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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의 인격수양을 위하여 학문을 한다는 공자의 말이다. 옛날 학자는 진실로 자기 자신의 지덕을 닦기 위하여 학문을 하였다는 말이다.
爲 : 할 위(爫/8)
己 : 몸 기(己/0)
之 : 갈 지(丿/3)
學 : 배울 학(子/13)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였던 공자(孔子)는 논어(論語)의 헌문(憲問)편을 통해 '옛날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학문을 했는데, 오늘날에는 남에게 보여 주기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고지학자위기, 금지학자위인)'라고 기록하며, 학문을 하는 이유를 크게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 구분하였다.
위기지학은 자기 자신을 위해 학문을 하는 것으로, 이는 학문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인격을 수양하여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먼저 자기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다듬고, 집안을 돌본 후에,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의 '수신(修身)'이나, 학문을 하는 것이란 잃어버린 마음을 다시 구하는 것이라 표현한 맹자(孟子)의 '구방심(救放心)', 또는 대학(大學)에서 인간이 원래 간직하고 있던 덕을 다시 밝힌다는 '명명덕(明明德)'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위기지학과 대비되는 개념은 위인지학이다. 위인지학은 자신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학문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공부가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때 학문의 목적은 사회적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얻기 위한 것 등이 된다.
위기지학(爲己之學)
정의
논어 헌문편에 근거해 자기 자신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학문. 유학
내용
논어 헌문편의 "옛날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배웠지만, 오늘날은 남을 위해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에서 비롯되었다.
인간 존재는 마음과 몸의 두 요소로 구성되는데, 이 중에서 몸보다 마음이 더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는 또 변하는 부분(人心)과 변하지 않는 부분(道心)이 있는데, 이 중에서 변하지 않는 부분이 더 근본이 되는 것이다.
마음의 변하지 않는 부분은 ‘물에 빠진 어린이를 건지고 싶어하는 마음’, ‘부모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 등이다.
그런데 이는 누구에게나 항상 존재하는 공통적인 것으로서, 이를 밝혀 마음의 명령대로 살게 되면 남을 자기처럼 사랑하게 되어 현실적인 모든 갈등이나 부조화가 저절로 해소된다.
이러한 마음은 사람들이 태어날 때 모두 가지고 태어나지만, 자라면서 남과의 경쟁에 진력함으로써 차차 잃어버리게 되므로 사람들은 잃어버린 마음을 다시 찾아야 하는 숙제를 갖게 된다. 이 잃어버린 자기 자신의 본 마음을 찾기 위해 하는 학문이 위기지학이다.
맹자는 이러한 학문을 ‘잃어버린 마음을 다시 구하는 것’이라 표현했고, '대학'에서는 명명덕(明明德), 즉 밝았던 덕을 다시 밝히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위기지학을 함으로써 자신의 본 마음을 밝혀 그것을 실천하는 이상적 인간이 성인(聖人)으로 규정되므로, 위기지학의 목적은 구체적으로 성인이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우리 나라에서 전개된 학문은 이러한 위기지학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일찍이 이색(李穡)은 인간과 하늘을 하나로 전제하고, 하나일 수 있는 조건으로 마음의 세계를 제시해 마음을 밝힐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마음을 밝히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성(誠)과 경(敬)의 실천이었다.
조광조(趙光祖)는 "말을 사랑하는 것, 꽃을 사랑하는 것, 거위나 오리 기르기를 좋아하는 것 등은 마음을 바깥의 사물에 달리게 하여 반드시 진흙에 빠지게 되므로 끝내 도에 들어갈 수 없다(外間有愛馬者 有愛花草者 有愛養鵝鴨者 若馳心於外物 則必至着泥 而終無以入道)"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도는 본 마음을 따라 행하는 길로 해석되기 때문에 조광조의 이 말은 바깥 사물을 좋아하는 위인지학보다 도에 들어갈 수 있는 위기지학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황(李滉)은 '주자서절요' 서문에서 "나의 참다운 삶의 길을 위해 성현을 알 필요가 있고, 그 때문에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학문적 성격이 위기지학임을 명백히 하였다.
