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방심하던 사이, 미니시리즈 한편이 조용하게 시작했다.
'시한부 인생, 소매치기, 결손가정, 삼각관계, 졸부집 딸과 가난한 청년'.
낡은 설정임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시작한 이 드라마는 그러나, 첫회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복잡한 가족사들이 얽혀있을지언정 질척거리지 않고 꼬여 있는 애정관계에서도 괜히 심각한 척 폼을 잡지 않았다. 회를 거듭할수록 보란듯이 그 낡음이 새로움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음을 증명하더니 급기야 "뜯어내면 심장마비로 죽어버릴 만큼 너무나 심장에 깊이 박혀"버렸다.
9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젊은이들은 변했으나 드라마는 단순히 "짱나, 캡숑, 열나" 등의 말투만을 옮겨오는 데 그쳤을 뿐, 변화된 청춘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낸 적이 없다. 하지만 < 네 멋대로 해라>는 그들의 대화법, 그들의 사고방식, 그들의 세계관을 투명하게 드러내면서 어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도 소화되지 않고 있었던 새로운 시대의 청년문화를 시원하게 세상으로 방출시켰다. 하여 가족을 중심으로 한 특유의 화법으로 80년대 드라마를 평정했던 김수현 작가가 그러했고, 90년대 후반 문학적인 감수성이 묻어나는 직설적인 대사로 마니아층을 형성했던 노희경 작가, 표민수 PD 콤비가 그러했듯이, 2002년 최강의 트리플을 이룬 감독, 작가, 배우가 합주한 <네 멋대로 해라>는 한국 드라마사를 바꾼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미 이 '초강력 까스 활명수'에 의해 뚫어져버린 이상 <네 멋대로 해라> 이전의 드라마와 이후의 드라마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9월 5일 20회 종영을 앞두고 밤샘촬영을 '전경 혼잣말하듯' 자주하는 <네 멋대로 해라>의 촬영장을 찾아 박성수 PD와 세명의 매력적인 배우들을 만났고, 인정옥 작가의 포항행 집필여행에 동행하며 전경과 복수, 그리고 미래의 옛날 이야기와 이후 이야기를 엿들었다.
편집자
우린 패배자, 그런데 세상은 우리 삶을 혁명이라 하네
<네 멋대로 해라>는 어떻게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나
그래 죽여주지. 드라마는 그렇게 시작한다. 소매치기 전과 2범. 세상의 떨거지 고복수는 감방생활을 끝내고 나오자 뇌종양임을 선고받는다. 넌 패배자야, 죽어. 세상은 고복수에게 너무도 당연한 듯 죽음을 예고한다. 그리고 죽어가는 남자에게 새 연인을 선사하고, 오랜 연인을 배신하라 부추기며, 결국 아비를 죽음으로 내몬다.
비정한 드라마다. 설정은 눈씻고 찾아봐도 어느 하나 새로울 것이 없다. 불치병, 복잡한 가정환경, 장애를 극복하는 사랑, 삼각관계 애정구도 등 대중드라마라면 응당 지녀야 할 '미덕'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으로 쾌락을 삼는다.
방영 첫주부터 밝혀진 복수의 죽음은 드라마 전체를 무겁게 짓누를 거라 예상하지만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늘 이런 식이다. 잔뜩 긴장하고 들어야 할 사랑고백이나, 불치병 선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어버리고 만다.
