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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어무(有生於無)
유는 무에서 생겨나고, 무는 유를 생기게 한다는 뜻이다.
有 : 있을 유(⺝/2)
生 : 날 생(生/0)
於 : 어조사 어(方/4)
無 : 없을 무(灬/8)
출전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40장
천하의 만물은 유(有)에 의거해 생기고, 유는 무(無)에 의거해 생긴다. 노자 도덕경 제40장의 말씀이다. 도(道)란 우주 만물이 가야 하는 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사물의 시작을 거슬러 끝으로 되돌아오는 순환을 말한다. 물극필반(物極必反)과 원시반종(原始反終)인 도의 움직임으로 만물은 본원으로 회귀한다.
反者(반자), 道之動(도지동),
弱者(약자), 道之用(도지용).
天下萬物生於有(천하만물생어유),
有生於無(유생어무).
돌아감은 도의 움직임이요
약한 것은 도의 쓰임이니
천하 만물은 유(有)에서 생겨나고
유(有)는 무(無)에서 생겨난다.
(老子 道德經 第四十章)
중국 철학에서 가장 먼저 '무(無)' 개념을 제시한 노자는 천하의 모든 사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생긴다고 봤다. 노자는 '유'를 포괄하는 절대적 '무'를 도(道)라 했다. 이렇게 무형(無形)이고 무명(無名)인 도가 곧 무(無)이고, 그 '무'에서 '유'가 나오며, '유'에서 만물이 나온다는 노자 철학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
천하 만물은 有(눈에 보이는 것)에서 생겨나고, 有는 無(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생겨난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세균이나 움직이고 호흡을 하는 모든 생명들은 씨앗(유)에서 생겨나며 씨앗은 무(자연, 공기, 무생명물질)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사람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인류 역사상 딱 하나 예수 한 사람만 난자만으로 결합되어 불완전한 육체를 지닌 사람이다. 그런데 정자와 난자는 에너지(영양소, 산소 등)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무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화를 내는 것도 웃는 것도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처음에는 무의 존재로 있다가 인간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뇌가 작용을 하면서 생성되는 것이다.
이때 인간들은 작용을 하기 전 무의 상태에서 영향을 받아 작용을 하기 전에 화를 웃음으로 바꿀 수도 있고, 슬픔도 기쁨으로 바꿀 수가 있으며, 이와 반대로 웃음을 슬픔으로, 화로 바꿀 수도 있기에 본질적으로 사람에게 영향을 외치는 것은 외적인 요인이나 영향을 받아 작용을 일으키는 것들은 모두가 내적인 요인으로서 내적인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본인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즉 외적인 영향이 크고 작고 많고 적음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외적인 영향을 받아 내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모든 것들은 본인의 통제 능력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져서 나타나기 때문에 모드가 자기 책임인 것이다.
예를 들어 키가 작은 유전자는 본인이 결정할 수 없는 외적인 요인이지만 건강을 유지하거나 유전자에 영향을 미쳐 키가 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내적인 요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므로 몸이 아프고 키가 작은 것 또한 본인 책임인 것이다.
얼굴이 못 생긴 부모를 만나 자식들도 얼굴이 못생긴 틀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을지라도 기본적으로 못 생긴 얼굴 틀이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얼굴에 변형을 주어 얼굴이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은 오디까지나 본인의 노력 如何에 달려있는 것이다. 물론 노력하지 않고 돈만 있다면 칼로 수술을 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의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타인에게 원망을 하는 경향이 많다. 그런데 원망이라는 것을 살펴보면 노력하지 않는 자, 게으른 자들의 불평불만일 뿐이다. 왕후장상의 씨앗으로 태어나 한 평생 갑질을 하고 살다 죽는 사람도 있고, 서울역 노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대를 이어 거지가 돠어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태어난 순간까지는 본인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만 태어난 순간 이후에 발생되는 모든 것들은 모두가 본인 하기 나름이다.무공도 자꾸 초식(유)에서만 極意를 깨우치려고 하는 자들은 한계가 다다르게 될 것이고, 초식을 벗어나 초식을 뛰어 넘은 무에서 시작하면 무림 고수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인생도 자기를 자꾸 자기가 현재 처한 환경에 가두려고 하면 인생 무림의 하수일 수밖에 없고, 최악의 상황에서 그대로 쓰러지면 개죽음이 되겠지만 최악의 상황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환경을 벗어나게 되면 다시 인생 무림의 고수가 되는 길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분들은 현재 주어진 삶의 상황이 극악에 이르렀다고 하여도 주화입마에 걸려 인생을 포기하지 말고 또 다른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로또를 사서 한 방에 인생 개혁을 만들든지 아이템을 개발하여 인생을 로또로 전환할 수 있는 모든 기회는 본인 스스로에 있는 것이지 경기를 한탄하고 여의도 황당한 사람들을 비난할 시간조차 없는 것이다.
