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에 만난 두 인물]
ㅡ해공 생가로ㅡ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 탄생 129주기를 맞는 날이다. 광주廣州 서하리(사마루) 신익희 생가는 행사에 참여한 인사가 입추의 여지 없이 마당을 가득 메운다. 주최인 광주문화원에서 직원들이 행사 준비에 수고롭다. 장맛비가 내려 어려움이 많다. 무더위 장마 때 행사는 평소와 달리 준비 사항이 더 생긴다. 천막과 우비 등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마 때 하천 범람으로 신익희 생가가 침수되어 지금의 장소(서하길6-25)로 이전한 것이다. 본래의 생가는 상습 침수지역이어서 부득이 이전한 것이다. 장맛비가 연일 이어져 전국에 호우 경보 중이어서 긴장된다. 가뭄에 단비와 달리 장맛비는 수식어가 변절할 정도다. '표풍부종조 취우부종일'의 뜻을 새기며 장마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해공 선생은 자신의 형으로부터 한문학을 익히며 어린 시절 공부에 전념한다.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뜻을 세운 청년이다. 1919년 3월 상해로 떠나 26년간의 망명생활이 이어진다.
1944년 임시정부 초대 대의원과 내무부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이후 법무와 문교, 외무부장 등을 거친다. 해방이 되면서 요직에 몸담으며 국회의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그는 1955년 조병옥, 장면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한다. 대통령 후보로 나서며 1956년 5월 5일 지방유세차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싣는다. 가는 도중 뜻하지 않게 심장마비로 서거한다. 개혁 정치를 꿈꾸다 떠났지만 하늘의 뜻이라면 아쉬움이 남는다.
서예 실력이 수준급이다. 필체에 추진력이 있다. 민주화 부르짖는 후세들은 그를 추앙하며 모습을 그리워 한다. 자신의 혼을 담아 쓴 필력을 잠시 감상해본다.
국민대학 설립자이며 초대 학장을 지낸 그는 북한산 순국선열묘역(강북구 수유동 산 127ㅡ1)에 잠들어 있다. 광주땅에 묻히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가 살던 종로구 효자동 164ㅡ2의 가옥이 서울시 기념물 제 23호로 지정해 잘 관리하고 있다.
추모 식후 행사에 선구자先驅者 가곡이 빗속을 가른다. 지난해에도 불렸다. 음악회에서 듣던 곡이 귀에 울리니 감회롭다. 신익희 선생이야말로 선구자다.
오찬 장소인 마을회관에서 주민과 함께 소담하며 민주화의 기초를 세운 당시의 행적을 상상하고 돌아선다.
ㅡ허초희 묘역으로ㅡ
오찬 후 광주학 김이동 부소장과 허난설헌許蘭雪軒 묘역으로 떠나본다. '실버넷뉴스' 기자 초년 때 기사를 쓰기 위해 다녀갔는데, 모처럼 와보니 낯선 비석이 눈에 띈다.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書雲觀正公派 시조비始祖碑(2021년)이다. 위편 북쪽에 세워져 있다.
서운관정공파 하당공계파荷塘公系派 시조비를 살펴본다. 신라 56대 경순왕 손자 숙승叔承, 중시조는 고려 충신 충렬공 김방경이고, 서운관정공파 8세손을 기준으로 소파 종중을 만들었다. 김홍도의 장자 김첨이 하당공계파의 시조가 된다는 의미로 세운 비이다.
안동김씨는 구舊안동김씨와 신新안동김씨로 나뉜다.
김성립은 구안동김씨 후손에 속한다. 김방경의 자손인 김선, 김흔, 김순과 후손 영돈, 영후, 사렴으로 이어지는 가문이다.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신안동김씨 김조순 형제를 비롯해 60년을 이어온 세도 정치 가문과는 관련이 없다. 새로 세운 시조비에서 가문의 의미를 알게되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빠르게 흐르고 중부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은 묘역을 진동시킨다. 남동쪽 방향 허난설헌 시댁묘는 토지 개발로 1985년에 500m 옆에 자리한 안동김씨 선영의 묘를 이장한 곳이다. 묘역 남쪽 방향에 제사를 모시는 모선재慕先齋 사당祀堂이 눈에 들어온다.
어린 두 아들(희윤)은 허초희許楚姬 오른편에 나란히 누워있다. 다음 단에는 남편 김성립(1562~1592)과 그의 후처인 남양홍씨와 합장이다. 아우인 김정립(1579~1648)과 부인 해주 정씨도 합장묘이다.
제일 윗단에 조부 김홍도金弘度(1524~1557)는 세 부인(평창이씨,한산이씨,평산신씨)과 합장이다. 드물게 보는 합장묘이다. 옆에 김성립의 아버지 김첨(1542~1584)이 은진송씨와 함께 잠들어 있다. 4대가 한 묘역에 자리했다.
허초희(1563~1589)는 조선 명종 때 허엽(본관 양천)의 딸로 강릉에서 출생하여 27세에 요절한 여류 시인이다.
우리나라 최초 한글 소설 홍길동 저자 허균의 누이이다. 서얼 출신 이달李達(1539~1612)에게 동생 허균과 함께 시를 배웠다.
초희는 기구한 삶을 살다 떠난다. 시부모와의 갈등과 남편과 불협화음이 겹친다. 일찍 떠나 보낸 자녀들에 대한 아픔과 아버지와 오빠 허봉이 객사하는 슬픔마저 겪는다.
동생 허균도 역모죄로 사형을 받는다. 친정 집안의 몰락으로 견디기 힘든 지경을 당하고 만다. "하늘의 이치를 벗어나기는 어려워라"의 싯구절을 마음에 깊이 새긴다. 당시의 여성으로서 타고난 재능을 펼치다 말고 떠난 시인이 또 있을까.
시인이 태어난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은 사계절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명소다. 강릉과 광주에서 해마다 허난설헌 발자취를 기리며 슬픈 시절의 아픔을 나누고 있다. 하늘에 먹구름이 그녀의 눈물을 머금은 듯하다.
태어난 고을에 잠들지 못한 두 인물을 그린 우중의 하루이다.
《난초를 보며》
"비맞은 난초 잎이
눈물진 한숨인가
하늘의 이치라며
햇살을 기다리네
한맺힌
통곡 소리에
등불마저 꺼진다."
2023.07.11.
첫댓글 광주 지월리 허난설헌 묘
그리고 해공 생가에는
가끔 혼자서 슬쩍 들려보곤 했습니다
시댁의 선산이 있는 곳이라서
때를 잊지않고 찾아 기록하시는
작가님의 발길에 감사하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