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를 위하여
小珍 박 기 옥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2시 12분이다. 디지털이라 현재 시간만 나와 있다. 2와 12 뿐이다. 과거와 미래는 아예 없다. 가차 없이 생략되어 있다.
거실 시계를 확인한다. 아날로그 시계다. 작은 바늘과 큰 바늘이 2시 15분을 지나고 있다. 12시와 1시를 거쳐 2시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얼마 안 있어 3시에 닿을 수 있음도 짐작할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눈에 보인다. 안도감이 생긴다.
내 인생이 아날로그인 것을 확인한 것은 퇴직 무렵이었다. 아들이 퇴직 기념으로 새 컴퓨터를 한 대 선물했다. 나는 그것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다. 나의 전산 실력이란 것이 컴맹 겨우 면할 정도였는데, 새 컴퓨터에는 기능이 너무 많았다. 아들은 바쁘고 불친절했다. 문제가 생기면 달려 와 휘리릭 해결해 주었다. 설명도 없이 해결만 해 주고 말았다. 설명해봤자 번거롭기만할 뿐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친구 모임에서 보면 다들 비슷한 입장이었다. 한 친구는 서울 사는 아들에게 전화로 두어 번 물었다고 어찌나 퉁명스러운지 좀 나무랐더니 화를 버럭 내면서 ‘엄마 컴퓨터 해결해 주러 휴가 내야 할 판’ 이라고 해서 손을 들었다고 했다.
또 한 친구는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친정 어머니한테 전화가 와서 달려가니 한겨울에 냉온기에서 찬 바람이 나오더라는 것이었다. 두 노인네가 밤새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오들오들 떨다가 새벽이 되어 연락을 받은 딸이 달려가 보니 기계가 저 혼자 냉방 모드로 가 있더라고 했다. 우리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나는 오랜 아날로그를 거쳐 가까스로 디지털로 넘어온 세대다. 10대까지만 해도 100% 아날로그의 삶이었다. 컴퓨터는 전문가들에게만 있었다.
초등학생 때는 국군장병아저씨한테 연필로 꾹꾹 눌러가며 위문 편지를 썼다. 선생님께서는 나의 편지를 반 아이들한테 큰 소리로 읽어 주셨는데, 마지막 한 마디로 반 전체에 폭소가 터졌다. 어디선가 읽은 한 구절을 옮겨 쓴 것이 문제였다. ‘명복을 빕니다.’였다.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문맹이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자녀들이 편지를 대신 써 주기도 하고 읽어 주기도 했다. 요즘처럼 불친절하거나 퉁명스럽지 않았다.
난방은 장작으로 불을 지펴 군불을 땠으므로 한겨울에 자동으로 에어컨이 켜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어쩌다 손님이 오면 장작을 넉넉히 써서 방바닥이 눋는 사고가 있기는 했다.
아이들도 지금처럼 스마트폰에 코를 묻고 살지는 않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시끌벅적하게 골목에서 뛰어 놀았다. 여자아이들은 주로 고무줄 놀이를 즐겨 했고, 남자아이들은 딱지를 치며 놀았다.
나는 딱지를 잘 만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솜씨를 발휘하곤 했는데 내가 만든 딱지는 동네에서 유명했다. 힘이 매워 상대 딱지를 잘 넘겼을 뿐 아니라 땅에 붙으면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종이가 두껍다고만 해서 힘이 센 것도 아니었다. 적당한 두께에 땅을 끌어당기는 악력 구조가 중요했다. 동생은 누나가 만든 딱지를 자랑스러워했다.
한국 영화 <오징어 게임>이 세상을 흔들었을 때 중년이 된 동생은 제사 모임에서 나의 딱지를 화제로 삼았다. 내가 만든 네, 댓 개의 딱지를 무기로 전장에 나가면 주머니 가득 채워오던 딱지치기를 그리워했다. 친구들도 나를 ‘딱지 잘 만들던 누나’로 기억한다고 했다. 그때가 지금 보다 덜 행복했을까.
다시 시계를 본다. 작은 침이 세시를 지나 네시를 향하고 있다. 이제 곧 날이 밝아올 것이다. 하늘에는 또 다른 해가 뜨고 나는 다른 날을 맞이할 것이다. 시간만큼 정직한 것이 있을까.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시간 어딘가쯤에 엉거주춤 서 있는 내가 보인다.
첫댓글 소진선생님
지발 눈 좀 아끼세요.
앞으로 30년은 생생하게
쓰야할 터인데...
그래야 미래의 독자들도
소진의 흥미롭고 속 깊은
글을 읽을 수 있을게
아닌가뵈. ㅎㅎ
그럴게요. 하하
아나로그 시대의 사실을 묘사한
작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도 딱지치기를 그리워하시죠?
글의 매력, 그 매력에 잠시라도 빠졌다가 나온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까?
글 감사합니다.
선생님힌테도 딱지 잘 만들어 주던 누나가 있었나 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