유생어무(有生於無)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난다.
'죽간본' 19-2가 통행본 '도덕경'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다. "천하의 온갖 것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天下之物, 生於有, 有生於無)."
'죽간본'에서는 '生於亡(생어무)'의 주어가 '物(물)'이었으나, '통행본'에서는 '有(유)'가 주어가 되었다. 그리하여 죽간본에서는 "온갖 것이 없음에서 산다"고 풀이되는 구절이 통행본 도덕경에서는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난다"는 뜻을 갖게 되었다. 한 글자가 더해지면서 그 의미에서 하늘과 땅 사이만큼 차이가 났을 뿐만 아니라 내용도 훨씬 불분명해졌다.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왜곡이 이루어진 셈이다.
죽간본 보다 늦으나 통행본 도덕경보다는 빠른 '백서본'에서도 '有生於无(유생어무)'로 되어 있다. 따라서 가장 초기 판본인 죽간본을 제외한 나머지 판본에서는 '有(유)'가 한 글자 더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죽간본이 필사되는 과정에서 '有(유)'를 빠뜨렸을 가능성과 후대에 '유'를 덧붙였을 가능성을 모두 점치는데, 대부분 연구자는 전자에 무게를 둔다. 노자의 사상을 관통하는 것이 '有無(유무)'의 논리라는 것이 그 근거다. 과연 그럴까?
통행본 도덕경을 따르면, 온갖 것은 유에서 나오고, 그 유는 무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무를 곧 道(도)라 하거나 도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이리하여 無形(무형)이고 無名(무명)인 도가 곧 無(무)이고(혹은 도에서 무가 나오고), 그 무에서 유가 나오며, 유에서 만물이 나온다는 노자 철학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는 만물의 발생론 또는 기원론이라 할 만한데, 얼핏 들으면 꽤 그럴듯하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노자 사상도 꽤 심오하고 형이상학적인 철학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참으로 有(유)에 앞서 無(무)란 것이 존재하고 그 무에서 유가 나왔다고 노자는 보았을까? 도 또는 무가 만물을 창조한 주체라고 보았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이미 말한 바 있듯이 노자에게 도는 곧 사물과 현상 전체를 일컫는 말일 따름이다. 노자가 주목한 것은 境界(경계)였다!
유생어무(有生於無)
反者(반자), 道之動(도지동)
되돌아 감이 도의 운동 방향이고
弱者(약자), 道之用(도지용)
부드러움이 도의 작용 방식이네.
天下萬物生於有(천하만물생어유)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有生於無(유생어무)
유는 무에서 생겨났네.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40장
이 장에서는 도의 운동 방향과 그 작용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노자는 우선 도에 내재된 '돌아감'의 이치를 말한다. "되돌아감이 도의 운동 방향이네(反者, 道之動)."
'反(반)'은 '도덕경'에서 대체로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되돌아가다' 혹은 '복귀하다'의 뜻이고, 다른 하나는 '상반되다'의 뜻이다. 후자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현묘한 덕은 그윽하기도 하고 아득하기도 하니, 일반 사물과 상반되네', '진리의 말은 마치 상반되는 말처럼 들리네.'
이 장에서 '반(反)'은 전자의 의미, 즉 '되돌아가다' 내지는 '복귀하다'의 뜻으로 쓰였다. 도의 운동 방식은 '되돌아 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25장에서도 선언한다. "커지면 가고, 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돌아오네."
이러한 '반(反)'의 이치는 삼라만상에 두루 작용한다. 우선 자연계의 변화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목은 봄과 여름을 거치면서 무성히 자라나지만,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면 결국에는 그 무수한 잎사귀들을 다 떨어뜨리고 다시 앙상한 가지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16장에서 말한다. "만물이 무성히 일어나는 데서 나는 그들이 돌아가는 자리를 보네. 무릇 사물들은 무성히 자라나지만 결국 각자 그 뿌리로 돌아가네."
