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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요한 2서의 말씀 4-9>
선택받은 부인이여,
4 그대의 자녀들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기뻤습니다.
5 부인, 이제 내가 그대에게 당부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6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7 속이는 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는 속이는 자며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8 여러분은 우리가 일하여 이루어 놓은 것을 잃지 않고 충만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살피십시오.
9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7,26-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8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29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30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31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32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33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6)·37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때와 장소와 방식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재림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때에 벌어질 일을 물과 불에 의해 멸망하게 된 구약의 두 사건, 곧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때와 같을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재림’의 준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노아와 롯의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노아 때에 대해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갔음을 말하고 있을 뿐, 특별한 죄나 부패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사랑에 소극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이 장차 일어날 일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들처럼 비록 죄를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인간적인 세속의 삶에 빠져 주님을 알려 하지도, 하느님을 경외하지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하지도 않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놓은 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 25장의 ‘심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음이 문제였음을 말해줍니다(마태 25,31-47).
한편 롯의 때에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불과 유황으로 멸망 당하였습니다.
롯도 노아와 마찬가지로 장차 닥쳐올 재앙을 미리 알고서 소돔을 떠나는 조처를 취하고 구원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집안에 있는 세간 곧 소유물에 대한 애착으로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루카 17,33)
결국 이 두 이야기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먹고 마심과 자신의 소유와 목숨의 보존에 매이지 말고, 그 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삶이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곧 죽음을 향하여 있는지 생명을 향하여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루카 17,37)
<오늘의 말 · 샘 기도>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루카 17,33)
주님!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썩어 부패한 시체의 삶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살아 팔딱거리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보존을 향한 죽음의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두 개의 밧줄>
주님 말씀 가운데 그 뜻이 무엇인지 헷갈리는 것이 바로 목숨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에 바로 그 말씀이 나옵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루카 17, 33)
그리고 복음의 다른 곳에선, 주님 때문에, 또는 주님과 주님의 복음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으면 목숨을 얻게 된다고 하는데, 오늘 복음에선 주님 때문에나 복음 때문에가 빠져서 더 헷갈립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 24)
주님 때문에 목숨을 잃으면 목숨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은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으니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거라는 말씀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이 말씀은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 목숨을 내가 지키는 것은, 힘도 없는 내가 내 목숨 지키려다 뺏기지만, 주님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는 것은, 힘세신 주님께 맡기기에 뺏기지 않고 보존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 역시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주님께 바치면 사랑으로 주님께서 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특히 주님께서 오시는 날 곧 종말의 날 얘기이니 종말의 때에 현세의 목숨을 붙들고 아등바등 애쓰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붙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니 잃게 되겠지요.
이는 마치 밧줄이 두 개인 경우와 같습니다.
하나는 썩은 밧줄이고 다른 하나는 튼튼한 밧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지금 잡고 있는 밧줄은 썩은 밧줄이고, 튼튼한 밧줄은 내가 지금 잡고 있는 밧줄을 놔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폐암 말기의 저를 상상합니다.
지금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이고 영원한 생명을 주십사고 생명의 주님께 청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제가 곧 끊어질 썩은 동아줄을 붙들고 연명하려고 애쓰느라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줄을 붙잡지 않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저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언제 어디에서나 반드시>
이른 아침 까치를 보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를 보면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까마귀 색깔이 검은 탓도 있지만, 그놈이 심하게 울어버리면 영락없이 동네의 앓던 어르신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까마귀가 흉한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떠날 것을 사람보다 미리 안 것일 뿐인데 까마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로 환영받습니다.
어린 까마귀는 어미의 극진한 도움을 받고, 커서는 제 어미를 철저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샌디에고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까마귀를 보았습니다.
까치는 보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으면 아마도 매일의 기분이 언짢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국 정서로 말하면 ‘주검이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여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썩은 고기는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인들은 자신의 삶에 심판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회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죄악이 있는 곳에 심판이 있게 마련이고, 심판이 있는 것은 죄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심판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 에 초점을 맞추었고, 제자들은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어디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들 듯이” 반드시 그날이 온다는 것을 전합니다.
