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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동(碧梧桐)
벽오동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 높이는 15m에 이르고, 수피가 벽색으로 특이하며, 꽃은 6∼7월에 엷은 황색의 꽃을 피운다. 중부 이남의 각 지역에 많이 식재되어 있으나 원래는 하와이,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에 자생하는 수목이다.
碧 : 푸를 벽(石/9)
梧 : 오동나무 오(木/7)
桐 : 오동나무 동(木/6)
(유의어)
청동(靑桐)
벽오동과(碧梧桐科)에 딸린 갈잎큰키나무. 나무 껍질이 초록빛이고 잎이 크고 손바닥 꼴, 여름에 가지 끝에 긴 이삭 모양(模樣)의 잔가지가 나와 황록색(黃綠色)의 작은 다섯잎꽃이 핀다. 정원수(庭園樹)나 가로수(街路樹)로 심으며, 재목(材木)은 가구재(家具材) 따위로 쓰고 열매는 먹는다.
중국, 인도차이나, 타이완 및 류큐[琉球] 원산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가로수로 심고 있으며 경기도에서도 곳에 따라 월동이 가능하다. 높이 15m 정도로 굵은 가지가 벌어지고 나무껍질은 녹색이다. 잎은 달걀 모양으로 넓으며 어긋나지만 가지 끝에서는 모여 달리고 가장자리가 3~5개로 갈라지며, 톱니의 길이와 너비가 16~25cm이다. 잎자루는 잎보다 길다.
꽃은 6∼7월에 연한 노란색으로 피고 원추꽃차례[圓錐花序]를 이루며 단성화이다. 하나의 꽃이삭에 암꽃과 수꽃이 달린다. 꽃받침조각은 5개이고 뒤로 젖혀지며 꽃잎은 없다. 합쳐진 수술대 끝에 10∼15개의 꽃밥이 달린다.
열매는 삭과(殼果)로 성숙하기 전에 5개로 갈라져서 둥근 종자가 겉에 나타난다. 종자를 볶아서 커피 대용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나무껍질에서 섬유를 채취하지만 주로 관상용이다.
학명은 Firmiana simplex (L.) W.F.Wight이다. 높이 15m, 직경 40㎝에 이르며, 나무껍질은 벽색으로 특이하다. 잎이 오동나무의 잎과 같게 생겼으나 나무껍질이 초록색으로 다르다 하여 벽오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 중부 이남의 각 지역에 많이 식재되어 있으나 원래는 하와이,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에 자생하는 수목이다. 내한성이 약하여 서울 이북지역에서는 월동이 불가하며, 서울에서도 어려서는 특별히 보호를 해주어야 피해가 없다.
꽃은 6∼7월에 가지 끝에 원추화서(圓錐花序: 원뿔형의 꽃차례)로 엷은 황색의 꽃을 피운다. 열매는 10월에 익는데 봉선에 따라서 갈라져 마치 돛단배 모양으로 피어 가운데 4, 5개의 콩과 같은 열매를 맺는다.
비교적 조풍(條風: 북동풍)에 강하고 각종 공해에도 견디는 힘이 좋아, 각국에서 가로수, 공원수, 정원수로 많이 심고 있다. 열매는 볶아서 커피 대용으로 이용하며 여기에서 추출한 기름은 식용유로도 사용한다.
번식은 가을에 익은 종자를 채종하여 노천매장하였다가 이듬해에 파종한다. 한방에서는 종자를 소화불량, 위통, 구내염, 내산(內疝) 등에 치료제로 사용한다. 벽오동은 예전부터 봉황이 깃들이는 곳이라 믿어 왔다.