복수 역시 세상에 흔한 방식으로'복수'하지 않는다. 자신을 내팽개친 음험한 세상을 향산 '복수' 따위엔 관심이 없다. 머리채 쥐어잡고 싸워야 할 라이벌 여자 사이에 우정이 싹트고, 지탄받아 마땅한 양다리 남자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양부모 엄연히 살아있는 전경의 집안이 '문제집안'이고 누가 봐도 결손가정인 복수의 집안이 '화목가정'이다. 전과자인 복수를 "에이!전과자"라고 부르는 양찬석의 행동도, 보통 꽃미남 주인공들에 비해 못생긴 양동근을 '감자'나 '못생긴 놈'으로 지칭하는 것도, '은근히 느끼하다'라고 속으로만 생각해왔던 이세창에게 "딱 보면 느끼하게 생겼다"라는 대사를 일부러 집어넣는 것도 다 배신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을 통해 숨어있던 것, 드러내기 꺼려했던 것이 사실 그리 심각할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청춘, 과도기가 아니다
<네 멋대로 해라>의 바퀴를 움직이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다. 이 드라마 속 인간들은 여러 요소들이 찰흙처럼 뭉쳐져 성분검사를 해보기 전엔 좀처럼 행동을 예상할 수 없다. 하여 이들의 행위엔 쓰레게가 치 있을지언정 상투성이 숨어들 공간이 없다. 그저 상황에 가장 정직하게 반응할 뿐이다. 눈물이 나면 울고, 질투나면 질투하고, 화나면 때리고, 얼울하면 맞받아친다. 그간 대부분의 드라마에서의 등장인물들이 '캐릭터의 일관성'이라는 강박 속에 단선적이고 일차원적인 선택을 해왔던 데 비해 <네 멋대로 해라>의 캐릭터들은 'case by case'로 행동한다. 오랫동안 지켜보지 않으면 뭐 저런 아이들이 있나, 오해하기도 쉽다. 그들은 누구와 대화하느냐,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기 일쑤다. 미래 앞에서는 '세상없이 답답하게 구는' 전경이지만 형사 정달이 앞에서는 이빨을 꽉 깨문 채 거친말을 내뱉는다. 미래는 "내가 생각해도 멋진 언니"이기 때문이고 "정달이는 나쁜놈"이기 때문이다. 명료하고 단순하다. 이처럼 <네 멋대로 해라>의 다중적인 캐릭터 설정은 주인공 또래 새로운 세대의 특성들과 맞물려 묘한 시너지를 일으킨다.
전경과 복수, 미래로 대표되는 이십대 청춘. 그들은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되어갈는지에 관심이 없다. 주류와 비주류, 그 어느쪽에도 포섭되지 않는 새로운 인간형. 이들에게 청년기는 기성과 권력에 순응하기 전 단계인 과도기가 아니다. 또한 기성에 대립하는 반항기도 아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도 전혀 없다. "세상을 바꾸는 건 ... 죽는 것보다 어려운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 먹을 밥값과 차비, 때론 마음맞는 이성친구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 "내가 한 기자님 애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내가 지금 음악을 하는 사람이란 건 알아요"라는 전경의 대사처럼 세상 어느 하나 명쾌한 건 없지만 '지금.내가.무엇을.원하고.있나'를 알고, 그것을 유일한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건 다른 누구도 대신 알아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로 인한 모든 문제도 기꺼이 스스로 짊어지려 한다. 그들은 순정, 가족, 집단이데올로기 등에 의한 사회적 동기나 사명감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의리나 사랑으로, 혹은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움직인다. 부모에 대한 토대도 마찬가지다. 늦은 나이에 "이혼하겠다"고 집안을 풍비박산 만드는 못난 부모를 뒤로 하기 자기방에 드러누워 새우깡을 씹으며 "아...이 집 진짜 싫다"며 중얼거린다고 불효의 극치도 아니고, 복수가 아버지에게 상추쌈을 싸먹이고, 엄마의 맨발을 주무르는 것도 효도에 대한 강박이나 예의범절 때문이 아니다. 그저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내가 아니면 쓰러질 것 같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일 뿐이다. 이렇듯 이들은 사회적 동기는 없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내면적인 동기에 몸을 싣는다.
또한 중얼중얼 내뱉는 이들의 헛소리는 느슨해질 법한 드라마의 템포를 잡는 한편 모든 인물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애인을 뺏긴 억울한 기분에서도, 못만나서 괴로운 심정에서도, 애인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심각한 소식에서도 이들은 유머를 잃지 않는다. 심지어 뇌종양을 판명받는 순간에도, "제가 잔머리를 많이 쓰거든요. 그래서 종양이 된 거 아니에요?"라고 묻질 않나, 출소한 아들을 뒤로 두고 떠나는 아버지에게 우산이 촌스럽다고 불러세우는 아들의 헛소리나 "남이사"라고 심드렁하게 돌아서는 아버지의 대꾸나 결코 어느 누구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작가의 얄미운 장치들이다.
