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8시50분 애오개 역에서 내려 청으로 가다보면, 지하철 구내 가게 앞에 아주머니 한분이 나와,“방금 만든, 맛있는 김밥 한 줄에 천원이에요!”라고 출근하는 행인들을 향해 나지막하게 이야기합니다.
전에는 무심코 지났는데, 요즘은 그 모습을 보면 제가 지난 11. 3. 밤 9시 아내와 함께 피카디리 극장에서 본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그러면서 주위에 펼쳐지는 모든 장면과 삶의 다양한 모습에는 어찌 의미와 사연이 없을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해 봅니다.
88년도 어느 TV의 연말 가수 왕이 된 로커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최곤입니다. 그때가 그의 인생의 정점이었지요.
그 뒤로 그는 화려한 날에 취한 듯 살다가 폭행사건으로, 음주운전으로, 대마초 흡연으로 여러 차례 문제를 일으킵니다.
급전직하한 그는, 아직도 88년 가수 왕이라는 타이틀에 취해 삽니다. 이제는 미사리 까페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그래도 구식일망정 벤츠를 타고 다니고, 요즘 잘나가는 후배가수들에게 전화하여 폼도 잡고 그러지요.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 까페에서 노래를 하던 중, 남자 관객 한사람이 노래를 한곡 더 불러달라고 하면서 돈질을 하자, 시비가 붙어 폭행사건으로 번지고, 경찰서로 잡혀 옵니다.
경찰관으로부터 조서를 받으면서, 88년도 가수 왕을 몰라보고, 조사를 한다고 못마땅해 하는 그 옆에서 최곤의 인적사항이라든지, 경찰의 질문사항을 대신 답하고 있는 그의 매니저가 있지요.
그의 이름은 박민수입니다.
유들유들하고 선량하기만 한, 그는 약20년을 최곤의 매니저 노릇을 했지요. 최곤이 일으키는 갖가지 사건들을 해결하고, 몸종노릇을 한다고 보면 될 겁니다.
영화 사이사이에 최곤을 위하여 담배를 사와, 꺼내주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며, 심지어는 짜장면도 비벼줍니다. 최곤은 매니저인 박민수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요.
그는 최곤의 매니저 노릇을 하면서 가정은 뒷전인 까닭으로 초대 최곤 팬클럽 회장이었던 아내와 어린 딸은 자그마한 가게를 내서 고생스럽게 김밥 등을 파는 분식점을 하지요.
경찰로부터 조사를 받던 중, 우연히 경찰서에 들른 기자가 최곤을 알아보곤, 폭행사건으로는 기사감이 안된다면서, 최곤이 마약했을지 모르니 소변검사를 해 보라고 경찰관에게 이야기합니다.
그 소리를 들은 최곤은 격분하여 기자를 두들겨 팹니다.
사건이 터졌으니, 해결은 박민수가 해야지요. 폭행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박민수는 가수이자, 프로그램 진행자로 여기저기 방송국에 출연하는 임백천을 만나고, 가수 김장훈을 만나 돈을 빌리려고 하지만, 그들은 냉정히 뿌리칩니다.
어쩔 수 없이 박민수는 친구인 방송국의 국장을 만나 또 사정을 합니다. 그러자 국장은 영월방송국이 3개월 후에 원주방송국과 통폐합되는데, 그 방송국의 디제이를 맡아서 진행해 주면 합의금을 마련하여 합의를 해 주겠다고 제의합니다.
박민수는 88년 가수 왕을 시골구석의 디제이를 시키냐고 불퉁거리는 최곤을 달래, 낯설고 물선, 영월 땅으로 갑니다. 영월방송국은 그야말로 한심합니다.
곧 통폐합될 것이기에 스튜디오의 기자재에 먼지가 내려 앉아 있을 정도로 관리가 안돼, 엉망입니다.
방송국 지국장이라는 사람도 자신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갑자기 음악방송을 하라니 신경질이나 부리고, 피디 역시 원주방송국에서 밀려온 젊은 여자로서 그 역시 매사에 불만스럽고, 부정적이며, 신경질이나 부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88년도 가수 왕 최곤의 오후2시의 희망가요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니, 진행 초반부터 엉망이지요.
