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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제 시간이 되자 눈이 떠지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을 보니 녀석은 곤히 자고 있었다. 어제 일을 생각해보니, 녀석 너무 멋있었다. 아, 괜히 심장 두근거리네.
그 ‘저주’에 대해서도 알았겠다, 이제부터 저 녀석이 나에게 흠뻑 빠지도록 유혹해야지. 나도 최대한 다른 놈들과의 연애를 줄이
고 유혹에만 신경 써야지. 뭐, 다른 놈들과 똑같이 난 이 녀석을 애완견 이상으로 보지 않을 테니까······. 나는 진정으로 누굴 사랑
하지 못할 테니까······.
일단 깨끗이 씻고 끈 민소매 옷과 짧은 반바지로 갈아입고 자고 있는 녀석 옆으로 갔다.
“여빈아~ 그만 일어나야지~”
다른 녀석들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잔뜩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런데 이 녀석, 내가 그렇게 말하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도끼눈으로 날 본다.
“으아, 닭살 돋아······.”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란······!
간신히 소리 지르려던 것을 억누르고는 미소 지으며 녀석에게 바짝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남자들이 침을 꼴깍 삼키는 내 가슴골
을 아슬아슬하게 보여주며.
그런데 이 녀석이 한다는 말이.
“무슨 쇼해요?”
쇼, 쇼란다······. 만만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녀석,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더니 내 옷차림을 훑어본다. 이제 넘어오려나? 했더니 아니다.
“옷차림이 그게 뭐예요? 아직 꽃샘추위도 다 안 가셨는데 얼어 죽을 일 있어요? 얼른 긴 옷으로 갈아입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며 도로 누웠다.
“야, 예쁘다고 칭찬 좀 해주면 어디 덧나?”
“이 추위에 얼어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 어딜 봐서 예쁘단 거예요?”
녀석이 날 쳐다보지도 않으며 말한다. 하긴, 아직 날씨가 꽤 춥긴 춥다만·······. 기분이 확 상한다.
“야! 난 너한테 예쁘다는 소리 듣고 싶어서 이렇게 입은 거란 말이야!”
“전 계절에 맞는 옷을 입은 사람이 예쁘다고 생각하는데요.”
“쳇!”
하는 수 없이 다시 얇은 긴 옷으로 갈아입었다.
“얼른 일어나!!”
녀석을 유혹해야한다는 것을 잠시 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아까 애교 부리며 깨울 때는 도끼눈으로 날 보더니,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까는 안 일어나더니만.”
“아까는 소름 돋아서. 주인님은 그게 제일 잘 어울려요.”
이걸 칭찬으로 받아야 할지, 욕으로 받아야 할지······.
“그보다 발목은 괜찮으세요?”
“어? 아, 응. 걸어 다닐 수는 있어. 얼른 씻고 와, 아침밥은 오래간만에 나가서 먹을 테니까.”
“에이, 귀찮아서 그러는 거면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 하품하며 씻으러 가는 녀석의 뒤통수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 녀석이 씻을 때, 녀석의 옷장을 살펴봤다. 옷장을 보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트레이닝 바지 두 벌, 흰 면 티 세 벌이 다니······. 영화 보러 가기 전에 옷부터 사 입혀야 되겠군.
준비를 다 끝내고 집밖으로 나왔다. 녀석은 트레이닝 복 차림에 슬리퍼, 나는 조금 미안하지만 어차피 옷을 사 줄 테니 흰색 후드
티에 연한 청색 스키니진을 입고 낮은 굽의 검정 구두를 신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와서 제일 먼저 백화점에 들어갔다.
수많은 옷이 진열된 곳에서 직원을 불렀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음~ 이 남자한테 맞는 청바지랑 제가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후드 티요.”
“네~ 잠깐만요, 사이즈 좀 재겠습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변한 여직원이 녀석을 훑어보고 있을 때, 또 다른 여직원이 달려왔다.
“어머, 언니~ 사이즈 재는 전문은 나지~ 손님, 허리둘레 좀 재겠습니다!”
