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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초기 PC 시장의 경쟁
나. Microsoft의 시작
다. IBM의 PC시장 진출
라. IBM PC의 수혜자들과 IBM PC의 발전
마. 도전하는 소수
바. IBM PC의 발전과 IBM의 전략 수정
사. 386 PC의 등장
아. PC의 업무용 시장 진출
자. NeXT와 486 그리고 호환칩
2. 슈퍼 컴퓨터와 인공지능
3. 본격적인 통신 시대의 개막
가. AT&T의 분할과 본격적인 경쟁
나. To Home, To Office(FTTO, FTTH)
다. 일본의 도전
라. 광통신
마. PC통신
바. 새로운 통신 기술
(1) 다중접속방식
(2) 분산통신, 클라이언트 - 서버통신
(3) 지능망
(4) 이동전화
(5) CT-2
4. 나쁜 해커, 좋은 해커
가. 2세대 해커 - 홈브루(Home Brew) 컴퓨터 클럽
나. 3세대 해커 - 해커들의 게임개발
다. 위험한 해커
(1) 워케임
(2) 바이러스
라. GNU
5. 멀티미디어와 주변기기
가. 컴퓨터 그래픽의 제4기
(1) 홀로그램
(2) 영화와의 결합
(3) 자연과학과의 접목
나. 게임과 MSX
다. XT의 출현과 게임
라. 그래픽 카드
마. 레이저 프린터
6. SW
가. PC용 OS
나. DR-DOS
다. PC용 DB
라. 유니코드
7. WS
다. RISC 기술의 등장
1. 3세대 PC (IBM PC의 등장)
가. 초기 PC 시장의 경쟁
IBM이 16비트 컴퓨터를 처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업체들이 IBM과 경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IBM을 앞지르고 있는 회사도 있었다. 전통있는 사무기기 제조업체인 키드사의 빅터 9000이라는 컴퓨터는 IBM PC보다 휠씬 위력적이고, 저장 및 기억용량이 컸으며 그래픽 기능도 우수했고, 가격 또한 저렴했다. 제니스사의 Z-100은 프로세스를 2개 탑재해 8비트용과 16비트용의 소프트웨어를 모두 사용할 수 있었으며, 가격도 IBM PC보다 낮았다. 휴렛팩커드사의 HP-150 역시 IBM PC보다 성능이 우수할 뿐 아니라 기억 저장용량이 더 크고 터치 스크린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디지탈 이퀴프먼트사(DEC)의 레인보 100 또한 성능과 용량이 IBM 제품보다 우수했고 적극적인 판촉활동을 폈다. 이외에도 제록스, 왕 래버러토리즈, 하니웰사등이 기술이나 가격 우위의 제품을 내놓고 IBM과 경쟁을 벌였다.
그런데 이러한 경쟁의 배후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보이지 않는 역활이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IBM PC의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업체들에게 새로운 PC의 개발을 독려했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DOS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이를 마이크로소프트에 주문하도록 설득했고, 대부분 성공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일단 마이크로소프트의 DOS를 선택하게 되면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인 멀티 워드 와 스프레드 시트인 멀티플랜 의 새로운 DOS 버전의 주문을 할 수 밖에 없도록 했다. 즉 MS-DOS에서만 작동되도록 설계된 것을 통보하는 것이었다. 결국은 응용프로그램도 마이크로 소프트에 주문할 수 밖에 없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물론 마이크로소프트는 한번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기업들이 PC를 만들고 있었지만 대부분 게임용이라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탠디사는 TRS-80모델Ⅱ를 사무용으로 선전, 판매하면서, 작은 회사난 전문가의 사무실에서 필요한 회계업무, 재고정리, 서신작성, 장부정리를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끼워 팔았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눈으로 보는 계산기 의 뜻을 가진 비지칼크(visiCalc)라는 프로그램이었다. 1979년 하버드의 대학원생이었던 댄 브리클린과 보브 프랭크스턴이 애플Ⅱ용으로 개발한 비지칼크는 회계사의 장부정리를 전산화한 것으로, 재정상태를 예측하는데에 이용할 수 있었다. 비지칼크가 소개된 후 1년동안 애플사가 판매한 12만대의 컴퓨터중 약 1/5이 이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위의 회사들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한마디로 IBM과 호환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HP-150같이 터치 스크린 이라는 첨단 기술을 너무 일찍 발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그 필요성을 수요자들이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와 마찬가지로 컴퓨터 센터도 재정적인 문제로 차압이 붙게 되었고, 알렌과 게이츠는 파산을 경험하게 된다. 사업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것은 알렌이 1971년에 전기공학 잡지의 중간쯤에서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인 인텔의 4004칩에 대한 기사를 찾아내면서부터 였다. 1년 뒤 인텔은 8008칩을 발표했고 훨씬 나은 성능과 싼가격으로 컴퓨터 매니아를 사로 잡았다. 바로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전 세대보다 두 배 빨라지면서 값은 떨어진다는 무어의 법칙이 증명되던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 게이츠와 알렌은 8008칩을 360개나 구매해 교통량 측정과 분석용 컴퓨터를 만들고 교통국에 납품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Traf-O-Data'란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비록 Traf-O-Data는 굉장한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있게 한 발판이 됐다. 이 둘의 관심은 컴퓨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포춘이나 비즈니스 관련 잡지를 탐독하며 기업가로서의 꿈을 키워갔다.
1973년 여름 드디어 소형 컴퓨터를 가지고 수력발전 댐의 전기를 분배하고 관리하는 워싱턴과 뱅쿠버의 TRW를 돕는 직업다운 직업을 갖게 됐다. 이렇게 되자 워싱턴 주립대학에 싫증이 났던 알렌은 모든 것을 그만두고 게이츠와 새로운 회사를 차리고 싶어 하였지만, 게이츠의 부모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게이츠를 하바드로 가도록 압력을 가했다.
1년 뒤 게이츠가 법학도를 포기한 그해 겨울 알렌은 그들의 삶뿐만이 아닌 모든 사람의 삶을 바꿔 놓을 기사를 한 잡지에서 읽었다. MITS 알테어(Altair) 8800에 관한 커버스토리였던 이 기사의 제목은 '상업용 모델과 경쟁하는 세계 최초의 미니 컴퓨터 킷'이었다.
알테어는 쉬운 프로그래밍 언어가 없이는 취미로 다루는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었다고 판단한 이들은 1주의 망설임 끝에 평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가 될 거라는 결정을 내린 후 Traf-O-Data 기계를 설계와 함께 알테어에서 동작할 수 있는 베이직 언어를 개발했다. 그 다음 주에 둘은 MITS 컴퓨터에 맞춰 프로그램을 수정했고 계획대로 4월까지 작업을 끝내 MITS가 사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MITS는 알렌에게 일자리를 주고 두 사람에게 Albuquerque 상가에 조그만 사무실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이크로소프트가 탄생하였다.
MITS와 첫번째 계약서에 '폴 알렌과 빌 게이츠가 조그맣고 조용하게(Micro-Soft) 사업을 한다'고 서명했다. 왜 하이픈과 대문자 'S'를 사용했는지 알렌과 게이츠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소스라인 첫줄에도 'Micro-Soft BASIC : 빌 게이츠가 상당 부분을 작성했고, 폴 알렌이 나머지를 만들었다'라고 넣어 두었다. 보스톤으로 돌아와 알렌게이츠로 할까 등등을 세기힘들 정도로 많은 이름을 생각해봤지만 Microsoft라고 당락 짓고(DEC과 IBM과 같은 회사들은 개인의 이름이 들어가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창립주 이후에도 계속 장수할 수 있었다고 생각에서였다), 1981년까지 공식적으로 법인화하지 는 않았다.
알렌이 늦게 일어나는 습관 때문에 게이츠와 불화도 있었지만 이러한 사소한 다툼 말고는 알렌과 게이츠 사이에 불화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초기 마이크로소프트는 낡고 보잘것이 없었다. 가끔씩 영화도 보는 여유도 가졌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고객 앞에서 잠이 들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고 부채를 얻어야 할 정도로 빈곤할 때도 있었다.
1978년 말 MITS를 먼지 속으로 세차게 내몰며, 개인용 컴퓨터의 물결을 몰고 온 애플II로 상황이 반전되었다. 전략을 대폭 수정해 1979년 1월 게이츠와 알렌은 시애틀로 본거지를 옮긴 뒤 1년 안에 직원수를 35명으로 늘리고 사업을 재정비한다. 30명 이상인 인원을 거느리게 되자 폴과 게이츠는 진행중인 프로젝트의 모든 부분을 관장하기에 어려움을 느껴 전문 경영진으로 게이츠의 하버드 동창인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를 영입하며, 마이크로소프트는 대전환기를 맞는다.
그리고 1980년 또다른 잊지 못할 사건이 이들에게 일어난다.
그해 IBM은 기밀 PC 프로젝트를 위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찾고 있고, 알렌과 게이츠는 어렵지 않게 Q-DOS의 라이센스를IBM에 팔았다. 이로써 마이크로소프트는 PC 소프트웨어 산 업계로 입성하는 전기를 맞게 된다.
다. IBM의 PC시장 진출
라. IBM PC의 수혜자들과 IBM PC의 발전
마. 도전하는 소수
바. IBM PC의 발전과 IBM의 전략 수정
사. 386 PC의 등장
아. PC의 업무용 시장 진출
자. NeXT와 486 그리고 호환칩
1968년 설립된 IBM의 카보래튼 연구소에서는, 1975년 컴퓨터 개발요원 30명으로 구성된 ELS(Entry Level System)팀이 5100 시리즈를 내놓았다. 소규모기업을 겨냥한 개인용미니 컴퓨터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IBM이나 소비자 모두에게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1만 달러가 조금 넘는 이 컴퓨터는 소프트웨어를 갖추지 못했다. 이 컴퓨터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따로 프로그래머를 고용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다른 회사도 비슷한 수준의 컴퓨터를 개발했고 비슷한 정도의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IBM은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적극적인 PC산업의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고 더티더즌(Dirty Dozen)이라는 기획팀을 조직하여 2주만에 기획안을 만들도록 하였다. 2주라는 것은 당시 IBM에 있어서는 획기적이라고 할 만큼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동안 보통 IBM에서는 한번 컴퓨터개발계획을 세우고 이를 생산하기까지는 보통 2년이라는 기간이 걸렸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나게 짧은 기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미 2년전인 1978년 6월에 인텔은 최초의 16비트 프로세서인 8086을 내놓았다.
IBM은 1979년 6월 PC개발 계획을 세우게 된다. PC 5150은 어콘(Acorn) 이라는 이름으로 1980년 7월 프로젝트 체스(Project Chess) 라는 암호명으로 어콘의 개발에 착수 되었다. 1981년 8월 12일에 8086과 함게 발표된 인텔 8088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채택한 16비트 PC 5150을 뉴욕시에서 발표, 세계 컴퓨터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개발 당시 어콘 의 프로세서로는 모토롤라의 68000, 내셔날세미컨덕터의 16032 등이 검토되고 있었다. 68000은 위력적이면서도 소프트웨어 작성이 용이했고, 16032는 성능이 우수하면서도 강력했다. 그러나 인텔의 칩만이 유일하게 컴퓨터를 만들 수 있는 완벽한 서포트 칩을 가지고 있었다. 모토롤라와 내셔날세미컨덕터는 서포트칩을 아직 개발중이었다. 모든 부품들은 최저가 입찰방식에 의해 구입함으로서 개발비를 낮추었다.
그러나 프로세서뿐만 아니라 IBM PC는 IBM의 제품이라고 할 수 없었다. MS-DOS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QDOS는 마이크로소프트에 있었고, 초기의 부품은 어느 반도체 회사의 재고품들이었다. 진짜 IBM의 기술로 만든 것은 하드웨어와 MS-DOS를 연결시켜 주는 ROM-BIOS뿐이었다. 그동안 IBM의 전략과는 배치되는 방법으로 조달했는데 즉, 모든 부품은 자체 제작이 아닌 외부의 경쟁입찰에 의해 공급했다. 결국 IBM의 계열사가 따낸 부품은 주회로기판과 켄터키밖에 없었다. 작지만 신뢰성있는 회사인 탠던사가 디스크드라이브의 공급권을 따냈고, 제니스 일렉트로닉스사가 전원공급장치를, 주회로기판 이외의 회로기판은 SCI 시스템이라는 실리콘밸리의 신규업체가, 모니터는 대만이, 프린터는 일본의 엡슨이 공급하기로 했다.
당시 대부분의 CP/M 기계에는 S-100이라고 불리우는 다른 버스가 사용되고 있었다. 애플Ⅱ용 회로카드는 S-100에 사용될 수 없었고, 이와 반대로 S-100은 애플Ⅱ에서 사용이 불가능해 호환성이 없었다. 당시 카드개발자들은 표준설계 사양이 기록된 버스의 기본 사용서를 책자로 만들어 발간했는데, 많은 업체들이 이를 기초로 애플Ⅱ나 S-100카드를 양산해 냈다. 결국 IBM의 버스를 제작하고자 하는 업체는 누구든 쉽게 버스 사양서를 구할 수 있었다. 또한 IBM은 직렬, 병렬 포트와 비디오 카드를 제외한 나머지 다른 카드를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는 서드파티로 넘겨진 셈이 되었고, 많은 업체들이 이 서드파티에 참여함으로 다양한 카드가 개발되고, 이는 다시 IBM PC의 대량 판매를 촉진하게 되었다.
8088은 8086이 16비트 버스를 쓰는 것과는 달리 8비트 버스를 사용하고 주소공간은 1MB를 넘을 수 없게 되어있다. IBM PC 5150은 OS로 MS-DOS 버전 1.25를 채택했고, 클럭속도는 4.77MHz, 기억용량은 16 - 256KB을 갖고 있었다. IBM은 이때 오픈 아키텍쳐 정책으로 기술을 공개, 수많은 호환기종이 생산케됐고, 이것이 거대한 IBM PC 패밀리를 형성하게 했으며 오늘날 세계 PC의 표준이 되다시피했다. IBM PC 등장의 의의는 개인용 컴퓨터의 포급에 촉진제 구실을 한 데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판매전략도 이전의 IBM방식이 아니었다. 즉 이전의 IBM제품은 판매나 AS에 있어서 자사의 직원이외에는 그누구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의 판매책임을 맡은 스파크스는 새로운 컴퓨터를 일반컴퓨터 대리점을 통해 판매할 것을 고집했고 결국은 당시 최대의 컴퓨터 판매망을 갖고 있던, 윌리엄 밀러드의 컴퓨터랜드사와 IBM의 최대 고객인 시어즈 로벅사를 통한 판매망을 확보했다.
IBM PC가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데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시판된지 4개월만인 1981년 말에 5만대가 팔렸다. 이는 그해 애플 컴퓨터의 총 판매대수가 13만 5천대 였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숫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82년초에 마침내 애플ⅠⅡ의 총 판매량을 앞지르게 되었다. 이의 구매자들은 대부분 최초로 PC를 구입하는 사람들로서, 응용프로그램보다는 IBM의 이름을 믿고, IBM PC를 구입한 것이다. 1982년 시사주간지 타임 이 타임 지 역사상 처음으로 컴퓨터를 올해의 인물(Man of The Year) 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IBM PC의 성공은 IBM에게만 행운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주변기기와 소프트웨어, 호환기를 생산하는 업체들도 한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주변기기를 생산하는 회사로 최초의 행운을 얻게된 회사는 테크마(Techma)사이다. 테크마사는 원래 전자실험기구를 만드는 회사였으나, IBM PC의 성공을 직감한 사장인 마틴은 즉시 IBM PC를 한대 구입해 이를 분해하여 분석하여 6주만에 20여가지의 주변기기를 만들어 산업박람회인 COMDEX에서 선보였다. 먼지방지용 덮개, 메모리 확장용 회로기판, 디스크 드라이버 등이 그것으로 엄청난 매상 증가를 가져왔다.
전자연필 이라는 초기의 워드프로세싱 프로그램을 개발한 마이클 슈라이어는 이 프로그램을 무려 78가지나 작성해야 했다. 그러나 IBM PC라는 가장 확실하게 잘팔리는 PC를 만난 그는 더 이상 중소 업체의 PC를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1981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의 노련한 경영인이자 기술자인 로드 캐니언, 짐 해리슨, 빌머토 등 3사람이 동업해 컴팩(Compaq)사를 설립했다. 컴팩은 처음부터 다른 클론 업체 들과 마찬가지로 IBM PC와 호환성이 있는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1982년이 일로 최초의 IBM PC호환 기종을 발표한 업체가 되었다.IBM PC의 모든 것을 모방할 수 있었지만 ROM-BIOS만은 지적재산권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다. 코드 등도 입수할 수 있었지만, 모방은 할 수 없었다. 컴팩은 여기에 도전했다. 즉 역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을 이용해 IBM의 ROM-BIOS와 같은 기능을 갖는 그러나 다른 ROM-BIOS를 15명의 기술자가 수개월간의 노력 끝에 개발했다. 결국 이러한 노력으로 컴팩은 어느 정도의 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IBM은 계속해서 PC XT를 1983년초 개발 시판하면서 컴퓨터왕국의 아성을 굳건히 했다. IBM PC XT는 인텔8080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채택햇고, 클럭속도 4.77MHz에 OS에 MS-DOS 버전2.0을 사용했다. 기억용량 128-640KB까지 확장이 가능하며, 10MB의 HDD를 연결해 사용이 가능한 제품이었다.
IBM은 1984년 11월 라스베이가스에서 열린 컴덱스 쇼에서 운영체계인 MS-DOS 3.0과 함께 하드웨어면에서 기존의 PC보다 월등한 속도와 용량을 가진 PC를 선보여 PC기술을 한단계 끌어 올린다. 다름아닌 IBM PC AT(Advanced Technology)로 흔히 AT로 불리우는데 CPU로 인텔의 80286칩을 선택했고, 6.14MHz의 클럭속도, 1MB의 기억용량, 20MB의 HDD를 장착, 고성능 PC시대의 막을 열었다. 80286은 1982년 개발되었으며, 주소공간은 16MB에 이르며, 보호모드라고 불리우는 동작모드를 통해 가상메모리공간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80286은 IBM PC에 사용되기전 2년동안은 사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1984년에는 인텔의 첫 모방작품이 NEC에서 나왔다. V20으로 불리운 이칩은 8088프로세서와 호환되는 칩이었다. 같은 시기에 8086과 호환되는 V30도 발표되었다.
원래 80286 프로세서는 AT&T의 유닉스 운영체제인 제닉스 를 탑재하고 멀티유저 컴퓨터용으로서 인텔사가 설계하고 마이크로소프트사가 판매했던 제품이다. 다라서 이칩은 PC용으로 제작된 프로세서는 아니었다. 제닉스를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80286은 실질모드와 보호모드 등 2종류의 작동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AT의 등장은 기술적인 뒷받침 뿐만 아니라, IBM 자체의 경영전략도 작용했다. 즉 많은 호환기 업체의 참여로 IBM의 이윤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다. 결국은 새로운 PC를 통한 이윤 확보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애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PC라고 하면 인텔의 8088 혹은 8086칩을 내장한 IBM PC를 의미했다.
·Apple IIc
’84년 매킨토시가 발표되는 시점에 애플 IIc가 발표되기에 이른다(그림 10). 비록 애플 IIe 기종처럼 베스트셀러 기종이 되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애플 IIe 기능을 조그만 몸체에 집약한 애플 IIc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작은 크기로 만들다 보니 확장성 슬롯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본체에 시리얼 슬롯 2개와 모니터 포트, 조이스틱 포트, 플로피디스크 포트 등이 탑재되어 매킨토시와 같은 올인원 개념의 애플 II였다고 할 수 있다. 후에는 Apple IIc용 LCD도 따로 발매되어 포터블 애플 II 기종으로서의 가능성도 엿보였다.
·코모도어 Plus-4, Commodre 128
코모도어의 Plus-4는 롬에 통합된 소프트웨어를 탑재했으며, 코모도어 128은 기존의 코모도어 64의 업그레이드 기종이었다(그림 11). 코모도어 128기종은 128KB 램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은 네이티브 모드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코모도어 64 기종과 호환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전용 소프트웨어의 부족과 매킨토시나 아이비엠, 아타리 ST와 같은 16비트 기종에 밀려 큰 빛을 보지는 못한 기종이었다.
·TRS-80 Model 4P
한때 잘 나갔던 TRS-80 모델의 최후 기종이다(그림 12). 기본적인 사양은 Model 4와 동일하다. TRS DOS 6.0에서 6.2버전, LS DOS 6.3버전을 사용했다.
·아타리 ST 520
사실 초창기의 8비트 아타리 기종들은 그다지 주목할 만한 기종은 아니었다. 하지만 ’85년 나온 아타리 ST는 모토로라 68000으로 무장한 매우 쓸만한 제품이었다(그림 13). 뛰어난 그래픽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디 인터페이스가 내장되어 있다는 점이 그 이후에 아타리가 미디용으로 많이 사용되는 이유가 됐다.