어떤 사랑, 악녀도 왕자도 없는
결국 삶의 태도는 사랑법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때때로 내가 살자고 남의 가슴에 대못 박는 짓을 서슴없이 해버리기도 한다. "마음이 잔인해지지 않고 어떻게 한 사람만 좋아합니까? 착한 마음으로는 세상 전부를 좋아하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만 좋아하려면 착해선 안돼요. 잔인하게 한 사람만 좋아할래요. 나중에...후회해도 좋을 사람"
이처럼 정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이들은 흔히 '어른들의 것'으로 치부되던 심각한 사랑과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전경과 복수의 연애장면은 유치원보다 더 유치하지만 그 안에는 대부분 한때 자신의 모습이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진실성이 숨어있다. "나 몰래 만나다 걸리면 죽어!"하는 미래의 협박은 "부숴버릴거야"라는 분노보다 더욱 간절하다. 이 사랑의 게임에 악녀도 천사도 왕자도 없다.
<네 멋대로 해라>는 결국 매우 이상한 드라마이며, 매우 '제 멋대로' 만든 드라마다. 대사만 보면 현실적이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현실에서 없는 '슈퍼울트라쿨'한 인간들의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네 멋'이 마음에 든다. 혁명을 꿈꾸지 않는 루저들에 의해 일어난 아이로니컬한 혁명이 반가운 것이다
복수처럼 엉뚱한 한편 전경처럼 진지한 박성수 감독은 다수의 베스트극장을 거쳐 <햇빛속으로> <맛있는 청혼>등을 연출했다. 수색의 폐공장터. 복수가 탄 오토바이가 유리창을 향해 날아가는 도난도의 액션신을 찍는 가운데 이루어진 이날 인터뷰는 '컷'과 '스탠바이'를 신호음 삼아 끊이는 듯 이어졌다.
- 처음 아이디어는 감독으로부터 나온 걸로 안다.
> "혼자 있을 땐 웃는 연습을 한다"는 시한부 환자의 이야기와 "시한부 통고를 받고도 그렇게 슬프거나 괴롭지 않았다. 그저 그간 인생을 낭비했다는 후회가 들었다"는 스티븐 호킹의 글, 또 지난 2월에 베니스의 아름다음을 보면서, 여기도 못보고 죽는 사람들은 참 불행하다라는 생각. 그런 모든 기억들이 혼합된건지, 미니시리즈를 준비하면서 막연히 '시한부 청년'을 떠올렸다. 하지만 흔한 투병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병을 알게 되면서 연애도 하고 직업적인 성취도 이루는 그런 청년을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눈이 나쁘다거나, 왼발이 작다거나 하는 수준으로 받아들여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감독과 작가가 한 맥박으로 드라마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작업이 아닌가.
> 작가 리스트를 보는데 모르는 사람이 인정옥 작가 하나였다. 그냥 몰라서 만났다. 앞서 이야기한 정도로만 말해줬는데 인 작가가 대뜸 재밌겠네요, 했다. 숙제가 아니라 재미로 생각해서 좋았다. 이후 써온 시놉시스와 1, 2회 대본을 보면서 좋은 드라마 한편이 나올 것 같았다. 윗선에서는 '실패한다', '어렵다', '재미없다' 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몇명의 시청자가 보더라도 그 시청자를 존중하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시청률 대강 나오고 금밥 잊혀지는 드라마라면 왜 꼭 만들어야 하는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내 멋대로 해봤다.
- 모든 인물들이 보통의 드라마에서 지켜졌던 캐릭터의 일관성에서 벗어나는 듯 보이지만 큰 줄기를 잃지 않는 것 같다.
> 방금전의 사건과 환경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새로운 환경에는 새롭게 반응한다,는 대원칙을 가지고 디렉팅했다. 사람이란 게 아무리 나쁜 일이 있어도 지나가는 농담에 웃을 수도 있고 아무리 기분좋은 일이 있어도 갑자기 화가 날 수도 있지 않나? 모든이들이 한번쯤 스스로에게 느꼈던 모습을 드라마에서 발견하길 바랐다.
