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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이타(自利利他)
나를 이롭게 하는 일이 남에게도 이로운 일이라는 뜻이다.
自 : 스스로 자(自/0)
利 : 날카로울 리/이(刂/5)
利 : 날카로울 리/이(刂/5)
他 : 다를 타(亻/3)
(유의어)
자익익타(自益益他)
자리리인(自利利人)
자행화타(自行化他)
출전 : 불설중아아함경(佛說中阿含經)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을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러한 정신의 실천을 자리이타행이라고 한다. 자익익타(自益益他), 자리리인(自利利人), 자행화타(自行化他)와 같은 뜻이다.
자리(自利)란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자기의 해탈을 위해 노력하고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타(利他)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꾀한다는 뜻으로, 사람들의 구제(救濟)를 위해 힘쓰는 것을 말한다.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는 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모두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이상으로 하며, 이타(利他)를 위해 자기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1) 남도 이롭게 하면서 자기 자신도 이롭게 하는 것. 대승의 보살이 닦는 수행 태도로서, 오직 자신의 제도만을 위하는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소승적 자리(自利)의 행과 구별된다. 자리란 자기를 위해 자신의 수행을 주로 하는 것이고. 이타(利他)란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자리이타를 원만하고 완전하게 수행한 이를 부처라 한다.
(2) 사은 중 동포은의 상호관계. 곧 모든 동포 사이는 서로 자리이타의 관계로서, 상호 도움이 되고 피은이 된다. 소태산대종사는 무슨 일이든지 행동에 옮길 때에는 자리이타로 하되, 부득이 한 경우에는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방을 이롭게 하라고 했다. 이것이 곧 불보살의 이타적 대승행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
자익익타(自益益他), 자리리인(自利利人), 자행화타(自行化他)라고도 한다. 자리(自利)란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노력하고 정진하여 수도의 공덕을 쌓아 그로부터 생기는 복락과 지혜 등 과덕의 이익을 자기 자신만이 향수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대하여 이타(利他)란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을 뜻하며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의 구제를 위해 닦는 공덕을 말한다. 이 2가지를 합하여 이리라고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소승불교에서 지향하는 자리적인 수행을 비판하고, 이에 대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조화를 이루면서 동시에 완전하게 실현된 상태, 곧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원만함이 실현된 세계를 목표로 삼아 이러한 세계가 바로 부처의 세계라고 했다.
한편 중국 담란의 '왕생론주(往生論注)'에서는 이타와 타리를 구별하여 이타는 부처의 경지에서 말하는 것이고, 타리는 중생의 경지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이루는 명품 인생
자리이타(自利利他)는 나를 이롭게 하는 일이 남에게도 이로운 일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나만을 위한 행동 때문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과 자신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남만을 이롭게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나를 위한 일이 타인과 사회를 잘 되게 하고, 타인을 위한 일 덕분에 내가 복 받는 일이 나의 일이라면, 최상의 명품 인생인 것이다. 사익(私益)이 공익(公益)이 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정말 멋지고 행복한 일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
내가 잘되고 이웃하는 남도 잘되게 하는 일이 자리이타(自利利他) 라고 합니다.
한 농부(農夫)가 있었습니다. 그가 수확한 옥수수는 품질이 뛰어나 농산물 박람회에서 늘 일등을 차지했습니다.이웃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웃 농부들에게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씨앗을 나눠주었습니다. 그것도 공짜로.
놀란 이웃들이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답(答)했습니다. "다 나 잘되자고 하는 일이지요. 바람이 불면 꽃가루가 날리지 않습니까? 만약 이웃 들판에서 품질이 떨어지는 옥수수를 기른다면, 그 옥수수의 꽃가루가 날아와 내 밭에 자라는 옥수수의 품질까지 떨어뜨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웃들도 최상의 옥수수를 기르는 것이 제게도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 )는 자신을 이(利)롭게 한다는 자리(自利)와 남을 이(利)롭게 한다는 이타(利他)를 합한 낱말로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남을 잘되게 도와줘라, 그것이 내가 잘되는 일이다.