언제, 어디에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든 곳에서’ 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비춰보아야 합니다.
심판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깨어있는 믿는 이들은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 2,12)는 것을 알기에 결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것이며,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성 예로니모)
우리는 까마귀를 보고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왜 몰려왔는가를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늘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미련을 갖지 않고 앞을 보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당신의 자비에 맡기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최양업 토마스)
지금은 참과 거짓이 구별되지 않는 혼돈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은 선이고 악은 악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은 없습니다.
올바른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소돔에서 탈출했더라도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박해윤 작가는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4년간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교육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가족과 함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의 한 시골에 들어왔습니다.
박해윤 작가가 박사학위를 마친 2013년에 남편도 갑자기 퇴직을 선택합니다.
당시 남편의 나이는 마흔이었습니다.
박해윤 씨도 교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초등학생이었고 둘째는 취학 전이었습니다.
모아놓은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무작정 이전 경쟁의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찾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시골 생활이 7년이 지났고 아직은 괜찮다고 합니다.
지금은 시애틀에서 한 시간 떨어진 작은 마을의 오래된 조립식 집에서 삽니다.
서울에서는 방 한 칸도 얻지 못하는 적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정도의 집입니다.
먹기 위해 농사도 짓지 않습니다.
처음에 시도했다가 사슴들이 채소 순을 다 뜯어먹어 아예 수렵 채취하며 삽니다.
곳곳에 자라나는 블랙베리와 야생초를 채취하고 통밀을 갈아 빵을 구우며 야생 동물들이 먹지 않는 깻잎이나 방울토마토를 반야생으로 야산에 키워 먹습니다.
네 식구가 한 달을 지내는 데 사용되는 돈은 100여만 원이라고 합니다.
물가는 서울과 비슷합니다.
통신비는 약 10만 원입니다.
스마트폰은 없고 통화와 문자만 되는 2G 휴대전화 두 대를 네 식구가 나누어 씁니다.
전기세는 여름에 2만 원 겨울엔 15만 원입니다.
에어컨은 없고 난방, 급수, 취사, 모두 다 전기입니다.
물은 우물물이고 정화조를 이용합니다.
유류비는 15만 원보다 조금 덜 나오는 수준입니다.
자동차 유지비는 월평균 10만 원 정도입니다.
4인 가족의 한 달 식비는 40만 원입니다.
필요한 돈은 시간이 날 때 쓰는 글을 메일로 보내거나 시골 생활과 그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적은 『숲속의 자본주의자』라는 책의 인쇄비로 충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숲으로 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신없는 경쟁사회에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이 길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속작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등장인물 중에 붉은 여왕이 나옵니다.
붉은 여왕은 항상 앨리스의 손을 잡고 달립니다.
정말 이상한 것은 앨리스는 무척 힘이 드는데 여왕과 신하들은 아무리 오래 달려도 전혀 지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더 신기한 것은 붉은 여왕과 신하들은 쉬지 않고 달리는데도 언제나 제자리라는 것입니다.
여왕이 그 비밀을 알려줍니다.
“여기에서는 말이야, 같은 자리에 있고 싶으면 있는 힘껏 달려야 하는 거야.”
여기서 박해윤 작가는 깨닫게 됩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나를 잃게 만든다는 것을.
모두가 열심히 달리지만 결국 그 욕망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붉은 여왕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욕망입니다.
돈과 쾌락과 권력일 것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욕망을 줄이는 일이 나에게 불가능한 고행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욕망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욕망을 줄이면 ‘나’가 사라집니다.
내가 사라지면 그제야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며 27년간 사람을 마주치지 않고 혼자 산에 숨어 살았던 크리스토퍼 노마스 나이트Christopher Thomas Knight)의 사례를 들기도 합니다.
그는 아무 이유 없이 집을 나가 혼자 살기 시작했고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을 훔쳐 그 오랜 시간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가 27년간 혼자 살고 나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단 한 순간도 외로운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박해윤 작가는 이러한 자유를 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소한의 욕망만 남으면 나가 사라지고 그러면 비로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그래서 그녀는 완벽한 자유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완벽한 자유란 곧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크리스토퍼도 27년의 여정이 끝난 후, 자신이 누구인지 잊었다고 말했습니다.