운영체계는 TOS라 불리는 것을 사용했는데, CPM/68과 GEM이라고 불리우는 그래픽 운영체계가 결합되어 있는 형태였다. 패러럴 인터페이스와 RS-232C 포트를 탑재했고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개인용 컴퓨터로는 최초로 미디 인터페이스가 내장되었다. 또한 512 컬러 팔레트에 16색을 사용할 수 있었다. 가격은 799달러로 맥이나 IBM PC AT에 비해 매우 저렴했다.
그 이후에 아타리 시리즈는 1MB 램에 플로피가 탑재된 아타리 ST 1040 기종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아타리 ST는 그래픽과 사운드 기능이 향상된 Mega ST 시스템과 STe (enhanced) 시스템이 차례차례 출시된다. 이 기종들은 기존에 사운드 분야에서 인정받았던 아타리 ST 기종을 그래픽 분야에까지 끌어올리려는 시도에서 발매된 기종이었다.
·아미가 1000
코모도어는 ’85년, 드디어 아미가 1000이라고 불리워진 16비트 기종을 출시한다(그림 14). 아미가의 기능은 그 당시 최고 수준에 이르는 매우 뛰어난 기종이었다. 이 기종 역시 모토로라의 68000칩을 사용하였으며 256KB 램을 탑재하고 880KB의 3.5인치 플로피 드라이브와 세 개의 커스텀칩을 사용하였다. 최대로 4,096컬러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놀랍게도 그 당시에 이미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지원했다. 또한 4채널의 디지털 사운드 기능과 마우스를 탑재했다.
·MSX2의 등장
MSX1의 차기 버전인 MSX2가 일본에서부터 시판되기 시작한다. MSX1에 비해 해상도와 컬러기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으며 뛰어난 그래픽 기능으로 다양한 게임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또한 MS-DOS의 8비트 버전이라 할 수 있는 MSX-DOS와 디스크 드라이브가 탑재됨으로써 본격적인 홈컴퓨터의 자리매김을 확실히 했다.
애플 II 16비트로 탈바꿈 - Apple IIGS : ’86
애플 IIGS의 시작은 애플 IIx라는 프로젝트에서 시작된다. 65816이라는 6502 계열의 새로운 16비트 CPU가 출시되자 애플사에서는 이를 이용한 새로운 애플 II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그들의 목표는 애플 IIc처럼 사용이 간편하고 애플 IIe처럼 확장성이 있는 컴퓨터였다. Apple IIGS는 기존의 애플 II+나 애플 IIe 의 소프트웨어를 그대로 돌릴 수 있는 호환성을 확보하면서 다양한 기능을 추가하였다. 일단 화면 디스플레이에서 320×240와 640×400 해상도를 추가로 지원했다. 320×240 해상도에서는 4,096 색상 중 16색을, 640×400 해상도에선 4,096 색상 중 4색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존의 애플 II와 달리 Ensoniq칩을 사용하여 동시에 50가지의 음을 조합할 수 있었다. 12MB까지의 램 확장이 가능했으며 ADB 포트와 애플톡 포트 등을 채용하여 애플 II와 매킨토시와의 가교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애플 IIGS의 상당부분은 퀵드로우와 같은 맥에서 사용되는 루틴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86년 8월에 출시된 애플 IIGS는 애플 II 매니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애플의 최단시간 최다 판매기록을 세웠다(그림 15). 운영체계는 초창기에는 ProDos16을 사용하다 후에는 매킨토시 운영체계와 거의 동일한 GS/OS 운영체계를 사용하게 된다.
1986년 IBM은 RT PC라는 퍼스널컴퓨터를 소개한다. 여기서 RT란 RISC( 기술(Technology)을 의미한다. 이 컴퓨터는 일찍이 1970년대 중반에 존 코크 휘하의 IBM연구팀이 실험적인 미니컴퓨터에 응용한바 있는 기술로, 코크와 그의 팀이 고속컴퓨터를 적은 비용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던중 발견한 개념을 토대로하여 제작하였다. 컴퓨터는 전체 명령어세트중 중용한 20%의 명령어가 실제작업의 80%를 처리한다. 따라서 잘 쓰이지 않는 대부분의 명령어 때문에 명령어처리속도가 늦어지고 있는 것이다. RT PC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이용 기존의 명령어를 약 절반으로 줄이면서도 속도는 더욱 빨리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다. 매우 뛰어난 착상이지만 다른 회사들도 곧 이와 같은 원리에 의한 컴퓨터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어느 컴퓨터는 RT PC 명령어의 1/4의 명령어만으로 동작하는 컴퓨터를 내놓기도 했다.
286PC가 최고의 제품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무렵인 1985년 10월 인텔은 80386DX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발표, PC시장의 변화를 예고했다. 80386DX는 32비트 데이타 버스를 제공하는 최초의 프로세서로, 80286의 보호모드 이외에 가상 86모드라는 별도의 동작 모드를 가지고 있다. 이 모드는 안정적인 멀티태스킹 환경을 제공하며, 640KB아래에서 수행되는 여러 응용 프로그램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 이칩은 인텔의 발표 다음해인 1986년 미국의 컴팩사가 전격채택, 386PC인 데스크프로386을 발표하게 된다. 이 PC는 세계 컴퓨터업계의 거성으로 자처해온 IBM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컴팩은 세계적인 PC업체로 급성장할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컴팩이 386PC를 발표한 1986년은 PC사()에 큰변혁의 해로 남고 있다. 당시까지 PC기술과 시장을 주도해온 IBM이 286PC보다 뛰어난 성능을 갖는 386PC를 컴팩에게 넘긴 것은 기술적인 면에서 큰 타격을 입은 셈이다. 이와 함께 세계 PC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IBM의 시장쉐어가 PC군에 의해 역전됨으로서 퇴조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해였다. 이에 따라 IBM의 매출은 약간 증가했지만, 순익은 오히려 감소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PC와 그 주변기기로 말미암은 것이다.
IBM이 이를 만회하고 기술적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1987년 4월 기존의 제품이 채택하고 있던 버스 아키텍쳐 대신 MCA(Micro Channel Architecture)를 채택한 네가지 종류의 PS/2(Personal System/2)를 발표했다. IBM은 PS/2에 대하여 내부회로, 게이트 어레이, MCA, BIOS 소스코드등의 사양공개 원칙을 포기했고 독과점을 선언해 호환기업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업체들이 유사제품을 만들기 어렵게 하기 위한 갖가지 조치를 취해 놓기도 했다. 이외에도 비디오 처리분야의 VGA(Video Graphic Array)와 3.5인치 플로피 드라이브 및 101키보드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컴퓨터들은 IBM과 마이크로소프트가 보장하는 새로운 운영체제인 OS/2를 사용했다. OS/2는 PC계열의 어떤 컴퓨터보다도 큰 용량의 메모리를 처리;할 수 있었다. 또 레이져 프린터, 200메가바이트의 광자기디스크 등 최신의 다양한 주변기기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PS/2는 예상외로 판매실적이 저조, PC왕국의 체면에 먹칠을 하여 IBM에 상처를 남겼다. 이후 IBM은 PC시장에서 옛 영광을 되살리지 못하고 1989년 IBM PC XT/AT 생산을 중단, 현재(1991년)는 호환기업체에 대한 기술료만을 챙기고 있다. 1988년 빅블루라 불리는 IBM을 제외하고, 그 호환기종을 판매하는 9인방(Gang of Nine)이라 불리운 컴팩을 비롯한 9개의 회사는 IBM의 MCA에 대항하는 새로운 버스의 개발에 합의하고 ISA(Industry Standard Architecture)와 EISA(Extended ISA)를 개발했다. 이는 기존의 AT버스와 호환이 되면서도 그 성능을 향상시킨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판매상들이 오리지날 PC버스 방식을 고집함으로 인해 PS/2를 급격히 쇠퇴하게 만드는 큰 원인이 되었다.
IBM이 PC시장에서 헤메고 있을 무렵인 1988년 6월 인텔은 80386SX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발표했다. 386SX는 내부적으로는 16MHz 32비트 80386칩과 똑같이 32비트로 운용되나 외부적으로는 80286과 같은 16비트 데디타 버스와 24비트 어드레스를 갖는 가격대비 성능이 우수한 제품이다. PC업계의 강자로 부상한 컴팩은 재빨리 386SX PC인 데스크프로 386S를 발표, PC기술을 선도하며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386SX는 가격대 성능비가 뛰어나 전세계적으로 크게 각광을 받으며 286시장과 386시장을 잠식해 들어갔다. 386SX는 16MB 램용량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용가능한 80286 소프트웨어를 모두 실행할 수 있고 마이크로소프트-윈도우/386, 파라독스/386과 같은 80386 소프트웨어를 실행시킬 수 있는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AMD는 인텔의 386 호환칩 Am 386 으로 386시장에서 15% 이상의 점유율을 기록했으며, 92년에는 50% 이상을 차지, 최대의 386칩 메이커로 급부상하고 있다.
데스크프로 386을 내놓은 후, 컴팩컴퓨터사는 곧발로 마이크로컴퓨터의 최고봉을 개척하는 회사가 되었다. 델컴퓨터사와 다른 회사들이 인텔 80386칩을 내장한 PC를 가지고 컴팩사를 바짝 뒤쫓았다. IBM도 PS/2 계열의 신형컴퓨터인 모델 80에 80386칩을 탑재했다. 애플사 역시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여러가지 면에서 호환 가능한, 개량한 32비트칩인 모토롤라 68020칩으로 강화한 매키토시Ⅱ를 내놓았다. 이러한 컴퓨터와 유사한 컴퓨터의 출현은 지난 20여년 동안 발전해온 여러 컴퓨터들 사이의 차이점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었다.
1985년 미국의 석유관련 업체들은 전국적인 석유산업의 침체로 비용절감운동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석유화학 정제설비의 설계로 유명한, 휴스턴의 피시 토목건설사 역시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회사의 사장인 짐보이드도 비용절감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중에 이 회사의 IBM4341 컴퓨터와 그 데이터처리진을 위해 지출되는 28만달러는 매우 큰 부담일 수 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컴퓨터 상담자와의 상담에서 현재의 기종으로는 무리가 따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새로운 기종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조금더 대형 기종을 바꿀것을 고려했지만 비용이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퍼스널컴퓨터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던 보이드는 모험을 하기로 결정했다. 즉 컴팩컴퓨터사로부터 데스크프로 286을 중심으로 12대의 퍼스널컴퓨터를 구입한후 컴퓨터망을 구성했다. 1986년 9월에는 조금더 강력한 데스크프로 386이 실용화되자 이로 대체해 나갔다. 3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이 회사는 사업의 번창과 더불어 130개의 스테이션으로 확장된 퍼스널컴퓨터통신망을 갖추게 되었다. 피시사는 퍼스널컴퓨터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었다.
손으로 수없이 반복해야 하는 도면수정작업을 없애려고 여러가지 시도를 하던 실내장식가인 개리 휘트니는 마이크로컴퓨터 CAD와 만났다. 휘트니는 이 분야에서는 최초로, 당시가지는 작업의 말미에나 기술적으로 완벽한 시공도면을 만들기 위해 이용하던 컴퓨터를 작업의 도입부부터 활용하는 것을 꿈꿔온 사람이었다. 휴스턴에 있는 3D/인터내셔날사의 설계부책임자인 휘트니는 홍콩과 디바이에서 호텔과 법인체 본부를 설계하면서 전통적인 방법에는 커다란 결함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바 있다. 그는 전통적인 방법에서 최초의 도면이 완벽한 건물로 되기까지는 각 단계마다 설계사가 말 그대로 백지위에다 도면을 다시 그려야만 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설계사가 통합된 프로젝트를 생각해서 스케치판 대신에 컴퓨터를 이용한다면, 애벌도면??이 최종청사진을 포함한 모든 설계도의 기초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 휘트니의 생각이었다. 그는 이런 시도가 작업시간을 상당히 줄여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휘트니는 이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1987년 3D/인터내셔날사를 나와서 휘트니그룹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그의 새사무실에는 제도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대신에 벤틀리라는 4천달러짜리 CAD프로그램이 내장된 컴팩사의 데스크프로 네트워크만이 있을 뿐이다. 처음에는 스케치판이 아닌 모니터위에 설계해야 하는것에 대부분의 설계사들이 당황하고, 불평을 늘어 놓았다. 그러나 이런 불평은 곧 수그려졌고, 휘트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것이 100% CAD사무실입니다. 여기서는 모니터가 종이이고, 마우스가 연필입니다. 그리고 삭제버튼은 지우개이지요. 휘트니그룹은 곧 다른 설계회사를 앞서가게 되었다. 훨씬 낮은 가격에 설계를 수주할 수 있었고, 설계시간도 단축할 수 있었다. 이는 생산성 향상을 고민하고 있던 다른 설계사와 건축가들에게는 희소식이라 할 수 있었다.
설계사들이 이러한 설계를 2차원에서 3차원으로 확대해 나갈 수 있게 하는 데에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의 뒷받침도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즉 32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탑재한 PC는 수학계산용 보조처리기(coprocessor)를 설치할 수 있게 함으로서 엄청난 계산을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하드웨어의 발전은 소프트웨어에도 영향을 주었다. 즉 가장 많이 팔린 소프트웨어중의 하나인 오토캐드는 투영선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이었으나, 이 프로그램의 그림에 색깔을 입혀서 입체구조물로 보여 주는 오토셰이드라는 프로그램 덕으로 더 많은 판매를 하게 되었다. 또 다른 프로그램인 로보솔리드는 간단한 입체도형들의 모음을 이용한다. 이 프로그램은 프리미티브라는 블록 을 연결해서 복잡한 도형을 만들 수 있는데, 이때 만들고자 하는 도형의 질량, 부피, 무게중심 등의 특성을 분석해낼 수도 있다.
1988년 10월 12일 스티브 잡스는 애플Ⅱ를 발표할 때와는 다른 분위기에서 새로운 컴퓨터를 발표했다. 애플에서 그가 기용한 사장인 스컬리에게서 쫓겨난후 와신상담 끝에 개발한 NeXT를 발표한 것이다. NeXT는 그가 이전에 개발한 애플Ⅱ보다 속도만 빠른 것은 아니었다. 동시에 여러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고, 선명한 전용화면, 현악4중주같은 사운드 등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컴팩은 다시 한번 기술신화를 이룬다. 인텔은 1989년 4월에 i486DX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개발했는데 컴팩은 미니급의 성능을 발휘하는 486PC 시스템프로 486PC를 개발, 초고성능 PC시대를 여는 개가를 올렸다. 80486DX는 수치보조 프로세서와 캐시 시스템을 내장한 최초의 칩으로 4.77MHz의 8088에 비해 50배의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다.
1990년 인텔은 386이지만 새로운 기술을 채택한 칩을 발표한다. 이 칩은 80386SL로 최초로 전력관리기능(APM : Advanced power management)을 부과한 칩이다. 이칩은 동급인 80386SX보다 집적도에서 훨씬 앞서고 있는데, 이는 캐시 및 메모리 컨트롤러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AMD(Advanced Micro Devices) 사에서는 AM386DX라는 칩을 1991년 3월 발표한다. 이칩은 386DX와 완벽하게 호환이 될뿐 아니라, 20% 정도 빠른 처리속도, 훨씬 낮은 가격으로 인텔의 386 독점에 제동을 건다. 7월에는 AM386SX를 발표한다. 9월에는 Chips & Technology사가 F8680이라는 8086/186 호환용 칩을 개발한다. F8680은 CPU와 USART(unvesal asynchronous receiver/transmitter), CGA급 디스플레이 컨트롤러, CPMCIA 표준을 지원하는 회로를 갖추고 있다. 내부적으로 향상된 코드를 쓰기 때문에 286급 성능을 낸다. 1991년 12월 IBM은 자사의 PS/2에만 쓰게될 IBM386SLC을 발표한다. 향상된 명령어 집합과 8KB의 캐시를 내장하고 내부에는 32비트 데이타 버스를 외부에는 16비트 버스를 쓴 칩이다. 인텔은 1992년 3월 80486DX2를 발표한다. 80486DX에 클럭-배가(clock-doubling) 기술을 적용한 첫 작품이다.
4월에는 인텔을 이후 긴장시킬 사이릭스에서 386SX처럼 내부 32비트, 외부 16비트의 버스를 가진 Cx486SLC를 발표한다. 이칩은 1KB의 32비트 내장 캐쉬를 가지며, 보조프로세서는 외장형이다. 6월에는 Cx486DLC를 발표한다. 외부에도 32비트 전송이 가능하며, 1KB 캐세를 내장하고 있다. IBM은 9월에 486SLC2를 발표하였다. 486의 두배인 16KB의 캐시를 가지고 있다. 사이릭스는 인텔의 486DX2를 의식해 10월에 Cx486DRu2를 발표한다.
486프로세서 시대에 접어들면서 PC의 개념은 486프로세서와 SVGA, IDE 하드디스크 표준 등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면서 MS-DOS나 관련 운영체계(DR-DOS, WINDOS, OS/2)를 실행시키는 기계로 바뀌게 된다. 아울러 네트워크의 일부로써 표준 서버로까지 그 개념이 확장하기까지 한다. 여기에는 노벨사의 네트웨어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운영체계에 있어서도 기존의 MS-DOS 또는 관련운영체계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PC용 UNIX의 등장으로 운영체계에 의한 PC와 중대형 컴퓨터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새로운 운영체계가 새로운 시대의 주도권 장악을 추구하고 있다. MS-DOS계열이라고 볼 수 있는 DR-DOS, MS-WINDOWS, WINDOWS-NT 이외에도 486이상의 시스템에서 작동하는 넥스트스쥜(NextStep), 486DX 이상의 시스템에서 운영가능한 솔라리스(Solaris), 그리고 유닉스 관련 운영체계로 SCO UNIX, SCO OpenDesktop, 노벨 UnixWare 등이 그것이다.
2. 슈퍼 컴퓨터와 인공지능
1980년대가 되어서 스탠포드대학의 라멜하트등이 연결고리(synaps)결합의 세기를 변화시켜 한정된 수의 뉴런으로 부과된 문제에 반응할 수 있는 오차역전파(eror back -propagation)를 고안하여 다층구조 인식자(multi layer perceptron)의 학습방법을 발견하였다.
198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캘리포니아 공대의 홉필드와 토론토 대학의 힌튼 등의 연구를 통해 볼츠만 머신 이 제안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자극에 대하여 흥분이 확률적으로 결정되는 뉴런이 쓰이고 있다. 사실상 볼츠만 머신을 통해 수학자나 심리학자들에 의해 이론 연구에만 치우쳤던 신경망연구가 비로서 공학적인 관점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이제 이론 뿐만 아니라 고집적 회로를 이용한 새로운 신경망 칩 생산과 음성인식이나 문자 인식, 정보통신의 최적화 등 기존의 컴퓨터에서는 한계라고 여겨졌던 분야들이 신경망연구의 새로운 응용분야로 떠 오르고 있으며, 일련의 연구성과들로 인해 신경망컴퓨터에 대한 전세계적인 관심이 커 가고 있다.
최근 5세대까지 컴퓨터과학의 전제는 모든 것을 수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본 괴델(K.Goedel)과 완전히 기계적인 방식으로 수학의 정리를 증명하려고 한 튜링(Alan Turing)의 수학이론, 프린스턴에서 함께 연구했던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과 샤논(C.E.Shannon)의 정보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기존의 컴퓨터가 무의미한 기호나 상징을 사용하여 수리적이고 분석적인 기능을 강조한 것이라면 신경망 컴퓨터는 일견 산만해 보이지만 동시 다발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강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좌,우 두뇌의 양면성에 근거해서 신경망 컴퓨터는 수치, 연산, 분석의 좌뇌적 기능에서 직관적이고, 종합적인 우뇌적 기능으로 전이시킨 것이라고도 한다.
흔히 신경망 컴퓨터는 기존의 노이만 컴퓨터와 상호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며, 사실 그러한 해설에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Alfred Whitehead)가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footnote)일 뿐 이라고 했던 말은 여기에도 해당된다.
전문가시스템(Expert System)은 인공지능의 응용분야로 전문가가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을 컴퓨터에 입력해 비전문가라도 지식과 추론과정을 이용해 해답을 제시하도록 한 시스템을 말한다. 용도를 지칭해서는 컨설테이션 시스템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문가시스템은 1960년대 화합물의 구조를 추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덴드럴 (Dendral)시스템」을 시초로 발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70년대 의료진단 시스템인 마이신(MYCIN)과 광물탐사시스템인 프로스펙터(Prospector) 등이 만들어져 사용됐다.
본격적인 실용화는 1977년 개최된 인공지능국제회의에서 미국 스탠포트대학의 파이겐바움(E. Feigenbaum)교수에 의해 발표된 후 산업현장에서 이루어졌다.
현재에는 의료진단이나 기계고장 진단, 설계지원과 보험 손해배상 판정 등의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금융분야나 심지어 법원에서의 형량산출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또 전문가들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석과 예측, 대책 수립 등 산업계와 인문과학, 자연과학분야에서 고르게 사용되고 있다.
전문가시스템은 인간에 의한 실수를 방지할 수 있고 휴식이 필요없기 때문에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즉 사람처럼 잊어버리는 일없이 기억을 축적할 수 있으며 피로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질 수도 있는 인간에 비해 언제나 정확한 작업을 할 수 있다.