자연도 인간 사회도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유 가치는 경쟁과 분열이 아니라 우애와 신뢰의 가치를, 오만이나 독점이 아닌 배려와 나눔의 가치를, 죽임과 파괴가 아니라 생명과 공생의 가치로 사람과 지구를 살리는 첫 걸음이 되어 줄 것입니다.
존 템플턴은 말합니다. "하나라도 더 주려고 노력한 것이 우리의 성공 비결이다." 그것이 이웃과 친구들과 공유하며, 힘 안들고 잘 사는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작금, 혼탁한 세상을 지켜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리이타(自利利他) 정신으로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
자리이타(自利利他)는 본래 불교의 ‘자리행’과 ‘이타행’에서 나온 말이다. ‘자리이타’의 삶은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도 이로움을 주는 삶이다.
여기서 ‘자리’와 ‘이타’의 관계는 서로 뗄 수 없지만(不相離; 불상리) 자기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자리’가 먼저고, 이타는 거기에 따라 붙은 부수적 결과다. 해서 자기 앞 가름도 제대로 못하면서 세상을 구하겠다고 팔 걷고 나서는 정치모리배나 종교 선동가를 항상 경계할 일이다.
내가 평생 가장 여러 번 읽었고 감동적인 책을 하나만 들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승기신론통석(이홍우, 2006)'을 꼽는다. 이 책에 있는 '자리적 삶과 이타적 삶'이라는 장을 다시 읽어보아도 새롭고 좋다. 기신론에 의거해 '자리적 삶과 이타적 삶'을 내가 평생 살아온 여정에 비추어, 즉 내 자신의 구체적 삶에 연관해 해석하고 반추해 보고자 한다.
흔히 '이기(利己)'는 다른 사람을 개입시키고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인 반면에, 여기 '자리(自利)'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개입시키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이롭게 하는 삶이다.
이홍우 교수는 '자리적' 삶은 '이타적' 삶과 맛 붙어 있으면서 중층구조의 위층에 해당된다고 했다. 동양철학의 개념으로 말하면 '자리'는 체(體)이고, '이타'는 용(用)에 해당된다. 나무로 치면 ‘자리’는 뿌리고, ‘이타’는 가지와 잎이다.
'자리'는 내 '마음 안'의 공덕이라면, '이타'는 밖으로 베푸는 공덕이다. 기신론에서 마음 안의 공덕은 밖으로 베푸는 공덕과 비할 바가 아니고, 질적으로 그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자리적' 삶은 그 자체가 심성함양 혹은 본래성 회복과 맛 닿아 있으며(혹은 그 자체이며), '진여(眞如)로 되돌아가는' 삶이다. 이른바 기신론에서 말하는 '정법훈습(淨法薰習)'의 삶이다.
'자리적' 삶의 전형은 진선미성(眞善美聖)으로 대표되는 학문, 윤리, 예술, 종교에 가능한 한 깊이 입문하는 삶이다. 이런 삶의 양식에는 진여에서 온 여래의 입김이 스며있으며, 그런 활동에 종사하는 동안 우리는 여래의 입김으로 숨 쉬게 된다고 했다.
기신론에 따르면 '자리적 삶'은 안으로 멈춰 지혜롭게 살피는 지관문(止觀門) 수행의 전형이고, '이타적' 삶은 다른 사람에게 두루 베푸는 시문(施門) 수행으로 대표된다.
우리네 삶에서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은 전형적으로 이타적 삶이다. 나이 들어 되짚어 보니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어 살고, 평생 직장생활을 무사히 마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출가자의 삶은 가정과 사회생활을 포기하고 ‘자리’의 삶에 전념하기위한 일종의 극약처방이다.
하지만 우리는 본래 속세에 살면서 사바를 열반으로 만드는 운명을 타고 난지도 모른다. 그게 사람 사는 모습이다. 나는 결혼하고 51년째 마누라와 함께 살아왔고, 지금은 정년한지 한참 되어 80줄에 들고 있다.
