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不惑)의 고개를 넘은 지 한참이 되었건만, 봄을 맞는 여인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가 보다. 자연은 목련, 진달래, 매화와 이름 모를 야생화가 산야를 물들이고 있는 것을 보니, 내 마음 또한 꽃물이 들기 시작한다.
봄바람이 불 때마다 지나가는 그리움은 가슴에만 피고 지는 상사화(相思花)를 보는 듯하다. 말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 미처 깨닫지 못한 것들이 많건만, 고맙게도 어김없이 돌아오는 이 봄이, 마냥 기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름 모를 조급한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저 봄꽃들도 아무 의미 없이는 피지 않겠지만, 속절없이 춘흥을 즐기기엔 마음 바람이 좌불안석이지 않은가. 그럴수록 유수 같은 세월 속에 많은 부분을 놓치고 사는 순수가 한없이 아쉽고 안타깝기만 하니, 이 춘심을 어이할 것인가.
자식들은 참빗 이가 빠지듯 하나 둘 내 곁을 떠나자, 공허감과 무상함이 선뜻선뜻 창호지 문구멍 바람처럼 허허롭다.
이른 새벽, 잠이 많은 내가 선잠을 떨치지 못하고 일어나 아침밥을 짓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자식들은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고자 한다. 마치 계절이 바뀌듯이, 매몰차게 돌아서는 여인의 마음처럼 자식은 꿈을 찾아 떠나가 버렸다.
자식들은 더 큰 꿈을 찾아 연어가 알래스카 바다로 향하는 것이 마땅한 순리이건만, 어미의 가슴은 댓잎에 이는 바람 소리처럼 소란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차선책으로 동사무소에 개설된 노래 교실에 등록했다.
노래가 마음 치료와 안정감을 주는 방편이 되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반신반의하면서 다니길 두 달이 되어갔다.
언제부턴가 디딜방아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뛰던 잡생각이 조금씩 잠잠해지며, 작은 희열마저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노래가 산소처럼 어느 순간, 마음의 카타르시스로 작용했다.
대중가요를 노래하다 보니, 이것이 시요, 수필이요, 삶을 노래하는 진솔한 대중 문학임을 깨닫게 되었다. 노래는 마음의 오욕(五慾)과 칠정(七情)을 체에 곱게 내리는 정화수가 되었다.
마음속에 느낄 수 있는 오감(五感)을 건드리는 감성의 노랫말이 내 심금을 울렸다.
특히 오은주 가수가 부른 가사는 동면에 빠져 있던 내게 깊은 감성을 흔들어 깨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지나가는 비에 마음을 다 뺏기고/가슴 타는 기다림에 울고 있어요//
한순간에 왔다간 그 사람을 못 잊어/ 오늘도 기다립니다//
내린 비보다 더 많은 사-랑/ 알면서도 모르는 -체 떠나간 당-신//
비야, 비야, 비-야, 나를 울린 비야/ 당신은 지나가는 비 //
내게도 지나가는 비만큼 그리움이 된 사람이 있다. 저 광활한 바다 수평선 멀리, 아련한 아지랑이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교 시절 친척 동네의 남자 친구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나는 부모님을 떠나 일류 명문고로 불리는 학교에 다니기 위해, 혼자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외롭고 힘든 시절이 아닌가 한다.
눈만 뜨면 공부가 심신을 짓누르고 있었고, 친구들과 보이지 않는 선의(善意)의 경쟁자로서, 공부 전쟁은 들불처럼 번지던 시절이었다. 젊음은 입시라는 의무감에 밀려, 저 멀리 곳간에 묻어놓고 살던 때가 아니던가.
청춘이란 감성은 보리 순을 밟듯 꼭꼭 잠재워야 했던 젊음의 찬란한 봄날은, 제한된 공간에서 책과 씨름하며, 해를 보고 나가 달이 뜨면 집으로 향하던 지극히 단순한 쳇바퀴 같은 일상이었다.
그 틈새로 물이끼처럼 피어나던 안개 같은 외로움을 멀리 J에 나가서 공부하는 그 친구와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기에, 마음의 작은 위안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이 편지이었다.
편지를 보내고 며칠 후부터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우편함을 향한 눈길은 간절한 소통의 창문이었다.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은 일일 여삼추(一日如三秋)의 시간이었다. 하얀 눈처럼 쌓인 소복한 사연이 주는 편지 한 통에, 그날의 기분이 좌지우지(左之右之)되던 소녀 시절이 아닌가 싶다.
그때는 외로움만큼 기다림과 그리움의 두께도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다 방학이 되면 한 번씩 만나 안부를 전하다가, 고2 겨울 방학 때 대학 가서 만나자며, 서로의 합의 하에 화려한 만남을 기대하며 이별을 고했다.
헤어지고 돌아온 후 한참 동안 마음을 잡지 못하고 원하던 대학 가서 만나자며, 잡초처럼 일어나는 사념을 잠재우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 후 고3 수험생 생활은 어떤 것도 우선일 수 없는 공부만이 전부였고, 웅녀(熊女)처럼 백색 교실에서 희망의 돛단배를 띄우기 위해 '참을 인(忍)'자를 셀 수도 없이 마음으로 새기며 황달 걸린 얼굴을 한 채, 입시 동굴에서 제한된 시간을 보내야만 했었다.
