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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3일 연중 제24주일
제1독서 : 집회 27,30―28,7
제2독서 : 로마 14,7-9
복 음 : 마태 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랑하라, 화내지 마라, 자비로워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믿는 이들의 삶은 주님과 일치의 여정입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의 일치는 깊어지는가 이것이 유일한 영적 관심사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됩니다.
제 졸저중 책 제목을 보고 우선 읽어보는 것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매일 수도자가 누구인가? 묻는 자가 수도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날마다 확인해야 할 우리의 존재입니다.
보기 드문 장마로 수도원 정문 밖, 불암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시냇물이 참 맑습니다.
장마가 걷히고 좀 지나면 물도 마를 것입니다.
시냇물이 맑게 흐르는 그 날까지 매일 식사 후 동요를 부르며 산책할 예정입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고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삶, 바로 이것이 참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맑게 흐르는 시냇물처럼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시냇물처럼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말씀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첫째, “사랑하라!”입니다.
사랑하십시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웃에 대한 집착 없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깨끗한 사랑, 바로 아가페 사랑이 가능합니다.
분도 성인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사랑의 일치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영원한 평생 도반인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일치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와 일치가 날로 깊어지는 지요.
무지로부터의 해방도, 행복도, 자유도 그리스도와 일치의 깊이에 달렸습니다.
우리가 평생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수행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바로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관계를 깊이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치의 모범이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은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주님은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그리스도는 내 삶의 중심이며 의미라는 것입니다. 아니 나의 모두라는 고백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날로 깊어가는 주님과 일치의 관계 속에 생사를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평온히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화내지 마라!”입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화내지 않는 것입니다. 분노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노도 우리 눈을 멀게 합니다.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그러니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는 것입니다.
분노의 후유증이 너무 큽니다. 화를 내면 싸움에 집니다.
참는 자가 온유한 자가 마지막 승리자가 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할 때 분노도 사라집니다. 온유하고 겸손해 집니다.
분노에 대한 답은 온유입니다. 바로 오늘 집회서도 온통 분노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분노와 진노 역시 혐오스러운 것인데도, 죄지은 사람은 이것들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말라.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화답송 후렴 역시 맥을 같이 합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그러니 주님과 관계가 깊어져 주님을 닮아 갈수록
우리 역시 자비롭고 너그러우며 분노에 더딜 것입니다.
셋째, “자비로워라!”입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자비는 용서입니다. 분노는 놔두면 화병이 됩니다.
용서로 즉시 의식적으로 풀어야 화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주님 말씀처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내가 살기위해 밥 먹듯이, 숨 쉬듯이 무한히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용서가 상대방을 회개에로 이끌 수 있습니다.
용서가 되지 않더라도 용서의 지향을 갖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고 증오나 미움을 품고 있으면 내가 먼저 다칩니다. 화병으로 내가 먼저 파괴됩니다.
집회서 또한 용서할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리라.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오늘 복음 후반부 매정한 종의 비유도 용서하라는, 자비로워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하느님께 용서받았으니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님의 것이요 죽어도 주님의 것이란 깨달음이 바로 용서와 자비의 샘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자비로 살아가기에 자비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몰라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요 몰라서 자비롭지 못한 것입니다.
만탈렌트 빚진 자가 상징하는바 우리 모두입니다.
이렇게 무한한 주님의 자비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지에 눈먼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는 무지가 큰 죄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서 배은망덕의 죄입니다.
그렇게 천문학적 빚을 진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그토록 인색하다니요!
주인의 엄중한 추궁이자 질책입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네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대로 무지에 눈멀어 인색한 이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끊임없는 용서와 자비로운 삶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무지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알아갈수록 자기를 알며 얼마나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지 깨닫습니다.
바로 여기서 용서의 사랑이, 겸손과 지혜가 나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답은 명확히 나왔습니다.
1. “사랑하라!”
그리스도를 항구히! 열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2. “화내지 마라!”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화내지 않는 것입니다.
3. “자비로워라!”
끊임없이 용서하는 사랑으로 표현되는 자비입니다.