어쩌면 지금이 내가 ‘자리’의 삶을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도 모른다. 집사람은 내가 정년하고도 얄밉게 혼자서 시간을 잘 보낸단다. 그리고 실생활 일에 무심한 건 여전하단다. 그리고 딸은 내가 ‘자기중심적’이란다.
여기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은 좋게 보면 자리적이고 어찌 보면 이기적이라는 것일 터이다. 사실 내 삶은 ‘자리적-이기적-이타적’ 삶이 뒤섞여 있다. 솔직히 그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내가 읽고 쓰는 일에 집중하고 산책하기를 즐기는 건 자리적 삶에 가깝다. 그러나 가족들과의 관계유지를 위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지식과 세상' 사회적 협동조합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동안은 다분히 이타적 삶에 속한다. 일상에서 내가 먹고 싶은 걸 챙기고 그냥 편히 쉬는 동안은 이기적이랄 수밖에 없다.
손녀가 우리 집에 있는 동안 집사람과 나는 손녀 돌보고 뒷바라지 하는 일을 우선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 내외는 다른 조부모에 비해 이타적이었다. 특히 집사람은 평생 가족들 건사하는 일에 헌신해 왔으니, 다분히 이타적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친 가족중심주의는 전형적인 이기심으로 연관된다. 이런 게 사람 사는 모습이다.
이홍우 교수는 '자리적 삶과 이타적 삶'에서 “내가 자리적 삶을 사는 정도만큼 다른 사람도 자리적 삶을 살게 될 것”이랬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여래와 중생이 함께 타고 가는 ‘큰 수레’와 같다는 게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의미의 수호자'로서 손녀(지현)에 대한 할아버지의 삶을 반추해 본다. 손녀가 서울로 대학을 가니 새가 둥지를 떠나듯 우리 집을 떠났다. 마침내 노년에 우리 내외만 남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간 손녀가 주말이면 제출할 과제 리포트 글을 좀 읽어달라고 카톡과 메일을 보내온다.
그렇잖아도 손녀 생각이 나던 차에 참 반갑다. 만사 제처 놓고 손녀가 보내온 글을 읽고 나름 수정해 보내준다. 할아버지로서 자긍심을 한껏 느끼는 순간이다. 집사람에게 할아버지 노릇 하는 걸 자랑삼아 말한다.
나는 노년에 내가 사랑하는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자리적 삶을 사는 정도만큼 손녀 자신도 자리적 삶을 살게 될 것”을 소망한다. 의미의 수호자로서 혹은 마음의 의지처로서 내가 손녀에게 얼마간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노년의 내게는 더할 나위없는 지복이다. 나이 들수록 '자리적 삶'의 진화는 그 끝이 없다.
자리이타(自利利他)
산촌은 고요하고 평화롭게 보인다. 하지만 산촌에서는 매일 소리 없는 사투가 벌어지고 있다. 그런 전쟁에 내가 동참해 생명들을 학살하고 있다. 가능한 잡초는 자주 뽑아준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생명체들, 본의는 아니지만 남의 생명을 위협하고 때론 죽이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서로 겪으면서 여러 생명체가 같이 사는 것 같다.
덩굴 식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곁에 있는 다른 식물을 휘어감고 그의 몸을 조이면서 성장한다. 조이려고 해서 조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이 크다보니 줄기가 굵어져 저절로 더욱 조이게 되는 것이다.
뿌리로 자신의 번식을 도모하는 식물들, 땅 속에서 뿌리를 마구마구 뻗어 다른 식물의 보금자리를 헤집고 들어가 자신의 자손들이 늘어나게 한다. 한 식물의 세력이 늘어나면 다른 식물의 생존을 위협한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생명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누구나 다 최선을 다한다. 이기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자신의 생존을 누가 다 해결해 줘야 한다고 여기는 생명체로 일부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집도 마련해 주고, 자신이 당면한 문제들도 해결해 주고...
