 하나의 교훈일 수도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제일 수치스러워하는 벌은 교실이나 복도에 꿇어앉히는 겁니다. 디케네라는 교육학자가 말하기를…”
그러고 나서 그분은 얼른 듣기에 논리정연한 듯한 교육이론(?)을 펼쳤는데, 그걸 여기 옮기지는 못한다. 그건 완전 허구였고 그분의 창작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디케네라는 교육학자가 누군가가 문제다. 답은 간단하다. 아무리 새로운 교육학을 공부하는 젊은 교사라도, 산전수전 다 겪은 원로 교장의 자신만만해 보이는 ‘디케네론(論)’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디케네는 어떤 인물인가? 미국의 대통령 ‘케네디’ 이름 석 자를 뒤죽박죽 섞은 거다. 평소 학력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그분이었다. 그걸 상쇄하자는 의미로 천부(天賦)의 유머 감각을 동원, 뜬금없이 ‘디케네’를 앞세워 보기 좋게 한 방 먹인 셈인 걸로 결론 짓자.
그 학력에 관계되는, 그 밖의 기가 막히는 일화들을 여기에 묶어 본다. K의 경우부터 들먹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분의 정년 퇴임을 조금 앞두고 K는 부산으로 전출한다. 새삼스럽게 그는 부적응의 삶과 맞닥뜨린다. 일상생활은 물론 이런저런 문화 자체에 적응이 힘들었다. 술이나 담배는 물론, 춤(사교춤)과 바둑 ‧ 당구 등 잡기와 담쌓은 채 살아왔고, 자동차 운전조차 할 줄 모르는 그를 얕잡아보는 직원들이 별칭까지 붙여 줬다. ‘천연기념물’이었더라나? 수모로까지 느껴지지 않아 얼버무리며 지냈지만, 그도 사람인 이상 유쾌할 수는 없었다. 노래 하나만은 수준이었다 해도 그것 하나 갖고 세파를 어떻게 헤쳐나간다는 말인가!
방송대 2년은 어떻게 졸업했지만, 그건 별 쓸모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동교(同校) 3학년에 편입, 졸업하여 학사(學士)임을 자랑했는데, 그도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었어도 현실 도피 차원에서 택한 게 ‘노인대학장’이었다. 까마득한 어릴 적부터의 민요를 중심으로 한 노래 수업(修業)이 시대를 달리했지만, 노인들과의 해후 혹은 조우의 계기를 마련해 준 거다.
30대 중반까지 K의 인사기록카드에는 사범학교 졸업으로 학력란은 막을 내리고 있었다. 단 국립(國立)이라는 거창한 전제(前提)를 달고 있었다. 그만큼 그 학교는 다른 고등학교와는 차별화되는, 수재들이 모이는 데였다. 사범학교 재학생들은 당시만 해도 다른 또래들의 선망의(羨望)의 적이 되었음은 당연하다. 그 교문을 나서기만 하면 바로 교사로 임용되었으니까.
그도 3년 수학의 과정을 겪어 나온다. 아무렇게나 마구 자란 탓에 교편을 잡은 지 한 달도 채 못 되어 교사 아니 ‘선생님’이란 직업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자신의 생활기록부를 열람해 보니, 적성(適性)이 바로 ‘문화 예술’에 편중되어 있던 걸 기억하고 그는 묘한 웃음을 입가에 흘린다.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고말고. 그는 결심했다. 그래 가수가 되자!
밤이면 밤마다 ‘쇼’를 공연하는 극장을 찾아다닐 수밖에. 그러다 보니, 시일이 갈수록 ‘설상가상’이라는 외마디 같은 신음(呻吟)이 보태졌다. 구제 불능? 그런 표현을 자신에게 퍼붓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마침내 오랜만에 들른 집에서 형님으로부터 뺨따귀까지 얻어맞았으니, 그의 어떤 생활 양식(樣式)에서도 성공이라는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거듭 말하지만 그만큼 그는 엉망이었다. 크지 않은 중소도시라 그는 그런저런 소문에 휩싸여 갈팡질팡하며 살았다. 어지간한 가수들과는 교유했고, 주먹깨나 쓰는 젊은이들이나 해군 해병대 병사들과 어울려 다녔다. 특히 그의 기상천외한 행동거지 범주에 길거리에 만나는 노인을 붙잡고, ‘양산도’며 ‘밀양아리랑’ 등을 부르는 것도 포함됐다. 그는 ‘가수’와 ‘군인’, ‘노인’ 등의 틈에서 첫출발을 했다는 게 맞겠다.