이이(李珥)는 '자경문(自警文)'에서 스스로 경계하기를 “먼저 자기의 뜻을 크게 가져 성인으로 준칙을 삼아야 할 것이니 조금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라고 성인이 되기 위함을 목적으로 하는 자신의 학문적 성격을 밝히고 있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강령
공자가 이르기를,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한 공부를 하였는데, 오늘날의 학자는 남을 위한 공부를 한다" 하였다. - 논어(論語)
정자(程子)는 말하였다. "위기(爲己)는 도(道)를 자기 몸에 얻으려고 하는 것이고, 위인(爲人)은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 논어 본주(本註)이다.
주자(朱子)는 말하였다. "공자가 이르기를,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한 공부를 하였는데, 오늘날의 학자는 남을 위한 공부를 한다'고 하고, 또 '너는 군자(君子)다운 학자가 되고, 소인(小人)스러운 학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옛날의 학자와 오늘날의 학자가 군자와 소인으로 나뉘는 분기점이고, 털끝만 한 차이에서 시작되어 천 리나 멀리 멀어지게 되는 대목이다." - 회암집(晦庵集)
정자는 말하였다. "학자는 모름지기 실제에 힘써야 하고 명예를 가까이하지 않아야 한다. 명예를 가까이하는 데에 뜻을 두면 이것은 거짓이다. 큰 근본을 이미 잃으면 또 무엇을 배우겠는가? 명예를 위하는 것과 이익을 위하는 것은 청탁(淸濁)이 다르지만 이익을 탐하는 마음은 같다."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고 하였으니, 그 문채(紋彩)가 너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해서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의 도(道)는 은은하되 날로 드러나고, 소인(小人)의 도는 선명하되 날로 없어지는 것이다. 군자의 도는 담박하되 싫지 않으며, 간략하되 문채나며, 온화하되 조리가 있으니, 먼 것이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됨을 알며, 풍화(風化)가 일어나는 곳을 알며, 은미함이 곧 드러남이라는 것을 안다면, 함께 덕(德)에 들어갈 수 있다" 하였다. - 중용(中庸)】
주자가 말하였다. "옛날의 학자(學者)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였으므로 그 마음을 세우는 것이 이와 같았다. 홑옷을 덧입었기 때문에 은은하고, 비단옷을 입었기 때문에 날로 드러나는 실제가 있다. 담박하고 간략하고 온화함은 홑옷을 밖에 껴입은 것이고, 싫지 않고 문채나며 또 조리가 있음은 비단의 아름다움이 속에 있는 것이다. 소인은 이와 반대이니, 밖에 드러나되 실제로써 이어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또렷하되 날로 없어지는 것이다. 원지근(遠之近)은 저기에 나타난 것이 여기에서 말미암는 것이고, 풍지자(風之自)는 밖에 드러난 것이 안에 근본하는 것이고, 미지현(微之顯)은 안에 있는 것이 밖에 드러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려는 마음이 있고, 또 이 세 가지를 알면 삼갈 바를 알아 덕(德)에 들어갈 수 있다." - 중용 본주(本註)이다.
공자가 이르기를, "도(道)에 뜻을 두며" 하였다. - 논어(論語)
주자가 말하였다. "지(志)는 마음이 지향해 가는 것을 말한다. 도(道)는 바로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것을 알아서 마음이 반드시 거기로 가면 나아가는 것이 올바르게 되어 다른 길로 가는 미혹이 없을 것이다." - 논어 본주(本註)이다.
또 학자에게 유시하였다. "글이 기억나지 않을 경우 익숙히 읽으면 기억할 수 있고, 뜻이 정밀하지 않을 경우 세밀하게 생각하면 정밀해질 수 있다. 오직 뜻이 확립되지 않으면 이는 곧 힘을 쓸 곳이 없다. 비유하자면 지금 재리(財利)와 녹봉(祿俸)은 탐하면서 도의(道義)는 탐하지 않고, 귀인(貴人)이 되려고 하면서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모두 이것은 뜻이 확립되지 않은 데에서 생기는 병통이다."
