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주님 중심의 참된 제자의 삶”
2025.2.21.연중 제6주간 금요일 창세11.1-9 마르8,34-9,1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 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보신다.”(시편33,12-13)
예나 이제나 인간의 관심사는 동일합니다.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참된 삶을 추구합니다. 부단히 희망을 길을 찾습니다. 희망을, 길을 잃었을 때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여기서 저절로 나오는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지금도 여기 수도원 피정집 마다 제가 쓴 3권의 책들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10년이 훨씬 지난 이미 품절된지 오래된 책들입니다.
“둥근 마음, 둥근 삶”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책 제목들이 삶의 길을, 삶을 방향을 제시합니다. 또 한권의 책을 낸다면 책 제목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로 하고 싶습니다. 이 세권의 책들중 우선 찾아 보는 것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 합니다. 마음 깊이에서는 누구나 잘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물음은 더 구체화되어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바뀝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제자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인류 모두가 따라야 할 길이신 예수님이심이 드러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외없이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참 삶의 길이자 참된 제자의 길입니다. 여기가 루카는 “날마다” 말마디를 추가합니다. 참 삶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 구원의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새삼 하느님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이자 화신인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가 됨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예수님 대신에 누구를, 무엇을 이 삶의 중심 자리에 놓을 수 있겠는지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을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느냐?”
참으로 유일무이한 목숨을 구하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을 따르는 길뿐임이 강조됩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히 고백하며 당신을 따르라 하시며 용기백배 힘을 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절개없고 죄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나 이제나 절개없고 죄많은 세대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혼탁한 와중에서 참된 삶의 길은, 길이요 진리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 까지, 주님을 고백하고 증언하면서 초지일관, 시종여일 주님을 따르는, 홀로와 더불어의 평생 여정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중심한 삶에 주님을 날로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할수록 자발적 기쁨으로 자기를 버리고 제 운명의, 책임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제 십자가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아모로 파티, 운명애가 됩니다. 자기 버림, 제 십자가를 짐, 모두가 주님 사랑의 표현이요 주님 사랑의 힘이 샘솟는 힘의 원천이, 원동력이 되어 항구히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바벨탑”이야기는 상징하는 바 참 깊습니다. 참된 제자의 삶에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바벨탑을 세우는 사람들! 삶의 중심인 하느님이 없습니다. 이들을 깊이 들여다 보면 그 안에는 뭔지 모를 두려움과 외로움이, 불안이, 깊은 내적 공허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헛된 바벨탑 쌓기에 아까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지요? 지위, 명예, 권력, 재물등 탐욕이 끝없이 추구하는바 내외적 바벨탑 쌓기요, 탐욕과 교만의 근원에는 두려움이, 두려움의 악마가 똬리를 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곳곳에 치솟는 고층 건물 아파트들을 볼 때마다 또 하나의 바벨탑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도 듭니다.
참으로 주님을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로 확실히 자리 매김할 때 마음의 헛된 내외적 바벨탑 쌓기는 끝날 것입니다. 그러니 거창한 바벨탑은 두려움의 표현이자 내적공허의 표현인 것입니다. 말그대로 참으로 위태한 사상누각에 하느님 중심 없는 획일화된 집단 삶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생명의 길이 아닌 죽음의 길을 가는 이 집단을 살리기 위한 비상조치로 이들을 뿔뿔히 흩으십니다. 새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셔야 함을 배웁니다. 인간의 원초적 내적 두려움과 외로움, 공허감을 해소시켜 주실 유일한 분은 하느님이신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생명이자 사랑이자 빛이신 주님을 삶의 중심에 새롭게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거짓 안전의 내외적 바벨탑 쌓기를 중단시키고, 두려움과 외로움, 불안과 내적공허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다시 한 번 되뇌어 보는 제 좌우명 기도 고백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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