그런 그가 교육의 꽃이라고 하는 교장(校長)으로 정년 퇴임했으니, 보이지 않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말이다. 그토록 가수가 되고 싶었는데, 그 소원을 이루게 될 줄이야! 그것도 일흔 살이 넘어 우리나라의 ‘정통(正統)’인 대한가수협회의 ‘정회원(正會員)’으로 등록되게 된 거다. 정상적으로는 상상조차 못 할 일 아니겠는가! 더더구나 ‘노인대학장’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경력은 무슨 재주로 설명할까? 노래 하나로 40대 초반에 교사와 대학장(?)을 겸했으니, 호사가들도 유구무언이었으리라.
그의 과거는 험난했다. 20대 초중반, 악몽 같은 현역 시절을 군에서 보냈었다. 치명적인 신체 결함을 갖고 있었으니까. 전립샘(前立샘) 기형(畸形)…. 내무반 생활을 전우들과 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그는 그걸 이겨냈다. 군의관에게 고백하면 언제든지 ‘현역 부적격’ 판정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고 지금도 그는 후회하지는 않아도 쓴웃음을 짓는다,
하여튼 그는 군 복무를 당당히(?) 마쳤다, 이를 악물고. 일흔이 넘어 그 시원찮은 전립샘에 암이 붙었다는 진단을 받고 아예 그걸 떼어내 버렸다. 돌이켜보면, 그걸로 말미암은 수십 년 동안 겪은 대인 관계에서의 얽히고설킨 수모는 차마 털어놓지 못한다.
그런데도 여기서 군 장병들과의 인연을 부득이 들먹여야 한다. 전후(前後)라는 잣대가 있는데, 그걸 몇 자로 줄여 쓰면 ‘전립샘 없애기 전과 없앤 후’라 할 수 있겠지. 전자(前者)는 공군 부대, 후자(後者)는 육군 부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공군 전투비행단의 ‘호국 문예’ 심사를 맡은 게 효시였다. 그가 노인대학의 문을 열고 나서 몇 해 지나서…. 공군부대와 노인대학의 접목은 민군 유대 강화의 역사 자체다. 그로부터 얽히고설킨 공군과의 인연은 책으로써도 한 권으론 모자라리라. 공군 부대 장병들과 어깨를 겯고 자그마치 20년을 훌쩍 넘긴다. 어제도 공군 2사관학교 출신 첫 장군 승진자인 P 예비역 공군 장성을 만났다. 성우회 회장은 물론 참모차장을 인계인수한 두 예비역 공군 중장과 수시로 연락이 오간다. 합참의장을 지낸 W 장군(공참총장 출신)과의 만남도 결코 가볍게 볼일이 아니다. 뭐니 뭐니 해도 역대 5전투비행단장 세 장군(예)과의 교류가 아직 빛난다.
그가 일흔이 넘어서 다시 드나든 육군 부대 출입, 그것도 모부대(母部隊)를 찾아 장병들과 어울린 게 햇수로 3년여다. 전립샘을 떼고, 반세기 만에 돌아온 ‘남자’로…. 그 뒹굶 또한 근래에 마침내 ‘돌아온 이 하사’라는 새로운 병기(?)를 선보이게 한 근원인(根原因) 중의 하나랄까? 공군 부대에 비하여 기간은 짧지만, 음양으로 얻은 보람의 총화(總和)는 엇비슷하리라.