최곤은 피디가 만들어준 원고대로 읽지 않고 제 맘대로 합니다. 최곤은 똥 폼 잡느라고, 잘나가는 후배가수 김장훈과 전화연결을 하겠다고 생방송으로 전화연결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최곤으로 인해 여기저기서 시달리던 김장훈은 최곤에게 후배 돈을 슈킹해 갔다고 방송 중에 난리를 쳐서 방송을 엉망으로 만들지요.
그러나 최곤과 박민수가 자주 가던 다방의 레지가 커피배달을 오자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시켜, 그녀로 하여금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게 합니다.
그녀는 외상커피를 마신 철물점 아저씨 등을 지목하면서 외상값 갚아달라고 하는 바람에 방송 듣는 영월사람들에게 쇼크를 먹이지요.
그뿐 아니라, 그녀는 집 나와 미안하다고 엄마에게 죄송하다면서 엄마 보고 싶다고 울먹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영월사람들을 숙연해지고요.
그뿐 아닙니다. 방송 중 온갖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할머니들이 고스톱을 하다가 전화로 고스톱 족보를 묻기도 하고, 영월의 유일한(?)록밴드 이스트리버(동강) 단원들도 방송에 출연하여 공연을 하기도 하지요.
그뿐 아니라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자기 꽃집에 있는 장미를 한 송이씩 가져다주면 좋겠다는 꽃집의 순진한 총각의 사연도 방송을 탑니다.
그러다보니 이 방송은 점차 영월주민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에 이르렀고, 입소문이 나 인터넷으로 전국에서 청취하는 사람이 많아져 엽서와 전화가 쇄도합니다.
방송국 본사에서는 임백천이 진행하는 희망가요 프로그램이 인기가 없어 광고도 떨어지자, 영월방송에서 진행하는 최곤의 프로그램을 전국으로 송출하기로 결정합니다.
방송 100일 기념으로 영월방송에서는 실황방송까지 하게 되는데, 최곤의 상품가치가 높아지자,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스타팩토리의 사장이 최곤의 스카웃을 추진합니다.
그러면서 최곤을 위해 헌신했던 매니저 박민수에게 최곤을 위해서 그만 물러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최곤과 헤어진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박민수로서는 정말 자신의 청춘을 바친 것이 무시되자 너무 서운하고, 섭섭하지만 그 상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최곤에게 결별을 선언하지요. 더 이상 매니저 노릇 못해먹겠다고 합니다. 갑작스런 상황에 최곤은 왜 이러느냐고 따져 보지만 박민수는 냉정하게 돌아섭니다.
박민수가 없는 최곤은 뭔가 나사가 빠진 듯, 얼이 빠진 듯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전국방송으로 할 날은 다가오는데, 최곤은 방송진행을 하지 않겠다고 버팁니다.
그사이 스타팩토리 사장이 찾아와 전속계약을 체결하자고 제의하자, 그제서야 사건의 전모를 대략 눈치 챈 최곤은 스타팩토리 사장과 함께 온 가수 김장훈을 내 쫓아 버립니다.
방송진행을 거절하던 최곤은 큐싸인이 떨어지자, 주위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방송을 시작하는데, 최곤과 박민수가 자주 가던 영월 순대집 꼬마를 등장시킵니다.
그 꼬마는 가출한 어머니를 찾겠다고 집 나간 아버지를 부릅니다. 제발 돌아와 달라고 합니다. 할머니가 매일 밤 우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아빠가 집나간 이유가 자기 때문이라는 것 잘 안다고, 잘 못했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죄송하다고 합니다.
최곤은 꼬마의 마이크를 받아서 꼬마의 아버지 이름을 부르면서 당장 돌아오라고, 자식에게 무슨 잘못이 있냐고 호통을 칩니다.
그리고 최곤 자신도 할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야기합니다.
“민수형, 돌아와 줘. 힘들어 죽겠어!. 형 듣고 있어? 천문대에서 별 볼 때 형이 그랬지?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없다고. 와서 좀 비춰주라”
마치 집나간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는 순대집 꼬마처럼 울먹입니다. 그 방송이 나가고 있는 그 시간, 박민수는 장사가 안 되어 가게를 처분한 아내와 새 출발을 한답시고, 지하철 입구 노상에서 김밥을 팔지요.
