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 길에서 만났던 당진의 한진포구와 심훈의 필경사.
당진시 송악읍 한진리漢津里에 있는 한진나루는 일명 대진 또는 나루머리라고도 부른다. 이 나루는 조선시대에 당진, 서산, 태안, 보령, 서천 등지에서 서울로 통하는 유일한 기항지였다. 아산만에서 서해로 통하는 큰 포구였으므로 항시 사람들로 붐비던 나루였다.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로 가는 배가 오가던 한진 나루의 ‘한진’이라는 지명은 중국의 한나라와 교역하던 항구라 이름 지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당진’이라는 지명 역시 당나라와 교역하던 항구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그렇게 번성했던 한진포구가 한진나루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으니,
일자나 한자 들고 봐, 일월 송송 해송송, 장자나 한자 들고 보오, 장원에 광대 박광대, 광대 중에도 제일이라.
당진시에 내려오는 〈장타령〉을 부르며 바다를 따라 북동쪽으로 올라간 당진시 송악읍 상록수 길에 <심훈기념관>이 있다. 송악읍 부곡리에서 태어난 심훈(沈熏)은 일제 강점기의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영화인이었다.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그는 ‘철필 구락부 사건’ 으로 기자노릇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왔다. 심훈은 <공동경작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에 앞장 선 심재영과 화성시 반월면의 샘골마을에서 농촌운동을 벌이다가 작고한 최영신을 모델로 <상록수>를 집필했고, 주인공이 박동혁과 채영신이었다.
동일일보에 연재 된 이 작품을 쓸 당시 ‘내가 죽으면 이 책을 제상 위에 놓아라.“라고 말했던 그는 책을 쓰고 나서 교정도 다 보지 못하고 너무 이른 나이인 서른다섯 살의 나이로 타계하고 말았다.
심훈이 <상록수> 를 집필한 곳이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상록수길 97에 있는 필경사였고, 당진시는 심훈의 항일 및 계몽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 주택인 필경사 일원에 기념관을 건립한 뒤 '심훈기념관'이라 이름 지었다. 기념관에는 심훈의 후손 및 여러 사람들이 기증하고 위탁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무나 오게, 아무나 오게”
문득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서 채영신의 말이 떠오르는 심훈이 생가에 그가 지은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춤이라도 추고,
한강이 뒤짚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와서,“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을 바라보다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그날이 오면>의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은 아니었으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을 가슴 아리게 읊조리며 심훈 기념관인 <필경사>를 나와서 다시 걷는 서해랑 길, 우리가 기다리는 그날이 오기는 올 것인가?
신정일의 <서해랑 길 인문기행> 출간을 앞두고 다리 아프게 걸었던 서해랑 길이 아득하면서도 그립다.
2024년 6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