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로마 공항에 내려섰을 때의 일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1986년 10월 초, 맑게 갠 따뜻한 날이었다. 강한 햇살에, 공기는 눈부실 정도로 맑았지만, 하늘 끝까지 뚜렷이 보일 정도로 새파란 일본의 가을 하늘과는 달리, 로마의 하늘에는 뿌연 안개 같은 것이 끼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개는, 마치 음악의 베이스처럼, 모든 소리와 모든 시간에 부드럽게, 그러나 숙명처럼 오버랩되고 있었다. 아피아 거리의 소나무에도, 파라쪼의 붉은 색 벽에도, 테베르 강 수면에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가을 안개의 필터가 걸려 있었다. 남유럽의 가을은 어딘가 우수를 느끼게 했다.
아내와 나는 일단 이렇게 유럽까지 오기는 왔지만, 어디에 살 것인지 정하지도 못했고 앞으로 충분한 수입이 있으리라는 확신도 없었고, 일단 유사시에 의지할 만한 조직도 없었다. 우리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곤 당분간의 생활비와 당장 필요한 옷가지와 소량의 일본 음식과 필기 도구뿐이었다. 나는 비교적 낙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에, 직접 가서 부딪혀 보면 어떻게든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일본을 떠난 이유는, 한마디로 말해서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을 쓸 수 있다고는, 나로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쓸 수 있으리라는 예상뿐이었다. 하지만 예상은 어디까지나 예상에 불과하다. 어쩌면 일부러 유럽까지 왔지만 결국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고, 괜히 시간과 노력만 낭비할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에 잠겨서 걷는 로마의 거리 풍경은(아마도 감정이입 탓도 있겠지만) 왠지 모르게 애절하게 느껴졌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발표한 뒤 오랫동안(정확히 말해서 2년간) 장편소설을 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유는 언제나 그렇듯이, 몹시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 1년간 단편을 여섯 편 정도 한꺼번에 썼다. 그 작품들은 단편집 《빵집 재습격》에 수록되었지만, 그 해는 나에게 완전히 단편의 해였다. 그것이 일단락되자, 그 다음에는 주로 번역을 했다. 조지 어빙의 《곰을 쏘다》, 레이몬드 커버의 《밤이 되면 개구리를》, 폴 세로의 《월즈 엔드》(이 세상 끝), C.D.B 브라이언의 《위대한 데스리프》를 번역하여 출판한 것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잡지에 실었던 에세이를 모아 책으로 내기도 했다. 《무라카미 아사히도의 역습》이나 《THE SCARP》가 바로 그 에세이집이다. 그 외에도 야스니시 미즈마루 씨와 둘이서 일본 전국의 공장을 견학하여, 책으로 출판한 《해가 솟는 나라의 공장》이 있다. 나로서는 이 기획이 마음에 들었고, 글을 쓰기 위해서 여러 곳을 다니며, 여러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 사실 이러한 문학적 '농한기'에는 몸을 움직이는 작업이 무척 즐겁게 느껴지게 마련이고, 또한 훗날에 유형 무형으로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 동안에 나는 주기를 후지사와에서 도쿄로 옮겼다가, 다시 오이소로 옮기는 등, 짧은 기간에--여러 가지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자주 이사를 했다. 나는 이사하는 것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고, 익숙해져 있기는 했지만, 나이가 들어 가재 도구가 늘어나자,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는 것이 그만 귀찮아졌다. 이제는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나도 곧 40대에 접어든다. 언제까지고 이리저리 방황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심한 초조감을 느꼈다. 무언가 특별히 불쾌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불쾌한 일은 언제나 있지만, 특별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슬럼프에 빠진 것도 아니다. 물론 작업은 너무나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생활도 별로 불안하지 않았고, 객관적으로 보아 작가로서는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하지만 어디에 가건, 무엇을 하건,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는 느낌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는 탓이리라고 생각한다. 전력을 기울여 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소설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는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욕심을 부리자면 끝이 없겠지만, 현재의 내 힘으로 이 정도 썼으면 일단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구성의 이야기를 어떻게든 완성시킴으로써, 소설가로서의 자신감도 다소는 붙게 되었다. 적어도 완성된 이후로 6개월 가량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윽고, 이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을 완전히 부숴 버리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더 이상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식으로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을 부수고,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좋을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내부에 무언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이론이나 전망과는 성격이 달랐다. 일종의 본능적인 예감이었다.