그런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불만이 잔뜩 쌓여 분노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이 자기만을 무시하는 듯한 느낌으로 쌓은 분노를 폭력의 형태로 노출시키기도 한다.
삶을 대하는 자세는 자리이타(自利利他)여야 한다. 자신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 스스로 풀숲을 헤치며 살아야 한다. 자신이 밟은 길이 타인이 길을 찾고자 했을 때 안내를 할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풀숲을 쉽게 헤치며 나아가기 위해 제초제를 마구 뿌린다는 것, 결국 자신과 남들, 그리고 주변 환경에 해를 끼친다. '자리이타', 오늘날 우리가 거듭거듭 마음판에 새겨야할 삶의 자세이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자리이타(自利利他)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나오는 장면이 있다. 남자는 문을 열고 그냥 나왔다. 그런데 뒤에 여자가 나오다가 자동으로 닫히는 문에 부딪히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그걸 보고 뒷머리를 긁적이는 남자의 모습 위로 엑스(X)자가 그려진다. 몇 년 전 공익광고의 장면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해했지만 내가 자주 들리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그 광고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떻게 배려를 강요하는 광고를 만들 수 있는지 어이없어 한 것이다.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사람들에겐 너무 올드한 광고였던 것이다.
지금 어른이라고 규정된 범주에 해당하는 세대들은 공동체의 중요성, 이타적 희생의 강요를 교육으로 배운 사람들이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우선해야 하고, 내 이익을 포기해야 좋은 사람이라는 교육을 받고 산 것이다.
지금의 세대를 보자. 매체에서는 민지(MZ)세대라고 한다. 민지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주의이다. 개인주의를 다른 말로 하면 자리(自利)주의이다.
이타(利他)주의를 강요하고 교육하였지만 그다음 세대들은 자리(自利)주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는 모두 중요하다.
이 세상은 내가 중심이다. 내가 없으면 이 세상도 없다. 내가 없는데 어떻게 이 세상이 있겠는가. 인식하는 나가 있어야 세상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이익은 아주 중요하다. 세상의 중심이며 세상의 전부인 내가 이익을 얻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 민지(MZ)세대의 개인주의, 자리주의는 욕을 할 것도 없고, 존중해 주어야 할 일이다.
이 세상은 나 혼자 살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나는 살 수 없다.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이 없으면 나는 살 수 없다.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은혜이다. 은혜는 갚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전 세대의 이타적 희생, 공동체 주의 역시 무시되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상이며 존중받아야 할 일이다.
문제는 어느 것 하나만을 강조했던 분위기이다. 두 가지가 모두 중요한데 한 가지만 강요한다면 자연스럽게 대중의 시선은 다른 한 가지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이제는 두 가지 모두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두 가지를 어떻게 공유하며 조화시킬 수 있는지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함께 강조해야 한다.
원불교의 교조 소태산 대종사는 사은(四恩) 중 동포은을 설명하며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서로 자리이타(自利利他)로써 은혜를 주고받았기에 그 은혜를 갚는 방법 역시 자리이타(自利利他)로써 해야 한다고 했다. 원불교에서는 이미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한 단어로 쓰인다.
원불교의 3대 종법사이신 대산 종사는 이렇게 말했다. "개인과 인류가 영세토록 다 같이 잘 살아갈 생활 표준은 대종사께서 밝혀 주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도라, 이 표준대로만 살고 보면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고 일체 동포가 이롭고 현생도 좋고 내생도 좋으리라. 그러나 부득이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되지 않을 때에는 내가 해를 차지하는 자해타리(自害他利)의 도를 실천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불보살의 생활이니라."
