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제1독서
<주님의 백성에 속한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님의 집을 짓게 하여라.>
▥ 에즈라기의 시작입니다.1,1-6
1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2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3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이제 그들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집을 짓게 하여라.
그분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4 이 백성의 남은 자들이 머무르고 있는 모든 지방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의 집을 위한 자원 예물과 함께,
은과 금과 물품과 짐승으로 그들 모두를 후원하여라.”
5 그리하여 유다와 벤야민의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과 사제들과 레위인들,
곧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곳에 계신 주님의 집을 짓도록
하느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신 이들이 모두 떠날 채비를 하였다.
6 그러자 이웃 사람들은 저마다 온갖 자원 예물 외에도,
은 기물과 금과 물품과 짐승,
그리고 값진 선물로 그들을 도와주었다.
복음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17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18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람을 가려서 비추는 등불은 없다.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다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얼핏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올바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게 마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누구나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어디에나 해당하는 법칙이지만, 말씀의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진다는 것을 가정할 때 말씀을 전하려는 이들이 더 가진 이들이고 그들에게 더 많은 말씀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도 더 받으려면 더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무언가를 주는 이의 뜻에 맞게 쓴다면 주는 이는 더 주게 될 것이 당연합니다.
예전에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승재라는 아이가 민속촌 같은 곳에 갔는데 품바를 하는 거지 옷을 입은 두 삼촌이 장난으로 배고픈 표정을 짓자 승재는 자신이 낙서하고 있던 입장권을 그 품바들에게 줍니다. 아빠는 그것이 돈이 아니기 때문에 승재에게 1,000원 권을 주자 승재는 그것을 품바 바가지에 넣어줍니다. 아빠는 승재가 더 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착한 일을 하려고 할 때 더 줍니다. 하느님이야 그보다 못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도우려는 사람은 더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받은 것을 전해주는 방식은 ‘등불’과 같아야 합니다. 말씀과 은총을 한마디로 하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칫 주님께 그러한 은총을 몇 몇 만을 위해 사용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참 빛이 아닙니다. 나는 말씀이든 은총이든 사랑이든 모든 이에게 전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의 줄거리입니다. 냉소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피츠버그 TV 일기예보 진행자인 필 코너스는 연례 성촉절 축제를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고 펜실베이니아주 푼수토니의 작은 마을로 파견됩니다. 그는 자신이 그런 하찮은 일을 해야 하는 것에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일을 끝내고 그 마을을 떠나려는 데 눈이 많이 내려서 갈 수가 없었고 어쩔 수 없이 하룻밤을 더 잤는데 또 성촉절입니다. 하루가 무한 반복됩니다. 그는 처음엔 그러한 상황을 즐겨보려 합니다. 감옥에 가도 원상태로 돌아오기에 은행도 털고 쾌락적인 삶을 즐길 대로 즐깁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도 신물이 납니다.
이 지옥과 같은 의미 없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자 그는 자살을 택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같이 파견 나온 프로듀서 리타를 꼬시기로 마음먹습니다. 여러 번 실패하며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모조리 알아내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항상 거부합니다. 무언가 자신에게만 잘해주는 게 의심스러웠던 것입니다.
결국 필은 자신이 리타에게 하려고 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잘해주기로 합니다. 그랬더니 그러한 보답이 돌아옵니다. 리타는 주위 사람들이 다 필을 좋아하게 된 것을 보고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거짓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함께 잠을 자고 일어납니다. 그런데 ‘내일’이 된 것입니다. 드디어 하루가 지난 것입니다.
영화는 타임 루프 개념을 사용하여 무한한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자신의 결점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탐구합니다. 영화는 의미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조로움과 절망 속에서 어떻게 목적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결국 우리의 하루는 이웃 사랑으로 채워져야 하는데 그 사랑은 한 사람 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등불처럼 모든 사람을 비추는 것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한 인간만 비추는 태양은 없습니다. 비도 그렇고 바람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입니다. 내가 이러한 참 사랑으로 나아갔을 때 내가 사는 하루가 진정한 하루가 됩니다.
가끔 어떤 젊은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하고 나서 둘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들에게 사랑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주위 사람들에게 번져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사랑을 부어주셔서 둘의 사랑이 더 깊어지게 합니다. 사랑도 받아야 할 수 있는데,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가진 사람은 마치 등불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우리 본성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5년째 사제로 살면서, 사제가 되는 것과 사제로 사는 것에는 간격이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제가 되는 것만으로는 예수님과 일치할 수 없으며, 예수님의 뜻을 되새기며 실천하는 사제로 살아야 예수님과 진정으로 일치하면서 제대로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신학생 때는 사제가 되는 것으로 저절로 예수님과 일치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25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전혀 그렇지 않음을 비로소 느낍니다.
묵상해 보면 솔직히 아직도 멀었습니다. 즉, 아직도 사제로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함을 반성합니다. 단지 주님의 사랑과 자비에 힘입어 조금씩 나아지려 노력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제로 사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인이 되는 것과 신앙인으로 사는 것의 간격도 마찬가지임을 깨닫습니다. 당연히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데, 신앙인 그 자체에만 머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안일한 마음만을 가지고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안일한 마음을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적극적으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 안에서 드러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인 자체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대신 신앙인으로 사는 것에 집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 것에 집중할수록 신앙인으로 사는 것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만 집중하며 세상 것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럴수록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서 들어오는 이들이 이 빛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등불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는 것처럼 감춰지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에 환하게 당신을 드러내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역할은 주님께서 세상에 잘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주님을 세상에 잘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단순히 신앙인 자체에만 머물면 주님을 오히려 세상 안에서 가리는 모습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 살아가면 모든 이가 환한 빛이신 주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이 당연한 진리를 너무나 쉽게 잊어버렸던 것이 아닐까요? 그 당연한 진리를 따라야만, 즉 신앙인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가야만 가진 것을 주님으로부터 더 충만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좀 더 가까워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어리석은 짓을 삼가는 것이 지혜의 입문이다(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
사진설명: 들불은 함지 속에 놓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