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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는 교황청의 정치적인 기반이 되었고,
교황청은 예수회의 보호막이 됨으로써
상호 의존적이고 공생적인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회가 각 국에서 물의를 일으켜 쫓겨나자 교황청은 이들을 탄압했고,
예수회는 교황청을 음해하고,교황을 암살하면서 이에 맞섰습니다.
교황청과 예수회 자신의 이익을 최 우선시 하는 권력집단이고 협력하면서도
때로는 견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19세기 들어서 예수회는 '하나님의 여인들'이라는 여성단체를 만들어
많은 교사와 기숙사를 설립함으로써세력확장에 나섰습니다.
예수회는 성모 마리아 숭배에도 심혈을 기울여 예수회의 제안으로
1854년에 성모 마리아의 '무염 잉태설'(원죄 없이 잉태)이 교리로 발표되었고,
프랑스 등의 성모 마리아 출현 사건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습니다.
1870년 바타칸 공회를 통해 믿음과 도덕적인 모든 문제에
'교황의 절대무오류성'이 선언됨으로써 교황의위상과 권위도 높아졌습니다.
교황을지지하는 예수회는 점차 교황청을 장악했고, 마침내 지배하기까지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유행어 가운데 '교황의 펜대는 예수회의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예수회 회원 중 상당수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점입니다.
예수회 자체가 프리메이슨의 신비주의적인 영성훈련과 사상, 조직을 모방해 만들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회와 프레메이슨은 서로 다른 사상과 기반을 지닌 권력집단으로 때로는 협력하지만 언젠가는 굴복시켜야 할 적입니다.
한편 요한 바오로 1세의 급작스런 죽음도 프리메이슨과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1984년 6월 영국에서 출간된 신의 이름으로라는 책에서는 요한 바오로 1세가 독살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요한 바오로1세는 즉위한 후 교회 사상 유례없는 대개혁을 결단하려고 했습니다.
1978년 9월 28일 오후 5시 30분 바티칸 교황청의 국무장관인 잔 비로 추기경은 요한 바오로 1세로부터 호출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바로 추기경은 교황 자신이 조목조목 쓴 인사 이동 목록을 전해받았고, 교회사상 없었던 많은 해직대상자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명단에 실렸던 사람들은 바티칸 국무장관 아고스티노 카사롤리 추기경, 로마 부주교 우고 볼렛티 추기경, 바조 추기경, 바티칸은행 총재 폴 마칭쿠스 주교(현재 대주교), 조반니 베네리 추기경 등이었는데 이들 전원에겐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프리메이슨의 단원이라는 것입니다.
인사이동 명단을 본 비로 추기경도 바티칸 내부의 프리메이슨 중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1세는 바티칸 내에 침투되어 세계통일을 꿈꾸는 프리메이슨을 일거에 제거하려고 했으나 완강한 저항에 봉착, 결국 교황 즉위 33일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과 예수회
a) 1차 세계 대전
20세기 초 유럽의 강대국들은 로마 교황청의 영향력을 벗어나 서로 연합하였습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정교회) 등이 연합하였고, 교황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곳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스페인 정도였습니다.
동 로마제국에서 발현한 그리스 정교는 발칸반도에서 번성하였고, 슬라브 민족을 기반으로 한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는 교황청과 오스트리아의 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정교회는 러시아 짜르의 후원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세르비아를 응징하기 위해서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와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연합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의 황태자 프랑소아 패르디난트(Francois-Ferdinand)가사라예보에서 마케도니아의 학생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이 일은 세르비아 정부와 아무 관련이 없었으나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랑소와 조셉에게 충분한 전쟁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예수회 회원인 오스트리아 각료들과 교황청은 조셉 황제에게 전쟁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일을 이용하여 유럽을 정복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옛 권력을 회복하려 하였습니다.
교황청은 우선 프랑스를 멸망시키기 위해 독일 연합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수 많은 사상자를 낸 채 독일이 패배했고, 이로 인해 교황청의 위신은 크게 추락하였습니다.따라서 1919년 6월 연합국이 베르사이유 조약을 조인할 때 1차 대전을 조장한 바티칸은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되었습니다.
b) 예수회의 파시즘과 나치즘 지원
1차대전의 실패로 교황청은 큰 손실을 입었는데 친 로마적 합스부르크 왕가는 무너졌고, 유고의 정교인들은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났고, 러시아는 공산화되어 무신론자가 되었고, 독일은 완전히 파멸했습니다.
예수회는 권세를 회복하기 위해 각 국에서 활동을 재개하였는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는 샤를 황제를
지지하였고,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를 후원하여 정권을 잡게 하였습니다.