- 빡빡한 일정일텐데도 세트촬영이 거의 없다. 지하철, 버스가 유독 많이 나오고.
> 돈없는 아이들이니까 공공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건 당연하고, 젊은 아이들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드라마니까 그들을 쫓아가는 생생한 느낌이 들길 바랐다. 미래의 집을 중심으로 대부분 홍익대에서 촬영되었는데,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이 아이들이 이 근처에서 연애하고 있구나, 하는 리얼리티가 살았으면 했다.
- 복수의 직업이 스턴트맨이다 보니 대규모 액션신이 많이 등장한다. 쉽지 않았겠다.
> 찬송가 중에 '부담이 변하여 능력이 되네'라는 구절이 있다. 꽤 좋아했던 말인데 스턴트신들은 그런 도전과 재미를 준다. 처음엔 부담스러웠는데 찍다보니 꽤 잘 찍게 되는 것 같다. (웃음) 정두홍 감독의 공이 크다.
- 복수 아버지의 자살은 의외였다.
> 아들은 죽고 노인은 남는, 쓸쓸한 느낌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자살은 그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종영하는 한 형태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였으면 했다. 생사관에 대한 작가와 연출의 의도가 같았기 때문일거다.
- 복수의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 고통과 눈물만이 남았나.
> 전혀 반대다. 오히려 유쾌하게 갈 거다. 복수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더 이상 잃을 것도 나쁠 것도 없이, 홀가분해지는 느낌일 것이다. 현실 속의 판타지라고 봐도 좋을 신들만이 남았다
.. 그 사람, 끝까지 속으면서두 믿어버리고만 싶은
고복수(양동근), 전경(이나영), 송미래(공효진), 캐릭터(배우) 열전
<네 멋대로 해라>를 보는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이 친구들, 오늘은 뭐하고 지냈나, 싸우진 않았나, 아프진 않았나, 궁금한메 오늘도 TV 앞에 앉는다. <네 멋대로 해라>에는 영웅이 없다. 대신 친구와 동생, 그리고 이웃이 있다. 복수와 전경과 미래의 안부가 궁금하고 한 기자, 전강, 복수아버지, 꼬붕이, 양찬석, 우찬석 심지어 정달이의 근황까지 궁금한 것이다. 이는 생생한 캐릭터를 만들어 낸 작가와PD의 몫도 크겠지만 33%는 역할들을 완전히 체화시킨 배우들의 몫이다. 양동근과 복수가, 이나영과 전경이, 공효진과 미래가, 다른 독립된 인물이라 상상하기 힘들다. 이들의 동물적이면서 본능에 가까운 메소드 연기는 드라마를 살린 1등 공신이다. 하여 이 세 배우와 드라마 속 캐릭터 그리고 그들의 잊을 수 없는 대사를 모았다.
"니가 뭐하러 소매치길 좋아하냐? 니가 나 같은 년도 아닌데, 뭐하러 걜 좋아하냐? 걔가 잘났냐? 너같이 이상한 것들 땜에 나같이 불쌍한 년들이 생기는 거다.....너 같은 년들은, 잡생각이 많아서,...믿음이란 걸 모르지?... 믿는다는 게 뭔 줄 아냐? 그 사람이 날 속여두, 끝까지 속아넘어간면서두, 그냥 믿어버리는 거... 그게 믿음이다...근데 , 복수는 안속여, 됐지?"
"지금..걔 옆에서 얼마나 사는 맛이 나겠냐? 알어. 나두. 나두 너 만나구 그랬으니까..근데..어뜩할라구?..인제 소리까지 바락바락 지를 정도로 아플텐데..그거 걔앞에서 숨기려구, 기를 쓸텐데..내가 그걸 모른척하니? 너, 죽어. 걔나 나보다, 빨리 죽어...난, 니 드런 꼴 다 볼 수 있는 사람이야, 복수야...난 니가 내 옆에서 눈 감을 거까지, 다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근데, ..걘, 너 죽으면 다쳐. 알겠냐? 너, 아파죽겠다구 맘대루 지랄지랄 할 수 있어야 돼...안그러냐, 복수야?"