이렇게 살 때 주님을 닮습니다. 셋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분노는 눈녹듯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자비가 샘솟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이런 자비의 샘이신 주님과 하나되는 시간입니다.
하여 우리 모두 미사은총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화내지 않고 자비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가 얼마나 존귀하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당신 날개 그늘에 피신하나이다.”(시편36,8).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나라는 ‘자살 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2016년에 13년간 연속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7년에 2위가 되기도 했었지만, 2018년에 다시 1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극단적 선택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로 ‘돈’과 연관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가난한 나라일까요?
미국에서도 한미방위비 협상에서 분담금을 올리려는 이유를 ‘한국은 부자나라다’가 아닙니까?
그러나 대부분 국민은 우리나라를 부자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19년 국제통화기금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일 인당 국내 총생산은 3만 불이 넘습니다.
이는 세계 27위에 해당하지요.
여기에 한국의 국내 총생산(GDP)은 1조 6422억 달러로 OECD 회원국 중 10위에 해당합니다.
분명 과거보다 엄청나게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가난하다는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긴 좋은 집에 살고, 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골프를 치러 다니면서도 “힘들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됩니다.
‘돈’이라는 물질에서 벗어날 때 행복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이 기준이 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말할 때도 그 이유가 ‘돈’으로 인한 아픔에서 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용서는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흔일곱이라는 수는 모든 세대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여기에는 한 세대도 빠지지 않으므로, 십자가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라는 충만한 선물을 받지 못한 세대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용서를 이처럼 여러 번 하라는 것은 분노할 시간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매정한 종의 비유에 나오는 매정한 종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용서하지 못하는 종이 아닌, 어떻게든 용서할 수 있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많은 용서를 계속해서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의 기준이 되는 돈과 같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서 자유로운 우리가 될 때,
하느님의 기준을 가지고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집회서 저자의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 28,2)
용서는 잊는 것이 아닙니다.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미사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용서의 실질적인 측면은 무엇입니까?
용서하라고 하면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예수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용서란 과연 무엇입니까?”
사탄은 틈틈이 우리를 노립니다. 그는 우리가 용서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가 살며시 다가와서는 우리의 귀에 속삭입니다.
“그가 너에게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봐. 네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니?”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종이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에 한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피정 중에 어떤 사람이 용서를 결심했습니다.
그는 어떤 신부님이 자기에게 큰 잘못을 했는데, 이제 그 신부님을 용서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고 나중에 다시 그 신부님을 보자, 다시 막 화가 났습니다.
어떤 용서가 있었던 것입니까?
피정 중에 용서했다고 한 것은 진정으로 용서한 것이 아니라 다만 경험일 뿐이었습니다.
묵주 기도를 하거나 기도를 하는 중에도 가끔 그 신부님이 자기에게 한 일이 생각납니다.
어떻게 그가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다시 화가 솟구칩니다. 그러면 용서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용서는 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잊는 것이 아닙니다.
20 년 전에 누가 나에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뺨을 때렸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그 일이 잊어집니까?
결코 잊을 수는 없습니다. 잊고 싶다면 그 생각을 잊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용서는 과연 무엇입니까?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사건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기억만 합니다.
‘용서했어.’라고 하면서 그것을 기억만 하고, 땅에 묻었던 것을 다시 꺼냅니다.
헌 양말은 그것을 발에 신었든지 주머니에 넣었든지, 가지고 있으면 냄새가 납니다.
사람과 사건을 기억하고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 사건, 그것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기억하면서 동시에 기도하고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에게 기쁨과 행복을 돌려주십시오. 그의 일을 축복해 주십시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은총이 작용합니다. 은총으로 그 상처가 없어집니다.
강렬하던 상처와 고통이 없어집니다, 타이어에서 공기를 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20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상처가 없습니다. 이제 아프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디로 갔습니까? 그 사건이 어디로 간 겁니까? 누가 그것을 없애 주었습니까?
바로 성령께서 그것을 없애 주셨습니다. 용서는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증오는 영혼의 병입니다. 어떤 약으로도 치유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은총만이 치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디에서 배웁니까? 바로 십자가상에서 배웁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용서하시기 위해서 그분도 기억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 아래에서 얻을 수 있는 보화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앉아 묵상을 하면 삶에 관한 진리를 얻게 됩니다.