또 지식 치환이 가능해 최신지식만을 판단기준에 응용할 수 있다. 이외에도 범용적인 전문가 시스템 개발도구에 전문지식만 입력하면 특정분야를 위한 시스템이 구축되므로 비전문가도 전문가의 지식을 이용할 수 있다는 잇점을 제공해준다.
이 전문가 시스템은 지식베이스(Knowledge base)와 추론엔진(Inference engine)으로 구성돼있다. 지식 베이스에는 전문가의 지식을 사실과 규칙으로 저장하는데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을 하고자 할 때는 지식베이스에 있는 사실과 규칙을 토대로 추론을 분석해 해답을 생성해 낸다.
1980년대 초에 일부 엑스퍼트시스템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예를 들면 워싱턴주의 톨만산에서 찾기 어려운 몰리브덴광산을 프로스펙터라고 불리우는 엑스퍼트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발견됐다고 전해지자 전문가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초기의 소박한 과학적 열정으로 시작된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는 다소 시들해졌다. 그 이유는 먼저 인간의 뇌에 대한 연구가 아직도 부족하고, 아직도 상식과 같은 인간의 모호한 지식을 효율적으로 컴퓨터에 이식시키지 못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완전하지 못한 상품을 과장광고로 선전하고 이를 판매하는 기업들 때문에 올바른 연구의 방향을 흐려왔다. 최근에는 다시 퍼셉트론류의 상향식 연구방법이나, 광학소자나 병렬처리 기술의 발달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계번역은 컴퓨터의 비약적인 기술발전에 힘입어 새로운 전기를 맞게됐다.
이 때부터는 전자기술을 앞세운 일본의 활약이 눈부시게 전개, NEC의 PIVOT 과 후지쯔의 ATLAS , 쿄토대학의 MU 프로젝트 등이 추진됐는데 이들 연구는 인간적인 번역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현재 일본에서 실용화되고 있는 번역제품은 대부분 영-일, 일-영 번역시스템으로 NTT의 ALT-J/K , 후지쯔의 ATLAS 1.Ⅱ , 샤프의 DUCT-E/J 등 40여개 시스템들이 판매돼 세계 최고의 수준을 달리고 있다.
특히 일본 히타치나 NEC가 개발한 기계번역시스템들은 번역을 할 언어를 중간언어로 변환하는 피봇방식을 사용, 쉽게 다국어를 번역할 수 있어 한-일, 일-한 번역도 가능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와 함께 유럽에서도 상용제품이 등장, 영국의 경우 영어로 된 매뉴얼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NTRAN , 프랑스는 전자공학에 사용되는 불어를 영어로 변환하는 CALLIOPE , 네덜란드는 독어, 영어, 스페인어로 번역하는 ROSETTA 등이 상품화돼 활용되고 있다.
또 미국은 IBM이 영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LMT를 개발했으며, 특히 조지타운대학에서 개발한 SYSTRAN 은 지속적인 성능향상이 이루어지면서 현재 영어를 아랍어, 독어, 서반아어, 일어 등 8개 국어로 번역하는 성능을 자랑하고 있다.
3. 본격적인 통신 시대의 개막
동케이블은 1마일정도 전송되면 다시 강화시켜 주어야만 하지만, 광파는 도중에 보강시켜 주지 않아도 1백마일이상까지 전송이 가능하다. 동케이블과는 달리 혼신의 염려도 없다. 오늘날 첨단 광파시스템은 1초당 1.7기가비트(1기가비트는 10억비트)의 자료를 전송할 수 있는데 이는 대영백과사전의 내용전체를 2초내에 전송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속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AT&T를 분할하라는 법원의 명령이 내려지자 미국의 여러 전화업체들이 광통신 장거리 서비스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나섰으며 그리하여 10여개의 전화업체들은 총 70억마일에 달하는 광섬유통신망을 건설했다. AT&T는 보스톤과 버지니아주 리치모든간에 1천5백km의 광통신망을 구축하고 84년에 서비스를 개시했다.
또한 AT&T는 같은 해에 로스앤젤레스에 광섬유케이블망 FT3C를 설치해 올림픽경기 실황을 각종 경기장으로부터 TV중계센터까지 생방송으로 전송해 줌으로써 이 새로운 기술은 더욱 널리 인정 받게 되었다. AT&T와 MCI를 비롯한 여러 통신업체들은 미국 동부지역 회랑보다도 더 긴 광섬유 케이블망을 설치했다.
광섬유는 84년에 본격적으로 새로운 통신 케이블로 선정되었다. 즉, AT&T와 북미 및 유럽의 28개 통신업체들이 88년부터 가동된 여덟번째의 대서양 횡단 해저케이블망으로 동축케이블대신 광섬유케이블을 선정했던 것이다. TAT-8로 명명된 이 해저 광케이블은 3만7천8백건의 통화를 동시에 전송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에 상응하는 분량의 음성, 데이터 및 비디오 신호를 3천6백7해리 떨어진 대서양을 횡단해서 보낼 수 있다. 이 해저케이블망은 파장 1천3백 나노미터의 단일 모드 섬유로 된 한상의 케이블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모드는 1초당 2백96메가비트로 운용되는 1.3미크론의 레이저에 의해 작동되도록 되어 있다.
영국과 프랑스를 해저로 연결한 이 케이블망은 광통로 기술을 통해 지상의 중계소에서 지선으로 갈라질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는 동축케이블을 사용할 때보다 훨씬 적은 1백25개의 중계기가 설치됐다. 현재 2백50개의 중계기를 사용하는 이와 유사한 태평양 횡단 케이블망 구축도 진행중이다.
이들 대서양 및 태평양 횡단 해저 광통신망 설치계획이 발표된지 2년후인 86년 미국의 AT&T, 캐나다의 텔리글러브, 영국의 텔레커뮤니케이션 인터내셔날, 프랑스의 우편통신부, 스페인의 텔리포니카 등은 유럽과 북미대륙을 광파로 연결하는 제2의 해저케이블망 가설계획에 착수했다. TAT-9라고 불리우는 이 광케이블망은 91년에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최신 기술이 동원되어 성능이 TAT-8보다 거의 2배가 되는 초당 5백65메가비트의 전송능력을 갖추게 했다. 이 새로운 광케이블 시스템은 독특한 수중 송신기술을 사용, 다중 중계기를 통해 미국 및 캐나다를 유럽의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과 개별적으로 연결시켜 주고 있다.
이미 88년초에 북미지역에는 전체인구의 거의 80%가 무제한에 가까운 정보를 접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광섬유 시설이 설치되었다. 그들은 전화, 전기, 라디오, TV 등과 같은 과학적 발명이 모두 대중화됨으로써 진가를 발휘했듯이 모든 주택 아파트는 물론 도시 전체가 광섬유화 되어야 비로서 이상향이 이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생활이 부유하고 교육수준이 높으면서도 정보에는 굶주린 수많은 시민들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 제일먼저 그 이상향이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러와 그의 동료들이 섬유광학통신을 탄생시키기도 한 바로 그 미국에서 그같은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미국에서는 기관이나 단체차원에서 고무적인 진전이 있었다. 통신용량을 확대하고 향상시키기 위해 광섬유시스템을 설치하는 기업체, 학교, 병원 및 기타 단체들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게다가 사무용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상업구역이나 새로 종성중인 주거지역 등에 광대역 통신시설을 설치하는 추세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일반 대중을 상대로한 광통신기술의 실용화에는 일본과 프랑스가 앞서 갔다.
78년 한 마을에 Hi-OVIS시스템을 설치함으로서 실용화의 길을 연 일본은 그후 계속적으로 그 시설과 서비스를 확대해 나갔다. 오늘날 일본의 일부 전화가입자들은 고감도의 TV카메라와 흑백모니터로 구성된 텔리페이스(Teleface)를 가지고 광섬유 통신망을 통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화상전화를 할 수 있다.
또 프랑스의 국영전화회사는 83년 휴양도시인 비아리즈의 1천5백세대를 대상으로 광섬유통신망을 설치해 비디오 전화서비스, 비디오 텍스트, 케이블TV 등을 제공했다. 이 서비스는 86년까지 무려 2백50만세대 이상의 가정이 가입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비디오텍스트 시스템으로 성공했다.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는 이 미니텔 시스템은 지금도 확대일로에 있다.
아직 미국에서는 일본과 프랑스에서와 같은 일반 가정을 대상으로한 광통신사업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관계 전문가들은 그 주요 장애 요인은 기술적 문제보다는 경제적 요인, 특히 전자단말기의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생산기술을 향상시켜 단말기의 값을 낮추고 일반대중이 광통신의 엄청난 효율성을 인식하게 되면 개인은 물론 기업활동에 일대변혁을 가져올 것이다.
나. To Home, To Office(FTTO, FTTH)
다. 일본의 도전
라. 광통신
마. PC통신
91년 美 벨연구소는 초당 3,500억회나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실험용 초고속 레이저를 선보였다.
이것은 대략 초당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내용의 350배나 되는 양을 초당 한번씩 보낼 수 있는 것을 의미했다.
멀티미디어로 대표되는 앞으로의 통신환경 변화에서 대용량의 정보를 취급하기 위하여 현재의 동선 가입자 선로의 대체수단으로 등장하는 것이 광섬유를 이용한 광가입자 선로이다. 광가입자 선로의 잇점은 거의 무한대의 정보를 보낼 수 있고, 전송손실이 적으며, 전자파에 의한 간섭이 없다.
또 가느다란 광섬유의 사용으로 인한 관로의 포화 해소가 가능하고, 앞으로 동선가격의 상승에 대비해 경제성이 있다는 점이다. 광가입자선로의 궁극적인 방향은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FTTH(fiber to the home)이고 다른 하나는 FTTO(fiber to the office)이다. 즉 사용자가 있는 곳까지 광선로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한 광가입자선로를 구성하는 방안에는 별(STAR), 링(RING), 버스 (BUS) 등 여러 형태가 있으나, 그중에서 가장 미래지향적이고 경제적인 방안으로 PON (passive optical network)이 선호되고 있다.
PON은 통신정보의 분기점에서 가입자 방향으로는 전화국에서 가입자에게 수동의 광분배기를 사용하여 분배전달하며, 전화국 방향으로는 각 가입자로부터의 광신호들을 수동의 광결합기를 사용하여 전화국으로 결합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 때 전화국으로부터 가입자로의 신호는 모든 가입자에게 반송되므로 가입자신호의 보안 방안 및 다중접속방안이 필수적이며 그 역방향 또한 유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수동적 방식의 PON은 능동 광소자를 전화국 내부나 가입자 주거지역 내부에 국한시킴으로써 여러 경제적, 관리적 이점을 제공한다
1970년대부터 일본은 광처리분야를 겨냥했으며, 1981년에는 통상성을 중심으로 광전자 개발계획 을 시작했다. 대성공을 거두면서 3백개 이상의 특허를 획득했고, 광반사 이극진공관(LEDs), 전하결합소자(CCDs, 일명 전자디스크), 컴팩트 디스크, 광저장 디스크 등의 여러 분야에서 세게의 선두자리에 오르게 하는데 기여했다.
1988년 소니와 마쓰시타, IBM등은 다시 쓸 수 있는 디스크를 개발해 같은해 시장에 내놓았다. 그러나 이분야에서도 일본 기업의 성장은 분부셔 세계 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다. 같은 해 후지쯔는 매초당 5백12MB의 교환속도-이것은 재래식 교환보다 50배나 더 바른 기록이다.-를 지닌 세계 최초의 광교환대를 발표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편 미쓰비시는 영어 알파벳의 26자를 식별해낼 수 있는 세계 최초의 광신경컴퓨터를 생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1989년 IBM이 8000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있는 세계에서 가장 밀도높은 광전자칩을 만들었다고 발표함으로 반격에 나섰다. 1990년에는 오랫동안 광컴퓨터의 우수성을 강조해온 벨연구소의 앨런 황이 최초의 실제로 사용될 수 있는 실험용 광컴퓨터를 선보였다. 또한 1991년에는 텍사스 인스트루먼츠가 개량된 광칩을 사용한 세계 최초의 광컴퓨터를 개발했다.
광컴퓨터는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욱이 초고속광슈퍼컴퓨터의 실용화는 더욱 먼 이야기라 한다. 그러나 광처리의 엄청난 잠재력, 광통신의 영향은 상상하기 힘들것이라는 데에는 대부분의 전문가가 동의하고 있다.
지난 60년 미국의 GE와 IBM이 갤륨비소 계열의 반도체레이저를 개발한 이후 66년 영국의 엔지니어인 찰스 카오 박사와 조지 호크햄이 이끄는 팀이 유리섬유를 이용해 광전송이 가능하다는 이론을 발표하면서 광통신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광섬유를 상업용으로 개발한 최초의 회사는 뉴욕의 코닝 클래스웍스로 증기침전 이라는 방법을 이용해 저손실 광섬유를 제작한 것으로 1970년의 일이었다. 또한 AT&T의 벨연구소를 중심으로 갤륨비소계열의 0.8μ급 단파장 반도체 레이저와 리튬.인계열의 1.3μ급 장파장 레이저반도체등이 개발돼 광통신 실용화를 앞당겼다.
이와 함께 최근에는 실리콘, 게르마늄, 인듐, 갤륨비소등 화합물 반도체를 중심으로 반도체 레이저가 연구되는 한편 이들 신호를 받아 전기신호로 바꾸어 주는 광검출기술등이 개발됨으로써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1991년 미국의 벨 연구소는 매초당 3천5백억회나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실험용 초고속 레이저를 선보였다. 이것은 대략 매초당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내용전부의 3백50배의 양을 매초에 한번씩 보낼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멀티미디어로 대표되는 앞으로의 통신환경 변화속에서 대용량의 정보를 취급하기 위하여 현재의 동선 가입자 선로의 대체수단으로 등장하는 것이 광섬유를 이용한 광가입자 선로이다. 광가입자 선로의 잇점은 거의 무한정의 정보를 보낼 수 있고, 전송손실이 적고, 전자파에 의한 간섭이 없으며, 가느다란 광섬유의 사용으로 인한 관로의 포화 해소가 가능하고, 앞으로 동선가격의 상승에 대비해 경제성이 있다는 점이다.
광가입자선로의 궁극적인 방향은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FTTH(fiber to the home)이고 다른 하나는 FTTO(fiber to the office)이다. 즉 사용자가 있는 곳까지 광선로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한 광가입자선로를 구성하는 방안에는 별(STAR), 링(RING), 버스(BUS) 등 여러 형태가 있으나, 그중에서 가장 미래지향적이고 경제적인 방안으로 PON (passive optical network)이 선호되고 있다. PON은 통신정보의 분기점에서 가입자 방향으로는 전화국에서 가입자에게 수동의 광분배기를 사용하여 분배전달하며, 전화국 방향으로는 각 가입자로부터의 광신호들을 수동의 광결합기를 사용하여 전화국으로 결합전달하는 역활을 한다. 이 때 전화국으로부터 가입자로의 신호는 모든 가입자에게 반송되므로 가입자신호의 보안 방안 및 다중접속방안이 필수적이며 그 역방향 또한 유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수동적 방식의 PON은 능동 광소자를 전화국 내부나 가입자 주거지역 내부에 국한시킴으로써 여러 경제적, 관리적 이점을 제공한다.
90년대 말 미국과 일본에서는 1.6 - 1.7기가비트급인 광통신기술이 개발되었다. 현재는 10기가비트급인 광통신기술이 마무리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으로는 앞으로의 멀티미디어 통신에는 부족하다. 적어도 수백기가 내지 테라비트급의 개발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기술로는 해결하기 어렵다고 보고있다.
현재 광통신기술은 반도체 레이저에서 나오는 빛을 렌즈에 모아 광섬유 안으로 진입시킨 후 빛의 강도를 모르스부호처럼 점멸시켜 상대방에게 보내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빛을 점멸시키는 속도에 한게가 있다. 실리콘반도체로는 1기가, 리튬반도체로는 40기가, 캘륨비소반도체로는 2백기가를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최근 연구되는 기술이 코히런트 검파방식이다. 이 방식은 매우 좁은 파장을 갖는 광신호를 라디오 주파수 신호처럼 변조하는 것으로 광신호를 입력신호에 따라 진폭변조, 주파수변조, 위상변조해 송수신하는 기술이다.
이러한 기술이 상요화하려면 먼저 매우 파장이 짧은 고성능 레이저와 이를 변조시키는 기술이 개발되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좀처럼 쉽지 않아 오는 2000년 이후에 가야 실용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국내의 광통신기술은 한국전자통신연구소, KIST를 중심으로 연구돼 80년대말 90메가비트급 광통신이 개발됐으며, 최근에는 8천64회선 용량인 565메가비트시스템이 개발, 서울과 제주를 연결하는 시범운영에 나서고 있다. 또 오는 95년을 목표로 3만2천회선의 용량인 2,488메가비트급의 광통신기술개발도 추진되고 있다.
미국의 프로디지 사는 서비스 개시 3년만에 1백50만 사용자를 확보하며 매출액 1억달러 이상의 매출로 대형 PC통신업체가 되었다. 프로디지는 88년까지 5년동안 서비스 개발, 기술시험 및 시장분석 작업만을 계속해 왔으며 89년 비로서 서비스를 실시하기에 이르른다. 특히 90년 서비스 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급신장, 현재는 1천5백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이 되었다.
프로디지의 성공에는 치밀한 시장조사가 있었다. 즉 인구통계를 세밀히 분석, 서비스를 확보하고, 광고주를 적극 유치함으로써 성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컴퓨서브는 온라인 정보통신서비스 및 네트워크서비스 사업 등을 하는 정보통신 종합회사이다. 또한 이 회사에서 제공하는 VAN서비스의 명칭이기도 하다. 자체 통신네트워크를 통해 미국내 5백여개 도시를 포함해 전세계 1백여개의 접속점을 두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포스서브를 통해 이를 제공하기도 했다.
서비스는 그 양과 질에 있어서 당양하고 광범위하여 각 분야의 DB를 망라하고 있다. 또한 미국내에서만 1천1백개의 회사와 정부기관에 전자우편과 부가통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가입자에게 비지니스 관련자료를 중점적으로 제공해 주고 있다.
79년 서비스를 실시한 이후 이용자는 급속히 늘어 89년에 50만명을 돌파하고, 100만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매출도 3년전에 비해 94% 신장하는 등 놀라운 발전을 하고 있다.
지난 86년 닛쇼이와이(주)와 후지쯔가 각각 50%의 합작으로 설립한 니프티서브 는 미국의 컴퓨서브와 라이센스 계약을 맺고 있다. 회사설립후 만 1년뒤인 87년 4월 3천5백명으로 서비스를 실시한 이후 92년 5월 현재 42만명의 회원을 확보, 120%의 놀라운 성장을 거두었다. 또한 20%정도가 법인이라는 것도 자랑이라할 수 있다. 특히 전체 이용의 60%를 차지하는 포럼은 니프티서브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이외에도 전자메일과 사랑방을 합친 서비스의 이용이 전체 이용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전기가 제공하는 PC-VAN은 86년 4월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GMail과 제휴하고 있다. PC-VAN의 특징은 간단한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전국을 망라하는 방대한 통신망, 정보의 충실성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서비스 이용자는 88년 5만5천명에서 92년 5월 현재 42만명에 이르고 있다.
다이얼로그정보서비스사가 운영하는 다이얼로그(Dialogue)는 65년 록히드사의 정보검색 연구개발 프로젝트로 시작되었으며 72년 온라인 조사 서비스를 상업화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다이얼로그는 지난 88년 7월 미국 제2의 신문 재벌 나이트-리버사가 록히드사로부터 3억5천만달러에 인수함으로써 소유주가 한차례 바뀌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이트-리버사는 현재 1백35개국에 1억 이상의 인구를 대상으로 뉴스 및 정보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다이얼로그의 가장 큰 강점은 3억3천만 레코드 분량의 4백개이상의 DB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지니스에서는 6백70만 기업의 재무상태 등을 알 수 있는 등, 기업관련 서비스가 2백여개의 DB로 구성되어 있다. 다이얼로그는 현재 90여개국에 12만명의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다.
다우존스정보서비스 그룹이 운영하는 다우존스 뉴스/리트리벌은 74년에 벙카라모사와 합작으로 설립되어 주로 경제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용자는 91년 3월 현재 23만명에 이르고 있다.
영국 브리티시텔레콤(BT)의 비디오텍스 서비스인 프레스텔(Prestel)은 73년 BT여?_구센터에서 뷰데이터(Viewdata) 란 이름으로 처음 제공되었다. 78년 6월 2차 시험을 실시 79년부터는 명칭도 현재의 프레스텔로 바꾸게 된다.
제공서비스는 1천2백개에 이르며 이용자들은 주로 상품이나 서비스 구입에 이용하고 있다. 이용자는 80년 1만명에서 91년 10만명을 돌파, 예상한 마큼의 큰 성과는 거두고 있지 못하다. 이는 단말기 가격을 낮추지 못하고 수익성을 고려해 초기요금을 비싸게 책정한 것이 그 이유로 생각된다.
바. 새로운 통신 기술
(1) 다중접속방식
(2) 분산통신, 클라이언트 - 서버통신
(3) 지능망
(4) 이동전화
(5) CT-2
광섬유에서 사용되는 전달과정은 펄스코드변조(PCM, pulse code modulation)라 불리우는 모스부호(Morse code)를 아주 세련시킨 방법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다.
