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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례(家家禮)
집안에 따라 저마다 다른 그 집안 고유(固有)의 풍습(風習), 예법(禮法)을 말한다.
家 : 집 가(宀/7)
家 : 집 가(宀/7)
禮 : 예도 례/예(示/13)
동일한 의례가 집안이나 지역, 학파에 따라 달리 행해지는 방식을 이르는 말이다.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가가례(家家禮)의 시작은 아마도 현종대(顯宗代)에 일어난 기해예송(己亥禮訟, 1659)과 갑인예송(甲寅禮訟, 1674)일 것이다. 이 예송은 효종(孝宗)의 계모인 장렬왕후(莊烈王后)가 효종과 효종의 비(妃)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喪)에 입을 복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게 되고, 이것이 정치적인 당쟁으로까지 이어진 사건이다.
문제는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일찍 죽자 둘째 아들인 효종이 왕위를 이은 데에 있었다. 인조(仁祖)의 대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국가의 왕통(王統)을 이어 주손이 되지만, 가통(家統)으로 보면 둘째 아들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비롯한 서인(西人)들은 효종이 비록 대통을 이었지만 인조의 차자(次子)이므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라 장렬왕후가 기년복(朞年服: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허목(許穆)과 윤휴(尹鑴) 등은 효종이 대통을 이은 특수성이 있으므로 효종을 인조의 장자(長子)로 간주하여 장렬왕후가 참최복(斬衰服: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서인이 실세였기에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기년복을 입는다.
15년이 지나 인선왕후 장씨가 죽자 장렬왕후의 복제가 다시 거론되었다. 서인들은 효종의 상에 준거하여 둘째 며느리에 해당하는 대공복(大功服: 9월)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영남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소(疏)를 올려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송시열이 효종의 사례에 따랐다고 하자 현종은 선왕을 체이부정(體而不正)으로 규정한 것은 박한 처사라며 국제(國制)에 따라 기년복을 입도록 명하여 시비는 종결되었다.
이 예송은 예(禮)의 적용을 왕과 백성에게 동일하게 하느냐 아니면 다르게 하느냐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남인은 대통을 이었으면 장자로 봐야 한다고 해석하였고, 서인은 왕실이라 하더라도 종법(宗法)에 따라 차자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세기 중·후반에 이러한 논쟁이 정치적인 문제로 확산될 정도로 예의 해석이 달랐기에 가가례의 조짐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17~18세기에 고례(古禮)를 저본으로 가례(家禮)를 재해석해 약 200종의 예서가 출간된 것을 보면 그만큼 이견의 여지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는 '가례'를 철저하게 보완한 것도 있지만, 조선의 실정에 맞게 재해석한 부분도 많다. 따라서 학파, 집안, 지역에 따라 다른 예법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내용
의례의 행례(行禮) 방식은 그 본질보다 그것을 구성하는 제 요소를 둘러싼 신분·사회적 질서체계와 의식의 적합성, 환경과 연관되어 있다. 의례의 행례 방식은 예서라는 규범에 따르지만, '가례' 등 대부분의 예서가 행례의 기본 원칙만 기술하고 세부 항목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어 행례 집단이나 지역, 학파에 따라 다른 행례 방식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현장에서 발생하는 변례(變禮)에 대한 대응은 집단을 중심으로 모색 및 설정되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다른 예설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관습이 되고 전통이 되면서 가가례로 고착되어 버린다.
이러한 가가례는 의례 전체의 맥락이 아니라 예서에서 규정하지 않은 세부적인 부분에서 나타난다. 잘 알려진 가가례는 첫째, 제사의 봉사대상에 대한 가가례이다. '가례'를 비롯한 예서에서는 기제사의 봉사대상에 해당하는 조상만 모시는 단설(單設)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집안에 따라서 봉사대상의 배우자를 함께 모시는 합설(合設)을 하는 사례가 많았다. 퇴계(退溪)나 율곡(栗谷) 역시 합설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 상차림의 가가례이다. 상차림은 가문별로 가장 의견이 분분한 사항이다. 이는 예서에서 과일은 과(果), 고기는 육(肉), 생선은 어(魚) 정도로만 표시하고, 제물의 종류와 숫자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아 나타난 현상이다. 이에 따라 노론에서는 홍동백서(紅東白西), 남인에서는 조율이시(棗栗梨柹)라고 의도적인 구분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과일의 숫자를 홀수, 짝수로 정하는 이유는 과일의 생장 환경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률적으로 적용하면서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생선은 숭어와 고등어, 문어를 쓰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의 차이가 생겨나고 있다. 이는 혼례(婚禮)나 흉제(凶祭)의 상차림에서도 나타난다.
그 이유는 예서에서 과일이나 생선, 고기의 종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역마다 지역 산물을 중심으로 준비하다 보니, 지역의 여건에 따라 다른 종류를 사용하면서 차이가 나타난다.
셋째, 상례에서 매장할 때 입관 여부의 가가례이다. 이는 매장할 때 관을 해체하고 시신만을 매장하느냐, 입관한 채로 매장하느냐의 차이로 풍수와도 관련이 있다.