그리고 나는 작가로서 자신의 위치나 존재가 나름대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오히려 초조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일본에서는 작가로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 별다른 일이 없는 한 굶어죽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이라는 나라는 정말로 풍요로운 나라이다. 기업은 돈을 잔뜩 지니고 있으니까 이익금의 일부를 광고에 쏟아 붓고, 광고로 수많은 잡지가 수입을 올리고, 그 국물이 작가들에게도 흘러 들어온다. 그러한 행복한 잉여금의 문화 유입이라는 도식이 도대체 언제까지 게속될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토록 여유만만하게 지내도 좋을까 하는 불안감은 확실히 있다. 물론 아무리 풍요로운 나라라 하더라도,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야기는 그다지 단순하지가 않다. 이 세상 어느 구석엔가 굶주리는 사람이 있어도, 고급 스테이크만 먹는 사람의 이빨은 역시 고급 스테이크용의 이빨로 변해 버린다-는 이야기다.
또한 초조감을 느끼게 된 데에는 적지않은 내 나이 탓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쓴 것은 서른여섯 살이 되던 해이고, 일본을 떠난 것을 서른 여덟에 가까운 때였지만, 나는 그 무렵, 자신이 지금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젊음을 전면에 내세워 작품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젊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적 성숙을 전면에 내세울 정도로 나이가 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어려운 시기에나 할 수 있는 일들을 지금 제대로 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썼을 때 이상으로 정신적인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먼 북소리》에서도 언급했지만, 《노르웨이의 숲》은 1986년 말에 그리스의 미코노스 섬에서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로마에서 완성시켰다. 나는 이 작품을 쓰면서, 이것은 아마도 내 작품의 계보상에 있어서 상당히 예외적인, 어떤 의미에서는 '외전'(外傳)적인 작품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특별히 강렬한 욕구를 지니고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니다. 얼마 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워밍업으로 가벼운 것을 하나 시험해 보자는 정도의 기분에서 착수했다. 평소와는 다른 근육을 사용하여, 평소와는 다른 운동을 해보자는 식의 가벼운 기분으로 썼다. 이 소설 속에서 내가 의도한 것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이것은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도 《노르웨이의 숲》도, 포맷 자체는 이른바 청춘 소설이다. 그곳에 묘사된 것은, 스무 살 전후 의 청년이 성장 과정에서 발견하는 세계의 광경이다. 그러나 이 두 소설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노르웨이의 숲》을 쓸 때 내가 의도한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철저하게 리얼리즘 문체로 쓸 것. 둘째 섹스와 죽음에 관해서 철저하게 언급할 것. 셋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보이는 처녀작 같은 수치감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 '반(反) 수치감'을 정면에 내세울 것, 이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점에 관해서는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기분상 그러했다는 것 이외에, 나로서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은, 내 계획으로는(어긋나기로 유명한 내 계획으로는) 지금 지니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성격의 책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 같은 소설도 썼지요, 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작정이었다. 다른 작품들과는 분위기가 다소 다르고, 세간의 평은 그다지 좋지 않더라도, 국부적으로는 열렬한 팬을 지니는 소품과도 같은 소설을 쓸 생각이었다. 그러한 것이 하나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다시피,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책(일본 원서)의 띠지에 '백 퍼센트 연애 소설'이라는 문구를 넣은 이유는, 이러한 소설을 펴낸 데에 대한 나름의 변명이었다. 내가 의도했던 것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은 래디컬(radical)하지도 세련되지도 지적이지도 포스트모던하지도 실혐적이지도 않고 단순히 평범한 리얼리즘 소설입니다. 