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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
한량없는 감사 에베소서 2장4-7절 / 김병삼목사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할 때 보여 주신 자신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5. 심지어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으니 7. 이것은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친절 속에 담긴 자신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다가오는 시대들 속에서 보여 주려 하심이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풍성하신 은혜를 생각하라! 늘 우리에게 고민스런 것이 있습니다. “과연 나에게 감사할 만한 일들이 있는가?” 라는 물음입니다. 아마도 감사절기 때만 감사하고 평소에는 여러분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think’와 ‘thank’라는 단어 일 것입니다. 생각하면 감사할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문제는 감사를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감사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아니 예배 가운데 많은 표현들이 있지만 감사의 고백은 예배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야 말로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7절에서 “하나님은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내려 하시는 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의 표현에 의하면 “very, very rich his kindness”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고백하고 계십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항변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감사를 하기에는 나에게는 너무나 많은 아픔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아픔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아십니까? 아주 희귀한 병 가운데 중추 신경의 이상으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 있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위험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에 이를 때까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손가락과 발가락, 신체의 마디가 떨어져 나가는 한센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아픔을 느끼기 원하는 소원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픔이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직 우리가 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데이비드 브린클리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은 가끔 빵 대신 벽돌을 던져 주시는데, 어떤 사람은 원망하면서 그 벽돌을 차다가 발가락 하나가 더 부러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벽돌을 주춧돌로 삼아 기막힌 집을 짓기도 한다.”고 말입니다.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인 귀족 세 가족이 가장 안전한 곳을 연구한 결과 오키나와 섬으로 결정짓고 그리고 피신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 곳이 가장 위험한 격전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고난은 맞서서 이기고 죄는 피해서 이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국의 속담에 “거친 파도라야 유능한 선장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감사로 이끌 방법은 고난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 임하시는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사는 불신앙이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지금 여러분이 받고,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를 모르는 교만이 두려운 것입니다. 저희 4남매가 크는 동안 늘 아버님이 말씀하시던 “감사해라, 감사해라”라는 말씀은 바로, 고난 중에도 감사하라는 가르침이요, 잘 나가는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잊지 말라는 충고의 말씀이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사도바울의 동일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11절입니다. “10.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11. 그러므로 나든지 그들이든지 우리가 그렇게 선포하매 너희가 그렇게 믿었느니라.” 오늘 여러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우리가 감사해야할 이유를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에벤에셀” 하나님! ➤사무엘상 7장12절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런 감사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12. 그때에 사무엘이 한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우고 이르되, {창조주}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며 그것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에벤에셀’ 하나님.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여 주셨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사업체에 심방을 가서 말씀을 전할 때, 가장 선호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풍성하신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격이 있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국운을 위협하는 위기 가운데서 백성들을 미스바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주}만 섬기니라.”(삼상 7:4) 참회하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이긴 것은 자신들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풍성하신 은혜를 힘입어,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념비를 세우며 말입니다. 오늘 에베소서 기자가 고백하는 감사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풍성한 은혜”입니다.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에베소서 2장 1-5절의 말씀을 보세요. ➤“1. 또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을 따라 걸었느니라. 3. 지나간 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 안에서 생활하며 육신과 생각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할 때 보여 주신 자신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5. 심지어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그렇습니다. 본문 4절의 말씀입니다.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할 때 보여 주신 자신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본문의 말씀이 영어식 표현으로 하면 훨씬 더 와 닿습니다. “4. But God, who is rich in mercy, for his great love wherewith he loved us,”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난 시절을 떠 올리며 하나님께 이런 원망을 하십니까? “하나님 제가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 제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나요?” 만일 그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키시지 않았다면 과연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자리의 누구도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그렇게 무겁게 생각하는 짐, 십자가조차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금까지 함께 하셨음을 고백하지 않으시나요? 그렇게 무거우신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저는 요즘 등산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힘들게 산을 올라갈 때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숨이 찹니다. 빨리 이 언덕을 올라가 쉬고 싶습니다. 가파른 산을 오를수록 몸을 땅에 붙이고 앞만 보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잠시 쉬면서 나의 자리를, 내가 선 곳을 보면 놀랍니다. “내가 이렇게 높이 올라 왔는가, 아니 이곳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가, 아니 내 주변에 있는 이 산과 들, 나무들, 새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운가?” 