무솔리니는 전체주의자로 1차대전 제대군인들을 모아 파시스트당을 창립하였고, 1922년 10월 로마진군이라는
쿠테타로 정권을 잡고 정치, 문화, 경제를 개혁해 독재정부를 수립했습니다.
타키 벤추리 신부는 예수회 회원으로 당시 무솔리니의 고해신부였습니다.
당시 교황청은 7억 5천만리라를 무솔리니에게 주고 바티칸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을 확보하였습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로부터 자극을 받았으며 나치즘은 파시즘의 전체주의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히틀러가 전체주의적 나치즘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회복하자 바티칸은 또 다시 독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치즘은 반 민주주의, 우생학적 인종 우월주의, 독일민족 지상주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반공주의 등을 바탕으로 한
독재적 정치이념입니다.
1차 대전 이 후 예수회 총재가 된 할케 폰레도코브스키는 오스트리아, 체코,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 크로아티아,
바이에른(독일 남부) 등을 포함하는 중부와 동부 유럽의 카톨릭 국가 연맹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중앙 제국은 두 개의 전선을 형성하는데 동부는 공산주의로 무장한 소련이고, 서부로는 개신교 국가인
영국과 혁명사상으로 뭉친 공화국 프랑스입니다.
바이에른(독일 남부)은 카톨릭 국가이고 히틀러는 카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교황청은 나치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히틀러는 중대사안에 대해 교황청과 상의하거나 인가를 받았습니다.
1924년 교황청과 바이에른은 협정을 맺었고, 베를린 주재 교황 대사인 파셀리는 1932년 7월 20일 반정부 시위를
주동하고 군의 개입을 막음으로써 바이마르 공화국(당시 독일의 중심)을 붕괴시킵니다.
예수회는 주로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였고, 1933년 풀다(Fulda) 회합에서 독일 주교들은 히틀러가 발표한 선언
(독일 사회주의 운동은 신성한 카톨릭 교리에 의거하고, 교회의 사명과 권리를 보장)을 받아드렸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카톨릭 정당을 이끄는 스투르조가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이양하였고, 독일에서는 카톨릭
중앙당(Zentrum)의 대표인 폰 파펜의 지원으로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교황청의 외무대신 파셀리 추기경은 히틀러에게 반 카톨릭 종파를 척결하도록 건의했습니다.
히틀러는 1933년에 유대인과 자유주의자 4만명을 45개 수용소에 분산 수감하였습니다.
한편 교황청은 무솔리니의 이디오피아 침공을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쟁지지 발언을 하였습니다.
파시스트는 1939년 알바니아도 침공했는데 이는 카톨릭 세력을 넓히려는 교황청의 계획에 부합하는 일이었습니다.
한편 스페인에는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교황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스페인의 혁명군에게 군자금, 전쟁물자, 항공기 등을 지원하였습니다.
교황은 스페인 공화국의 수반을 파문하고, 교황청과 마드리드 간의 영적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바티칸은 내란이 끝나기 20개월 전인 1937년 8월 3일 혁명군 프랑코 정부를 인정하였습니다.
c) 2차 대전의 발발과 유럽의 카톨릭화
독일 뮌헨에서 퍼레이드 하는 |
1938년 3월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
왼쪽부터 히틀러(A. Hitler), |
1930년대의 경제 공황과 자본주의 열강의 경제 블록화는 식민지가 부족한 독일을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1937년 독일과 이탈리아와 일본은 3국동맹을 맺고 영국, 프랑스, 소련에 대항하였습니다.
1937년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병합함으로써 중부 유럽의 세를 넓혔습니다.
히틀러는 산업을 발전시켜 전 후 보상금 등으로 피폐한 경제를 일으켰고 군사력을 대폭 증강하였습니다.
1939년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은 폴란드와의 영토 협상이 결렬되자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은 발발합니다.
히틀러, 괴벨스, 히믈러 등은 카톨릭 신자였고,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항상 교황청과 협의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은 나치와 교황청이 힘을 모아 유럽을 정복하려 했던 전쟁입니다.
교황청은 2차 대전을 전후해서 독일의 무력을 이용해 비 카톨릭 교도를 제거하고, 세력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병합 때 비엔나의 대주교인 이니찌(Initzer) 추기경은 "히틀러 총통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고 있으므로 신도들은 독일 제국을 받아드려야 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해 독일군을 환영했습니다.
