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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여행 | 환상선 눈꽃열차
겨울 산하를 추억으로 돌아본다
국내 최고(最高) 추전역, ‘하늘도 세 평, 땅도 세 평’ 승부역 등에 겨울 낭만 가득
‘하늘도 세 평, 땅도 세 평.’ 기차가 아니면 갈 수 없는 오지 영동선 승부역. 가파른 산비탈을 깍은 자리에 간이 역이 혹처럼 달려 있다. 실제로 ‘하늘도 세 평, 땅도 세 평’은 아니지만 태백산맥 첩첩산중 오지의 역이라는 표현이다.
역 아래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 상류이다. 깍아지른 절벽 아래, 언 강 위에는 넓은 썰매장이 마련돼 있다. 동심으로 돌아간 어른들과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썰매를 즐긴다. 강변 비좁은 모래사장에 설치된 임시 천막에서는 다양한 먹거리가 시장한 관광객을 부른다. 닭고기꼬치구이, 순두부돼지고기볶음, 시레기국밥 등 투박하고 담백한 시골 음식이 추억을 자극한다.
‘2007 환상선 눈꽃열차’가 가장 오래 머무는 승부역은 팍팍한 삶에 풋풋한 추억 하나를 만든다. 환상선 눈꽃열차는 1998년 12월 운행되기 시작해 해마다 폭발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겨울철 대표적인 관광열차. 기차를 타고 가며 하얗게 쌓인 눈꽃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산하를 열차로 돌아보며 ‘기차여행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고, 국토의 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1월 13일부터 2월 11일까지 매일 출발한다.
서울역, 청량리역을 출발해 양평∼원주∼제천∼영월∼증산∼추전∼태백∼승부∼춘양∼봉화∼영주∼제천을 둘러보고 단양을 거쳐 다시 청량리역, 서울역으로 돌아온다. 강원도의 산간과 낙동강 상류를 달리면서 다리 497개, 터널 204개를 통과한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추전역(해발 855m), 열차만이 접근수단인 승부역, 인삼의 고장 풍기역 등에 정차해 승객들을 겨울 산하 속으로 안내한다.
환상선(環狀線)이란 이름은 열차 운행코스가 둥근 고리모양처럼 보여 붙여졌다. 경부선(서울~용산), 경원선(용산~청량리), 중앙선(청량리~제천~북영주), 태백선(제천~백산), 영동선(백산~북영주) 등 이용하는 철길만도 다섯 개에 이른다. 총 594.6㎞를 운행하는 동안 140개의 역과 만난다.
◇ 터널, 터널, 터널 = 청량리역에서 아침 8시 14분 정시에 출발한 열차는 도시의 분주한 하루를 열며 달리다 이내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망우 터널이다. 길이는 1.6km. 조금 길다고 느껴지는 터널이 끝나면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 왕숙천이다. 14시간 동안 기차를 타면서 만나게 될 204개 터널 여행의 전주곡이다.
터널은 원시시대에 주거용 동굴로 시작됐다. 기원전 이집트 왕의 묘에서는 통로로 사용됐다. 화약이 발명되고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철도의 보급과 더불어 터널도 인류생활과 친숙한 시설물이 됐다. 철도?도로?수력발전소 등의 건설이 활발해지면서 초대형 터널이나 해저 터널도 건설되고 있다.
터널은 목적지까지 쉽고 빠르게 가는 길이다.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하는 수고를 덜어준다. 터널은 아무리 어둡고 길어도 끝이 있고 출구가 있다. 그러기에 어느 누구도 터널을 앞에 두고 긴장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잠시의 답답함과 지루함을 참고 견디면 목적지가 가까워지고 새 풍경이 전개된다는 믿음이 있다.
지나온 삶의 여로를 돌아다보면 수 없는 터널이 있었다. 환상선 눈꽃열차 여행에서도 204개의 터널이 있다. 크고 작은 터널을 지나며 인생을 회고할 수 있는 기회이다.
환상선 눈꽃열차 여행에서 가장 긴 터널은 정암(淨巖)터널이다. 태백선의 고한역과 추전역 사이에 있는 터널로 길이 4,505 m, 너비 3.9 m, 높이 5.9 m이며 1973년 2월 개통됐다. 터널의 단면은 말굽형[馬蹄型]이며, 단선 터널이다. 1956~75년에 있은 태백선 건설공사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공사였다.
◇ 겨울 산하 = 우리의 철도역사는 1백년을 넘었다. 한세기 이상 국토의 동맥역할을 하며 국민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철도는 오랫동안 문학작품의 주제가 되어왔고 숱한 유행가도 낳았다. 기적, 철마, 막차, 야간열차, 철길, 텅빈 대합실, 이별, 상봉, 기다림에 기차길옆 오막살이?옥수수밭에 이르기까지 철도는 우리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주고 또 감상에 젖게 한다.
국내의 오지를 차창 밖으로 볼 수 있는 환상선 눈꽃열차에는 추억이 있고 나날이 발전하는 산하를 함께 볼 수 있다.