정자가 말하기를, "학문을 말하면 곧 도(道)를 아는 데에 뜻을 두어야 하고, 인품을 말하면 곧 성인이 되는 데에 뜻을 두어야 한다." 하였다. - 근사록(近思錄)
주자가 말하였다.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은 배워서 성인에 이르는 일이다. 이천(伊川)선생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학문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사장(詞章)의 학(學), 훈고(訓詁)의 학, 유자(儒者)의 학이다. 도(道)를 통하려고 한다면 유자의 학이 아니면 불가하다'고 하였다. 윤 시강(尹侍講)이 이른 바 '배운다는 것은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성인(聖人)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도리를 극진히 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이것이 모두 매우 중요한 말이다."
또 말하였다. "무릇 사람은 모름지기 성현(聖賢)이 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성현을 높게 여기고 자신을 낮게 여기기 때문에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현도 품성(稟性)은 보통 사람과 똑같으니, 어찌 성현이 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주자어류(朱子語類)
또 말하였다. "오직 성인만이 인륜을 극도로 실현한 분이니 참으로 보통 사람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을 세우는 근본은 극진한 분을 법으로 삼아야지 극진하지 못한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 회암집(晦庵集)
율곡(栗谷) 선생의 자경문(自警文)에 이러하다. "털끝하나 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했다면 이는 곧 내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맹자는 성선(性善)을 말씀하실 때 반드시 요순(堯舜)을 칭하셨다. - 맹자(孟子)
주자가 말하였다. "성(性)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아 태어나는 이(理)이니, 혼연(渾然)히 지극히 선(善)하여 일찍이 악(惡)함이 있지 않다. 보통 사람은 요순과 처음에는 조금도 다름이 없었으나, 다만 보통 사람들은 사욕(私欲)에 골몰하여 이것을 잃었고, 요순은 사욕에 가려진 것이 없어 능히 그 본성(本性)을 채운 것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맹자가 성(性)의 선(善)함을 말하면서 반드시 요순을 칭하여 실증한 것이니, 인의(仁義)는 밖에서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성인(聖人)은 배워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서 힘 쓰는 데에 게을리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이다." - 맹자(孟子) 본주(本註)이다.
안연(顔淵)이 말하기를,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순과 같은 일을 하는 자는 또한 이와 같다" 하였다. - 맹자(孟子)
주자가 말하였다. "사람이 능히 순과 같은 일을 하면 모두 순과 같다는 말이다." - 맹자(孟子) 본주(本註)이다.
또 말하였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분발해서 용맹하게 앞으로 나아가 일상생활 속에 털끝만큼의 사욕(私欲)도 남아 있지 않게 한 것이다. 만약 여기에서 분발하여 흥기(興起)하는 것이 있으면 비로소 공부를 할 수 있는 바탕이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바로 기름 위에 그림을 그리고 얼음에 조각을 하는 것과 같아서 참된 힘을 얻는 곳이 없게 된다." - 회암집(晦庵集)
또 말하였다. "반드시 스스로 진실하고 평온하게 공부하는 곳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한갓 밤낮으로 생각하고 헤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한 일을 순이 한 일과 비교해서 절절하게 오직 순과 같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병든 사람의 경우, 의당 순서에 따라 약을 복용하고 차츰 치료를 해 나가서 기운과 육체가 점차 충만해져 정상인의 수준에 도달하고 난 뒤에야 치료를 그쳐야 한다. 어찌 환약 한 알 먹고 가루약 한 봉지 먹고서 일조일석의 사이에 갑자기 병이 낫기를 바라서 금방 정상인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단 말인가!" - 회암집(晦庵集)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천지(天地)를 위해서 마음을 세우고, 생민(生民)을 위해서 도(道)를 세우며, 옛 성인을 위해서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萬世)를 위해서 태평(太平)의 길을 열어야 한다" 하였다. - 근사록(近思錄)
율곡 선생이 말하였다. "이것은 학자가 뜻을 세우는 조목이다"고 하였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발의 거동은 무겁게 하고, 손의 거동은 공손하게 하며, 눈의 거동은 단정하게 하고, 입의 거동은 다물며, 소리의 거동은 조용하게 하고, 머리의 거동은 곧게 하며, 기운의 거동은 엄숙하게 하고, 서 있는 거동은 덕스럽게 하며, 얼굴빛의 거동은 씩씩하게 해야 한다." 하였다. - 예기(禮記)
요진경(廖晉卿)이 무슨 책을 읽을지 묻자, 주자는 말하였다. "공(公)은 방심(放心)한 지 오래되었으니, 우선 정신을 수렴하여 예기 옥조(玉藻)에서 구용(九容)에 대해 말한 대목을 자세히 체인(體認)하고, 거기에서 의사(意思)가 생기거든 그때 가서 독서하는 것이 좋겠다." - 주자어류(朱子語類)
또 말하였다. "구용은 경(敬)의 조목이다."
