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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BC 450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공자의 언행록이다. 공자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과 제후와의 문답 등을 기록했다. ‘논어’는 어록이라는 뜻이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말과 행동이 약 500개에 이르는 문장으로 묘사되어 있다. 「학이편(學而篇)」에서 「요왈편(堯曰篇)」까지 2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으냐.”
너무 유명한 말이라 누구든 한 번쯤은 이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논어』를 펼치면 맨 처음에 나오는 문장이다. 전체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하기를,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으냐.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으냐.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가 아니겠느냐.”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이것은 학문의 즐거움을 강조한 구절이다. 이 가운데 우리는 ‘친구’에 관련된 구절만 즐겨 차용해 사용한다.
많은 중국의 고전 가운데서도 특히 『논어』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이 많이 들어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문장도 널리 인용된다.
“교묘하게 꾸민 말과 곱게 꾸민 얼굴에는 어진 덕이 없다.”
(巧言令色, 鮮矣仁. 교언영색, 선의인.)
“잘못을 알았으면 솔직하게 고쳐야 한다.”
(過則勿憚改. 과즉물탄개.)
이러한 말들은 모두 공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논어』에는 다음과 같이 공자의 제자가 한 말을 기록한 것도 있다.
“증자(曾子)각주1) 가 말하기를, 나는 매일 세 가지로 내 몸을 반성한다.” (曾子曰, 吾, 日三省吾身. 증자왈, 오, 일삼성오신.)
이처럼 단독형이 있는가 하면 문답형도 있다. 공자와 자공(子貢)의 문답을 살펴보자.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돈이 많아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떠합니까?”
자공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며, 돈이 많으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자공이 “『시경(詩經)』에 나오는 ‘절차탁마(切磋琢磨)’[절(切)은 칼 같은 것으로 끊는 것, 차(磋)는 줄 같은 것으로 가는 것, 탁(琢)은 정으로 쪼는 것, 마(磨)는 숫돌로 가는 것. 곧, 수양이란 끝도 없이 갈고닦는 것이라는 뜻]란 이를 두고 한 말이겠군요”라고 말하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賜, 자공의 이름)야, 비로소 함께 시를 논할 만하구나. 과거를 말하면 미래를 아는구나.”
자공은 공자의 수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말을 잘하고 재기(才氣)가 뛰어나며 상업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업가로 공자의 활동에 경제적 지원을 했다. 그런 자공이었기에 “돈이 많아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떠합니까?” 하고 물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이것을 “좋은 말이다”라고 칭찬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충고한다.
그러자 자공은 『시경』을 인용하면서 「학이편」의 서두를 장식하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으냐!”라는 구절을 실천하려는 자세를 드러낸다. 리얼리스트인 자공다운 발상으로 시작되는 스승과 제자의 대화가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온다.
『논어』의 문장은 단독형이건 문답형이건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압축되어 있다. 그 때문에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경우도 있지만, 신중하게 읽어 가다 보면 그 압축된 표현이 오히려 매력임을 알 수 있다. 『논어』가 오랜 세월이 흘러도 고전으로서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문장의 매력 때문일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정치를 도덕적으로 한다면, 비유컨대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고, 여러 별들이 이를 중심으로 도는 것과 같다”고 했다.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 而重星共之. 자왈, 위정이덕, 비여북신, 거기소, 이중성공지.)
「위정편」은 이렇게 시작된다. 여기 나오는 ‘위정’이란 말에서 ‘위정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논어』 24편의 제목은 모두 이런 식으로 붙여진 것이다. 이것은 『논어』가 서로 관련성이 없는 짧은 글들을 모아서 만들어진 것임을 말해 준다.
「위정편」에는 공자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유명한 장이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뜻을 확고히 세웠으며, 마흔에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게 되었고, 쉰에는 천명을 알게 되었다. 예순에는 사물의 이치를 절로 알게 되었고, 일흔에는 마음이 가는 대로 해도 순리에 어긋남이 없게 되었다”고 했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자왈, 오십유오이지우학, 삼십이립, 사십이불혹, 오십이지천명, 육십이이순, 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
공자는 모든 계급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상태를 현실 정치에 실현하려 애썼다. 그리고 50대 중반에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노(魯)나라를 떠나 천하를 편력했다. 그러나 그를 등용해 주는 나라는 없었다. 공자의 이상은 비현실적이라 하여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제자 중에도 그런 생각을 가진 자가 있었다. 공자 자신도 내심 초조감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공자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실패한 정치사상가였고, 공자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공자는 70세가 다 되어 고국 노나라로 돌아와 후진 양성과 고전 정리에 힘을 기울였다. 그런 자기의 일생을 되돌아보고, 그 내면의 역사를 말한 것이 바로 이 구절이다. 우리가 40세를 ‘불혹(不惑)’이라 하고, 60세를 ‘이순(耳順)’이라 하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에도 널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몇 구절을 아래에 소개한다.