독일과 병합된 체코 의원 중 일부는 카톨릭 사제였고, 그들은 교황청의 허가로 공직을 겸할 수 있었으며,
그들 중 한명은 국가 원수로 임명이 되었고, 최고 영예인 철십자 훈장을 받았습니다.
1941년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크로아티아 독립국'이란 위성국을 만들었고 루이 바소
(Louis Barthou)라는 테러리스트를 수상으로 앉혔으며, 크로아티아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스 정교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이 결과 30만명의 세르비아인과 유대인이 추방되었고, 50만명이 학살되었으며, 24만명의 정교회 신자가
고문과 협박으로 개종되었습니다.
이를 주도한 경찰총장 등 공직은 카톨릭 사제들이 차지했으며, 가장 끔찍한 수용소인 자세노바크(Jasenovac)의
소장인 미로슬라프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tch) 또한 사제 출신입니다.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수상이 된 예수회 회원 티소(Tiso) 경은 "카톨릭 정신과나치주의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세계를 개조하는데 힘을 모았다."고 선언했습니다.
1940년 6월 바티칸은 라디오로 티소의 선언문이 교황의 승인을 얻었다고 발표하였고, 티소 정권은 국민의 20%에
해당하는 개신교도에 대해 탄압을 가했고, 정교회 신자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켰습니다.
프랑스에서는 F.N.C.(카톨릭 국민 연합회)가 조직되어 드 카스텔노(de Castelnau) 장군이 선임되었고,
3백만명의 지지자가 참여하였습니다.
78세의 이 군 장성은 파시스트적인 교회 선전 전략의 기수가 되었습니다.
F.N.C.는 카톨릭의 행동대원으로 예수회 신부들이 창설에 일조하였습니다.
예수회는 '예수 성심회'를 통하여 F.N.C.를 결성, 조직하였습니다.
교황 피오 11세는 "카톨릭 행동대는 신념에 찬 사도들이다."라고 하며 F.N.C.를 지지하였습니다.
또한 프랑스 파리의 카톨릭회 회장 보드릴라르 추기경은 "히틀러의 전쟁은 유럽 문화를 수호하고자 착수한
숭고한 사업이다." 라고 언급하였습니다.
d) 히틀러 측근과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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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교 세자르 오르세니고(Cesare Orsenigo) |
1934년 새로운 성직자-파시스트 정관 선언 입회한, |
스페인 카톨릭 성직자들이 1937년 산티아고 |
스페인 시민 전쟁동안 카톨릭 “개종작업” |
히틀러는 교황청과 반 카톨릭주의자들을 섬멸하기로 조약을 체결하고, 자유주의자와 유대인을 가둘 수용소를
건립했습니다.
그 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강제 노동에 시달리거나 학살당했습니다.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회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 제도보다 더 위대한 것을 보지
못했다. 나는 이 조직을 대대적으로 수용하고자 한다. 비밀리에 사람들을 유도해 갈 기관을 설립할 것이며,
그 기관을 이용해 젊은이들을 선동하며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다."
SS(독일 친위대)는 예수회의 영성훈련과 규칙을 본받아 히믈러가 조직하였습니다.
SS의 조직은 카톨릭 교회의 성직제와 거의 유사하며, 베벨스보르크(Webelsbourg)라는 SS의 본부는
'SS 수도원'이라고 불리웠습니다.
독일에서 활동한 교황의 밀사 폰 파펜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제 3제국은 교황의 숭고한 정신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실천으로 옮긴 첫 번째 세계적 권력이다."
여기서 '실천으로 옮긴다'란 말의 의미는 반 카톨릭교인을 척결한 것을 의미하며 UN의 공식 집계로 무려
2천 5백만명이 수용소에서 희생되었습니다.
폰 파펜은 나치와 교황청의 연결 고리 역할을 했으며, 교황이 제시한 안을 나치 수뇌부가 받아드리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나치 정권의 열렬한 선전장관이었던 조셉 괴벨스는 예수회 대학에서 신학을 교육을 받았고, 로욜라가 주장한
도덕적 상대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자 나치 독일의 2인자인 히믈러 역시 예수회 출신입니다.
히틀러는 "나는 히믈러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로 보인다네!"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친위대와 게슈타포와 독일 경찰의 사령관인 히믈러가 가장 성직자다운 면모를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히믈러의 부친은 카톨릭 학교 교장이있고, 형은 수도사이며, 삼촌은 예수회 회원이었습니다.
예수회의 총재 폰 레도코브스키 백작은 예수회와 독일 사이에 작전을 수행할 첩보기관을 기획합니다.