그러니까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 주십시오'라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그런 말을 책 띠에 쓸 수는 없으니까, 열심히 궁리해서 '연애 소설'이라는 말을 끄집어 낸 것이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숲》이 연애 소설이라는 관점에서 평론되는 데에 대해서는, 스스로 자초한 결과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몹시 당황하고 있다. 왜냐하면 《노르웨이의 숲》은 정확한 의미에서 연애 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연애 소설이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몰랐다(지금도 모르지만). 나는 이제까지 수많은 소설을 읽어 왔지만, 그 대부분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인간이 어떻게 사랑을 주고(주지 않고), 어떻게 사랑을 받아들일(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그 문제가 끊임없이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소설을 연애 소설로 취급한 적은 없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 책에 묘사된 갖가지 종류의 사랑은, 그러한 의미에서의 사랑의 범주를 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애는 묘사되고 있지 않으니까. '연애 소설'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비평을 받는다고 해도 사실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소설을 굳이 정의하자면, 성장 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을, 당초의 예상대로 가벼윤 소설로서 끝내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써나아가다, '이것을 이대로 도중에서 내팽개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점차로 고개를 들게 되었다. 나는 <반딧불>이라는 소설을, 어느 단계에서 멋대로 내팽개칠 수 있었다. '내팽개치다'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면, 어느 지점까지 밀고 가다가 손을 떼었다고 해도 좋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편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이러한 이야기입니다, 나머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것이 소설입니다-하는 식으로. 하지만 그 단편을 바탕으로 좀더 길게 끌어 보자는 결심을 한 순간, 나는 이야기에 대한 전면적인 책임을 져야만 했다. 《노르웨이의 숲》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사랑에 대해서, 혹은 모럴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듯이, 나도 그 이야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소설에서는 등장 인물들이 잇달아 죽어간다. 그건 지나치게 편의주의적이 아니냐는 비평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변명이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이야기가 그것을 나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정말로 나로서는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따. 그리고 이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캐주올티즈(casualties. 적절한 변역을 할 수 없다. 전투원의 감원이라고나 할까)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내 주위에서 죽어간, 혹은 사라져 간 수많은 캐주얼티즈에 관한 이야기이며, 혹은 나 자신의 내부에서 죽거나 사라져 간 수많은 캐주얼티즈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가 정말 이 소설에서 쓰고 싶었던 것은 연애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캐주얼티즈의 모습이며, 그캐주얼티즈의 뒤에 남아서 존속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혹은 사물들의 모습이다. 성장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고독하게 싸우고, 상처받고, 상실되고, 상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야만 하는 모습이다.