“옛것을 알고 새로운 것을 익혀 나가면 스승이 될 수 있다.”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자기가 모실 귀신이 아닌데 모시는 것은 아첨이요, 의를 보고도 나서지 않으면 용기가 없다 할 것이다.”
(非其鬼而祭之,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 비기귀이제지, 첨야, 견의불위, 무용야.)
예(禮)에 관련된 내용이 많다. 예란 예의나 예절이라고 할 때의 예이다.
국가적 차원의 외교, 내정과 개인 차원의 사회생활, 가정생활 등 모든 것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중앙 정권이라 할 수 있는 주(周)나라 왕조가 몰락하여 유력한 제후가 패권을 다투는 춘추시대 말기로서 온 세상에 하극상(下剋上)이 만연했다. 곧, 질서가 무너진 것이다.
공자는 계씨(季氏, 노나라의 대부)를 비판하여 이렇게 말했다.
“뜰에서 팔일(八佾)을 추게 하다니, 이런 무례를 범할진대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는가?”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무어정, 시가인야, 숙불가인야.)
팔일이란 8×8, 곧 64명이 추는 천자(주 왕실)의 무악이다. 제후의 무악에서는 6×6의 36명이 춤을 추고, 가신의 무악에서는 4×4의 16명이 춤을 춘다. 그 무렵에는 이것이 예였다. 그런데 일개 대부에 지나지 않는 계씨가 팔일의 무악을 즐겼다는 것은 자신 위에 있는 왕실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다. 공자는 예를 무너뜨린 그 행위를 비판한 것이다.
처음의 7장은 모두 인(仁)에 관한 것이다. 공자가 가장 힘주어 강조한 것으로, 인간이 갖추어야 할 가장 높은 덕목이 바로 인이다.
『논어』에서 인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곳은 모두 60장으로 전체의 1할에 해당하는데, 어떤 줄기를 세우고 개념적인 정의를 내린 것은 아니다. 다만, 평소의 생활과 인간관계, 행동거지에서 인을 체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이란 자신의 눈에 비친 지배층의 부패와 알력과 대치되는 것으로, 공자가 내세운 치세의 슬로건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을 향해 무한히 노력하고 전진하는 것이 백성에 대한 위정자 또는 군자의 책임을 다하는 일이라고 공자는 말하고 있다.
“군자가 인의 길을 버리고 어찌 이름을 이루겠는가? 군자는 밥 먹는 동안에도 인의 길을 어기지 않고, 아무리 다급해도 반드시 인에 의지하고, 자빠졌을 때도 인에 의지해야 한다.” (君子去仁, 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군자거인, 오호성명, 군자무종식지간위인, 조차필어시, 전패필어시.)
덧붙여서 아주 짧은 시간을 ‘조차전패(造次顚沛)’(엎어지고 자빠지는 급한 순간, 곧 매우 위급하고 중대한 순간을 이르는 말)라고 하는데, 이 말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 밖에 유명한 몇 구절을 들어 본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朝聞道, 夕死可矣. 조문도, 석사가의.)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德不孤, 必有隣. 덕불고, 필유린.)
내용의 대부분은 인물평이다.
공자는 공야장(公冶長)각주2) 을 일러, “사위로 삼을 만하다. 비록 감옥에 들어간 적이 있지만, 그것은 그의 죄가 아니다”라며 자기 딸을 주었다. (子謂公冶長, “可妻也. 雖在縲絏之中, 非其罪也.” 以其子妻之. 자위공야장, 가처야. 수재누설지중, 비기죄야. 이기자처지.)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서는 이 밖에 전하는 바가 없지만, 인간적인 체취가 물씬 풍겨나는 이야기이다.
다음은 자공과 공자의 안회에 대한 평이다.
공자가 자공에게 말했다.
“너와 안회 중 누가 나으냐?”
자공이 대답했다.
“제가 어찌 안회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데,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그러하다. 나와 너는 안회를 따를 수 없다.”
(子謂子貢曰 “女與回也, 孰愈.” 對曰 “賜也, 何敢望回.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女, 弗如也.” 자위자공왈, 여여회야, 숙유. 대왈, 사야, 하감망회. 회야문일이지십, 사야문일이지이. 자왈, 불여야. 오여녀, 불여야.)
안회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고 하니, 자공과는 대조적인 인물이라 할 것이다.
“어질도다, 안회여. 대그릇 한 공기 밥과 표주박 한 잔의 물로 누추한 거리에 살다 보면 다들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현재, 회야. 일단사, 일표음, 재누항, 인불감기우, 회야불개기락. 현재, 회야.)