다음으로 이 '반'의 이치는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에 적용된다. 노자는 이상적인 지도자를 '갓난아이'로 돌아간 자, 다시 말해 갓난아이의 순수한 덕을 회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노자는 말한다. "수컷을 알면서도 암컷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되고, 천하의 계곡이 되면 덕이 늘 떠나지 않으며, 그러면 갓난아이로 돌아가게 되네."
그 외에도 노자는 자연과 인간의 상호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에서도 이 이치를 찾아낸다. 가령 군대가 머문 자리에는 가시가 생겨나고 대군이 지나간 후에는 흉년이 든다는 식이다.
군대는 살기를 품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살기에 감응하고 반응하여, 그들이 머물렀던 자리에는 가시나무만 자라나고 농사도 망쳐지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도를 따르는 사람은 무력으로 세상을 제압하려들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상만사가 모두 이 '되돌아감'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우선 우주와 자연의 운행 현상을 보자. 우주의 팽창과 수축, 지구의 자전과 공전, 사계절의 순환, 달의 커짐과 작아짐, 밀물과 썰물, 낮과 밤의 반복 등이 모두 이 '反의 원리'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다음으로 가까이 우리의 인생사를 살펴보면 대개 이 '반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순환이 그러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의 변화가 그러하며, 길흉화복의 순환 반복이 그러하다.
무(無)는 유(有)의 근원
반자(反者)는 도지동(道之動)이요, 약자(弱者)는 도지용(道之用)이다.
천하만물(天下萬物)은 생어유(生於有)하고 유생어무(有生於無)니라.
반복하는 것은 도의 운동이요, 약함은 도의 활동이다. 천하의 만물은 유(有)에 의거해 생기고, 유는 무(無)에 의거해 생긴다. 노자 도덕경 제40장의 말씀이다.
'도(道)'란 우주 만물이 가야 하는 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사물의 시작을 거슬러 끝으로 되돌아오는 순환을 말한다. 물극필반(物極必反)과 원시반종(原始反終)인 도의 움직임으로 만물은 본원으로 회귀한다.
천변만화하는 세상의 물건은 만물의 어머니인 유에서 나왔고, 이 유는 천지의 비롯함인 무에서 나왔으므로 결국은 도의 근원인 무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노자의 유생어무(有生於無)를 뒷받침하는 미국의 우주론학자 로런스 크라우스의 책 '무로부터의 우주(2013)'는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그는 '팽창하는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만물은 무에서 시작됐다. 시간과 공간은 완전한 무에서 탄생했다'고 썼다. 138억 년 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상태에서 갑자기 폭발한 뒤 엄청난 속도로 팽창해 지금의 우주가 된 것이라 한다.
얼마 전 '앗! 태양이 이상해'라는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나사는 2020년 5월 29일 태양 표면에서 2017년 10월 이후 최대 규모 폭발이 일어났다고 소개했다. 이런 폭발은 흑점 주변에서 주로 일어나며 전자나 양성자 등을 우주 공간으로 방출한다. 단파통신에 장애가 일어났다. 더 큰 문제는 태양의 이상 가열 현상이 지구를 점차 파멸로 이끈다는 점이다.
과학계에선 태양이 50억 년 뒤, 몸집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 '적색거성' 단계로 진입해 수성과 금성, 지구를 집어삼킬 것으로 예측한다. "태양의 죽음과 함께 우리는 다시 무로 돌아간다"고 크라우스는 썼다. 원시반종(原始反終)이다.
무(無)로부터의 우주
팽창하는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만물은 무(無)에서 시작됐다. 시간과 공간은 완전한 무에서 탄생했다.
미국의 우주론학자인 로렌스 크라우스가 저서 '무(無)로부터의 우주'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는 책에서 '무'는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로 이로부터 유(有)가 필연적으로 탄생했다는 것과 신의 손을 거치지 않고 우주가 완전한 무로부터 물리적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치고 있다. 138억 년 전, 눈에 보이지 않는 점보다 작은 상태에서 갑자기 폭발한 뒤, 엄청난 속도로 팽창해 지금의 우주가 된 것이라 한다.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은 무(nothing)에서 나왔다. 현대물리학은 우주가 진공에서 생겨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사람은 '빅뱅 직전의 우주'를 쓴 영국 물리학자 프랭크 클로스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진공은 비어 있지 않고 에너지, 입자, 장(場) 등으로 들끓으며, 전자와 양전자 같은 가상 입자들이 만든 장으로 요동칠 수 있다.
