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8일 일요일 (자) 대림 제4주일
오늘 전례
▦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오늘 가브리엘 천사가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나타나 잉태 소식을 전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겸손한 마음과 굳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겸손과 믿음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일하시는 자리입니다. 우리도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을 모실 자리를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초대말씀:
다윗은 실로에 모셔져 있던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안치하고 예루살렘을 유다 왕국의 수도로 정하여 그곳에 성전을 세우겠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나탄 예언자를 시켜 이를 거절하시고 오히려 백성들 가운데 천막을 치시며 옮겨 다니시겠다고 말씀하신다(제1독서). 구약부터 기다려 온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구체적으로 이루어졌고 사도들의 복음 선포를 통하여 구원의 기쁜 소식이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된다(제2독서). 감추어졌던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나자렛 처녀 마리아의 응답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믿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 마리아를 통해 인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다(복음).
제1독서:
<다윗의 나라가 주님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질 것이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1-5.8ㄷ-12.14ㄱ.16
다윗 1 임금이 자기 궁에 자리 잡고, 주님께서 그를 사방의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셨을 때이다. 2 임금이 나탄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
3 나탄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엇이든 마음 내키시는 대로 하십시오.”
4 그런데 그날 밤,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8 나는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9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10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곳을 정하고, 그곳에 그들을 심어 그들이 제자리에서 살게 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는 전처럼, 불의한 자들이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11 곧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판관을 임명하던 때부터 해 온 것처럼, 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겠다.
더 나아가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오랜 세월 감추어졌던 신비가 이제는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6,25-27
형제 여러분, 25 하느님은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또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의 계시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26 이제는 모습을 드러낸 이 신비가 모든 민족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도록,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예언자들의 글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7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서울] 하느님의 도구/고찬근 신부
우주 만물은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 우주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가 계시고, 그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것들을 만드셨습니다. 우리 인간도 피조물 중 하나이며 창조주의 목적을 지니고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우주 만물과 인간 역사 속에서 드러난 창조주의 창조 목적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위한 창조주의 도구’가 되는 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로 살아갑니까? 아니면, 나의 교만, 자만심으로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하느님의 길을 막아 서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나 때문에 못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가 피조물이고 하느님의 도구라는 것을 신앙으로 인정하고 고백했지만, 실제로는 도구가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무엇인가를 하려 합니다.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심지어는 하느님까지 자기 도구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 인간이 하느님의 도구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도구가 된다는 것은 인간 삶의 본질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시는 신비로운 계획을 감행하시면서 인간측의 역할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그 역할 중에 가장 중요했던 역할이 바로 성모님의 역할이었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기꺼이 하느님의 도구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종이라 고백하며 불합리한 요구에도 겸손하게 순명함으로써, 하느님을 세상에 낳아주는 하느님의 그릇, 하느님의 구유가 되셨습니다.
겸손은 우리 인간에게 필수적인 덕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직시하여 있는 그대로를 파악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직시하려 하지 않고,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생각에 불합리해 보이는 하느님의 뜻에도 순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논리와 하느님의 논리는 다릅니다. 우리의 논리가 하느님의 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모님처럼 늘 곰곰이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여정입니다. 또한,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인간이 모르는 차원에서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믿음이 신앙입니다. 특히 자기 자신에게는 힘든 과정일지라도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자신에게 닥치는 힘든 과정들을 수용하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의 불합리한 분도 받아들이는 그런 것 아닙니까? 리는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합니까?