경상남도 함안은 한때 가야국의 진관지(鎭管地)였던 곳으로 정구(鄭逑)가 벽오동과 대나무 숲을 만든 바 있다. 그 이유는 함안의 뒷산은 풍수에 의하면 비봉형(飛鳳形)이므로 당시 군재(郡宰)였던 정구가 땅을 모아 봉란(鳳卵)을 만들고 동북방에 벽오동 천 그루를 심고 대숲을 조성하여 비봉이 영구히 그곳에 머물게 하려던 것으로, 봉황과 벽오동의 관계에 관한 우리 선조들의 사고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환경 탓하지 마라
언덕에 지은 집으로 이사했다. 대학 다닐 때다. 이삿짐 오기 전에 먼저 온 아버지는 지붕만 빼고는 모두 꼼꼼하게 살폈다. 문이란 문은 다 여닫아 보고 수도꼭지는 물이 잘 나오는지를 살폈다. 집 감정하는 사람처럼 물을 부어 가며 하수구들도 빼놓지 않고 점검했다. 집 뒤 좁은 골목까지 둘러본 뒤, 이중으로 된 비탈진 텃밭을 살피던 아버지가 밖으로 나갔다. 집 오른쪽으로 흘러 내리는 실개천 옆의 담벼락도 유심히 보았다.
한참 지나 아버지가 밖에서 불렀다. 아버지는 지팡이로 실개천을 건너는 나무뿌리를 가리켰다. 개천 바깥쪽으로 몇 가닥 나무뿌리가 드러나 보였다. 나무뿌리는 줄기가 되어 담벼락을 뚫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와서야 그게 오동나무인 줄 알았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큰 나무여서 마당 한쪽을 넓은 이파리로 그늘을 만들었다. 의자를 갖다 놓고 앉자마자 아버지는 "참 멋진 벽오동(碧梧桐)이다"고 확인하며 "봉황은 벽오동에만 둥지를 튼다고 해 조선시대에 왕의 상징으로 많이 심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화투에서 '똥'이라 부르는 건 오동나무 잎이다. 화투가 일본에서 넘어오면서 오동잎을 완전히 검게 칠해 못 알아볼 뿐이다. '똥광'의 새도 닭이 아니라 봉황이다"고 설명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설명은 계속됐다. 나뭇결이 아름답고 습기와 불에 잘 견딜뿐더러 가벼우면서도 마찰에 강해 가구를 만드는 좋은 목재다. 예전에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혼수를 대비하기도 했다. 소리를 전달하는 성질이 뛰어나 악기를 만드는 데에도 쓴다. 가야금은 오동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든다. 거문고나 아쟁 앞판은 오동나무, 뒤판은 밤나무로 제작한다.
아버지는 "오동나무가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것은 넓은 잎 덕분이다. 어른의 얼굴보다 큰 오각형의 잎은 훨씬 더 많은 햇빛을 받을 수 있고 그만큼 더 많은 영양분을 만들어 낸다"며 "잎이 크니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뿌리도 아까 본 것처럼 길게 뻗었다. 햇빛을 많이 받으려고 개천을 건너고 담벼락을 뚫고 저렇게 무성하게 자랐다. 무서운 생명력이고 경탄할 순응력이다"고 했다.
회사 부도나고 어렵게 장만한 집으로 이사한 것을 의식해서인지 이어 강한 어조로 "마치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일 수 없는 유한적 존재자인 인간처럼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잘 자랐다. 저 벽오동이 우리 조상의 현신처럼 지켜줄 거다. 환경 탓하지 마라. 우연히 온 이 집 이름은 벽오당(碧梧堂)이다"고 명명하며 "앞으로 우리에게 큰 복이 있을 거다"고 의미를 부여해 낡은 집을 쳐다보던 가족의 투정을 잠재웠다.
아버지는 즐겨 쓰던 한시를 암송했다.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있고, 매화는 일생 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바탕은 변함이 없고, 버드나무 가지는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오동나무로 만든 악기는 천 년을 묵어도 자기 곡조를 간직하고,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에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으며,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치 않으며,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버드나무 가지는 백 번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조선 선조 때 4대 문장가인 상촌(象村) 신흠(申欽) 선생의 수필집 '야언(野言)'에 수록된 시라고 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매화는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원칙을 지키며 의지와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말이라는 설명도 곁들여서 했다. 뒤의 3, 4구절은 백범 김구 선생도 좋아해 서거 4개월 전에 휘호를 썼다고도 했다.
시간만 나면 아버지는 오동나무 그늘에서 쉬며 한시에 곡을 붙여 장구를 치며 시조를 읊었다. 꽤 비쌌던 판소리용 소고(小鼓) 북을 사다 드리자 오동나무를 얼른 키워 거문고를 만들어야 겠다고 다짐하며 "원하는 것보다 원치 않는 환경에서 어려운 선택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여기 서서 다른 곳만 쳐다본다고 내 환경이 달라지지 않는다.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우선이다. 그게 순응성이다. 내 것이 되면 소중해진다. 저 오동처럼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힘을 기르라"고 당부했다.
