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알은 단순한 우상(idol)이 아닙니다. 바알은 거대한 지배방식(ideologie)입니다. 세상과 백성을 지배하는 방식을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고 합니다. 줄여서 흔히 경제(經濟)라고 합니다. 바알식 경제의 두드러진 특징은 빈익빈부익부 현상입니다. 바알식 경제의 치명적인 문제는 양극화입니다. 바알식 경세제민은 토지를 독과점한 대지주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왕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창6:2,4).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을 제외하고 바알식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을 멸망시키셨습니다(창6:5~7). 엄청난 심판을 경험했음에도, 인류는 다시 바알식 경제로 회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하나님식으로 경영되지 않고, 바알식으로 경영되고 있습니다. 바알은 제법 셉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다스리기 전, 가나안 땅은 대지주와 소작인으로 계층화되어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풍요했지만,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가 심했습니다. 소작인은 자기 땅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소원이었습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의 죄악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 토지는 균등하게 분배되었습니다(수13~21장). 시간이 지나면서 토지가 타인에게 넘어가기도 했고, 토지를 잃은 사람들은 종이 되기도 했지만,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50년 단위로 찾아오는 ‘희년’에 토지는 균등하게 재분배되었고, 종이었던 사람들은 원래 살던 땅으로 돌아가 자유민이 될 수 있었습니다(레25:8~28).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레25:23)”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매매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식 경제입니다. 기근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사용권이 넘어가기도 했지만, 토지 소유권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나누었던 대로 토지는 균등하게 재분배되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에 의해 확립된 하나님식 경제입니다.
가나안 땅의 바알식 경제가 여호수아에 의해 하나님식 경제로 전환되는 상징적 사건이 ‘여리고’ 성의 함락이었습니다(수6:20).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의 진입로였던 ‘여리고’를 점령함으로 바알식 경제는 끝장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끝장 난 바알식 경제를 다시는 구축하지 말라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수6:26)”
그런데, 이스라엘에 아합이라는 자가 왕이 되면서 오늘날 ‘페니키아’라 불리는 시돈과 동맹을 맺더니 “바알을 섬겨 예배”합니다(왕상16:31). ‘페니키아’, 즉 ‘시돈’은 고대 알파벳 문자를 창시한 나라이고, 카르타고를 건설하여 북아프리카까지 세력을 확장해 로마 제국과 패권을 다투었던 강대국입니다. 이스라엘-페니키아 동맹은 아합 왕이 여호수아의 통치 이념인 하나님식 경제를 버리고, 바알식 경제를 도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알식 경제를 도입하는 상징적인 조치가 여리고 성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해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왕상16:34)”
무너졌던 여리고 성이 다시 세워짐으로 하나님식 경제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식 경제가 무너진 자리에 바알식 경제가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토지 매매를 금지하셨지만, 토지는 매매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땅을 주셨지만,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의 땅을 사들여 필요 이상의 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토지를 사고팔고, 필요 이상의 땅을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토지는 다 하나님의 것이니까요.
바알식 경제는 무너져야할 제도이지만, 무너져야 할 것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알식 경제는 때로 공황과 크고 작은 위기를 겪으며 흔들리지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여리고 성은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단단합니다. 무너졌다가도 다시 세워지는 것이 여리고 성이요 바알식 경제입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은 ‘말씀’으로 무너졌음을 기억한다면 소망이 있습니다(수6:6~15).
로마가 포에니 전쟁에서 ‘페니키아’, 즉 ‘시돈’이 세운 카르타고를 무너뜨립니다. 시돈보다 더 강고한 바알식 경제를 구축한 로마제국 식민지에 예수께서 태어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세상에 보내심은 세상에 검(劍)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 ‘성령의 검’ 말씀으로 기도하십니다(시147:;34:10). 처녀 마리아의 기도가 시퍼렇습니다.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눅1:52~53)”
하나님은 그저 종교적인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으로 투표하겠습니다. 독재의 상징 ‘바벨탑’은 무너져있어야 합니다. ‘여리고 성’은 다시 무너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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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