지금까지 개발된 관련 기술은 TDMA(시분할 다중접속), CDMA(코드분할 다중접속)등이며, TDMA기술은 이미 미국기업에 의해 개발이 완료되어,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TDMA, CDMA를 막론하고 디지탈 셀룰러 기술의 핵심은 가입자 수용능력을 현재의 애널로그 시스팀에 비해 2-5배 이상 향상시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진행상황으로 미루어 셀룰러 기술분야에서는 유럽보다는 미국이 다소 앞서 있으며, 단기적으로는 CDMA보다 TDMA기술이 주도권을 쥐고 이동통신 네트웍분야의 발전을 선도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무선전화기 기술을 출발점으로 한 기술개발 방향은 가정용에서 공중용으로 개념을 확대시키고 있다. 현재 1단계인 CT-2의 개발이 완료돼 유럽, 미국, 동남아 일부지역에서 시범 또는 사용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는 단계이다. 향후 착발신이 가능한 시스팀인 CT-3의 과정을 거쳐 완전한 개인 통신이 가능한 PCN까지 발전해 갈 전망이다.
셀룰러와는 달리 PCN에서는 미국에 비해 유럽업체들이 앞서고 있다는 평이다. 이런 통신 네트웍 기술은 결국 한단계 더 진화된 형태로 통합된 다음 광대역ISDN의 일부로 편입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각종 통신기술은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동통신망 기술의 경우 현재의 애널로그 셀룰러라고 불리우는 기술이 디지탈화돼 가는 한편 가정용 무선전화기 기술이 CT-2(발신전용 무선공중전화), CT-3(착발신용 무선공중전화)의 과정을 거쳐 개인휴대통신(PCN)으로 발전하고 있다.
데이타통신도 앞에서 밝혔듯이 X.25라는 패킷통신 기술이 개발되면서 급속한 발전을 시작, 최근 들어 패스트패킷통신 등 신기술이 속속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신기술은 B-ISDN(광대역 종합정보통신망)이라는 최종목표를 향해 모여들 것이라는 게 통신 전문가들의 일관된 전망이다. 다시 말해 모든 통신망 기술은 장소나 시간에 관계없이 모든 형태의 통신 단말기가 무리없이 사용되는 통신의 이상향을 향해 일제히 전진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이동통신은 셀룰러통신에서의 기술개발과 가정용무선전화기 (CT-1)기술을 근원으로 하는 두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셀룰러(이동전화기) 기술은 네트웍 및 단말기의 디지탈화 작업, 즉 디지탈 셀룰러 시스팀의 개발이 최대의 관심사로 떠 오르고 있다. 미국, 유럽, 일본 등을 선두로 이동통신시장에서 사활을 가늠할 디지탈기술 개발에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미국에서는 71년 AT&T가 이동통신을 최초로 제안했으나, 미연방통신위원회(FCC)는 77년이 돼서야 시카고에 시범용 이동통신을 운영하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여러 규제로 83년 말까지 실용화되지 못했다.
84년이 되어서야 급속한 발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동통신의 급속한 발전으로 이보다 비용이 저렴한 CT-2 또는 텔리포인트(telepoint)로 불리우는 시스팀은 처참한 패배를 경험하게 되었다.
세계적인 이동통신 시장에서 모토롤러는 일본의 경쟁사들과 그리고 스웨덴의 에릭슨사와 더 많은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에릭슨은 지멘스, 알카텔, 필립스 등과 같은 다른 유럽회사들과 제휴하여 유럽전역을 커버하는 이동통신망을 개발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까지 GMS(Global for Mobile Communication, 이동통신을 통한 세계적인 시스팀)을 통해 이동통신망을 세계화하려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동전화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GMS의 성공은 유럽회사의 영향력 강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미국의 모토롤라도 같은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리듐(Iridium) 이라고 불리우는 이 계획은 77개의 위성을 연결하여 회사 자체의 세계적인 이동통신망을 구성하려는 야심찬 계획이다.
모토로라는 GSM과 마찬가지로 완전 디지탈방식을 채택할 것이며, 90년대 중반까지는 설치가 완료될 것으로 예상된다.
GMS과 이리듐 계획 모두가 인공위성을 통한 통신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위성통신의 시장전망은 어느 때보다 밝아지고 있다.
이 점을 의식한 일본 정부는 미국의 기술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기술에 기반한 위성을 개발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일본은 자체 개발 중인 H-2 위성발사대의 완성을 서두르고 있다. 이것이 완성되면, 미국의 타이탄(Titan) 로킷, 유럽의 아리안(Arian) 로킷과 격렬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위성을 통한 직접방송(DBS: Direct Broadcasting by Satellite)의 경우를 보면, 일본이 1984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이래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이미 위성통신을 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경우, 행운과 불행의 쌍곡선을 경험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비교적 행운만을 경험하고 있다. 즉 섬과 산악지대가 많은 일본에서는 위성통신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종전 호스트-단말기 중심의 기업 컴퓨터 환경이 고성능 PC로 대체돼 가면서 소형분산처리(downsizing)이 거스릴 수 없는 대세로 밀려오고 있다. 이미 미국, 일본 등 정보선진국의 각 기업들은 호스트-단말기 중심의 중앙집중식 전산시스템을 PC중심으로 한 소형분산처리시스템으로 서둘러 전환해 나가고 있으며, 이를 위한 컴퓨터업계의 신제품 개발경쟁도 뜨겁게 달아오를 전망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중대형기종에 맞물린 터미날이 자리하던 책상위를 PC가 대신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특히 이같은 PC는 GUI(grapic user interface) 등의 유연한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고해상도 그래픽처리, 다양한 소프트웨어의 보유등 기존의 더미 터미날(dummy terminal)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강력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또 개방형을 지향하는 컴퓨터업계의 네트워크 기술수준의 향상으로 이기종 컴퓨터간의 접속이 점점 쉬원지고 있으며, 메임프레임등에 비해 월등한 가격대 성능비를 강점으로 업무효율이 크게 향상되고 있다.
최근 대두되고 있는 다운사이징의 개념은 개별적으로 운용되던 PC 특유의 강점은 살리면서 종전 호스트 역활을 대행하는 서버와 네트워크 장비, 그룹웨어등의 SW를 통해 운영의 묘를 살린 통합적인 분산처리시스템으로 지향해 나가려는 것이 다운사이징의 주목적이다. 이를 위해 등장한 개념이 클라이언트-서버 컴퓨팅(client-server computing) 이다.
메인프레임-미니컴퓨터-PC에 이어 제4의 물결 이라 불리워 지는 클라이언트-서버 컴퓨팅은 데이터를 저장, 처리, 전송하는 중심 컴퓨터(서버)와 여기에 PC나 워크스테이션 등의 단말기를 접속, 상호간 네트워킹을 통해 각각이 CPU, 하드디스크, 주변기기 등의 자원을 공유해나가는 분산처리시스템을 말한다. 결국 다운사이징은 상호 독립돼 작업을 하면서도 정보가 고립되는 정보섬(Information Island)이 발생하지 않으며, 이기종간의 자유로운 통합을 통해 기업전체의 컴퓨팅파워가 올라갈 수 있는, 종전 LAN등에 비해 향상된 네트워크 컴퓨팅환경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다운사이징은 최근들어 그 개념이 더욱 발전해 라이트사이징(Right-sizing)이란 신조어를 낳고 있다. 메인프레임이나 미니컴퓨터가 PC로 이동하는 다운사이징과는 달리 라이트사이징은 고성능 컴퓨팅을 요구하는 작업에 대해 클라이언트의 데스크탑을 오히려 미니급이나 워크스테이션으로 이동, 다운사이징과 업사이징을 가장 적절하게 혼합해 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현재 다양하고 고품질의 서비스를 추구하는 통신망 및 서비스는 크게 3가지 방향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첫째는 다양한 복합 미디어의 정보를 어디서나 주고받을 수 있는 정보전달속도의 고속화와 광대역화이고, 둘째는 개인휴대통신(PCN)과 개인번호의 개념에 의한 통신서비스의 개인화, 세번째는 이용자에게 다양하고 안정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시스템 제어개념의 지능화가 그것이다.
이들 3가지 가운데 광대역화 및 개인화는 전송 및 개인기술에 힘입어 발전될 것이고, 지능화는 통신망의 구조 측면에서 기존통신망(PSTN)에 새로운 기술의 부가가 용이하도록 될 것이다. 통신 이용자의 서비스에 대한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망의 지능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통신망을 운용하는 운용자의 입장에서 급속한 기술을 신속하게 통신망에 수용시켜 서비스의 품질 향상 및 사업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기존 통신망에 지능망을 도입하게 된 결정적인 요소는 전송로 및 교환기의 디지탈화 및 공통선 신호방식 (CCS : common channel signalling)의 채택에 힘입은 것이다.
지능망 서비스는 1984년 미국의 AT&T가 분리되면서 설립된 BOC (bell operating company)사가 독자적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800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출현하게 되었다. 현재 지능망 서비스는 다양한 고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계속 발전하고 있다. 미국 및 일본에서는 800 서비스와 프리 다이얼(free dial) 같은 서비스는 통신사업자의 수입을 증가시키는 유망 사업으로 꼽히고 있다.
오늘날 전기통신 분야의 급속한 기술발전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창출해 냄에 따라 국내의 통신은 물론 국제간의 통신접속을 위해서 규격화된 표준이 필요하게 되었다. 표준화는 시장점유와 기술의 조기확보 측면에서 국가간의 이해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현재 국제전기통신연합(ITU :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을 통해 지능망서비스 표준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세계적인 공통관심사속에 B-ISDN(광대역종합정보통신망), 토큰링 네트워크( TRN : Token Ring Network), UPT(퍼스널통신) 등과 함께 중점 표준화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또한 선진국은 나름대로 표준을 개발하여 국가간의 표준으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지능망의 최종 목표는 어떠한 망이든지 각각의 서비스가 실현 가능하도록 표준화하는 것으로서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다. CCITT에서는 CS-1 (compatibility set-1)이라는 제명으로 25가지의 서비스 표준화를 발표하고 단계적으로 이를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CS-2, CS-3가 표준화될 때 수백가지의 지능망서비스가 이용자들에게 선보일 것이다. 이와 같이 많은 서비스가 국내는 물론 국제간에 통용되려면 지능망 서비스의 표준화는 서비스 상용화 이전에 우선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지능망은 공중전화망(PSTN : public switched telephone network)등 기존 통신망에 No.7 공통선 신호망을 통하여 컴퓨터와 고속대용량의 데이터베이스(DB)를 접속한 수직적인 망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고도의 통신서비스를 신속하게 실현할 수 있는 망구조를 말한다.
여기서 기존의 통신망은 음성이나 데이터와 같은 정보통신을 실제로 교환, 전송하는 전달층에 해당되고, No.7 공통선 신호망은 교환기 등 망요소 사이의 제어신호를 전달하는 신호층에 해당되며, 컴퓨터 및 데이타베이스는 제어 정보를 집중관리하는 서비스층에 대응된다.
지능망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망구성요소가 상호논리적으로 접속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망구성 요소는 전달층에 속하는 서비스수행교환기(SSP)와 신호층에 속하는 신호중계교환기(STP) , 신호망관리시스템(SEAS) 등이 있으며, 서비스 층에 속하는 서비스제어시스템(SCP) , 서비스관리시스템(SMS) 등이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애널로그 방식은 APMS, TACS/ETACS,NMT900 그리고 NMT450 등이 대표적이지만, 이러한 방식은 모두 셀룰러(cellular) 개념을 토대로 하고 있다. 현재와 같이 제한적인 주파수 자원속에서는 이러한 셀룰러 개념의 도입이 없이 일반인을 위한 이동전화서비스는 극히 일부인에게만 제한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동통신에서의 셀룰러 방식이란 제한된 주파수 스펙트럼의 반복된 사용을 통해 사용자수를 늘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주파수의 재사용을 위해 나누는 셀의 수는 7, 4 그리고 12가 있지만, 이중 7셀구성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7개의 셀은 인접채널과 혼신방지를 위해 3개의 섹터로 나누게 되어 결국, 주파수의 반복 사용이란 점에서 이동전화에 할당된 주파수를 21개로 쪼개어 7셀마다 계속 반복함으로써 서비스 지역의 크기와 관게없이 넓은 지역을 커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파수 재사용을 위한 제안들은 1940년대 미국의 AT&T에서 시도되었으며, 69년에 본격적으로 미국의 FCC에 제안형식으로 제출되었다. 그러나 제안된 셀이 초기개념만으로 실제 시스템 구성과 운영상에서 많은 인접 채널과의 혼신으로 어려움을 겪어오면서, 시스템 하드웨어의 구준한 개선으로 70년대말쯤 본격적인 셀룰러시스템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69년 일본의 NTT에서 400MHz대를 이용한 셀룰러 시스템을 개발하였으나, 상용화되지 못하다가 79년 도쿄에서 최초로 NAMTS시스템을 사용하여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초기의 시스템은 셀룰러 시스템으로 8천명까지 가입자를 수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셀룰러 방식의 도입 이전에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었던 서비스가 있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2천명의 가입자를 수용할 수 있는 단일 시스템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높은 고지에 한개의 송신기를 설치하여 수십Km까지 전파가 도달할 수 있도록 고출력을 사용하였다. 대부분 VHF나 UHF대의 상대적으로 낮은 주파수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서비스는 주파수의 제한된 사용과 고출력, 사용자 수의 제한 및 서비스 지역의 제한 때문에 상대적으로 서비스 요금이 비싸, 일부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서비스가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의 NAMTS에 이어 81년 NMT450이 북유럽의 여러나라에 도입되었고, 수용할 수 있었으며, 83년 10월 13일 미국의 지역벨인 아메리텍(Ameritech)이 시카고에서 처음으로 AMPS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많은 나라가 이 방식을 채택하였으며, 현재 우리나라가 이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채택된 방식으로 전세계적으로 가입자의 60%가 AMP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AMPS시스템이 채널수와 가입자수가 NMT450시스템을 훨씬 능가하지만, 유럽의 주파수 할당 현황상 800MHz를 사용하고 있는 AMPS 사용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자 TACS와 NMT-900을 속속 개발하여 유럽 여러나라가 채택하게 되었다.
<표 >은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이동전화시스템의 종류와 가입자수에 의한 시장점유울을 나타낸 것이다.
92년말 세계 이동전화의 총가입자가 추정수는 대략 2,300백만명에 이르고 있다. 이는 88년 세계이동전화 가입자수 400백만명에서 매년 50%이상의 성장율을 보여온 것으로 많은 전문가들이 향후 예측하는 바대로 연간 25%의 성장률을 감안한다면, 오는 95년에는 세계적으로 총가입자수가 현 가입자 수가 현 가입자의 약 2배인 4,500백만명에 이르게 되어 각 나라마다 현재 시스템의 수용가능한 가입자 용량에 한게를 이를 전망이다. 여기에 기존의 음성전화 이외에 여러가지 서비스, 예를 들면 이동 무선 데이타 서비스 등이 점차 도입되어 활성화되면, 이동전화의 새로운 수요가 더욱 증가하면서 시스템 용량의 한계를 더욱 빨리 나타내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주파수의 한게성에 기인하여 가입자수를 늘리기 위해 무한정 주파수 할당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새로운 방식의 도입으로 가입수를 늘리기 위한 차세대 이동통신 시스템인 디지탈 방식의 도입이 이루어지고 있다. <표 >은 각 나라별 인구 100명당 무선호출과 이동전화 가입자수의 현황을 92년말까지 추정한 숫자이다.
이러한 가입자수의 증가는 결국 서비스의 경쟁체제로 이어지게 되었다. 서비스 도입을 시작할 때에만 해도 이동전화 시스템의 설치비가 워낙 방대하고, 도 이에 다른 비싼 이동전화 요금으로 인해 가입자수가 적은 관계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국영전화회사가 독점하고 있으나, 수년전부터 가입자수의 높은 증가율로 인해 수익성이 보장되자 각 나라마다 서비스 업체의 복수 경쟁체제가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와 대만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가 복수도입을 도입하였거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의 경우 79년 서비스의 도입이 시작된 이래 NTT 이외에 8개의 이동전화 신규사업자가 지역별로 복수 경쟁체제를 이루고 있다. 또 홍콩의 경우 현재 3개의 서비스 업체가 복수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이동통신의 복수경쟁 업체의 지정을 올해 중에 실시할 예정이다. 물론 작년에 선정한 제2 무선호출은 올 10월부터 본격적인 무선호출사업을 실시함으로 본격적인 경쟁체제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복수 경쟁의 유도는 장점과 단점을 각각 가지고 있다. 단점으로는 주파수 할당을 몇 개 업체에 나누어줌으로써 한 서비스 업체가 모든 주파수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용량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데 반하여, 할당된 주파수를 몇개업체에 나누어 사용하여 콘트롤 채널의 중복등 주파수 활용율이 떨어진다. 그러나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이동전화요금의 자연적인 하락을 유도하기 위해 복수경쟁체제의 도입은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으며, 또 경쟁의 우위를 쟁취하기 위해 서비스의 질은 물론 새로운 서비스의 창출 또한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이동전화의 셀구성과 밀집된 도시지역의 운영상의 노하우 축적은 경쟁을 통하지 않고는 기대하기 어렵게 때문이다. 예로써 일찍부터 경쟁체제가 도입되었던 홍콩의 경우 경쟁적 상황에서 부단히 서비스 질을 향상시켜 온 허치슨 텔레콤(Hutchison Telecom)이 최근 아시아 각국에 진출하면서 세계로의 진출을 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자유경쟁이 가져온 장점인 것이다.
지금 사용되고 있는 애널로그 방식에서의 가입자수가 2-3년내에 포화에 이를 전망에 이르자 약 5년전부터 연구되어 온 여러가지 디지탈 방식의 도입을 각국에서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새로이 도입될 디지탈 방식은 USDC(U.S.A. Digital Cordless)과 GSM 및 코드분할 방식이 검토되고 있거나, 이미 도입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시분할 방식(TDMA)인 USDC방식이 이미 미국표준 방식으로 채택되어 여러 이동통신회사가 이미 도입을 추진하고 있으며, 지금 시험중에 있는 CDMA방식 또한 향후 표준채택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향후에 도입될 디지탈 방식을 결정하지 못한 상태이며, 다만 한국전자통신연구소가 주관이 되어 CDMA에 대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CDMA가 갖고 있는 큰 이점인 가입자 용량(애널로그 방식에 비해 20배)에도 불구하고, 상용화가 되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내다보는 이동통신 운영자와 각 나라들이 현재 사용 가능한 디지탈 방식으로 속속 전한하고 있다.
이미 유럽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GSM을 유럽표준으로 제정하여 설치에 들어갔으며, 아시아에서는 호주, 싱가포르, 중국이 GSM을 채택하여 시설도입이 시작되었다. 홍콩의 경우 4개 디지탈 이동전화사업자 가운데 3개 업체가 GSM을 그리고 나머지 1개 업체가 USDC 경쟁체제에 돌입하고 있다. 대만의 경우 잠정적으로 USDC를 결정한 상태에서 세게적 추이를 관망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일본이 JDC(Japan Digital Cordless)를 계획하고 있다.
결국 세계는 약 3가지 방식으로 분할될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다가오는 디지탈 시대에서도세계적으로 이동통신의 호환성을 갖기는 어려운 전망이다. 다만 GSM의 경우 거의 모든 유럽을 비롯하여 많은 아시아 국가가 표준으로 채택하게 됨으로써 가장 높은 호환성을 이루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때 국가간의 상호통신 교류에서의 이익이 두드러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CT-2기술은 영국텔리컴(BT)이 지난 80년말 처음으로 상용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기술적 명칭으로는 CT-2 ,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텔리포인트 서비스라 부르는 이 새로운 통신방식은 지난 80년대초 획기적인 이동통신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셀룰러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일반무선전화(코드리스폰) 기술에 의존한 것으로 특정 지역의 일정한 범위내에서 전화를 걸 수 있지만 받을 수는 없는 발신전용 통신시스템이다.