“고독은 저의 지각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 점에서 곤란한 일이 생겼죠.
늘어난 지각을 스스로 적용하니, 제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관객도 없었고, 저를 보여줄 대상도 없었죠.
저 자신을 정의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전 완벽히 무의미해졌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나가 사라지면 자유롭습니다.
그렇다고 인간관계를 끊을 수 있을까요?
크리스토퍼는 외롭지는 않았지만 “완벽히 무의미해졌다”라고 말합니다.
그냥 모기처럼 산 것입니다.
남의 음식을 훔치며.
자유롭기는 하겠지만 행복하지는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 때 노아의 배에 들어가지 못해 수장당한 사람들이나 소돔 땅에 그대로 머물러 유황불에 죽은 사람들처럼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그들이 노아의 배, 곧 교회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는 세상 욕망과 함께 달렸기 때문입니다.
붉은 여왕에게 잡혀 자기 자리를 지키려다 그렇게 멸망한 것입니다.
소돔 땅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고, 비록 교회 안에 들어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더라도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처럼 세속, 육신, 마귀의 욕망을 버리지 않고 교회에 머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교회는 박해윤 작가처럼 세상 사람들을 붉은 여왕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진정한 자신으로 살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욕망만 버린다고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불교의 교리입니다.
우리는 욕망을 버리는 이유가 자기 정체성이 하느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것을 알려줍니다.
롯과 그 가족을 데리고 소돔 땅을 빠져나올 때 그들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에서 하느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옮겨지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노아의 배가 곧 교회를 상징하는데, 교회 안에 들어오면 성체를 영하고 하느님과 하나 되었다는 새로운 정체성을 입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머무는 것이 곧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무조건 욕망을 버린다고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욕망이 곧 나인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합니다.
새로운 욕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붉은 여왕이 추구하라고 하는 욕망과 반대입니다.
그것이 사라져야 사랑의 욕망이 자리를 잡습니다.
사랑하면 하느님이 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정체성이 말씀과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구원의 유일한 길이 우리 정체성을 바꿔줄 은총과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오늘 복음에서 노아의 방주와 소돔의 두 이야기를 한꺼번에 해 주셨을까요?
하나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이고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부여하여 사랑의 욕망대로 살게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소돔을 탈출하지 못하면, 곧 욕망을 버리지 못하면 사랑의 욕망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곧 삼구에서 벗어나 사랑의 욕망으로 나아가야 구원되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의 아들의 날>
오늘 말씀은 ‘노아 때의 사람들’이나 ‘롯 때의 사람들’처럼 살다가, 그들처럼 멸망을 당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노아 때나 롯 때의 사람들은 방심하고 있다가 멸망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는 일”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런 일상적인 일만 신경 쓰면서, 또 태평하게 살면서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사실 노아 때의 대홍수나 롯 때의 소돔의 멸망은 예고 없이 갑자기 내린 천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재앙을 내리기 전에 인간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종말을 맞이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옛날의 어리석은 사람들의 일을 잘 알면서도 그 일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옛날의 어리석은 사람들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루카 17,31-33)
이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라는 말씀은 “그날이 되면 옥상에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짧은 시간도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세속의 재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제 때에 잘 버리는 것도 회개를 잘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 말하는 상황은 심판이 시작된 다음의 상황이 아니라 심판이 시작되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회개 말고는 다른 일은 할 수 없는 아주 짧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만일에 종말과 재림이 오늘 닥친다면, ‘지금’이라는 시간이 바로 그 ‘마지막 기회’입니다.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시간이 너무 짧아서 들에 있는 밭에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날이 되면, 옥상에 있는 사람은 옥상에서, 밭에 있는 사람은 밭에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그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심판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면 그 심판에 대비하는 일만 하는 것이 옳습니다.
눈앞에 닥친 심판에 대비하는 일은 회개 말고는 없습니다.