줄자를 뺏은 뒤, 녀석의 허리둘레를 재는 여직원을 노려보는 또 다른 여직원. 하긴, 녀석이 멋지긴 하지.
그에 반에 자기가 인기가 있는지 없는지 전혀 관심 없는 저 표정은······.
“호호, 잠깐만 기다리세요, 손님~”
“후드 티 찾아왔습니다.”
“여빈아, 탈의실가서 갈아입고 와.”
옷을 받아든 녀석을 탈의실로 집어넣고,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이 나오고······. 어느 잘나가는 연예인 뺨칠 수준의 녀석이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역시~ 녀석의 외모는 알아
봐 줘야해.
“어쩜~! 너무 잘 어울리세요, 손님!”
이건 오버가 아니라 사실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다.
여직원에게 옷 계산을 하고 달려있는 상표를 모두 때어냈다. 똑같은 후드 티에 청바지, 누가 봐도 연인으로 보겠지?
“자, 그럼 신발 매장으로 가자. 운동화로 사야지.”
“옷 입는 사람은 난데 그쪽이 더 신난 것 같네요.”
“오랜만의 쇼핑이니 신나지! 얼른 가자.”
녀석을 이끌고 신발매장으로 가서 운동화 하나 골라 녀석에게 신기고 곧바로 계산했다. 녀석이 입고 있던 옷과 신발은 쇼핑백에
넣고 백화점 내의 사물함에 넣어두었다.
“아침으로 햄버거 먹을까?”
“아침부터 햄버거는 좀 그렇지 않아요?”
“됐어, 내가 먹고 싶은 거야.”
“그럴 거면 아예 묻지를 말던가.”
“시끄러.”
이게 요즘 은근 대들고 있어.
녀석을 또 이끌고 근처 햄버거 집에 갔다. 휴일이라서 그런지 시내에는 사람이 북적였다.
간신히 주문하고 햄버거 받아 빈자리에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
서로 아무 말 없이 먹다 슬쩍 녀석이 햄버거 먹는 모습을 보았다.
“햄버거 먹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네.”
게다가 무슨 CF 찍는 것 같아.
“피자 빵은 느끼해서 못 먹겠다고 하더니만.”
“햄버거는 먹을 만한데요.”
흐음······. 식성을 알다가도 모르겠네.
“여기 묻었어요.”
“어?”
잠시 멍하니 있을 때, 갑자기 녀석이 티슈로 내 입술 주변을 닦아주었다.
“칠칠맞게 묻혀서 먹고.”
“아, 어······. 고마워.”
“다 먹었으면 얼른 나가요, 얼른 자리 비켜줘야죠.”
“으응·····.”
녀석과 같이 햄버거 집을 나오고 영화 매표소 앞으로 갔다.
“뭐 보고 싶은 거 있어?”
“아는 영화 없어요.”
“흐음······. 공포 볼까?”
“제대로 보지도 못 하면서.”
하긴······. 분명 눈 가린 채로 영화 상영 시간을 다 끝낼 거다.
“로맨스? 아니, 그건 내가 별로다. 코믹? 요즘 재미있는 것도 없다던데. 멜로? 난 멜로도 싫어하고”
“그럼 볼 게 있나?”
녀석의 말대로 이것저것 다 제외시키다보니 볼 게 없다.
“으음, 공포는 몰라도 스릴러는 볼 수 있을 듯한데.”
내용이 뭔지 모르겠지만 15살 관람가라고 적혀있는 스릴러 영화. 15살 관람인데 설마 잔인한 장면이 나오겠는가? 했더니 나온다.
“엄마야!!”
피 튀기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눈을 감고, 더불어 소리까지 끔찍할 때는 옆의 녀석의 팔을 붙잡아 벌벌 떨었다.
지옥 같기만 한 두 시간의 상영 시간이 끝나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영화관을 나왔다.
나오는 내내 내 모습이 웃긴지 녀석은 계속 쿡쿡 웃고 있었다.
“웃지 마!”
“하, 하지만 완전 겁에 질려가지고······.”