이 CT-2시스템은 통화 가능지역이 불과 2백-3백m에 불과하고 핸드오프기능 등도 없어 기존 이동통신시스템에 비해 성능이나 편리성면에서 우수하기 때문에 일반전화처럼 사용료가 싸고 지갑크기만한 20-30만원대의 단말기를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외에도 역, 백화점 등 대규모시설에 설치하면 대단히 효율적이며, 매우 좁은 주파수 내에서도 많은 통화를 수용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착발신이 가능한 CT-3 기술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지난 89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CT-2가 상용화된 이후 세계 각국에서 이의 도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CT-2에 대해 선두주자인 영국은 89년 상용서비스를 실시한 이후 영국무역산업성이(DTI)이 이의 전담사업자를 선정하는 등 이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꾀하고 있다. 한때 주파수의 혼선으로 서비스를 중단하는 사태까지 빚었으나 서로 다른 사업자간에도 호환성을 갖는 CAI 기술표준화를 제정하면서 이의 보급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프랑스텔레콤의 경우 지난해(전자신문 1288호 기준) 9월 스투라스부르지역에서 7백개의 기지국과 1만대의 단말기를 이용한 서비스를 실시하였다. 올해부터는 본격적인 상용서비스를 실시할 예정이다. 이탈리아 역시 로마와 밀라노를 중심으로 상용서비스에 나서고 있다. 나머지 유럽의 나라들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의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4. 나쁜 해커, 좋은 해커
가. 2세대 해커 - 홈브루(Home Brew) 컴퓨터 클럽
나. 3세대 해커 - 해커들의 게임개발
다. 위험한 해커
(1) 워케임
(2) 바이러스
라. GNU
1975년 3월 5일 밤, 실리콘밸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든 프렌치라는 한 해커의 주차장에 3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프렌치가 여기저기 붙여 놓은 포스터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이다. 프리랜서 기술자, 전자부품상점 주인, 전자공학자등이 자신의 집에 컴퓨터를 갖는 꿈을 꾸며 모여들었다. 이들은 당시 막 개발된 인텔의 8800칩에 대한 논쟁을 벌였고, 알테어 8800 이라는 3백97달러 짜리 개인용 컴퓨터를 화제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이것이 이후 해커의 꿈을 한층 더 발전시켰던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탄생이었다. 홈브루 (home brew)라는 말은 원래 집에서 담근 술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해커들은 스스로 제작한 컴퓨터를 일컫는 말로 통했다. 제 2세대 해커들은 핸드온 명령을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지키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컴퓨터를 보급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제 2세대 해커는 캘리포니아를 중심무대로 활동한 하드웨어 해커들로 제 1세대의 해커들이 MIT라는 상아탑에 매몰되고 컴퓨터라는 마술 자체에 침잠해 컴퓨터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임무를 게을리했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홈브루 컴퓨터 클럽 등을 중심으로 컴퓨터를 상아탑이나 거대기업의 전산실에서 해방시켜 컴퓨터의 마술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삼았다. 결국 그들은 알테어 8800 , 애플Ⅱ 와 같은 최초의 퍼스날 컴퓨터를 만들어 냈고, 사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애플 컴퓨터로 유명한 스테판 워즈니액 역시 위의 홈브루클럽에 참여했다. 워즈니액은 자신처럼 컴퓨터의 제작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이 30명이나 있었다는 사실에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8800칩을 연구하고, 이어 신형 마이크로프로세서 초기모델인 6502 칩을 구입해 초보적인 컴퓨터의 심장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저 홈브루의 친구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만들었던 이 컴퓨터는 클럽의 회원들에게는 모두 공개되었고, 이들과의 토론을 통해 많은 개선을 거쳤다. 이 때 아타리사에 근무하던 스티브 잡스는 이 회로기판의 대량 생산판매를 주장했다. 워즈니액은 한때 과수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잡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애플 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애플을 세운다. 주소는 한 우체통으로 정하고, 주차장을 작업실로, 자금을 위해 잡스는 폭스바겐을 팔았고, 워즈니악은 HP의 계산기를 판매하면서 자금을 모았다. 호사가들이 보는 잡지에 6백66달러66센트라는 가격의 애플컴퓨터 광고를 냈다. 아울러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는 무료 혹은 최소의 비용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80년대, 즉 제 3세대의 게임해커들은 앞선 선배들과는 달리 교외에 위치한 자택 침실에서 안락하게 컴퓨터를 마스터한 디지탈 모험가들이다. 이들은 선배 해커들이 이룩해 낸 성과를 토대로 신비의 집 , 공주와 마술사 등의 컴퓨터 게임을 만들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게임왕국 시에라온라인사 등 본격적인 해커사업체를 만들어간다.
1980년 1월 켄 윌리엄스는 거의 전재산을 들여 애플Ⅱ 컴퓨터를 구입했다. 그는 애플Ⅱ는 전문가들만이 사용할 것라는 생각으로 근사한 프로그램 언어의 개발에 메달렸다. 그의 아내 로베르타 윌리엄스는 내성적이고 공상을 즐기는 여자였다. 그러던 어느날 윌리엄스는 돈 우드라는 해커가 만든 어드벤쳐게임을 집에 가지고 왔다. 이 프로그램은 로베르타를 붙잡았고 며칠동안 이 게임에만 매달려, 결국에는 이 모험게임을 완전히 풀 수 있었다. 로베르타는 애플에서 실행되는 모험게임을 더 구해 보았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는 스스로 새로운 모험게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신비의 집 (Mystery House)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신비스러운 일에 대한 이야기를 작성해가기 시작했다. 2주일간 작성한 시나리오를 남편 윌리엄스에게 보였으나 그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로베르타는 끈질기게 윌리엄스에게 이를 설명하며, 이를 프로그램으로 개발하도록 했다. 마침 버사 라이터 (Versa Writer)라는 그래픽 입력장치가 개발되자 이를 구입하여 수십장의 그림을 게임의 안에 그려 넣었다. 그러나 이는 아주 볼품이 없었다. 윌리엄스는 결국 70장의 그림을 한장의 디스크에 압축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림전체가 아닌 그림에 나타난 선의 위치를 표시하는 수법이었다. 한달의 작업 끝에 완성된 프로그램은 온라인 시스템 (On-line System)이라는 회사를 세워 본격적인 판매에 나섰고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워게임
그러나 앞에서 밝힌 좋은 의미의 해커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해커들도 있다. 1983년 발표된 영화 워게임 (War Game)은 이러한 예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고등학생이 비디오 게임 프로그램을 훔치려다 잘못해 미국 방공 사령부의 컴퓨터에 침입, 하마터면 핵전쟁이 일어날 뻔한 위기상황을 소재로 엮은 것이다. 이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많은 청소년들이 해커를 자처하고 프로그램 개발과 불법 액세스(access) 방법을 개발하는데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영화가 발표된 직후 미국 밀워키시에 사는 일단의 청소년들이 텔레네트라는 정보통신망에 몰래 들어가 로스알라모스 핵폭탄연구소, 은행, 캐나다의 한회사, 뉴욕 암연구센터 등의 시스템속을 한동안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침투사실을 감추기 위해 몇개의 데이타 파일을 지웠는데, 불행히도 6천명의 암환자에 대한 임상기록이 수록된 뉴욕 암연구센터의 파일이 이 가운데 포함돼 있었다. 이 사건이 공개되자 미국 국민들은 이들이 핵폭탄 연구소의 컴퓨터에까지 마음대로 드나들어 자칫하면 워게임 이 실제 상황에서 재현될 뻔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1989년 3월 서독 경찰은 하노버, 함부르크, 서베를린 등의 15개 가옥을 수색하고 다섯명을 체포했다. 이들은 프랑스의 무기 및 전자제품 제조회사, 유럽공동 첨단물리학연구소, 유럽공동 우주항공연구소, 미항공우주국(NASA), 로스알라모스 핵폭탄연구소, 일본 고에너지물리학연구소 등 세계적인 첨단군사과학 관련 컴퓨터만 골라 침투했다. 수사결과 이들이 군사관련 정보를 훔쳐 소련 스파이들에게 현금과 마약을 받고 넘겨준 사실도 들어났다.
이외에도 각국의 정부기관, 첨단연구소, 은행 등의 대형시스템들이 해커들의 주요 공격목표가 돼 몸살을 앓고 있다. 해커들이 이처럼 대형 컴퓨터에 침투하는 동기는 호기심과 공명심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은 컴퓨터에 흠뻑 빠져, 기발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거나, 대형시스템의 패스워드(password)를 알아내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한다. 만약 어떤 해커가 기발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거나, 특정 시스템의 암호를 푸는데 성공했다고 소문이 나면, 그는 해커들의 세게에서 일약 영웅으로 칭송된다.
컴퓨터와 통신기술의 결합에 의해 최근 각광받고 있는 정보통신망들도 해커들이 활약하는 주무대이다. 유명통신망들은 한결같이 이들의 출입을 막기위해 보안장치를 강화하고 있지만, 일단 패스워드가 한번 공개되면, 해커들의 침투를 막기가 용이하지 않다. 보안장치를 강화하면 할수록 합법적인 이용자들의 불편 또한 커지기 때문이다. 통신광들은 자기들끼리 사설전자게시판(BBS)을 열고 해킹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노이먼이 연구한 자기증식 소프트웨어란 자기자신이 복제를 한없이 계속해 점점 증식해 가는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실제로 컴퓨터 바이러스가 만들어진 것은 그로부터 20년쯤 지난 1970년의 일이다.
덩굴풀(creeper)이라고 명명된 초기의 컴퓨터 바이러스는 개념도 확실하지가 않았다. 덩굴풀은 불리턴 보드 네트워크(BBN)의 보브 토머스가 시범용 프로그램으로 작성했다. 덩굴풀은 미 국방부의 DARPA통신망을 통해 확산되었고 침입한 시스템에 나는 나는 덩굴풀이다. 잡을테면 잡아봐라!는 메세지를 남겼다. 이것을 잡기위해 덩굴풀을 제거하는 잔디깎기가 개발되었다.
덩굴풀과 잔디깎기의 전쟁이야기는 서부 온타리오 대학의 A K 듀드니교수를 자극시켰다. 그는 서로 파괴하는 프로그램의 개념을 도입한 컴퓨터 게임 코어워즈를 만들었다. 그는 게임이 얼마나 위험한 폭탄인지 몰랐다. 그러나 그 게임의 진화는 컴퓨터 바이러스의 새로운 기술의 기초가 되었다.
83년 가을, 미남부 캘리포니아대학의 전기공학과 박사과정에 있던 청년 프레드 코엔은 암호이론수업을 받던 중 컴퓨터 바이러스의 개념을 떠올렸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전세계의 퍼스컴을 모두 집어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이런 생각을 비밀유지관리 관련작업을 하고 있던 주변 사람들에게 경고했지만 그들은 컴퓨터 바이러스를 공상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일로 간주하고 미리 대책을 강구하는데 소홀했다.
그러나 공상은 뜻밖의 장소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파키스탄의 한 조그만 도시에서 퍼스컴가게를 경영하던 형제가 컴퓨터 바이러스 소동의 장본인. 형인 암샤드 파루크 알비(26)는 펀자브대학에서 물리학과를 졸업한 경력으로 동생과 함께 퍼스컴의 수리방법을 IBM PC환경에서 독학으로 배워갔다. 그들은 그 지방의 기업용으로 특수 소프트웨어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다른 업자가 이것을 멋대로 도용하고 있는 것을 알고 분노했다.
86년 암샤드는 부정한 사용자의 컴퓨터에 침입해 처리를 마비시키고 그들 형제에게 수리를 의뢰토록 할 목적으로 자기증식형 바이러스를 만들었다. 로터스1-2-3이나 워드스타의 복사판에도 바이러스를 주입했다. 그것을 산 미국인들은 미국에서 친구들에게 디스킷을 빌려주었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늘 때마다 바이러스는 전염됐다. 이렇게 해서 세계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일명 정보사회의 에이즈 (AIDS)라 불리는 컴퓨터바이러스도 대개 10대 해커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바이러스가 유전인자를 갖고, 스스로를 무한정 복제하는 것처럼 컴퓨터바이러스도 프로그램속에 자기자신을 복제하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이라고 불리운다. 1980년대 중반이후 발견되기 시작한 컴퓨터바이러스는 퍼스널컴퓨터의 급속한 확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에도 큰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최초의 바이러스프로그램은 브레인바이러스는, 파키스탄인 앰자드형제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앰자드는 유명 소프트웨어를 복제해주는 브레인컴퓨터라는 가게를 운영했는데, 외국인이 복사하러 오면 몰래 바이러스프로그램을 끼워 주었다. 외국인은 복제행위가 불법인줄 알면서도 복사해가는 것이므로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는 애자드의 논리였다. 그러나 브레인바이러스는 최근 기승을 부리는 바이러스들에 비해 실제 큰 피해를 입지는 않는다. 화면을 켜면 (c)brain 이란 메시지가 나타나고 쓸데없는 프로그램을 증식시켜 기억공간을 차지하며, 컴퓨터속도를 떨어뜨리지만 데이타나 프로그램을 파괴하지는 않아 양성바이러스에 속한다.
최근에 발견된 악성바이러스들은 자신을 복제할 뿐만 아니라 디스크에 저장된 데이타나 프로그램을 파괴하거나 변형시킨다. 또 브레인바이러스와는 달리 저작자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해커들이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에서 실력부족으로 미완성의 프로그램이 짜여져 이 프로그램이 무한정 자기복제를 계속하거나, 장난으로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악성바이러스로 변형된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사상 최대의 바이러스사건은 1988년 11월 2일 발생했다. 이날 저녁 미국의 주요대학과 국방연구기관에 설치된 인터네트(internet)망은 한 바이러스의 침입을 받았다. 이 바이러스는 급속도로 번져나가 1시간만에 미국 전역의 6천여개 컴퓨터를 감염시켰고, 겁먹은 사용자들은 스스로 인터네트와의 연결을 끊어 버렸다. 다음날 버클리와 MIT의 전문가들이 인터네트의 복구에 나섰고, 이 바이러스의 정체는 곧 드러났다. 코넬대학 전산학과 대학원생인 로버트 모리스(당시 26세)가 이 바이러스의 개발자임이 밝혀졌다. 1990년 미국의 지방법원은 이 사건의 피고인 모리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1988년 3월 이스라엘의 한 대학에서 발견된 바이러스는 1988년 5월 13일에 이 대학의 전체파일을 한꺼번에 지워 버리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었다. 이날은 팔레스타인들이 추방돤 지 40년이 되는 날이어서 팔레스타인 출신의 프로그래머가 이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에서도 왕립협회의 컴퓨터가 바이러스의 침입을 받아 피해를 입었고, 1989년 태국에서는 한 은행에서 바이러스가 고객에 대한 데이타의 일부를 손상시켜 큰 피해를 입혔다.
국내에도 해커들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여러번 발견되었다. 지난해 봄 한국데이타통신(데이컴)이 운영하는 한글전자게시함에 바이러스서울연합 이란 이름으로 주전산기의 일부 기능을 마비시키겠다는 경고가 실렸다. 이 경고문에는 데이컴의 서비스가 미흡하고 사서함 이용자들의 장난편지에 분노를 느껴 호스트컴퓨터의 데이타파일을 파괴하겠다 고 적혀 있었다. 다행히 이 경고는 실행되지 않고 해프닝으로 끝났으나, 데이컴은 컴퓨터 단말기의 비밀번호를 모두 바꾸고, 기술자들이 24시간 대기하는 소동을 벌였다.
또 다른 증거는 근래에 발견된 바이러스프로그램 가운데 몇 종류는 국내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바이러스백신프로그램 개발자 안철수씨는 지난해 악명을 떨쳤던 LBC바이러스는 개발자가 한국인일 것으로 추측한다. 전염성이 강하고 하드디스크를 몽땅 못쓰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이 바이러스는 프로그램중에 virse program message Nih to Lbc 라는 메세지가 나오는데, 여기서 Nih나 Lbc가 한국인의 영문명 머릿글자로 짐작된다는 것이다. 또 바이러스가 외국에서 발견된 예가 없고 프로그램중 영문 철자가 가끔씩 틀린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1990년 8월에 발견된 11월 30일 바이러스는 제작자가 케텔에 공개사과문을 낸 것으로 유명하다. 제작자는 원래 5월 18일(광주민중항쟁기념일)에 518 이란 숫자가 깜빡이도록 할 계획이었는데 실수로 11월 30일에 1130 이 깜빡이도록 되었다고 해명했다.
GNU(Gnu’s Not Unix)는 소프트웨어의 공개 개념을 표방하는 비제도권 단체 인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ree Software Foundation)의 종합적인 프로젝트다.
지난 1985년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일원인 도브박사가 GNU를 논문에 발표하긴 했으나 기본적인 개념은 이보다 1년 반전쯤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리더인 「리차드 스톨만」에 의해 정립됐다.
GNU는 컴퓨터 프로그램은 물론 모든 관련 정보를 돈으로 주고 구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을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있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기초적인 법률정보나 의학상식들을 특별하게 값비싼 대가를 치루지 않더라도 얻을 수 있는 것 처럼 향후 21세기 정보화사회를 맞아 현대인들이 인류 공동의 지적재산으로서 컴퓨터 관련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GNU의 기본 정신이 정립되던 80년대 초반은 PC시장의 급격한 성장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필두로 상업용 소프트웨어들이 줄을 잇던 시절이다. 당시 일부의 해커들은 소비자가 일단 물건을 구입하면 제조사는 어떤 권리나 제약도 가할 수 없는 일반적인 소비재와 달리 소프트웨어의 경우 구입후에도 지속적으로 사용상에 제한을 하는 소프트웨어회사들의 상업화에 염증을 느끼게 됐다. 따라서 이들은 누구나가 제약없이 자유롭게 소프트웨어를 배포하고 공유할 수 있는 필요성을 느끼고 자유 소프트웨어재단의 설립을 추진하게 됐다.
설립의 취지에 따라 이 재단에서 개발된 소프트웨어는 자유롭게 수정을 가하는 것이 허용됐고 개인이나 기관에서 이를 수정해 성능을 향상하면 이를 더욱 권장하는 형태로 소프트웨어를 배포해 왔다. 업무에 사용하는 실행프로그램은 물론 소스코드까지 체계적으로 공개해왔기 때문에 일부 제품의 경우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 상업용 소프트웨어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이같은 활동을 벌이고 있는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궁극적인 목표는 OS에서 워드프로세서, 전자메일 프로그램,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버거, 유틸리티 등을 총망라하는 완벽한 소프트웨어 사용환경을 만드는 것. 이미 상당부분 이 계획이 진척돼 디버거와 OS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결과가 발표되고 있다.
현재 일부 매니아를 중심으로 사용이 급증하고 있는 리눅스의 경우도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이 부르짖고 있는 소프트웨어 사용에 대한 자유, 무료 배포의 정신에 따라 세계 각국의 프로그래머들이 개발해 배포하고 있는 GNU 소프트웨어의 하나이다.
5. 멀티미디어와 주변기기
가. 컴퓨터 그래픽의 제4기
(1) 홀로그램
(2) 영화와의 결합
(3) 자연과학과의 접목
나. 게임과 MSX
다. XT의 출현과 게임
라. 그래픽 카드
마. 레이저 프린터
80년대에 들어와 컴퓨터 그래픽은 반도체의 급속한 진보에 따라 대형화와 퍼스널화가 진행되어 OA 시대를 맞게 되었다. FA 시대, 로보틱 시대로 불리워질 만큼 컴퓨터 그래픽은 산업계의 여러 분야에 영향을 주고 있다. CRT는 76년대의 스트레지형 CRT대신 선표시부터 풍부한 색채표시 능력을 갖추면서 면표시 기능까지 갖춘 래스터 스캔 CRT가 개발되어 색면으로 입체물의 표면을 색칠할 수 있어 현실의 시각에 가까운 솔리드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즉 선표시로부터 면표시로 변화하여 옮겨가는 형태를 화상에 자유스러운 형태로 조작할 수 있다.
IBM의 연구원 만델브로트가 주장한 프렉탈 이론은 산의 표현, 해안선, 혹성의 표면 등 자연계의 복잡한 경관을 묘사하는 새로운 질감 묘사 기법을 가능하게 했다. 이와 같은 사실주의적 경향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며 컴퓨터 그래픽의 기술혁신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최근의 컴퓨터 애니메이션에 의한 컴퓨터 그래픽의 실용기술은 컴퓨터 애니메이션이나 예술적 표현법으로서 정착했고 근래에 없었던 예술 표현으로서의 새로운 시각을 개척했다.
70년대에 이미 제록스사의 팔로알토 연구소에서 개발된 앨토 컴퓨터는 모든 대화를 마우스가 지원되는 그래픽 모드에서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앨토의 개념을 근간으로 애플사는 1980년대 중반에 리자(Lisa)와 매킨토시를 잇따라 개발한다.
(1)홀로그램
홀로그램이란 그리스어의 Holos(완전한)와 Grama(메세지)가 합쳐진 합성어로 3차원상이 기록되어 재생될 때 입체적인 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록체를 말한다. 이는 47년에 영국의 과학자 데니스 게이버(Dennis Gabor)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이를 생각해 낼 때까지는 3차원상을 사진에 기록하여 재생시키는 일은 불가능했다. 처음 홀로그래피에 대한 논문이 발표되었을 때 특이한 성질 때문에 많은 놀라움이 표현되었다. 게이버 교수는 이미 과거에 마련되어 있었던 홀로그래피의 기본 부분들을 결합하였으나 그 충분한 위력을 발휘하기에는 시기가 일렀다. 왜냐하면 근대까지 간섭성을 지닌 단일 진동수의 빛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홀로그래피에 필요한 이 빛은 60년에야 이런 성질을 가진 새로운 광원인 레이저(laser)가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47년 당시 게이버 박사는 완전한 홀로그래피를 실증하지 못했고, 63년 미국의 과학자 에미트 리드(Emmett Leith)가 레이저를 홀로그래피에 이용하게 됨에 따라 빛을 발했다.