이 말은 개인의 임종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실 임종이나 종말이나 같은 상황입니다.
이쪽 세상에서의 인생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설 때가 되었다면, 심판받을 준비를 하고 저쪽 세상에서의 인생을 준비하는 것이 옳은 일인데, 마지막 순간까지 이쪽에서 누리던 권력과 재물과 명예를 놓지 못하고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리석다고 비웃는 사람들 자신들도 임종 때가 되면 자기들이 비웃었던 사람들처럼 그렇게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는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는 “지금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영원한 목숨을 얻을 것이다.”인데,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한 침상에 있는 두 사람은 부부이고, 함께 맷돌질을 하는 두 여자는 모녀이거나 자매이거나 아니면 시어머니와 며느리입니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라는 말씀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함께 구원받거나 함께 멸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 버림받는 쪽을 선택합니다.
종말의 심판은 철저하게 개인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의 가족이라도 회개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죄인의 가족이라는 것이 심판 때 불리하게 작용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물론 성인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누리는 일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의 가족인데도 구원을 못 받는 경우가 생길 것입니다.
‘어디에서?’ 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모든 곳에서’입니다.
종말과 재림은 ‘전 우주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서 살고 있더라도 심판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라는 말씀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모든 사람’이 심판의 대상이다.” 라는 뜻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최후심판 - 심판의 잣대는 사랑>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축일, 아침 성무일도 찬미가가 참 아름답습니다.
"경건하고 모없이 슬기로와서, 겸손으로 티없이 보낸 생애여,
주께 받은 생명을 꽃피웠으니, 그 향기를 만세에 남기었도다."
사랑은 동사입니다.
구체적 행위로 표현되어 검증되는 사랑입니다.
요한 1서 말씀도 생각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요한3,18)
어제의 사랑도 잊지 못합니다.
어느 착한 자매님이 제 졸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책이 좋다하여 품절된 책을 복사 제본하여 그 무거운 책들을 가져왔습니다.
우선 ‘평화의 집’ 피정집 10개의 방에 넣으려 합니다.
오래 지나다 보니 비치했던 책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이 또한 동사로 표현된 사랑입니다.
평범한 사실을 새벽 강론을 쓰면서 새롭게 깨닫습니다.
새삼 진리는 세월에 색깔 바래지 않고 늘 새롭게 빛남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진리입니다.
참 사랑은 진리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최후심판의 잣대 역시 사랑입니다.
성 마르티노의 전 생애를 통해 확연히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심판의 잣대이자 성덕의 잣대인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인데,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기념일이 아닌 축일로 지냅니다.
성인이 수도승 출신 주교인데다 베네딕도 수도회와의 각별한 인연 때문입니다.
성 마르티노 주교에 관한 일화들을 소개합니다.
프랑스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는 마르티노는 항가리 출신으로 이태리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후에 군복무중 프랑스에서 퇴역하여 은수생활을 시작하여 마침내 투르의 주교 수도승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당시 한나라와 같은 로마제국 유럽 전체가 성인의 활동 주무대였음을 봅니다.
파란만장한 삶중에도 만81세까지 장수하셨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술피기우스 세베루스가 전하는 성인의 임종어 역시 감동적입니다.
불화한 성직자들의 화해를 이루고 수도원에 돌아가려던 중 병에 걸려 위중한 상태가 되었을 때,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이들을 보며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아직 당신 백성이 저를 필요로 한다면, 계속 일하는 것을 거절치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당신이 계속 함께 해 달라는 성직자들에게, “그냥 두시오. 땅보다 하늘을 더 바라보고 싶습니다. 이제 여행을 떠나는 순간에 이 내 영혼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악마들을 향하여는, “피에 얼룩진 짐승아,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이놈아, 네가 받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아브라함의 품이 나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 마지막 임종어를 남기고 성 마르티노는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 드립니다.
성 베네딕도 이전에 서방 수도원 제도를 개척한 탁월한 지도자 성 마르티노였고, 순교자가 아니면서 성인이 된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성인을 성소에로 이끈 다음 전설적 일화는 너무 유명합니다.