지금도 그는 낮이나 밤이나 자신을 현역으로 착각하면서 산다. 어디서든 부르면 전국 방방곡곡의 소규모 부대라도 찾는다는 각오다. 심지어는 최전방 작은 초소(哨所)에서 거기 있는 병사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르겠다? 설사 그렇게 소릴 그렇게 냈다 치자. 그가 내놓은 논리의 비약은 주위를 어리둥절하게 할지 모르지만, 실천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다시 ‘시벌노마’에 관련된 여담.
학장이며 자원봉사자인 강사 중 일부도 초대 졸업인 데다, 학생은 글쎄 반 정도가 초등학교 졸업? 그러면서 그들은 만나기만 하면 희희낙락하며 시간을 보냈다. 학생 중 상당수는 문자를 몰라도 이태 동안만 다니면 사각모와 가운을 착용하고, 공군부대 버스에 편승하여 B 일보 대강당에서 졸업식을 했다. 부대 군악대가 축하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이런저런 우여곡절의 연속인 노인대학, 그래도 1/3이 글을 모르니, K가 팔을 걷었다. 마침내 정부에서 서른네 평짜리 독립공간을 하나 마련해 주자, 그는 아내까지 동원하여 한글을 가르치게 했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문자 해득에는 유네스코로부터의 지원도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일찍 퇴근하여 마흔 명 가까운 학생들 앞에 섰다.
“염라대왕이, 방금 저승으로 온 학생에게 노인대학 졸업했다며 학장의 성씨나 아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 동그라미 하나에 작대기 하나입니다.”
폭소가 터졌다. 그동안 익혔던 문자 해득용 민요 가사를 화이트보드에 쓰니, 학생들은 다투어 읽는다. 여러 기관으로부터 박수를 받았던 우수 사례다. 민요를 몇 곡 부르고 난 뒤, 그는 돌아서서 다시 정성을 들여 반듯하게 한자를 네 글자 남겼다. <施罰勞馬>
그가 지시봉 끝으로 한 자 한 자를 아무리 두드려봐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깊이 고심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낸다. 그렇다. 한글도 제대로 못 읽는 학생들에게 획수도 많은 한자를 들이대니, 유구무언일 따름임을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만약에 마(馬) 씨가 있었다면, 그가 희생이 만면하여 큰소리를 냈겠지. 말 마 자입니더!
그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넉 자를 또박또박 읽어내려갔다.
“시벌노마”
아무리 수업 시간이지만, 그걸 들은 학생들이 가만있을 리 만무하다.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울부짖는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한참 있다가 그가 학생들에게 건네는 말이다.
“‘*팔 놈아’로 들리지요? 아닙니다. ‘시벌노마’입니다. 일하고 있는 말에게 벌을 주면 안 된다는 뜻이라는 것 정도만 아세요. 열심히 공부하는 여러분에게 배(裵) 선생이 지나치게 많은 숙제를 내준다면 견뎌내겠습니까?”
“…….”
“옛날 공부하던 교실은 초등학교 학생들이 주인이었습니다. 우린 그걸 빌려 썼지요. 내가 그 반 어린이들을 가르쳤구요. 어떤 녀석이 말하는 겁니다. 숙제 안 해 오는 노인 학생이 있으면 손바닥을 회초리로 때리라고…. 여러분, 그렇게 벌 받으면서까지 공부를 하겠습니까? 허허.”
웃음의 도가니로 변한 교실에서 더 이상의 강의는 불가했다. 단축 수업을 하고 노래만 불렀다. 도중에 그가 털어놓은 이 과거사가 두고두고 노인 학생들의 화두가 되었다.
“십여 여 전이었지요. 교감이 되기 직전의 그 사건을 여러분은 알고 있으리라 여깁니다. 어느 해 5월 8일 오후….”
노인 학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릴밖에.