넷째, 헌작 방법의 가가례이다. 여기에는 '가례'나 '가례의절(家禮儀節)' 등의 예서에서 규정한 방법이 있고, '국조오례의'에서 규정한 방법이 있다.
'가례'에서 규정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주인이 올라가 신위 앞으로 나아간다. 그 다음에 집사자 한 명이 술 주전자를 들고 그 오른쪽(동쪽)에 선다. 주인은 진홀(搢笏)하고 직접 고위의 잔을 받들고 향탁 앞에서 동향하여 선다. 우집사자가 맞은편에서 서향하여 잔에 술을 따른다. 주인이 받들어 원래의 자리에 드린다. 그런 다음 홀을 들고 신위 앞 향탁 앞에 북향하여 선다. 집사자가 고위의 잔을 받들고 주인의 왼쪽에 선다. 주인이 진홀하고 꿇어앉으면 집사자도 같이 꿇어앉는다. 주인이 집사자로부터 고위의 잔을 받아 오른손으로 술잔을 들어 세 번으로 나누어 조금씩 모사에 좨주(祭酒)한다. 잔을 다시 집사자에게 주면 집사자가 원래의 자리에 되돌린다.
'국조오례의'의 헌작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주인이 올라와 신위 앞 향탁 앞에 나아가 꿇어 앉으면 집사자가 잔을 가져다가 술을 떠내어 주인에게 준다. 주인이 집사자로부터 잔을 받아 받들었다가 집사자에게 주면 집사자가 잔을 원래의 자리에 올린다. 주인은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조금 물러나 꿇어앉는다.
다섯째, 계반개(啓飯蓋) 시기의 가가례이다. '가례'나 사례편람'(四禮便覽)' 등에는 초헌에서 메의 뚜껑을 열고 합문(闔門)에서 삽시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삽시정저(插匙正箸)라는 말이 생겼다. 그러나 합문할 때 메의 뚜껑을 열고 삽시하는 사례도 많아 계반삽시(啓飯插匙)라는 용어도 탄생하였다.
이 외에도 길제를 지낼 때 주부의 예복, 혼례의 함 싸는 방법과 받는 방법, 혼례복, 초례상의 상차림,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갈 때 짚불을 넘거나 바가지를 깨는 일, 노적섬 밟기 등 세부적인 부분은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많다. 이에 따라 '남의 집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도랑 건너면 집사하지 않는다' 등의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가가례에 따른 예론은 분분했던 것 같다.
가가례는 기본적으로 예학의 범주에 속한다. 예학파는 이미 그 자체로서 분파 형성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성리학의 분파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기본적으로는 퇴계와 율곡의 문인들이 퇴계학파(영남학파)와 율곡학파(기호학파)로 분파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예학 역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정치적인 분파와도 관련이 있다.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 등이 그것이다. 예학에서는 노론과 남인을 구분하는 것이 위의 학파 구분과 상통한다. 그러나 하나의 예학 계통에 있는 퇴계 선생의 제사상 차림과 학봉 선생의 제사상 차림이 다르기도 하여, 가가례는 일정한 원칙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지역사례
가가례의 지역 사례는 무척 많아 대표적인 몇 가지만 제시한다. 경상북도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에서는 적(炙)을 하나의 적틀에 모두 쌓는 도적(都炙)을 쓴다. 그러나 기호학파에서는 '적'을 따로따로 차리는 산적(散炙)을 쓴다.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에서는 생선으로 숭어를 차리지만, 안동 지역에서는 고등어와 문어를 차리는 차이가 있다. 영남학파에서는 대부분 '국조오례의' 식 헌작(獻爵)을 하고, 기호학파에서는 '가례'식 헌작을 한다.
안동 지역에서는 길제(吉祭) 때 주부가 혼례복을 예복으로 입는다. 경기도와 충청도 등에서는 헌작할 때젓가락을 시접에 세 번 구르는 전저(奠箸)를 하지만 영남지역에서는 하지 않는다.
특징 및 의의
가가례의 특징은 세부적인 부분에 한정된다. 이는 예서가 세부적인 행례 방법을 제시하지 않아 집안마다 다른 실천 방법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사실 가가례는 전통의 고수라는 미명 아래 원래의 규정을 찾아 바로잡으려는 노력보다 왜곡된 사실을 그대로 전승하다 보니 변이형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적용기준 역시 매번 달라지다 보니 변형된 가가례는 더욱 고착되었다. 이러한 '가가례'는 예서와의 차이에 대한 시비를 무마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경기도 용인시 가가례(家家禮)
정의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집안에 따라 달리 행하는 제사의 예법을 말한다.