늘 읽어도 흥미진진하고 새로운 느낌입니다.
성 마르티노는 자신이 속한 부대가 프랑스의 아미앵 근처에서 주둔하던 어느 추운 겨울날, 거의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면서 구걸하는 한 걸인을 만납니다.
당시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던 옷과 무기밖에 없었기에 칼을 뽑아 자기 망토를 두 쪽으로 갈라 그것을 절반으로 갈라 그 반쪽을 걸인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날 밤 꿈에 자기가 걸인에게 준 망토를 입은 예수님이 나타나, “아직 예비신자인 마르티노가 이 옷을 나에게 입혀 주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이 신비체험 후 마르티노는 18세에 세례를 받았고 얼마간 군대생활 후 제대합니다.
바로 이런 구체적 행위의 사랑이 그 사랑의 진정성을 입증합니다.
이런 일화 때문에 오늘 최후심판 이야기가 복음으로 채택된 것 같습니다.
오늘 최후심판은 구체적 사랑의 행위로 이뤄집니다.
기도를 많이 했느냐, 수행생활을 많이 했느냐, 신학지식이 많으냐가 아닌 구체적 사랑을 실천했느냐가 최후심판의 잣대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민족의 사람들이 최후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최후심판에 통과한 의인들에 대한 주님의 언급입니다.
1.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2. 너희는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3. 너희는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 주었고,
4. 너희는 내가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5. 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6. 너희는 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전부 6개 항목의 실천적 동사의 사랑입니다.
과연 몇개 항목에 걸쳐 실천된 사랑인지 우리의 사랑을 비춰주는 거울같습니다.
바로 성 마르티노가 걸인에게 실천한 사랑은 4째 항목에, 베네딕도 성인이 당신 수도자들에게 강조하는 환대의 사랑은 3째 항목에 관련됨을 봅니다.
이어지는 의인들의 “저희가 언제 주님께 그렇게 해드렸냐?” 물음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충격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이며 길이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국적이나 인종, 종교에 관계 없이, 가장 작은 이들 하나하나 모두를 당신 형제들이라 하며 이들에 대한 사랑 실천이 바로 당신께 한 사랑이라며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참 놀랍고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가 누구든 곤경이나 궁핍중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자들 모두가 당신의 형제이고 당신의 현존이며 구원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도, 멀리 밖에서도 아닌 바로 가까이에서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받고 버림받고 외로운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들 모두가 주님의 형제들이며 주님의 현존임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게 진정한 회개입니다.
우리는 무지에 눈이 가려 곤경중에 있는 주님을 모르고 지나친 일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종이자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1.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2.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 주며,
3.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4.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5.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6.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대신 화관을,
7. 슬픔대신 기쁨의 기름을,
8. 맥 풀린 넋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참으로 이런 사랑의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참 자유인의 삶에 받은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겠습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새롭게 만나 주시고,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온갖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며 자유롭게 하시어 당신 사랑의 도구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은, 사제서품식 미사 때 화답송 후렴과 같으며 제가 참 좋아하는 시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시편 89,2ㄱ)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람의 아들의 날'을 맞는 우리의 자세를 이야기하십니다.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루카 17,26)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루카 17,28)
예수님께서 그날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누구도 그 때와 그 시간을 모른다는 전제에서 말씀하시지요.
노아 때, 그리고 롯 때에 세상에는 극소수의 의인이, 악에게 휩쓸린 대다수의 사람들 틈에서 제 방향을 고수한 채 분투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노아나 롯은 어려움 중에서도 그 경외심을 부여잡고 살았지요.
악을 일삼는 이들은 제 멋대로 욕망에 이끌려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멸망이 닥친 것입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 내려가지 말고, ... 들에 있는 이도 뒤를 돌아서지 마라."
(루카 17,31)
예수님께서 당부하십니다.
두고 온 재산이나 뒤에 남은 것들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의미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동안 살아온 지향과 방향성, 품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라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진작부터 살아온 그 모습 그대로 그날을 맞이할 테니까요.