[부산] 루가 1, 26-38./서공석 신부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제자들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첨가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가브리엘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실제 대화를 녹취하여 기록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초기 신앙 공동체의 믿음이 반영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구약성서 구절들을 짜깁기하여, 이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 후 신앙인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초기 신앙인들이 믿었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거명된, 가브리엘 천사는 유대교 묵시문학 저서들 중 하나인 다니엘서(8,18)에 나옵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분입니다. 그 천사는 마리아에게 ‘기뻐하여라.’라고 인사합니다. 이 인사는 구약성서의 예언자 스바니야가 예루살렘을 향해 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니 기뻐하라(3,14)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 안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에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라는 말은 사무엘서(1사무 1,17-18)의 엘리가 장차 사무엘의 어머니가 될 한나에게 한 것입니다. 한나는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엘리가 그에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수태할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은총이 가득한 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수태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된 일이라고 말하기 위해 가브리엘 천사를 등장시켜 이 말을 하게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묻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천사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신다.’고 답합니다. 이 말은 성령이 내려 오셔서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창세기(1,2)에서 가져 왔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세상이 창조되었듯이, 성령이 새로운 생명 하나를 마리아 안에 창조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새로운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엘리사벳에 대한 말이 있습니다.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던 엘리사벳이 잉태한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과 더불어 오늘 천사의 말은 끝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늙은 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온 천사가 일 년 후에는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자, 사라가 그것을 엿듣고, ‘다 늙은 몸으로 어떻게 아기를 낳으라고 하면서 웃었습니다.’(창세 18,14). 그때 천사가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 탄생 예고 이야기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이사악의 어머니 사라 그리고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이 세 여인을 상기시키는 말로 꾸며져 있습니다. 한나와 사라는 구약성서가 언급하는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고, 엘리사벳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수태치 못하는 여인입니다. 이 세 여인들에게 공통된 것은 수태치 못하는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생산력이 없는 여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수태하여,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신앙 역사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인물들을 출산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리아가 처녀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는 인류의 생산력이 탄생시킨 인물이 아니라, 인간의 힘이 불가능한 곳에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신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마리아를 성서가 처녀라고 말할 때, 그것을 산부인과적 의학 진술로 알아듣지 말아야 합니다. 성서는 생리학적 정보를 주는 문서가 아닙니다. 성서는 신앙의 문서입니다. 마리아가 처녀라는 말은 독신이 더 좋다거나, 하느님이 처녀를 더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성서의 이사악, 사무엘, 혹은 세례자 요한과 같이, 예수는 인류역사가 생산한 인물이 아니라,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신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을 사실 보도로 보고, 처녀인 마리아가 기적적으로 잉태하였다고 말하면, 예수는 신화(神話)적 인물이 되고 맙니다. 인류 역사에는 영웅 탄생 신화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개국 신화에도 기적적 탄생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단군을 비롯해서,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과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모두 기적적 탄생 신화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류가 생산한 예수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탄생한 구원의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인류역사는 강하고 풍요로운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가난하고 허약한 생명은 우리의 눈에 실패작으로 보입니다. 하느님도 우리가 강하고 풍요로울 때,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인류역사는 상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알려주신 하느님은 달랐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와 보살핌을 배워 실천할 때,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자비와 보살핌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 극히 제한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비와 보살핌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비와 보살핌을 실천하며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의 생명이 하느님의 것이었다고 말하기 위해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를 처녀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생산력의 결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령이 마리아에게 내려오신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생명인 예수님이라고 신앙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살아서 보여주신 자비와 보살핌 안에 하느님의 일을 읽어낸 초기 신앙인들이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구약성서의 언어를 빌려 꾸민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초자연과 기적을 바라며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인류역사 안에 발생하는 자비와 보살핌의 실천들 안에 하느님의 숨결을 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해마다 기념하면서 하느님이 인류역사 안에 은혜로운 일을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달은 하느님의 일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겠다고 각오를 새롭게 하는 축일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를 모두 행복하게 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자비와 보살핌의 실천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그 실천을 하면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
[마산] 성모님의 응답(Fiat) - 자유 너머의 자유/김호준 신부
만해(萬海 ․ 卍海) 한용운의『복종』이라는 시(詩)입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금(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사실 현대인의 자유에 대한 생각으로 비추어 보면, 만해의 시는 낯설고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예속되거나 복종하지 않고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을 자유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생각하면, 만해의 ‘달콤한 복종’은 이해될 수 없습니다. 되려 ‘복종’이 ‘자유의 예속’이나 ‘굴복’으로 오인되기에 딱 좋습니다.
