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원래 장승배기 장승으로 더 유명하다. '정조 전설'에 따르면 화성에 있는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행차 하던 정조가 잠시 쉬어가던 곳이 지금의 장승배기였다.
정조 시대에 장승배기는 인가도 드물고 아름드리 나무숲이 우거진 곳이라,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이에 정조는 숲이 울창하고 인가도 드물어 으슥한 그곳에 장승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그러면서 하나는 남자의 형상을 한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다른 하나는 여자의 형상을 한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이름 붙이도록 명했다는 것이다.
장승배기 장승은 왕명에 의해 만들어져서인지 다른 장승들하고는 급이 달라 전국의 장승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대방장승'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방동이라는 지명이 나왔다는 설도 있지만, 세워진 장소부터 대방동이 아니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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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만 수난을 당했을까
장승배기 장승은 1930년대 일제가 '미신타파'라는 명분으로 전국의 장승을 없앨 때 수난을 당하면서 없어진다. 장승이 사라지는 데에는 초기 미국 선교사들의 역할도 컸다. 당시 기독교 선교사들이 샤머니즘과 민간신앙을 구별하지 않고 자신들의 선교활동에 장애가 된다고 장승제, 산신제, 성주·터주 등을 배척하였는데,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선교사들의 몰이해와 편견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다.
장승배기 장승은 해방 이후 복원되지만, 6·25한국전쟁 때 다시 사라진다. 지금의 장승배기 장승은 1991년에 다시 복원되면서 새로 세워진 것이다.
1982년 장승공원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 동작도서관이 건립된 관계로 오래 가지 못하고, 지금의 자리에 장승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도 장승배기 장승의 안착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개신교 일부에서 '우상숭배'라며 장승 설립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한겨레신문>의 <장승 개신교 반대로 반년 째 낮잠>(1991. 10. 9)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한겨레신문>은 "개신교 동작구교구협의회 소속 목사·신도들이 '우상숭배'라며 반발하고 나서 한달 이상 장승 건립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데, "장승 건립에 반대하는 침묵시위를 계획하는 등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고 당시 기독교계의 움직임을 전하고 있다.
개신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겨우 장승을 세우지만, 며칠 후에는 실제로 <서울동작구기독교청년회> 소속 회원 70여 명이 <장승철거를 위한 연합기도모임>을 거행하기도 한다. 결국 새로 세워진 장승은 두 차례에 걸쳐 불에 타기도 하고 톱에 잘리기도 하는 수난을 당한다.
<경향신문>의 <장승백이 장승 복원 이번에 세 번째...>(1991) 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지난 1월 23일 새벽 신원불명자에 의해 전기톱으로 몸체가 잘리는 등 수난을 당했던 동작구 노량진동 동작도서관 앞 지하여장군이 3일 복원됐다"면서 이는 "한국전쟁 동안 없어졌다가 지난 91년 10월 처음 원형 회복된 이 장승은 그 후 10일 만에 몸체 전부가 방화를 당한 뒤 2번째 복원된 데 이어 3번째 제 모습을 찾았다"는 것이다.
첫댓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 아니라 알려하제 않았던 이민족의 침략이 얼마나 많은 대륙을 망가뜨렸는지를 떠올리면 아찔해. 거기다가 여성 지우기까지.. 개신교는 대체 어떤 사랑을 전파하려 하는 건지 의문이야
미치겠다 널리 알려졌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