저는 예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십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인간에게 특징이 있다면, 첫째는 사랑입니다. 둘째는 용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용서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어렵다면, 용서에 관한 부분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용서하기 어려우면 당연히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용서가 정말 어렵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 은총을 청합시다.
정말 어렵지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의 맑고 푸른 드넓은 하늘처럼, 우리 마음이 너그럽고 맑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드넓고 한계가 없는 무한한 용서를 입었으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인간이 죄인을 용서해주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하는 그 사람의 죄도 용서해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용서하는 것이 용서받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 28,2)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셨기에,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8) 라고 고백합니다.
곧 주님의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사실, 베드로의 이 질문은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라는
말씀을 듣고서 하는 것이기에, 하느님 자비와 용서를 한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일흔 일곱 번’이라는 이 말씀이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시각을
얼마나 바꾸어 놓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일흔 일곱 번’이라는 말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카인을 죽이는 이는 누구든지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받았던 것보다 일곱 배나 더 큰 벌을 주겠다고 위협하셨는데,
이는 카인에게 내리는 자비의 표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그를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를 보호하기까지 해 준다는 큰 자비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카인의 후손 라멕은 자신에게 가볍게 상처를 입힌 사람과
막대로 자신을 건드린 사내아이를 무자비하게 살해했다고 두 아내 앞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해치는 이는
누구든지 일곱 배가 아니라 ‘일흔일곱 배’로 앙갚음을 할 것이다!”라고
자랑삼아 떠벌립니다(창세 4,23-24).
여기서 보듯이, 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되갚고 앙갚음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악함이 클수록 앙갚음도 더 격렬해서.
눈에는 눈, 손에는 손으로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 더하여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 반면에, 하느님은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그 한계를 두지 않는데서 더 잘 드러납니다.
그러니 ‘일흔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상대방의 악함보다 항상 더 큰 선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단지 용서할 뿐만 아니라, 끝까지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를 보호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를 도와주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돌보아주라는 말입니다.
곧 용서를 넘어서는 용서, 용서한 다음에 거기에 더하여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를 산상설교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이를 설명하시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곧 ‘조금만 참아달라는’ 종의 간청에 대해 단지 참아 주는 것을 넘어서,
청하지도 않은 빚을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왕’과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리는”(마태 18,30)
카인의 후손 라멕과 같은 ’무자비한 종’이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용서”는
빚진 종을 왕이 “가엾이 여겨, 그를 놓아주고 빚을 탕감해주는 것”(마태 18,26)으로 드러납니다.
곧 “자비”로 드러납니다.
그 자비는 단지 놓아 줄뿐만 아니라, 빛을 탕감해주고 잘 살아가도록 도와줍니다.
더구나 그것은 청하기도 전에 미리 헤아려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되는 자비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왕은 종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33)
이는 우리가 왜 용서해야 하는지, 용서의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기도 전에, 고백하기도 전에, 아니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당신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구원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구원해주신,
‘먼저’ 베풀어진 자비와 용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용서에 더하여 선으로 앙갚음되는 더 큰 은총의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역시 하느님의 ‘호의’(헤세드)의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마치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6)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골로 3,13)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아니,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고 돌보게 하소서.
꺾이고 또 꺾이어도 결코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금은 대부분 자동차를 타고 다니지만 어릴 때는 손수레, 우차, 마차를 많이 보았습니다.
손수레를 앞에서 끈 적은 없고 주로 뒤에서 밀었습니다.
이사 갈 때 뒤에서 밀었습니다. 김장 배추를 담은 손수레를 뒤에서 밀었습니다.
솜씨가 좋은 작은 형은 손수레에 좌판을 만들고
지붕은 천막으로 덮어 멋진 포장마차를 만들었습니다.
형과 함께 동네 모퉁이에서 포장마차를 했었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소달구지의 뒤에 앉아서 간 적도 있습니다.
손수레는 구루마라고도 불렀습니다. 50년 전에는 시장에 많은 구루마가 있었습니다.
지게로 짐을 나르던 사람들에게 구루마는 자동차와 같았습니다.
