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왕은 한국인인가?
일본 천황의 가계에 백제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학설은 국수주의적인 일본 학자들도 잡아떼기 어려울 만큼 사료가 풍부하다. 20여년 동안 이 분야를 파고든 홍윤기 교수(일본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일본 황실의 족보 제례 의복 음식 등을 근거로 일본 황실과 백제
왕족의 깊은 혈연 관계를 추론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한일
고대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일본 황실이 선진국 백제문화의 영향을 폭넓게 받았지만 일본 천황가의 백제 동조론(同祖論)은 무리한 국수주의적 학설이라고 경계한다.
일본천황이 생일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역사서를 인용해 8세기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었다고 밝힌 것을
보면 일본 천황이 한국인은 아니지만 일본 황실에 한국인의 피가 다소간 흘러들어간 것만은 틀림 없는 것 같다. 황실에서 딸이 태어나자 온 나라가 들썩이는 나라에서 이런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센징의 DNA ▼
아사히 신문을 제외하고는 요미우리 신문등 주요지들이 천황의 발언을 생략하고 월드컵이 잘 진행되기를 바란다는 요지만 보도한 것을
보면 천황에 대한 일본인의 정서를 의식한 고민이 엿보인다. 천황을
신인(神人)으로 우러르는 일본의 보수층에서 천황 가계에 조센징의 DNA 가 튀어들어왔다는 것은 사실(史實)이라고 하더라도 용인하기 어렵다.
소위 진보적이라는 아사히 신문조차도 천황에 대한 보도는 일정한 선을 넘지 못한다. 서울에 와있던 아사히 신문의 한 특파원은 "내 이름으로 천황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쓰면 천황제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시간과 지면의 제약을 받는 언론은 기자회견이나 인터뷰에서 말해진
내용을 모두 싣는 일이 드물다. 그래서 열심히 뛰는 기자들은 인터뷰
대상으로부터 한시간이 넘게 말을 시켜놓고 겨우 한두줄 쓰느냐는 항의를 곧잘 받는다. 그러나 빠질 수 있는 것이 있고 빠져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강력 윈집 파일로 압축을 하더라도 핵심적인 내용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천황의 기자회견에서는 천황의 가계에 백제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말이 핵심이었다. 한국의 국수주의적인 학자가 발표한 논문도 아니고 천황 스스로 한 말이기 때문에 더욱 뉴스가 된다. 이것을 어떤 크기로 보도하느냐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가 생길 수 있지만 없지만 핵심을 빠뜨린 보도는 사실의 중대한 왜곡이다.
▼일본언론의 역수입 보도▼
일본인은 축소하고 생략하는데 별난 기술을 지닌 민족이다. 그들은
역사 기술에서 위안부와 난징(南京)학살도 과감히 생략해버린다. 한국 언론이 천황의 발언을 크게 보도하자 뒤늦게 일본 신문들은 `한국 언론이 천황의 한반도 혈연관계 발언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고
기사를 썼다. 기사의 역수입을 통해 보도의 책임을 한국에 미뤄버림으로써 일본 정서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 꾀를 낸 것이다.
한국인들이 일본 황실의 피에 백제인의 DNA 가 섞여 있다고 해서 국수적으로 뻐길 이유가 없다. 1200년을 내려오면서 백제의 여인이 일본 황실에 전해준 한국인의 순종 DNA는 어느 정도 남아 있을까. 춘천
소양댐에 잉크 한병 버려진 것을 잠실 수중보에서 그 흔적을 찾으려는 노력만큼이나 부질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국제화 시대에서 단일민족이나 순수한 혈통을 찾는 것도 촌스럽다.
순수 혈통이 어디 있는가. 게놈 프로젝트에서 밝혀졌지만 인간의 유전자에는 바이러스와 곤충의 유전자가 틈입해 대물림을 하고 있다.
황실의 신성이 훼손될까봐 천황 발언의 핵심을 깔아뭉개는 일본 언론보다는 1200년 전 조상의 인연을 거론하며 한일관계가 나아지기를 기원하는 일본 천황에게서 훨씬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모습을 본다.