순응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통해 키울 수 있는 능력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을 먼저 배워 툴툴대는 손주들에게 얼른 가르쳐 물려줘야 할 소중한 덕성이다.
참고로 인용한 문구의 출전은 찾아지지 않는다. 인터넷 혹은 일부 인문학 작가들의 글에서 상촌 신흠의 시(詩)의 일부로 선생의 문집 '상촌집'의 '야언(野言)'이 그 출전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야언에는 저런 글귀가 없다. 상촌 선생의 '야언(野言)'을 읽어봤으면 저런 주장은 감히 못한다.
심지어 신흠 보다 한 세대 앞서 사셨던 퇴계 이황 선생이 위의 글귀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주장에 이르면 그만 말문이 막힌다. 이 시는 7언시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운을 달아 놓지 않아서 정식의 7언시로 보기 힘들 듯하다. 민간에 떠돌던 말을 누군가가 7언시의 형태로 옮겨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벽오동 심은 뜻은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잤더니
어이타 봉황은 꿈이었다 안 오시뇨
달맞이 가잔 뜻은 임을 모셔 가잠인데
어이타 우리 님은 가고 안 오시느뇨
하늘아 무너져라 와르르르르~
잔별아 쏟아져라 까르르르르♬
가수 김도향이 부른 노래 '벽오동 심은 뜻은' 가사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락에 뜻도 잘 모르는 가사를 따라 흥얼거린 적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봉황을 간절하게 기다릴까.
◆ 봉황의 쉼터 벽오동
전국시대 제자백가 장주(莊周)가 쓴 '장자'의 추수편에 "남방에 원추(鵷鶵)라는 새는 벽오동이 아니면 앉지도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도 않고 예천이 아니면 마시지도않는다(非梧桐不止, 非練實不食, 非醴泉不飮)"는 구절이 나온다.
원추는 상상의 새 봉황을 말하며 봉황이 앉아 쉬는 상서러운 나무[祥瑞木]가 오동(梧桐)이다. 연실(練實)은 빨라야 60년에 한 번 맺힐까 말까 한 대나무 열매이며 예천(醴泉)은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시대에만 솟아나는 샘을 말한다. 한마디로 봉황은 성군이 다스리는 태평성대에만 나타난다는 전설의 새다.
전설의 봉황이 앉아 쉬는 오동은 우리가 흔히 부르는 오동나무가 아니라 벽오동(碧梧桐)을 일컫는다. 보통 오동나무는 속이 희기 때문에 백동(白桐)이라 부르고 벽오동은 껍질이 푸르기 때문에 청오(靑梧) 혹은 청동목(靑桐木)이라고 부른다.
조선 후기 선비인 유박이 쓴 '화암수록'의 '화목구등품제'에는 오동나무를 6등에 넣고 평하기를 "벽오동이 좋은 품종이다, 화분에서도 덮개 모양으로 기르기에 좋다"라고 했을 정도로 오동나무와 벽오동을 구분하지 않았다. 나무 이름이나 목재 쓰임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나무이다. 식물학적으로 보면 오동나무는 현삼과고 벽오동은 벽오동과다.
한자 '梧(오)'의 오동은 벽오동을 뜻하고 '桐(동)'은 오동나무를 뜻한다. 봉황이 쉬어가는 오동은 모두 벽오동으로 보면 된다. 오동나무로 악기를 만들듯이 벽오동도 거문고와 비파를 만드는데 귀중하게 사용됐다. 특히 벽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를 '사동(絲桐)'이라고 불렀다.
벽오동은 세월이 지나더라도 줄기가 푸르고 윤기가 나며 자라는 속도도 빠르다. 한 해에 1m 정도 쑥쑥 크고 높이가 15~20m까지 자란다. 줄기에 가지가 자란 흔적을 세보면 나이를 짐작할 수 있다. 늦봄에 잎이 돋아날 때 주황색으로 아름답게 보이는데 새잎에 돋아난 털의 색깔 때문이다.
