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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1)
“안돼요. 경수씨, 절대로 이렇게 헤어질 수 없어요. 난, 난 어쩌라고요?”
“미연아, 더 이상은 안 돼. 더 지속되다가는 너와 나는 끝장이라고. 제발 내 말대로
해야 돼. 미연아, 제발......”
“경수씨이........ 흐흐흐흐흑.”
여인은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애원하다시피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고 남자 역시
억지로 슬픔을 인내하는 눈치지만 눈가가 촉촉이 젖어있다.
여인이 상당히 취한 것으로 보아 평소에 마셔오던 주량의 서너 배 쯤은 마신 듯
보였다. 마스카라가 녹아 볼을 타고 내리며 여인의 얼굴이 더욱 서럽게 일그러졌다.
남자는 자주 헛기침을 해대며 천정을 올려다보고 담배연기만 연신 뿜어 댔다. 카페
종업원이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행동을 예의 주시하면서 괜히 홀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주말 오후지만 카페에 손님들은 별로 없었다.
남녀는 한 살 차이로 고향이 같았다.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다른 마을에 살던
두 사람은 고등학교 다닐 때 우연한 기회로 첫사랑의 연인이 되었다. 남자는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하였고, 여인은 집안 사정으로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가는 길이 어긋나면서 두 가슴에 상처는 해가 갈수록 깊어
져만 갔다. 남자가 군대를 다녀온 뒤 여인의 혼인 소식을 들었고 남자는 오랜 세월
가슴에 응어리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담배 한가치를 다시 피워 문 남자는 일 년 전 낙엽 지던 때의 가슴 떨리던 기억을
상기해냈다. 상대(商大)를 졸업하고 국내 굴지의 무역회사인 S기업에 입사한
경수는 지난 20년동안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 회사에서 같이 입사한 동료
열두 명 중 가장 먼저 대리가 되었고 가장 먼저 차장이 되어 동료와 주변의 부러움과
질투를 동시에 받아야 했다. 경수의 가슴에는 미스코리아 출신의 아내가 있지만
첫사랑의 미연이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늘 가슴 깊은 심연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경수는 업무에 시달리다가 머리를 식힐 겸 웹서핑을 하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미연’이란 이름 석 자를 인터넷 검색창에 써 놓고 엔터를 눌러보았다. ‘이미연
칼국수’, ‘이미연 부띠끄’, ‘이미연 떡집’. ‘미연네 빵집’, ‘이미연프로헤어’, ‘미연
장식’, ‘미연비빔밥’ 등 수많은 상호와 다양한 홈페이지와 블로그가 검색되었다.
경수는 검색된 자료들은 하나하나 클릭해 보았다. 그러던 중 두 홈페이지에 흥미를
가지고 자세히 읽어 보았다. 한 홈페이지는 대략적인 정보만 있을 뿐이었고 또 다른
홈페이지는 역도 및 주인의 인사말과 취급하는 상품명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을
곁들여 꽤나 정성을 들였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꾸며 놓았다.
물론 경수는 첫사랑 여인의 이름을 딴 다양한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통하여
첫사랑을 찾겠다는 뜻은 없었다. 경수는 관심을 가지고 두 번째 홈페이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S시에 소재한 미용실인데 홈페이지에 올려진 미용실 간판과 내부가
꽤 깔끔해 보였다. 여러장면의 사진을 보다가 그만 경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미연’ 분명히 첫사랑의 여인이 손님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그러나 사진만으로 25년 전의 여인을 알아본다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따를 수도
있었다. 여자는 헤어스타일 하나만 바꾸어도 남자들은 잘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
이다. 언젠가 아내가 결혼 이후 한 번도 바꾸지 않던 긴 머리를 짧게 하고 파마를
한 모습을 보고 경수는 아내가 다른 여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화장을 진하게 하면 남자들은 같은 이불을 수십 년 동안 썼어도 잘 알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더욱이 희미한 불빛은 나이트클럽에서 아내에게 유혹의
손길을 보낼 수도 있는 해프닝도 벌어질 수 있다.
‘내가 뭘 잘못 보았겠지.’
경수는 결혼 한 한동안은 어쩌다 들려오는 미연의 소식을 풍문을 통하여 알 수
있었다. 그러다 10년 전 부터 풍문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향의 동창이나
후배들에게 그녀의 소식을 알아본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벙어리 냉가슴 앓듯 말 못하고 그녀의 소식이 풍문
으로 다시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진을 통해본 여인의 모습이 자꾸만 경수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녀가 동창이라면 얼른 앨범을 보면서 홈페이지에 여인의
사진과 대조해 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겠지만 기억에만 의존해야하는 상황
에서 미용실 홈페이지에 사진 속 여인이 첫사랑의 여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S시면 서울서 가까운 곳인데......’
경수의 머리에는 온통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미용실 여주인의 모습으로 꽉 차
있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미연과 그녀가 너무나 닮아 있었다. 미연의 트레
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오뚝한 코와 반달눈썹이 너무나 흡사했다. 아니라고
속으로 부인하면서도 경수는 자꾸만 미용실 여주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다가
왔다. 괜히 보았다고 후회하면서도 다시 그 미용실 홈페이지를 열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녀가 틀림없어 보였다.
‘한번 찾아가 볼까? 아냐, 동명이인이 분명할 거야.’
경수는 머리를 흔들며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였다.
2
“김대리, 나 갑자기 집에 일이 있어서 오후에 조퇴해야 하니까 결재할 거 있으면
12시 이전에 올려요.”
지난 일주일 내내 경수는 미용실 여주인의 사진을 수백 번도 더 보았다. 그렇지만
홈페이지에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주인을 바꿔달라고 하여 고향이 어디며,
혹시 박경수를 아느냐하는 시시콜콜한 내용을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경수는 오후에
조퇴(早退)를 하고 S시로 가보기로 했다. 도저히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궁금해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혹시, 미용실 여주인이 미연이라면 어떻게 하지?’
