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님이 한번은 민생순시차 찜질방에 가셨답니다. 거기서 박카스를 팔더래요. 땀도 좀 흘리셨겠다 박카스 한병을 사 드셨어요. 그리고 한참있다가 한병 더 드셨는데, 머리가 어찔하더랍니다. '아, 박카스도 함부로 슈퍼에서 팔도록 해서는 안되겠구나.' 장관님이 그때 굳히신 생각입니다."
2008년은 액상소화제 등 일부 일반약을 약국 밖으로 내보내는 정책이 사실상 8부능선을 넘었던 때로 알려져 있다.
약사사회를 제외하고는 주무부처인 복지부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전재희 전 복지부장관이 부임했고, 복지부 입장이 슈퍼판매 반대쪽으로 180도 전면 수정됐다.
국회 한 보좌진은 "전 전장관은 보건복지위에 몸 담았을 때도 혈액안전관리 등 보건의료분야의 안전관리 쟁점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고 의정활동 과정에서도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던 인물"이라면서 당시 입장선회 배경을 설명했다.
실제 전 전장관은 재임기간 내내 영리의료법인 도입이나 일반인 병의원-약국 개설, 일반약 슈퍼판매 등 경제부처의 파상공세에 맞서 공공재이면서 안전관리가 강조돼야 할 보건의료분야의 특수성을 지켜냈다는 나름의 평가를 받고 있다.
"박카스도 남용하면 혈압환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박카스는 일반약 약국외 판매가 현실화될 경우 액상소화제와 더불어 제 1순위로 슈퍼로 내보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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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퍼판매가 금지돼 있지만 이미 일반약 불법유통 사례는 빈번하다. 사진은 서울의 한 지역약사회가 적발한 슈퍼나 간판대 불법 판매 의약품들. |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관계자는 "박카스에 카페인이 들어 있어서 중독성이 강하고 각성작용을 한다는 것은 상식"이라고 운을 뗐다.
그는 "그러나 권장량대로 성인은 하루 한병정도는 괜찮지만 중독성을 보일 경우 호흡이나 심장박동이 빨라지게 돼고, 혈압상승을 유도할 수 있어서 고혈압환자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편의점에서 음료처럼 생각없이 사먹은 박카스 몇병이 특정병력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심각한 위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시 슈퍼판매 단골매뉴인 진통제 중 대표약물인 '타이레놀'을 보자. 미국 워싱턴대 연구진이 의학저널 '중독학 화학연구'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다량의 진통제와 카페인을 동시 복용할 경우 간 손상 위험이 커진다.
"진통제, 카페인과 병용시 간 손상 위험 3배 늘어" 타이레놀의 성분인 아세트아미노펜이 분해될 때 생기는 독성 부산물의 양을 카페인이 3배 이상 증가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소프로필안티피린(IPA) 성분이 함유돼 퇴출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국민 두통약 '게보린'은 애주가들이 음주 후 숙취해소를 위해 자주 찾는 약이다. 하지만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은 알코올과 만나면 간괴사 같은 심각한 독성을 일으킬 수 있다.
또 진통제 아스피린의 장출혈 부작용 위험은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감기약은 더 심각하다. 미국 보건부 산하 약물남용정신보건국 조사를 보면, 미국에서 12~25세 연령대 청소년 및 청년층 가운데 5.3%인 3100만명 가량이 일반판매되는 감기약을 오남용하고 있다.
시럽제나 정제타입의 감기약은 과량복용시 환각, 시력손상, 심한 복통, 구토, 폭력성을 동반한 근육경련, 정신착란 등 중등도 부작용을 수반할 수 있다.
국내 대표 감기약이었던 콘텍600이 제제에 함유된 페닐프로판올아민(PPA)의 성분의 뇌졸중 부작용 우려로 2004년 갑자기 시판금지된 사례는 유명하다.
오랜기간 부작용이나 이상반응 보고가 없었다고 해서 슈퍼에서 팔 수 있다는 확신자체가 성립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다.
"해열진통제-진해거담제 등 감기약 부작용보고 빈번" 더욱이 이숙향 아주대약대 교수가 민노당 곽정숙 의원실의 의뢰로 지난해 분석한 '약물유해 반응으로 보고된 사례 의약품 빈도분석' 결과를 보면, 아스피린 성분은 2007년부터 2010년 상반기까지 1753건, 아세트아미노펜은 1641건이 보고돼 전체 의약품 성분 중 5~6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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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숙향 교수 보고서상의 유해반응 보고순위. |
보고서는 특히 일반적으로 감기증상에 사용되는 해열진통제나 항히스타민제, 진해거담제 비율도 높았다고 지적했다.