<송미래>
야구장 치어리더. 악착스럽게 돈도 잘 모으고 생활력도 강한 여자로 부모없이 동생 현지와 함께 살아간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현행범으로 잡은 고복수를 감방에 보낸 인연으로 "남자가 아니라, 가족"같은 복수와 7년째 정을 쌓아간다. 간호사가 되어 복수와 함께 잘살아보겠다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미래는 세 명의 인물 중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자 이름 그대로 미래지향적 인물이다. "넌 참 곱게 복수를 도왔는데..나, 아주 드럽게 복수 도와야했거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고운 쪽이랑, 드런 쪽이랑 나눠져 있나부다. 난, 늘, 드런 쪽에서 살아야 되는 년인가부다. 그게 참..눈물 나. 왜 이렇게 태어났냐, 난.." 늘 '명쾌함의 여왕'이었던 미래지만 자신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전경이 복수의 새 연인으로 나타나자 자신감을 잃는다. 그리고 미래는 "답답하지만 귀여운" 전경마저 좋아하고 만다.
< VS 공효진>
질펀한 욕지거리를 서슴없이 내뱉는 공효진의 연기는 상스럽지 않고 정답다. "날씬하고 예쁜"데다 삶의 통찰까지 갖춘 미래를 연기해 낼 80년생 배우가 어디 그리 많으랴. 늘 "세상 다 산 년"처럼 굴다가도 복수 앞에서만은 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이나, 전경의 호의에 양아치처럼 구는 다양한 연기를 보여주는 그는 매회마다 가슴을 후벼파는 대사 한마디쯤을 박아넣고 더난다. 최근 자매처럼 동고동락하던 코디네이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큰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씩씩하게 촬영에 임하면서 속깊은 직업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울지마, 미래야...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근데...좋아하는데...그 사람이 너무나 심장에 깊히 박혀서..그걸 뜯어내면..심장마비루 내가 죽어...살자구 하는 짓이니까...니가 용서해, 응?"
"요즘요, 내 몸에 남아있는 쓰레기 냄새가..경이씨 몸에 닫는 것 같애서..참 심란해..경이씬 그냥 음악 속에서만 살이요. 내 나쁜 냄새, 되도록 피해가면서..난 경이씨가, 내 냄새나고 드런 기억 갖는 거 싫어요"
<고복수>
아버지(신구)가 원로가수 고복수를 좋아해 붙여진 이름. 열살 때 어머니(윤여정)가 도망가자 복수는 고아원에 맡겨진다. "3년 뒤에 찾으러 올게"라는 아빠의 약속의 말에 "뻥까지마.."라고 대답했지만 부자의 재회는 그로부터 15년 뒤, 그것도 소매치기로 형을 살고 출소하는 날 이루어진다. 그동안 옥바라지해 준 '와이프'같은 미래와 연애하며, 소매치기로 돈벌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던 복수. 어느날 그는 자신이 지갑을 훔친 전경이란 여자에게 첫눈에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뇌종양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지금 같은 세상에 가장 큰 복수는 착한 일을 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너의 착함을 가지고 세상에 대항해봐라는 뜻으로 붙였죠" 전경이 술에 취해 벽에 "복수는 내꺼"라고 낙서하는 것은 복수의 작명이 <복수는 나의 것>을 염두에 두었음을 드러내는 장면.
<VS 양동근>
"머리가 심하게 까맣고 곱슬에..물투가 심하게 졸리는 사람인데요.."전경이 복수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다보면 어느새 복수는 양동근 그 자체다. 무심한 듯 힙합리듬에 몸을 싣던 그의 몸짓이나 씹지않고 흘리는 듯한 양동은의 말투 역시 마치 고복수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멜로라서..."선택했다는 <네 멋대로 해라>는 양동근의 '사내다움'과 '섹시함'에 대한 발견인 동시에 아역부터 시작한 탄탄한 한 사람의 배우 발견이다. 16회 마지막신에서 죽은 아버지의 몸을 부둥켜안고 오열하던 그의 연기를 본다면 그가 얼마나 이 배역에 몰입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난 복수씨 쓰레기 냄새 같이 맡을래요..자기 안에 쓰레기 없는 사람이 어딨어요. 아마 그래서 사람들은 착하구 이쁜 것만 보고 싶은가봐요. 자기만의 쓰레게 안볼려구...그래서, 드런거 보면 토하구.., 근데 난 내 쓰레기두 보구 복수씨 쓰레기도 볼래요..난 비위가 강해서요, 토하고 그러지 않아요..."
