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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능진(1899년 ~ 1951년)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대한민국의 경찰이다.
1899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1937년 안창호와 함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8·15 해방 직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부장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9월께 소련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뒤 미군정에 의해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발탁됐다. 그러나 1946년 조병옥의 친일 경찰 등용과 부패에 항의하다가 경찰 간부직에서 밀려났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5.10 총선거에 이승만이 출마한 동대문 갑구에 입후보하려 했으나 서북청년회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지휘 아래 경찰의 잇단 방해로 후보 등록이 취소되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극적으로 후보 등록을 했다. 추첨에 의해 기호 1번이 된 최능진은 선거가 시작되자 자신의 독립운동 경력, 친일 경찰 처벌 요구등으로 부각되며 인기가 아주 높았다. 이 때문에 이승만의 당선을 위협하는 ‘정적’으로 부각됐다고 한다. 그러자 동대문경찰서장 윤기병은 경찰을 동원하여 본인이 스스로 날인하지 않았다는 추천인들의 진술을 받아 선거관리위원장 노진설 대법관을 찾아가 등록을 무효화시킬것을 요청했고, 선거 2일전인 5월 8일 선거관리위원회는 추천인 200명 중 27명이 본인 날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최능진의 입후보 등록 취소를 통보했다. 이에 최능진은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할 때 서재필을 옹립해 또다시 이승만에 대항했다.
결국 이는 초대 대통령 당선된 이승만에 눈밖에 나게 되어버리고 그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달 반만에 “국군 안에 혁명의용군을 조직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한국전쟁이 터진 뒤 인민군 치하 서울에서 정전·평화 운동을 벌인 최능진은 결국 그 일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를 조사한 방첩대(CIC)는 일제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인 김창룡이 이끌고 있었다. 1951년 2월 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서 처형당했다.
[편집] 가족 관계
- 아버지 : 최경흠
- 아내 : 이풍옥
- 형제 : 최능찬, 최능현, 최능익
- 아들 : 최필립(장남), 최만립, 최봉립, 최화선, 최자립
- 손자 : 최우석 (조선일보 기자)
- 최필립 기업인 , 특수단체인
- 출생1928년 8월 6일
- 출생지대한민국
- 소속정수장학회 이사장
- 경력정수장학회 이사장
학력
- |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 |
- |
연세대학교 대학원 |
경력
2005 ~ |
정수장학회 이사장 |
1996 ~ 2002 |
월드컵조직위원회 위원 |
1993 ~ |
대현농수산 회장 |
1990 ~ |
리비아 대사관 대사 |
1971 ~ |
남북적십자회담 사무국 파견 |
1963 ~ |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영사 |
1961 ~ |
외교통상부 공무관 |
첫댓글 이런 것도 많이 알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필립이라는 분이 어떤 인물인가를 알리는 것도 오해를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트윗에 널리 알려 주시길.
특무대 출신으로 방첩대장, 김창룡 중장은 군수물자 빼돌리고 군량미를 훔쳐서,
이승만에게 아부해서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김창룡은 강문봉에 의해 암살 당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