'양자요동'으로 불리는 이 현상은 양성자와 원자의 특성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한다. 빅뱅에 의해 물질과 복사의 밀도에 작은 요동이 생기고, 이것이 훗날 중력을 통해 한곳으로 뭉쳐서 은하와 별, 행성 그리고 인간이 탄생했다면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결국 무에서 생성된 '양자요동' 덕분이라는 것이다. 폭발한 별의 잔해들이 다시 뭉쳐서 인간이 된 것이라면 그리고 빅뱅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우리는 양자적 '무'에서 탄생한 셈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대폭발 당시 모든 입자는 질량이 없는 상태였다. 영국의 피터 힉스 교수가 입자들에 질량을 부여하는 새로운 입자, 힉스입자를 발견함으로써 질량의 기원과 소립자들의 상호작용으로 우주가 생겨났다는 표준모형이론을 입증할 수 있었다. 없음의 세계였던 곳에서 오늘날의 우주가 생겨난 것이다. 노자가 일찍이 설파한 '유생어무(有生於無)'와 다르지 않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자라면서 아버지에게 가장 많이 들은 야단이 ‘생각이 없다’였다. 조금 약한 핀잔은 ‘생각이 짧다’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였다. 가장 심한 욕은 ‘생각 없는 놈 같으니라고’였다. 야단칠 때는 언제나 “사람은 딱 생각한 만큼만 행동한다. 생각 좀 하고 살아라”라고 마무리 지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듣고 자라 토씨까지 외운다. 말귀를 알아듣기 전부터도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나 “그렇게 생각해서 행동하는 거다”라는 최고의 칭찬을 듣고부터 ‘생각’이 비로소 내 귀에 들어왔다.
원주에 사시는 친척 집에 아버지 편지 심부름을 갔다. 초등학교 5학년 때다.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기차를 두 번 갈아타고 잘 찾아가 전달했다. 문제는 오는 길에 생겼다. 원주에서 제천역에 내려 기차를 갈아탈 때 시간이 남아 역 승차장에서 파는 가락국수를 사 먹느라 기차를 놓쳐버렸다. 마지막 기차를 눈앞에서 떠나보내고 한참을 울었다.
역에 불이 들어올 때 집 쪽으로 가는 홈에 낯익은 화물열차가 정차해 있는 걸 보고 몰래 올라탔다. 내가 내릴 역을 통과한 화물열차는 터널 입구 언덕에서는 힘이 부쳐 걷듯 달렸다. 전에 아이들이 타고 내리는 걸 봤던 대로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넘어지긴 했지만, 무릎에 상처가 났을 뿐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눈을 흘기며 나를 반겼다. 꿇어앉아 그날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자 아버지가 “잘 생각해서 잘했다”라고 칭찬했다. 아버지는 “넘어졌을 땐 바로 일어나지 말고 왜 넘어졌는지를 반성하고, 어떻게 일어날지를 먼저 생각해라”라며 “누구나 넘어진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도움 안 되는 걱정하지만 말고 방법을 찾아라”라고 했다.
그날 말씀하신 고사성어가 ‘유생어무(有生於無)’다. 유생어무는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40장의 “천하 만물은 유에서 태어나고, 유는 무에서 태어난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유는 무에서 생겨나고, 무는 유를 생기게 한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천하 만물 자체가 유다. 그 유는 무 때문에 있는 것이다”라고 다르게 해석했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고사성어라고 했다. 그날은 뭔 말인지 몰랐으나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성어여서 언제쯤부터는 내게도 가장 좋아하는 고사성어가 돼 좌우명처럼 여긴다.
아버지는 “무에서 유를 찾는 방법이 생각이다. 생각 없이는 유를 찾을 수 없다. 무는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묻혀 있는 것이다”라며 “네가 세상에 왔었다는 일을 한 가지라도 하려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라고 했다.
이어서 아버지는 “모방 없이 창조 없다. 누군가는 이미 생각한 거다. 모방을 부끄러워 마라. 골똘하게 몰입하면 다른 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창조를 해낼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한자로 쓴 ‘생각(生覺)’은 중국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써온 순우리말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본래 한자어가 아닌 낱말에 그 음만 비슷하게 나는 한자로 적는 취음자(取音字)다.
아버지는 “순우리말을 굳이 한자로 쓰면서 ‘깨달을 각(覺)’자를 쓴 거는 ‘창조는 내가 미처 보지 못했을 뿐 이미 있던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데 지나지 않는다. 각(覺)자는 ‘볼 견(見)’과 ‘배울 학(學)’의 생략형 ‘학(𦥯)’이 합쳐진 형성자다. 끊임없이 보고 배워야 한다”면서 생각의 깊이와 크기를 깊고 넓게 가질 것을 주문했다.