개설
집안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절차와 예법이 다르다고 해서 쓰이는 말인 가가례는, 중국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가례(家禮)에서 쓴 예(禮)를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하는가와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조선시대에 예론의 해석 방법은 크게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로 나누어졌다. 기호학파는 '가례'의 규정에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형식을 중요시하였고, 영남학파는 '가례'의 규정을 따르면서도 어느 정도 상황에 따른 변화를 인정하였다. 그 결과 예의 해석에 많은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처럼 가가례는 예의 해석 차이에서 발생하였음에도 상차림이나 제수(祭需)의 사용 방법, 의례의 절차 등 실천적 과정의 차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같은 집안의 형제 사이에도 제수의 진설 방법 등에서 차이가 발생하면 가가례라는 용어로 무마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상의 차이는 의례 절차와 방법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결과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 번의 실수나 조그만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돌이킬 수 없는 변형으로 발전되고, 이를 정당화하는 방법이 가가례라는 웃지 못할 현상으로까지 발달되어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예송 논쟁
가가례는 예론(禮論)의 해석 차이에서 발생한 조선 중기의 예송(禮訟) 논쟁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659년의 기해예송(己亥禮訟)과 1674년의 갑인예송(甲寅禮訟)이 그것이다. 기해예송은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효종의 상(喪)에 어떤 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논란이었다.
발단은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가 왕통을 잇지 못하고 일찍 죽자 둘째 아들인 효종이 세자로 책봉되고 왕위를 이은 데에 있었다. 즉 왕통으로 보면 인조의 계를 이었으나, 가통으로 보면 효종이 둘째 아들로서 장자가 아니라는 것에 시빗거리가 있었다.
당시의 서인학자들은 효종을 인조의 장자가 아닌 차자로 간주하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라 기년복(朞年服, 부장기 1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학자들은 제왕의 종통이라는 특수성을 강조하여 효종을 장자로 간주해 참최복(斬衰服, 3년복)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서인이 실세였기 때문에 자의대비의 복은 송시열측의 주장대로 일년복으로 시행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갑인예송은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상에 자의대비가 입을 복제에 대하여 고례에 근거를 둔 서인들의 주장에 따라 대공복(大功服)인 9개월로 정하자, 영남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소를 올려 일년복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현종은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선왕을 체이부정설(體而不正說)로 규정하는 것은 박한 처사이기 때문에 국제(國制)에 따라 일년복으로 하도록 명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예송 논쟁은 조선시대 예학의 큰 흐름인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라는 양대 학파로 연원을 분명히 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나, 후기로 내려오면서 제사의 상차림에서 가장 큰 시빗거리로 변화되었다.
그중에서도 조율이시(棗栗梨柿)나 홍동백서(紅東白西) 등 과일을 놓는 위치가 집안마다 제각각 달랐기 때문에, 이러한 상차림이나 진행 절차 등의 실천 방법에서 벌어지는 차이를 가가례라는 말로 정당화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특징
용인 지역 가가례는 제사 상차림의 경우 조율이시, 조율시이, 홍동백서 등이 고르게 나타나고 있다. 제사의 절차에서는 잔을 올릴 때 젓가락을 시접(匙楪)에 세 번 굴리는 전저(奠箸)의 관행이 보편화되어 있다. 또한 예서(禮書)에서 정한 횟수보다 절하는 횟수가 많기도 하고, 아헌 때 계반삽시(啓飯揷匙)를 행하는 등의 가가례가 보인다.
경상북도 안동시 가가례(家家禮)
정의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나타나는 제례 방식과 내용의 다양성.
개설
경상북도 안동 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제사 방식, 곧 가가례(家家禮)가 존재한다. 이러한 경향은 제물과 진설에서 주로 나타난다.
먼저 갱(羹)을 살펴보면, 안동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콩나물과 무로 끓인 갱이 보편적이다. 그런데 현지 32개 종가를 대상으로 사례 조사를 한 결과, 이황 종가를 비롯한 5개 종가에서는 쇠고기와 무를 넣은 갱을 제물로 올린다. 다음으로 어류·육류·조류의 제물을 적틀에 괴는 도적에서는 익히지 않은 생육(生肉)이나 숙육(熟肉)을 올린다. 32개 종가의 도적을 조사해 본 결과 생육이 17개 종가, 숙육이 15개 종가로 집계되었다.
설위방식
진설의 대표적 가가례는 설위방식(設位方式)이다. 즉 제사를 지낼 때 기일을 맞은 조상만을 대상으로 하는지, 배우자를 함께 모시는지에 따라 방식이 달라진다. 이에 대해 안동 지역 50개 종가를 대상으로 자료를 수집한 결과, 12개 종가에서 해당 조상만을 모시는 단설(單設)을 따르고 있었으며, 나머지 38개 종가에서는 합설(合設)이라고 해서 부부의 신주를 제사상에 함께 안치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사례
조상이 각별히 당부해둔 유계(遺戒)가 있거나, 생전에 즐기던 음식 등을 제물로 차리게 됨으로써 가가례가 형성되는 경우도 있다. 이황 종가에서는 검약을 강조한 선생의 뜻을 기려 과일을 높이 괴지 않는가 하면 삼색나물도 별도의 제기에 각각 차리지 않고 한 그릇에 모아서 담는다.
또 기름에 튀기는 유밀과(油密果)는 사치스러우므로 제사상에 차리지 말라는 선생의 유계를 받들어 지금도 따르고 있다. 류성룡 종가에서는 선생이 평소 즐겨 드시던 '종개'라는 기름에 튀긴 과자를 높게 괴어 제사상에 올리고 있으며, 김성일 종가 역시 선생의 기호품이었던 '생마'를 제물로 차리고 있다.