불보살의 생활은 우리 원불교 교도들이 지향하는 삶이다. 그걸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우리가 잘살아갈 표준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영세토록 다 같이 말이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게 나를 이롭게 한다
이삿짐 실은 차량을 떠나보내고 그리 멀지 않은 새로 산 집까지는 아버지와 함께 걸었다. 골목을 빠져나올 즈음에 아버지가 봉투를 꺼내주며 방금 떠난 집 마루에 놓고 오라고 했다. 겉봉에는 ‘이사 오시는 분께’라고 수신인을 적었지만, 봉투는 열려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궁금해 열어봤다. '이 집에 살며 느낀 것들입니다'로 시작하는 편지는 두 장이나 됐다. 만년필과 볼펜을 번갈아 쓴 아버지 필체는 정갈해 며칠에 걸쳐 쓴 것 같았다. 살던 집 얘기라 한 눈에 들어왔지만 몇 가지는 살펴보지 않으면 모를 것들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몇 가지다. ‘안방 뒤 벽지가 축축한 거로 보아 누수가 있는 거 같은데 지붕에서 스며든 거로 보입니다. 누수 지점은 찾지 못했습니다. 안방에서 나오는 마루 세 번째와 다섯 번째 나무는 상해 교체해야 할 겁니다. 마루 바깥 유리문은 집이 오른쪽으로 기울어 꼭 닫히질 않습니다. 건넌방 구들 위쪽은 막힌 듯합니다. 겨울에는 불길이 들어가지 않아 냉골입니다. 볕이 잘 들긴 하지만 창문 역시 집이 기울어 틈이 벌어져 외풍이 심합니다. 마당의 벽오동은 무성해 채소밭으로 난 가지는 쳐줘야 합니다. 마당 수도는 도드라져 겨울에는 동파한 일이 있습니다.’
마루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자리에 편지를 넣어놓고 돌아와 길을 걸으며 아버지께 그런 글까지 남기셨다고 하자 웃으며 하신 말씀이다. "까마귀가 덫에 걸린 개를 발견했다. 까마귀는 개가 덫에 걸린 것을 보고 안타까워 개 꼬리를 물고 덫을 풀어준 뒤 땅을 파 묻어 주었다는 옛이야기가 있다. 유향(劉向)이 쓴 전국책(戰國策)에서 읽었다."
훗날 원전을 찾은 아버지는 시경(詩經)에서 인용한 고사라고 했다. "시경에는 '까마귀가 개를 그리워하고 개는 까마귀의 이타심 있는 행동에 감동해 하늘로 올라온 까마귀와 짝이 되었다'고 했다"라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물론 교훈을 위해 쓴 얘기겠지만 미물인 까마귀의 이타적이고 고귀한 행동이 가슴에 오래 남았다"라고 술회하며 "이사 가는 집은 새로 지은 집이니 그런 편지는 없을 거다"라고 우스갯말을 했다.
그날 저녁 이사 간 집에서 아버지는 말씀 중에 고사성어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인용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개념인 자리이타는 '자신을 이롭게 하면서 남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 중 하나이자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법의 하나다. 원전은 '불설중아아함경(佛說中阿含經)'. 석가모니의 설법집으로, 모두 120권이다.
석가모니가 자리이타를 설파한 말이다. "자신을 이롭게 하면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이타심이다. 자신을 이롭게 하지 않고는 남을 이롭게 할 수 없다. 남을 이롭게 하지 않고는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없다."
아버지는 "자리이타를 실천하는 것은 너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오늘처럼 실천하면 평안을 얻을 수 있고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어려운 게 아니다. 내가 먼저 봤으면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해라" 라며 자리이타의 구체적 실천을 요구했다. "그리하면 어려운 일도 쉽게 풀린다. 사회가 극도의 경쟁을 요구하고 있어 실천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럴수록 빛이 난다. 경쟁에서 이기는 최선의 길이 이타심이다"며 꾸준한 실천을 당부했다.
특히 아버지는 "내가 손해 보는 듯하지만,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마음이 편안해지면 오히려 일이 더 잘 풀린다. 지나고 보면 남을 이롭게 하는 게 곧 나를 이롭게 한다"고 덧붙였다.
