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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47,1-2.8-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일찍이 다윗은 주님의 현존인 '궤약의 궤'를 모실 집을 짓고 싶어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유다의 멸망과 더불어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기원전 515년에 제2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 역시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기원전 167년과 63년) 다시 유린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 이후, 기원 후 70년에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로마군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원 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반포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난 후, 324년에 황제는 자신의 별궁을 성전으로 세우고 봉헌하였습니다.
오늘은 바로 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곧 오늘은 로마의 주교좌성당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타락한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진정한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제시하십니다.
곧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성전으로 내어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목숨을 거두실 때에는 성전의 장막이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됩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1코린 3,16)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듯이,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 들어와 앉아 계십니다.
당신의 사랑에 응답을 요청하시면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이끄시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이 됩니다.
주인은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성전의 봉헌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교회의 유대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23) 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 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만나는 곳, 함께하는 곳이니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에서의 모든 만남이 거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거룩함으로 속됨을 정화해야 하고 우리의 거룩함이 세상의 속됨을 이겨가야 합니다.
그 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 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 ‘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허물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답게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합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예, 맞아요.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기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된 곳이 있다면 놀랄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를 하고 집안을 정돈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 하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은 어떤 모습의 성전이 지어지기를 원하셨을까?>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사실 저는 이러한 축일이 썩 기쁘지 않습니다.
라테라노 성전 하면 떠오르는 것이 그 앞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상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나의 성전을 재건하여라!”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돌로 된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다 수도회 회칙을 승인 받기 위해 라테라노 성전으로 옵니다.
그곳에 교황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당의 규모에 놀랍니다.
그런 모습이 청동으로 라테라노 성당 앞쪽에 있습니다.
교황은 거지로 지내는 탁발 수도회를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꿈에 한 거지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성당을 어깨로 받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는 프란치스코를 다시 불러 회칙을 승인합니다.
나중에야 사람들은 주님께서 교회를 재건하라고 한 것은 눈에 보이는 다미아노 성당이 아닌 참 하느님의 성전을 의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장사꾼들이 가득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을 허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당신이 사흘 안에 성전을 다시 짓겠다고 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서 사시는 성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코린 3,16)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9)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집입니다.
첫 성전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짓게 하신 성막입니다.
성막을 짓기 전에 그들이 가진 성전이 있었습니다.
바로 금송아지를 섬기는 성전입니다.
제단이 있으면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지 않으면 새 성전이 지어질 수 없습니다.
돌로 된 성전은 그 크기가 커질수록 금송아지를 섬기는 성전이 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커다란 성전을 지어 놓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장사꾼들을 들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을 지으신 일이 없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가는 곳이 다 성전이었습니다.
사실 신약의 첫 성전은 성 목요일의 마르코의 다락방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성전들이 모이는 곳에 따로 또 다른 성전이라 불리는 돌로 된 것을 지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뜨거움이 식어가기 시작하였을 때는 커다란 성전이 지어지는 때부터였다고 생각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교황 이노첸시우스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발코니에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중세 때의 교회의 부와 권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고 낮은 위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마침 교황청으로 돈 주머니가 수송되어 오는 행렬이 있었습니다.
교황은 그것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기 봐요. 이제는 ‘금과 은은 내게 없노라’고 교회가 말하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소.”
이 말은 성전에서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와 함께 요한이 지나갈 때 앉은뱅이가 자선을 청하자, 베드로가 대답했던 말을 인용해 그 때처럼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는 뜻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성인이 이를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앉은뱅이더러 ‘일어나 걸어라.’하고 교회가 말할 수 있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집중하면 멀리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세상 것에 먼저 시선을 두면 세상 것 안에 머물러 주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총은 얻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로 토마스가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영과 육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육에 치우친 사람은 영적인 삶을 절대로 살 수 없게 됩니다.
솔로몬에 커다란 성전을 지었을 때부터 나라가 갈라졌습니다.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성전을 재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이 헤로데가 리모델링 한 성전인데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장사꾼들을 들여보내 세금을 거둬내야만 했습니다.