바른 예절(正禮)과 가가례(家家禮)의 오류
우리가 조상에 대한 봉제사(奉祭祀)를 정성들여 지내면서 제례(祭禮)의 뜻을 제대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예기(禮記)의 단궁편(檀弓篇)을 보면 '대저 예절이란 남에게 전할 수가 있고 남이 본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울부짖음과 몸부림치는 일에도 모두 절도가 있는 것이다(夫禮 爲可傳也 爲可繼也 故哭踊有節)'고 하였다.
중용(中庸)에도 '예의의 근본은 이치에서 나오고 이치의 근본은 하늘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하늘이 변하지 않으면 예 또한 변하지 않는다(禮之大本 出於理 理之大本 出於天 天不變 禮亦不變)'고 하였다.
또 '예절이란 이치이니 사리를 통합하여 묶은 법칙이다. 이치는 도리라 이르니 예절이란 말은 만인으로 하여금 함께 섬기게 하는 도리이다. 그러므로 예절은 나라의 법제도이다(禮者 理也 事理統結之法則也 理謂道理 言禮者 使萬事合於道理也 故禮者 國家之法制)'고 하였다.
바른 예절은 음양상생(陰陽相生)에 맞춘 진설 원칙에 따라 소목(昭穆)으로 천산(天産)은 동물인 어(魚) 육(肉) 치(雉: 궝) 등의 회(鱠: 膾)와 구이[炙]로 양수(陽羞, 양의 제물)이니 양의 방향인 동쪽에 차리고 지산(地産)은 식물인 채(菜) 곡(穀) 등의 숙채(熟菜)와 지짐이[臇]로 음수(陰羞, 음의 제물)이니 음의 방향인 서쪽에 차려야 한다.
이렇게 제상의 전후좌우가 균형이 되게 진설(進䬦)함은 역경(易經)의 중정사상(中正思想)과 중용(中庸)의 화(和, 화평)의 정신에 의거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올곧은 선비의 바른 자세로 숭조목종(崇祖睦宗)하며 부귀영화(富貴榮華)로 다복한 가정을 이루어 건강하게 오래 복록을 누리고 잘 살기를 바라는 조상들의 교훈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가가례는 집집마다의 예절이 틀린다는 것인데 집집마다 예절이 틀린다는 것은 예절이 없다는 말이 된다. 가가례로 인해 가정의례의 기본 원칙이 흐트러졌으며 오늘날 예서(禮書)도 구구각각이어서 더욱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런 것들이 가가례의 오류라고 생각된다.
가가례가 아직까지 고쳐지지 않은 까닭은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3년간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행하시던 것을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아야 효자라 할 수가 있다(三年無改於父之道可謂孝矣也)'는 구절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3년 동안 고치지 말라는 것은 마땅히 고쳐야 할 입장에 있으나 아직 고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三年無改亦謂在所當改而可以未改者耳)'고 하였다. 이 말은 섣불리 하여 불효가 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라는 경구(警句)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만약에 도리가 아니라면 어찌 3년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如其非道可待三年)'라고 한 것을 보면 '도리가 아닌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은 3년 동안 기다리지 말고 고치라는 것이다.' 이제라도 후세에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가가례를 전범(典範)이 되는 바른 예절로 올바르게 고쳐야 할 것이다.
일찍이 우리 조상들은 동방예의지국이란 명성을 세계만방에 떨쳐 예의바른 국민이라 자부하여 왔는데 지금은 국민 모두가 실천하고 후세에도 전할 수 있는 전범이 되는 예절 하나 없다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가례는 극심한 사색당쟁과 예송의 갈등으로 파생된 것이지만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께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제의편(祭儀篇)에서 말씀하시기를 "지금의 사람들은 예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 제사를 지내는 예절이 집집마다 같지 않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만약에 예절을 하나로 통일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문란하고 질서가 없어서 오랑캐의 풍속으로 되돌아갈 것이다(今俗人 多不識禮 其行祭之儀 家家不同 可笑也 若不一裁之以禮 則終不免素難無序 歸於夷虜之風矣)" 라고 한탄을 하시면서 통일된 전범을 만들 것을 희망하셨다.
천리절문(天理節文)과 인사의칙(人事儀則)에도 어긋나는 가가례를 오래 전부터 선조들이 지켜 오신 예절이라는 이유만으로 제례원칙에도 맞지 않는 것을 우직하고 고집스럽게 그대로 답습해서는 안 된다. 후세에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으려면 남에게 전할 수가 없고 남이 본받고자 하지 않는 비례(非禮)를 이론과 사리에 합당하고 남에게 전할 수가 있고 남이 본받을 수 있는 전범이 되는 바른 예절로 고쳐서 다 같이 실행하기를 제창한다.
지킬 수 있어야 전통이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때 추석날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상차림을 두고 크게 다퉜다. 끝내 차례를 모시지 못 하는 일이 벌어졌다. 진설된 차례상을 점검하던 큰아버지가 "배는 왜 안 올리느냐?"고 했다.