라고 말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전설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새를 만드셨을 때는 날개를 달아 주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새는 하나님께 “뱀은 독이 있고, 사자는 이빨이 있으며, 말은 발굽이 있어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건만, 저는 적으로부터 저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소연을 했더랍니다. 새의 하소연을 들으신 하나님께선 새에게 날개를 달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새가 다시 하나님을 찾아와 ‘하나님, 날개를 달고 나니 이전보다 몸이 무거워 전처럼 빨리 움직일 수 없습니다.“라고 불만을 토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어리석은 새야! 두 날개를 네게 달아 준 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라는 것이 아니라 하늘 높이 날아 적을 피하라고 준 것이다!”라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짊어진 무거운 짐 때문에 삶을 후회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무거운 짐조차도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로 더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십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생명 있음이 바로 ‘에벤에셀’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서 예배드리고 있음이 ‘에벤에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임마누엘” 하나님! 본문 5절의 말씀을 보세요. ➤“5. 심지어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과거의 허물 가운데서 우리를 살리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함께 하시는,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감사입니까? 절대로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겠다는 선언의 말씀입니다. 과거에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역사하시는 풍성한 은혜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은혜를 입은 자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혜 말입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위로]라는 책에 나오는 Max Lucado의 글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로마서 8장31절의 말씀, “31. 그런즉 이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라는 말씀은 단순하게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러한 물음이라면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습니다. 물질, 인간관계, 전쟁, 기근, 갈등.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잊을 수도 있다. 우리 선생님들이 우리를 무시할 수도 있다. 우리 형제자매가 우리를 부끄럽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도 속에서 우리가 닿을 수 있는 분, 바다를 지으신 분이 계시다.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 옆을 돌아보라. 응원하고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결승선 너머를 보라. 박수를 쳐 주고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외야석에서 우리 이름을 소리 높여 외치는 그분의 음성을 들어보라. 계속 달리기에는 너무 지쳐 있는가? 하나님께서 안고 가신다. 계속 싸우기에는 너무 낙담 했는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 하나님께 달력이 있다면 우리 생일에 동그라미가 쳐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승용차를 운전하신다면 우리 이름을 새긴 스티커를 달고 다니실 것이다. 하늘나라에 나무가 있다면 거기에 우리 이름을 새겨 두셨을 것이다. 하나님께 문신이 새겨져 있고 그 문신의 내용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사 49:16) ➤로마서 8장32절을 보세요. “32.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 아들을 내어주신 그 사랑으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제 이런 질문을 묻고 싶습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으리요?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 35)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그 은혜를 우리가 입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수없이 많은 적들이 우리를 해하려고 할 때에도,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지난주에도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위기 가운데 있다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손길을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회개의 운동에서부터 한국 교회의 부흥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처럼, 1974년 빌리 그래함 집회를 기점으로 일어났던 성령운동처럼, 새로운 부흥의 역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만나교회가 그 중심에서 함께 서려고 합니다. 그동안 교회가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를 좋아하고, 교만으로 인하여 딴 길로 가며 영향력과 탁월설을 잃어버렸다면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부흥의 파도를 소망하라!” 우리 한국 교회는 70년대 빌리 그래함 집회를 기점으로 전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80년대는 조용기 목사님을 필두로 한 성령사역이 강하게 역사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삶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변해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역사가 증명되어야 합니다. 이 시점에서 “목적이 이끄는 교회”와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을 쓴 릭 워렌 목사님의 출현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한국 교회에 던져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책을 통해 교회의 모습과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현재 세계 교회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릭 워렌 목사가 엑스폴로 74년 집회와 순복음 교회를 바라보며 도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사역을 이어가는 전도자로서의 계승자라는 사실입니다. 누구나가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라면 함께 모여 기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는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 있고, 영향력을 상실한 채 힘을 잃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이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땅위에 강력한 영향력을 세우는 교회로 말입니다. 3. “엘로힘 이레”의 하나님! 에벤에셀의 은혜와 임마누엘의 은혜는 우리에게 확신을 심어 줍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되리라는 믿음을 말입니다. 미래에 대한 감사의 고백보다 더 큰 믿음이 어디 있을까요? 미래의 삶을 감사하는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기쁨이 어디 있을까요? 우리의 삶에 기대감이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우리의 미래를 확신하며 감사하는 은혜입니다. ➤창세기 22장14절입니다. “14 아브라함이 그곳의 이름을 {창조주}이레라 하였으므로 이 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창조주}의 산에서 그것을 보리라, 하느니라.” 신앙의 가장 높은 경지는 “감사”입니다. 감사는 사단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감사하는 사람 앞에서 사단은 어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반대로 이 감사를 앗아가는 최대의 무기가 “염려”입니다. 특별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염려들 말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매튜 헨리 박사는, “감사하는 사람은 진흙 속에서 살면서도 그것을 은혜로 안다. 그 이유는 보석은 진흙 속에서도 보석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1-34절에서,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혹은,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혹은,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나니)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33.