그 결과 친위대의 중앙 안전부 안에 한 기관이 창설되었는데 대부분의 요직은 검은 제복을 입은 성직자들이 차지했고,
최고 요원 중 한 사람은 예수회 신부 히믈러였습니다.
히믈러는 전쟁이 끝난 후 도망다니다가 1960년 이스라엘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교수형 당했습니다.
e) 죽음의 강제수용소와 바티칸
아유슈비츠 수용소 |
독일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
독일 예나의 수용소 |
독일 바이마르의 시체소각장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설치한 강제수용소를 KZ(Konzentrationslager)라고 합니다.
KZ는 A.히틀러의 나치스 독일이 구금·강제노동·살육을 위하여 국내외에 설치한 감옥으로 1933년 2월 제정된 ‘국민과
국가의 방위령(防衛令)’에 의하여 그 해 수십개 지역에 설치되었습니다.
공산당원·사회주의자·민주주의자 등 모든 반(反) 파쇼주의자와 나치스체제에 순응하지 않은 자들을 일반국민으로부터
고립시켜 말살하고, 나아가서는 전국민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에서, 반대파나 교도소에서 만기석방된
반 파시스트의 대부분이 아무런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고 SA(나치스돌격대), SS(나치스친위대) 등에 의하여 수용소로
끌려가 기한도 없이 구금되었습니다.
1934년부터 히틀러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SS가 수용소의 관리를 맡아, 정치적 반대자에 이어 인종적·종교적 이유에서
유대인과 불복종하는 그리스도인을 구금하고, 나중에는 일반범죄자·변절자 등도 수용하였습니다.
개전(開戰) 후, 파시스트와 그 배후의 융커들은 폴란드와 소련의 일부를 독일인의 이주지역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
지역의 원주민을 전멸시키려고 그들을 점령지구에 설치한 절멸(絶滅)수용소에 구금하는 등, KZ는 타국민 특히
슬라브인·유대인의 조직적 근절시설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 실례로서 폴란드에 설치되었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루블린 근교 마이다네크의 가스실(室), 시체소각장 등을
들 수 있습니다.
KZ는 처음 수용인원 1,000명 안팎의 소규모 시설로서 수십 개소에 산재해 있었으나, 그 뒤 세계여론이 두려워
작센하우젠을 비롯한 5~6개소의 대수용소로 통합하였고, 1938년 H.W.괴링이 유대인의 절멸을 제의한 이래,
1100만명의 유럽거주 유대인 중 약 600만 명이 학살되었고 그 중 180만명이 어린이였습니다.
아우슈비츠(Auschwitz)는 폴란드 남부 비엘스코주(州)의 도시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건립되었습니다.
1940년 4월 27일 유대인 절멸(絶滅)을 위해 광분하였던 H.히믈러의 명령 아래 나치 친위대(SS)가 이곳에 첫번째
수용소를 세웠으며, 그해 6월 이 아우슈비츠 1호에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습니다.
그 뒤 A.히틀러의 명령으로 1941년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어 아우슈비츠 2호와 3호가 세워졌고, 1945년 1월까지
나치스 이곳에서 250만∼4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로 인해 ‘아우슈비츠’는 나치스의 유대인 대량학살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수용소를 40개의 캠프로 나누었는데, 피수용자는 강제노동과 영양실조·전염병으로 죽거나 또는 ‘욕실·청결·건강’이라는
등 거짓 푯말이 붙은 독가스실로 연행되어 학살되었으며, 일부는 의학실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학살된 자의 금니·모발 등은 자원으로서 회수되었습니다.
이러한 학살은 히믈러가 지휘하는 SS와 게슈타포에 의해 자행되었습니다.
1942년 프랑스에서 유대인을 탄압하는 조치가 내려지자 프랑스의 카톨릭과 개신 교회가 이의를 제기했으나 카톨릭
당국자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카톨릭 람바흐 학교를 다녔고, 수도원 성가대원이었으며, 나치의 기장인 철 십자가는 수도원 원장
하겐(Hagen) 신부의 전령관의 표지에서 따 온 것입니다.
예수회의 기독교 박해
도미니크 수도회(Dominicans)가 지휘한 종교재판소(Inquisition)는 원래 예수회가 만들었으며 그들이 종교재판
때 사용하던 악명높은 고문 방법도 예수회가 고안한 것들입니다.
1545~1546년 사이에 포르투갈에 종교재판소를 설치한 사람은 로욜라 자신이였으며, 1655년 포루투갈
종교재판소의 소장은 예수회 회원이였던 니타르드(F. Lithard) 추기경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곳곳의 종교 재판소와 개신교도의 탄압, 학살, 고문, 개종은 거의 예수회가 담당했습니다.