독촉하는 큰소리가 나자 배 한 개를 담은 접시가 상에 받쳐 들여왔다. 큰아버지는 대뜸 "왜 한 개냐"고 했고, 더 큰소리가 나자 큰어머니가 세 개 중 하나가 썩은 게 있어 빼다 보니 홀수를 맞춰야 해 하나만 올렸다고 설명했다. 큰어머니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질책하는 더 큰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얼른 중재에 나섰다. "괜찮습니다. 하나면 어떻고 둘이면 또 어떻습니까. 썩은 놈을 도려내려면 배 세 개를 모두 그만큼 도려내고 상에 올리면 되잖아요" 라며 말을 거들었다. 큰아버지는 바로 '정신 나간 소리'라고 일축하며 당장 배를 구해다 상을 올바르게 차리라고 했다.
큰아버지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아버지는 전통은 상황에 따라 변해도 된다는 주장이었다. 심지어 아버지가 절충안으로 사과와 배, 감을 모두 한 개씩만 놓자고도 했으나 큰아버지는 "차례는 정성이다. 정성을 들이지 않은 차례는 안 지낸다"며 건넌방으로 나가버렸다.
화난 아버지는 집에 가자며 따라 나서라고 엄명했다. 해가 이제 막 뜨는 동네를 벗어나며 분을 삭이지 못한 아버지는 혼잣말을 해댔다. "형편이 닿지 않으면 종이에 '배'라고 써서 올리거나 물만 떠놓고도 지내면 되는 거다. 배가 안 나는 지방에서는 상에 올리지도 않는다"고 했다.
집에 와서 아버지가 길게 설명한 과일을 상에 올리는 이유다. '조율이시(棗栗梨柿)'는 대추와 밤과 배와 감이다. 대추는 씨가 하나이므로 임금을, 밤은 한 송이에 세 톨이 들어있어 삼정승을 뜻하며 후손이 공경받는 인물로 자라기를 바람을 담아 올린다. 씨가 6개인 배는 6조 판서를 뜻해 무슨 일을 해도 잘 하기를, 감은 씨가 8개여서 8도 관찰사를 상징한다. 어느 곳에서도 제 뜻을 펴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아 그렇게 올리는 속설(俗說)이 있다. 이들 과일을 상에 올리게 된 것은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주자가례 등 모든 예서(禮書)에 올릴 제물의 구체적인 명칭이 없다. 지역 산물을 중심으로 제사상을 차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조율이시나 홍동백서 등의 근거 또한 명확하지 않다. 근대 이후 민간에서 생겨난 거다"라며 "선조들이 드시던 음식과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음식이 다르듯 제례 전통도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버지는 "큰아버지 역정은 십분 이해한다. 우리 집안이 이조판서 후손이라 배가 상했다는 말에 신경이 곤두선 거 같다"고 했다.
이어 옛 얘기를 들어 이유를 설명했다. 한 선비가 같이 공부하는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마침 제삿날이라 지켜보니 진설한 과일들의 위치가 이상했다. 선비는 '조율시이'라고 했고, 친구는 '조율이시'가 맞다고 우겼다. 판서 집안 후손은 배를, 관찰사 집안은 감을 먼저 놓는 상차림이 다른 데서 온 촌극이다. 남의 제상에 '감놔라 배놔라 한다'는 속담은 그래서 유래했다.
아버지는 집안마다 진설법이 다르다며 성어 '가가례(家家禮)'를 알려줬다. 가례(家禮)를 재해석해 약 200종의 예서가 출간된 것을 보면 그만큼 이견이 많았다. 실정에 맞게 재해석해 학파, 집안, 지역에 따라 다른 예법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예서가 행례의 기본 원칙만 기술하고 세부 항목 설명이 없어 집단이나 지역, 학파에 따라 다른 변례(變禮)가 관습이 되고 전통이 되면서 가가례로 고착되었다. 아버지는 "전통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변용할 수 있다. 지킬 수 있어야 전통이다"고 강조했다.
몇 해 전에 한 신문이 추석 차례 설문조사를 했다. 차례를 지내는 집과 지내지 않는 집의 비율이 53대 47이었다. 지내지 않는 집의 21%는 오래전부터 안 지낸다고 했고, 26%는 최근 몇 년 전부터 지내지 않는다고 했다. 용기를 얻어 십여 년 넘게 지내오던 아버지 제사를 없애버렸다. 우리집의 또 다른 가가례다.
준비하는 번거로움도 있긴 하지만 후손의 참석률이 저조해서다. 전통이란 단순한 전승이나 반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새로운 탄생과 인격의 형성을 뜻한다는 자각이 있어서다. 고집도 중요하지만 사고의 유연성도 필요하다. 그 또한 손주에게도 물려주어야 할 품성이다.
