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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유선방송 "디스커버리 채널"에서는 battlefield detective프로로서 스페인 아르마다 함대가 어찌 해서 전멸하였는지에 대한 현대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여주었다.
1588 년 스페인은 유럽에서 최대 강국이었다. (임진왜란과 거의 비슷한 시기이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금은보화로 스페인 왕은 엄청 부자였고, 그 육군은 세계최강이었다.
스페인 육군은 네델란드, 독일 등지의 신교도들의 군대와 싸워 연전연승하고 있었다. 스페인령 네델란드에는 파르마 공이 지휘하는 스페인 정예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당시 스페인군에 저항하는 네델란드 독립군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음악가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 이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로서 신교도의 국가로서 새롭게 발전하고 있었다. 국민들의 구교도에 대한 공포는 바로 전 시대 "피의 메어리 여왕" 치하에서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피의 메어리 여왕은 국내의 신교도들을 마구 학살하였던 것이다. 메어리 여왕이 죽은 후 간신히 살아남아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는 신교를 장려하고 구교를 배척하였다. 당연히, 구교도의 수장인 스페인 왕 필리페와 대립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지금의 자본주의-공산주의 간 대립처럼 신 구교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극심하였다. 영국 국민들은 막강한 스페인 군의 침공에 의해 신교도들이 마구 학살당할까봐 매우 걱정하였다.
스페인의 생명줄은 신대륙에서 오는 수송선들에 있엇다. 영국의 해적 드레이크는 이 수송선들을 마구 공격하고 약탈하였다. 필리페는 신교도 들의 해군력을 꺾기 위하여 영국에의 침공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페인과 그 동맹국이 가진 함선들을 모두 끌어모았다. 이들 대함대는 아르마다라고 불렸다.
이 아르마다로 도버해협을 지나 네델란드로 간다. 거기에서 파르마 공작이 거느린 육군을 배에 싣고 다시 해협을 건너 영국의 켄트에 상륙하여 런던으로 진격한다는 것이다.
스페인 육군은 무적이므로 이들이 영국에 상륙하면 영국은 끝장날 것이다. 그 당시 영국에는 상비군이 없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드레이크는 이들 아마다가 영국 해안에 닿기 전에 막아야한다.
당시 영국과 스페인 군함의 비교가 소개되었다.
스페인군의 함선은 키가 크고 벌어진 형상인 반면, 영국 함선은 새로운 설계 혁신으로 더욱 유선형으로 날씬하며 키가 작았다. 당연히 영국 함선이 스페인것 보다 근대식이고 더 날렵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영국의 승리가 가능할까?
영국은 그 당시 우수한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캘버린포라 하는 이 대포는 포신이 길어서 사정거리가 길었다.
실제로 이 대포의 복제품을 만들어 성능시험을 해보는 것을 보여주었다.
켈버린포의 포탄의 속도는 초속 500 미터, 사정거리는 450 미터에 달했다. 12 kg의 철포탄이 초음속으로 날아가면 탄착점의 목선은 큰 구멍이 날 것이다.
문제는 정확도이다. 그 프로에서는 실제로 과학자들이 이 대포를 가지고 150 미터 전방의 목표를 향하여 맞히는 실험을 해보았다. 기묘한 것은 컴퓨터 시대에 익숙한 과학자들도 정작 이 대포로 맞히는 실험을 할 때에는 별 수 없이 대포의 각도를 여러번 시행착오 되풀이 하면서 암산으로 각도를 계산하여 대포를 조준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150 미터 전방의 목표를 도무지 맞히지 못하였다. 좀 더 가깝게 목표를 가져다놓아도 마찬가지였다.
포알의 방향은 대포의 각도 뿐 아니라 포구 속에 남아있는 화약 찌꺼기에도 좌우되었던 것이다.
"평지에서도 이렇게 맞추기가 힘든데, 그 당시 출렁거리는 함선 안에서 적함을 향해 맞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겠습니다..."
이런 실험은 같은 시기 임진왜란 당시에 사용된 조선의 화포를 가지고 직접 발사 실험을 하는 장면을 KBS 역사스페샬에서 본 적이 있다.
다만 역사스페샬에서는 정확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같은 시기였으니까 조선의 거북선에 달린 화포도 역시 그 정확도가 캘버린 포와 오십보 백보였을 것이다....당시 조선 해군의 고충을 십분 알 수 있었다....
스페인 해군의 전법은 지중해에서와 같이 적함에 부딪치고 적함에 올라타 육전과 같이 육박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영군 해군은 이에 대하여 대포를 쏘아 적함을 부숴버리는 것에 전술을 두었다.