숨넘어갈 듯 웃는 녀석이 너무 얄밉기만 하다. 녀석이 비명이라도 질렀더라면 나도 비웃어줄 테지만·······. 녀석은 겁은 커녕 하품
하며 졸린 모습이었다. 아니, 졸리다가도 내가 겁에 질려 옆에 붙기라도 하면 웃질 않나, 괜찮다며 영화보라고 하지 않나······.
“영화도 봤으니 집으로 가요?”
“무슨 소리!! 나온 김에 신나게 놀다 갈 거야.”
“아직 발목 다 나은 것도 아닌데 무리하지 마요.”
“걱정 마, 걱정 마!”
그래도 내 걱정 해주는 녀석이 기특하기만 하다.
녀석을 이끌고 오락실로 향했다. 갖가지 오락실 게임이 있고 제일 먼저 총으로 좀비 쏴 죽이는 곳으로 갔다.
2인용으로 설정하고 게임을 시작하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난 죽고 말았다. 젠장······. 반면 녀석은 단 한 번도 공격을 맞지 않
고 백발백중에다 혼자 게임을 클리어 해버렸다. 쳇!
그 이외에도 이지, 태고, 테크니카 등 안 해본 게임이 없었고, 단 한 번도 녀석에게서 이기지 못 했다. 분명 오락실은 처음일 텐
데!!
그리고 한다는 말이······.
“우와, 주인님 엄청 게임 못 하시네요.”
이걸 정말!!! 내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가장 잘 하는데!!!
“그래, 너 게임 잘 한다!!”
“어, 삐쳤어요?”
“안 삐쳤어!”
“에이, 삐친 거 맞는데, 뭘.”
“아니라니까!”
저게 또 쿡쿡거리며 웃고 있다. 쳇, 완전 날 갖고 놀아라, 놀아!
“어떻게 하면 풀리실 건데요?”
녀석의 물음에 잠시 생각해 보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오늘 시내에 나온 이유가 저 녀석을 유혹(?)하기 위해서였잖아? 아, 미치
겠네. 유혹은 커녕 완전 놀림거리가 되고 있으니······.
“야, 한여빈.”
“네?”
“우리 사진 찍자. 스티커 사진.”
이리저리 둘러보다 발견한 스티커 사진 기계. 오랜만에 찍어보고 싶기도 하고 애완견이 사람으로 변한 것을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기도 했다.
“뭐, 그러죠.”
스티커 사진 기계 안으로 들어가 돈을 넣고 녀석을 옆에 세운 뒤 한 장 찍었다.
“어디보자~ 너는 강아지 귀에다가 목에는 목줄~”
“아, 그게 뭐에요.”
“뭐 어때. 사실이잖아.”
“그럼 주인님은 갈매기 눈썹.”
“야, 안 돼!!”
이리저리 실랑이 하다 얼굴이 완전 엉망이 되었고, 그걸 취소하지도 못 한 채 또 다시 포즈를 취하라는 기계 소리가 들려왔다.
뭐, 이미 지난 거 어떻게 하겠는가.
다시 그 녀석과 옆에 나란히 서서 개구지게 웃기도 하고, 얼짱 각도를 취하기도 하고, 연인처럼 팔짱끼기도 했다.
두 장 정도 남았을 때, 이왕 이렇게 나온 거 연인으로 찍을까 생각이 들어, 신호음에 맞춰 까치발을 살짝 들어 녀석의 뺨에 입을
맞췄다.
“뭐예요, 갑자기······.”
녀석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날 보자 그저 배시시 웃었다.
“뭐, 그냥. 이렇게 찍는 것도 나쁘지 않아서.”
“난 또. 주인님이 술 먹은 줄 알았네.”
“뭐, 뭐야!!”
이게 꼭! 무드 없게 그런 말을 꼭 해야겠냐!!
또 다시 포즈를 취하라는 목소리에 어떤 포즈를 지을까 고민을 했고, 얼마안가 카운터다운이 시작됐다.
“5, 4, 3·····.”