일반약 슈퍼판매 논리는 이런 잠재 위험에도 불구하고 편의성과 접근성을 위해 슈퍼에서 판매하도록 해야한다는 주장이다.
가정상비약 시민연대 조중근 상임공동대표는 "안전성이 고려돼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교통사고를 우려해 비행기나 자동차를 타지 못하게 한다면 말이 되겠나. 위험보다 편익이 크다면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연대의 주장은 가정상비약 약국외 판매허용, 자유판매약을 포함한 의약품 분류체계 변경, 의약품분류 및 제반사항 협의를 위한 특위 구성 등이 골자다.
조 상임대표는 "미국이나 일본, 영국, 독일, 캐나다 등 상당수 선진국들은 가정상비약을 약국이 아닌 일반소매점 판매를 허용하고 있다"면서 "약국에서만 판매를 제한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복지부가 최근 최영희 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OECD 회원국 중 일반약 약국외 판매를 허용하는 국가는 미국과 일본 등 21개 국가로 금지국가 11곳보다 더 많다.
"약국외판매, OECD 회원국 중 21곳은 허용-11곳은 금지" 대한약사회는 이에 대해 "외국의 경우 약국당 인구수가 5천명 이상인 경우 의약품에 대한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슈퍼판매를 허용하기도 하지만 한국처럼 약국당 인구수가 2300명 수준인 국가에서는 허용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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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자원 설문결과 중 일부. |
유럽연합의 경우에도 27개 국가 중 15개 국가가 약국외 판매를 금지하고 있고, 2개 국가는 약사에 의해서만 관리·판매가 이뤄져 실질적인 슈퍼판매 허용국가는 10개국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소비자원 김재영 선임연구원은 "(약사회의 주장은) 인구수에 대한 단편적인 기준일 뿐이다. 국내에서도 당장 전국 215개 기초행정구역(읍면)에는 최소한의 약품을 구입할 수 있는 시설이 없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EU 국가 이외에 다른 국가를 고려해 보면 일반약 슈퍼판매를 실시하는 나라가 더 많기 때문에 약사회의 반박논리는 옹색해 보인다는 것이다.
"국내 215개 읍면지역, 의약품 살 곳이 없다"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관계자는 이에 대해 "우리나라의 1인당 약국수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편의성과 접근성을 지적하는 의견을 약사사회는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면서 "똑같은 방어논리만 내세울 게 아니라 당번약국 의무 및 확대시행과 더불어 복약지도로 약사직능의 대국민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소비자원 김재영 선임연구원 또한 "소비자는 일반약 약국외 판매도 원하지만 공휴일이나 심야시간 때 약국에서 일반약을 구입하고 싶어하고 약사의 설명이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소비자원 설문결과 응답자 71.2%는 일반약 약국외 판매가 필요하다고 답했지만, 심야 및 공휴일 구입불편 해소방안으로는 '소매점 판매' 32.4%, '심야 및 공휴일 당번약국 확대시행' 32%로 약국이용 수요가 만만치 않았다.
심야나 공휴일에 문을 연 약국이 있다면 가까운 슈퍼보다는 동네약국을 이용하겠다는 국민들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얘기다.
지난 국정감사에서 의약품들의 안전성 문제를 이슈화했던 한 야당 보좌진은 다른 측면에서 미국이나 일본과 한국을 같은 선상에서 놓고 볼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2004년 기준 인구 100만명당 의약품 부작용 보고사례를 보면, 미국은 1454명, 일본은 237명이지만 한국은 19명에 불과하다.
"부작용 관리체계 걸음마 수준…아직은 시기상조" 이 같은 결과는 미국 FDA나 일본 후생성 의약품정보센터는 신약정보와 처방약 등에 대한 부작용 사례를 조직적으로 수집하고 분석하지만, 식약청은 불과 두 명이 관리한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이 보좌진은 "의약품 사후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한국 정부의 안전성 관리수준과 시스템을 놓고 슈퍼판매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라고 주장했다.
만약 다른 나라 수준에서 자유판매약을 허용하려면 정부의 의약품관리체계를 선진국 수준까지 높이고 의약품 적정사용과 안전사용에 대한 국민적 마인드를 제고시키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고 그는 제안했다.
이숙향 아주약대 교수 또한 "한국의 의약품 부작용 관리와 대응시스템은 아직 걸음마 단계"라면서 "당분간은 유통채널을 약국으로만 제한하고 시스템 구축에 공을 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