제1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적들이 흘리는 교설에 흔들리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요한 5)
이미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새로운 무엇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셨고, 행하라 명하신 사랑의 계명,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주님께서 떠나시고, 박해가 닥치고, 반대자와 이단 교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사랑'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들어서 알게 되었고, 지금 이 순간까지 지속해서 간직해 온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2요한 9)
신앙은 연속성 안에서 성장합니다.
영혼은 처음 불리웠을 때 받은 그 사랑을 간직하면서 더 깊고 풍부하게 자라나지요.
악은 한 영혼이 하느님과 더 친밀히 결속되는 것을 방해하려 속이는 자들을 앞세웁니다.
아직 어리고 여린 이들의 빈틈을 파고들어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들은 그대로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어떤 파도가 닥쳐도 헷갈리지 않습니다.
설령 '그날'이 닥친다 해도 마찬가지지요.
우리는 그 날, 그 때가 닥친 순간까지 살아온 모습 그대로 구원의 길로 들어설 것입니다.
지상에서 구원을 앞당겨 살아온 이는 거대한 연속성 안에서 진정한 구원으로 유연히 건너갈 것입니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루카 17,34-35)
우리는 서로 참 다릅니다.
태생과 역사와 배경, 취향과 흥미와 성향 등등, 그리스도인이라는 공통점 안에서조차 엄청나게 다양한 층위가 존재하지요.
주님은 분명 자비하시지만 우리 각자가 맞이할 구원은 개별적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각자 삶에서 자신이 고수하고 머무른 모습이 연속성을 타고 구원으로 넘어갈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맘껏 탐하고 즐기며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겠다는 욕심은 말 그대로 허욕이 되겠지요.
살아서 주님을 기쁘게 찬미한 이는 그 기쁨과 찬미의 완성을 누릴 것입니다.
살아서 베풀고 나눈 이는 그 나눔과 베풂의 절정 안에서 더없이 행복하겠지요.
이처럼 여한없이 사랑한 이는 마지막 때에 내려갈 필요도, 뒤로 돌아설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여태까지 걸온 그대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면 되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주님의 날'인듯 미련이 남지 않게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 모습을 주님께서 아시니, 그분은 한눈에 우리를 알아보시고 기뻐 뛰며 맞아 주실 겁니다.
그날이 우리에게 최고의 날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정신과 의사 ‘에릭 번’은 인간에게 3가지 인생 각본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각본은 평범한 각본입니다.
나답기보다 남과 비슷한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남들도 다 그러하게 하는데….’, ‘내가 뭐 특별하다고….’ 등의 말을 합니다.
두 번째 각본은 패배자 각본입니다.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기억에 사로잡혀 삽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각본은 승리자 각본입니다.
내 삶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을 알고, ‘지금 여기’에 집중합니다.
‘나는 나일 뿐이야.’라고 말하면서, 남의 말과 행동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계속해서 자신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떤 각본에 따라 사는 것 같습니까?
당연히 승리자 각본을 따라야 하는데, 오히려 평범한 각본, 패배자 각본에 더 가깝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절대로 평범할 수 없습니다.
단 한 명도 똑같이 만들지 않으신 하느님의 창조물인 우리 각자를 보면 모두 특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과 비슷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목적과 분명히 다릅니다.
패배자 각본 역시 우리에게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아오스딩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진 시간입니다.
후회하며 뒤를 바라봐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말씀하십니다.
이날은 갑자기 닥치는 날이고, 모든 가치 판단이 뒤바뀌는 날입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지 말고 구원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사람은 그 소명만을 향하여 가야지 다른 곳에 정신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롯의 아내가 구원의 길을 따라가다가 남기고 온 재산이 못내 아쉬워 뒤를 돌아다보고 죽었다는 기사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구원의 피난 길을 떠났으면 그저 그 길만을 향하여 가야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마지막 순간,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하십니다.
함께 있다는 것 자체로 구원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랐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만이 승리자 각본에 맞춰서는 사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법은 이 세상의 법을 뛰어넘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느님 나라의 법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각본은 ‘승리자 각본’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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