홀로그램은 물체에서 나오는 광파와 기준파의 간섭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간섭무늬를 기록한 것으로 이 사진 기록이 현상된 다음에 다시 레이저 광으로 조명하게 되면 원래의 모습이 상으로 재생하게 된다. 이 재생상은 대단히 생생하고 입체감을 보여주며 보는 사람의 여러 각도에 따라 각기 다른 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홀로그램의 패턴은 레이저로부터 나오는 단일 빔(beam)을 편광기로 나누어 한 쪽 파동은 사진 건판에 기록하고자 하는 물체에서 나ㅏ오게 하고 나누어진 다른 쪽 빔은 단순히 평면파(reference beam : 기준파)를 발생하도록 하면 이 두 파는 간섭을 일으키게 되고, 간섭을 일으킨 파는 사진 건판에 기록되어 간단한 홀로그램이 만들어지게 된다. 반대로 기록된 물체를 재생하고자 할 때에는 홀로그램을 원래의 기준파와 같은 파동으로 비추어 주면 물체는 실물과 똑같은 완전한 3차원으로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은 놀라운 성질에 많은 관심이 쏠렸으나 실제로는 3차원으로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은 놀라운 성질에 많은 관심이 쏠렸으나 실제로는 3차원 영상에 대한 발전보다 상업, 군사목적에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이전까지 쓰인 사진 건판은 현상을 해야 하는 시간적 제약 때문에 실시간으로 쓸 수 있는 물질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PROM (Pockets Readout Optical Modulator), LCLV(Liquid Crystal Light Value) 등과 같은 우수한 물질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이들 물질은 값이 싸기 때문에 일부 분야와 고신뢰도를 요하는 군사용으로 많이 사용된다.
(2)영화와의 결합
그래픽 기술과 영화산업의 결합도 이루어진다. 컴퓨터를 영화에 이용하려던 최초의 사람은 존 휘트니 1세이다. 그는 1970년대에 ?를 소재로한 몇몇 영화에 컴퓨터를 등장시켜 카메라를 제어하는데 이용한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진전된 영화는 1977년에 발표된 루카스 감독의 별들의 전쟁 (Star Wars)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전체 3시간의 영상중에서 컴퓨터가 그려낸 영상은 90초에 불과했다. 이마저 ? 컴퓨터가 그린 영상을 덧칠을 한 것이었다. 어쨋든 별들의 전쟁의 흥행성공에 자극받은 ? 스튜디오 영화팀은 블랙홀 ?이라는 본격적인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이용한 영화를 만든다.
젊은 애니메이터인 리스?와 전직 변호사인 쿠슈너는 모스크바 올림픽용 만화영화인 ?올림픽 을 완성하기 위해 손을 댔다가 미국의 불참으로 NBC와의 모든 계약이 취소된다. 낙심한 그들은 비디오 게임에서 힌트를 얻어 한 시나리오를 꾸몄다. 다소 엉둥한 내용의 이 영화는 1백 5분의 상영시간중 15분이 컴퓨터로 제작되었는데, 자연적인 물체를 수식으로 표현하고 이를 다시 화면에 표시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계산이 필요했고 그만큼의 투자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 자체의 문제로 인해 트론이라는 이름으로 개봉된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한다.
휘트니의 아들 존 휘트니 2세는 아버지의 실패를 설욕이라도 하려는 듯 다시 컴퓨터 영화업에 뛰어든다. 이번에는 조금더 첨단인 슈퍼 컴퓨터 크레이 XMP를 이용해서 트론보다 7백배나 빠르고, 정교한 영상으로, 7백억가지의 색을 절묘히 배합, 기존 애니메이터로는 불가능한 영상을 창조하였다. 이번에는 본전도 건지고 약간의 수입도 올렸다.
(3)자연과학과의 접목
그래픽이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분야는 의학분야이다. 현재 수준은 컴퓨터상에서 수술을 수행한후, 여러 그래픽 기술을 이용해서 걸음걸이를 시켜볼 수 있다. 이 때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이 과정을 걸음걸이가 완전해질때까지 다시 반복해볼 수 있는 것이다. CAD/CAM 기술이 인간의 신체에도 적용된 것이다. 실제 미국의 특수외과에서는 CAD/CAM을 이용하여 주문받은 부품을 설계하여 그 모형을 보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래픽은 실험수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분야를 만들었다. 이제 생물학자나, 화학자가 컴퓨터를 통해 분자 모형이나 유전자 배열모형을 그려주는 것은 이제 필수적인 연구 수단이 되었다. 나아가서는 인간의 창조력을 돕고 있는데, 메스매틱스 라는 수학용 프로그램은 수식으로 표현되는 거의 모든 모형을 보여준다. 이 도구를 이용해 새로운 발견이 속속 이루어 지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분야에서 이를 응용한 분야가 나오게 되었다. 예술과 컴퓨터기술, 통신기술이 결합한 인공현실 (Artifitial Reality), 가상현실 (Virtual Reality), 가상환경 (Virtual Environment), 인공두뇌공간 (Cyber-space)이라 불리우는 세계이며, 이를 구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을 가상현실시스템 (Virtual Reality System)이라한다. 인공현실이라는 단어는 이미 70년대 중반 이분야의 개척자중의 한사람이며, 비디오플레이스 (Video place) 개념을 창안한 크루거(Krueger)에 의해 탄생했으며, 그후 VPL리서치의 레이니에(Lanier) 사장이 가상현실(VR)이라는 말로 다시 표현했다.
오늘날의 가상현실은 전자계산학, 특히 인공지능학(Artifitial Intelligence), 입체 혹은 실체 안경학(Stereoscopy), 모의 실험(Simulation) 등 여러 학문의 복합체이며, 이는 지난 4반세기 동안 행해진 학계, 산업계, 연구소의 꾸준한 연구결과라 할 수 있을것이다. 그 예로 미국 라이트패터슨공군기지의 한 연구소에는 지난 20년동안 Super cockit Program 과 관련하여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HMD : Head Mounted Display)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해 왔으며, 이곳에서 개발된 비행 시뮬레이터(Flight Simulator)는 VR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MIT에서는 1970년 후반부터 가상탐험 (Virtual Exploration)이라는 입체디스플레이 (Stereo-scopic Display)에 관한 연구를 해왔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빠른 진전은 1980년대 중반 미항공우주국(NASA)의 에임즈 연구소에서 이 연구에 필요한 인력, 재력, 기술이 모임으로써 이루어 졌다. 미래예측자를 포함한 그 구성원을 보면 컴퓨터분야 연구원, 특히 인간과 컴퓨터 인터페이스(Human Computer Interface)기술자, 인지과학자, 예술방면에 능통한 사람, 그리고 모험게임 프로그래머들이 처음으로 VR의 시제품을 제작하였다. 실제로는 오토데스크사에서는 하이사이클이라는 고정자전거를 타고 머리에 HMD를 쓰고 자전거의 페달을 빠르게 돌리면 자신이 둥둥 떠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전원위를 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이러한 상용화 되어 개인에게까지 보급되려면 2020년경에 가서야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그 시장은 6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VR의 정의는 사람에 다라 약간씩 차이가 난다. 그 예를 보면, 컴퓨터를 이용하여 생성한 무한한 인공의 세계에서 인간이 현실감을 체험하는 것 , 사용자가 단지 컴퓨터 데이타로 존재하는 대상물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게 하는 것 , 대화식 3차원 모델링 시뮬레이션을 위한 첨단 기술과 움직임 (Movement)을 감지할 수 있는 입력 메카니즘의 병합적인 응용 , 컴퓨터를 이용하여 생성한 3차원 환경에서 사용자가 특수 안경, 데이타 장갑, 특수 옷(body suit), 비틀리는 공(torque ball)을 이용하여 대상을 조정하는 것 등으로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상현실은 인간성이라든가, 윤리 도덕에 미칠 영향을 자금부터 연구하는 것이 밝은 미래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
84년말 VPL리서치사를 설립한 이후 재론 래니어는 VR(Virtual Reality)머신의 개념과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에 온힘을 기울였고 VR이라는 용어 자체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영에서는 서툴러 그가 가구어온 VPL리서치사를 프랑스의 톰슨사에 넘기고 만다. 그리고 자신은 VPL의 핵심간부와 함께 도메인 시뮬레이션사를 설립해 재기를 위해 연구에 몰두한다.
그런데 이러한 1980년대 초 초기 게임 전성시대에 가세한 또 하나의 주역이 있었는데 MSX 기종이 바로 그것이었다. 애플II로 대표되는 애플 시리즈가 미국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MSX 기종은 일본을 기반으로 한 기종으로서 팩(Pack)이라는 게임 전용기에 일반화된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있었다. 애플 시리즈의 게임들이 대부분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통해 배포되고 있었던 것에 비해, MSX 기종의 게임들은 게임 팩이라는 롬(ROM)에 수록된 형태로 게임을 제공하였다. 롬은 플로피 디스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입출력 처리 속도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MSX 기종의 게임들은 거의 오락실 수준의 빠른 스크롤링과 사용자 응답 속도를 보일 수 있었다. 따라서 MSX 기종의 게임들은 이른바 슈팅(Shooting) 게임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는데, 이는 애플 시리즈의 비교적 느린 아케이드 게임의 장르와 유사하면서도 보다 빠른 스피드 위주의 게임을 가리키는 차별화된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었다.
85년 말경, MSX라는 새롭고도 이상한 기종이 국내에 상륙했다. 모 기업의 과장광고 탓도 컸지만, 새로운 기종에 흥미를 느낀 일반 사용자들은 쉽게 하드웨어의 교체를 선택했고, 이때 이미 국산게임의 맥은 시들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MSX는 무엇보다 게임을 하기 쉽게 되어 있는 셈틀이었으며, 롬팩의 광범위한 확산으로 나중에 가면 거의 게임기화돼 버리게 된다. 게임을 만들어 하겠다는 소박한 생각은 이미 일반 사용자에게서 사라져 버리고, 오직 새롭고 신기한 게임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새로운 풍조가 유행하게 되었다. 한편, Apple은 그나마 미국의 본의 아닌 지원사격에 힘입어, 새로운 Apple용 상업게임들의 유입과 함께 여전히 사용자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86년, 울티마(Ultima) 시리즈 4탄이 등장해서 불법복제의 온상이던 세운상가가 북새통을 이룬 일이 있었으며, 이후로도 <마이트 앤 매직(Might & Magic)> 시리즈, <바즈 테일(Bard's Tale)> 시리즈 등의 게임들이 속속 유입, 애플의 황금시대로 불리기까지 했다.
비디오 게임은 전대미문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982년 미국에서의 매상고는 30억달러에 도달했다. 그러나 너무 빠른 성장 때문인지 85년에는 이러한 상승이 갑자기 멈추기 시작했다. 아타리는 카트리지를 쓰레기 매립장에 묻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
즉, 88년 IBM-XT가 개인용으로 나타나기까지 국내 개인용 셈틀 시장, 그 가운데서도 게임시장은 Apple, MSX의 양대산맥이 완전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이런 상태가 적어도 2~3년은 가리라 믿고 있었으며, Apple과 MSX의 계속적인 업그레이드는 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듯이 보였다. 필자 역시 Apple II를 구입할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 87년이었다. 그러나 88년 XT가 본격적으로 양산, 보급되면서부터 이러한 기대는 뭔가 불안하게 바뀌어가기 시작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XT의 출현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을 풍미한 초기 게임 전성시대는 16비트 IBM PC의 등장과 함께 막을 내리며 암흑기를 맞게 된다. 게임의 전성시대 구가와는 달리 한글 처리에서 난맥을 보여 사무용으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던 이들 8비트 기종들은 16비트 PC/XT가 등장하자 급속하게 쇠퇴해 버리고 말았다. 이와 함께 기존 애플II용 게임을 공급하던 업체들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부분 PC/XT의 하드웨어 공급업체로 업종을 전환하자, 신규 게임의 공급마저 단절되어 8비트 기종의 몰락과 함께 초기 게임 전성 시대는 급속하게 막을 내리고 만다.
1980년대 중반부터 호황을 누린 IBM PC 호환기 시대는 과거 애플II 시대와는 달리 사무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어 일시적이나마 컴퓨터 게임 암흑기를 가져왔다. 당시 대부분 흑백 허큘리스 카드(일명 천하장사 카드)를 장착하고 출하된 XT 기종들은 애플II나 MSX처럼 가정용 TV에 연결할 수도 없었고, 과거 16컬러는 표시했던 8비트 기종에도 못미치는 게임 환경이어서 8비트에서 16비트로 발전한 만큼 보다 나은 게임 환경을 기대했던 게임 매니아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통칭 XT라 하면 메인메모리 640KB를 가진 IBM 호환 개인용 셈틀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비트군 Apple의 최고 128KB와는 비교도 안되는 메모리를 가진 이 XT는 대용량에 10MHz라는 초고속 처리속도 때문에 89년이 되기까지도 업무용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컬러가 거의 보급이 안된 상황이라 Apple의 16컬러는 흉내도 못냈으며, Apple의 뛰어난 사운드 기능에 비하면 PC스피커는 가히 소음이라 칭할 만했다.
하지만 일단 게임 제작사들이 XT를 게임이 가능한 셈틀로 인식을 전환하자, 그 발전속도는 실로 엄청나게 빨라지게 된다. 필자가 처음 XT를 구입한 것은 89년 여름이었다. 이미 이 당시 IBM-XT용 게임은 어느 정도 국내에 유입되었으며, 유통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뭣하지만 복사전문점을 통해 소규모로 서서히 퍼져 나가던 단계였다. 게임들은 아직은 Apple 게임을 그대로 컨버전한 것이 대부분으로 그 대표적인 것이 오리진의 <울티마 5>였다.
l 게임의 장르개념 도입
이 게임은 Apple 공전의 히트작으로, 롤플레잉 게임(RPG)이라는 개념을 국내 게임가들에게 심어 준 작품이다. 생각해 보면 게임의 [장르]라는 개념이 성립된 것도 이 시기를 전후해서였다. 게임의 장르는 시간이 지날수록 세분되고, 개인에 따라서는 수십 가지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어드벤처(ADV), 롤플레잉(RPG), 아케이드(ARC), 시뮬레이션(SIM)의 네 분야의 기본구분이 이때 겨우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장르에 대해선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아무튼 Apple 게임 컨버전이란 바람은 적어도 90년 초반까지 계속 불어, 사용자는 Apple에 있는 모든 게임을 훨씬 빠른 속도로 다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언급했던 울티마시리즈와 각종 롤플레잉게임 시리즈, 그리고 시에라(Sierra) 사의 게임을 주축으로 하는 어드벤처 게임, 마이크로프로즈와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대표격인 시뮬레이션 게임은 이미 Apple에서 상당한 인기를 올린 구종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신종처럼 인기를 얻었던 것이다. 그 원인은 몇 가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어느 XT에서나 잘 돌아가는 운영체제인 MS-DOS에 있다고 봐야 한다. 일단 각 기종 간의 비호환성이 사라진 만큼, 사용자는 어느 회사의 어느 셈틀이라도 같은 소프트웨어를 돌릴 수 있다는 데 상당한 구매의욕을 가지게 되어 그 전까지의 소극적인 관망자세를 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l 입에서 입으로 퍼진 게임
그래도 국내에서는 여전히 게임, 즉 소프트웨어는 거의 대부분 불법복제에 의존해서 퍼지고 있었다. 더구나 한국경제신문의 케텔(KETEL)이라는 통신망이 가동되기 전까지 게임을 하고 싶었던 사람은 스스로 광고나 소문을 통해 카피점의 위치를 알아내 복사료를 마련, 직접 찾아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국내의 8비트 셈틀을 한꺼번에 무용지물화시킨 정부의 16비트 교육용 셈틀 도입 정책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여전히 제작사나 기업들이 소프트웨어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옳다.
이 당시 퍼진 게임들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 보자. 초기에는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이 640KB라는 메모리 공간은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얄팍한 상혼의 대기업이 주메모리 256KB나 512KB만을 내놓아도 별 저항없이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때의 게임은 640KB의 공간을 가지고도 넉넉하게 게임을 할 수 있었다. Apple에서는 고급사양이었던 2FDD는 XT에선 기본이었으므로 게임 역시 메모리를 최적으로 사용(요즘처럼 낭비를 하지 않는)하기 위해 2FDD를 활용하는 방법을 많이 택했기 때문이다. 자동차 게임인 <Outrun>이나 Apple의 롤플레잉 게임들, 간단한 아케이드 게임 등은 도스를 띄운 상태에서의 512KB에서도 무리없이 작동했다. 때문에 누구나 XT라는 하드웨어보다는 좀더 새롭고 구하기 어려운 소프트웨어를 찾기 시작했고 또 소중히 생각했다.
이때 가장 널리 퍼지고 또 지금까지도 애용받고 있을 만큼 커다란 반향을 울린 것이 <테트리스>였는데, 누구나 셈틀을 사면 이 게임이 무료로 따라 붙었다. 전국 어느 셈틀에서나(심지어 관공서에서도) <테트리스>는 돌아갔으며, 사용자들은 싫증내는 법도 없이 이 게임에 열광했던 것이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기 위해 만들어 유포시켰다는 그럴 듯한 소문이 사실로 들릴 만큼 이 게임은 사무처리를 지연시켰으며, 수업에 빠지게 하고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단일 게임으로 이만한 반향을 불러온 예는 아마도 <테트리스>가 전무후무일 것이다.
또한 시에라(Sierra)의 어드벤처 게임 역시 XT를 게임기로 만들기에 충분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킹즈퀘스트(King's Quest)> 시리즈를 필두로 하는 시에라 사의 게임은 우선 무엇보다 사용자가 이야기를 찾아가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해 주었으며, 화면 속의 주인공이 사용자가 된 듯한 느낌을 주어 게임 애호가들로 하여금 하루 온종일을 소비하고서도 지루함을 못느끼게 하는 신기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인기를 끌었던 것이 <Leisure Suit Larry> 시리즈 첫작품으로서, 일상의 평범한 일들을(비록 미국일이지만) 스크린 안에 재현, 유쾌하고 별로 낯설지 않은 일들을 약간은 성인취향적으로 풀어나가게 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들 시에라의 작품은 CGA카드를 보유하고 있다면 16컬러를 보여 주었기 때문에, 한때 세운상가에서는 이 게임을 하기 위해 CGA카드를 구하려는 사용자들의 발길로 매우 부산했던 적도 있다. 한편, 다소 장난 같은 어드벤처와는 달리 되도록 사실에 가깝게 하려고 노력한 시뮬레이션 게임인 <F-16>이나 <F-19>의 등장은 가상현실의 초보적 단계를 개인용 셈틀에서 실현시켜 준 명작이었다. 이 게임들이 워낙 인기있었기 때문에 원래 복사방지장치(프로텍터)가 있던 것들을 국내 모 사용자가 풀어, 대량으로 복제되는 일도 생겨났다.
이렇게 많은 용량의 램은 게임의 풍요를 한동안 보장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영화로 성공한 <인디아나존스(Indiana Jones) III>와 아케이드 게임 <페르시아 왕자>가 상상을 초월할 만한 인기를 누리게 되면서 사용자들은 점차 XT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래픽카드는 PC의 필수 부품이자 주변기기로 PC가 등장함과 동시에 개발되었다.
그래픽카드의 원조는 MDA(Monocrome Display Adapter)카드. 세계 최초의 16비트 IBM PC인 "PC 5150"에 탑재돼 사용됨으로써 그래픽카드의 신기원을 이뤄냈다. 가로 80자와 세로 25열에 흑백 문자를 표현할 수 있었던 이 제품은 당시엔 모니터에 글자를 쓸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사용자들의 큰 감탄을 자아냈다.
MDA카드는 그래픽카드라기보다는 비디오카드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래픽 처리가 불가능하고 다양한 색상을 표현할 수 없는 단색용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MDA에 이어 80년초 컬러 그래픽을 지원하는 그래픽카드가 등장하는데 이것이CGA(Color Graphic Adapter)카드이다.
CGA는 최대 16가지의 색상을 표현할 수 있지만 한번에 표현할 수 있는 색상은 4가지로 한정된다. 또 해상도가 낮아 주로 게임기화면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82년)에 컬러를 표현할 수 없지만 고해상도의 장점을 무기로 장수를 누린 HGA(Hercules Graphic Adapter)카드가 발표된다.
일반인들에게 허큘리스카드로 더 많이 알려진 HGA카드는 단색이지만 명암처리 등 각 분야에서 해상능력이 뛰어나 오랫동안 표준 그래픽카드로 사용돼 왔다.
2년후인 84년에 이르러 PC사용자들은 본격적인 컬러그래픽의 세계를 맛보게된다.
IBM사가 AT(286 PC)를 발표하면서 EGA카드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IBM은 당시 AT발표와 함께 EGA의 하드웨어적인 스펙을 공개했다. 이로써 그래픽카드 제조업체들이 너도 나도 EGA호환카드를 만들기 시작, 일반에 널리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 사용자들에게도 익숙한 "EGA WONDER"는 그때부터 급부상하기 시작한 제품 가운데 하나이다.
EGA카드는 16색을 지원하는 표준모드 이외에도 최대 8백×6백 해상도를 지원한 것이 특징이다.