또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본원(本源)을 함양(涵養)하는 것이다."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을 위한 학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子曰 古之學者는 爲己러니 今之學者는 爲人)이로다." (憲問 25)
일반적으로 어릴 때는 주로 부모님께 칭찬을 받기 위해 공부를 한다. 초·중·고등학생이 되면 대체로 좋은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입시공부를 하고, 대학생 때에는 좀 더 큰 자신의 인생목표를 위해 공부를 한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할 때에도 좋은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공부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학문(學問: 배우고 물음)을 하는 데에는 각자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학문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공부'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 두 가지가 있다고 공자는 말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공부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현재의 수준을 끌어 올리기 위한 공부를 말한다. 이런 공부를 하는 사람은 남을 의식하기 보다는 자신의 목표에 집중한다. 따라서 자기가 얼마만큼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남에게 자랑할 시간이 없다. 또한 그런 마음이 쉽게 생기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이 세운 목표가 바로 눈앞에 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할 공부의 분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를 하는 사람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이런 사람은 애초부터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향상된 점이 생기게 되면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거나 그들에게 자랑하기 일쑤다. 이렇게 자신의 실력을 여기저기에 자랑하다 보면, 그 만큼 공부에 집중할 시간도 부족하게 되고 간혹 자신의 실력을 부풀리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결국 큰 꿈을 갖기도 쉽지 않고, 그런 꿈을 가진다고 해도 그것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고 있는 시간에 그와 경쟁하는 사람들은 더욱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말을 빌면,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공자가 강조하는 '자신의 위한 학문'이란 단순히 지식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자는 학문의 궁극적인 목표를 '성숙한 인격을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훌륭한 인격과 덕망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학문을 한 사람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렇게 볼 때, 공자가 말하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공부'란 단순히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공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한 마음으로 꾸준히 학문에 매진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인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학문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배우고 묻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는 자기반성과 자기성찰을 의미한다. 공자는 자기반성과 자기성찰이 남에게 자기지식을 과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함을 강조한다.
생각해 보자.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가? 나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내 실력을 남들에게 과시하고 자랑하기 위해서인가?
너를 위해 살아라
이제껏 아버지만큼 삼국지(三國志)를 탐독한 이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가 쓴 삼국지 번역본을 읽었다. 가끔 보면 밑줄을 긋기도 하고 여백에 메모를 깨알같이 했다.
결혼해서 한집에 살 때다. 출근 인사를 드리자 갑자기 삼국지 일본어판을 구해오라고 했다. 동경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 며칠 걸려 구해드렸다. 그러고 얼마쯤 지나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연의(三國演義) 중국어본을 대만에 있는 지인을 통해 구해드렸다.
그때 아버지는 책 심부름시키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삼국지를 읽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으냐"고 했다. 월탄(月灘) 박종화(朴鐘和)의 월탄삼국지(月灘三國志)를 구해드리자 비로소 만족해 했다.
아버지 방을 청소하다 깜짝 놀랐다. 책 네 권을 펴놓고 노트에 삼국지를 만년필로 새로 쓰시고 있었다. 이미 다른 노트에는 등장인물별로 발언록을 따로 만들어 놓은 걸 보고 많이 놀랐다. 책에 다 적지 못한 번역 오류 등을 바로잡은 노트도 있었다. 적어도 몇 달은 족히 걸렸을 작업량이었다. 심하게 놀란 건 달력 뒷면을 이어붙여 삼국지에 나오는 모든 전투상황도를 그린 지도를 보고서였다.