정시에 출발한 기차. 느릿느릿 전철 오가는 시내를 통과해 어느새 한강을 지난다. 덕소, 팔당, 능내역을 지나면 남과 북 두 한강이 하나 되는 두물머리(양수리)이다. 춥지않은 겨울의 두물머리는 살얼음 평원이다. 아침 물가의 나뭇가지는 하얗게 서리를 이고 있다.
열차 탑승시간이 긴 편이어서-거의 하루 종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다소 힘든 여정이다. 객실에서 벌어지는 각종 이벤트에 참가하거나, 카페객차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분위기를 잡아보기도 하면서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여행지를 구경하면 즐겁다. 사람의 정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기차 안에서 밖으로 보이는 겨울 경치는 여행에 대한 설렘과 함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지나온 시간을 돌이킬 수 있는 여유, 순백의 순수함을 느끼게 한다.
북한강 철교 건너면 양수역. 예서부터는 남한강 물길을 끼고 달리다 양평에서 강을 버린다. 이제 중앙선 철로는 산을 가르며 원주를 거쳐 치악산 지나 제천으로 치닫는다.
꿩과 구렁이의 전설이 서려 있는 상원사가 떠오르는 원주역, 뱀이 똬리를 틀 듯 한 바퀴를 돌아 나오게 되는 루프형 터널(금대2터널), 월악산국립공원, 역사 문화의 교육장 청풍문화재단지, 선비 박달과 금봉 처녀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는 ‘울고 넘는 박달재’로 알려진 제천역 등이 잇따라 지나간다. 이제부터는 태백선 구간. 열차의 속도가 더욱 느려지며, 창 밖으로 멋진 경치가 펼쳐졌다. 연당역을 지나 영월역에 들어서기 전, 왼편에 비운의 왕 단종이 기거하던 청령포가 보였다. 오른쪽으로는 서강(평창강)과 동강이 만나 남한강이 되어 흘러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미원역을 지날 때는 높이 올라와서 그런지, 마치 비행기를 타고 넘어가는 듯한 기분이다. 왼쪽 아래로는 증산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운행하는 정선선 철길. 정선 아리랑과 함께 기차여행의 향수를 떠올릴 수 있다.
◇ 추전역과 승부역 = 열차는 산을 오르는 듯 숨소리가 거칠다. 터널이 수시로 나타나고 계곡도 부산스레 열차 좌우를 오간다. 산이 깊어짐을 알리는 풍경의 변화. 수리재터널 지나 자미원역에 이르니 ‘해발 688m역’이라고 쓴 글씨가 보인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추전역(태백시)의 높이가 855m이니 기차는 앞으로도 167m를 더 올라야 한다.
증산역을 출발한 무궁화호가 내리막을 조심스레 내려간다. 왼편 계곡에는 거대한 교각공사가 한창이다. 폐광촌 경제 활성화를 위한 38번국도 직선화 공사다. 철로는 오르막으로 변하고 온통 탄 빛깔로 변한 축대 위 철로는 사북 역으로 이어진다. 강원랜드 카지노가 들어선 뒤 고층 모텔만 우후죽순 들어서는 사북역. 한때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탄광촌의 신화를 상기시킨다. 태백으로 향하던 열차가 긴 터널로 빨려 들어갔다. 국내에서 두번째로 긴 정암터널(4505m)이다. 터널 밖의 추전역은 국내에서 가장 높은 역이다.
해발 855m의 고지대에 위치한 추전역. 싸리밭골에 세운 역이라서 추전역이다. 1973년에 세워진 역으로 5?16군사혁명 후에 국토건설단원들이 동원되어 건설했다. 싸리밭골은 중촌에서 왼쪽으로 갈라져 들어간 골짜기이다. 골짜기 안쪽에 화전(火田)을 많이 하여서 묵밭이 많고 그 묵밭에 싸리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서 싸리밭골이다. 옛날 이 골짜기안쪽에 큰 싸리나무가 있었는데 홍수에 떠내려가서 동점 구문소의 석벽을 강타하여 구문소의 구멍을 뚫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도 골짜기안쪽에는 팔뚝만한 싸리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추전역에서는 태백 풍력발전단지를 바라볼 수 있다. 8개의 하얀 바람개비가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매봉산 정상에서 돌아가는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해발 1,303m 매봉산 정상에 조성된 태백풍력발전단지는 추전역이 자랑하는 볼거리이다.
추전역에서 20분간 머문 열차는 다음 목적지 승부역을 향해 다시 움직인다. 추전역에서 승부역까지는 40분 거리. 승부역은 환상선 눈꽃열차의 종착지이다. 문수산 등 1,000m가 넘는 산들이 예닐곱개가 겹쳐진 '육지 속의 섬마을'이다. 승부로 들어오는 길은 석포에서 비포장 길로 7∼8㎞. 겨울이면 그나마 얼음판이 돼 차편이 끊겨버린다. 유일한 교통편은 하루에 4번씩 다니는 통일호 열차뿐. 손님이라고는 하루 2∼3명이 고작. 그나마 1명도 없을 때도 있다.