“오후에 제가 근무하던 그 초등학교의 경로잔치를 이끌어나갔지요. 그런데 목감기가 와서 변두리 한지(限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다음 날도 병원에 갔습니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그는 페니실린 주사 쇼크로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 위를 날아가다가, 판자로 둘러싸인 큰 집의 솟을대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가 싶었다. 어느덧 험상궂게 생긴 창검을 든 괴한에 이끌려 대청마루 무릎이 꿇려졌다. 괴한 중의 두목인 듯한 자가 큰 소리로 명했다. 그리고 이야기했다. 위에 앉아 계시는 분이 염라대왕님이시라고….
그로부터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둘의 ‘담판’이 이뤄졌다. 대왕은 K가 만 명에 하나 말까 할 정도의 미성(美聲)을 지녔으니 살려 주겠다, 대신 제발 ‘오동추야’ 따위 노인 학생들에게 부르게 하지 말라는 엄명이었다. 지금 데려온다면 백수십 명의 노인 학생들이 오갈 데가 없다고 걱정했다. 대왕은 또 민요를 거쳐 다른 노래를 부른다손 치더라도 수준이 있는 걸 고르라고 훈계했다. 수없이 머릴 조아리며 고맙다는 인사치레를 하고 그가 염라대왕에게 묻는다. 학생들의 ‘십팔번’을 생활기록부-그 많은 노인학교 중에서 유일한 사례였다-에 적어 놓고 틈틈이 부르게 하는데, 검토해서 고치겠다고.
순간 대왕이 벽력같이 꾸짖는다. ‘십팔번’이 일본 말 찌끼기인 줄도 모르면서 학장 노릇을 하느냐고. 대왕은 ‘대지의 항구’도 학생들이 입에 달고 사는 모양인데, 그게 일제 말엽 일본이 조선 사람을 만주로 이주시키기 위한 정지 작업으로 만든 노래임도 알아야 한다며 일갈했다.
호되게 당하다가 꿈인 듯 생시인 듯한 그 촌음(寸陰)을 벗어나 눈을 떠보니, 그의 콧구멍에 자동차 타이어 펑크를 때우는 산소통의 고무호스가 끼워져 있는 게 아닌가? 물론 ‘십팔번’은 그가 무의식중에 뱉은 거지,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황망 중에서도 염라대왕의 실력을 떠보고 싶어 끄집어낸 시험용이라 하자.
그러나 꾸지람은 꾸지람이다. ‘대지의 항구’에 관한 것은 아리송했지만.
그렇게 ‘저승을 구경한 사람’의 반열(?)에 오른 뒤라 그런지 그의 소설과 수필에서 일본말이나 그들식의 표현 찌꺼기가 없어진 대폭 줄어든 건 당연하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라고? ‘그녀’는 그의 글에서 절대 등장하지 않는다. 내친김에 하나만 더, 화자(話者)의 재량으로 덧붙이자. 바로 ‘…로 인(因)하여’, 두말하면 잔소리지! ‘…로 말미암아’도 알 만한 사람은 알리라. 그건 정권(政權) 차원에서도 검토되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주사 쇼크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걸핏하면 맥박이 120회 이상 뛰면서 꼭 죽을 것 같은 느낌에 빠지는, 다시 말해 공황 장애를 앓게 되는 것이다. 거리에서도 여러 번 쓰러졌다. 맨 처음의 그 사건이 워낙 충격적이어서 그런지, 때로는 육교 밑에 누워서도 잠시 염라대왕을 만나기 일쑤(?)였다.
‘과유불급’은 때로 생명을 앗아간다는 걸 그는 알게 모르게 체험해 가면서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나갔다. 그 기나긴,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기간에 그가 출근하지 않는 노인대학은 상상조차 못 했다. 한사코 거기 매달리는 것도 모자라 때로는 이웃 노인학교에도 징발(?)되기 일쑤였다. 퇴임 후엔 교육감에 나가는 후배의 출정식에 나가 Oh Danny Boy를 부르기도 했다.