다 자란 이파리도 오동잎처럼 넓고 손가락처럼 잎 가장자리 끝이 3~5개로 갈라진다. 여름이 시작 될 무렵인 6월에 엷은 노란색을 띠는 꽃이 가지 끝에 피어 풍성한 꽃차례를 이룬다. 10월 무렵 아래로 오므린 듯 바람개비 모양의 날개에 맺힌 콩 같은 열매가 4, 5개 익는다. 열매는 한약재나 볶아서 커피 대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입추가 지나면 벽오동 잎이 점차 노랗게 물들어 한 잎씩 지기 시작한다. 이즈음에 옛 사람들은 "벽오동 잎 한 장이 떨어지니 세상에 가을이 다가왔음을 안다(梧桐一葉落 天下盡知秋)"고 표현했다.
◆ 봉황 등장하면 벽오동도 소환
봉황이 쉬는 터전이 벽오동이니 옛날 문장이나 글에 실과 바늘처럼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한석봉의 천자문에는 '鳴鳳在樹 白駒食場(명봉재수 백구식장)'이라는 말이 나온다.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이 되면 봉황이 나무에 앉아 울고, 망아지 같은 네발 달린 짐승들도 사람을 잘 따르게 된다는 의미다. 여기서 봉황이 앉아서 쉬는 나무가 바로 벽오동이다.
고려 문장가 이규보(李奎報)가 쓴 영동(詠桐: 오동나무를 읊다)에는 봉황이 오지 않으니 자못 한탄조의 심기가 배어 있다.
漠漠陰成幄(막막음성악)
넓고 넓은 그늘 장막을 이루더니
飄飄葉散圭(표표엽산규)
나부끼는 잎사귀는 모처럼 흩어지네
本因高鳳植(본인고봉식)
본래 봉황 보려고 심었는데
空有衆禽棲(공유중금서)
부질없이 잡새들만 깃드네
조선시대 문장가 송강 정철은 식어버린 선조 임금의 사랑을 다시 찾아오기를 기원하면서 '번곡제하당벽오(飜曲題霞堂碧梧: 하당의 벽오동을 번곡하여 적다)'라는 시를 썼다.
樓外碧梧樹(누외벽오수)
다락 밖에 벽오동나무 있건만
鳳兮何不來(봉혜하불래)
봉황은 어찌 안 오는가
無心一片月(무심일편월)
무심한 한 조각달만이
中夜獨徘徊(중야독배회)
한밤에 홀로 서성이는구나
봉황이 벽오동에 내려 앉기를 갈망하는 이유는 벼슬에서 쫓겨나 변방에 떠도는 자신을 임금이 다시 불러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나라와 임금을 동일시하던 왕조시대에 '성은이 망극'할 정도로 임금을 사랑했거나 사랑하는 척이라도 했던 선비들은 그들의 공간인 서원이나 향교에 벽오동을 한 두 그루 심고 가꿨다.
깨끗하고 푸르며 줄기는 곧게 올라가 절개 높은 선비 정신과도 잘 부합돼 봉황의 쉼터를 조성한 것인데 여기에는 너른 잎이 햇빛을 가려줘 학문을 연마하는 공간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실용성도 고려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조선 중기 퇴계의 제자이자 문신인 학봉 김성일(金誠一)은 퇴계 사후 도산서원에 들러 스승을 그리워하는 시 '도산오죽만정 승월배회 감루산연(陶山梧竹滿庭 乘月徘徊 感淚潸然)'을 읊었다.
幽貞門掩暮雲邊(유정문엄모운변)
저녁 구름 떠 있는 가에 유정문은 닫혀 있고
庭畔無人月滿天(정반무인월만천)
사람 없는 뜨락에 달빛만 가득 하네
千仞鳳凰何處去(천인봉황하처거)
천길 높이 나던 봉황은 어디로 가셨나요
碧梧靑竹自年年(벽오청죽자년년)
벽오동과 푸른 대나무는 해마다 자라는구나
퇴계를 봉황에 비유하고 품격을 천길이나 된다고 표현했다. 높은 도덕성과 심오한 철학을 가르치며 일생을 살다간 스승을 눈물로 추억했다.