약 2초를 남겨두고 아직까지 생각을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녀석이 내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입을 맞췄다.
찰칵 소리가 들린 뒤, 입술이 떨어지고 난 여전히 녀석을 보고 있었다.
녀석이 씩 웃었다.
“당한 거 그대로 되갚아준 거예요.”
“어, 어······.”
여전히 멍한 얼굴로 찍힌 스티커 사진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햇빛이 강열한지 얼굴이 뜨거운 걸 느꼈다.
녀석이 잠시 내 심부름으로 음료수를 사러 간 사이 벤치에 앉아 찍힌 스티커 사진들을 보았다.
제일 처음의 낙서투성인 사진. 그 뒤에 자연스러운 스티커 사진, 내가 녀석에게 뽀뽀한 사진과 녀석이 내게 키스한 사진······.
시선이 한 동안 마지막 사진에 머물렀다. 한 눈에 보아도 녀석에게 손목이 잡혀 끌려가는 것과 놀라 크게 뜨여진 내 눈, 그리고 서
로 붙어있는 입술.
그걸 보고 있자니 절로 배시시 웃음이 난다.
“음료수 사 왔어요.”
“아, 고마워.”
녀석이 내게 오렌지 주스 캔을 내밀었다. 그런데 같이 건네준 거스름돈이 꽤 많다.
“근데 넌 안 먹어? 분명 돈 남았을 텐데.”
“별로 먹고 싶지 않아요.”
“그래?”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은근 안 먹는다. 그래서 나보다 가벼운 건가? 나도 이제부터 다이어트 좀 할까······.
“그럼 이제 뭐해요?”
“으음······. 시내에서 영화 말고는 딱히 할 것도 없고. 쇼핑할까?”
“그러시던지.”
“얼른 가자!!”
또 다시 들어온 백화점. 제일 먼저 인형들이 눈에 띄었다.
“와, 이것 봐, 진짜 귀엽다!”
보들보들한 곰 인형을 얼굴에 비볐다.
“이거 하나 사갈까?”
“인형은 왜요?”
“너 대신 안고 잘 거. 토실이랑 크기가 엇비슷하잖아. 보드랍고.”
“그럼 저야 좋죠.”
“무슨 뜻이야? 네가 왜 좋아?”
“아니, 아무것도.”
내가 노려보자 저 녀석, 딴 짓한다.
다시 곰 인형의 가격을 보았다. 생각보다 비싸네. 다른 거 고를까?
“주인님~ 이쪽 좀 봐요.”
“어?”
녀석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는데······. 갑자기 나타난 괴상망측한 얼굴에 놀라 소리도 못 지르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피투성이의 얼굴······. 그 가면 뒤로 녀석이 웃음소리가 들린다.
“뭐, 뭐, 뭐야······.”
“큭큭, 아, 주인님 완전·······.”
가면을 벗은 녀석이 완전 숨넘어갈 듯 자지러지게 웃는다.
“영화 볼 때도 그렇고······. 이런 거 엄청 약하구나.”
녀석의 숨넘어갈 듯 웃는 모습에 또 다시 목소리부터 커졌다.
“야아!!! 내가 얼마나 놀랬는데! 내가 심장마비로 죽으면 책임 질 거야!!!”
벌떡 일어나 녀석을 주먹으로 때려보지만, 웃기 바쁘다.
“아, 아!”
괘씸한 생각에 녀석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고 뜯었다. 그런대도 웃음을 멈출 생각을 안 한다.
“그만 웃어!!”
한바탕 난리를 치고, 녀석과 멀찍이 떨어져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주인님~”
“······.”
“화 안 풀렸어요?”
“······.”
“대답 좀 해보라니까.”
“······.”
“그만 용서 좀 해주지.”
내가 용서해 줄까보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웃다니······.
“여울 주인님~?”
“······.”
녀석의 말을 계속 무시하니, 더 이상 말 걸지 않는다.
슬쩍 뒤를 보니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 가버려라!
씩씩거리며 무작정 걸어가는데······. 점점 녀석이 걱정된다. 모습도 보이지 않고, 게다가 여긴 워낙 넓어 자칫 잃어버릴 수도 있는
데······.
