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두산 천주교 성지 동쪽 야외전시장에 묘비 하나가 눈이 들어온다.
조선 왕실의 첫 순교자인 송 마리아와 남편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의묘비이다.
그의 묘는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18번지에 있었다.그 묘는 파묘되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에 있는 한 사찰에서 은언군과 송 마리아 묘비가 발견되어 한동안 보관되다가
절두산 성지 야외 전시장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은언군 이인(李裀)은 영조의 손자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사도세자이며, 어머니는 숙빈 임씨(肅嬪 林氏)이다.
부인은 진천인(鎭川人) 송낙휴(宋樂休)의 딸로 상산군부인 송씨(常山郡夫人 宋氏)이다.
사도세자의 서장남으로 1754년(영조 30) 탄생하였다. 1764년(영조 40) 11세에 은언군(恩彦君)에 봉해진다.
1765년(영조 41) 12세에 진천인(鎭川人) 송낙휴(宋樂休)의 딸과 관례를 행하였다.
1768년(영조 44) 2월 3일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官)에 제수되고, 이해 4월 20일 숭헌대부(崇憲大夫)에 가자되었다.
1771년 외람되게 근수(跟隨)를 많이 거느리고 남여(藍輿)를 타고다닌다 하여 이복동생 은신군(恩信君)과 함께
관직에 서용되지 못하는 처분을 받았다. 곧이어 시전(市廛)상인들에게 수백냥의 빚을 지고 갚지 않은 것이
조부 영조에게 알려져 이복동생 은신군과 함께 직산현(稷山縣)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되었다.
이해 이복동생 은신군은 제주에서 별세한다.
1774년(영조 50) 안치된지 3년 만에 은언군은 석방되어 다시 서용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5월 8일 종부제조(宗簿提調)에 제수하고 가덕대부(嘉德大夫)에 가자되었고,
이해 8월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고, 이해 8월 24일 수덕대부(綏德大夫)에 가자되었다.
1777년(정조 1) 3월 5일 흥록대부(興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고, 이해 8월 28일 현록대부(顯祿大夫)에 가자되었다.
1778년(정조 2) 은언군 집에서 소를 밀도살하여 팔았다는 물의를 일으켰다.
1779년(정조 3) 6월 28일 종부제조(宗簿提調)을 거쳐 이해 12월 교정청제조(校正廳提調)가 되었다.
1786년(정조 10) 종척집사(宗戚執事)를 역임하였다.
이해 당시 홍국영(洪國榮)이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후사가 없는 것을 기화로
누이동생을 원빈 홍씨(元嬪 洪氏)를 들여 왕세자를 낳게 하려 하였다.
원빈이 1780년에 죽자, 대신에 은언군의 맏아들인 담(湛)을 원빈의 장례 때에 대존관(代尊官)을 시켜 양자로 삼고,
완풍군(完豊君 : 완(完)은 왕족의 본관인 완산(完山)을 가리키고 풍(豊)은 홍국영의 본관인 풍산(豊山)을 가리키며
후에 상계군(常溪君)이라 부르면서 가동궁(假東宮)이라 하여 왕위를 잇게 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홍국영이 쫓겨나 병사한 뒤로도 그 일당이 계속 역모를 꾸며고, 상계군 담은 자기가 연루되자
1786년 음 11월에 자살하였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은언군도 이에 연루되어 죽을 뻔하였다.
정조가 대신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강화도에 처자와 함께 유배시켰다.
1797년(정조 21) 강화도에서 탈출하려다가 체포되어 그곳에 안치되었다.
그뒤로도 벽파대신(僻派大臣)들과 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로부터 역모의 화근으로 지목되어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정조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자 상황이 뒤바뀌게 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에게 영세받은 천주교인으로
순교하자 함께 강화도 배소에서 사사되었다. 향년 48세였다.
1849년(헌종 15) 손자 원범(元範)이 철종으로 즉위하자 곧 작위가 복구되었고,
이해 9월 12일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에 의하여 은언군가의 역모에 관한 일을
적은 모든 문적(文蹟)이 세초(洗草)되었다.
1851년에 대제학 서기순(徐箕淳)에 의하여 신유사옥 때 은언군의 무죄를 변증하는 주문(奏文)이 지어 올려졌다.
1871년(고종 8) 2월 21일 왕족 은언군과 은전군의 시호를 의논하게 하고, 전교하기를,
"은언군(恩彦君)은 왕실의 가까운 친족이다. 증시(贈諡)의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세 때문에, 중간에는 겨를이 없어서 못하였으니 모두 까닭이 있었으나,
선대왕(先大王)의 성충을 우러러 체득하고 있는 만큼 의당 숭보(崇報)의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이다.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하고,
은전군(恩全君)에게 증시하는 은전도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일체(一體) 시호를 의정하게 하라." 하였다.
이해 2월 25일 은언군 등의 시호는 행실과 업적에 따라 짓게 하고, 전교하기를,
"시호(諡號)는 행적에 대한 자취이니, 그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되어야 받은 사람으로도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이번 시호에 대한 의논이 과연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으나, 만일 조금이라도 지나치게 찬양한다면 이것이 어찌 옛 법이겠는가?
