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숙의 ‘도화산촌(桃花山村)’
첩첩산골이다.
뒤로는 소나무 듬성듬성한 기암절벽, 앞으로는 여유롭게 휘돌아 흐르는 강줄기, 그 가운데 작은 마을이 포근히 안겨 있다. 복숭아나무들에 둘러싸인 마을 앞자락엔 길게짧게 고랑 진 밭이 옆으로 모로 어깨를 부비며 기지개를 켠다. 나느 지금 소정(小亭) 변관식의 ‘도화산촌’을 보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봄, 무채색의 수묵화 속에서도 복숭아 나무 구부러진 잔가지에 연분홍 꽃잎이 하늘하늘 내려앉는다.
그림 상단 왼쪽에 이백의 ‘산중문답’이 달필로 쓰여 있다.
問余何事樓碧山 어짜하여 청산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笑而不答心自問 웃으며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 절로 편안하다
桃花流水査然去 시냇물에 복사꽃 동동 아득히 흘러가니
別有天地非人間 인간세상 벗어난 별천지라네
그런데 ‘별유천지비인간’을 말하면서 소정은 그림 속에서 마을 그려넣었다. 왜 그랬을까? 집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모두 여섯 채다. 집은 또 왜 하필 여섯 가구일깡?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니 알아지는게 있다. 그래, 풍진의 바깥세상에 담쌓고 이 산골에 숨은 듯 들어앉아 어우렁더우렁 한 세월 보래려면 여섯 집 정도는 서로 이웃하여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느 집에 살까. 사랑 채, 안 채 갖춘 기와집보다는 아무래도 그리 크지 않은 저 삼간 초가집이 좋겠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인물이 19세기의 소로우 이다. 그는 2년을 월든 숲속에 홀로 은거하였다. 그러나 나는 윌든을 통해 그토록 찬양해 마지 않았던 숲속의 생활을 단 2년만에 접고 도시로 가버렸다. 그리곤 다시는 숲속 생활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좋다고 하면서 왜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야 했을까. 만약에 혼자 살지 않고 여섯 채 정도가 이웃하여 살았더라면 오래도록 그곳에 머물 수 있었을까. 나는 그런 그에게 9세기를 살았던 최치원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僧乎莫道靑山好 저 스님아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
山河何事更出山 좋다면서 왜 다시 산을 나오니
試看他日吾蹤迹 뒷날에 내 자취 두고 보시오
一入靑山更不遷 한 번 들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천년을 앞서 살았던 최치원이 천 년 후의 소로우를 가르친다. 뭔가를 좋다고 말하려면 그만큼의 철저함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자연은 최치원엔게는 필요충분 조건을 갖춘 대상이었겠으나 소로우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아름다운 자연은 우리를 위로한다. 온갖 인위적인 것이 제거된 소박한 자연의 상태에서 맞이하는 것은 잠시의 고독과 적요 속에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맑게 정화된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비로소 진정한 위안을 얻는다. 하다못해 절대고독 속에서 도를 닦는 선승들에게조차도 도반이 필요하지 않는가.
하긴 고립을 자초하여 사는 게 편안한 사람들도 간혹 있긴한가 보다. 길을 가노라면 산자수명한 경치 속에 외딴집 한 채가 그림같이 들어앉아 있는 정경이 드물지 않다. 지나는 길손에게 더러 쓸쓸한 소회기 여로에서 운치를 선사하기도 하지만, 주변에 인적이 없어 나는 괜히 걱정이다. 밤중에 깜깜할 때 무섭지 않을까. 불시에 사고라도 생기면 인가가 멀어서 어쩌지. 그러면서 생각한다. 저 집에 사는 사람은 복잡한 인간 세상이 지긋지긋하게 싫은가 보다.
임제는 이런 시를 남겼다.
道가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를 멀리하는 것이며
山이 俗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속이 산을 떠나는 것이다.
無爲의 자연과, 有爲를 향해 내달리는 인간 사이에는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와 같은 긴장이 흐르다. 소정은 아마 그 긴장관계를 해소하고 나아가 산과 속을 아우르는 이상적 상태를 맞이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최치원의 경지는 어렵고, 소로우의 홀로서기는 실패한 셈이다. 소정의 ‘도화산촌’쯤이 우리들 마음의 길집이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산에도 안기고, 세속도 품고, ‘도화산촌’은 내게 심산과 속세, 자연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져 조화롭게 이루는 참다운 이상향의 모스블 보여준다.
첫댓글 제가 이 글을 여기에 올린 이유는 소로우가 자연과 더불어 살자고 큰 소리 치고는 겨우 2년을 살았다..
인간 사회로 돌아와서는 사회운동을 한답시고 온갖 정치적 문제에 관여한다. 그런 그를 자연주이자라면서
예찬에 예찬을 한다. 왜 그럴까. 그가 미국사람이라서, 백인이라서 -
나는 우리의 허위 의식 때문이라고 본다. 꿈 깹시다.
나는 漢詩 공부를 하면서 唐詩 三百首 강의를 세 번이나 들었습니다. 공부하면서 서양시와는 다른 , 마치 뼈를 푹 고아서 울거내는 것 같은 깊은 맛을 느꼈습니다. 그 맛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할지 답을 찾지 못했는데------,
서숙의 '도화산촌'을 읽으면서, '그래 이것이다.'라고 느꼈습니다.
서정적이면서도, 뼈고음에서 우러나는 맛처럼, 깊은 의미가 느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