"桓武 日王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 자손"
아키히토 일왕이 23일 “간무 일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의 연을 느낀다”며 일왕가가 고대 한반도와 깊숙이 관련돼 있음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간무’는 재위 기간 781~806년의 제50대 일왕이며, 재위 중인 일왕 자신이 공개적으로 한반도와의 혈연적 관련성을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68세 생일을 기념한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대한 생각을 질문받고 이같이 답변한 뒤 “무령왕은 일본과의
관계가 깊어 이 때부터 오경박사가 대대로 일본에 초빙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양국의 사람들 간에 옛날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음은 ‘일본서기’ 등에 상세히 기록돼있다”며 “성명왕은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이주·초빙돼온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문화·기술이 (일본에) 전래돼 왔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도쿄의 한 고위 외교 소식통은 “일본 정부 차원에서 사전
조율됐다는 흔적은 없다. 일왕이 개인적 인식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며 “한·일 간 현안 중 하나인 일왕 방한 문제에 이 발언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고 분석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또 “궁내청(왕실 행정 담당 관청) 악부의 악사들 중에는 당시 이주자의 자손들이 대대로 악사를 지냈고, 지금도 때때로
아악을 연주하는 사람이 있다”고 언급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이런
문화·기술이 일본 사람들의 열의와 한국 사람들의 우호적 태도에 의해 일본에 전래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며 그 후 일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과는 이런 (우호적) 교류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잊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지적, 불행한 과거사도 기억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2002년 월드컵이 “양국민의 협력에 의해 차질없이 진행돼, 양국민 사이의 이해와 신뢰감이 깊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아키히토 일왕은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 때 “한때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여러분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다”고
하는 등 재위 12년간 네 차례에 걸쳐 한국에 대한 반성의 뜻을 표명했었다.
(동경=박정훈특파원 chosun.com)
서기 6~7세기 한일관계사
▲505년 백제 무령왕 아들 사아군(순타) 왜국 파견. 일본 칸무(781~806)왕 생모의 직계 조상이 됨.
▲513년 백제 오경박사 단양이 선진 문물 파급 위해 왜국 파견.
▲538년 백제 성왕, 왜국에 불교 전래.
▲555년 백제 위덕왕 동생 혜왕자, 왜국 파견.
▲570년 고구려 사절, 왜국 방문.
▲588년 백제서 승려와 와(기와)박사, 화공 등 문화인들 파견.
▲595년 고구려 승려 혜자 왜국 방문. 쇼토쿠 태자 스승 됨
▲596년 왜 아스카사 준공. 준공식 때 일본 최고 귀족 100여명 백제 옷 입고 참배.
▲610년 고구려 승려 담징 왜국 파견. 금당벽화 그렸으며, 채색법, 종이와 먹 만드는
법 전래.
▲623년 신라서 불상과 불교 관련 물건(불구) 전래.
▲642년 백제 의자왕 아들 풍왕자(훗날 백제부흥군 총사령관) 왜국 파견.
▲647년 신라 김춘추 왜국 방문.
▲661년 백제 풍왕자 왜국서 5000여명 지원병 이끌고 백제부흥군 총사령관으로 귀국.
▲662년 왜국서 화살·솜 등 전쟁물자 대량 입수.
▲663년 금강 하류 백촌강 전투서 백제·왜 연합군과 나당연합군 간 전쟁 발발. 왜 2만7000명의 대군 지원했지만 나당연합군에 패배.
▲664~667년 왜, 한반도와 인접한 서북부지역에 병력 배치. 백제 유민 지도 아래 대야성, 가네다성 등 한반도식 산성 축조.
▲667년 백제 귀족 나카토미노 가마타리 신라 사신에게 김유신에게 줄 배 한 척 선사.
▲671년 백제 유민에게 대규모 관작 수여.
( 도움말 주신 분 연민수 동국대 사학과 강사(일본 고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