“사람이 지켜야 할 의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하면 지혜롭다 할 수 있다.”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무민지의, 경귀신이원지, 가위지의.)
우리는 자칫 인간을 넘어선 초월적인 힘에 의존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러나 먼저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지식이라고 공자는 말하고 있다.
“심하도다, 나의 노쇠함이여! 오래되노라, 내가 주공을 꿈에 다시 못 본 것이.” (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夢見周公. 심의, 오쇠야, 구의, 오불복몽견주공.)
주공은 주나라의 건국 공신으로, 공자가 늘 이상적인 정치가로 생각했던 인물이다.
“변변치 못한 예물이라도 가지고 와서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에게 내 일찍이 가르침을 거절한 적이 없다.”
(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 자행속수이상, 오미상무회언.)
‘속수(束脩)’는 가르침을 구하는 자가 스승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건네는 예물로, 건육(乾肉, 육포)이나 건어물을 가리킨다. 예의 표현 가운데서도 가장 가벼운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입학금 정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발하지 않으면 이끌어 주지 않고,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해 더듬거리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고, 하나를 가르쳐 세 가지를 알아듣지 못하는 자에게는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불분불계, 불비불발, 거일우, 불이삼우반, 즉불복야.)
우리가 흔히 쓰는 ‘계발(啓發)’이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거친 밥을 먹으며 물을 마시고, 팔을 괴어 베개로 삼아도 또한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으니, 의롭지 않은 부귀는 내게 뜬구름과 같다.”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반소사음수, 곡굉이침지, 낙역재기중의, 불의이부차귀, 어아여부운.)
앞에서 든 “어질도다, 안회여”라는 구절과 잘 어울리는 내용이다.
“공자는 괴이쩍은 것과 힘으로 하는 것, 어지러운 것,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子不語怪力亂神. 자불어괴력난신.)
이것은 공자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한 것이다.
제3장부터 제7장까지는 증자의 말로 되어 있고, 제18장부터 제21장까지는 요(堯), 순(舜), 우(禹)를 찬미하는 공자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
하루에 3가지로 자신을 반성했다는 증자였던 만큼, 그 말은 너무도 당당하다.
증자가 말했다.
“선비는 너그럽고 뜻이 굳건해야 하니, 그것은 임무가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으니 어찌 무겁지 않겠는가?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니, 어찌 멀다 하지 않을쏜가?”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증자왈, 사불가이불홍의, 임중이도원, 인이위기임, 불역중호, 사이후이, 불역원호.)
공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시로 감흥을 일으키고, 예로 규범을 세우며, 음악으로 정서를 완성시킨다.”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흥어시, 입어례, 성어악.)
공자는 이 3가지를 군자의 필수 교양으로 삼았으니 그의 교실이 어떤 풍경이었을지 상상해 볼 수 있다. 공자는 그 자신이 연주가이기도 하여, 음악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제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에는 고전음악을 듣고 너무 감동한 나머지 음식 맛도 잊어버렸다고 할 정도였다.
“백성은 따라오게 할 수는 있어도, 알게 할 수는 없다.”
(民, 可使由之, 不可使知之. 민, 가사유지, 불가사지지.)
공자가 냇가에서 말하기를, “지나가는 것은 이와 같으니, 밤낮 쉼이 없구나”라고 했다. (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자재천상왈, 서자여사부, 불사주야.)
“젊은이가 두렵다. 앞날이 지금만 못하리라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사오십 세가 되어서도 이름이 없다면, 그런 사람들은 무서워할 게 없다.”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후생가외, 언지내자지불여금야, 사십오십이무문언, 사역부족외야이.)
이 편은 다른 편들과는 달리 공자의 말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일상적인 행동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으로 당시의 예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었는지 알 수 있다. 일설에 따르면 그 내용은 공자에 대한 것보다는 예의 일반적인 규정을 말한 부분이 더 많다고 한다.
하나의 장으로 이루어졌지만 편의상 27개 절로 나누어 읽기도 한다.
공자가 “유[由, 자로(子路)각주3) ]는 어찌하여 거문고를 우리 집에서 연주하는 것이냐?”라고 말했다. 이에 제자들이 자로를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 공자는 “자로의 실력은 당(堂)에는 오를 만하지만, 실(室)에는 들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子曰, 由之瑟, 奚爲於丘之門. 門人不敬子路. 子曰, 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 자왈, 유지슬, 해위어구지문. 문인불경자로. 자왈, 유야승당의, 미입어실야.)
자로는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는데, 힘이 세 무용에 뛰어났다.