선거와 그 노래? 당위성을 부여한 것은 염라대왕이었다. 전장으로 떠나는 아들의 무운 장구를 비는 아일랜드의 민요라고 대왕은 십팔번 아니 애창곡 이야길 하면서, 그에게 압력을 넣었던 노래다. 기가 막히는 여담 하나. 어느 전(前) 대통령의 모교 맞은편 노인대학에서 노인 학생들에게 Oh Danny Boy 대신 ‘아 목동아’, 즉 우리말로 부르니 정말 잘 따라 하더라. 참 그날 ‘이리랑’보다 ‘클레멘타인(미국민요)을 그들이 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도 거듭 확인했다.
그렇듯 그는 ’십팔‘이라는 숫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살았다. 단순한 우스개 이야기일 듯해도, 설득력을 갖고 있다. 설명해 볼까?
‘십팔번’은 염라대왕의 지적을 받고 나서부터 수십 년 이어져 온 화두다. 며칠 전 어느 모임에서도 교육장까지 지낸 동료가 십팔 번 운운하다가 그가 삿대질하기 직전에 수습되었다. 전(前) 교육장은 ‘뱃노래’ 후렴도 ‘에야누 야누야’로 얽더라. 왜색(倭色)임을 모른 까닭에서다.
학력(學歷)을 다시 거론하는 게 넌센스일지 모르지만, 그러지 않으면 재미가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견강부회라고? 아니 조금 있다가 판단해도 늦지 않으리라.
대여섯 살 될 무렵까지 두어 해 아버지가 운영하는 야학(서당과 동의어 혹은 개념이라 전제하자)에서 천자문을 공부했다. 야학(夜學) 2년이다. 이윽고 한 해 이르게 자기 형님이 교사로 재직 중인 초등학교에 들어가 1년 가까이 다녔다. 청강생? 아무튼 담임을 선생님이 아닌 ’형님‘으로 부르기 고집하다가 퇴학(?)당했다. 이듬해 다시 입학해서 6년 과정을 마쳤다. 하지만 부산의 최고 명문 중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읍소재지 초등학교 6학년에 적을 두고 재수했다. 여기까지가 9년이다.
그 중학교에 보기 좋게 합격했으니 천재 났다는 소릴 들으며 의기양양했다. 하나 그도 잠시뿐, 3년이 못 되어 가출을 결심해 미수에 그친다. 까닭이 있었다. 형수의 가까운 친척이 세 살 나이 많았고, 그(사형)도 명문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한 방에 자면서 기차 통학을 하게 되었다. 사춘기의 반항? 뭐 그쯤으로 해 두자. 하여튼 그 사형은 모범생 중의 모범생이라 그러니 형님 내외가 그만 감싸고 돌았음은 어린 소견에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하자. 가라는 학교는 안 가고 역전 삼류 극장에서 2본 동시 상영 영화를 보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다가 귀가했겠다? 개봉한 지 상당히 오래된 프로가 대부분이었음은 물어보나 마나.
그것들 중에서, High Noon이 기억에 노래 남고 그 영화 주제곡 Do Not Forsake Oh My Darling을 아직 부르고 있다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하자. 어처구니없게도 불량소년인 그는 자기를 게리 쿠퍼로 착각하고 있었던 거다. 그레이스 켈리며 악당은? 그만두자. 뻔한 답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사형에게 밤낮으로 던지는 ’시* 놈‘이었음을 밝힌다. 어쨌든 다시 재수했으니 거기까지가 13년.
다시 사범학교에 진학하여 3년을 보낸다. 13+3이 16년이다. 방송대 2년을 졸업한 것을 합하면 그의 학력은 ‘**년’이다. ‘년’과 ‘놈’의 뉘앙스에 차이가 상당해도, 18은 18이다.
그의 노인대학은 해마다 졸업식을 했다. 글자 겨우 익힐 무렵이면 버젓이 대학 졸업식이라는 현수막을 건, 예식장이나 신문사 강당에서 졸업장을 받는 거다. 그러고도 다시 이듬해 입학이 가능하니 졸업생은 줄어들지 않는다. 전투비행단에서 지원하는 그 행사(졸업식)를 18번 치렀으니 그 또한 묘한 우연의 일치라 할까?
또 하나 기가 막히는 18.