아버지는 “사람은 한 시간에 2천 가지 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하루가 24시간이니 4만 8천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만들어진 말이 ‘오만가지’다. 하루만 집중해서 오만가지를 생각해보면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즉답을 원하거나 게을러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기 때문에 창조하지 못한다”며 다그쳤다.
아버지는 “남과 똑같이 해서는 남 앞에 설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멈추었을 때 더 가봐라”라고 늘 재촉하며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게 했다. 그런 창의성은 오랜 기간 학습을 통해 얻는 습성이어야 한다는 점을 누차 강조했다. 몸에 익혀서 얻어야 하니 가르치기는 이를수록 좋고 자식은 물론 손주들에게도 꼭 일러주고 싶은 성품이다.
▶️ 有(있을 유)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달월(月; 초승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𠂇(우; 又의 변형)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有자는 '있다, '존재하다', '가지고 있다', '소유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有자는 又(또 우)자와 月(육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에 쓰인 月자는 肉(고기 육)자가 변형된 것이다. 有자의 금문을 보면 마치 손으로 고기를 쥐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내가 고기(肉)를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有자는 값비싼 고기를 손에 쥔 모습으로 그려져 '소유하다', '존재하다'라는 뜻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有(유)는 (1)있는 것. 존재하는 것 (2)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 소유 (3)또의 뜻 (4)미(迷)로서의 존재. 십이 인연(十二因緣)의 하나 (5)존재(存在)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있다 ②존재하다 ③가지다, 소지하다 ④독차지하다 ⑤많다, 넉넉하다 ⑥친하게 지내다 ⑦알다 ⑧소유(所有) ⑨자재(資財), 소유물(所有物) ⑩경역(境域: 경계 안의 지역) ⑪어조사 ⑫혹, 또 ⑬어떤 ⑭12인연(因緣)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재(在), 있을 존(存)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 폐할 폐(廢), 꺼질 멸(滅), 패할 패(敗), 죽을 사(死), 죽일 살(殺), 없을 무(無), 빌 공(空), 빌 허(虛)이다. 용례로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음을 유명(有名), 효력이나 효과가 있음을 유효(有效), 이익이 있음이나 이로움을 유리(有利), 소용이 됨이나 이용할 데가 있음을 유용(有用), 해가 있음을 유해(有害), 이롭거나 이익이 있음을 유익(有益), 세력이 있음을 유력(有力), 죄가 있음을 유죄(有罪), 재능이 있음을 유능(有能), 느끼는 바가 있음을 유감(有感), 관계가 있음을 유관(有關), 있음과 없음을 유무(有無), 여럿 중에 특히 두드러짐을 유표(有表), 간직하고 있음을 보유(保有), 가지고 있음을 소유(所有), 본디부터 있음을 고유(固有), 공동으로 소유함을 공유(共有),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는 뜻으로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우환을 당하지 아니함 또는 뒷걱정이 없다는 뜻의 말을 유비무환(有備無患), 입은 있으나 말이 없다는 뜻으로 변명할 말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구무언(有口無言), 있는지 없는지 흐리멍덩한 모양이나 흐지부지한 모양을 일컫는 말을 유야무야(有耶無耶), 형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천지간에 있는 모든 물체를 일컫는 말을 유상무상(有象無象),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명무실(有名無實), 머리는 있어도 꼬리가 없다는 뜻으로 일이 흐지부지 끝나 버림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유두무미(有頭無尾), 다리가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박식한 사람을 이르는 말을 유각서주(有脚書廚), 만물은 조물주가 만드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일컫는 말을 유생불생(有生不生), 다리가 있는 양춘이라는 뜻으로 널리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유각양춘(有脚陽春), 뜻이 있어 마침내 이루다라는 뜻으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을 유지경성(有志竟成),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온다는 뜻으로 뜻을 같이하는 친구가 먼 데서 찾아오는 기쁨을 이르는 말을 유붕원래(有朋遠來), 시작할 때부터 끝을 맺을 때까지 변함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시유종(有始有終), 무슨 일이든 운수가 있어야 됨을 이르는 말을 유수존언(有數存焉),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있으나 마나 함을 이르는 말을 유불여무(有不如無), 말하면 실지로 행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함 또는 각별히 말을 내 세우고 일을 행함을 이르는 말을 유언실행(有言實行), 끝을 잘 맺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으로 시작한 일을 끝까지 잘하여 결과가 좋음을 이르는 말을 유종지미(有終之美), 입은 있으되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정이 거북하거나 따분하여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유구불언(有口不言), 행동이나 사물에 처음과 끝이 분명함 또는 앞뒤의 조리가 맞음을 일컫는 말을 유두유미(有頭有尾),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 융통함을 이르는 말을 유무상통(有無相通), 장차 큰 일을 할 수 있는 재능 또는 그 사람을 일컫는 말을 유위지재(有爲之才), 끝까지 일을 잘 처리하여 일의 결과가 훌륭함을 이르는 말을 유종완미(有終完美),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그대로 있지 않고 인연에 의하여 변해 가는 것이라는 말로 세상사의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유위전변(有爲轉變), 가기에 잎을 더한다는 뜻으로 이야기에 꼬리와 지느러미를 달아서 일부러 과장함을 이르는 말을 유지첨엽(有枝添葉),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의 문이 개방되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유교무류(有敎無類) 등에 쓰인다.