태평성대를 갈구하고 존경하는 스승을 그리워할 때만 봉황과 벽오동을 말한 것은 아니다. 판소리 '열녀춘향수절가'에 춘향과 이도령이 사랑을 하는 대목에도 등장한다. "단산(丹山) 봉황이 죽실(竹實) 물고 오동(梧桐) 속에 넘노는 듯 구고(九皐) 청학(靑鶴)이 난초를 물고서 오송간(梧松間)에 넘노는 듯…"
전설의 새 봉황과 천하가 태평할 때만 운다는 청학만큼 그들의 사랑을 환상적으로 멋스럽게 보았기 때문에 최고의 비유를 했으리라 짐작한다.
◆ 화투 11월 그림은 봉황과 벽오동
대구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봉무동(鳳舞洞)에도 봉황과 오동나무에 관한 얘기가 있다. 예로부터 오동나무가 많았던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동수(桐藪)'다. 조선 후기에 정자 곁에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구덩이를 팠더니 땅속에서 봉황이 나와 북쪽으로 날아 가더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종 12년(1875년) 성리학자 봉촌(鳳村) 최상룡(崔象龍)이 봉무정(鳳舞亭,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8호)을 짓고 주위에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인과 의를 실현하는 공간으로 구상했다고 한다.
대구 앞산에도 벽오동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특히 고산골 맨발로 걷는 길의 남쪽 편에 도열하듯이 늘어선 수백그루의 벽오동은 가을에 열매를 매달고 우뚝이 서있어 청명한 하늘과 함께 장관이다.
우리는 봉황을 화투판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화투의 11월을 상징하는 '똥광' 그림의 닭과 비슷한 새가 봉황 머리다. 흔히 화투의 봉황을 '똥'이라고 부르는 것은 함께 그려진 '오동' 잎을 짧게 발음하다 보니 '똥'으로 부르게 됐는데 실제로는 벽오동이다.
우리나라 대통령 휘장 속의 무궁화를 감싸고 있는 꼬리 긴 새가 봉황이다. 그런데 봉황을 직접 본 사람이 없으니 화투의 그림과 청와대 휘장의 이미지는 천양지차다.
난세에 태평한 시대를 상징하는 봉황을 기다리는 게 옛 사람들이었다. '과학의 시대'에 나무 벽오동을 보면서 '전설의 시대' 새인 봉황을 떠올려 보는 낭만도 괜찮을 것 같다. 대통령이 리더십을 발휘해 국민들을 편안하게 해주면 그것이 곧 태평성대다. 우리가 꿈꾸는 대통령을 기다리며 내년 봄에 벽오동 한 그루를 심고 싶다.
▶️ 碧(푸를 벽)은 ❶형성문자로 玉(옥; 구슬)과 石(석; 돌),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명백하다의 뜻을 가진 白(백, 벽)으로 이루어졌다. 옥돌의 맑고 푸른 기가 있는 흰색이, 전(轉)하여 푸르다, 녹색의 뜻으로 쓰인다. ❷형성문자로 碧자는 ‘푸르다’나 ‘푸른빛’, ‘푸른 옥’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碧자는 珀(호박 박)자와 石(돌 석)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여기서 호박이란 소나무 송진이 화석화된 것을 말한다. 고대부터 호박은 보석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보석을 뜻하는 珀자에 石자를 더한 碧자는 ‘푸른 옥’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이다. 그러나 지금은 주로 ‘푸른빛’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碧(벽)은 벽색(碧色)의 뜻으로 ①푸르다 ②푸른빛 ③푸른 옥(玉) ④푸른 물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푸를 창(蒼), 푸를 록(綠), 푸를 취(翠), 푸를 청(靑)이다. 