예수회에 대한 명사들의 경고
"나는 죽는다...제수이트를 공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교황 끌레망 13세-
"매우 위험한 자들! 그들은 절대로 제국에서 용납되지 아니할 것이다."
-나폴레옹 1세-
"진리의 우물에 독약을 탄 자들"
-토마스 칼라일-
"제수이트들은 영원히 박멸되어야 한다."
-교황 끌레망 14세-
옥스퍼드 대학 토론회는 "로마 카톨릭교회는 서방 세계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크게 위협하는 종교"라는 동의를구하는 가부투표에서 387명중 220명이 이에 동의하였다.
-The Times"1960.1.29.
"제수이트들은 피의 행동에는 명수들이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
"제수이트...흑암, 잔인, 배반, 전재독재제, 죽음"
-존 아담스 대통령-
"만약 미국이 자유를 박탈당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체제를 통하여 올 것이다." -죠지 워싱턴 대통령-
"
"제수이트들은 피의 행동에는 명수들이다."
"포교하겠다는 미명 하에 날마다 우리 영토로 상륙한 로마 카톨릭 사제와 성직자들이 학교와 병원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남북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안다면 힘을 합쳐 그들의 손아귀에서 권력을 박탈할 것이다. 그들은 교황이나 유럽 전제군주의 대사로서 질서를 해치고 우리 국민의 마음을 헌법과 법률에서 멀어지게 하며, 아일랜드·멕시코·스페인 등
자유를 사랑하는 국민들이 있는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무정부 상태를 도모하고 있다."
-아브라함 링컨-
"마피아와 여러 비밀단체들이나 정보기관이 한 통 속이 되고, 거대 기업들이 바티칸과 손을 잡고, 비밀스러운 목적을 위해서 거액의 돈이 뿌려지고, 정치와 종교와 첩보와 금융과 조직범죄 사이의 경계선이 희미해져서, 마침내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아브라함 링컨-
내 목숨을 노리는 그토록 많은 음모들이 꾸며졌었기에, 그 모든 것이 실패했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다. 특히 거의 대부분이
숙련된 로마 카톨릭의 살해자들, 명확하게 예수회에의해 훈련된 자들의 손에서 꾸며졌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예수회는
피를 흘리는 임무에 매우 전문적이어서, 헨리 4세는, 그들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그리고비록 그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에게 희생되었다. 그들의 손아귀에서 내가 벗어나는 것은,
제퍼슨에게 쓴 교황의 편지가 나의 가슴을 찌르는 백만 비수를 갈게하였기에, 기적을 훨씬 뛰어넘는 일일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민족들의 죄들로 인해, 그가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에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의 입술에서
나오는 어떤 불평도 듣지 않으셨던 것처럼; 그렇게, 내가 내 나라를 위해 쓰러질 때, 그분께서 나의 불평을 듣지 않으시길,
다만, 나는 소망하고 기도드린다."
-아브라함 링컨-
"제수이트...흑암,잔인,배반,전재독재제,죽음" -존 아담스 대통령-
"우리를 압도하는 한 역사적 교훈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것이니 당신의 자녀들을 카톨릭교 사제들로부터 피신시켜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당신의 자녀들을 인류의 적으로 만들것이다."
-W.K.클리포드 교수
"나는 제수이트의 부활을 기뻐하지 않는다. 대다수는 더욱 가장을 하게 될 것이므로 인쇄업자, 작가, 출판업자,
학교 교사 등과 마찬가지로 보헤미아의 수장도 받아들일 것이다.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할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면 바로 이 로올라 협회이다."
(John Adams, 1816)
"나는 예수회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 제도보다 더 위대한 것을 보지 못했다.나는 이 조직을 대대적으로 수용하고자 한다. 비밀리에 사람들을 유도해 갈 기관을 설립할 것이며, 그 기관을 이용해 젊은이들을 선동하며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다."
카페 : '국가수호연합'에서 퍼왔습니다
첫댓글 역사적으로 자국의 식민지를 꾀할땐 언제나 선교사들을 앞장 세우며 미개한 민족으로 치부하며 문명을 운운한 파괴적인 종교.. 우리 토속종교의 기본적인 범주도 헤어나지 못한..예수님도,석가모니도..결국은 선황(마을앞 나무)밑의 깨달음 하나를 가지고 대단한양..무속은 그나라의 역사일수 있습니다..역사(종교)라면 불교보다 기독교보다 훨 뿌리가 깊을수 있겠죠..ㅠㅠ
의미있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