“여빈아······?”
아무리 둘러봐도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점점 다급해졌다.
“야, 한여빈!”
내가 화났다고 해서 말도 없이 사라질 애가 아닌데. 설마 납치?!
가능성 있는 얘기일지도······. 걔가 겉으로 보기에는 돈도 많아 보이고······.
미아센터에 신고할까? 아니, 아직 너무 이른 것 같고······. 혹시 화장실 간 건가? 너무 급해서 말도 하지 않고 간 것일 수도······.
아까 있던 장소로 되돌아와 제일 가까운 화장실 쪽으로 가 보았다. 하지만 역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화장실 옆, 백화점 창고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 쪽에서 두런두런 목소리만 들려올 뿐.
“내가 반가운 애를 데리고 왔어.”
“어머,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지?”
“역시 그 소문은 거짓이었구나?”
여자 두 명의 목소리······. 녀석을 찾는 것이 시급했기에 얼른 다른 곳으로 발길을 옮기려던 순간,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니들 모르는데.”
아까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이었다. 슬그머니 다가가 상황을 보았다. 녀석이 벽에 기대어있고, 여자 둘이서 녀석을 둘러
싸고 있는 상황.
자세히 보니 아는 여자들이었다. 얼굴에 잔뜩 피어싱을 한······. 분명 나와 같은 학교의 선배들이었다.
“어머, 무슨 소리야. 1년 동안 보지 않아서 잊은 거야?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 소문 때문에.”
소문?
“미안하지만 그쪽하고는 초면이고, 그 소문 또한 몰라.”
“소문은 모른다고 치더라도, 우리를 모르다니. 너무하잖아.”
“머리색을 바꾸고 우릴 잊기로 한 거야?”
“난 니들 모른다니·······!”
갑자기 한 여자가 다짜고짜 녀석의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부딪쳤다.
“키스 실력은 그대로인데, 뭘. 아직도 기억 안 나?”
녀석의 화난 얼굴에······. 녀석의 입에서 내뱉어지는, 처음 들어보는 험한 말들.
“하하, 이것 봐! 딱 민정우네. 안 그래?”
“그러게.”
“내가 몇 번이나······!”
“한여빈!”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다짜고짜 모습을 드러내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그 녀석은 물론이고 선배들도 날 쳐다보았다.
“어라, 넌 한여울 아니야? 우리 학교 애 맞지?”
“선배, 죄송하지만 여빈을 돌려주셨으면 하는데요.”
“여빈?”
“제 사촌동생이에요. 올해 중3이거든요.”
내 말에 선배들이 눈에 띄게 놀란 것 같았다. 아마 녀석을 다른 사람과 착각한 모양이지. 아마 아까 한 여자가 말한 그 ‘민정우’란
사람과······.
“얘가 네 사촌이라고?”
“이름은 한여빈이에요. 그럼 가겠습니다.”
녀석의 손목을 붙잡고 얼른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그 여자들이 우릴 붙잡지는 않았다.
“언제부터 거기에······.”
“너, 어디서 그런 말을 배운 거야?”
짚이는 곳이 없진 않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다.
“배운 적은 없어요. 저도 모르게 나간 말이라······.”
녀석의 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또 ‘기억’되어 있는 거다.
녀석의 손목을 놓고 백화점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녀석이 내 뒤를 따라왔다.
“저······. 죄송해요.”
“네가 사과할 일은 없잖아.”
녀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무거운 침묵만 감돈 채 계속 걸어갔다.
점점 녀석의 존재가 의심되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개가 사람으로 변하는 것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지 않는가.
게다가 알 수 없는 ‘기억’들.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은 처음에 내가 알던 그 모습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이 점점 꼬여만 간다.
내가 이 녀석을 버리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죽기 싫어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처음에는 1년 동안의 애완견으로써의 정도 있었기에 친하게 지내겠다는 마음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날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은 녀석이 내게서 멀어지지 않게 붙잡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죽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