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인 줄 알고 놀라는 것은 변계소집성의 상태이고, 노끈을 뱀으로 오인하게 된 것은 그 모습에 유사성이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중간 상태의 모습 또는 인연화합의 모습과 실제로 뱀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의타기성이고, 뱀이 아니라 노끈임을 알게 된 것은 원성실성이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투명한 수정을 준비해서 빨간 색종이 위에 올려놓는다면 그 수정이 빨간 루비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파란 색종이 위에 얹으면 사파이어처럼 보일 것이다. 여기서 루비나 사파이어는 존재하지 않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게 변계소집성이다. 그리고 투명한 수정이 루비나 사파이어로 나타는 현상이 의타기성이고, 본래의 투명한 수정 그 자체가 원성실성이다.
그러면 이때 무엇이 허망한 분별을 불러일으키는가? 이점에 대해서는 유식학의 안혜(安慧, Sthitamati, 510∼570년 경)와 호법(護法, Dharmapala, 530∼561년 경)의 견해가 있다.
안혜(安慧)는 제8식을 비롯한 모든 의식이 물들어져서 허망한 분별을 일으킨다고 본다. 그 이유는 모든 물든 의식의 본질이 바로 분별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호법(護法)은 허망한 분별을 일으키는 주범으로써 세계와 자아에 집착하는 제6식과 제7식을 지목한다. 전5식과 제8식은 이런 분별에서 벗어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전5식은 언어적인 능력이 결여돼있고, 제8식은 정보를 저장만 하지 스스로 선악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유식의 입장에선 변계소집성을 고통의 원인으로 본다. 곧 사물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왜곡시키는 것을 말한다.
위의 사례에서 새끼줄을 뱀으로 잘못 인식을 한 관계로 공포와 두려움의 고통을 느낀 것이다. 고통은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그것을 잘못되게 분별한다는 데에 있다. 그런 까닭에 잘못된 분별하는 성향을 수행을 통해 교정해 존재를 존재하는 그대로 바르게 수용하게 한다면,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불교에서 기세계(器世界) 또는 기세간(器世間)은 공업(共業)에 의해 이루어진 삼계(三界)를 뜻하고, 세계(世界) 또는 세간(世間)은 각자가 가진 ‘경험 세계’를 말한다.
즉, 비록 각 개인의 삶이 기세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각 개인의 세계는 기세간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된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할 때, 변계소집성은 유위(有爲) 유루(有漏)의 상태에 있는 미혹한 범부가 가진 세계 또는 세계관이고,
의타기성은 유위(有爲) 무루(無漏)의 상태에 있는 수행자들이 가진 세계 또는 세계관이고,
원성실성은 무위(無爲) 무루(無漏)의 상태에 있는 부처가 가진 세계 또는 세계관이다. 원성실성의 세계 또는 세계관은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證得)했을 때만 비로소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원성실성 상태일 때 기세간(우주)에 대해서도 비로소 정확히 그리고 완전히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원성실성의 경지는 범부중생으로서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고차원의 경지이다. 그러니 중생은 고통 속에 헤매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눈(眼)ㆍ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과 마음(意), 이렇게 여섯 가지[육근(六根)]를 구비하고 나온다.
이 육근에서 작용이 일어나면 눈(眼)은 색(色-물질)을 보고, 귀(耳)는 소리를 듣고, 코(鼻)는 향기를 맡고, 혀(舌)는 맛을 보며, 몸(身)은 촉감을 느끼고, 마음(意)은 온갖 일들(法)에 대한 생각을 일으킨다.
주관인 육근이 만나는 객관, 즉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 여섯 가지 상대를 육경(六境) 혹은 육진(六塵)이라고 한다.
이러한 육근(六根) 중에서 눈ㆍ귀ㆍ코ㆍ혀ㆍ몸 다섯 가지 오근(五根)은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정보, 즉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의 다섯 가지 경계를 받아들이고, 그리고 제6근 마음(意根)이 내부에서 받아들인 정보(일체법)을 판단하고 정리한다.
그런데 판단하는 마음(의식)은 ‘있는 사실’ 그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자기가 경험한 것을 축적해 놓은 것, 즉 업식(業識)에 의해서 판단한다. 이와 같이 중생의 판단이라는 것이 자기중심적인 업식에 의한 판단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해서, 외부에서 받아들인 정보를, 내부의 마음인 의근(意根)은 과거의 습관화된 업식에 의해서, 즉 과거에 자기가 경험한 것을 축적해 놓은 업식(業識)에 의해서 판단하고 결정한다.
이와 같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자기가 익힌 습관, 즉 업식(業識)에 의해 판단하기 때문에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치우치게 봐서 집착하는 성품인 변계소집성은 우리 중생들의 망령된 마음, 잘 못 보는 그 마음에 있다. 즉, 의식(意識)에 잘못이 있는 것이지, 원래 우주의 도리에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성인(聖人)은 함부로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이 없다.
<성유식론>에서는 변계소집을 허망한 분별(虛妄分別)로 정의한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한다고 분별해 집착하기 때문이다.