외출했다 돌아온 아버지에게 “대단하십니다”라며 삼국지를 여쭙자 밤을 밝히며 하신 말씀이다. “번역서로는 월탄의 글이 좋다. 요시카와는 독자를 너무 많이 가르치려 한다. 그래서 내가 삼국지를 새로 쓰고 있다. 나관중이 저지른 실수도 여럿 있다. 특히 역사는 당시 인물이 겪은 바를 독자가 따라 해보는 방식의 추체험적(追體驗的) 기술을 해야는 데 소설적 가미가 너무 심하다”라고 평했다. 아버지는 “삼국지 현장을 일간 좀 다녀왔으면 좋겠다”라고 했으나 몇 년 지나 뇌출혈로 쓰러지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아버지는 “삼국지 주인공은 조조(曹操)다. 등장인물 중에서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를 모두 기술된 유일한 인물이다. 발언량도 최고 많고 걸물 중에서는 가장 인간적이고 실수도 많이 해 정이 간다”라면서 “‘사람들은 어제 조조를 잘못 보았다, 오늘도 잘못 본다. 어쩌면 내일도 잘못 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나니까’라는 조조의 말이 참 좋다. 그는 임종 직전 이 말을 하고 물을 가져오게 하고 마시지를 못하고 손으로 튕긴다. 마치 자신의 인생을 의미하듯이. 닮고 싶은 멋있는 삶이다”라고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인용한 고사성어가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공자(孔子)가 논어(論語)의 헌문(憲問) 편을 통해 "옛날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학문을 했는데, 오늘날에는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질타하며, 학문하는 이유를 크게 위기지학과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 구분했다.
아버지는 “위기지학은 학문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인격을 수양하여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위인지학은 자신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학문을 하는 것이어서 공부가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 학문의 목적은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얻으려는 데 있다”라고 했다.
말을 마칠 즈음에 아버지는 “너를 위해 살아라. 너를 발견하고 온전한 네 삶을 살아라. 직장에서 일하니 직장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언제까지나 직장에 있을 수는 없다. 조조처럼 죽을 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의 공부를 집요하게 해라”라고 했다.
아버지는 조조가 한 말인 “산은 영원히 그 높음에 만족하지 않고, 물은 영원히 그 깊음에 만족하지 못한다(山永不滿足於其高, 水永不滿足於其深)”를 옮기며 공부 방법으로 집요성(執拗性)을 제시했다. 그런 성정이 몸에 배도록 노력할 것을 요구했다. 그 또한 손주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은 품성이다.
▶️ 爲(할 위)는 ❶상형문자로 为(위), 為(위)는 통자(通字), 为(위)는 간자(簡字)이다. 원숭이가 발톱을 쳐들고 할퀴려는 모양을 본떴다. 전(轉)하여 하다, 이루다, 만들다, 다스리다의 뜻으로 삼고 다시 전(轉)하여 남을 위하다, 나라를 위하다 따위의 뜻으로 쓴다. ❷회의문자로 爲자는 '~을 하다'나 '~을 위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爲자는 원숭이가 발톱을 쳐들고 할퀴려는 모습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갑골문에 나온 爲자를 보면 본래는 코끼리와 손이 함께 그려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코끼리를 조련시킨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爲자의 본래 의미는 '길들이다'였다. 하지만 후에 코끼리에게 무언가를 하게 시킨다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을 하다'나 ~을 위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爲(위)는 ①하다 ②위하다 ③다스리다 ④되다, 이루어지다 ⑤생각하다 ⑥삼다 ⑦배우다 ⑧가장(假裝)하다 ⑨속하다 ⑩있다 ⑪행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움직일 동(動), 옮길 사(徙), 옮길 반(搬), 흔들 요(搖), 옮길 운(運), 들 거(擧), 옮길 이(移), 다닐 행(行), 구를 전(轉)이 있다. 