"언니가 간호사 노릇하는 거 참 좋은 일인 거 같애요..그치만, 나까지 간호사 만들진 말아요, 언니...나한테 복수씬 환자가 아니라, 남자거든요..난, 그 사람 애인할래요..속두 썩이구, 일두 부려먹구, 싸우구,..그럴래요.
<전경>
"난 원래 천박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졸부(전경환)의 딸로 태어난 전경은 인디밴드 키보디스트다. 친구의 수술비로 가지고 있던 돈 500만원을 복수에게 소매치기 당한 뒤 친구가 죽게 되지 복수를 "영원히 미워할 것"이라고 다짐하지만 마음은 결심을 배신한다. "...좋아해두 되나요?..." 닭집 앞에서 엉겁결에 내뱉은 고백과 함께 "그 험한 기억이 복수씨가 살아왔던 현실이라면 난 그것두 좋아할래요..."라며 그의 지난 삶마저 받아들인 전경. 하지만 문제는 복수의 예 애인 미래다. 아무리 '질투의 화신'인 전경이지만 미래는 복수만큼 멋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을 좋아하는 한 기자(이동건)의 호의도 싫지가 않다. 전경은 세 명의 주인공 중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변화가 크고 다중적인 캐릭터다. 마치 자라나는 아이처럼 1회부터 20회까지 전경의 캐릭터는 복수로, 미래로 때론 그들간의 관계에 의해 점점 바뀌어 나간다.
<VS 이나영>
대부분 CF로 기억하는 것과 달리 인정옥 작가가 처음 본 이나영은 '여자 드림팀'으로 참여해 열심히 뛰고 구르는 모습이었다. 그러다보니 수박 2통은 거뜬히 들고 누구라도 쓰러지면 업고 뛰는 씩씩한 전경의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었다. "양동근 옆에 있는 제 모습이 왠지 어울리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하하. 전경은 계산하면 안되는 아이에요. 머리로 이해하려는 순간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거든요..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전경이 부러워요..."
.. "불안하죠, 그럼에도...사랑은 시작되지요"
작가 인정옥, 그녀를 알고 싶다.
카페문을 열고 그가 성큼성큼 들어와 마른손을 내민다. 다문 입에 꾸벅 건네는 허리인사나 악수를 청하는 폼이 꼭 전경 같구나, 생각한다. 불쏘시개같이 가는 담배가 재떨이에 쌓여가고 이야기가 점점 무르익자 이 사람, 미래같궅, 하는 생각도 해본다. "사람들이 똘아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복수 같기도 하다. 아직 4회 분량이나 대본을 써야하는 그는 처음에, 방송이 끝난 다음 인터뷰를 하면 좋겠다고 정중하게 거절했고, 몇주간 전화 끝에 "한시간, 아니 두시간만 뺏을게요"라는 속보이는 거짓말을 믿어주었다. 그때까지는 그 두시간이 3일간의 동행으로 이어질지 미처 알지 못했다.
"감독과 작가가 같은 박동수로 호흡하는 것 같아요"
"이데올로기와 정서, 둘 다 통해쓰니까요"
인정옥 작가가 박성수 감독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3월이었다. 박성수 감독이 스티븐 호킹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불치병에 걸린 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했을 때 그의 머리속엔 이미 고복수가 내려앉았다. "죽음이란 것에 대해,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려면 처음부터 그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가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고. 몇회 분량은 아닌 척하다가 나중에 알리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다행히 1,2회 대본이 썩 마음에 들었던 감독은 "니 멋대로 하세요"라며 인작가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주었다. 하지만 대본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수나 미래는 알겠는데 전경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전경은 주변에 널려있는 캐릭터예요. 맹하게 착하거나, 또순이 같은 역할이 아니라, 익숙하지만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오는..." 어차피 스탠더드한 연기에 익숙한 배우라면 제대로 소화하기 힘든 대본이라는 데 동의한 두 사람은 구체적인 대본이 나온 뒤엔 애초에 염두에 두었던 캐스팅을 엎었다. 그리고 "순전히 이미지 위주로" 캐스팅에 들어갔다.