초월적 신(神)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존재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에 집착한다. 마찬가지로 자아(自我)의 존재가 실질적으로 존재한다는 구체적이고 확고한 증거가 없는데도 우리는 자아의 존재를 믿는다. 이런 것들이 모두 허망한 분별로서 변계소집성이다.
어떤 선비와 사냥꾼과 바람둥이 세 사람이이 산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산 속에서 어떤 여자가 갑자기 튀어나오다가 이 세 사람을 보고 얼른 도망을 가는데, 옷매무새가 헝클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그런 것을 봤을 때 각자 자기 (업식에 의해서) 견해가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변계소집성이다. 선비는 그 여인의 옷차림새가 헝클어져 있으니 저 여자가 참 방정맞은 여자이고, 예의도 없고 버릇도 없는 여자라고 무시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바람둥이는 저 여자가 아마 숲 속에서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다 놀래서 저렇게 허둥지둥 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또 사냥꾼은 숲 속에서 나물 같은 것을 캐다가 짐승을 만나 놀라서 저렇게 달아나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이 고개를 넘어서 어느 집이 한 채 있어서 거기를 들어가 보니, 아까 그 여인이 마당에서 약을 달이고 있었다. 방금 본 그 여인이어서 아까 왜 그렇게 달아났는지 물었더니, 그 여인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병이 들어서 산에 가서 약초를 캐서 달여 드리는데, 약을 올려놓고 산에 약초를 캐다 보니 약이 탈 것 같아서 바쁘게 내려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진실은 이 여인이 약이 탈까봐 달려내려 온 것인데, 그 여인이 달려 내려오는 형국을 보고 선비, 사냥꾼, 바람둥이 셋은 각자 자기 소견에 맞춰서 상대를 파악한 것이다. 이 게 바로 변계소집성이다.
일체 중생이 마음의 본성을 깨닫기 전까지는 이러한 마음을 쓴다는 것이다. 그 변계소집성은 정(情)이다. 정이라는 것은 자기감정은 있으나 이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전도몽상이라 했을 때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반 중생들은 일상생활에서 주관적으로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은 결국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부처님이나 큰스님한테 와서 만약 이게 옳습니까, 저게 옳습니까, 했을 때 대답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주관적인 자기 소견만 가지고 와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 달라고 하는 것이니, 부처님이나 큰스님께서 대답을 안 하신 것이다. 왜 대답을 안 하시는 지 그 이유를 깨칠 수준이면 상근기일 테지만 그런 상근기 중생이야 그런 질문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사회현상에 결부시켜 변계소집성을 말해본다면, 어떤 대상이나 사건 사업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한 자기의 이해(利害)관계를 따져서 자기에게 유리하고, 이익이 되면 그것에 대한 집착심을 일으킬 것이고, 손해가 될 것 같으면 사회정의가 어떻게 되든 거부할 것이다. 이런 성품이 변계소집성이다.
때문에 정부 관료들의 부정부패, 부도덕한 성관계로 인한 소동,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되는 빈부격차가 심한 경제구조, 남의 생명이나 종교를 무시하는 풍조에 따른 종교전쟁, 심각한 노사(勞使) 갈등, 선전과 실제가 다른 불량 식품이나 약품 등에 나타나는 것은, 지나친 자기 욕심에 따른 집착하는 변계소집성의 결과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회생활에서도 이런 성품을 가진 사람이 주변에 많이 있을 때, 그 단체의 질서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어렵고, 조직의 분위기가 매우 혼란스러워 창조적인 발전에도 지장이 많을 것이다. 흔히 나타나는 고위공직자의 불륜행각이나 부정해위 등도 모두 그들의 변계소집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미국 문화원에 불을 지르며 반미 행동을 보인 사람이 자기 아들은 미국유학을 보내는 행위는 그야말로 앞뒤가 맞지 않은 변계소집성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자기 정의는 없고 이해만 따져서 자식은 미국에 유학을 보내는 행위에는 전혀 진실이라는 게 없다.
변계소집성은 이와 같이 자기의 이익에 집착하는 성품이지만, 나아가서는 본인은 물론, 그의 가정, 그가 속한 직장과 사회에도 해(害)를 가져와 서로 망하게 하는 길로 가는 성품이다.
그러므로 불교신자는 변계소집성은 모든 병과 고통의 원인임을 바르게 인식하고, 이를 멀리 여의고 수행 정진을 거듭해서 원성실성을 성취할 때, 밝은 사회가 이룩될 것이다.
그리하여 변계소집성을 멀리 여의임에 따라 원성실성(圓成實性)이 드러난다고 유식 제21송에서 말하고 있다. 원성실성은 모든 존재의 참된 성품인데,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원만하게 성취하는 실다운 성품이다. 실다운 성품이란 자기가 만든 환상적인 그림을 추구하는 성품이 아니라 실재(實在) 있는 진실 된 모습을 바로 보고, 하고자 하는 일을 이치에 맞게 원만히 성취하는 성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