그의 공식 비공식 약력에 보면 대중가요 콘서트가 18회라 적혀 있다. 특히 저서 책날개엔 더욱 두드러지게 그걸 강조해 뒀다. 부산과 서울에서 연 걸 합한 수치다. 결코 예사롭게 넘길 수 없는 게, 우정 출연 인사가 만만찮은 존재여서다. 광역시의 전(前) 시장(팝송 콘서트 수회 개최 경력), KBS 가요 무대의 최다 출연 가수(작고), 한때는 전세 비행기를 타고 공연 다녔던 선배 가수(2회) 등등. 그 선배는 여든을 훌쩍 넘기기는 했지만,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현역이다. 표(票)와 직결되는 그의 노인학교의 특성상 현역 국회의원들까지 와서 애창곡을 부른 것까지 ’우정 출연‘ 운운한다면, 행여 18번에 아귀가 맞아떨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그의 ’시벌노마‘나 십팔의 공통분모는 어디서든 적용되었다 해도 과히 틀리지는 않으리라. 그 옛날 소읍에서의 ‘시벌노마’론은 그가 교장으로 재임할 즈음에도 즐겨 쓰는 명제 혹은 덕목이었으니까. 물론 어린이들에게 직접 그런 말을 쓴다는 건 있을 수 없으니, 추억 삼아 직원 상대로 한 발언 중에 양념 삼아 마침맞게 섞었다고 해석하면 되겠다.
수십 년 뒤에 다시 군부대에서 안보 강연을 하면서도 그는 그 넉 자를 가끔 들먹임으로써 장병들이 배꼽을 잡게 했다. 그게 쉬운 노릇이 아니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여단 본부에서 그러노라면 임석한 여단장에게 책잡힐 빌미를 줄 염려가 있으니까. 가끔은 지휘관(대대장) 실에 들렀다가, 라이브로 그 내용을 체크하는 보안 부대 요원(주로 준위)들은 또 어떻고. 신경이 은근히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만큼 지도 기술도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아슬아슬하다는 푸념도 그래서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래도 말이다. 그는 마흔여 시간을 버텨냈던 거다. 제법 호평을 받으면서…. 어수룩하게 나섰다가는 한 시간도 못 버티고 돌아서야 하는 게 군 안보 강사의 신분(?)이다. 그의 말을 다시 한번 인용해 보자.
“시벌노마는 고사성어로서, 여러분의 생활에 양식이 되는 겁니다. 그냥 넉 자로 줄이면 욕이 되겠지요. 시벌노마! 풀이 혹은 수사(修辭)가 필요합니다. ‘시벌노마’는 가치 덕목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일하는 말에게 벌을 주지 말라는 것이고, 그와 비슷하다고 오해하기 쉬운 사자성어 즉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가한다는 주마가편(走馬加鞭)과는 오히려 대척점에 설 때가 많아요. 지금도 사단마다 고등학교 졸업을 인증하는 부설 고등학교 과정이 있는데, 그 학생(병사)들에게는 둘 중 어느 것을 적용해야 할지 자명해집니다.”
‘시벌노마’에 얽히고설킨 역사 중에 백미(白眉)로 그는 이것을 꼽는다.
어느 날 그는 노인대학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서른네 평짜리 새 교실 안은 한여름이라 에어컨을 틀어도 무더위가 가시지 않았다. 모두 땀을 흘리고 앉아서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이웃 성당의 보좌신부로 부임한 사제(司祭)가 문을 열고 들어선 거다. 사무장이란 사람과 초로의 자매(천주교에서 여자 신자에게 붙이는 호칭)와 함께. 사무장이 틈을 봐서 둘을 소개했다.
아무리 비율로는 불교 신자가 많지만, 천주교 신자도 더러 있어 그런지 여기저기서 눈치껏 박수를 보내는 게 아닌가. 이윽고 신부가 시간을 얻어 교단 위에 섰는데, K와 자매는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30년 전에 헤어진 ‘해주사범’이자 ‘시벌노마’의 주인공인 그 옛날 그 학교장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은체를 단박에 할 수는 없었다. 사제의 말이다.