안면에 구애되지 말고 청탁에 관계없이 전적으로 실제 행실과 업적에 따라 정함으로써 옛날의 규례를 회복하도록
홍문관(弘文館)에 분부하라." 하였다.이해 3월 16일 시호를 충정공(忠貞公)으로 추증하였다.

정조 임금에게는 이복형제로 은언군 이인(李裀)이 있었다.
정조 10년에 그의 큰아들인 상계군이 반역죄로 몰려 죽게되자 은언군은 셋째 아들 전계군과 함께 강화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리고 은언군의 부인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서울의 구궁인 양제궁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게 되었다.
양제궁은 원래 은언군의 모친인 양제부인 부안 박씨가 거처하던 옛궁의 이름으로 전동인데, 상계군이 모반죄로 몰려 죽고
은언군과 전계군이 강화도로 귀양가고 남은 부인들인 송씨와 신씨가 유폐되어 사는 역적의 궁이라 하여 폐궁이라 불렸다.
이때 강완숙은 송씨와 신씨의 처지를 동정하여 이들과 접촉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이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잘못되면 모반죄에 연좌된 왕족들과의 접촉으로 어떤 화를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누구도 그들과의 접촉을 꺼려했다.
그런데도 강완숙은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왕족인 폐궁의 송씨와 신씨를 만나려 은밀히 드나들고 폐궁의 나인들과도 접촉했다.
외롭고 쓸쓸한 처지에서 두 왕족의 부인은 천주교 교리를 전해 듣고 크게 위로 받으며 깊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강완숙은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그 집에 모시고 가서 그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들은 마리아를 세례명으로 하여 입교하게 되었으니 이들이 송마리아와 신마리아이다.
이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교리서를 읽었으며, 자주 주문모 신부를 모셔다가 강론을 경청하면서 천주교 신자로서
지킬 모든 본분을 성실하게 지켰다. 강완숙과 송마리아, 신마리아의 교류는 매우 친밀하였으며 대군의 부인들인 그들은
자신의 궁녀들에게도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다. 이들은 주문모 신부가 만든 최초의 평신도사도직 단체인 명도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신심생활과 사회활동에도 은밀하게 참여하였다.
그래서 신유박해가 일어나 매우 긴박한 상태에서 이들은 주문모 신부의 최후의 피신처로 폐궁의 은밀한 곳을 제공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왕족 부인으로서 강완숙과 함께 당시 한국교회 안에서 신자로서 활동하며 미사에 참례했고,
특히 여신도들의 활동에도 가담하였다.이들의 은밀한 활동은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양제궁의 궁녀이던 서경의의 밀고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밀고에 의해 폭로된 요지는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천주교 교리 배우기를 좋아해서 강완숙이 경문을 대단히 잘 해석해
주었으며, 이 때문에 폐궁과 강완숙의 집을 자주 왕래하면서 교리를 배웠는데, 서경의도 함께 자주 왕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경의 자신이 목격한 주문모 신부의 폐궁으로의 피신 광경이었다.
대왕대비는 왕족의 부인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켜 주었다는 사실에 크게 노하여
즉시 사사를 인준하였다. 두 왕족 부인의 사사는 어떤 재판도 심문도 어떤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다만 1801년 3월 16일
대왕대비의 인준만으로 이뤄진 것이다. 대비가 인준한 명문은 이러했다.
"강화읍에 갇힌 죄인 인(은언군)의 처 송씨와 상기 죄인 인의 아들 담의 처 신씨의 사건에 대하여,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둘 다 사학에 물들었음이 명백하고, 이들이 고약한 외국종자와 상통하고 외국인 신부를 보았으며, 또 엄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염치없이 그를 자기들 집에 숨겨 두었음이 명백하다. 이런 중대한 죄를 생각하면 그들은 하루라도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음이
만인에게 명백하다. 그런 즉 그들에게 독약을 내려 둘이 함께 죽게 하라."
이 명령은 다음 날 3월 17일(음) 바로 시행되어 두 왕족 부인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두 부인은 신자로서 자살 죄를 피하기 위해 독약을 스스로 마시기를 거부하여 집행관이 억지로
먹여야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송마리아와 그의 며느리 신마리아는 왕족의 부인이면서 그들의 신앙과 박해받던 주신부에게
용감하게 은신처를 제공한 죄목으로 사사되어 선종했다. 이들의 최후에 대한 더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폐궁은 엄중히 닫혀있고 일체의 외부와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왕족 부인의 사사는 그들이 신앙생활에 충실했고 그들의 열성과 그들이 가진 왕족부인으로서의 명성과
지위 때문에 박해받던 당시 조선교회에 크나 큰 격려가 되었다고 달레신부는 그의 교회사에서 전하고 있다.
강화도에 귀양간 은언군(그의 손자가 조선왕조 제25대 철종이 된다)은 그의 부인 송마리아의 신앙생활을 알기는 했겠지만
자신은 신자가 아니었는데도 이 사건으로 인해 이복형제인 정조가 지켜주던 그 생명을 결국 정순왕후 김대비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