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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4일 수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57-62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
우리는 걸음마를 배우면서부터 누군가를 따라다녔습니다. 어려서는 형들을 따라다니며 엄마를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배우고 살았습니다. 특히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부지런히 배움을 시작했습니다. 그냥 따라다니며 흉내를 내며 배우기 시작했고, 그렇게 배우는 것이 아주 좋은 수학의 방법이었습니다. 흔히 ‘어깨 너머의 공부’라는 것이 따라다니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제 대학에 가서 OT니 MT니 하면서 따라다니면서 밥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먹고, 궂은 일도 같이 하고, 수련도 같이 하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같이 밥 먹고, 잠도 같이 자면서 정도 들고, 오랜 시간을 같이 생활하는 동안 동화(同化)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은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발적인 사람을 아주 쌀쌀맞게 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당신은 머리를 기댈 곳도 없다.”고 그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간청을 거절하십니다. 우리는 그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잠시 상상할 뿐이지만, 아마 그 사람은 분명 예수님의 제자 되는 것을 직장으로 생각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편안한 잠자리와 안락한 쉼터와 풍성한 식탁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따라다니며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접을 받는 재미를 소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보리 고개를 넘어야 했던 가난한 시절에 하얀 쌀밥을 드시던 신부님을 부러워해서 신학교에 들어갔던 신학생도 있었던 것과 같이 주님께 그런 욕망으로 제자 되기를 간청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돌아가실 때에도 머리를 편히 뉘일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을 아무도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제자로 삼기에 괜찮은 사람을 발견하셨습니다. 그 사람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따르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는 제자가 되면 좋겠으나 그는 일의 경중(輕重)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어갑니다. 정말 그가 제자로서 적합하였다면 아마 주님은 그의 아버지의 장례에 직접 참석해서 장례를 치러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례는 죽은 당일에 치루는 것이 그 당시의 관례였으니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인정이 많아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몰두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거절하신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갑니다. 그리고 생명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데 죽음에 연연하면 모진 박해와 용감히 순교할 수 있는 용기가 없음을 개탄하시는 것입니다. 나도 세상에 살면서 죽음에 매달려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죽지 못해서 산다.’고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장례를 치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고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봉사생활도 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지도 않고, 크리스천으로 살고 있지도 않는 사람들은 곧 죽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죽은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도 죽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먼저 요청하면서도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미를 얻으려는 사람에게 주님은 또한 냉정하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라’고 제자로 거두어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는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있는 사람이며 세상의 모든 것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이 갈라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배척하십니다. 다기망양(多岐亡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종들이 갔으나 길이 너무 많아서 아무도 양을 찾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쟁기질을 할 수 없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라고 모두 쟁기질을 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쟁기질은 정말 어려운 농사일이랍니다. 쟁기를 잡은 사람과 쟁기를 멘 사람이나 소와 쟁기가 모두 혼연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밭 갈 듯 일구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렇게 혼연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복음화의 도구인 교회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주님은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저를 제 조상들의 도성으로 보내 주셔서 그 도성을 다시 세우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느헤미야기의 말씀입니다. 2,1-8
1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 제이십년 니산 달, 내가 술 시중 담당이었을 때, 나는 술을 가져다가 임금님께 올렸다.
그런데 내가 이제까지 임금님 앞에서 슬퍼한 적이 없기 때문에,
2 임금님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어째서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느냐?
네가 아픈 것 같지는 않으니, 마음의 슬픔일 수밖에 없겠구나.” 나는 크게 두려워하면서, 3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만수무강하시기를 빕니다. 제 조상들의 묘지가 있는 도성은 폐허가 되고 성문들은 불에 타 버렸는데,
제가 어찌 슬픈 얼굴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4 그러자 임금님께서 나에게,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기에,
나는 하늘의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고, 5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그리고 이 종을 곱게 보아 주신다면,
저를 유다로, 제 조상들의 묘지가 있는 도성으로 보내 주셔서, 그 도성을 다시 세우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6 그때에 왕비께서도 옆에 계셨는데, 임금님께서는 “얼마 동안 가 있어야 하느냐?
언제면 돌아올 수 있겠느냐?” 하고 나에게 물으셨다.
임금님께서 이렇게 나를 보내시는 것을 좋게 여기셨으므로, 나는 임금님께 기간을 말씀드렸다.
7 나는 또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관들에게 가는 서신 몇 통을 저에게 내리게 하시어,
제가 유다에 다다를 때까지 그들이 저를 통과시키도록 해 주십시오.
8 또 왕실 숲지기 아삽에게도 서신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집 곁 성채의 문과 도성의 벽,
그리고 제가 들어가 살 집에 필요한 목재를 대게 해 주십시오.”
내 하느님의 너그러우신 손길이 나를 보살펴 주셨으므로, 임금님께서는 내 청을 들어주셨다.
