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변상도(2)
우담바라
내 짐작으로는 고대인들이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자연의 구름 모양에서
힌트를 얻어 구상했을 상상 속의 동식물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은
어차피 작가의 마음이니 정답이 따로 없을 것이다.
용의 발톱이 넷이든 다섯이든 용이라면 용이지, 발톱 수를 문제 삼아
이무기라고 따지지야 않겠지만, 그렇다고 뱀이나 지렁이를 그려놓고
용이라고 우기면 난감할 수밖에...
이야기가 빗나가지만, 경남 창원의 대방동에 있는 불곡사(佛谷寺) 일주문에는
기둥 위에 화려한 단청문양과 함께, 다양한 민속적 조각이 새겨져 있다.
거북, 물고기 등과 함께 큼직한 불알을 당당히 드러낸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친근한 모습의 통나무로 깎은 호랑이 하며, 용들이 서로 뒤엉켜 꿈틀대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사실적이면서도 토속적 해학미를 재미있게 갖추고 있다.
아마 이런 멋진 삼문(三門)은 전국에서 유일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이 일주문을 조사하다가 동행한 어떤 여성회원이,
사찰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문제의 호랑이 조각 뒷부분의
거시기가 머시기하여 좀 거시기하다고 입방아를 찧다가
머시기한지 화제를 돌릴 겸해서 엉뚱한 퀴즈문제를 내놓았다.
"조오기~ 용 두 마리가 서로 엉켜 뒤트는 모습을 다섯 글자로 요약하믄?"
그걸, '쌍용등천문'이니 '용력부사의', 아니면 '민화풍 조각' '난리블루스'일까
속으로 꿍꿍댄 나는 의기양양한 발표에, 정말 약이 오를 뻔했다.
눈에 보이는 인식범위 내에서만 머무는 나의 수준이 사고의 전환에 한방 먹었다.
정답은 "용용 죽겠지"였다. 이런 경우에는 억울하다고 시험출제자에게 딴지를 걸면 안된다.
용용 죽겠지가 정답이라면, 그러냐고 고개를 끄떡여주는 것이 피차 편하다.
하지만 뭔가 찜찜해서 그냥 넘어가기에는 머시기한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좀 뜸한 것 같은데, 근년에는 3천년 만에 한번 핀다는 전설의 꽃
우담바라 소식이 우후죽순처럼 피어나, '굳이 부정할 필요가 있느냐'는
입장에서부터 '풀잠자리 알'이라거나, '어쨋건, 풀잠자리 알이 자주 발견되는 것은
환경적인 측면이 좋아졌다는 반증이니 좋은 현상이다'는 데까지
이야기가 진전되는 경우도 있었다.
화엄변상도의 우담바라
파출소 유리창, 호텔 가로등, 화단의 장미 잎사귀,
동사무소 계단의 가드레일 등에 많이도 피더니만,
급기야 국정원에서도 피고, 우리 창원에서는 자동차 문짝에서도 피었다.
이 꽃이 필 때는 전륜성왕이 출현한다니, 처처(處處)에 감동이고 물물(物物)에 희유함이니
'대한국민 만세' 소리가 절로 나왔었는데, 세월이 훌쩍 지나고, 또 계절이 바뀌어도
크게 고무적인 국운융성 같은 것은 아직 보일 기미가 없다.
육안으로 알아보기에도 힘든 이런 작고 여린 우담바라가
21세기 민중들의 소망을 한껏 담은 맞춤형(?) 우담바라라면,
예전 사람들은 그 모습을 어떻게 상상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화엄변상도가 그려진 고려시대까지는 뽕나무 과에 속하는 무화과의 일종이며,
꽃은 자웅의 구별이 있는 큰 나무의 모습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변상도 56권에서 그리고 새긴 모습은 내 눈에도 무화과나무와 닮았다.
이 변상도는 보현보살이 보혜보살의 질문에,
보살의 십종심(十種心)에 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먼저, 땅과 같은 마음<如大地心>이니
일체중생의 모든 착한 뿌리를 유지하여 증장케하는 연고라 하고,
이어서 수미산왕과 같은 마음<如須彌山王心>과 금강과 같은 마음<如金剛心>,
모든 세간법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은 마음<如蓮華心>, 밝은 해와 같은 마음<如淨日心>,
허공과 같은 마음<如虛空心>과 함께, 우담바라 꽃과 같은 마음<如優曇鉢華心>은
모든 겁(劫)에서 만나기 어려운 연고를 말한다고 하여,
경문(經文)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전 사람들은 부처님 당시와 가까워서 정답에 근사할 것인지,
선조들께서는 덜 합리적이라서 상상이 오버했음인지 모르겠으되,
누가 원력을 세워 현대의 화엄변상도를 그린다면 우담바라를 팽이버섯과 무화과나무,
두 가지 모델 중 어느 쪽을 택할지 괜히 궁금해진다.
앞의 거룩한 마음들은 다 어디로 가고, 범부에게는
'걱정도 팔자인 마음<如八字心> 만이 가득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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