효와 조상숭배의 정신
차례와 제사는 정성과 엄숙함이 있어야 한다
차례(茶禮)는 명절에 지내는 제사이다. 일반적으로 절사(節祀)라고도 한다. 오늘 날 차례풍경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인구의 도시집중, 교통난 등이 큰 변화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주자의 (가례)에 나타나는 제례 중에서 참례(參禮)와 천신례(薦新禮)가 관행의 차례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명절 중에서 차례를 가장 많이 지내는 명절은 설과 추석이다. 설날 아침에 깨끗한 옷(설빔)으로 갈아입고 차례를 지내는데 관행의 제례는 차례, 기제, 시제로 나뉜다. 차례는 지역과 가문에 따라 각각 다르다. 대체로 정초, 정월보름, 한식, 단오, 칠석, 추석, 중양, 동지 등에 지낸다. 고려사에 의하면 정몽주의 건의에 따라 공양왕 때에 대부 사(士) 서인의 제례를 주자의 (가례)에 의거하여 규정한 사실이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475년(성종 6년)에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비로소 대부 사 서인의 관혼상제가 실리게 되었다. 이것이 1485년(성종 16년)부터 시행된 조선왕조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과 함께 시행되었다.
조선시대 최초로 예학의 연구방향을 제시한 학자는 '김장생'이다. 그리고 '가례'를 풀이하여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널리 반포하자는 의미에서 간행된 것이 1632년에 신식(申湜)이 번역한 '가례언해'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주자의 가례에 근거한 저서가 200여 종류나 간행되었다.
그 결과 집안마다 관혼상제의 규정을 세워 주자의 가례의 내용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각각 다르게 행하기도 했다. 이를 일컬어 가가례(家家禮)라고 부르고 있다. 그 가운데 널리 알려진 책은 이재(李縡)의 사례편람(四禮便覽)이었다.
설날 아침차례는 장손의 집에서 모신다. 전통예절에서 정조(正朝) 차례를 받는 조상은 제주(祭主)의 4대조까지이다. 돌아가신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가 대상이다. 5대조 이상의 신주는 각기 분묘 옆에 묻어 집에서는 지내지 않고 10월 경에 또는 봄에 시제 때에만 제사를 지낸다. 차례는 제수와 세주(歲酒)를 마련하여 사당이나 대청마루가 없는 집에서는 큰 방에서 모시면 된다.
제수에 귀신을 쫓는다는 전설이 있는 복숭아는 올리지 않기로 하고 인간의 혼령과 밀접하다는 속설이 있는 개고기는 쓰지 않기로 한다. 차례 제수는 떡국, 술, 과일, 적이 필수이며 술도 소주는 쓰지 않는다. 곡주 또는 과일주를 써야한다. 사당이 없는 경우에는 신주(神主)대신 지방(紙榜)이나 영정(사진)을 모시면 된다.
지방이라는 것은 고인의 신위 표시를 말하는 것으로서 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분은 지방이 필요 없지만 그렇지 않는 분은 흰 종이 위에 작고하신 분의 호칭과 관직을 먹으로 정성껏 써 제상정 후면이나 병풍에 붙인다. 지방의 길이는 주척(周尺)으로 1척 2촌 폭이 3촌인바 주척 1촌은 오늘날의 미터법으로 약 20리(厘)에 해당한다. 그러니 지방의 길이가 22센티미터에 너비다 6센티미터 정도가 된다.
지방을 쓸 때에 유의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사후에는 서고동비(西高東卑)라 좌편에 고위(考位,男), 우편에 비위(妣位, 女)를 쓴다. 둘째, 고(考)는 부(父)와 같은 뜻으로 살아계실 때는 부(父)라 하고 사후에는 고(考)라하며 사당에 모실 때에는 이(檷)라고 하며 비(妣)는 모(母)와 같다. 즉 살아계실 때에는 모(母), 사후에는 비(妣)라 한다. 셋째, 고인에 관직이 있으면 '학생' 대신에 관직을 쓰고 그 부인의 호칭도 달라진다. 넷째, 지방은 깨끗한 백지에 쓰며 길이 22센티미터 정도 폭이 6센티미터 정도로 한다. 다섯째, 아들의 제사에는 손자가 있어도 아버지가 제주가 된다.
또 축문(祝文)이라 함은 제사를 지내는데 고인을 추모하는 뜻을 써서 제사 올릴 때 조상에 대한 경의를 나타내며 따라서 축문은 깨끗한 창호지나 또는 모조지에다 붓으로 정성껏 써야 한다.
그리고 제복(祭服)은 깨끗한 평상복을 정장으로 갖추어 입으면 된다. 평시에 입는 옷이라도 깨끗한 것으로 갈아 입어야 한다. 또한 가정의례 준칙에 의한 제례의 진설법도 지방이나 가문에 따라 예법에 차이가 있으나 전통적인 법도에 비해 간소화한 것이 그 특징이다.
신위는 사진으로 지방은 한글로도 할 수 있으며 새로운 제식 절차에 따라 신위봉안(神位奉安) 및 참신(參神)에서 종료되는 절차나 방식이 융통성이 있고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간소화 되어있는 것이다.
제사상을 차린 뒤 맨 먼저 할 일은 대문을 열고 빨랫줄을 걷는 일이다. 대문이 열려 있어야 혼령께서 제대로 들어오실 것이며 오시다가 혹시 빨랫줄에 목이라도 걸리시면 큰일이 나기 때문이다. 비록 아파트 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출입문은 열어 놓아야 한다.
