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담당 의사가 힘들게 잠든 나를 깨웠다. 어제 응급실에서 찍은 CT결과가 좋지 않아서 치료과정과 현재의 우려를 설명해주려고 왔지만 나는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설마, 내가 왜? 괜찮겠지, 주님께서 벌써 나를 부르시지는 않을 거라는 막역한 믿음에 기대었지만, 서서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왔다. 양쪽 폐의 염증, 순간에 갈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식욕부진과 숨 쉬는 일이 힘들었다. 죽는 사람들 다수가 폐렴으로 간다는 건 알고 있었다. 코로나로 온 폐렴이 차도가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다는 기억을 하면서 비로소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인수인계할 게 있는지, 남편에게 메모를 해놔야 할 것들이 있는지. 딸들에게는 주고 갈 수 있는 게 있는지, 원한을 품었던 사람을 생각해보고 갚아야 할 빚이 있는지 받을 돈이 있는지 온갖 생각이 왔다. 자꾸 의식이 몽롱해지면서 호흡곤란으로 오는 편두통에 시달리면서 죽음은 미리 준비해두라고 하는데 나는 준비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나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은 약속 되어있는 운명이 아닌가?
하늘나라에는 주님이 계시니까 차라리 가야될 길이면 지금 가서 편히 쉬고 싶다는 자포자기도 오고,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내가 왜?
누구에게나 죽음은 갑작스럽다. 병사나 자연사는 사고사에 비해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이 있어 죽음을 준비하는 데 여유가 있을 법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렇다면 죽음을 준비할 수나 있을까? 죽음은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정도만이 죽음의 준비의 최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표면적으로야 얼마든지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 겉으로 보면,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건 빈소에 들어가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바로 영정 사진이다. 차근차근 죽음을 준비한 분들을 보면, 영정 사진이 제대로 만들어져 있다. 반면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했던 분들은 일상에서 찍은 스냅사진 일부를 확대하거나 재촬영하는 바람에 흐릿한 사진이 걸려있기 일쑤다. 외적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게 사진만은 아니다. 수의나 장제 관련 물품도 있고, 무덤 자리 마련도 있을 터다.
그렇다고 그런 외적인 것들의 준비만이 죽음의 준비일까? 내가 보기엔 죽음을 준비하는 데 내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 가족과의 화해일 터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은 상처를 주는 건 가장 가까이 사는 가족이기에 가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과의 화해가 가장 중요할 것 같다. 특히 배우자와의 화해가 있어야 하고, 자식과의 화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나아가 함께 살아온 이웃과의 화해, 세상과의 화해, 때론 내가 파괴했던 자연과의 화해도 있을 터다. 이웃들, 또 세상과 화해하는 과정도 거치며 눈앞에 다가온 죽음이 주는 공포나 심적인 고통, 막막한 내면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자연과의 화해를 위해 자신의 장례 방법으로 나무 아래에 자신의 유해를 묻는 수목장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나 자신과의 화해일 것 같다.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기 위해서 자신이 받았던 상처를 보듬어주고, 자신의 삶이 괜찮았다고 말해주고 상처를 봉합해주는 과정을 거치는 건 어떨까? 그건 죽음을 앞둔 이에게 가장 절실하고 가장 필요한 일이 될 것 같다.
자신과의 화해의 방법으로 자신의 부고 기사를 자신이 직접 써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신문에 나오는 사망자에 관한 기사 말이다. 영어로 흔히 ‘오비추어리 노티스’(Obituary Notice)라고 부르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거둔 성과나 살면서 이룬 꿈, 심지어는 잘못했던 것, 오점까지 하나하나 적어보는 것이다. 하나도 빼먹으면 안 된다. 그래야 자신에 대한 눈물의 용서와 화해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의 부고기사를 직접 쓰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평가하고,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남겨진 시간이나마 소중하게 쓸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보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경외감도, 모멸감도 생기겠지만, 몇 시간이 될지, 며칠이 될지, 혹은 몇 달이 될지 모르지만, 보람되게 자신의 여생을 쓸 수 있다면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향년(享年), 한평생 사람이 살아 누린 나이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길게 살았지만, 아무 의미 없이 살다간 이도 있고, 짧게 살았지만, 의미 있는 삶을 살다간 이도 있기 때문이다. 죽었어도 살아있는 삶과 살아 있어도 죽어있는 삶의 의미의 그 깊이를 다시 생각해보는 병상의 시간으로 비로소 지금은 감사한 마음이다.
깊어가는 겨울 한파를 헤치며 달려가 시린 겨울 바다라도 봐야 죽음의 심연, 그 웅숭 깊은 뜻을 표피적으로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은 혹한의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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