“이번에 이웃 성당에 보좌신부로 온 손(孫) 아우구스티노라고 합니다. 같이 오신 분은 제 어머니구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세 차이가 많지요. 스물 넷, 띠동갑이십니다. 초등학교장으로 계셨던 당신은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하셨습니다. 학생들과 비슷하실 겁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
여기저기서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동류의식의 발로였을까?
“학생 여러분, 제가 전교(傳敎)를 하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닙니다. 소문에 의하면 열심히 공부도 하신다던데, 한글을 익힐 정도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노래 열심히 부르시는 건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니 즐겁게 계속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더니 신부는 돌아서서 화이트보드에다 뜻밖의 네 글자를 한자로 썼다. 施罰勞馬
학생들이 웅성거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약간은 뜻밖의 반응에 놀라는 표정을 짓던 신부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너무나 연세 차이가 나는 두 분 사이에 태어난 제가 어릴 때 지나친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했지요. 그러다 보니 버릇없이 자라고 세상 물정도 모르면서 학업을 계속하다가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된 겁니다. 한 남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사제로서 산다는 게 만만찮았습니다. 고집은 또 어찌나 센지…. 제딴은 잘해 보겠다는 결심으로 지나치게 절제하고 독한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수렁으로 빠져드는 게 아니겠습니까?”
물 한잔을 마신 신부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너무나 힘들었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그는 자제력을 잃기 시작했단다. 마침내 폭음으로 이어지고 옷을 벗을 생각까지 했더라나? 우여곡절 끝에 그는 상담 사제를 찾아가 모두를 털어놓았다. 상담 사제가 한 말도 ‘시벌노마’ 비슷했더란다. 자신에 대한 혹독한 채찍질을 삼감으로써 그는 사제의 본분을 찾았다. 그 무렵 그와 종교가 다른 아버지가 이승을 떠났다. ‘시벌노마’의 영원한 주인공!
나머지 시간을 자원봉사자들에게 맡긴 K는 둘을 인근 식당으로 안내해 이른 저녁을 대접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날 신부의 이야기는 K의 교육 지침에 꽃 한 송이를 던져 얹은 셈이었다 할까? 금상첨화가 따로 없었으니 그 이후로 학생들은 공부는 공부대로 수월하게 하고, 노래는 노래대로 즐겁게 부르는 배우는 행복한 일상을 보냈다.
근래 코로나로 말미암아 군부대 강연을 못 하게 된, 그는 대신 본격적으로 현충원에 발걸음했다. 한 달에 한 번은 거기 들러서 호국 영령들께 노래를 바치는 거다. 슬퍼서도 기뻐서도 눈물은 흐른다. 후자(기뻐서 눈물 흘리는 가수)는 자신이 유일하다시피 마치 전속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지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육군가’, ‘해군가’, ‘공군가’, ‘해병대가(나가자 해병)’를 음정 하나 박자 하나 안 틀리고 정확하게 소화시키는 예비역 부사관이 전국에 10명 있다? 아서라, 그런 가상은 안 하는 게 좋겠다. 그건 원천적으로 불가하다.
때마침 그는 그 현충원에서의 열창 영상을 담아 유튜브 <돌아온 이 하사>를 개설했다. 머지않아 이승을 떠날지 모른다는 예감은 그에게 좌절이 아니라 성취동기로 작용하는 거다. 한 달이 지났는데, 영상 다섯 개에 구독자는 105명, 총 조회수 4500여 회이니, 이만하면 성공이다 싶다.
현충원에서 19만 영령들의 유택을 일별하면, 그 위로 그의 곁을 오래전에 떠난 수백 수천 명의 노인 학생들의 생전 모습이 겹쳐진다. 사위가 어둑할 무렵엔 약간은 두려움이 생기지만, 그러다가 기력이 쇠진하여 쓰러진다 가정하자. 행복하리라 여겨진다. 무엇보다 염라대왕을 만난다는 안도감에 가슴이 설렌다. 하기야 주사 쇼크 때와 비슷한 경우를 당한 게 여태 열대여섯 번이다. 어김없이 염라대왕과의 조우가 이뤄졌으니, 예외가 없다. 마지막은 서너 번 남은 셈이다. 그러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리라. 그가 준비하는 말은 이거다.