아버지의 그 편지를 이사 온 사람이 읽었는지는 모른다. 한참 뒤 살던 집을 지나가다 보니 허물고 새로 짓고 있는 중이었다. 새로 짓더라고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아버지는 "까마귀는 일곱 살 아이의 지능이 있다. 하찮은 까마귀가 지닌 몇 안 될 지능 중 이타심을 가진 게 놀랍다"며 반드시 새겨두라고 했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쉬운 일인 것 같지만 지키기 어렵다.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손주들에게도 일깨워줘야 할 성품인 건 맞다.
▶️ 自(스스로 자)는 ❶상형문자로 사람의 코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사람은 코를 가리켜 자기를 나타내므로 스스로란 뜻으로 삼고 또 혼자서 ~로 부터 따위의 뜻으로도 쓰인다. 나중에 코의 뜻에는 鼻(비)란 글자가 생겼다. ❷상형문자로 自자는 '스스로'나 '몸소', '자기'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自자는 사람의 코를 정면에서 그린 것으로 갑골문에서는 코와 콧구멍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래서 自자의 본래 의미는 '코'였다. 코는 사람 얼굴의 중심이자 자신을 가리키는 위치이기도 하다. 우리는 보통 나 자신을 가리킬 때는 손가락이 얼굴을 향하게끔 한다. 이러한 의미가 확대되면서 自자는 점차 '자기'나 '스스로'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自자가 이렇게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畀(줄 비)자를 더한 鼻(코 비)자가 '코'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自(자)는 어떤 명사(名詞) 앞에 쓰이어 ~부터, ~에서(~서)와 같은 뜻을 나타내는 한자어. 시간이나 공간에 관한 낱말 앞에 쓰임의 뜻으로 ①스스로, 몸소, 자기(自己) ②저절로, 자연히 ③~서 부터 ④써 ⑤진실로 ⑥본연(本然) ⑦처음, 시초(始初) ⑧출처(出處) ⑨코(비鼻의 고자古字) ⑩말미암다, ~부터 하다 ⑪좇다, 따르다 ⑫인하다(어떤 사실로 말미암다) ⑬사용하다, 쓰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몸 기(己), 몸 신(身),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를 타(他)이다. 용례로는 제 몸을 자신(自身), 남의 구속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함을 자유(自由), 제 몸 또는 그 자신을 자체(自體), 저절로 그렇게 되는 모양을 자연(自然), 제 몸이나 제 자신을 자기(自己),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어서 죽음을 자살(自殺), 스스로 자기의 감정과 욕심을 억누름을 자제(自制), 스스로 그러한 결과가 오게 함을 자초(自招), 스스로 움직임을 자동(自動), 제 스스로 배워서 익힘을 자습(自習), 자기 일을 자기 스스로 다스림을 자치(自治), 스스로의 힘으로 생계를 유지함을 자립(自立), 자기의 능력이나 가치를 확신함을 자신(自信), 남에게 굽히지 않고 자기 몸이나 마음을 스스로 높이는 마음을 자존심(自尊心), 어떤 일에 대하여 뜻한 대로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스스로의 능력을 믿는 굳센 마음을 일컫는 말을 자신감(自信感), 스스로 나서서 하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자발적(自發的), 자기의 언행이 전후 모순되어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가당착(自家撞着), 자신을 스스로 해치고 버린다는 뜻으로 몸가짐이나 행동을 되는 대로 취한다는 말을 자포자기(自暴自棄), 스스로 힘을 쓰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쉬지 아니한다는 말을 자강불식(自强不息), 자기가 그린 그림을 스스로 칭찬한다는 뜻으로 자기가 한 일을 자기 스스로 자랑함을 이르는 말을 자화자찬(自畫自讚), 자기가 일을 해놓고 그 일에 대하여 스스로 미흡하게 여기는 마음을 일컫는 말을 자격지심(自激之心), 물려받은 재산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가를 이룸 곧 스스로의 힘으로 사업을 이룩하거나 큰 일을 이룸을 일컫는 말을 자수성가(自手成家), 자기의 줄로 자기를 묶다는 뜻으로 자기가 자기를 망치게 한다는 말이다. 즉 자기의 언행으로 인하여 자신이 꼼짝 못하게 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자승자박(自繩自縛), 잘못을 뉘우쳐 다시는 그런 잘못이 없도록 함을 이르는 말을 자원자애(自怨自艾), 처음부터 끝까지 이르는 동안 또는 그 사실을 일컫는 말을 자초지종(自初至終),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한다는 뜻으로 마음속으로 대화함을 이르는 말을 자문자답(自問自答), 제 뜻이 항상 옳은 줄로만 믿는 버릇이라는 뜻으로 편벽된 소견을 고집하는 버릇을 이르는 말을 자시지벽(自是之癖) 등에 쓰인다.
