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근심 걱정을 해결하는 피리, 만파식적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이어 감은사라는 절을 세웠다. 어느 날 바닷가에 작은 산이 하나 감은사를 향해 떠내려 오고 있었다. 신문왕이 일관에게 물으니 문무왕과 김유신이 큰 보물을 주려는 것이라 하였다. 산은 거북의 머리처럼 생기고 그 위에 대나무가 하나 있었다. 한바탕 비바람이 몰아치고 잔잔해지던 날 신문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자 용이 나타나 대나무를 가져가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이라고 하였다. 신문왕은 대나무를 가져가 피리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나라에 근심이 있을 때 이 피리를 불면 평안해졌다. 물결을 쉬게 하는 피리라는 뜻으로 만파식적이라 불렸다.
통일된 신라를 새롭게 정비한 신문왕
신라의 제31대 왕 신문왕은, 삼국 통일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문무왕의 둘째 아들이다. 형 소명태자가 병으로 일찍 죽자 태자로 임명되었고 문무왕이 세상을 떠난 681년부터 왕의 자리에 올랐다. 문무왕의 뒤를 이어 통일된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쓰고 정치적 이념으로 유교를 선택하였다. 확장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였다. 신문왕은 신기한 피리 만파식적을 얻은 것으로 유명하다. 만파식적은 근심스러운 상황에 불면 평안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삼국유사」에 만파식적을 만들게 된 신비한 과정이 기록되어 전한다.
모든 근심 걱정을 해결하는 피리, 만파식적
용으로부터 얻은 대나무로 만든 피리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이어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감은사를 세웠다. 어느 날 바닷일을 보던 해관(海官) 박숙청이 신문왕에게 아뢰기를, “동해안을 살펴보니 한 작은 산이 감은사를 향해 둥둥 떠오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길흉을 점치는 일관(日官)을 불러 헤아려 보게 하였다. 일관은 “용신(龍神) 문무왕과 천신(天神) 김유신이 큰 보물을 주려는 것입니다. 나가서 받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신문왕은 그 달 7일에 감포읍 대본리에 있는 이견대로 향했다. 사람을 시켜 떠 오는 산에 대해 알아보게 하였다. 그 사람은 돌아와 “산의 모양은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고 그 위에 대나무 막대기가 하나 있습니다. 대나무 막대기는 낮에는 둘로 나눠졌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쳐집니다.”라고 아뢰었다. 그 후 9일 동안 하늘과 땅이 요동치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16일이 되자 비로소 비바람이 멎고 바다의 물결이 잔잔해졌다. 신문왕이 배를 타고 떠 오던 그 산에 들어가자 용이 검은 대나무를 바치며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게 되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신문왕은 그 대나무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용의 말대로 피리를 만들어 왕실의 보물창고인 천존고에 보관하였다. 이 피리를 불게 되면, 침입한 적병이 물러가고 가뭄에는 비가 내리며 비바람이 몰아치다가도 잦아들었으므로 ‘물결을 쉬게 하는 피리’라는 뜻에서 ‘만파식적’이라 불렸다.
태평성대를 바라는 염원이 담긴 만파식적
이 이야기는 신문왕이 떠 오던 산의 용에게 영험한 대나무를 얻어 피리를 만든 이야기이다. 만파식적은 진평왕이 받은 천제가 내린 옥대나 이성계가 꿈에서 얻은 금척과 같이 새로운 나라가 세워질 때마다 등장하는 신이한 물건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뒤를 이어 신문왕은 여러 제도를 정비하고 왜적의 침입에 대한 방비 등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왕통의 정당성과 왕권의 강력함을 바탕으로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만파식적이라는 신기한 피리에 대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만파식적이 피리(악기)라는 점에서 예악을 중시하는 유교 이념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통일된 신라의 새로운 음악 체계가 발생하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참고자료
웹페이지
"만파식적",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웹페이지
"만파식적설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웹페이지
한국구비문학대계
지방문화원
경주문화원 GO
집필자
송지현
|
첫댓글 경상도 설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설화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