바퀴가 달려서 더 많은 짐을 나를 수 있었습니다.
지난 성모승천 대축일 때입니다.
한국에서 80년 된 구루마를 십자가로 만들었고, 교황님께 선물로 드렸다고 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십자가의 의미를 들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축성하셨다고 합니다.
80년 동안 노동자와 함께 했던 구루마가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십자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십자가로 변하였습니다.
서울의 밤을 나타내는 것들이 많습니다.
남산 타워의 불빛이 있습니다. 한강 다리의 조명이 있습니다.
홍대, 신촌, 대학로에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청계천에서는 물고기를 볼 수 있습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경복궁을 볼 수 있습니다. 하천이 정비 되어서 산책할 수 있습니다.
서울의 밤은 안전하고 쾌적합니다. 서울의 밤을 나타내는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빨간 색의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교회를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자동차에도 묵주나 십자가를 걸어 놓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우들의 가정에는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는 성지(聖枝)를 십자가에 놓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합니다.
십자가를 고상(苦像)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 그리고 허리에 상처를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받아들이신 고통을 기억하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믿고 사랑했던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서 도망갔습니다.
유다는 은전 몇 닢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맡겼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해 주셨고, 걷지 못하는 사람은 걷게 해 주었고,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었고, 중풍병자는 일어나게 해 주었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해 주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은 배불리 먹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들이 조롱과 야유를 보내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참된 자유와 평화보다는 지금의 풍족함이 더 중요했습니다.
빌라도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진리를 외면하였습니다.
코로나19는 분명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미사에 참례할 수 없었고, 단체 활동을 할 수 없었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찾으면 코로나19의 위험에도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200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욕심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예수님께 받았던 사랑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지만 모든 사람을 용서하셨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적당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0%만 용서한다. 50%만 용서한다는 말은 없습니다. 용서는 온전히 100% 용서여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미진한 마음으로 용서한다면 그것은 참된 용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분노와 원망이 있기 때문에 기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내가 베푸는 선행이 아니라 어쩌면 용서는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행해야 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은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가 용서하고 용서받을 때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죄와 회개 사이로
소중한 사람이 있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께서는 용서이시다.
하느님을
향해야 하는 용서이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다.
용서 받은 우리들이기에
용서해야 한다.
사람은
용서 없이 살 수 없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용서에 빚진 사람들이다.
용서는 생명이다.
용서는 구원이다.
하느님 안에서
용서를 구한다.
용서는
하느님의 영역이다.
우리를 살리는 용서이다.
사람을
살게 하는 용서이다.
우리의 삶이란
불완전한 관계의 연속이다.
참된 회개와 아픈 용서를
청하는 우리들 영혼이다.
용서는
주고받는 하느님 나라이다.
우리 인생에서
분리될 수 없는 용서가
우리를
매순간 일깨워준다.
용서받은 자녀는
용서의 길을 걸어간다.
용서? 아침에 고행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일만 탈렌트를 탕감 받은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1만 탈렌트를 탕감 받았으면서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빚 독촉을 해대는 못된 종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용서받았으면서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 용서했는지, 그렇지 못한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왠지 용서한 것 같으면서도 또 그 사람을 보면 화가 나는 수가 있습니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은 자기 아들 유괴범이 마음이 편한 것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합니다.
머리로는 용서하였지만, 마음으로 되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으로 용서하였다면 그 사람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어도 마음이 동요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동요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용서했다면 나는 그 사람이 어떤지에 상관없이 항상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그분이 좋아지지 않는 용서는 아직 진정한 용서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원수 앞에서 기분이 좋아질 수 있을까요?
알바니아 예수회의 ‘안톤 룰릭’ 신부는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에 의해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의 첫 번째 감옥은 몹시 추운 외딴 산골 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9개월간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상태로 인분 위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해 성탄절 밤에 간수들은 그를 다른 화장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어 매달았습니다.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룰릭 신부는 엄청난 절망감으로 크게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달려와 그를 바닥에 내려놓고 마구 구타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고통 속에서 룰릭 신부는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위로가 느껴졌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고문자들에게 그는 어떤 미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89년 79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석방되었을 때,
룰릭 신부는 우연히 만난 간수에게로 달려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습니다.