이 소설이 처음 예정보다 훨씬 길어지게 된 것은, 제작 과정에서 그러한 모습들이 보인 까닭이다. 마치 산꼭대기를 향해서 등반하는 도중에 조금씩 주위의 안개가 걷히듯이, 내 눈에 여러 가지 것들이 선명하게 보여 왔다. 그러니까 만약 이 소설에 어떤 흠이나 결점이 있다 하더라도(물론 많이 있다), 나는 이 이야기에 대해서 나름대로 책임을 완수했노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내 자신에 대해서는 작은 소리로 대답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대한 갖가지 반응 중에서 가장 의외로 생각되는 것은, 이 소설의 줄거리에 대한 반응이 제법 강했던 것에 비해서, 문체에 관해서는 그다지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소설의 문체와 줄거리는 자동차(vehicle)와 승객(passenger)의 관계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승객보다는 오히려 자동차를 만드는 데 상당한 신경을 썼다. 리얼리즘이라는 문체는 시종일관 나에게 신종의 자동차였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리얼리즘이란, 우선 담백(simple)하고 스피드가 있을 것. 문장은 줄거리의 흐름을 저해하지 않고, 독자에게 그다지 물리적, 심리적 요구를 하지 않을 것, 이것이 내가 설정한 《노르웨이의 숲》에서의 문장적 액세스의 개요였다. 그것은 나에게는 일종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결국-내가 상상하기에는-많은 사람들이(특히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이 문장을 리얼리즘으로는 간주하지는 않은 듯하다. 내가 생각하는 리얼리즘이란, 남들이 생각하는 리얼리즘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성립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의미에서, 어쩌면 나는 전혀 엉뚱한 짓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은 마지막 단계에서까지 결정되지 않았다. 4월에 볼로냐 서적 페스티벌에 온 고단샤(講淡社) 사람에게 원고를 넘겼는데, 그 직전까지 이 소설에는 다른 제목이 붙어 있었다. 물론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은 후보 명단에 항상 들어 있기는 했지만, 지나칠 정도로 정확히 맞는 제목이어서, 이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비틀즈의 노래 제목을 그대로 쓴다는 점에도 저항을 느꼈다. 세대적 티가 너무 많이 묻어 있지 않은 가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단어에 너무나도 친숙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제목들은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에 아내에게 읽어 보도록 한 다음,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을 알려주지 않은 채, "어떤 제목이 좋을까?"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하면 좋지 않을까요?" 하는 대답이어서, 결국 이 제목으로 낙찰되었다. 단, 아내는 그때까지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은 상징적이라고 여겨진다. 원작의 시를 읽어 보아도 역시 그렇지만 'NORWEGIAN WOOD'라는 말에는, 어휘 자체가 자연스럽게 부풀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있다. 조용하고, 멜랑콜릭하고, 더구나 어딘가 텐션(tension)이 느껴진다. 물론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일본어로 바꾼다면 역시 '노르웨이의 숲'이 가장 원어의 뜻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된다. 노르웨이 사람에게서 들은 말인데, 노르웨이 어의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말에는 정말로 그것에 가까운 분위기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레논인지 매카트니인지는 과연 그 뜻을 알고 있었을까?
하도 하루키 하루키해서~그냥봤는데~~저는 워낙에 일본작가 책은 안좋아하는데~(몇몇작가는 괜찮은사람도 있지만)역시 하루키도~~나의 피나는 인내력에도 불구하고 반틈만 읽고 말았습니다.혹자는 프랑스의 삼류소설에 이런책이 많다고도 하는데~암튼 하루키가 왜 인기가 있는지 아직도 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비틀즈를,, 아시나요?!?!?!........
그럼요 저는 이 책 읽고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곡을 듣기위해 비틀즈의 앨범을 뒤져서 샀는걸요.
하도 하루키 하루키해서~그냥봤는데~~저는 워낙에 일본작가 책은 안좋아하는데~(몇몇작가는 괜찮은사람도 있지만)역시 하루키도~~나의 피나는 인내력에도 불구하고 반틈만 읽고 말았습니다.혹자는 프랑스의 삼류소설에 이런책이 많다고도 하는데~암튼 하루키가 왜 인기가 있는지 아직도 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1년만에 다시 책을 들었습니다. 다시 읽는데도~ 새롭고 좋습니다. 잔잔한 하루키소설을 다시 음미해보렵니다. ^^*!~~~
상실의 시대에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윽
ㅋㅋㅋ 저도 상실의 시대에 관해서 할 말 많아요.. 정말 힘들게 읽은 책인데.. 정말 이해안되는 부분도 많고..가끔은 그런 질문들 속에 하루키가 미워질때도 있어요..^^*ㅋㅋㅋ
이 책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책이라고 해서 읽어봤는데 정말 많은걸 깨달았음 이번에 대학들어가시는 분이라면 한번 읽어보시길
상실..헤어짐..멀어짐..이런것에 대한 느낌들을 애틋하게 느껴볼 수 있어 좋았지만 스토리 자체는 진부한거 아닌가 모르겠네...
한번 읽었을 때와 두번, 또 세번째 읽었을 때 느껴지는 점이 참 달라요. 제가 최고로 꼽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