“대왕님, 이제 제 애창곡은 대왕님이 일러 주신 Oh Danny Boy에다 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g, I Went To Your Wedding이 보태졌습니다. 그 옛날 그렇게 저를 꾸짖으셨으니, ‘오동추야’니 ‘대지의 항구’ 따위는 근처에도 얼씬 않습니다. ‘가고파’, ‘고향 생각’ 등 가곡이 보태졌습니다. 물론 민요는 많아졌습니다. 18, 아니 욕을 써서 죄송합니다만 어쨌든 열여덟 곡을 골랐습니다. 대왕님의 18번 아니 애창곡을 한 번 들려주시지요.”
현충원에 가는 건 그에겐 행복이다. 거기서 영령들께 바치는 노래를 그는 기쁜 마음으로 고른다. 물론 현장에서 큰 소리로 열창하면 제지를 받을 수도 있다. 해서 말인데, 우선 녹음실에 가서 최고의 컨디션 산물(産物)을 스마트폰에 담고 다시 현충원으로 발걸음하는 방법을 택한다. 현충원에서는 영상만 녹화하는 거다. 그러고 귀가하여 둘(노랫소리와 영상)을 유튜브에 탑재한다. 이어 전파로 송출! 환상의 조합이라고나 할까? 여태까지의 실적(?)은 미미하다. 더구나 영어로 된 노래는 없었으니, 또한 그게 효시다. 위 염라대왕에게 전한 셋에다 순서를 매기는 게 그의 우선 소임 중 하나다. 혼자서 가늠해 보니, 첫손가락에 Do Not Forsake Me Oh My…을 꼽는다.
왜냐고? 그의 옆에는 게리 쿠퍼만 하게 커 보이고-아마 키가 비슷할 거다, 둘은-미남인 한 소설가가 있어서다. 전공이 영문학이라는 게 근인(近因)이기도 하다. 녹음실에서의 결과물을 그에게 들려주었을 때 발성(발음)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그다.
둘의 나이가 비슷해서 교수도 하이눈을 몇 번 감상했을지 모른다고 추측을 하니, 그 또한 마음 내키게 한다. 그레이스 켈리를 최고의 미인으로 여기고 사모(?)했으리란 짐작도 공통분모다. 두 스타 게리 쿠퍼와 그레이스 켈리가 주인공으로 출연했을 때,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32살) 미스캐스팅이었다는 진단도 같이 내릴 수 있으리라.
누가 말이다. 아니, 그 노래와 현충원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질책성 질문을 던진다면, 둘은 의기투합하며 답할 수 있다.
“자유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들의 넋을 기리자는 데가 현충원입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 레이건이 말했어요. 하이눈의 악당 넷은 한국의 현충원 영령들의 주적(主敵)과 같은 놈들이라고!”
여주인공이 퀘이커교 신자가 된 사연이라든지, 주제가를 부른 가수의 당시 위상, 뒤에서 총질하는 뜻밖의 낭패(?) 등에 얽힌 이야기는 후일담으로 넘겨도 되겠지. 절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교리를 가진 여주인공이 뒤에서 악당 하나를 사살한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 노래를 맹렬히 연습하는 게 급선무다.
이원우
국제PEN한국본부이사(소설. 가입심의위원), 한국소설가협회 ‧ 한국수필가협회 ‧ 한국가톨릭문인회 이사 역임
KNN문화대상, 화쟁포럼문화대상, 부산PEN문학대상, 경기PEN문학대상, 경기문학인 대상 등
소설집 『연적의 딸 살아 있다』 등 6권, 수필집 『열아홉 과부가 스물아홉 딸을 데리고』 15권, 기타 3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