이것은 기묘하게도 같은 시기 임진왜란 때에 조선군과 왜군의 해전 전술과 똑같다. 조선 해군도 왜군에 대하여 육박전 보다는 대포로 부숴버리는 것을 장기로 하였던 것이다. 같은 시기의 것이니 퍽 흥미롭다...
1588 년 도버해협에 아마다의 거대한 모습이 나타났다. 그런데 플리머스에 정박한 영국 해군은 가만이 있을 뿐이다. 드레이크도 아무 반응 없이 볼링 경기에 열중하고 있다.
이런 영국 사령관의 태연한 모습이 후에 영국 국민들에게 전설적인 영웅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드레이크는 과연 승산이 있어서 태연한 모습을 보인 것일까?
그 당시 스페인 함선들의 항해일지, 날씨 기록을 토대로 하여 당시 도버해협의 천기도를 그릴 수 있었다.
아르마다가 도버해협으로 다가올 때에 유럽대륙에 고기압이 자리 잡아 바람은 남서풍이었다. 아르마다는 바람을 등에 지고 순조롭게 영국으로 전진할 수 있다.
반면에 플리머스항의 영국 함선들은 꼼짝할 수 없다. 게다가 조류까지도 영국군에 불리하였다.
드레이크로서는 가만히 손놓고 있는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르마다는 이런 기회를 만나 상륙을 기도하지 않고 계속 동쪽의 네델란드쪽으로 향한다.. 스페인왕의 작전명령은 네델란드에 주둔하는 파르마 공과 만나라는 것이었다. 메디나 시도니아 제독은 그 명령을 어기고 맘대로 함대를 영국에 상륙시킬 수 없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현지 사정을 잘 아는 현지 사령관에 재량이 주어지고 작전도 거기에 맞게 수정되어야 하는데 이 당시 함대 사령관은 스페인왕의 명령만 따르는 경직된 태도만 보였다. 스페인군은 황금과 같은 상륙기회를 놓쳤다.
네델란드쪽으로 향하는 스페인 해군의 뒤를 이제는 영국 함선들이 뒤쫓는 상황이 되었다. 바람을 등지고 있는 영국 해군은 바람을 마주보게 되는 스페인 해군에 대하여 여유있게 공격을 가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스페인군은 초승달 모양의 진을 짜서 영국 해군을 방어한다. 이런 잘 짜여진 학익진 때문에 영국 함선들은 적함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다. 당연히 영국 해군의 대포 사격은 정확하지 못하여 적에게 별 피해를 주지 못하였다...
순조롭게 네델란드 까지 항해한 아르마다는 이제까지는 상당히 운이 좋았다. 그런데 네델란드 건너 해상에 도착해보니 거기에는 아르마다가 정박할만한 항구가 없다. 네델란드 저항군의 방어로 인하여 안전한 항구가 없어서 파르마공과의 합류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제 기상이 변하여서 저기압이 되고 바람은 북서풍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조류도 스페인군에 역방향이어서 아르마다는 네델란드 해안에 발묶여서 꼼작을 할 수가 없다. 아르마다는 이제 운이 다하였던 것이다.
드레이크는 이 기회를 활용하였다. 화염선을 아르마다 한 가운데로 밀어넣었다. 이 땨문에 아르마다는 대형이 깨어졌다. 영국 해군은 찰나를 놓칠새라 잽싸게 바짝 접근하여 스페인 함선들에 대포알을 선사한다.
이번에는 근거리에서 영국 대포가 아주 정확하게 적함에 맞았다. 스페인 함선들은 수없이 명중탄을 얻어 맞고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의 탄약은 충분치 않았고, 아르마다는 여전히 건재하였다. 그들은 바람의 방향이 다시 남서풍으로 바뀌자 잽싸게 대양으로 빠져나와 더 동쪽으로 향하였다.
이제 시도니아 제독의 과제는 아르마다를 안전하게 스페인으로 돌려 보내는 것 뿐이다. 그런데 도버해협을 거슬러 내려갈 수는 없고,. 결국 영국 섬의 동쪽과 북쪽을 돌아 아알랜드의 서쪽을 끼면서 남하하는 크게 우회하는 코스를 택할 수 밖에 없다....그 바다는 스페인해군에게는 미지의 춥고 파도치는 험한 바다였다...