용례로는 나라를 위함을 위국(爲國),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爲民), 다른 것에 앞서 우선하는 일이라는 위선(爲先), 힘을 다함을 위력(爲力), 첫번을 삼아 시작함을 위시(爲始),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행동함을 위아(爲我), 생업을 삼음 또는 사업을 경영함을 위업(爲業), 사람의 됨됨이를 위인(爲人), 정치를 행함을 위정(爲政), 주되는 것으로 삼는 것을 위주(爲主), 예정임 또는 작정임을 위계(爲計), 진실한 즐거움을 위락(爲樂), 어떤 것을 첫 자리나 으뜸으로 함을 위수(爲首), 기준으로 삼음을 위준(爲準), 나라를 위한 기도를 위축(爲祝), 부모를 위함을 위친(爲親), 자기를 이롭게 하려다가 도리어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위총구작(爲叢驅雀), 치부致富하려면 자연히 어질지 못한 일을 하게 된다는 말을 위부불인(爲富不仁), 바퀴도 되고 탄환도 된다는 뜻으로 하늘의 뜻대로 맡겨 둠을 이르는 말을 위륜위탄(爲輪爲彈), 겉으로는 그것을 위하는 체하면서 실상은 다른 것을 위함 곧 속과 겉이 다름을 일컫는 말을 위초비위조(爲楚非爲趙), 되거나 안 되거나 좌우 간 또는 하든지 아니 하든지를 일컫는 말을 위불위간(爲不爲間), 선을 행함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말을 위선최락(爲善最樂),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된다는 뜻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위어육(爲魚肉), 어떤 사람을 위해 벼슬자리를 새로이 마련함이나 남을 위해 정성껏 꾀함을 일컫는 말을 위인설관(爲人設官), 자손을 위하여 계획을 함 또는 그 계획을 일컫는 말을 위자손계(爲子孫計), 가난을 면하지 못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위귀소소(爲鬼所笑), 자기가 정한 법을 자기가 범하여 벌을 당함을 일컫는 말을 위법자폐(爲法自弊),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다는 뜻으로 어떤 불행한 일이라도 끊임없는 노력과 강인한 의지로 힘쓰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을 전화위복(轉禍爲福),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라는 뜻으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어 강압으로 인정하게 됨 또는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함을 이르는 말을 지록위마(指鹿爲馬),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이루기 힘든 일도 끊임없는 노력과 끈기 있는 인내로 성공하고야 만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마부위침(磨斧爲針), 강남의 귤을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으로 사람도 환경에 따라 기질이 변한다는 말을 귤화위지(橘化爲枳), 손이 도리어 주인 행세를 한다는 뜻으로 주객이 전도됨을 이르는 말을 객반위주(客反爲主), 인공을 가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또는 그런 이상적인 경지를 일컫는 말을 무위자연(無爲自然),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된다는 뜻으로 작은 것도 모이면 큰 것이 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진적위산(塵積爲山), 하는 일 없이 헛되이 먹기만 함 또는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무위도식(無爲徒食) 등에 쓰인다.
▶️ 己(몸 기)는 ❶상형문자이나 지사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본래 구불거리는 긴 끈의 모양을 본떴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 모양에서 일으키는 일의 뜻으로 쓰인다. 일으키다의 뜻은 나중에 起(기)로 쓰고, 己(기)는 천간(天干)의 여섯번째로 쓰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己자는 '몸'이나 '자기'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몸'이란 '나 자신'을 뜻한다. 己자의 유래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사람이 몸을 구부린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굽의 있는 새끼줄을 그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己자와 결합한 글자를 보면 새끼줄이 구부러져 있는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다만 己자가 단독으로 쓰일 때는 여전히 '나 자신'이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己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상용한자에서는 뜻과 관련된 글자가 없다. 다만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새끼줄이나 구부러진 모양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으니 상황에 따른 적절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래서 己(기)는 ①몸 ②자기(自己), 자아(自我) ③여섯째 천간(天干) ④사욕(私慾) ⑤어조사(語助辭) ⑥다스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여섯 번째를 기사(己巳), 열여섯째를 기묘(己卯), 스물여섯째를 기축(己丑), 서른여섯째를 기해(己亥), 마흔여섯째 기유(己酉), 쉰여섯째를 기미(己未)라 한다. 