로마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종교가 자유를 갖게 되었을 때부터 커다란 성전이 지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뜨거움이 식어갔습니다.
바티칸 성전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매우 필요하여 어쨌건 개신교가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성전의 크기는 신자들의 자존심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옆의 다른 성당과 비교해서 조금 더 크고 화려한 것을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많은 돈을 냅니다.
이렇게 되면 성직자들은 그 성당을 유지하기 위해 돈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돈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참 하느님의 성전이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때가 되면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묵시 21, 22)
일본의 원폭피해를 전 세계적으로 알린 한 작가가 있습니다.
나가이 다카시입니다.
의사였던 그는 본인도 원폭 피해를 입고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지만, 그 시한부 인생 동안 무려 17권의 책을 집필하여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알렸습니다.
그는 한 평짜리 집을 마련하고 ‘여기당(여기 애인(如己愛人: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의 줄임말)’ 이란 이름을 붙여 두 자녀와 함께 지내며 글을 썼습니다.
여기당은 유리로 돼 있는데 옆으로 보면 성당 성모상이 보여, 그 성모님을 보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글을 썼습니다.
매년 20만 명 가까이 순례객이 여기당을 찾고 있습니다.
한 평짜리 집이지만 매년 20만 명이 찾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커다란 성당은 원자폭탄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희생이 담긴 여기당은 지금도 건재합니다.
어쩌면 외적인 성전 건물이 커지면 내적 성전은 피폐하여가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먼저 멋지고 화려한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 크고 화려한 건물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까요?
성전이 크기 때문에 장사꾼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유지 관리를 위해 그들을 허락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작은 성당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성전이 크면 장사꾼이 모입니다.
우리 각자의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프란치스코가 묵었던 토굴, 그리고 여기당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참 성전이 아닐까요?
성전이 우리들의 자존심을 상징한다면 그러한 성당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유지할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담긴 참 성전이 세워집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돈이 들어왔을 때 성당을 짓지 않고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러한 학교에서 하는 미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성전>
오늘 복음에서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은, 하느님이 주인이신 집이라는 뜻과 하느님을 위한 집,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집,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살피시는 집이라는 뜻이 모두 들어 있는 말입니다.
1) 성전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성전에서는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물론 성전이 아닌 곳에서도 그런 일 자체가 죄인데, 특히 성전에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성전모독죄(하느님 모독죄)라는 대단히 큰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2) 성전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집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이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전체가 공적으로 모여서 함께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도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만난다는 말은 하느님께 기도를 바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전은 공동체가 함께 바치든지 개인이 혼자서 바치든지 간에 어떻든 사람들이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는 집입니다.
3) 성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살피시고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집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나 어디에서나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분인데, 그래도 공동체 전체가 공적으로 함께 모여서 기도를 바칠 때,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은총을 내려 주시는 분입니다.
성전은 공적인 전례와 성사가 거행되는 집입니다.
개인이 혼자서 기도를 하는 경우에도, 성전은 좀 더 쉽게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의 반대말로 ‘장사하는 집’이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 ‘장사하는 집’이라는 말은 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일하는 집,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 재물만 탐내는 집, 사랑 없이 내 욕심과 이기심만 충족시키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집이 성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전 정화 사건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은 간판만 성전이었고, 실제로는 ‘장사하는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절).
이 말씀을 “성전이라는 간판을 내려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성전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은 뜻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열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한 열정으로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에는 하느님에 대한 열정으로 했지만, 말년에는 그 열정이 식었습니다.
성전을 재건축한 헤로데는 처음부터 하느님에 대한 열정이 없었고,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려는 욕심으로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한 것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가?” 라는 뜻입니다(루카 20,2).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말씀은 종교를 개혁하라는, 즉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을 쇄신하라는 명령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건물을 허물거나 새로 짓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말씀은 허례허식과 율법주의와 이기심과 물욕에 빠져 있는 종교를 개혁해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바탕을 둔 새로운 종교로 변화시키겠다는 뜻입니다.