축일 10월 4일 성 프란치스코 (Francis)
신분 : 부제, 설립자
활동 지역 : 아시시(Assisi)
활동 연도 : 1181/1182?-1226년
같은 이름 :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인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Pietro di Bernadone)와 프랑스인 어머니 피카 드 브를레몽(Pica de Bourlemont)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사업차 프랑스에 가 있었고, 어머니는 그에게 요한(Giovanni)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사업상의 이유 등으로 프랑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프랑스 사람’이란 뜻의 프란치스코로 개명하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젊은 날을 무모할 정도로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내다가 기사가 될 꿈을 안고 1202년 아시시와 페루자(Perugia) 간의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듬해 두 도시 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듯 보이다가 중병을 앓았고, 병에서 회복한 뒤로는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여전히 기사가 될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1205년에 브리엔네(Brienne) 백작의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그는 스폴레토(Spoleto)에서 환시와 함께 메시지를 들었는데, “왜 주인을 섬기지 않고 종을 섬기려느냐? … 집으로 돌아가라. 내가 할 일을 알려주겠다.”라는 내용이었다. 군대에서 나온 그는 1206년 성 베드로 대성당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나병 환자를 만나 입맞춤을 한 후 삶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자주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느 날 폐허가 된 산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중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물건을 내다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고 했다. 이를 안 부친은 그를 작은 방에 가둘 정도로 분노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부친과 결별하게 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주교 앞에서 재산 상속권을 포기하길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응하며 입고 있던 옷까지 모두 벗어 아버지에게 넘겨주고 알몸이 되어 가난한 삶을 선택했다.
이때부터 성 프란치스코는 허름한 농부의 옷을 입고 본격적으로 ‘가난 부인’을 모시는 통회의 생활을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기도와 노동을 하며 극도의 가난 생활을 실천했다. 1209년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들의 생활 양식을 인준해 주길 교황에게 요청했다. 그 회칙이 너무 엄격하다 여긴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는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성 프란치스코가 쓰러져 가는 라테라노 대성당을 떠받치고 있는 장면을 꿈에서 본 후 1210년 마침내 구두로 인준해 주었다. 그리고 극도의 가난을 살고자 하는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11명의 동료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설교의 사명까지 주었다. 이것이 ‘작은 형제회’, 곧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본부는 오늘날 아시시 교외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gli Angeli) 안에 있는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이었다. 이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부터 성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수도회는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했다. 성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은 이탈리아 내외를 두루 다니며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회와 보속의 생활을 단순한 말로 가르쳤다. 그들은 재산과 인간적인 지식 소유를 거부했고 교계 진출 또한 사양하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사제가 아니었고 다만 부제였다고 한다. 그들의 공동체는 날로 지원자가 늘어 여러 곳에 분원이 생겼다. 그만큼 그들의 청빈 생활은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1212년 아시시의 명문가 출신인 성녀 클라라(Clara)도 그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가족과 친지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녀 클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지도를 받아 뜻을 같이하는 몇 명의 자매들과 함께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현 클라라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216년부터 프란치스코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해 조직이 강화되면서 발전의 폭이 커졌다. 몇 개의 관구가 형성되었고, 1217년과 1219년의 총회에서는 잉글랜드(England)를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결의하는 등 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무렵 성 프란치스코는 모슬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직접 찾아갈 정도로 선교와 순교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로 갔다가 술탄 알 카밀(Al-Kamil)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이슬람에 대한 선교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성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총장직을 사임하였다. 이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재중에 몇몇 회원들이 수도회의 회칙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알고, 우고리노(Ugolino) 추기경의 도움으로 회칙을 보완해 1223년 11월 29일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에게 인준을 받았다. 1224년 성 프란치스코는 라 베르나(La Verna) 산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그 고통에 참여하길 기도하던 중에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오상(五傷)이었다. 그리스도의 오상은 은총의 선물이었으나 그의 일생 내내 계속되면서 동시에 심한 육체적 고통도 안겨 주었다. 그는 오상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당나귀를 타고 움브리아 지방을 다니며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기력이 쇠하여지고 눈마저 실명되어 갔다. 그런 고통의 와중에서 그는 이탈리아어로 ‘태양의 찬가’를 지어 외우며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1226년 9월 병세가 깊어진 성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로 숙소를 옮겼다. 미리 유서를 작성한 그는 죽음이 다가온 것을 깨닫고 알몸으로 자신을 잿더미 위에 눕혀달라고 했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처럼 완전한 가난 중에 임종을 맞이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수사들에게 요한 복음의 주님 수난기를 읽게 한 후 시편 43장을 노래하며 1226년 10월 3일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유해는 다음날 아시시에 있는 산 조르조(San Giorgio)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선종 2년도 채 되지 않은 1228년 7월 15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230년 5월 25일 그의 유해는 엘리아 형제가 그를 기념해 지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지하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지금도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공경은 세계 곳곳에서 활기차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가 세운 제3회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도 다른 재속 회원과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 그의 성덕을 본받고 가난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1979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를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아시시의 가난뱅이 성 프란치스코만큼 교회 안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다시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는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늘 축일을 맞은 프란치스코 형제들과 형제회, 클라라 수도회, 재속 3회 회원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