CGA카드는 높은 해상도와 색상 표현기능이 보강돼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한국을 포함한 동양권에서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한글과 한자를 표현하기에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87년에 와서 컬러 그래픽카드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CGA가 컬러그래픽의 문을 열자마자 곧이어 컬러그래픽의 시대를 개화시킨 제품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IBM이 PS/2라는 PC시리즈를 발표하면서 컬러그래픽 표현을 자유자재로 할 수있는 VGA(Video Graphic Array)카드가 나왔다.
IBM의 스펙발표 후 곧바로 EGA카드 호환업체들이 VGA카드 개발에열을 올리기시작, 수개월만에 VGA카드 호환제품들이 속속 출시되었다.
초창기 VGA의 표준사양은 6백40×4백80해상도에 16색을 표현했고 최대 26만가지의 색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최근에는 화면에 계단식 형상을 메워주는 CEG기법 등 새로운 기술발전으로 1천6백×1천2백80의 해상도에 1천6백70만개의 모든 자연색상을 모두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색상수도 2백56가지로 확장된다.
뛰어난 성능의 VGA카드는 그래픽카드와 동일어로 통용될 만큼 현재 거의 모든 PC에 채택되고 있는 제품이 되었다.
IBM은 87년 VGA카드를 발표하면서 그래픽 처리기능을 보강한 제품을 별도로 선보이기도 했다.
IBM은 PS/2의 선택사양으로 그래픽카드인 8514/A라는 카드를 내놓았다.
1천24×7백68의 해상도에서 2백56색을 표현하는 이 카드는 자체 그래픽처리전용 보조 프로세서를 내장해 CPU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이후인 80년말 IBM이 PS/2의 새로운 모델을 발표함과 동시에 나와 주목을 끈그래픽카드는 XGA(eXtended Graphic Array)카드. 8514/A의 기능을 보완함으로써 빠른 그래픽처리 기능을 보여주었다.
8514/A와 XGA카드는 현재 IBM사의 표준으로 통용되고 있으며 주로 PS/2기종에 채용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래픽카드의 특성은 각 제품이 발표된 당시의 스펙을 기준으로 삼았다.
현재에는 일반 PC사용자들에게 널리 보급된 그래픽카드는 VGA카드이며 초기발표된 사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다.
그래픽칩업체의 부단한 기술발전에 힘입은 결과이다.
최근에 판매되고 있는 그래픽카드는 거의 모두가 1천2백80×1천2백의 고해상도를 지원하고 모든 자연색을 구현하고 있다.
그래픽 처리속도도 일부 대기업 PC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64비트 그래픽가속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래픽카드의 선택기준이 되는 해상도, 그래픽 처리속도, 색상표현 등이 모든 제품에 최상의 조건이 갖춰지면서 점점 그 가치기준의 역할이 퇴색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프트웨어 MPEG나 3D 그래픽 등 별도의 멀티미디어 기능의 탑재 여부가 그래픽카드의 새로운 선택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부 제품에 소프트웨어 MPEG기능을 내장한 제품이 등장하는가 하면 3차원 입체영상이 가능한 3D그래픽 칩을 탑재한 제품도 나오고 있다.
VGA카드의 또 다른 발전방향은 다른 I/O카드의 기능통합에서도 엿볼 수 있다.
TV수신.오버레이.MPEG.3D 등 기존의 I/O카드의 기능을 통합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통합보드는 안정성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으나 칩과 회로 설계기술 발전에 힘입어 미래에는 그래픽카드의 새로운 발전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발달과 복사기 기술의 결합으로 레이져 프린터가 개발되었다. 글자체는 보통의 활판인쇄의 글씨만큼이나 뛰어나다. 1980년대초 미국의 휴렛팩커드는 값싼 레이저 프린터 시장의 잠재력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84년 레이져젯 이라는 이름의 레이저프린터를 세상에 내놓았다. 1991년 휴렛팩커드의 레이저 프린터 시장 점유율은 60%에 달했다. 이는 그 동안 일본에 계속 몰리고 있는 미국의 컴퓨터산업의 반격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휴랫팩커드의 레이저프린터의 실제적인 제조자는 일본의 캐논이나 다름이 없었다. 레이져 프린터의 핵심부품인 엔진의 대부분은 일제 캐논제품이었기 때문이다.
6. SW
가. PC용 OS
나. DR-DOS
다. PC용 DB
라. 유니코드
< PC시대 개막, 다양한 애플리케이션 선뵈... >
80년대는 PC와 웍스테이션 시대라고 칭할 수 있다.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 발달로 70년대의 메인프레임과 같이 강력한 데크스탑 컴퓨터를 구축함이 가능하게 되었고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집중적이고 대규모 컴퓨터 장치로 데이터를 가져오기보다는 그 데이터를 필요로 하는 장소에 분산해 처리되었다.
80년 설립된 노벨은 PC용 네트웍 시스팀으로 네트웨어를 공급하면서 시장주도권을 쥐는 시점도 바로 이때부터이다.
81년 빌 게이츠와 몇몇 프로그래머에 의해 PC용 OS 제작이 완성, [MS-DOS(IBM은 PC-DOS로 명명)]라는 작품을 만들어 낸다.
82년 로터스 디벨롭먼트를 설립한 케이퍼는 이듬해에 IBM PC용 스프레드시트 제품인 로터스 1-2-3을 선보인다.
84년 애플이 워드프로세싱, 데이터베이스 관리, 스프레드시트 계산 모듈 내재한 통합 소프트 패키지인 애플웍스를 내놓았다.
같은 해 dBASE 제작사인 애시톤테이트는 로터스가 로터스 1-2-3에 워드프로세서와 통신의 기능을 더해 선보인 심포니에 대적, 통합 소프트웨어인 프레임워크을 내놓고, 89년에는 최초의 소프트웨어 패키지인 콘트롤을 공급하기도 했다.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 워드로프세서 데이터베이스 패키지, 그래픽 패키지 등과 같은 응용 소프트웨어 패키지들은 사업가들에게 깔끔하고 전문적인 예산과 제안 및 판매물의 표시를 경제적으로 제공함으로써 개인용 컴퓨터의 변혁을 이끄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개인용컴퓨터의 소유와 접근이 늘어나게 됐다.
80년대 중반부터 IBM PC 호환기종이 기업의 필수품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으며, 이때의 표준 운영체제은 도스였다. OS/2가 선보인 시기도 이때 였으나 마이크로소프트가 애플리케이션 시장을 성숙시키지는 못했다.
한편 PC이 본격적 확대와 더불어 PC네트워킹에 대한 시장에 대한 요구가 늘게 되었다. PC의 단점으로 지적되는 고립된 작업 환경에서 타 PC 그룹이나 웍스테이션에서 메인프레임까지 연결할 수 있는 네트워킹이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또한 중요하게 대두된 것은 컴퓨터 네트웍에서 컴퓨터간의 정보전달로서 전자우편, 파일전송, 원격 데이터베이스 액세스 응용 프로그램들이 확산되었다. 이와 함께 클라이언트/서버 모델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86년 AT&T에서 시스팀 V R3을 발표하면서 유닉스 원시코드 사용권에 관한 정책의 변화가 생기게 된다. 즉 AT&T 표준에 의거한 개발에 국한된 사용권만을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IBM*DEC*HP 등에서는 독자적 유닉스 개발에 나서게 된 것이다.
87년 노벨은 산타클라라 시스템즈, 소프트크래프트 및 CXI를 합병함으로 써, 네트워킹 하드웨어 가격 인하는 물론 데이터베이스*개발툴*IBM 기종 연결 부분 등에서 전문성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88년 IBM*DEC*HP를 중심으로 설립된 OSF와 AT&T*썬 등을 중추로 한 UI는 각각 AIX3.0과 시스팀 V 4R로 방향을 달리하게 된다.
가.PC용 OS
현재 세계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제품의 시초는 1981년 7월 1에 발표된 MS-DOS 1.0이다. 이 버전은 마침 IBM PC가 처음발표되던 1981년 가을에 IBM에 의해 주요 운영체제로 채택되었으며, IBM은 이를 IBM PC -DOS 1.0이라 명명하였다.
MS-DOS 버전 1.0은 그때까지의 주요 개인용 컴퓨터였던 CP/M-80과 유사성이 있으면서도 다음과 같은 보강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디스크 디렉토리 구조화일의 크기, 화일의 작성 날짜등에 관한 정보를 포함시켰다. 또 우수한 디스크 공간 할당, 경영기법과 운영체제기능 호출을 포함, 확장시켰다. 1982년 6월에는 MS-DOS 버전 1.25를 발표하였다. 이 버전에서는 1.0의 버그를 수정하고, 양면 디스크의 기능을 보강된 기능이 들어 있었는데, IBM이외의 다른 OEM들에게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IBM가 MS-DOS를 OS로 채택한 데에는 그 우수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즉 8비트 PC에서 CP/M이라는 운영체계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디지탈 리서치사도 16비트 운영체계인 CP/M-86을 개발하고 있었으나, IBM은 이를 알지 못하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계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디지탈리서치는 마이크로소프트가 프로그래밍언어 분야에만 욕심이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를 나았다.
한편 MS-DOS 역시 시애틀 컴퓨터 프로덕츠사에서는 QDOS라는 16비트 운영체계를 만들었다. 그리 우수한 성능의 OS는 아니어서 마이크로소프트에서도 만들 수 있었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는 시애틀컴퓨터프로덕츠사로부터 QDOS의 사용권을 당시로는 매우 큰 돈인 5만달러에 사들였다. 그런데 이 QDOS는 CP/M의 모방품이라는 시비가 휠씬 후에 일게 된다.
매킨지사의 경영 자문들과 케이퍼는 대리점 확보 경쟁을 피하기 위해 대기업에 직판하는 방식을 택했다. 광고는 컴퓨터 전문 잡지대신 타임지나 뉴스위크같은 일반잡지를 택하는 것과 같은 독특한 방법을 택했다.그들은 1983년 1월 1달동안 1백만달러를 광고에 투입하는 등 전력을 투구했고, 성과는 기대를 지나치게 초과했다. 목표 4백만달러를 1천 7백 퍼센트 초과달성한 것이다. 이는 매킨지의 성공뿐 아니라 IBM PC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IBM PC는 특별한 응용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이다.
점차 PC에서 하드디스크를 사용하게 되면서 대용량 플로피디스크와 하드디스크를 지원하는 버전 2.0이 1983년 3월에 공표됐다. 이 버전은 개인용컴퓨터의 통상적인 운영체제와는 전혀 새로운 것으로 사용자가 새로운 장치들을 임의로 설치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한 구동장치의 지원등 그 기능이 훨씬 다양해졌다. 보통 MS-DOS 2.XX이라함은, 2.0의 버그를 수정하고 기능향상 및 다국언어를 지원할 수 있도록 개발된 MS-DOS 버전 2.11을 일컫는다.
1983년 가을 탠디사는 IBM PC의 경쟁 상품으로 모델 2000을 내놓았는데 IBM PC보다 처리속도가 두배나 빨랐으며, 저장 용량도 컸고 그래픽의 해상도 역시 높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IBM의 기존 8088 PC에서도 작동하는 보다 강력한 인텔 80186프로세서를 채용하고 있었다. 빌 게이츠는 모델 2000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새로운 소프트웨어 윈도우즈 를 탑재할 수 있는 유일한 퍼스날 컴퓨터라는 사실 때문에 이 제품에 대단한 기대를 걸었다.
윈도우즈는 제록스사의 알토에 사용되었던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 graphic user inteface)를 사용자 퍼스널 컴퓨터에 적용한 제품이었다. 그런데 윈도우즈는 8088을 채용한 컴퓨터에서는 사용이 불가능했다. 윈도우즈의 성공을 위해서는 모델 2000과 같은 성능이 우수한 컴퓨터가 필요했다. 탠디와 거래하고 있던 모델 2000의 성공을 예측했으며, 공개석상에서 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실패했다. 이유는 IBM PC와 호환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탠디사는 이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큰 이익을 얻게 되었다. 모델 2000은 라디오색의 마키팅 실패에도 책임이 있었고, 라디오 색의 컴퓨터사업 책임자였던 존 셜리는 자신의 자리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1983년 셜리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사장으로 영입되었다.
이어 MS-DOS 버전 3.0은 1984년 8월에 IBM이 80286CPU를 채택한 IBM AT를 공표함과 동시에 발표되었으며, 버전 3.1, 버전 3.2가 계속 발표되었다. 현재 일반적으로 버전 3.XX이라함은 버전 3.2를 가르킨다. 이는 3.5인치 플로피디스크드라이버를 지원하고, 다국언어지원기능의 지원기능과 하드디스크 최적지원기능 등을 보강한 것이다. 1987년 IBM PS/2가 발표되면서 MS-DOS 3.3이 함께 소개돼 PS/2시리즈를 지원하며 1.4MB플로피디스크를 지원하게 됐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1988년 8월에 MS-DOS 버전 4.0을 발표했다. 이 버전은 도스쉘, 자동 설치프로그램, 확장메모리 지원기능이 추가되었고, 아울러 다국언어 지원, 32MB이상의 화일크기지원이 보강되었다. 이중 특징적인 기능은 도스쉘 기능으로 OS/2의 프리젠테이션 매니저, 윈도우즈와 같은 그래픽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5.0 6.0
나.DR-DOS
디지탈리서치사는 최초 OS 버전인 CP/M 80으로 8비트 PC시장을 석권하였다. 이 CP/M 80은 인텔 8080, 8085, Z-80용의 싱글 유저, 싱글데스크 도스로서 후일 CP/M 86, MP/M, 컨커런트 CP/M으로 발전하였고, 또한 MS-DOS에도 많은 영향을 준 PC OS이다.
16비트 PC의 등장과 더불어 디지탈리서치사도 16비트용의 운영체제로 CP/M 86을 개발했으나, 그 발표시기가 늦어져, 보다 앞서 발표되고 IBM의 PC OS로 채택된 MS-DOS에 그 주도권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싱글유저 싱글태스크 운영체제시장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대부분의 시장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던 디지탈리서치사는 1988년 5월 DR-DOS 버전 3.3을 발표하였다. 89년 1월에는 버전 3.4를 89년 6월에는 버전 3.41을 발표한다. 버전 3.4는 MS-DOS 3.3, MS-DOS 4.0과 호환성을 가지며 MS-DOS에서 지원되지 않는 여러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 먼저 DR-DOS 3.4는 롬에서부터 DR-DOS를 실행 시킬수 있으 DR -DOS가 자동으로 실행되며, 또 많은 양의 메모리를 기본방식보다 더 쓸수 있다. MS-DOS 3.3에서는 하드디스크의 분할이 32MB까지만 지원되었는데, DR-DOS 3.4는 대용량 하드디스크 지원이 가능해 최대 512MB까지 한개 또는 그 이상의 크기로 분할 지정이 가능하다. 특히 도움말기능은 도스 유틸리티로서 제공되는 모든 실행화일의 사용법에 대한 도움말을 제공해 줌으로써 초보자들도 설명서 없이 손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준다.
우수한 기술력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디지탈리서치사는 MS-DOS 5.0에 앞서 DR-DOS 5.0을 발표, 주목을 끌었다. 1990년 여름에 발표된 이 버전은 기존의 도스들과 호환됨은 물론 메모리 맥스기능과 배터리 맥스 기능을 갖고 있어 랩탑, 노트북과 같은 소형컴퓨터의 운영체제로 주목받고 있다. DR-DOS의 메모리 맥스기능은 커넬부분 및 COMMAND.COM 부분을 UPPER 메모리 또는 하이 메모리에 로드 시킬 수 있어 랩탑컴퓨터 등 배터리전원을 사용하는 소형컴퓨터의 배터리 수명을 연장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화일링크기능과 뷰맥스기능도 돋보인다. 버전 5.0은 뷰맥스(View Max)라는 윈도우 기능을 제공, 마우스를 사용하여 모든 명령어를 실행시킬 수 있게 하였다.
다.PC용 DB
dBaseⅢPLUS는 dBaseⅢ를 개선한 프로그램이다. dBaseⅢ는 마이크로 컴퓨터에서 처음으로 인기를 얻은 데이타베이스 메니저인 dBaseⅡ의 개선된 프로그램이다.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기 이미 오래전에 데이타베이스가 출현하였다. 캘리포니아의 파사데나에 있는 제트추진 연구소(JPL)의 과학자들은 JPL의 인공위성으로부터 수신되는 위치를 추적하기 위하여 메인 프레임 컴퓨터에서 데이타베이스 관리프로그램을 사용하였다. 마이크로 컴퓨터가 도입된 초기에 메인 프레임 데이타베이스 메니저의 능력과 특징에 감명을 받은 JPL의 소프트웨어 디자이너인 웨인 래트리프는 JPL 시스템을 모델로 하여 마이크로 컴퓨터의 데이타베이스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다. 데이타베이스 시스템을 완성한 후 래트리프는 자신의 데이타베이스 메니저를 시장에 내놓기로 결정하고 벌칸(Vulcan)이라고 명명하였다. 벌칸은 dBaseⅡ와 dBaseⅢPLUS에 있는 많은 효과적인 정렬(sort)이나 인덱싱(indexing) 명령들을 사용할 수 없는 제한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벌칸은 강력한 데이타베이스 언어였다. 조그만 프로그램으로 시작되었지만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벌칸을 사용해보고 벌칸의 능력에 매혹된 소프트웨어 판매업자인 죠지 테이트는 이 프로그램을 판매하려고 래트리프를 만날만큼 감동을 받았다. 세일즈맨보다는 프로그래머로서 더욱 편안함을 느끼는 래트리프는 벌칸의 판매권을 테이트에게 넘겼으며 테이트는 프로그램의 판매로 생기는 로얄티를 래트리프에게 주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테이트는 벌칸 프로그램의 판매량을 높이기 위해 많은 판매 전략을 사용했다. dBaseⅠ이라는 프로그램이 없었으나 dBaseⅡ라고 이름을 바꿨으며 dBaseⅡ는 새로운 개선된 프로그램이라고 선전했다. 컴퓨터 쇼에서는 전시장 상공에 양측면에 dBaseⅡ라고 쓰여진 비행선을 띄웠다. 돋보이는 방법으로 경쟁사의 제품인 빌지 펌프와 비교되자 빌지펌프의 제조업자들과 경쟁업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일반인들은 광고를 눈여겨 보았고 제품을 알게 되었다. 테이트는 할 래쉬리와 합작으로 dBaseⅡ를 판매하기 위한 Ashton-Tate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Ashton이란 이름은 없었지만 테이트는 그 이름이 호칭하기 좋게 느꼈다.
수년간에 걸쳐 dBaseⅡ가 성공하자 경쟁사들은 dBaseⅡ가 가지고 있지 않은 많은 개선된 특징을 가진 제품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그 대응책으로 래트리프와 Ashton-Tate사의 디자이너 팀은 새로운 프로그램인 dBaseⅢ를 만들기 위해 2년을 소비했다. dBaseⅡ와는 달리 dBaseⅢ는 16비트 마이크로 컴퓨터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디자인 되었고 C 언어로 쓰여졌다. 개인용 컴퓨터의 통신망에 대한 욕망이 커지고 사용자가 친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 때문에 dBaseⅢPLUS가 개발되었다. dBaseⅢPLUS는 dBaseⅡ와 dBaseⅢ보다 훨씬 뛰어난 개선점을 제공해 준다.
dBaseⅡ가 유명했지만 문제점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dBaseⅡ는 주어진 시간에 처리할 수 있는 자료의 양에 제한을 받았으며 레코드당 최대 1,000자까지 처리할 수 있었지만 레코드당 32필드 이상을 처리할 수는 없었다. 한 데이타베이스에서 65,535레코드를 넘을 수 없었으며 dBaseⅡ는 오직 한 필드만을 정렬(sort)할 수 있었다. 한번에 오직 2개의 화일을 열 수 있는 dBaseⅡ의 제한 때문에 많은 응용플그램에서 프로그래머에게 어려움을 주었다.
dBaseⅢPLUS로써 Ashton-Tate는 dBaseⅡ에 있는 많은 애로점을 없앴다. dBaseⅢPLUS는 10억개의 레코드와 레코드당 128개의 필드까지 처리할 수 있다. 한 레코드에는 4,000자까지 수록할 수 있다. 동시에 여러 필드로 정렬할 수 있으며 또한 10개 정도의 데이타베이스 화일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큰 능력 때문에 실제보다는 더욱 더 깊은 감명을 받은지도 모르지만 데이타베이스 화일의 각 128개 필드에서 10억의 레코드를 저장하고 있다면, 한번 데이타베이스를 읽는데 PC로써는 한달 이상이 소요되며 3천만장의 플로피디스크가 필요하게 된다. dBaseⅡ로 정렬하는데 50분 정도 걸리는 화일을 dBaseⅢPLUS로 정렬한다면 60초 정도 소요되므로 dBaseⅢPLUS가 매우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dBaseⅡ의 사용자라면 dBaseⅡ의 화일과 데이타를 변형시켜 dBaseⅢPLUS에 사용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을 dBaseⅢPLUS가 갖고 있다는 것에 반가움을 느낄 것이다. 근거리 통신망(LAN : local area network) 상태에서 dBaseⅢPLUS를 작동할 때에는 여러 사용자들이 프로그램을 이요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프로그램의 보호 특징은 IBM PC와 PC호환 기종에서 대부분의 인기있는 LAN에서 사용될 수가 있다. 데이타베이스의 응용프로그램인 dBaseⅢPLUS의 능력을 크게 벗어난다면 메임프레임 컴퓨터의 세일즈맨과 이야기해야 할 정도로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91년 애시턴 테이트는 볼랜드 인터내이셔날에 인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개발된 소프트웨어가 한국이나 일본에서 사용되려면 6-12개월 정도의 시간이 경과해야 했다. 현지국어로 메세지등을 변환시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메세지를 소프트웨어에서 분리하고 2바이트 문자코드를 취급할 수 있는 국제판 소프트웨어의 등장이 예상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벌써 미국산 소프트웨어의 무차별 유입을 우려하고 있다. 현재 OS를 중심으로 국제판 소프트웨어 작업을 벌이고 있는 기업은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노벨 등의 소프트웨어 선진기업들이다.
