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16호. 1963년 지정. 1491년(성종 22)에 축조된 것으로, 둘레 1,800 m, 성 높이 5 m, 성 안의 넓이 6만 4350 m2이다. 영장(營將)을 두고 서해안 방어의 임무를 담당하던 곳이며, 폐성된 지 오래되어 성곽이 일부 허물어지고, 성 안의 건물이 철거되어 그 자리에 해미초등학교와 우체국 ·민가 등이 들어서는 등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으나, 1973년부터 읍성의 복원사업을 실시, 민가 및 관공서가 철거되었다.
본래의 규모는 동 ·서 ·남의 3대문이 있었고, 옹성(甕城)이 2개소, 객사(客舍) 2동, 포루(砲樓) 2동, 동헌(東軒) 1동, 총안(銃眼) 380개소, 수상각(水上閣) 1개소, 신당원(神堂院) 1개소 등 매우 큰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 복원된 것은 3대문과 객사 2동, 동헌 1동, 망루 1개소뿐이다. 1418년(태종 18)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되었다.
해미는 1414년(태종 14)에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德山)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뒤 1651년(효종 2)에 청주로 이전할 때까지 군사전략상 중심지였다. 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되었으며, 영장(營將)이 머물면서 서해안 방어를 맡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당시 절도사영이 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자리하였는데,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3,172척이고, 높이는 15척이며, 우물 3곳과 군창(軍倉)이 설비되어 있다고 기록되었다.『해미읍지(海美邑誌)』에는 성벽의 둘레가 6,630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雉城)이 380첩(堞)이며,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 성문 앞을 가려 쌓은 옹성(甕城)이 2곳이라고 하였다. 또한 남문은 3칸인데 무지개 모양의 문인 홍예(虹霓)와 2층의 다락을 두었다고 하였고, 동문과 서문은 3칸이지만 북문은 없다고 하였으며, 우물이 6곳으로 성 밖에는 호(壕)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설치된 충청병마절도사영과 해미읍성은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순신(李舜臣)이 1579년(선조 12)에 충청병마절도사영에서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 근무한 적이 있다.
현재 성벽의 둘레는 2㎞ 정도인데, 남문인 진남문(鎭南門)과 함께 동문·서문이 있다. 성 안에는 동헌(東軒)·어사(御舍)·교련청(敎鍊廳)·작청(作廳)·사령청(使令廳) 등의 관아(官衙) 건물이 분포해 있다.
이 읍성은 현재 전하는 우리나라의 읍성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유적이다. 읍성의 표본으로 삼기 위해서 성 안에 자리하였던 민가와 학교 등을 철거하고 연차적인 보수 공사를 실시하였다. 곧 1974년에는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였고, 1981년에는 성 안의 일부 지역을 발굴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客舍)터가 확인되었고, 현재의 아문(衙門)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터가 발견되었으며, 관아를 둘러쌌던 돌담의 자취도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