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이 자기 것들을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악은 그 날에 족하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4-5절입니다. “4.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은 선하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거부할 것이 하나도 없나니 5.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히 구별되었느니라.” 감사하지 못할 일이 생기면 범사에 감사하라 하신 말씀으로 푸시고, 감사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해지면 기도로 해결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며 순종하는 자에게는 여호와이레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엘로힘이레(שבעה ימים אלוהים)의 감사는 아브라함의 순종이 없었다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주신 그 약속의 보증이 이삭이 아닙니까? 이삭이 없다면 어떻게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자손이 번성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 유일한 약속의 보증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언뜻 하나님의 약속을 파기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개가 이 부분에서 신앙적인 걸림돌에 넘어집니다. 누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부인합니까? 알고 있습니다.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부분적인 순종을 하려고 합니다. 부분적인 신뢰를 하려고 합니다. “내가 이해하고, 용납되는 한도 내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준비하고, 내가 걱정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감사의 삶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염려가 충만합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향한 미래에 대한 감사함과 풍성함의 내용이 무엇인가? 데이비드 그레고리가 쓴 [예수님과 함께한 저녁식사]라는 책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으로부터 초청장을 받고 레스토랑에 마주 앉게 된 한 사람이 질문을 합니다. 도저히 예수님임을 확신할 수 없기에, “당신이 예수님 이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와인을 물로 바꿀 수 있습니까?”라고 하지요. 예수님은 너무나 쉽게 대답을 하십니다. “물론이지요.” 그리고는 예수님은 웨이터를 불렀습니다. “이리와 보세요. 이 사람이 와인 대신 물을 원하는 군요. 바꿔주시겠어요?” 상당히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때로 쓸데없는 것에서 기적을 구하고, 표적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기사와 표적은 아무리 보여줘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했던 사람들도 결국은 십자가 아래서 다 도망을 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사랑, 주님을 향한 고백, 감사의 내용은 기사와 이적이 아닙니다.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아니면 감사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지금 내 앞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인도하실 그 기대 때문에 나오는 감사 말입니다. 그 풍성하신 은혜를 생각하면,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지금도 함께 하신 은혜를 생각하면 터져 나오는 그 감사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제물로 드릴 때, 수양이 준비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을 향해 가는 그 길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그 산을 사흘이나 걸려서 갔으니, 얼마나 마음의 고민이 되었겠습니까? 하지만 순종하며 그 산에 올랐을 때, 그는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모리아 산을 피해갔더라면, 결단코 창조주이레의 복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 풍성한 은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큰 은혜를 아는 자들은 씨앗을 뿌린다. 아주 중요한 사실은 이 은혜를 아는 자들은 삶에서 은혜의 씨앗을 뿌린다는 사실입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은 감사의 흔적이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사의 씨앗과 흔적들을 다 계산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감사와 당신의 고백이 하늘나라에 정확하게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오. 감사를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여기저기에 그 감사의 향기를 남기고 살아갑니다. 여기저기에 열매를 맺도록 감사의 씨앗을 뿌리고 살아갑니다. 현재 미국에 있는 가장 유명한 교회 중에 하나가 레이크 우드 교회입니다. 현재 프로 농구팀이 쓰던 구장을 사들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3만 명 이상이 들어가는 아주 커다란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처음 건축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그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스페인 교회에서도 똑같이 건축을 추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주일 이 교회의 목사님은 건축 특별헌금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모아진 돈을 자신의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페인 교회의 건축을 위해 드렸습니다. 놀라운 일은 오래지 않아 레이크 우드 교회도 건축을 완공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일이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광주의 어떤 교회는 건축을 하면서 자신의 교단과 관계가 없는 한 작은 교회를 위해 헌금을 하고 교회를 세워주었다고 합니다. 역시 하나님은 그 교회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번 맥추 감사를 드리면서 저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교회를 건축하며 많은 돈이 필요하지만 먼저 더 필요한 사람에게 씨를 뿌리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큰 은혜를 입은 자들이 작은 은혜를 뿌리는 교회 말입니다.” 사실 저는 우리 교회의 리모델링 공사를 하면서 감사하기도 했지만, 우리만의 기쁨이 될 까봐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 체육인들의 모임에서, 현재 대표팀의 기술위원장으로 있는 이영무 목사님을 통해, 현재 태릉선수촌에서 대표선수들이 예배를 하는 장소가 냉난방이 안 되는 아주 낡은 장소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게다가 종교적 편파성을 띠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교회만 지원할 수 없는 사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들어온 생각은 “우리도 헌금을 하며 어려운 때이지만 기도하는 선수들을 위해,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탁월한 선수들이 되기 위해 우리가 그 교회를 새롭게 단장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언 11장 24-25절의 말씀을 보세요. ➤“24. 흩을지라도 여전히 불어나는 일이 있고 지나치게 아낄지라도 가난에 이르는 일이 있느니라. 25. 후하게 주는 혼은 기름지게 되며 물을 대는 자는 자기도 물을 받으리라.” 특별한 씨앗을 뿌리면 특별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선행을 기록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들 선한 일들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도행전 10장 4절을 보세요. 이방인으로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성령을 체험한 고넬료의 가정을 말입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우리가 받은 은혜로 인하여 누군가에서 선행을 베풀 때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삶에 에벤에셀의 고백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임마누엘의 신앙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창조주 이레의 기대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감사의 씨앗을 많이 뿌리십시오. 하나님이 그 감사의 고백을 기뻐 받으십니다. 당신의 감사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여러분은 어떤 은혜의 씨앗을 뿌리시겠습니까? 그 씨앗은 썩어 없어지는 것 같지만 반드시 여러분의 삶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영적 투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영적 투자와 영적인 씨를 뿌리십니까? 감사절 때만 감사하지 말고 매일매일 순간순간 감사하는 일에 여러분 삶에 은혜의 씨를 뿌리는 일들이 있기를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