그리고 자기의 물건을 기물(己物), 자기 마음을 기심(己心), 자기가 낳은 자녀를 기출(己出), 자신의 의견이나 소견을 기견(己見), 자신의 초상을 기상(己喪), 자기의 소유를 기유(己有), 자기의 물건은 기물(己物), 제 몸이나 제 자신 또는 막연하게 사람을 가리키는 말을 자기(自己), 자기 이익만 꾀함을 이기(利己), 자신의 몸을 닦음을 수기(修己), 안색을 바로잡아 엄정히 함 또는 자기자신을 다스림을 율기(律己), 자기 몸을 깨끗이 함을 결기(潔己), 몸을 가지거나 행동하는 일을 행기(行己), 신분이나 지위가 자기와 같음을 유기(類己), 자기를 사랑함을 애기(愛己), 자기 한 몸을 일기(一己), 자기에게 필요함 또는 그 일을 절기(切己), 자기가 굶주리고 자기가 물에 빠진 듯이 생각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겨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함을 일컫는 말을 기기기익(己飢己溺), 중종때 남곤 일파 조광조 등을 쫓아내어 죽인 사건을 일컫는 말을 기묘사화(己卯士禍), 기미년 3월1일 일제에 항거하여 일어난 한국의 독립운동을 일컫는 말을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자기 스스로를 돌이켜 봄을 일컫는 말을 자기관찰(自己觀察), 모든 사고와 판단과 행동을 자기 중심으로 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자기본위(自己本位), 자기의 이해와 쾌락과 주장을 중심으로 삼고 남의 처지를 돌보지 않는 주의를 일컫는 말을 애기주의(愛己主義), 자기 존재를 인정 받으려고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는 심리적 경향을 일컫는 말을 자기과시(自己誇示), 스스로에게 황홀하게 빠지는 일을 일컫는 말을 자기도취(自己陶醉), 자신의 생활은 검약하게 하고 남을 대접함에는 풍족하게 함을 이르는 말을 약기유물(約己裕物)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일컫는 말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말을 지남지북(之南之北),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비유적 의미의 말을 낭중지추(囊中之錐),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뜻으로 첫눈에 반할 만큼 매우 아름다운 여자 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말을 경국지색(傾國之色), 일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을 결자해지(結者解之),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형세를 이르는 말을 누란지위(累卵之危), 어부의 이익이라는 뜻으로 둘이 다투는 틈을 타서 엉뚱한 제3자가 이익을 가로챔을 이르는 말을 어부지리(漁夫之利),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을 형설지공(螢雪之功), 처지를 서로 바꾸어 생각함이란 뜻으로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봄을 이르는 말을 역지사지(易地思之),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부귀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이 허무함을 이르는 말을 한단지몽(邯鄲之夢), 도요새가 조개와 다투다가 다 같이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뜻으로 제3자만 이롭게 하는 다툼을 이르는 말을 방휼지쟁(蚌鷸之爭),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풍수지탄(風樹之歎), 아주 바뀐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 또는 딴 세대와 같이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비유하는 말을 격세지감(隔世之感), 쇠라도 자를 수 있는 굳고 단단한 사귐이란 뜻으로 친구의 정의가 매우 두터움을 이르는 말을 단금지교(斷金之交), 때늦은 한탄이라는 뜻으로 시기가 늦어 기회를 놓친 것이 원통해서 탄식함을 이르는 말을 만시지탄(晩時之歎), 위정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을 믿게 한다는 뜻으로 신용을 지킴을 이르는 말을 이목지신(移木之信), 검단 노새의 재주라는 뜻으로 겉치례 뿐이고 실속이 보잘것없는 솜씨를 이르는 말을 검려지기(黔驢之技), 푸른 바다가 뽕밭이 되듯이 시절의 변화가 무상함을 이르는 말을 창상지변(滄桑之變),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으로 범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도중에서 그만두거나 물러설 수 없는 형세를 이르는 말을 기호지세(騎虎之勢), 어머니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문에 의지하고서 기다린다는 뜻으로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르는 말을 의문지망(倚門之望), 앞의 수레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뒤의 수레는 미리 경계한다는 뜻으로 앞사람의 실패를 본보기로 하여 뒷사람이 똑같은 실패를 하지 않도록 조심함을 이르는 말을 복거지계(覆車之戒) 등에 쓰인다.