만일에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했다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교라는 새 종교를 세우시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신 것은 ‘새 건물’을 짓는 것도 아니었고, 새 종교를 세우는 것도 아니었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신앙인들은 처음에는 유대교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변화되기를 거부했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신앙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분리되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성전을 허물어 버리겠다는 하느님의 경고는 처음부터 있었습니다(1열왕 9,1-9).
그 경고 말씀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서 봉헌했을 때 내린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의 경고 말씀을 기억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오늘날까지도 파괴된 채로 있습니다.
그 일은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성전에 관한 하느님의 경고와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쪽으로 타락하면 언제든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교회든지 개인이든지 간에.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성전 정화 - 날마다의 삼중三重 성전 정화>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전으로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거의 천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세계의 각 지역 교회는 오늘 로마의 모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오늘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냅니다.
믿는 이들의 일치의 가시적 중심이 바로 성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성전을 사랑합니다.
고향집을 찾듯이 주님의 집인 성전을 찾습니다.
저희 요셉수도원의 가시적 중심 역시 수도원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성전입니다.
저는 물론 우리 수도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 성전이요, 수도원 정문에서 성전입구까지 곧장 난 메테세콰이어 가로수 길을 저는 ‘하늘길’이라 칭하며 거의 매일 사진에 담습니다.
아마 1987년 3월19일 수도원 개원 후 만35년동안 날마다 24시간 개방된 성전은 여기 수도원 성전 하나뿐일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영혼의 고향집을 찾듯이, 끊임없이 힐링센터를 찾듯이 주님의 평화를 찾아 매일 미사가 거행되는 수도원 성전을 찾습니다.
기도의 집, 평화의 집으로 불리는 성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역시 얼마나 하느님의 집 성전을 사랑하시는지, 파스카 축제를 앞둔 오늘 복음의 격렬한 성전정화 활동을 통해 여실히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 서두의 묘사를 통해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난잡하고 속화되었는지 눈에 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성전속화에 대한 열화와 같은 분노의 표출과 더불어 성전을 정화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비둘기를 파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좀 부드럽게 대하십니다.
“이것들을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세상을 성화聖化해야 할 세상의 중심인 성전이 타락하여 속화俗化되면 더 이상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겠는지요!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 아니 날마다 이뤄져야 할 성전정화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성전정화의 열정을 통해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 삼킬 것입니다.’라는 성경말씀을 연상했다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 성전정화활동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화두같은 말씀에 동문서답같은 대화가 전개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안에 세우겠다는 말이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아 알고 믿게 되었지만 후대의 우리는 당시의 제자들보다 더 잘 압니다.
이제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전은 물론 비가시적 성전인 주님의 몸인 공동체와 더불어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성전에서 거행하는 미사가 우리 모두 삼중적三重的 성전에 속한 신분임을 깨닫게 합니다.
가톨릭 교리서가 이를 명쾌하게 정리합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4,24) 드리는 신약의 예배는 어느 한 특정 장소에만 매이지 않는다.
온땅은 거룩하며, 사람의 자녀들에게 맡겨졌다.
신자들이 한 장소에 모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영적 집”으로 세워지도록 “살아 있는 돌”(1베드2,5)이 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생수가 솟아 나오는 영적 성전이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2코린6,16)이다."
(교리서 1179)
그리스도의 몸은 바로 생수가 솟아나오는 영적 성전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의 꿈같은 예언이 그대로 이 거룩한 성전에서 거행되는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실낙원失樂園이 복낙원復樂園으로 변화되는 놀라는 미사은총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에제키엘의 꿈은 그대로 하느님의 꿈이며 마침내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바로 신약성경의 마지막 묵시록에서 이를 황홀하게 묘사합니다.
“그 천사는 또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습니다.”
(묵시 22,1-2ㄱ)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은총의 강이 이를 앞당겨 맛보게 합니다.