승강장 앞 쉼터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 있다.
“작은 꽃밭 애처로워 / 세평하늘 되었는지
작은 꽃밭 넘친정에 / 세평하늘 되었는지
세평꽃밭 님의 마음 / 하늘만큼 넓었으니
님의 마음 승부역은 / 하늘꽃밭 만들어서
님과 함께 정을 주네”
오른쪽으로 뒤뚱거리며 냇가를 건너갈 수 있는 흔들다리가 놓여져 있다. 태풍과 수해를 겪으며 3번째 다시 태어난 사연을 간직한 다리다. 다리를 건너면 청아하게 물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계곡을 따라 트레킹을 할 수 있는 오솔길 코스, 옛 선조의 생활상을 표현한 농기구 전시관 등이 있다.
역사 옆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로 썼다는 '영암선 개통비'가 있다. 영암선은 55년 12월 30개가 넘는 굴을 뚫고 다리를 세우며 영주와 철암을 이어줬던 '최대의 역사'였다. 석탄을 실어나르기 위해 험준한 오지까지 철로를 뚫었다. 그때만 해도 60가구 이상이 살았다. 지금은 역사 바로 뒤의 6가구, 10여분쯤 떨어진 마을에 각각 열댓 가구씩 모두 30여가구가 산다.
1956년 1월 1일 역이 열리고 1982년에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봉화군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됐다. 1998년에 순수한 자연 풍경을 간직한 승부역을 연계한 환상선 눈꽃 순환열차가 운행돼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게 됐다.
◇ 인삼의 고장 풍기역 = 승부역을 나서면 이제 국내에서 가장 험준한 산악, 협곡지역을 지난다. 창 밖의 경치가 멋지다 못해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돈 주고도 보기 힘든 겨울 경치를 편안한 열차 안에서 실컷 볼 수 있으니, 영화제목처럼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오순도순 정겨운 이야기를 하고, 계란을 까먹으며 부모님은 옛 추억을, 자녀들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기차여행. 고요한 산과 들을 굽이굽이 돌고, 스쳐 지나가는 이름 모를 간이역과 시골풍경을 바라보면 눈이 즐거워진다.
17시00분 한눈 팔 시간이 없을 정도로 계속되는 멋진 경치에 “우와! 멋지다∼”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동안 열차는 세번째 정차역인 중앙선 풍기역에 도착한다. 인삼으로 유명한 곳. 인삼향에 취해 역앞 인삼시장에서 인삼을 사기도 하고, 재래시장에서 사과, 고추, 참깨, 무, 파 등 신선한 농산물을 사기도 했다. 풍기역 앞 인삼모형에 얼굴을 대고 사진을 찍으면, 아쉽지만 서울로 돌아가야 할 시간.
풍기 인삼시장은 1965년부터 정기시장이 개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0년 9월 풍기역 앞에 건평 1,436평의 인삼시장을 개설하여 수삼?백삼 등을 상시 판매하고 있으며, 현재 약 80여개의 점포가 위치하고 있다. 2001년 12월 중앙고속도로의 완전개통으로 풍기 IC를 통한 외지인구의 유입으로 인하여, 매출이 50%이상 오르는 등 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다. 또한 매년 9월말에서 10월초에 풍기인삼축제가 열려 인삼 캐기 체험 현장, 인삼요리 전시회 등 각종 행사가 개최되고 있어 국?내외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 야간 열차 = 18시00분 풍기역을 떠난 기차는 단양팔경과 고수동굴, 구인사, 남한강 물줄기가 보이는 단양역으로 향한다. 19시00분 카페객차에서 오늘의 마지막 이벤트 디스코 타임이 벌어진다. 디스코음악도 멈추고 열차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온다. 이제부터는 저마마 하루의 열차 일정을 돌아보고 상념에 젖는 야간열차 여행이다.
야간열차의 차창 너머로 명멸하는 도시의 작은 불빛을 관찰할 수 있다. 일상의 일탈과 새로룸을 찾아서 떠난 길, 밤풍경에 삼켜진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평온하고 관조적인 삶의 여유로움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하루를 돌아보며 승객들은 친구이자 형제가 되어 시간 밖으로 떠난 이야기를 나눈다.
호기심과 상상력은 차창 밖으로 흘러갔던 풍경들에게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한다. 마음의 돛을 올리고 달콤한 유혹으로 환상선 눈꽃열차에 몸을 실어야 했던 이유를 서로 찾는다. 열차가 전속력으로 어둠을 가르며 이름 모를 역들을 지나는 동안, 객차라는 소우주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희미하게 불빛이 밝혀진 가운데 끊임없이 속삭이는 사람들. 서로 닿을 듯 말 듯 뒤척이는 몸뚱이들. 현재가 과거나 미래와 똑같은 간격으로 끊임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열차 안에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 잡티 하나 섞이지 않고 순수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들. 우리 자신의 근원과 연결될 때 우리 안엔 참으로 소중한 에너지가 샘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