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 압살롬’
작가 ; 윌리엄 포크너(1897-1962)
초판 ; 1936
압살롬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연합 이스라엘 왕국의 2대 왕 다윗의 셋째 아들이다. 아버지 다윗에 대항하여 압살롬의 난을 일으켰으나 패배해 살해당했다.
압살롬은 다윗이 헤브론에 있을 때 그루스의 왕 탈마이의 딸 마아카에서 태어난 아들로 알려져 있다. 이후 다윗의 장남이자 형인 암논이 자신의 누이 타마르(다말)를 강간하자 이에 대한 복수로 2년 후 에프라임 근처 바알 하초르에서 자신이 주최한 연회에서 부하들을 시켜 암논을 살해했다.
그리고 3년 동안 그루스의 왕 암미훗의 아들 탈마이에게 있다가 돌아왔다. 그러나 다윗의 휘하 장수이자 군대 장관 요압이 이를 반대하자 분노해 요압의 밭에 불을 질렀고 이후 반란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를 했다.
4년 후 압살롬은 드디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다윗은 요르단 강을 건너 요르단 지역으로 피신했다. 압살롬은 아히토펠의 말을 듣지 않고 후사이의 의견에 따라 다윗을 뒤쫓았다가 요압의 군대에 의해 패배하여 도망가다가 향엽나무에 머리가 걸려 매달렸다.
그리고 한 병사에 보고로 달려온 요압과 그의 군사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 이야기는 소작농에서 대농장주가 된 토마스 섯펜이 1835년에서 1910년 사이 (노예들을 데리고 도망친 프랑스 건축가를 쫓다가 잠시 쉬는 동안에)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다섯 번에 걸쳐서 이야기를 한다.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가 무너지는 과정을 악으로 점철된 섯펜가의 비극을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다.
포크너는 성(性)과 인종 문제, '남부'의 과거와 현재, 시간, 인간의 본성, 영원 등 자신이 끈질기게 추구했던 주제를 이 소설 속에 집약시켜 "도스토예프스키보다 도착적이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발표 당시에는 긴 문장과 모호한 단어, 어두운 표현으로 널리 이해받지 못했으나, 지금은 미국 문학사뿐 아니라 세계 문학사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833년 미국 남부의 소읍인 요크나파토파에 토머스 섯펜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인디언 부족에게서 넓은 땅을 구입한 그는 흑인들을 데리고 벽돌을 굽고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기 시작한다. 오 년 후, 어디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대저택과 인근에서 가장 큰 목화 농장을 갖게 되자 그는 그에 걸맞은 신붓감을 구한다. 종교적으로 아주 경건한 콜드필드 가문의 딸 엘런이 그 상대였다.
과거를 알 수 없는 '악귀' 같은 그와 눈물을 흘리며 결혼했던 엘런은 헨리와 주디스라는 남매를 낳는다. 대학에 간 헨리가 사귄 찰스 본이라는 남자가 주디스와 약혼하려는 것을 서트펜이 반대하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서트펜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사 년 후 헨리가 찰스 본을 살해하면서 새로운 비극이 닥쳐온다.
대농장주 섯펜에게는 본이라는 이름의 아들(이름으로 추정컨대 흑인의 혈통일 수도 있다.)이 있다. 만일 그에게 흑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 섯펜은 몰락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혼혈일지도 모른다는 애매한 정체성 때문에 소외 당한 체 방황하다가 살인을 저지른다.
배다른 형제인 찰스 본과 주디스의 결혼을 막으려 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용인하려 하자 백인 순혈주의 때문에 더 이상 허용할 수도 없었다. 섯펜 농장은 흑인이 없으면 농장 운영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백인순혈주의 때문에 흑인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섯펜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소설의 마지막에 흑인 섯펜의 남자 아이가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순혈주의에 대한 대를 이은 집착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섯펜과 자녀인 헨리와 주디스) 결국에는 혈인혈통만이 남게 된다. 이것은 아무리 발버둥처도 시대의 흐름은 자신의 방식대로 희망을 남긴다는 것을 포크너는 은유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한다.
‘압살롬 압살롬’에는 근친상간과 백인순혈주의 두 가지를 상징한다.
다수의 화자에 의하여 이야기되는 내용에는 많은 차이가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를 인식하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하는 의문을 던지게 한다. 압살롬, 압살롬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다.
흑인들은 백인을 위해서 무한히 봉사한다. 백인들의 얼굴, 성, 피부 등에 따라 지역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다르다는 보여준다. 그리고 백인의 땅에서 노동을 강요당하는 흑인들이 막상 백인이 거부한다는 것도 보여준다. 이러한 의문은 끊임없이 반복한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아는지 누가 알겠느냐.”는 "그들의 얼굴, 피부, 성 그리고 땅이 흑인의 노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안다면 흑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이 아는 것을 계속하여 거부할 수 있겠느냐?"로 의문이 바뀐다.
포크너는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것(예들 들면 섯펜이 본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이기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포크너는 아직까지 흑인에 의존하는 그의 고향에서(비록 이제는 노예는 아니더라도 빚에 의해 착취 당하는 노동자가 되어 있지만) 자신의 조상들과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모더니즘 소설로서 빛을 나게 했다고 한다.
이 소설을 모더니즘 소설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