▶️ 利(이로울 리/이)는 ❶회의문자로 勿(물)은 여기에서는 쟁기와 흙을 나타내는 모양이며 논을 갈아 엎는 모양이다. 禾(화)는 벼라는 곡식을, 利(리)는 곡식을 만드는 밭을 가는 쟁기로, 쟁기날이 날카롭다, 나중에 날카롭다는 것과의 관계로 부터 勿(물)을 刀(도)로 쓰게 되고, 또 刀(도)는 돈과 관계가 있으므로 이익의 뜻으로도 쓰여지게 된 듯하다. ❷회의문자로 利자는 '이롭다'나 '유익하다', '날카롭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利자는 禾(벼 화)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벼와 칼을 함께 그린 것이니 利자는 벼를 베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利자는 본래 칼이 벼를 벨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다'라는 뜻을 위해 만든 글자였다. 利자에 아직도 '날카롭다'나 '예리(銳利)하다'라는 뜻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利자는 후에 '이익'이나 '이롭다'라는 뜻이 파생 되었는데, 벼를 베어 추수하는 것은 농부들에게 수익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利(리)는 ①이롭다, 이하다(이익이나 이득이 되다) ②이롭게 하다 ③유익하다 ④편리하다 ⑤통하다 ⑥날카롭다 ⑦이기다 ⑧날래다 ⑨탐하다 ⑩이자 ⑪이익(利益) ⑫승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더할 가(加), 더할 증(增), 더할 첨(沾), 더할 첨(添), 더할 익(益),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해할 해(害)이다. 용례로는 편리하게 씀을 이용(利用),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탬이 된 것을 이익(利益), 이익을 얻음을 이득(利得), 남에게 돈을 빌어 쓴 값으로 무는 일정한 비례의 돈을 이자(利子), 돈벌이를 하는 동안에 남는 돈을 이윤(利潤), 적을 이롭게 함을 이적(利敵), 자기 이익만 꾀함을 이기(利己), 이익을 탐내는 욕심을 이욕(利欲), 다른 이에게 이익을 주는 일을 이타(利他), 겨루어 이김을 승리(勝利), 이익이 있음을 유리(有利), 편하고 이로우며 이용하기 쉬움을 편리(便利), 빌려 준 돈의 이자를 금리(金利), 조건이나 입장 따위가 이롭지 못함을 불리(不利), 날이 서 있거나 끝이 뾰족함을 예리(銳利), 부당한 방법으로 얻은 이익을 폭리(暴利), 이익을 얻음을 득리(得利), 실지로 얻은 이익을 실리(實利), 이해 관계를 이모저모 따져 헤아리는 일을 일컫는 말을 이해타산(利害打算), 기구를 편리하게 쓰고 먹을 것 입을 것을 넉넉하게 하여 백성의 생활을 나아지게 함을 이르는 말을 이용후생(利用厚生), 이로움과 해로움 이나 얻음과 잃음을 일컫는 말을 이해득실(利害得失), 이익과 손해가 반반으로 맞섬을 일컫는 말을 이해상반(利害相半), 이욕은 사람의 밝은 지혜를 어둡게 만듦을 이르는 말을 이령지혼(利令智昏),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일컫는 말을 이국편민(利國便民), 이를 찾는 문과 명예를 얻는 길을 일컫는 말을 이문명로(利門名路), 이가 되든지 해가 되든지 간에를 이르는 말을 이불리간(利不利間), 적을 이롭게 하는 짓을 이르는 말을 이적행위(利敵行爲), 이로움이 있는 곳을 말함을 이르는 말을 이지소재(利之所在), 이해를 따지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이해불계(利害不計), 이해에 관하여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따진다는 뜻으로 인색함을 가리키는 말을 이석추호(利析秋毫) 등에 쓰인다.