[출처: ‘안톤 룰릭 SJ 신부 이야기’, 김영석 신부(예수회), ‘기도의 사도직’ 카페]
안톤 룰릭 신부의 용서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분을 들어 높이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당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이에게만 당신 은총을 허락하십니다.
100데나리온은 1만 탈렌트의 6십만 분의 1입니다.
6조 원의 로또가 당첨된 사람이 천만 원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일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일상에서는 내가 돈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받은 죄 용서의 가치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6조 원을 거저 받아도 기분이 좋지 못한 것입니다.
기분이 좋지 못하니 작은 일에도 분통이 터지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돈의 가치를 알려면 그것을 조금은 써봐야 합니다.
돈의 가치를 모르는 아기에게 그 많은 돈을 주어봐야 사탕 하나 때문에 짜증 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받은 것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로부터 받는 1만 탈렌트의 가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일만 탈렌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 값으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우리 대신 죗값을 치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히 그 가치를 올바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다만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1만 탈렌트를 다 써봐야 그 값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 한 데나리온만 써봐도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데나리온의 가치는 내가 고행을 할 때 깨닫게 됩니다.
주님 피의 값을 알기 위해 아주 조금만이라도 그 고통에 동참해보는 것입니다.
요즘 고행을 말하면 중세시대 낡은 골동품 취급을 당합니다.
그러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과 어느 한 젊은 사제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한 젊은 신부가 비안네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비안네 신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나를 통해 하신 것이며 나는 그저 도구였을 뿐입니다.”
젊은 신부가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누구도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영혼들에게 아무 일도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왜 다른 신부들은 신부님이 고해성사 중에 하시는 기적을 행할 수 없는 걸까요?
그들도 하느님 은총의 도구인데요.
그들도 영혼들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매우 열심히 기도하는데요.”
비안네 신부는 망설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거룩한 친구이며 스승인 밸리 신부가
자신에게 종종 말하던 것을 그 젊은 신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죄인들의 변화는 기도로 시작하여 참회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 죄인이 사제이든 친구이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군가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위해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는 물론이요 단식하고, 잠을 포기하고라도 힘든 고행을 감수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또 자신의 양 떼들을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고통을 겪지 않는 목자는 완전히 실패할 위험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참아 받는 고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과 일치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총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은총에 감사하고 기쁘지 않을 수 없고
내가 그들에게 흘려주는 은총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됩니다.
기도 자체가 고행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맞갖은 고행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아침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기도하신 그 시간을 짧게라도 반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께 받은 1만 탈렌트에 감사하게 되고
하루 동안 나에게 잘못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고행하기 어려우면 운동을 조금 힘들게 해도 됩니다. 건강도 좋아지니 일거양득입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내가 받은 용서의 가치를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공부하고 고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우리 죄의 용서는 공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일만 탈렌트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많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됩니다.
이 기쁨 없인 어떠한 용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사람은 쉽사리 용서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실수가 일어났을 때 입으로는 '괜찮아.' 라고 상대에게 말해주지만
같은 실수가 일어나면 무심코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저번에 그러더니 또 그랬어?" 혹은 "네가 그럼 그렇지." 같은 말들입니다.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상대를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어떤 사건을 잊지 않음으로써
그 존재를 내 마음대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 아픈 일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가장 많이 합니다.
나의 약함이 반복될 때 좌절하고, 때때로 '내가 그럼 그렇지.'라며 자조적인 농담을 합니다.
내가 나에게 상처를 줍니다. 자기 용서를 하지 못함으로써.
이 복음을 묵상하다 문득, '너 나를 사랑하느냐?'는 세 번의 질문 앞에
눈앞에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분이 건네시는 말씀보다는
배반했던 자신의 잘 못을 기억하고, 그걸 놓지 못해 슬퍼하는 베드로가 떠올랐습니다.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33절의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라는 말씀이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자신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으로 되돌아옵니다.
용서, 라는 단어를 되새기며,
하느님께서 품어주신 나의 약함을 나 역시 사랑하고, 기쁘게 지고 갈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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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