고축(告祝) 읽기를 마친 뒤 밥그릇 한가운데 숟가락을 꼿꼿이 꽂아두고 자손들이 방 밖으로 잠시 나가는 것을 합문(闔門)이라고 한다. 자손들은 혼령이 아홉 숟가락 정도 밥을 드실 때까지 혼령의 생존시 일화를 이야기하다가 "다 잡수셨는지요. 이제 들어가겠습니다"는 뜻으로 혼령이 놀라지 않게 잔기침을 세 번 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이것을 계문(啓門)이라고 한다.
특히 혼령들은 제상에 정성이 없으면 크게 노여워한다. 혼령들에게는 며느리가 빠뜨린 머리카락 하나도 밥 속에 꿈틀거리는 구렁이로 보여 큰 화를 내기 때문이다.
제사는 정성, 청결, 조심함이 으뜸이니 종도 꾸짖지 말고 하하 웃지 말고… 어린아이 보채여도 주지 말며 정성으로 머리 빗고 목욕하고 화려한 색 옷 입지 말 것이며 손톱, 발톱 베이고 정결하면 신명이 흠향하고 자손이 복을 받느니라.
▶️ 家(집 가, 여자 고)는 ❶회의문자로 宊(가)와 동자(同字)이고, 姑(시어미 고)와 통한다. 갓머리(宀; 집, 집 안)部와 안에서 돼지(豕)를 기른다는 뜻을 합(合)하여 집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家자는 '집'이나 '가족'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家자는 宀(집 면)자와 豕(돼지 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예로부터 소나 돼지와 같은 가축은 집안의 귀중한 재산이었다. 그러니 도둑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곁에 두는 것이 가장 안전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 중국에서는 돼지우리를 반지하에 두고 그 위로는 사람이 함께 사는 특이한 구조의 집을 지었었다. 아직도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중국의 일부 소수민족은 집안에 돼지를 기르고 있다. 家자는 그러한 가옥의 형태가 반영된 글자이다. 그래서 家(가)는 (1)일부 한자어 명사(名詞) 다음에 붙어 그 방면의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나 또는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란 뜻을 나타내는 말 (2)어떤 일에 능하거나 또는 지식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란 뜻을 나타내는 말 (3)어떤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4)성 다음에 붙어, 그 집안을 나타내는 말 (5)호적상, 한 가(家)로 등록된 친족의 단체 등의 뜻으로 ①집 ②자기(自己) 집 ③가족(家族) ④집안 ⑤문벌(門閥) ⑥지체(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⑦조정 ⑧도성(都城) ⑨전문가 ⑩정통한 사람 ⑪용한이 ⑫학자(學者) ⑬학파(學派) ⑭남편(男便) ⑮아내 ⑯마나님(나이가 많은 부인을 높여 이르는 말) ⑰살림살이 ⑱집을 장만하여 살다 그리고 ⓐ여자(女子)(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집 당(堂), 집 우(宇), 집 택(宅), 집 실(室), 집 궁(宮) 등이 있다. 용례로는 부부를 기초로 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을 가족(家族), 한 가족으로서의 집안을 가정(家庭), 집안 살림에 관한 일을 가사(家事), 집에서 나가 돌아오지 않음을 가출(家出), 대대로 전하여 내려오는 집안의 보물을 가보(家寶), 집안 식구를 가구(家口), 남에게 대하여 자기 아버지를 이르는 말을 가친(家親), 남에게 자기 아들을 이르는 말을 가아(家兒), 집안 살림의 수입과 지출의 상태를 가계(家計), 한 집안 사람을 가인(家人), 사람이 들어가 살기 위하여 지은 집을 가옥(家屋), 집안이나 문중을 가문(家門), 집안의 어른을 가장(家長), 집안 어른이 그 자녀들에게 주는 교훈을 가훈(家訓),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에게 길들여져 집에서 기르는 짐승을 가축(家畜), 집안 살림에 관한 일을 가사(家事), 한 집안의 대대로 이어 온 계통을 가계(家系),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된다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집집마다 또는 모든 집을 일컫는 말을 가가호호(家家戶戶), 빈한한 집안이라서 아무것도 없고 네 벽만 서 있다는 뜻으로 살림이 심히 구차함을 이르는 말을 가도벽립(家徒壁立), 집안이 네 벽 뿐이라는 뜻으로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가도사벽(家徒四壁), 석은 한 항아리고 담은 두 항아리의 뜻으로 집에 조금도 없다는 말로 집에 재물의 여유가 조금도 없음을 이르는 말을 가무담석(家無擔石), 한 집안에 주인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군신의 다름을 이르는 말을 가무이주(家無二主), 집에서 먹는 평소의 식사라는 뜻으로 일상사나 당연지사를 이르는 말을 가상다반(家常茶飯), 타국이나 타향에 살 때는 고향 가족의 편지가 더없이 반갑고 그 소식의 값이 황금 만 냥보다 더 소중하다는 말을 가서만금(家書萬金), 집집마다 알려주어 알아듣게 한다는 뜻으로 누구나 다 아는 것을 이르는 말을 가유호효(家喩戶曉), 집의 닭을 미워하고 들의 물오리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일상 흔한 것을 피하고 새로운 것 진기한 것을 존중함을 비유하는 말을 가계야목(家鷄野鶩), 집의 닭을 미워하고 들의 꿩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아내를 소박하고 첩을 좋아함 또는 흔한 것을 멀리하고 언제나 새롭고 진귀한 것을 중히 여김을 이르는 말을 가계야치(家鷄野雉), 집집마다 살림이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해 살기 좋음을 이르는 말을 가급인족(家給人足), 집안이 가난하여 혼백이 땅에 떨어진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뜻을 얻지 못하고 실의에 빠짐을 이르는 말을 가빈낙탁(家貧落魄),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었을 때는 마음에 들지 않은 벼슬자리라도 얻어서 어버이를 봉양해야 한다는 말을 가빈친로(家貧親老) 등에 쓰인다.