예컨대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즈 NT 를 처음부터 여러 국가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애플, IBM 양사가 공동개발중인 객체지향형 OS인 핑크 와 노벨사의 네트워크OS인 네트웨어 3.2 도 국제화를 겨냥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같은 국제판 OS의 등장은 당연히 다국어에 대응한 어플리케이션SW의 개발을 용이하게 하고 있다. 이는 여러국가에서 쓸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기 위한 기본 기능을 국제판 OS가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이 결과 앞으로 미국산 어플리케이션의 한국이나 일본의 유입이 가속화될 전망이다.
이처럼 미국 SW업체들이 국제판 OS의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유는 개별 기업의 매출변화와 관계가 깊다. 즉 세계적인 경기침체속에서 미국내 SW판매수입은 해외판매수입에 상대적으로 크게 밑돌게 된데에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해외부문의 비율은 약 60%에 달하며, 로터스와 노벨은 각각 50%에 이르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본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금까지 일본 어플리케이션 SW업체가 상대적으로 열세라는 SW분야에서도 미국에게 시장을 내주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2가지 장벽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독자적인 아키텍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언어의 장벽이다.
그러나 이같은 아키텍쳐의 장벽은 윈도우즈 의 보급에 따라 무너지고 있다. 윈도우즈는 HW를 직접 액세스 하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장벽인 언어 역시 국제판 OS와 SW의 등장으로 무너져 가고 있다.
이같은 움직임은 80년대 후반부터 나타났다. OS분야에서는 상당히 진척되고 있으나, 응용SW 분야에서는 단순히 메세지 만을 바꾼다고 사용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세금의 계산은 단순히 메세지를 고쳐서만은 사용할 수 없다. 그 나라의 세법등도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응용SW 분야는 조금더 시간이 걸릴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6-12개월이 소요되던 현지언어화 작업은 크게 단축될 것임은 당연하다.
국제판 OS의 개발 포인트는 2가지이다. 하나는 메세지 등의 언어의존부 와 하드웨어 의존부 를 분리하는것으로 이에 따라 SW본체는 손대지 않고 여러 국가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시아 국가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2바이트 코드의 사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2바이트 문자코드의 사용은 문자 코드와 관계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문자코드와 관련해서는 최근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윈도우즈 NT 나 핑크 등의 국제판 OS에 Unicode 라는 새로운 문자코드를 채용할 예정이다. Unicode는 세계 각국의 문자코드를 포함시킨 것으로 한국어와 일본어 프랑스어를 동시에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다국어에 대응한 문자코드로 안성마춤이다.
현재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이 문자코드의 보급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국제 표준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92년 5월 현재)
국내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자체계는 84년 국제표준화기구에서 제공한 ISO-2020 규격으로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는 KSC-5601 규격이 이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ISO-2020은 그 이후 각국의 다양한 욕구에 대응해 새로운 국제표준코드를 만들기로 합의를 보고 여러차례의 논의를 거쳐 현재 DIS-10646이라는 4비트코드 체계에 이르고 있고 국내에서도 최근 이에 대응, 조합형 코드를 근간으로 DIS제출안을 확정했다.
이같은 4비트 코드체계는 종전 알파벳 중심의 코드체계에서 다국어를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새로운 코드체계의 한 방법으로 이같은 코드체계가 표준화돼 사용된다면 지금까지 외국에서 만든 컴퓨터에서 한글을 사용하기 위해 도출했던 문제점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같은 ISO의 코드표준은 DIS-10646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업계의 유니코드(Unicode) 체계로 인해 실질적인 표준이 될 수 있을지는 상당히 회의가 뒤다르고 있다.
ISO의 DIS-10646의 시안을 반대하는 ISO 회원들이 실질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다국어코드를 만들자는 욕구에 의해 탄생한 유니코드는 일단 참여업체가 현재 PC시장을 지배하는 주요 HW, SW업체가 망라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
유니코드의 참여업체는 애플, 제록스, IBM, 마이크로소프트, 선, 넥스트, RLG등 12개 업체이다.
유니코드는 ASCII코드를 사용하는 기존 PC에서 사용이 가능해야 하며, 다국어를 지원할 수 있도록 알파벳, 심볼, 한중일 한자 및 사용자 정의 영역 등 5개의 문자 영역으로 구분된다.
이들 유니코드는 이미 윈도우즈NT 등과 같은 다국어 지원 운용체계를 통해 본격적인 상업화가 이룽지고 있는데, 현재 한글의 경우 2,350자 밖에 배열되지 않아 궁극적으로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글을 나타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입장이다.
그러나 상업성을 제일목표로 각국의 문자특성을 제대로 살려나가자는 것이 유니코드의 탄생 취지인만큼 현재 유니코드에서 배열된 제한된 한글코드는 충분히 조합형 한글코드로 대체될 수 있으며, 이의 기초 단계로 이미 DIS-10646의 제출안으로 조합형안이 확정돼 있어 유니코드의 한글조합형채택 가능성은 비교적 높은 편이다.
어쨌든 향후 컴퓨터의 문자코드 체계는 사실상의 업계 표준안인 유니코드와 ISO의 DIS-10646으로 이분될 수 밖에 없는데 이같은 상황에서 대부분의 전례가 그랬듯이 유니코드 안이 실질적인 차세대 PC의 표준으로 대두될 전망이다.
이는 또 자체 운용체계를 같지 못하고 있는 국내 PC환경으로서는 유니코드가 완성형의 한글배열만을 갖는다 할지라도 이를 따를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미해 주며 비록 근 5년간의 공방끝에 최근 조합형 코드가 완성형코드와 함께 국내표준의 위치로까지 자리잡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또 다시 2350자만을 사용할 수 밖에 없음을 시사해 준다.
7. WS가. WS의 시작
나. WS의 발전
다. RISC 기술의 등장
WS의 개념의 원류를 더듬어 올라가면 애틀랜틱 먼슬리 라는 잡지의 45년 7월호에 게재된 논문에서 찾을 수 있다. 집필자는 MIT의 바네바 부시교수로 당시 미국을 대표하던 과학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새로운 형태의 메맥스라는 장치를 제안한다. 즉 2차대전후 엄청나게 늘어나는 정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키보드와 자동색인능력, 사진복사능력을 가진 장치가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2차대전말기 해군 레이더 기술자로 일하고 있던 엔겔버트는 이 논문을 읽고 컴퓨터로 구현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세계최초의 컴퓨터인 에니악이 탄생하고 엔겔바트는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에서 전자공학박사학위를 받고 착실히 준비를 해나갔으나 기회가 쉽게 오지않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미연방고등계획의 자금을 손에 쥔 리크라이더를 만난다.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 두사람은 협력을 통해 WS개발에 뛰어든다.
1960년, 디지탈 이퀴프먼트사는 미니컴퓨터를 내놓으면서 저가형 대형컴퓨터시장으로 파고 들었다. 비록 대형컴퓨터에는 성능이 미치지 못했으나 이 미니컴퓨터는 작은 기업들에게는 매우 적합한 기종이었다. DEC의 첫번째 컴퓨터인 PDP-1은 그 가격이 12만달러로 부담이 되는 가격이었지만, 1963년에 나온 PDP-8은 18,000달러로 미니커뮤터의 가격을 크게 떨어뜨렸다. 이정도의 가격은 작은 회사의 큰회사의 단위부서에 적합한 가격과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유사한 컴퓨터를 만드는 다른 회사들은 이러한 기종을 여전히 부담을 느끼는 고급기술자를 위해 임대해 주는 정책을 쓰기도 하였다. 이는 당연히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왔다.
보스턴시 교외의 아폴로컴퓨터사와 캘리포니아의 선마이크로시스템즈사는 재빨리 기회를 포착하고 이른바 워크스테이션이라는 컴퓨터를 내놓기 시작했다. 이 워크스테이션들은 엔지니어링에서는 일반화한 CIGP(Computer-intensive graphics program)에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1980년대 초에 아폴로컴퓨터사는 모토롤라 68000 계열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주축으로한 일련의 워크스테이션을 내놓았다. 그리고 얼마 안돼 선마이크로시스템즈사가 경쟁상품을 내놓았다. 약 2만달러에서 8만달러까지 하는 이 컴퓨터들은 범용미니컴퓨ㅓ보다 적은 비용으로 더 나은 기능을 제공해주었다.
82년 썬의 창립시에 썬의 스코트 맥닐리사장을 포함한 창업자들은 곤란한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과했다. 즉 이미 공급과잉상태에 있는 범용컴퓨터시장에 진출을 선언은 했지만 어떻게 진출한 것인가가 문제였다.
즉 IBM을 중심으로 한 대형시장에서는 계층 구조를 중심으로 한 제국이 형성되어 있었고, 미니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시장에서는 HP, DEC, 프라임 등의 우수한 업체들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썬은 두번째 시장에 비중을 둔 그러나 새로운 시장의 개척에 촛점을 맞추었다. 즉 강력한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근간으로 하고 통신을 강화한 컴퓨터의 개발이었다. 이것은 분산처리로 나아가고 있던 DEC보다 한발 앞서 나가는 것이었다. 통신기능을 강화함으로써 정보와 고가의 주변기기도 공유하는 결과를 가져와 가격이 싸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OS로서 UNIX를 탑재한 것은 전략면에서의 큰 성공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즉 사용자가 시스템을 자신의 업무에 맞도록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되는 프러프라이어러티 시스템 을 고집하면서 86년경 선을 앞지르던 아폴로 는 결국 HP에 흡수, 합병되고만다.
워크스테이션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 알려지기 시작한 컴퓨터의 한 분야이다. 워크스테이션은 1981년 아폴로가 처음으로 DN-100기종을 소개한 이후 썬이 1983년에 밉스 DEC가 1986년에 워크스테이션을 내놓았고 후발주자인 IBM이 1990년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워크스테이션 분야는 현재 컴퓨터군의 발빠른 주자로 영역을 확고히 하고 있으며, 전력투구 할 분야로 평가되고 있다. 원래 워크스테이션이라는 용어는 미국 제록스사 제품인 스타와 왕컴퓨터인 Z-80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채택한 컴퓨터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재 워크스테이션은 세계 각 메이커들의 전략 상품으로 참여업체가 속속 늘고 있다.
최근의 워크스테이션은 다양한 어플리케이션을 자랑해, 3000여종의 소프트웨어를 지원하는 것도 있다. 분야별로는 과학용, AEC/GIS, MCAD, EDA, DTP, Database, CASE, AI등 나날이 영역폭을 넓혀가고 있다. 현재는 소프트개발과 캐드용으로 활용도가 60%이상 차지하고 있으며 인공지능, 사무자동화, 교육분야등에 나머지가 활용되고 있다.
1980년대에는 일반적으로 오픈 시스템 아키텍쳐를 기반으로 한 것이 워크스테이션의 특징으로 보여진다. 통신규약으로는 TCP/IP, NFS가 주로 채택됐으며, X-윈도우, 리스크 아키텍쳐, 그래픽 엑셀레이터 등이 부가된 제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편 1990년대에는 클라이언트/서버 컴퓨팅의 시대에 알맞도록 시스템과 소프트의 표준화에 워크스테이션도 사양을 맞추는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제품은 더 값싸지고, 더 빨라지면서 사용의 편리성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워크스테이션은 한마디로 가격대 성능의 향상면에서 기술의 흐름을 관망할 때 밉스(Mips)치를 올리는 과정을 밟아 왔다. 이러한 접근은 클럭 스피드, 멀티프로세서 채택, 명령어 처리능력, 데이타 패스등의 병행적인 향상 위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소프트웨어적인 기술도 복합적으로 가미돼 진행되고 있다. 워크스테이션은 그래픽 분야를 포함한 업무에 적응하는 특성에서 많은 데이타를 빨리 처리해야한다. 이는 곧바로 밉스 경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한편 제품의 변천사를 결정짓는 것은 하드웨어적인 변화 특히 반도체분야의 기술혁신이 크게 작용한다. 프로세서의 클럭사이클은 기술변화에 따라 최근에는 CMOS에서는 20나노초(ns),Bi-MOS에서는 10나노초 이상, ECL에서는 3나노초이상의 영역이 가능해지고 있다. 특히 반도체 분야에서는 CMOS공정에 이어 갤륨비소(GaAs), HEMT(High enectro Mobility Transistor)의 양산 기술과 실장의 고밀도화, 고속 저가 저발열소자 개발에 눈을 돌리고 있다. 또한 소프트웨어적인 처리기법으로 컴파일러 고집적화 기술은 향후 하드웨어적 변화요인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한편 32비트 처리를 벗어나면, 1991년 말부터는 본격 64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장을 열것으로 기대되고 있으며, 병렬처리 또한 주요한 지침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한편 채택기술을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CISC에서 RISC 아키텍쳐로 변화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RISC 관련 기술은 1970년대 토마스 J 왓슨 연구소에서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1975년에 등장한 IBM801 등에 탑재되는 등 그 역사는 비교적 긴 편이었다. 느린 발전을 보여오던 RISC는 1982년 썬의 창립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워크스테이션의 성능 향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썬은 매년 성능을 배가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CISC 기술로는 한계를 느끼게 되자 자연히 RISC기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프로세서의 설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즉 1980년 이전에는 프로세서의 설계에서의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명령을 갖추어 프로그래머들의 부담을 덜어 주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를 지나면서 최소한으로 명령의 갯수를 억제하여 프로세서 개발에 관계되는 반도체 기술측의 부담을 경감하려는 방향으로 방향으로 설계의 개념이 변화하였다. 이 변화를 촉진시킨 또 다른 이유는 VLSI 기술의 성능향상에 수반한 CISC 내부구조의 복잡화이다. 복잡할수록 개발기간과 노력이 가중되는 것은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발 당시 일부에서는 RISC의 성능을 의문시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CISC의 경우 한 명령만의 속도는 느리지만, 프로그래밍할 때에 사용하는 명령의 수는 적다. 이에 비해 RISC는 한 명령의 스피드는 빠르지만, 프로그래밍은 많은 명령을 필요로 한다. 양자의 실행 시간을 비교하는 것은 이론만 갖고서는 어느 쪽이 빠른가 하는 결론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RISC프로세서가 등장했을 때, 이러한 우려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RISC프로세서는 C언어로 쓴 프로그램을 대단히 빠른 속도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RISC는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RISC는 반도체의 새로운 기술, CMOS라든가 ECL, 칼륨비소 등에 접근하기가 쉬웠다. 소요되는 트랜지스터의 수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스크(RISC) 아키텍쳐에 대한 의존도가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반면, 막상 시장에서 판매되는 제품의 70% 이상이 시스크(CISC) 제품이 점유하고 있다. 관련 전문가에 의하면 1991년 말부터는 기술채택의 격차가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특히 리스크 아키텍쳐의 채택은 제품향상의 주기를 점점 가속화 시켰고 고성능의 영역으로 진입을 가능케 했다.
워크스테이션이 나름대로 시장을 형성하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이유로는 리스크의 출현을 들 수 있다. 리스크 경쟁에 있어 컴퓨터 업계로는 IBM과 HP가 원류를 이루고 있다. 그 태동은 IBM, 스탠포드, 버클리에서 이론화가 모색되었지만, 본격적인 준비는 1980년대에 들어와 이루어졌는데 특히 HP는 리스크팀을 구성해 놓고, 조웰 범바윈 박사를 영입해 정밀측정작업에 들어가 프리시젼 아키텍쳐(Precision Architecture)를 개발해 대형시스템에 탑재한 것이 상품화의 모태이다. 그러나 워크스테이션에 실제 리스크 아키텍쳐가 채택된 것은 썬의 스팟스테이션에서 비롯된다.
초기기술로는 성능에서 시스크와 성능상에서 뛰어남을 보이지 않았고 제한된 어플리케이션만을 운영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며 32비트 데이타 처리, 외형의 캐쉬, 제한된 컴파일러 테크놀로지 등이 주요 특색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각사는 자체의 리스크 기술을 개발하면서 시스크 기술을 성능면에서 따돌리게 되었다. 칩제조 메이커들도 리스크칩 양산에 들어가 상용화된 제품으로 시장에 선보이는 활황기에 접어들게 된다. 소프트웨어 개발이 뒷받침되면서 시장에서의 인기를 갖게 됨에 따라 빠른 클럭스피드, 멀티프로세싱 기능, 향상된 메모리 기술보완에 관심이 모아지는 현상이 크게 나타났다.
한편 최근의 기술는 데스크탑에서도 미니급 이상의 성능을 보여 주고 있어 차세대 워크스테이션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핵심기술을 가진 공급업체만이 워크스테이션의 강자로 군림할 것으로 보이며, 기술 개발과 아울러 서드업체의 어플리케이션 확보도 중요한 관심사로 떠 오르고 있다. 이제 데스크탑에 채택된 리스크 기술이 시스크의 존립을 거부할 정도로 비중있게 자리잡았으며, 복수의 명령어 처리와 통합네트워크화의 추세에 따른 부산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64비트 아키텍쳐로의 전환도 서서히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엔지니어링 워크스테이션 분야의 1위인 썬 마이크로 시스템즈에 공격을 가하고 있는 2위인 휴렛팩커드(HP)와 컴퓨터 전부야를 석권하려는 IBM이 엔지니어링 워크스테이션 시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편으로는 인텔과 밉스간의 CPU 다툼도 치열하다. 밉스는 RISC의 개발로 단숨에 반도체 분야의 주목받는 기업으로 성장했고, 이 여파로, 반도체계의 거인 인텔은 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인텔은 직접 RISC칩을 만들어 반격하기 보다는, CRISC인 펜티엄 등을 통해 반격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DEC같은 회사는 RISC와 CICS를 둘다 개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현재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업체인 썬은 1982년에 설립되어 다음해 워크스테이션 썬-100 모델을 출하했고, 1984년 11월에 썬-2/50을 내놓았다. 1985년 처음으로 2밉스의 성능을 갖는 썬-3/160을 발표하고, 이듬해 바로 4밉스의 선-3/260을 발표하여 업계를 놀라게 하였다. 또 1987년에 업계 처음으로 썬-4/260모델을 발표하여 리스크 머신의 새장을 열게 되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게 된다. 1990년 말에 발표된 썬스팍스테이션2까지에 적용된 썬 전략은 스펙 오픈을 통한 클론 업체들을 대거 등장시키면서 저가로 시장을 공략하는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90년 회사 설립 8년만에 썬은 세계 워크스테이션 시장의 40%에 이르는 점유율을 차지함으로서 막강한 기업으로 떠오른게 된다.
한편 IBM은 70년대 말 801리스크 프로세서를 개발하면서 리스크 아키텍쳐에 대한 연구의 프로젝트에 일찍부터 들어갔다. 그러나 이 첫번째 프로젝트가 중단된 후, 1986년에 리스크 초기단계 제품으로 RT-PC를 발표했으나 커다란 실패를 보았고, 진정한 워크스테이션의 상품화는 1990년 RS/6000을 소개하면서 이루어졌다. IBM은 이 제품을 계기로 워크스테이션의 차세대를 선언함과 동시에 선두업체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HP는 1985년 HP-PA아키텍쳐를 상품화에 들어갔으나, 다음의 상용화 단계에서 PA-RISC로 정식 명칭을 바꾸면서 미니컴퓨터에 RISC기술을 채택했다. 그러나 HP의 워크스테이션이 본격적으로 리스크 아키텍쳐를 도입한 것은 800시리즈부터였고, 데스크탑 워크스테이션에 고성능을 실현한 것은 1990년 3월 26일 전세게에 정식으로 발표된 HP 9000/700시리즈가 처음이었다.
또 밉스컴퓨터는 1985년에 R2000-8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다음해에 R200 -16을 발표했다. 밉스는 1987년 R3000시리즈를 발표하면서 많은 시스템에 33MHz의 성능을 부여했고, 최근에 발표된 R4000 64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또 한차례의 치열한 64비트 워크스테이션시장을 만들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대부분 밉스칩 채택 메이커들은 1991년 하반기에 이칩을 채택 워크스테이션 시장에서 한판 승부를 벌일 것으로 에상된다.
1990년 4월에는 DEC스테이션 5000계열을 10월에는 VAX스테이션 3100/76을 선보였다.
1991년부터 RISC에서도 64비트 제품이 등장하였다. 1991년 10월에는 밉스가 R4000 을 발표하였고, 1992년 2월에는 DEC가 21064(아키텍쳐 이름은 Alpha) 를 발표하였다. 이런 뉴스에 접한 이들은 물론 지금부터는 64비트시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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