본 편에는 공자가 자로의 성격을 두고 천수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 말대로 훗날 자로는 위나라에서 전사했다. 그런 자로였지만 음악적 소양에서는 상당한 수준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자공이 사[師, 자장(子張)각주4) ]와 상[商, 자하(子夏)각주5) ] 중에 누가 더 현명하냐고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사는 재주가 너무 지나치고, 상은 모자란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사가 더 낫습니까?”라고 물으니, 공자는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고 대답했다. (子貢, 問師與商也, 孰賢, 子曰師也過, 商也不及. 曰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 자공, 문사여상야, 숙현, 자왈사야과, 상야불급. 왈연즉사유여, 자왈, 과유불급.)
이 편의 마지막 장은 공자를 둘러싼 자로와 증석(曾晳각주6) , 증자의 아버지),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 네 사람이 자신의 포부를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논어』에서 가장 긴 장이다.
안연(안회)이 인을 묻는 것이 제1장, 중궁(仲弓)이 인을 묻는 것이 제2장, 사마우(司馬牛)가 인을 묻는 것이 제3장이다. 그 각각의 물음에 대한 공자의 대답이 주안점이며, 자로에 대한 인물평도 나온다.
공자가 말하기를 “한마디로 소송의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자로[유(由)]일 것이다. 자로는 한번 약속한 일을 미루는 법이 없다”고 했다. (子曰, 片言可以折獄者, 其由也與, 子路無宿諾. 자왈, 편언가이절옥자, 기유야여, 자로무숙낙.)
성격이 급하기는 하지만, 행동력이나 결단력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자로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강인하고, 과감하고, 질박하고 꾸밈이 없으며, 입이 무거우면 인에 가깝다”고 했다.
(子曰, 剛毅木訥, 近仁. 자왈, 강의목눌, 근인.)
공자가 말하기를 “가르치지 않은 백성으로 하여금 싸우게 하는 것은 백성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했다.
(子曰, 以不敎民戰, 是謂棄之. 자왈, 이불교민전, 시위기지.)
공자가 방문했던 나라의 군주들이나 그 신하들과의 문답이 많고, 역사적 인물을 둘러싼 평가도 있다. 공자에 대한 은자의 평가도 눈길을 끈다.
“인을 행함에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아야 한다.”
(當仁, 不讓於師. 당인, 불양어사.)
“가르침에는 부류가 없다.”
(有敎無類. 유교무류.)
“문장이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辭, 達而已矣. 사, 달이이의.)
공자의 말이 모두 ‘공자 왈[孔子曰, 다른 편은 자 왈(子曰)]’로 정리되어 있는 점과 삼계(三戒), 삼사(三思), 구사(九思)라는 식으로 숫자로 정리한 말이 나온다는 점이 다른 편과 다르다.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느냐.”
(割鷄焉用牛刀. 할계언용우도.)
공자가 무성(武城)이라는 작은 마을에 들어가니 여기저기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그 마을을 다스리는 제자 자유(子游)각주7) 에게 이런 마을(닭)을 다스리는 데 이렇게 화려한 음악(소 잡는 칼)이 과연 필요하냐고 농담을 던진 것이다. 그 말에 자유는 즉각 반론을 펼쳤다. 그러자 공자는 제자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자신의 말을 거두어들였다.
“길거리에서 들은 말을 길거리에서 하는 것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
(道聽而塗說, 德之棄也. 도청이도설, 덕지기야.)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힘들다.”
(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유녀자여소인, 위난양야.)
‘자 왈’, ‘공자 왈’로 시작하는 장이 없고, 공자의 행동이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기술이 많다. 또한 은자와 공자를 대비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이 편은 모두 제자들이 한 말이다.
제1장은 유가가 성인으로 추앙하는 요의 말이고, 제2장과 제3장은 누가 한 말인지 알 수 없다. 제4장은 자장과 공자의 문답이며, 제5장은 공자의 말이다. 제1~3장을 하나로 묶는 분류 방식도 있다. 이 편은 『논어』를 20편으로 구성하기 위해 추가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한 제자가 공자(BC 552~BC 479)의 말을 잊지 않으려고 허리띠에 적어 두었다는 구절이 『논어』에 나온다. 이처럼 『논어』는 그 제자들이 공자를 둘러싼 말과 일들을 정리해서 기록한 책이다. 그렇게 정리된 시기는 한(漢)나라 초기인 BC 2세기라고 한다. 때문에 『논어』는 체계를 갖추지 못했고, 내용에도 일관성이 없다. 『논어』 가운데서도 공자가 생전에 힘주어 말하고, 후세 사람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긴 말을 하나 꼽으라면, 당연히 그것은 ‘인(仁)각주1) ’이다. 인은 보편적인 인간애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 공자는 그것을 달리 군자의 덕이라고도 말했다. 중국의 문화혁명기에 공자가 비판의 대상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