▶️ 他(다를 타)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뜻을 나타내는 也(야, 타)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它(타)의 옛날 자형(字形)은 사람의 발과 뱀으로 이루어졌다. 뱀이 무서운 짐승이므로 사고(事故), 별다른 일, 다른 것의 뜻으로 되었다. 他(타)는 후일 다시 사람인변(亻=人; 사람)部를 붙여 뱀과 구분되는 다른 사람, 다른 일의 뜻으로 쓰인다. ❷형성문자로 他자는 ‘다르다’나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他자는 人(사람 인)자와 也(어조사 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다르다’라는 뜻은 본래 佗(다를 타)자가 먼저 쓰였었다. 佗자에 쓰인 它(다를 타)자는 뱀의 형상을 본뜬 것으로 ‘다르다’나 ‘뱀’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佗자는 이렇게 ‘다르다’라는 뜻을 가진 它자에 人자를 더한 것으로 ‘다른(它) 사람(人)’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었다. 그러나 소전에서의 它자와 也자가 혼동되었었는지 지금은 也자가 들어간 他자가 ‘다르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他(타)는 (1)타인(他人)의 뜻을 나타냄 (2)어떤 명사(名詞) 앞에 쓰이어, 다른의 뜻을 나타냄 등의 뜻으로 ①다르다 ②간사하다(마음이 바르지 않다) ③겹치다 ④짐을 싣다 ⑤남, 다른 사람 ⑥다른 곳, 다른 데, 다른 방면(方面) ⑦딴 일 ⑧두 마음, 부정(不正) ⑨겹쳐 쌓이는 모양 ⑩그, 그 사람, 그이 ⑪누구 ⑫다른, 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를 별(別), 다를 차(差), 다를 수(殊), 다를 리(異),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스스로 자(自)이다. 용례로는 다른 나라를 타국(他國), 제 고장이 아닌 다른 고장을 타향(他鄕), 다른 사람 또는 자기 이외의 사람을 타인(他人), 타향의 달리 일컫는 말을 타관(他關), 남이 죽임 또는 남에게 당한 죽음을 타살(他殺), 동작이 다른 데에 미침을 타동(他動), 자기 외의 다른 사람을 타자(他者), 다른 생각이나 다른 사람의 뜻을 타의(他意), 자기의 의사에 의하지 않고 남의 명령이나 속박에 따라 움직임을 타율(他律), 미래의 세계를 타세(他世), 남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타견(他見), 다른 까닭이나 사고를 타고(他故), 남의 영토 또는 영역을 타령(他領), 어떤 물건이나 장소 등의 다른 쪽을 타면(他面),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기타(其他), 남을 반대하여 내침을 배타(排他), 자기와 남을 자타(自他), 나머지 다른 것을 여타(餘他), 남에게 의지함을 의타(依他), 다른 이에게 이익을 주는 일을 이타(利他), 집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나감을 출타(出他),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남의 활을 당겨 쏘지 말라는 뜻으로 무익한 일은 하지 말라는 말을 타궁막만(他弓莫輓), 다른 것은 말해 무엇 하랴는 뜻으로 한 가지 하는 일을 보면 다른 일은 보지도 않아도 미루어 헤아릴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타상하설(他尙何說), 바빠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음을 염불급타(念不及他),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이 아주 확실함을 보무타려(保無他慮), 남에게 더 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자기 것으로 넉넉함을 이르는 말을 불필타구(不必他求)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