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안 선사 반야심경 선해(禪解)
머리말
나는 심경(心經)의 서두에 무슨 말을 써야 할까 하고 붓을 들었습니다. 심경은 마음경입니다. 마음경이니 어찌 글자와 말이 필요한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글자와 말은 마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고 반문하겠습니다.
그러나 달마(達摩)대사가 이르시기를, “마음 난 것이 문득 허물 생긴 때[心生便是罪生時]”라고 하였으니, 마음을 낸 것이 허물이라면, 내가 이 붓을 든 것도 허물이고, 조사들의 양구방할(良久棒喝: 침묵하거나 때리거나 고함지름)과 양미순목(揚眉瞬目: 눈썹을 움직이거나 눈을 깜박거림)도 허물이고, 이보다도 더 크게 부처님이 49년간이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신 것은 허물이 아니겠습니까? 허물이고 아닌 것은 차치하고 불교에서 팔만장경이 모두 마음 법 하나를 밝힌 것이라 하고, 이 경의 제목도 심경(心經), 곧 마음경이라 하였으니 대체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대매(大梅)선사가 마조(馬祖)에게 가서, “어떠한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마조는 “마음이 곧 부처니라[卽心是佛].”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대매는 아무 말 없이 가버렸다고 합니다. 한 번 간 뒤로는 6년이 지나도 다시 오지 않으므로, 마조는 문인(門人)을 보내 대매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6년 전에 큰스님에게 다녀간 뒤로 지금까지 한 번도 와서 법을 묻지 않는가?” 대매는 서슴지 않고, “그때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일러주셨는데 다시 물을 것이 있느냐?”고 대답했습니다. 문인이 다시 “요새는 마조의 불법이 달라져서,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라[非心非佛]고 하시니라.” 하였더니,
대매는 “그만두라. 마조는 비심비불(非心非佛)이고 나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마조는 “매실이 익었구나[梅子熟也].” 하였으니, 마음에 걸리면 조사의 1,700 공안(公案)도 언설(言說)과 문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언설과 문자에 걸리지 않으면 세존의 일대시교(一代時敎)가 마음 하나일 뿐 아니라, 꾀꼬리 노래와 제비 소리며 초목와력(草木瓦礫)과 산산수수(山山水水)가 모두 마음 하나뿐이니 무엇에 걸림이 있겠습니까?
불법(佛法)은 걸림 없는 법입니다. 걸리면 불법이 아니니 불법을 배우려는 목적은 해탈에 있습니다. 해탈하지 않고는 대자유를 얻지 못하니, 심경을 배우는 뜻도 여기에 있으며, 이 경을 강의하는 뜻도 해탈을 얻어 불법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러나 즉심시불이나 비심비불의 뜻을 알았다 하여 이 사람이 크게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심경에 말했듯이 오온(五蘊)이 공한 것을 보아서 일체(一切) 고액(苦厄)이 없어야 실로 해탈한 사람입니다. 뜻으로는 몸과 마음이 공인 것을 깨달아서 일체 고액이 없는 본리(本理)를 알고, 입으로는 공을 말하고 있지만 실로 자기에게 일체 고액이 멸도(滅度)되어 무애자재(無碍自在 )한가를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理)로는 공리(空理)를 알았지만 현실[事]로는 몸과 마음이 있어,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지 않습니까? 몸과 마음이 분명 거짓이며 환(幻)이지만 있는 것만은 목전(目前)의 사실입니다. 아무리 환일망정 환신(幻身)이 있는 이상 심두(心頭)를 멸각(滅却)하기 전에는 공부와 수양을 많이 쌓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탐심(貪心)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고 때로는 진심(嗔心)과 치심(癡心)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예뻐하고 미워하는 마음과 아끼고 시샘하는 마음, 나와 남이라는 생각이 일어나게 되므로 고(苦)와 액(厄)이 없을 수 없으니, 이러고서는 일체 고액이 멸도 되었다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불법을 배우는 자는 아는 것을 능사(能事)로 여기지 말고 깊은 행이 있어야 할 것을 간절히 바라면서 나의 죄를 여러 불자들 앞에 참회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ㅡ 해안선사의 <7일 안에 깨쳐라>(동명 엮음/ 비움과소통) 중에서
첫댓글 말음에대한 좋은글 감사합니다.~~~
나무 관세음보살..._()_
봏은 법문 잘보고 감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