시도니아 제독은 함선들이 아일랜드의 거친 해안의 암초에 부딛쳐 난파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아일랜드섬에서 멀리 떨어져 항해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종래에는 이들 함선들은 모두 아일랜드 해안으로 떠내려와 난파하고 말았다. 수장된 스페인 해군의 숫자는 아직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약 3000 명? 그 중에는 일찌기 지중해에서 숙련된 엘리트 선원들, 터어키군과의 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장교들을 비롯하여, 스페인 제국의 각종 인재들이 수없이 포함되어 있어서 스페인은 큰 타격을 입어 그 국운이 기울게 되었다.
무엇때문에 이들은 그런 대 재앙을 맞았던 것일까?
과학자들은 스페인 해군의 항해일지를 연구한 결과 그 일지의 기록이 부정확함을 알았다.
아일랜드 섬 북쪽에 집결한 아르마다는 자기들이 충분히 서쪽으로 항해했다고 생각하고 남쪽의 대서양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런데 그들의 앞에는 대서양이 아니라 아일랜드의 거친 해안의 암초들이었다...
실상 스페인 해군은 심각한 navigational error를 범한 것이다. 무엇때문에 이렇게 되었을까?
과학자들은 멕시코 만류를 그 범인으로 지복하였다. 아일랜드 섬의 북쪽을 끼고 서쪽으로 항해하던 아르마다는 열심히 항해했다고 기록에는 적었으나 이 멕시코 만류 때문에 실상은 그 자리에서 오히려 뒤로 밀렸던 것이다.
이것은 기름 유출 방향과 조류를 연구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시뮬레이션 해보므로 확실히 드러났다.
아일랜드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항해하던 아르마다는 육지가 안보이므로 자기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엇다. 멕시코만류의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그토록 높은 위도의 지점까지 그 해류가 영향을 미칠줄은 몰랐다. 게다가 멕시코만류는 이 지점에서는 끝자리로서 상당히 와류가 심하다.
오랜 항해와 전투로 고되고 지친 스페인 선원들로서는 그런 조류와 바람 떄문에 자기들의 배가 뒤로 밀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없었고, 알았대도 이겨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대서양으로 나와 스페인으로 향하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남하하기 시작하였던 이르마다는...
뜻밖에도 전방에 아일랜드의 거친 해안이 나타났고, 지칠대로 지친 선원들은 그것을 피하고 비껴갈 엄두도 기력도 상실한채, 무력하게 그들 함선과 함께 해안의 암초들에 격돌해갔던 것이다...
아르마다 의 함선들중 무사히 스페인으로 돌아간 함선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영국은 신의 바람으로 적들의 배들이 난파되었다고 신교도들의 신앙심에 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허지만, 아르마다의 참극은 비록 예상치 못하였었지만 원래 그 지역에 존재하였던 자연 조건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 프로는 이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난 이 아르마다의 사건이 조선의 이순진 장군의 거북선들과 같은 시기의 것이었다는 데에서 퍽 흥미로왔다.
임진란 당시의 조선 해군도 영국 해군과 같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대포는 정확치 못하였을 것이고, 남해의 조류는 무척 복잡하였다.
왜군이 스페인군처럼 육박전을 장기로 한다면 이순신의 거북선은 영국군처럼 대포로 적을 공격하는 전법이다... 이순신의 명량해전의 승리도 어쩜 이런 조류를 잘 활용하여 거둔 승리일 것이다.
불과 10 여척의 조선 수군은 조류를 타고 왜군의 함선들을 코너로 몰았고, 조류때문에 꼼짝할 수 없게 된 왜군 함선들은 대포 사격에 의해 큰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무사히 빠져나온 적선들도 조류에 밀려 해안과 섬의 암초에 걸려 좌초되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이건 기적이다" 라고 난중일기에 쓴 대로 10여척의 전선만으로 왜 함선 90 척을 격침한 것은 바로 같은 시기 영국 해군이 아르마다를 전멸시킨 것과 같은 방식으로서, 자연환경을 잘 활용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영국에게 아르마다의 승리가 있었다면 우리 조선에는 명량해전이 있다. 둘 다, 중과부적의 약한 해군력으로 막강한 적들을 참패시킨 것에서 공통점이 있어 흥미롭다...
아쉬운 것은 영국해군과 아르마다가 그들의 항해 전투 일지를 꼼꼼히 남겨놓았으나. 같은 시기 명량 해협의 조선 수군도, 왜군도 그런 충분한 기록을 남겨 놓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춭처:<유용원 기자의 군사세계>, 글쓴이: 이 근호
첫댓글 조선측 함선은 정확히 13척이었다고 기록되어있죠. 왜선은 130척쯤. 아르마다하고 명량해전하고는 비교가 안됀다고 생각합니다. 명량해전은 정말.....그 정말적인 상황에서 그런 승리를 이끌어 낸다는것이...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