여전히 성장중인 양동근과 이나영, 공효진은 연기자로서의 불안감들이 증폭되어 오히려 불안한 세 명의 캐릭터에 착착 감겨들어갔다. 초반엔 역니에 대한 주문을 하는 지문이 많았지만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에 빠져들자 특별히 감정지시가 필요한 신 외에는 거의 대사로만 이루어진 대본이 오갔다. "저 역시 처음엔 복수, 경이, 미래라는 캐릭터를 가지고 글을 썼는데, 요즘엔 양동근, 이나영, 공효진을 생각하면서 써요. 내 머릿속에 이미 복수도, 전경도, 미래도 없어요"
"방송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전 영화 먼저 시작했는데요..."
인정옥 작가가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디뎠던 곳은 여의도가 아니라 충무로였다. 87학번이었던 그는 대학 졸업 뒤 영화사 기획실에서 일하는 후배의 "3개월이면 끝난다"는 꼬임에 빠져 장길수 감독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스크립터 일을 시작으로 이후 여균동 감독의 <포르노맨> 역시 연출부로 참여했다.
"여균동 감독이 그때 시퀀스 써내오는 걸 보고 시나리오 써보면 잘 쓰겠다"고 했고 이런저런 연이 닿아 오기민 PD를 만났다. 그리고 오PD로부터 '여고괴담'이라는 제목 하나를 건네받았다. "기획적으로는 단순히 호러를 원했던 건데 그렇게 외국영화들을 모방해봐야 정말 무섭지는 않을 것 같았어요. 정말 현실적이어야만 가장 현실적이고 소름끼치게 공포를 받아들일거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시나리오는 완성되었지만 쉽게 제작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일단 귀신이라 해도 학생이 선생을 죽인다는 설정부터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고 한번 궤도를 벗어난 시나리오는 3년을 '우주미아'신세로 충무로를 떠돌았다.
"돈은 빨랑 벌어야겠고 일은 없고.." 어떤 이가 일주일 뒤면 MBC에서 코미디작가 공채가 있다고 말해주었고 급하게 원서를 내어 1차에 합격했다. 하지만 2차 시험에서 다소 황당한 이야기를 내면서 떨어졌다. 하지만 당시 <환상특급>이라는 드라마타이즈 오락프로그램을 준비하던 PD들은 "음...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군"하며 그를 눈여겨보았고 인정옥은 <환상특급>으로 처음 작가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후 <테마게임>을 쓰는 동안, <여고괴담>은 박기형 감독과 오기민 대표를 중심으로 제작에 들어갔다(지금도 알 수 없는 미스터리에 의해, 엔딩크레딧에 시나리오 작가 이름이 빠졌고 오기민 PD는 여전히 그 점에 정말 미안해하고 있다). 그리고 <해바라기>를 쓰게 되었다. "의학 드라마, 아마도 죽음에 끌렸던 것 같아요. 극단적인 상황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있을 때 삶의 진실을 끄집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병원은 죽음이 일상화되는 공간이고 그곳에서 의사들은 어떤 것을 느낄까가 궁금했어요." 하지만 <해바라기> 이후 한참을 쉬었고 그러다가 "방송사에서 미리 받은 돈이 있어서, 더 이상 도망갈 데가 없어서" 시작한 것이 <네 멋대로 해라>였다.
"다 문제 있는 가정이네요"
"화목한 중산층의 이야기를 내가 왜 해야하죠?"