터널을 통과한 상아탑은 녹음방초(綠陰芳草)로 눈길 머무는 자리마다 희망으로 넘치는 듯했다. 찬란한 봄날의 젊음은 자유라는 날개가 너무나도 낯선 행복이었다.
생동하는 대지가 주는 희망의 푸른 캠퍼스의 봄날은, 한 마리 나비처럼 어디로 날아가야 할지 모를 행복한 비명으로 날이 새고, 지는 참으로 보석 같은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청춘은 인생 꽃밭이었다. 전 생애 동안 그렇게 화려한 봄날은 다시없을 것이다.
정신없이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노닐다 소나기를 만난 아이처럼, 문득 화롯불에 묻어둔 군밤이 생각난 듯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남자 친구가 불현듯 생각났다. 만나려고 생각하니, 가슴이 새가슴처럼 두근거렸다.
'어떻게 변했을까?, 나를 잊지는 않았을까?' 마음이 콩닥거리며 가마솥의 깨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친척을 통해 만날 약속을 정했다. 두근거리며 약속 장소로 가면서, 이제 성인인데 ‘반말로 인사를 해야 하나, 존댓말을 해야 하나?’ 별의별 사념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런 기우를 한꺼번에 날리듯 먼저 와서 기다리던 남자 친구는, 반갑다며 먼저 악수를 청했다. 일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친구는 역시 편안해서 좋다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되었다. 이성 친구는 동성 친구와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 있는 듯했다. 차 한 잔 마시고 어두침침한 다방을 나와 가까운 부석사로 향했다.
부석사는 경북 영주시 부석면에 있으며, 신라 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사찰이었다. 여기에는 의상대사와 선묘 간의 신앙적인 사랑이 전설로 유명한 사찰이 아닌가 한다.
스님이 중국 유학길에 병을 얻어 고생할 때 모든 정성을 기울여 간호하면서, 싹튼 애절한 사랑을 모질게 삭이면서도 선묘 낭자는 큰 스님이 되기 위해 공부 길로 떠나보내야만 했다.
칠팔 년의 세월을 알게 모르게 스님의 뒷바라지로 청춘을 보내고도 큰 스님이 되어 돌아온 사랑하는 이를, 또 한 번 기약 없이 보내야만 했던 기막힌 사랑의 사람이었다.
함께하지 못할 스님의 길이었기에, 죽어서라도 임의 꽃이 되겠다고 발원하며, 바다에 몸을 던진 선묘 낭자가 아니던가. 사랑하는 이를 향한 그 마음이 오죽이나 절절했을까? 그런 선묘는 진정한 수호신 되어 의상의 발길마다 빛이었고 숨결마다 꽃이었던 여인이었다.
어느 날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지으려 할 때 도적 떼의 방해가 있자, 여인은 돌이 되어 도둑들의 머리에 춤을 추어 도둑을 몰아냈다고 한다.
의상대사는 그 자리에 절을 짓고 돌이 떠 있었다 하여 부석사(浮石寺)라 이름하였으니, 죽어서까지 자기를 지켜 주는 선묘의 혼을 기리어 선묘 각을 세운 스님의 따뜻한 가슴이, 참으로 부럽고도 애절할 사랑의 전설이 묻어나는 곳이 부석사가 아닌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요금을 내는 그의 지갑 안에, 내 사진이 곱게 끼어 있었다. 당황한 내가 달라고 하자 거절했다.
소중한 추억을 빼앗는 처사라며 끝내 주지 않았다. 하루 동안 함께 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며 생각이 피었다 지고 있었다. 풋사과 같은 소망이 첫사랑이라 여기며 불면의 그리움을 달래던 철없던 시절이, 참으로 순수한 성장의 홍역이었던 것을 그때는 진정 몰랐었다.
그는 앞으로도 친구를 넘는 사랑으로 키우자고 했지만, 나는 분명 그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불같은 이상형의 사랑 같은 떨림이나 열병이 그에게는 없었다. 다만, 봄비가 촉촉이 내려 실록이 우거져 눈이 부시도록 푸른 물결이, 금방이라도 녹즙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싱그러운 오월의 녹음(綠陰) 같은 친구였다.
그리하여 해마다 실록이 우거질 때마다 그 친구가 생각나곤 한다. 신록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우정 같이 영원히 우리 곁에서 싱그러운 물결로 세월 속에서도 남아 있지 않겠는가.
그의 감성은 내게 봄이 주는 녹음이었고, 지나가는 비처럼 가슴을 적시는 그리운 젊은 날의 한때의 애련한 초상(肖像) 일뿐이었다. 어려울 때 함께 생각을 공유했으며, 편지글로써 감성에 한없이 젖을 수밖에 없었던 봄비 같은 존재는 아닌가 한다.
언제나 희망을 담아 보내던 앞마당 채송화에 맺힌 물방울 같은 다정함이 그에겐 남아 있었다. 4월의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가로수길을 따라, 둘이 함께 걷는 머리 위로 꽃비가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추억은 잊히지 않는 화안(花顔)이었다. 마치 그 사랑의 채도는 풀잎 위에 아롱 새겨진 청초한 사랑으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화안( 花顔): 꽃같이 아름다운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