전철에 몸을 실은 경수는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25년 만에 불쑥 나타난 자신을
보고 여인이 놀라거나 모르는 체 하거나, 그 여인이 첫사랑이 맞는다하여도 지나간
사랑타령에 신경 쓸 여유가 없거나 또는 세파에 휩쓸려 옛 추억 따위는 하찮은 것쯤
으로 생각한다면 괜한 발걸음이 될 수 있고 여러 사람 앞에서 망신만 당할 수 있을
거란 판단이 들자 전철에서 내리고 싶었다. 그래도 기왕 첫사랑을 찾고 싶어 나선
발걸음인데 되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불성실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당시에 나 혼자만 미연이를 좋아했던 건 아닐까? 아냐, 분명히 나와 만날 때마다
나를 좋아하는 눈치였고, 핑크색 종이에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랬어. 내 기억이
변한 것은 아니겠지?’
전철 창밖으로 낙엽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직은 푸른 기운이 약간은 남아 있는 상태
지만 이미 세상은 갈색의 향연에 취한 듯 해 보였다. 낙엽 지는 계절에 첫사랑을 찾아
간다는 것이 께름칙했다. 경수는 전철이 좀 천천히 달려주길 바랬다. 처음 그녀를
찾아보기로 마음 먹었을 때는 당장에 달려가 보고 싶었지만 막상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전철에 몸을 싣자 묘한 생각이 들었다.
경수의 마음과 달리 전철은 한 시간 만에 S시에 곧 도착하였다. 미리 메모해 온
미용실에 전화를 걸어 전철역에서 찾아가려면 어떻게 가느냐고 묻자 상냥한 아가씨가
12번 버스를 타고 네 번째 정거장에서 내리면 길 건너에 있다며 친철하게 알려주
었다. 경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파란 하늘에 여름보다 더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만약 미용실 여주인이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첫사랑의 미연이 아니라면 실망감은 충격 이상의 혼란을 가져올 수
있고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하여 한동안 자괴감에 빠져 공황상태로 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서울로 돌아갈까?’
담배 한 개비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래,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가보는 거야. 그녀가 아니라도 절대 실망하지 말아
야지.’
버스도 전철만큼이나 빨리 달렸다. 금방 네 번째 정거장에 도착하였다. 경수는
네 번째 정거장에서 차마 내리지 못하고 한 정거장 더 가서 버스에서 내렸다. 길을
건너 왔던 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혹시 그녀의 미용실이 가까우니 지나가는 행인 중에 그녀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
었다. 그러나 10분 동안 수십 명의 중년 여인이 스쳐지나갔지만 인터넷에서 본
그녀와 비슷한 여인은 없었다.
100미터 앞쯤에 인터넷에서 보았던 미용실 간판이 보였다. 붉은색 바탕에 흰색과
검정색 바탕의 글씨와 로고가 잘 어울려 보였다. 대형 쇼 윈도우가 미용실 내부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었다. 미용실 주인의 취향이 미용실 간판과
쇼윈도에 비친 내부 모습에서 파악이 될 것 같았다. 미용실 안에는 10여명이 넘는
종업원 아가씨들이 똑같은 근무복을 입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십여 명의 손님들이
머리에 큰 전기장치를 쓰고 의자에 앉아서 잡지를 보거나 전화를 하는 모습이
보이고, 네댓 명의 손님들은 노란색 소파에 앉아 잡담을 하고 있다.
그런데 미용실에는 남자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여성전용 미용실이 분명해 보였
다. 요즘은 미용실에서도 남자 손님을 받는 곳도 종종 있어서 경수도 집 근처 미용실
에서 이발을 하곤 했다. 남자 손님이 한 사람이라도 보이면 용기가 날 것 같았는데
불행히 한명도 보이지 않자 경수의 가슴은 마구 뛰기 시작했다. 막상 들어갔다가
남자 손님은 받지 않는다고 하면 미용실 안에 있는 많은 여인들이 자신을 이상한
남자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수는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
갔다.
“어서 오세요.”
이십대 초반의 초미니 스커트를 입은 예쁜 종업원 아가씨가 경수를 보더니 상냥
하게 웃으며반겼다.
“남자 머리도 하나요?”
“네에, 커트 정도는 가능합니다. 잠시만 저 소파에 앉아 기다려주세요.”
밖에서 볼 때보다 막상 들어와 보니 내부는 훨씬 커보였다. 대략 40평 정도는 되어
보였다. 내부 디자인도 반은 중년 취향으로 만들어 놓았고 창 쪽의 20여 평 정도는
의자와 소파 그리고 집기들이알록달록한 색상으로 젊은이 취향으로 꾸며놓아 심플
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미용실 실내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진속의 여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머리 커트하러 온 중년의 남자 손님이 여주인을 찾는 것이 우습워 보일 것 같았다.
경수가 신문 한 면을 다 보았을 때 인터넷에서 본 여주인이 들어왔다. 어디 외출
했다가 온 듯 베이지색 버버리를 입고 있었다. 종업원 아가씨들이 여주인이 비운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여인에게 보고하자 여인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실 같은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손님, 15번 의자에 앉으세요.”
“저어, 아가씨.”
“네?”
“저는 방금 들어 온 분한테 서비스를 받고 싶은데요?”
“마담 언니한테요?”
“먼젓번에도 그분이 제 머리를 컷트해주셨거든요.”
“아, 그러세요? 그럼 잠깐 기다려보세요.”
종업원 아가씨는 씨익 웃으면서 내실 쪽으로 갔다.
- 계속 -
첫댓글 잘~~고맙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