여기서 만해는 무슨 ‘구속’이나 ‘굴종’이 아니라, ‘자유를 넘어선 곳에 있는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누구에게도 기쁜 마음으로 복종해보지 않은 사람’, ‘자유를 복종의 반대로만 알고 있는 사람’은 ‘참된 자유’를 맛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참된 만남’에 이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자유’란 누군가에게 매혹(魅惑, fascinosum)되어서, 나의 ‘자유의지’와 ‘주체성’을 상대에게 기쁘게 넘겨줄 수 있을 때 빛을 발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성모님처럼 말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라고 응답하십니다. 이 구절을 교회는 전통적으로 ‘마리아의 Fiat(응답)’라고 불러왔습니다. Fiat라는 라틴어는 ‘이루어지다’ 혹은 ‘그렇게 되도록 격려하여 이루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Fiat에 담겨진 의미에 따르면, 성모님의 응답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기꺼운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만해가 성모님의 이 응답을 들었다면, ‘행복한 순종’ 곧, ‘자유를 넘어선 곳에 있는 자유’라고 이해했을 것입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께서도 자신의 모든 ‘자유’와 ‘기억’과 ‘지혜’와 ‘의지’를 송두리째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참된 행복은 ‘너를 위하여 나의 자유를 버리는 마음’에 있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Fiat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만해와 이냐시오 성인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의 Fiat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근본적으로 성모님의 Fiat는 인간의 이해 너머에 있는 신비요, 하느님의 은총인 까닭입니다. 나아가 성모님의 Fiat 그 이전에,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복종과 Fiat(응답)’이 먼저 있었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안동] 기다림, 약속, 믿음, 겸손, 순종/이태균 신부
찬미예수님!
우리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성탄절에 대한 기다림으로 가슴이 뜁니다.
이번 성탄절은 어떤 일들이 생길까요? 어떤 이는 ‘올 성탄절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성탄 전야제 행사 준비로 바쁩니다. 학생들은 밤샘 파티 계획에 분주한 마음이고, 꼬마 친구들은 성탄 때 받을 선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잊고 지낸 친척이나 은인, 친구들에 보낼 성탄카드를 준비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성탄절에 대한 기다림과 기대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고 모두가 똑같습니다.
성탄절에 무슨 약속이 있으십니까? 아직 미혼인 사람들은 ‘애인을 만나야지.’, 아니면 ‘누구랑 어디 여행이라도 갈까?’를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가족끼리, 친구끼리, 지인들끼리 식사 등의 약속이 있든지, 아니면 대부분의 신자 분들은 ‘성당에 가서 성탄미사 드리는 것 말고는 약속이 없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곧 약속했던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약속이란 우리들의 개인적인 그런 약속들이 아니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약속입니다. 이 탄생은 그저 갑자기 준비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의 역사에서 미리 계획되고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처녀가 임신을 한다는 것도 엄청난 일이지만, 이보다 더 엄청난 일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기의 모습으로, 말씀으로 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은 대림 4주일입니다. 제대 앞에 대림초도 이제 4개가 다 켜졌습니다.
오늘 가브리엘 천사는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나타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 31)라고 하며, 잉태 소식을 전합니다. 마리아는 감당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하며, 겸손한 마음과 굳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대림 시기는 성탄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하고 기다려야 할까요? 신앙은 본질적으로 순종이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믿음과 순종을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능력이 자신에게 오시도록 자신을 그분의 손에 맡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이 오시도록 그분의 자리를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비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비우고 그분이 내 안에 오시도록 나를 기꺼이 그분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매년 그분의 오심을 상징적으로 기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매년 똑같이 그냥 흘러가는 성탄절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새로운 느낌으로 오는 성탄절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나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성탄절은 “기다림, 약속, 믿음, 겸손, 순종”으로 가능합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곧 임박 했습니다. 내 마음의 포대기를 펼쳐 예수님을 받아들일 준비를 합시다. 아멘.
[의정부] 前無後無한 인사/송영준 신부
첫댓글 주님의 탄생을 일주일 앞둔 오늘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마리아의 심오한 태도를 눈여겨보도록 초대받습니다.
<오랜 세월 감추어졌던 신비가 이제는 알려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