용례로는 짙게 푸른 하늘을 벽공(碧空), 안구가 푸른 눈을 벽안(碧眼), 깊고 푸른 바다를 벽해(碧海), 물빛이 매우 푸르게 보이는 맑은 시내를 벽계(碧溪), 푸른 물결을 벽랑(碧浪), 푸릇푸릇한 구름을 벽운(碧雲), 푸른 이끼를 벽태(碧苔), 이끼 끼어 푸른 바위를 벽암(碧巖), 푸른 하늘을 벽주(碧宙), 푸른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벽간(碧澗), 풀과 나무가 무성한 푸른 산을 벽산(碧山), 푸른 비단을 벽라(碧羅), 푸른 하늘을 벽락(碧落), 짙은 푸른빛을 벽록(碧綠), 푸른 물의 흐름을 벽류(碧流), 곱고 짙푸른 빛깔을 벽색(碧色), 푸른 나무를 벽수(碧樹), 깊어서 푸른빛이 나는 물을 벽수(碧水), 푸른빛을 띤 옥을 벽옥(碧玉), 푸른 빛깔의 매우 단단한 기와를 벽와(碧瓦), 푸른 하늘을 벽우(碧宇), 푸른 하늘을 벽천(碧天), 구리에 녹이 나서 생기는 푸른 빛깔을 벽청(碧靑), 푸른 물결을 벽파(碧波), 푸른 하늘을 벽허(碧虛), 푸른빛을 띤 진한 피를 벽혈(碧血), 항상 푸름을 상벽(常碧), 약간 검은빛을 띤 청색을 감벽(紺碧), 짙은 푸른빛을 남벽(藍碧), 푸른 바다가 뽕나무 밭이 되었다를 일컫는 말을 벽해상전(碧海桑田), 푸른 시내가 흐르는 산골을 일컫는 말을 벽계산간(碧溪山間), 이끼 낀 푸른 바위와 그윽한 돌을 일컫는 말을 벽암유석(碧巖幽石) 등에 쓰인다.
▶️ 梧(오동나무 오, 악기 이름 어)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吾(오)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梧(오, 어)는 ①오동나무 ②책상(冊床), 서안(書案) ③기둥, 버팀목 ④거문고 ⑤날다람쥐 ⑥버티다, 지탱하다 ⑦크다, 장대하다 ⑧거스르다 ⑨맞이하다, 그리고 ⓐ악기의 이름(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오동나무 동(桐)이다. 용례로는 오동나무 잎을 오엽(梧葉), 오동나무 그늘을 오음(梧陰), 편지를 받는 사람의 이름 밑에 써서 존경하는 뜻을 나타내는 말을 오하(梧下), 오동잎이 지는 가을이라는 뜻으로 음력 칠월을 달리 이르는 말을 오추(梧秋), 맞서서 겨우 버티어 감을 지오(枝梧), 오동잎은 가을이면 다른 나무보다 먼저 마름을 오동조조(梧桐早凋), 오동나무 한 잎이라는 뜻으로 오동잎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왔음을 안다는 말을 오동일엽(梧桐一葉), 무른 오동나무가 견고한 뿔을 자른다는 뜻으로 부드러운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김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오동단각(梧桐斷角) 등에 쓰인다.
▶️ 桐(오동나무 동)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바로 통하는 뜻을 가진 同(동)으로 이루어졌다. 나뭇결이 바른 나무의 뜻이다. 그래서 桐(동)은 ①오동나무(현삼과의 낙엽 활엽 교목) ②거문고(우리나라 현악기의 하나) ③어린이(=僮) ④땅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오동나무 오(梧)이다. 용례로는 오동잎을 동규(桐圭), 유동의 씨에서 짜 낸 건성의 기름을 동유(桐油), 오동나무와 가래나무라는 뜻으로 좋은 재목읊음을 말함을 동재(桐梓), 오동나무로 만든 화살집을 전동(箭桐), 거문고의 별칭을 사동(絲桐), 오동나무의 모양이 그려져 있는 화투짝으로 11월을 나타냄을 오동(梧桐), 엄나무를 해동(海桐), 오동나무의 껍질을 가루로 만들어 메밀가루나 밀가루에 섞어 만든 국수를 동피면(桐皮麵), 엄나무 껍질을 해동피(海桐皮), 오동나무를 켜서 만든 널빤지를 오동판(梧桐板), 돌 위에서 자라는 오동나무를 석상동(石上桐), 무른 오동나무가 견고한 뿔을 자른다는 뜻으로 부드러운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김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오동단각(梧桐斷角), 오동나무 한 잎이라는 뜻으로 오동잎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왔음을 안다는 말을 오동일엽(梧桐一葉), 오동잎은 가을이면 다른 나무보다 먼저 마른다는 말을 오동조조(梧桐早凋)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