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3. 12. 22.(음 11월 10일. 동지).
동짓날이라서 그럴까?
금주 내내 추웠고, 오늘도 종일토록 영하권이다.
해마다, 다달이, 나날이 더 늙어가는 탓일까?
올봄부터는 유난스럽게 허약해져서 힘들어 했고, 올겨울철에는 무척이나 추위를 탄다.
한겨울철인 요즘에는 하도 추워서 아파트 바깥에 나가지도 못한 채 방에서만 맴돈다.
방안에서 지내자니 뭐라도 해야겠기에 인터넷 사이버세상에 더욱 자주 들락거린다.
오늘도 <한국국보문학카페> '등단 시인방'에 오른 시 하나를 보았다.
'초포 황규환' 시인의 '제3막 2장 어릿광대의 노래'
내가 아래처럼 댓글 달았고, 퍼서 '세상사는 이야기방'에 올려서 내 글감으로 삼는다.
내 댓글 :
글과 이미지 사진이 잘도 어울려서 엄지 척! 합니다.
추운 동지섣달에 사그라지는 노년의 삶을 엿봅니다.
이를 보충설명하는 초가삼칸의 집도 그렇고요.
지금도 이런 집이 남았나요?
어찌하여 삼간집 마루에 유리창도 설치하지 않았나요?
한겨울에는 찬바람이 휘날려서 한지(종이) 바른 문풍지 틈새로 방안의 온기가 냉기로 변하겠군요.
마치 늙어가는 제 몸뚱아리를 엿보는 것 같습니다.
서해안 산골에 있는 제 시골집.
위처럼 흙벽으로 지은 집인데도 유리창문을 달았지요.
1959년에 개보수한 집, 마룻장에는 유리창문을 덧대어 달아서 한겨울의 북풍을 막아내고,
여름철에는 흩날리는 비바람을 막지요.
눈 내리는 한겨울.
삭신이 녹아나는 세월에 와 있는 노인네들이 많을 겁니다.
현재 남한인구 5,175만 명 가운데 65살 이상의 노인네는 900만 명을 넘어 1,000만 명에 점점 가까울 겁니다.
저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올봄부터는 왜그리 몸이 허약해졌는지...
위 시를 읽고는 서해안 산골에 있는 제 시골집으로 갑니다.
눈 내리는 바깥마당으로 나가서, 바깥창고 함석지방 처마 밑에 서서
먼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싶군요.
인터넷으로 '초가삼간' 이미지를 검색한다.
많은 사진이 올랐으며, 몇 개를 골라서 여기에 올린다.
1950년대에 내가 산골마을에서 살았던 당시의 마을의 집들도 이와 엇비슷하였다.
흙담장도 없는 집이 대부분이었으니 한겨울철에는 날바람이 얼마나 드세게 불어닥쳤을까?
사진을 임의로 퍼서 여기에 올린다.
용서해 주실 게다.
'그때 그시절'의 모습이기에.
사진에 마우스를 대고 누르면 사진이 크게 보임.
내 작은 외삼촌네 집도 마지막 사진과 비슷했다.
충남 보령군 남포면 용머리 갯바다 뒷편에서 살았는데 빚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쫄딱 망해서 이웃 면인 웅천면 구룡리 화망으로 이사갔단다.
화망마을 뒷산 욱굴산 산자락 아래에 허름하게 지은 초가삼간.
집 주변을 가려주는 울타리, 담벽 등 가림막은 전혀 없었다.
정말로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던 외삼촌은 술(음주)로 일찍 죽었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전개될 때 외삼촌네 남은 가족들은 객지로 떠났다.
그 훗날 가난한 외지사람인 석수쟁이가 이사와서 그 집에서 살다가 이내 이사를 갔고, 그 집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오래 전에 흔적조차도 없어졌고, 지금은 울창한 숲으로 뒤덮혔다.
내가 기억하는 1950년대 ~ 70년대 초까지의 산골마을의 정황이 지금도 눈에 아련하게 떠오른다.
지금은.... 마을사람들이 많이도 줄어들었고, 이제는 극소수 노인네만 남아서 어기적거리다가는 이따금씩 북망산천으로 떠난다.
마을의 초가집들은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으로 지붕개량을 해서 짚으로 얹었던 지붕을 벗겨내서 스레이트, 함석, 기와 등으로 개보수했기에 이제는 초가지붕을 가진 집은 전혀 볼 수가 없다.
1949년 1월 생인 나한테는 과거의 농촌 산촌 생활실상이 눈에 아련히 남았다.
또한 나는 1960년 봄에 객지인 대전으로 전학을 갔고, 대전시내 은행동, 선화동, 원동 등에서는 종이 루핑집이 무척이나 많았다.
가난한 이웃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2020년대인 지금 나는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면 '천지가 개벽한 것처럼 많이도 변했고, 크게 발전했다'고 말한다.
정말로 많이 변했고, '모두 다들 잘 산다' 라고 말한다.
많은 글감이 떠오른다.
잠시 쉰다.
2023. 12. 22. 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