아마 이 장면 때문에 제가 애오개 역을 나오면서 김밥을 파는 아주머니를 유심히 보게 되었고, 그 아주머니의 김밥을 사라는 그 소리가 가슴에 와 닿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날 김밥을 모두 팔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최곤의 그 방송을 듣습니다.
남은 김밥을 먹고 가던 박민수는 꾸역꾸역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방송에 몰입하여 김밥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습니다.
아마 목울대가 아프고, 혹여 울음소리가 나올까 봐, 그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틀어막는 것처럼 먹습니다. 정말 눈시울이 촉촉이 젖은 채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김밥을 밀어 넣는, 그 탁월한 연기에 감탄했습니다.
박민수 옆에서 피곤해 자던 아내는 잠자는 체 눈을 감고 가다가 남편에게‘이 화상아’라면서, 최곤에게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래도 자기가 최곤의 초대팬클럽회장이라고 하면서....
비가 주룩주룩 오던 날, 방송을 마친 최곤이 잠시 밖에 나오는데, 빗속에 말끔하게 차려입은 박민수가 방송국으로 와, 우산을 쓰고 서 있습니다. 씨익 웃으면서,,
그들은 재회의 기쁨을 빗속에서 장난으로 표현하다가 빗속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최곤에게 우산을 씌워줍니다.
이 영화는 한때 영화를 누렸고, 인생의 절정에 올랐던 록가수와 그 매니저 이야기입니다. 즉 시들어가는,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지요. 록가수와 매니저 뿐 아닙니다. 뒷방늙은이가 되어 가는 듯한 방송국의 지국장, 밀려난 피디, 통페합 될 지방방송국의 기술자도 모두 아웃사이더 들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비 오는 날 엄마를 그리는 다방레지, 집나간 아버지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는 순댓집 꼬마, 연모하는 여자에게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안달인 꽃집 청년, 빛볼 가능성 전혀 없이 그저 열정 하나로 음악을 하는 이스트리버 그룹도 마찬가지지요.
감독은 그런 아웃사이더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냅니다.
주연배우들이야 워낙 유명한 배우들이고, 단짝이니 더 말할 것 없이 탁월한 연기자들이지요.
칠수와 만수,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에서 그들은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호흡을 맞췄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특히 앞서본 김밥을 우걱우걱 밀어 넣는 장면과 빗속에서의 재회장면이 압권입니다.
그리고 박민수가 신중현의 미인이라는 노래를 서너 차례 부르는데 그 장면 하나하나 약하고 사라져 뒤안길로 가는 사람이 보내는 시그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연들도 뛰어나지만 조연들 역시 빼어난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특히 강피디로 나오는 최정윤이라는 배우가 처음 앙칼지고, 잔뜩 불만에 쌓였다가 방송프로그램이 천천히 성공하자, 최곤과 박민수를 이해하게 되면서 따뜻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는 연기변화가 참 괜찮더군요.
이스트리버 역을 하는 노브레인이라는 그룹의 열연과 열창도 뛰어났습니다. 주제곡‘비와 당신’을 비롯한 삽입곡들도 적절히 선택되어 있습니다.
촬영도 신선했습니다. 최곤의 노래 소리에 맞춰 타고 흐르는 듯한 영월과 서울, 부산의 모습, 특히 영월 높은 산위에서 마치 행글라이더를 타고 부드럽게 활강하는 듯한 촬영방식은 방송국의 밀폐된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벗어나, 활짝 펼쳐지듯 자유롭게 날아가는 식으로 촬영해 제 눈길을 잡아채더군요.
최곤이 전국으로 송출되는 방송 첫날, 박민수에게 들으라고 했던 , 가슴 절절하게 파고들던 그 말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없다”를 영화에서 들으며, 참으로 삶이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누군가의 도움과 희생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록가수 최곤 만이, 박민수의 도움과 희생으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박민수 역시, 그의 아내와 어린 딸의 도움과 희생이 있기에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피곤했을 때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빌려주고, 밟고 올라설 수 있도록 허리를 빌려주는 건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낡은 방송국의 스튜디오로 가고 싶었고, 순대 집과 천문대, 다방과 꽃집을, 그리고 그 거리를 따라 걷고 싶었습니다.
첫댓글 몇줄만 읽다가 리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