▶️ 生(날 생)은 ❶상형문자로 풀이나 나무가 싹트는 모양에서 생기다, 태어나다의 뜻으로 만들었다. ❷상형문자로 生자는 '나다'나 '낳다', '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生자의 갑골문을 보면 땅 위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生자는 본래 '나서 자라다'나 '돋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生자는 후에 '태어나다'나 '살다', '나다'와 같은 뜻을 갖게 되었다. 生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본래의 의미인 '나다'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姓(성 성)자는 태어남은(生)은 여자(女)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生(생)은 (1)생명(生命) (2)삶 (3)어른에게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흔히 편지에 씀 등의 뜻으로 ①나다 ②낳다 ③살다 ④기르다 ⑤서투르다 ⑥싱싱하다 ⑦만들다 ⑧백성(百姓) ⑨선비(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 ⑩자기의 겸칭 ⑪사람 ⑫날(익지 않음) ⑬삶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날 출(出), 있을 존(存), 살 활(活), 낳을 산(産)이 있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죽을 사(死), 죽일 살(殺)이 있다. 용례로 살아 움직임을 생동(生動), 목숨을 생명(生命), 살아 있는 동안을 생전(生前),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생존(生存),말리거나 얼리지 않은 잡은 그대로의 명태를 생태(生太), 자기가 난 집을 생가(生家),생물의 환경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생활 상태를 생태(生態), 세상에 태어난 날을 생일(生日), 사로 잡음을 생포(生捕), 태어남과 죽음을 생사(生死), 먹고 살아가기 위한 직업을 생업(生業), 활발하고 생생한 기운을 생기(生氣),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생모(生母), 끓이거나 소독하지 않은 맑은 물을 생수(生水), 어떤 사건이나 사물 현상이 어느 곳 또는 세상에 생겨나거나 나타나는 것을 발생(發生), 배우는 사람으로 주로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을 학생(學生),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先生), 사람이 태어남을 탄생(誕生),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활을 인생(人生), 일단 못 쓰게 된 것을 손질하여 다시 쓰게 됨 또는 죄를 뉘우치고 마음이 새로워짐을 갱생(更生), 다시 살아나는 것을 회생(回生), 아우나 손아래 누이를 동생(同生), 사람이 삶을 사는 내내의 동안을 평생(平生), 어렵고 괴로운 가난한 생활을 고생(苦生), 살림을 안정시키거나 넉넉하도록 하는 일을 후생(厚生), 사람을 산채로 땅에 묻음을 생매장(生埋葬), 생명이 있는 물체를 생명체(生命體), 이유도 없이 공연히 부리는 고집을 생고집(生固執),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세상만사가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생자필멸(生者必滅), 불교에서 인간이 반드시 겪어야만 한다는 네 가지 고통 즉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의 고통을 이르는 말을 생로병사(生老病死), 산 사람의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아무리 곤궁하여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생구불망(生口不網), 학문을 닦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안다는 뜻으로 생지生知하는 성인을 이르는 말을 생이지지(生而知之), 죽은 자를 살려 백골에 살을 붙인다는 뜻으로 큰 은혜를 베풂을 이르는 말을 생사골육(生死骨肉), 사람이 태어난 뒤 사흘 동안과 죽은 뒤 이레 동안을 부정하다고 꺼리는 기간을 이르는 말을 생삼사칠(生三死七), 몹시 곤란한 지경에 빠져 삶이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는 말을 생불여사(生不如死), 기운이 꺾이지 않고 본디의 기운이 아직도 남아 생생한 모양을 일컫는 말을 생동생동(生動生動), 삶은 잠깐 머무르는 것이고 죽음은 돌아간다는 뜻으로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잠깐 동안 머물러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죽는 것은 본래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을 생기사귀(生寄死歸), 산 채로 삼키고 산 채로 껍질을 벗긴다는 뜻으로 남의 시문을 송두리째 인용함을 이르는 말을 생탄활박(生呑活剝), 나면서부터 알아 쉽게 행한다는 뜻으로 배우지 않아도 사물의 도리를 알아 쉽게 그것을 실행한다는 말을 생지안행(生知安行), 일속을 잘 알지 못하고 관계가 없는 사람을 그릇 책망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생면대책(生面大責), 태어나서 만나 본 적이 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생면부지(生面不知), 살리거나 죽이고 주거나 뺏는다는 뜻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생살여탈(生殺與奪), 거듭나서 유전한다는 뜻으로 만물이 끊이지 않고 변해 감을 이르는 말을 생생유전(生生流轉) 등에 쓰인다.