▶️ 禮(예도 례/예)는 ❶형성문자로 豊(례)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보일 시(示=礻; 보이다, 신)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신에게 바치기 위해 그릇 위에 제사 음식을 가득 담은 모양의 뜻을 가진 豊(풍, 례)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제사를 풍성하게 차려 놓고 예의를 다하였다 하여 예도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禮자는 '예절'이나 '예물', '의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禮자는 示(보일 시)자와 豊(예도 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豊자는 그릇에 곡식이 가득 담겨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예도'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예도'라는 뜻은 豊자가 먼저 쓰였었다. 고대에는 추수가 끝나면 신에게 감사하는 제사를 지냈다. 이때 수확한 곡식을 그릇에 가득 담아 올렸는데, 豊자는 바로 그러한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그러나 후에 豊자가 '풍성하다'나 '풍부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면서 소전에서는 여기에 示자를 더한 禮자가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禮(례)는 ①예도(禮度) ②예절(禮節) ③절(남에게 공경하는 뜻으로 몸을 굽혀 하는 인사) ④인사 ⑤예물(禮物) ⑥의식(儀式) ⑦책의 이름(=예기禮記) ⑧경전(經典)의 이름 ⑨단술(=감주), 감주(甘酒: 엿기름을 우린 물에 밥알을 넣어 식혜처럼 삭혀서 끓인 음식) ⑩예우(禮遇)하다 ⑪신을 공경(恭敬)하다 ⑫절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예의에 관한 모든 질서나 절차를 예절(禮節), 사회 생활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공손하며 삼가는 말과 몸가짐을 예의(禮儀), 예로써 정중히 맞음을 예우(禮遇), 예법에 관한 글을 예문(禮文), 예로써 인사차 방문함을 예방(禮訪), 존경하여 찬탄함을 예찬(禮讚), 예법과 음악을 예악(禮樂), 예법을 자세히 알고 그대로 지키는 사람 또는 그러한 집안을 예가(禮家), 사례의 뜻으로 주는 물건을 예물(禮物), 예법을 따라 베푸는 식으로 결혼의 예를 올리는 의식을 예식(禮式), 예로써 정중히 맞음을 예대(禮待), 예법으로써 그릇된 행동을 막음을 예방(禮防), 예절과 의리를 예의(禮義), 혼인의 의례를 혼례(婚禮), 스무살이 되어 남자는 갓을 쓰고 여자는 쪽을 찌고 어른이 되던 예식을 관례(冠禮), 예의에 벗어나는 짓을 함을 결례(缺禮), 볼품없는 예물이란 뜻으로 사례로 주는 약간의 돈이나 물품을 박례(薄禮), 장사지내는 예절을 장례(葬禮), 예법에 따라 조심성 있게 몸가짐을 바로함을 약례(約禮), 예의가 없음을 무례(無禮), 아내를 맞는 예를 취례(娶禮), 언행이나 금품으로써 상대방에게 고마운 뜻을 나타내는 인사를 사례(謝禮), 공경의 뜻을 나타내는 인사를 경례(敬禮), 말이나 동작 또는 물건으로 남에게서 받은 예를 다시 되갚는 일을 답례(答禮), 예절과 의리와 청렴한 마음과 부끄러워 하는 태도를 일컫는 말을 예의염치(禮義廉恥), 예의와 음악이 깨지고 무너졌다는 뜻으로 세상이 어지러움을 이르는 말을 예괴악붕(禮壞樂崩), 예의가 지나치면 도리어 사이가 멀어짐을 일컫는 말을 예승즉이(禮勝則離), 예의를 숭상하며 잘 지키는 나라를 일컫는 말을 예의지국(禮儀之國), 예의가 너무 까다로우면 오히려 혼란하게 됨을 이르는 말을 예번즉란(禮煩則亂), 예의는 서로 왕래하며 교제하는 것을 중히 여김을 일컫는 말을 예상왕래(禮尙往來), 어느 때나 어느 장소에서나 예의는 지켜야 한다는 말을 예불가폐(禮不可廢)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