"이혼한 친구가 있는데 TV를 보던 아이가, 엄마 우리는 결손가정이야?, 라고 묻더래요. 그전까지 아무런 이상도 못 느끼던 아이였는데 말이죠. Tv를 통해 보여지는 중산층의 화목함은 때론 부풀려져 있고 과장되어 있죠. 그런 건 죄악이라고 봐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다는 것을 드라마를 통해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복수네 집은 어머니가 없는 '결손가정'이지만 부자간의 정이 돈독하고, 자매 둘이 살아가는 미래의 집에는 훈풍이 도는 데 비해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집안인 전경의 가정은 결손가정보다 훨씬 불행한 공기를 안고 산다. 또한 <네 멋대로 해라> 속 가정은 그 역할이 상당 부분 전복되어 있다. "복수 아버지는 오히려 보통의 드라마에서 어머니에, 복수의 어미니는 아버지에 가까워요." 또한 모든 아이들은 어른을 가르치고 품고 달랜다. "살아온 연륜이 있으면 그 연륜에 의해 누군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요. 하지만 전 어른들이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세월동안 얻은 게 과연 전수해야 할 진리들인가요? 그저 살아가면서 잠정적으로 얻은 결론일 뿐이죠. 그걸 정답이라고 할 순 없다고 봐요"
"연애를 많이 해본 분 같아요..."
"많이 해봤죠" (웃음)
"사랑은 유치하쟎아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닭살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연애하다보면 누구나 초등학생 같은 행동을 하지 않나요. 말도 안되는데 삐치고 화내고 달래고 풀리고...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는 어른들을 대상으로 해야 하니까 뭔가 사랑을 늘 고귀하고 어렵고 심각한 것으로 만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어었어요. 그게 못마땅했어요. 그래서 경이와 복수가 노는 장면은 가장 초등학생답게 그렸죠." 복수와 경이 버스정류장 유리창에 붙여놓은 편지에 대해 "복수씨가 썼죠?" "아닌데요" "썼죠?" "아닌데요.."하며 점점 멀어지는 장면은 초등학생이 아니라 유치원 수준에 가깝지만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뿌듯한 웃음을 짓게 된다.
게다가 라이벌 관계인 미래와 경의 관계도 마치 맘에 드는 짝을 뺏기 위한 초등학생의 질투어린 쌍무 같다.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들 사이에는 교감하는 부분이 있을거라고 봤어요. 다른 운명으로 만났으면 미래가, 너 참 귀여워했줬을텐데, 하는 대사도 있고..." 양다리를 걸치는 데 꼭 악의만이 있겠냐고, 새로운 사랑이 나타났기 때문이지 이전의 사람이 싫어졌기 때문은 아닐 거라면서. "미래의 사랑은 규범적이고 안정적이에요. 사람들은 그런 사랑만이 영원하다고 믿죠. 복수에게는 그런 사랑이 맞다고 미래에게 돌아가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전경의 사랑은 불안해됴. 그럼에도 불구하고...어쨌든 사랑은 시작되었어요. 사랑이 영원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한때 마음을 울린 것들은 그 시기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요?"
"마니아도 벌써 생긴 것 같아요"
"...신경 안써요"
<네 멋대로 해라>의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면 드라마의 명장면, 명대사를 뽑아낸 글들이 빽빽이 올라와 있고 벌써부터 '이 작가가 궁금하다' 식의 기사도 심심찮게 올라오고 있다. 인정옥 작가의 팬 카페도 있다. 하나하나 떨어뜨려 놓고 보면 제법 싱거워지는, 배우들의 입을 통하지 않고는 맛이 없는 인정옥의 대사는 문학적인 강박에서 벗어나 대본은 결국 배우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글임을 인지시킨다. 때론 비문과 상소리가 아무렇게나 뒤섞이고 때론 해체된 문장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귀에 들어오는 순간엔 그 어떤 시적인 대사보다 큰 감동을 선사한다.
"누군가 내 드라마에 교감을 느끼고 즐거워한다는 건 분명 신나는 일이지만 작가가 그것에 영향을 받아선 안된다고 생각해요. 팬들은 작가가 자신들의 기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라치면 사정없이 매서워지거든요. 신경을 쓰다보면 어쩔 수 없이 매이고 그런 것에 얽매이긴 싫어요. 전 언제라도 배신때릴 준비가 되어 있는걸요." 마음이 떠난 것도 아닌데 배신이 기다려지는 이상한 심리. 갑자기 미래를 향한 고복수의 마음이 온몸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