▶️ 於(어조사 어, 탄식할 오)는 ❶상형문자로 扵(어)의 본자(本字), 于(어)는 간자(簡字)이고, 烏(까마귀 오)의 옛 글자의 약자이다. 까마귀의 모양을 본떠, 음을 빌어 감탄사, 관계, 비교를 나타내는 어조사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於자는 '~에'나 '~에서'와 같은 어조사로 쓰이는 글자이다. 於자는 方(모 방)자와 仒(구결자 어)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仒자는 한문 문장에 구두점을 찍는 용도로 쓰이는 글자로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게다가 於자는 方자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於자의 금문을 보면 烏(까마귀 오)자에 仒자가 결합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於자는 본래 까마귀가 내는 소리에 빗대어 '아아'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였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는 얼마 쓰이지 않은 채 지금은 다양한 '어조사'로만 쓰이고 있다. 烏자는 해서에서부터 方자로 바뀌었다. 그래서 於(어)는 (1)한문 투의 문장에서 장소를 표시하는 말이 얹히어에서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어조사(~에, ~에서) ②기대다, 의지하다 ③따르다 ④가다 ⑤있다, 존재하다 그리고 ⓐ탄식하다(오) ⓑ아아(감탄사)(오) ⓒ까마귀(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까마귀 오(烏)이다. 용례로는 이제야 또는 여기에 있어라는 어시호(於是乎), 마음속 또는 주로 ∼에 꼴로 쓰이는 어심(於心), 벌써나 어느새는 어언(於焉), 가운데가 되는 정도라는 어중(於中), 바둑판에서 배꼽점을 중심으로 한 부분을 어복(於腹), 거의 중간쯤 되는 데를 일컫는 말을 어중간(於中間), 부인이 예장할 때 머리에 얹는 다리로 만든 커다란 머리를 일컫는 말을 어유미(於由味),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뜻으로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말하기에 따라 사뭇 달라짐을 일컫는 말을 어이아이(於異阿異),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어쨌든을 일컫는 말을 어차어피(於此於彼), 어느 사이인지도 모르는 동안에를 일컫는 말을 어사지간(於斯之間), 썩 흡족함을 일컫는 말을 어량족의(於良足矣), 자기 분수에 만족함을 일컫는 말을 어분족의(於分足矣), 온갖 일을 일컫는 말을 어천만사(於千萬事), 그때를 한창으로 함을 이르는 말을 어사위성(於斯爲盛), 그것으로 만족함을 일컫는 말을 어사족의(於斯足矣), 알지 못하는 동안에 어느덧을 일컫는 말을 어언지간(於焉之間), 푸른 색이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은 것을 비유하는 말을 청출어람(靑出於藍),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라는 뜻으로 약한 자가 강한 자들 사이에 끼여 괴로움을 받음을 이르는 말을 간어제초(間於齊楚), 가마솥 속에서 논다는 뜻으로 생명이 매우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이르는 말을 유어부중(游於釜中), 지극히 선한 경지에 이르러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람은 최고의 선에 도달하여 그 상태를 유지함을 이상으로 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지어지선(止於至善), 즐거움은 언제나 걱정하는데서 나온다는 말을 낙생어우(樂生於憂), 뭍에서 배를 민다는 뜻으로 고집으로 무리하게 밀고 나가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추주어륙(推舟於陸), 혀가 칼보다 날카롭다는 뜻으로 논봉의 날카로움을 이르는 말을 설망어검(舌芒於劍), 백성은 신의가 있을 때에 안정된다는 뜻으로 백성은 신의에 의해서만 잘 다스려진다는 말을 민보어신(民保於信), 먼저 곽외부터 시작하라는 뜻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말한 사람부터 시작하라는 말을 선시어외(先始於隗), 스스로 목매어 도랑에 익사한다는 뜻으로 개죽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경어구독(經於溝瀆) 등에 쓰인다.