참으로 은혜롭게도 삼중적 성전 현실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가시적 건물의 성전, 비가시적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 그리고 나의 성전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이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성전임을 웅변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1코린3,16-17)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해 정화되고 성화되는 건물 성전에 주님의 성전인 교회 공동체요 각자 성전인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지상에서 나그네이며 이방인인 우리 신앙인 모두가 하루하루 날마다 본향집인 천상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름다운 감사송 일부를 나눔으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기도하는 집에 자비로이 머무르시며,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저희가 성령의 성전이 되고, 거룩한 생활로 주님 영광의 빛을 드러내게 하시나이다.
또 눈에 보이는 이 집으로 교회를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가 나날이 거룩해져, 무수한 자녀들과 함께 기뻐하며, 하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나이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요한 2,13)
오늘 복음 대목의 첫 구절이 의미심장합니다.
'건너감'이라는 뜻의 파스카는 죽음의 천사가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민족의 집안을 거르고 지나간 것과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마른 땅을 밟고 바다를 건넌 기적을 떠오르게 합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이 정한 바대로 파스카 축제를 거행해 왔습니다.
물을 건넘으로써 노예 이스라엘은 죽고,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로 거듭났기에 민족적 정체성과 자긍심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이르러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이번은 아니지만 훗날 다가올 파스카 때에 예수님은 피를 흘려 인류를 정화하고 구원한 어린양의 희생 제사를 바치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겁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요한 2,16)
성전에서 소동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축제 예식에 기대어 부당한 이득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분노를 터뜨리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 장사하는 이들에게 외치신 "내 아버지의 집"이란 말씀에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성전이 이윤 추구의 소란스런 각축장이 되어버린 탓입니다.
성전은 하느님 현존의 장소이고, 진심으로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면 누구나 다가와 마음을 쏟아놓고 기댈 수 있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아버지의 집이어야 합니다.
또한 정화와 성화, 즉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본연의 정체성도 잃지 말아야 하지요.
성전의 거룩하고 진실되고 장엄하며 아름다운 모습이 예수님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곧 성전이십니다.
걸어다니는 성전, 말씀하시는 성전, 치유하고 용서하고 해방시키는 성전이십니다.
제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유명한 성전 현시 대목입니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에제 47,9.12)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만물을 되살리고 생동하게 합니다.
이 생명의 원천은 성전입니다.
성전이신 예수님의 벌어진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요한 19, 34 참조)가 온 인류와 세상에 생명을 주리라는 예언적 환시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요한 2,19)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이 말씀으로 당신 생명의 처분권을 유다인들 손에 넘기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맞이하실 파스카를 의미합니다.
허물지 않고는 다시 세울 수 없고, 새로운 생명은 죽음을 건너야 얻으니까요.
이 의미를 유다인들은 못 알아들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요한 2,22) 깨달을 것입니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9)
다시 약동하게 될 생명의 기운은 죽음을 거친 뒤에야 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모든 이를 당신께로 모아들이시고 그들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성전은 장소적으로 고정된 아버지의 집에서, 육화하신 예수님에게로 옮아갑니다.
예수님의 파스카를 통하여 진정한 예배는 이 산, 저 산을 찾아다니지 않는, 제도와 절차에 묶이지 않는,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진정한 제사로 건너갈 것입니다.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나는 보았네."
(입당송)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성령을 받아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우리가 곧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며, 그리스도의 신부로 아름답게 치장한 새 예루살렘입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께서 이 지상 교회 안에서 무엇을 가장 안타까워하실지, 우리 공동체에서 무엇을 가장 슬퍼하실지, 내 안에서 무엇을 가장 치우고 뒤엎고 내쫓고 싶어하실지 바라봅시다.
이 손길은 가장 순결하고 진실되고 아름다운 본래 모습을 되찾아 주시려는 파스카로의 초대이기에, 그 목적은 파괴와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이 되살림에 목숨을 거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우리의 파스카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저는 신학생 때 학생회 간부를 맞지는 않았지만 자치회장을 위한 ‘지지연설’은 2번 했습니다.