▶️ 學(배울 학, 가르칠 교, 고지새 할)은 ❶회의문자로 아이들이 양손에 책을 들고 가르침을 본받아 깨우치니 배우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學자는 '배우다'나 '공부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學자는 臼(절구 구)자와 宀(집 면)자, 爻(효 효)자,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갑골문에 나온 學자를 보면 집을 뜻하는 宀자 위로 爻자를 감싼 양손이 그려져 있었다. 한자에서는 爻자가 무늬나 배움과 관련된 뜻을 전달하고 있으니 이것은 '배움을 가져가는 집'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니까 갑골문에서의 學자는 집이나 서당에서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子자가 더해지면서 '아이가 배움을 얻는 집'이라는 뜻을 표현하게 되었다. 그래서 學(학, 교, 할)은 (가)철학 또는 전문적인 여러 과학을 포함하는 지식의 조직체. 곧 현실의 전체 또는 그 특수한 영역 및 측면에 관하여 체계화된 지식의 계통적 인식 (나)학문(學問) 등의 뜻으로 (1)'배울 학'의 경우는 ①배우다 ②공부하다 ③흉내내다 ④모방하다 ⑤가르침 ⑥학교(學校) ⑦학문(學問) ⑧학자(學者) ⑨학통(學統) ⑩학파(學派) 따위의 뜻이 있고, (2)'가르칠 교'의 경우는 ⓐ가르치다(교) 따위의 뜻이 있고, (3)'고지새 할'의 경우는 ㉠고지새(되샛과의 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닦을 수(修), 익힐 련(練), 익힐 습(習),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가르칠 교(敎), 가르칠 훈(訓), 가르칠 회(誨)이다. 용례로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을 학교(學校), 배우는 사람으로 주로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을 학생(學生),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히는 일을 학문(學問), 사물을 배워서 익히는 일을 학습(學習), 학문에 능통한 사람이나 연구하는 사람을 학자(學者), 학문의 실력이나 역량을 학력(學力), 공부하여 학문을 닦는 일을 학업(學業), 학문의 사회나 학자의 사회를 학계(學界), 한 학년 동안을 규정에 따라 나눈 수업 기간을 학기(學期), 출신 학교에 따른 연고 관계를 학연(學緣), 학문의 기술 또는 학문의 방법이나 이론을 학술(學術), 공부한 이력을 학력(學歷), 공부하는 데 드는 돈을 학비(學費), 배워서 얻은 지식을 학식(學識), 한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는 벗을 학우(學友), 학생의 무리 또는 학문을 닦는 사람을 학도(學徒), 학업을 닦음을 수학(修學), 실지로 보고 학식을 넓힘을 견학(見學), 배우지 못함이나 학문이 없음을 불학(不學), 일정한 목적과 방법으로 그 원리를 연구하여 하나의 체계를 세우는 학문을 과학(科學), 인간이나 인생이나 세계의 지혜와 궁극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을 철학(哲學), 언어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을 어학(語學), 학교에 들어감을 입학(入學), 개인의 사사로운 학설 또는 개인이 설립한 교육 기관을 사학(私學), 외국에 가서 공부함을 유학(留學), 학문에 나아가 닦음 또는 상급 학교로 나아감을 진학(進學), 학교에서 학기를 마치고 한동안 수업을 쉬는 일을 방학(放學), 방학을 마치고 다시 수업을 시작함을 개학(開學), 다니던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옮겨가서 배움을 전학(轉學), 학문에 힘써 공부함을 면학(勉學), 배우고 때로 익힌다는 뜻으로 배운 것을 항상 복습하고 연습하면 그 참 뜻을 알게 된다를 이르는 말을 학이시습(學而時習), 학문은 미치지 못함과 같으니 쉬지 말고 노력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학여불급(學如不及), 배우는 일에 정성을 다해 몰두함을 이르는 말을 학업정진(學業精進), 배움이란 마치 물을 거슬러 배를 젓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한다를 이르는 말을 학여역수(學如逆水), 외고 읽을 뿐으로 이해하려고 힘쓰지 않고 또 실천하지 못하는 학문을 이르는 말을 기송지학(記誦之學), 배우지도 못하고 아는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불학무식(不學無識), 널리 공부하여 덕을 닦으려고 뜻을 굳건히 함을 이르는 말을 박학독지(博學篤志)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