▶️ 無(없을 무)는 ❶회의문자로 커다란 수풀(부수를 제외한 글자)에 불(火)이 나서 다 타 없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없다를 뜻한다. 유무(有無)의 無(무)는 없다를 나타내는 옛 글자이다. 먼 옛날엔 有(유)와 無(무)를 又(우)와 亡(망)과 같이 썼다. 음(音)이 같은 舞(무)와 결합하여 복잡한 글자 모양으로 쓰였다가 쓰기 쉽게 한 것이 지금의 無(무)가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無자는 ‘없다’나 ‘아니다’, ‘~하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無자는 火(불 화)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無자를 보면 양팔에 깃털을 들고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무당이나 제사장이 춤추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춤추다’가 본래의 의미였다. 후에 無자가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 되면서 후에 여기에 舛(어그러질 천)자를 더한 舞자가 '춤추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無(무)는 일반적으로 존재(存在)하는 것, 곧 유(有)를 부정(否定)하는 말로 (1)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공허(空虛)한 것. 내용이 없는 것 (2)단견(斷見) (3)일정한 것이 없는 것. 곧 특정한 존재의 결여(缺如). 유(有)의 부정. 여하(如何)한 유(有)도 아닌 것. 존재 일반의 결여. 곧 일체 유(有)의 부정.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뜻에서의 무(無)가 아니고 유무(有無)의 대립을 끊고, 오히려 유(有) 그 자체도 성립시키고 있는 듯한 근원적, 절대적, 창조적인 것 (4)중국 철학 용어 특히 도가(道家)의 근본적 개념. 노자(老子)에 있어서는 도(道)를 뜻하며, 존재론적 시원(始原)인 동시에 규범적 근원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이므로 무(無)라 이름. 도(道)를 체득한 자로서의 성인(聖人)은 무지(無智)이며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임 (5)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서 없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없다 ②아니다(=非) ③아니하다(=不) ④말다, 금지하다 ⑤~하지 않다 ⑥따지지 아니하다 ⑦~아니 하겠느냐? ⑧무시하다, 업신여기다 ⑨~에 관계없이 ⑩~를 막론하고 ⑪~하든 간에 ⑫비록, 비록 ~하더라도 ⑬차라리 ⑭발어사(發語辭) ⑮허무(虛無) ⑯주검을 덮는 덮개 ⑰무려(無慮), 대강(大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그 위에 더할 수 없이 높고 좋음을 무상(無上),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을 무애(無㝵), 아무 일도 없음을 무사(無事), 다시 없음 또는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사람이 없음을 무인(無人), 임자가 없음을 무주(無主), 일정한 지위나 직위가 없음을 무위(無位),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쉬는 날이 없음을 무휴(無休),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이 거저임을 무상(無償), 힘이 없음을 무력(無力), 이름이 없음을 무명(無名), 한 빛깔로 무늬가 없는 물건을 무지(無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무자(無子),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무념(無念), 부끄러움이 없음을 무치(無恥),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무리(無理),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전무후무(前無後無), 일체의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일체의 상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념무상(無念無想), 끝이 없고 다함이 없음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무궁무진(無窮無盡), 학문과 지식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학무식(無學無識), 아무 재능도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재무능(無才無能), 해로울 것도 없고 이로울 것도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해무득(無害無得), 모든 생각을 떠나 마음이 빈 상태를 이르는 말을 무상무념(無想無念), 하는 일이 없으니 탈도 없음이나 하는 일도 없고 할 일도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위무사(無爲無事), 하는 일도 없고 일할 능력도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위무능(無爲無能), 한도 끝도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진무궁(無盡無窮), 사심이나 편파됨이 없다는 뜻으로 매우 공평함을 이르는 말을 무사무편(無私無偏),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는 뜻으로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우환을 당하지 아니함 또는 뒷걱정이 없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유비무환(有備無患), 눈 아래에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사람됨이 교만하여 남을 업신여김 또는 태도가 몹시 거만하여 남을 사람같이 대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안하무인(眼下無人)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