다행히 제가 지지했던 후보가 자치회장이 되었고, 저는 덕분에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었습니다.
그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톨릭의 장점은 질서이고, 프로테스탄트의 장점은 자유입니다.
가톨릭의 단점은 변화에 쉽게 대응하기 힘들고, 프로테스탄트의 단점은 구심점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지하는 후보는 교회의 전통과 학교의 지침을 잘 따르면서 신학생들의 복지를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했던 것처럼 후보자는 학생을 위해서, 학교를 위해서 헌신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를 인용하면서, 괴로웠던 그러나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치회장이라는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자치회장을 했던 친구는 교구에서 중책을 맡아서 일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계제도와 성전이 있기에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교계제도와 성전을 이끌어가는 사람입니다.
지난 2019년 성주간 월요일에 프랑스의 상징이었던 노트르담 성당의 화재가 있었습니다.
저도 몇 번 방문했었습니다.
유럽의 자존심이 느껴지는 성당입니다.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프랑스는 ‘교회의 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프랑스의 상징이 불타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성당이 불에 타고 있는 시간에 많은 사람이 성당 주변에서 성가를 불렀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당은 화재로 사라지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파리의 시민은 안타까운 모습을 보며 눈물 흘렸지만, 식어가는 신앙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건물은 복원할 수 있지만 식어버린 신앙을 다시 찾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어머니와 같은 성당의 화재를 보면서 자신들의 식어버린 신앙을 뉘우쳤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황님들께서 지내시던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랜 박해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와서 위로를 얻는 곳입니다.
성전은 생명의 빵을 나누는 성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성전은 성전만으로 남으면 단순히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그곳에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몸이 바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몸에서 ‘가난, 순결, 순명’의 물이 흘러나오면 세상에는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몸에서 ‘믿음, 희망, 사랑’의 물이 흘러나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들레헴 성당 문에 있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이 관광객으로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순례자로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서 가치가 더욱 드러납니다.
탐욕, 거짓, 분노, 교만을 담으면 겉은 화려해도 속에서는 악취가 날 것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을 담는다면 비록 질그릇과 같을 지라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질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그런 분에게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가 말하는 ‘사람들의 네 가지 후회’를 이야기해 드리곤 합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 후회하는 대표적인 네 가지 후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안정된 삶을 갖지 못한 것.
2) 용기 내지 못한 것.
3) 옳은 일을 하지 못한 것.
4) 누군가와 멀어지기 전에 연락하지 못한 것.
후회하지 않는 삶이 가장 잘 살고 있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때, 이 네 가지 후회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후회를 많이 만드는 삶이 아닌, 후회를 줄여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만을 바라보면, 가지고 있는 것을 소홀히 하며 후회를 남기게 됩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후회 없이 잘 살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삶을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신 장면을 보여 줍니다.
파스카 축제에는 모든 사람이 사방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듭니다.
그들은 성전에 희생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 성전 안이 얼마나 복잡했을지가 예상됩니다.
희생제물로 사용될 동물도 사람의 수만큼 성전 안에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동물 우는 소리로 가득하고, 이 동물을 파는 장사꾼들의 고함 등을 볼 때 완전히 시장터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파스카 축제에는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사람이 몰려듭니다.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키레네, 로마 등지 등에서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이 사용하는 다른 언어 역시 무척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던 돈을 환전해야 제물용 동물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환전상 또한 들끓었습니다.
이런 환경을 기도하는 공간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성전을 지키는 대사제들은 이런 환경에서 충분히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당시에 성전은 재건 중이었습니다.
이곳저곳 공사하느라 정신없는 상황에 놓여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집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이렇게 시장터와 같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과연 후회하지 않을 일일까요?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성전이라면 허물라고, 그리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우리의 성전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건하게 모시고 있을까요?
이제 더 이상 후회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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