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의 목적은 왜정시대 일본놈이 한국인을 열등하게 묘사 시킬려고 만든 역사를 답습해서 예수쟁이들이 유교 헐뜱을라고 만든 역사개념을 한국 일부 대갈이 병신들이 지도 모르고 동조하는 잘못을 밝히는 것이다.
“李家*朝鮮은 역사적으로 외적한테 친입을 많히 당했고 大小전쟁도 자주했는 왕조이고 그 때문에 살기가 곤란했다.” 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孟子님의 이름이 가이기 때문 맹씨 만은 맹씨 라하지 맹가라고 하지 않고 기타 성은 家라 한다. 이씨조선도 이가조선이라 해야한다.)
조선시대때 친입을 많히 당했다고 해서 살기가 어렵다는 증거도 없지만, 친입을 많히 당하지도 않했고 전쟁을 많히 하지도 안했다. 지금 평균 한국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가조선시대 이전이나 안에 생긴 나라들의 역사들은 어떻한가 보자. 미국역사는 지금 230 년 정도 이고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한 300 년으로 100년전에 없어젔고, 불란스는 한 200년, 이태리 150년, 명이 250년, 청이 250년으로 명의 시작과 청의 멸망이 이가왕조의 시작과 멸망하고 거의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지금 영국이 (대영제국) 300년 된다. 모르면서 조사하지 않는 병신대갈이들이 영국은 한 천년 또는 2000 년 되고 이태리를 들면 역시 그정도로 아는데 대영제국은 300년, 현 이태리는 150 년 역사 밖에 안된다. 대영제국이 300 년 동안 나폴래옹과의 전쟁, 일차대전, 이차대전을 치루었다. 미국은 건국 수년만에 영국이 친입해서 수도를 다 불지렀고, 100년만에 외적이 친입해서 전쟁한것아니고 내부전쟁을 일으켜 그당시 전인구 2000 만에서 2백만을 죽인 남북전쟁을 치루었고, 그전에 멕시코와 전쟁해서 이겼고, 스페인하고 전쟁해서 이겼어 지금 큐바 콴테나모하는 기지도 차지했고, 필립핀도 얻었는데 필립핀을 합병시키면 필립핀인이 대거 캘리포니아로 와서 남양토인 하고 같이 살게 될까 두려워 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들구 일어나서 필립핀 독립을 시켰다. 그다음 일차대전, 이차대전에 많은 미국인이 죽었고 한국 동란 때는 못이겼고 , 베트남전에는 젔고, 걸퍼 1차 전쟁에는 이겻지만 2차 전쟁 계속으로 볼수있는 이락, 아프가니스탄에서 치루는 게리라전의 승패는 아직 불명이다.
이가 (이씨) 들의 500년 조선왕조와 거의 같이 긴 동시대의 왕조는 李家조선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고 망했는 오스만 터어키 (Ottoman Turks) 밖에 없다.
조선건국 초는 지금 한경남도 북도는 조선 땅이 아니였는데 전쟁을 안하고 영토를 확장해서 지금 한경남북도를 조선초에 (세종대왕때) 조선 영토에 편입했고 조선말에는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확장했다. 조선 시대 전쟁기간은 임진왜란 7년 병자호란 1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기에 비해 오스만 터키는 지금 터키에 시작해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락 에집트, 수단, 리비아를 정복했고 서로마제국과 싸워 西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자기들 수도로 만들었고 발칸반도 (그리스, 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정복하고 헝가리에서 이기고 지고 했다. 오스만 터키 전성기는 나머지 유롭 즉 독일, 프랑스, 이태리, 영국, 스페인등을 다 합친것보다 인구와 영토면적에서 컸다. 이러다가 전쟁에서 지면서 쭈구러 들어가기 시작해서 헝가리, 불가리아 등에서 쫒겨났고, 영국이 후원한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지고 난후 콘스탄티노블 주위를 제외한 모든 발칸반도를 잃고, 이집트, 수단, 리비아도 잃고,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락도 다 잃고 지금 터키로 쭈그러 들어갔다. 그러다 혁명이 일어나서 지금 터키가 되었다. 그러니 오스만 터키는 500년동안 팽창하다가 거의 원래 영토로 쭈구러들어가는 것을 했고 그 사이 한시도 평화롭게 지낸적이 없었고 전쟁으로 세월을 보냈다. 똑똑한 사내놈은 전부 장교로 만들어 전선에 내보내 거의 다 전쟁으로 죽게했고, 흐릿비릿해서 군인으로 쓸수없는 인물들이 종자를 만들어 퍼지도록됬기 때문 지금 터키가 한국보다 머리도 둔하고 따라서 산업도 발달 못하게 되었다.
이조의 창업자 이성계는 개인적으로 뛰어난 무술가일뿐 아니라 王材였다. 이성계는 자기 실력으로서도 삼군의 통수가 될 실력이 있어 다른 한국 장군들의 장점, 약점을 잘 알고 잇었다. 그 아들 이방원(이씨 왕조의 태종)은 수재로서 여말에 대과에 급제할만큼의 글 실력이 있었다. 고려시대때 정중부로 시작한 武臣執權이 있기전에는 儒臣이 전쟁시에 병권을 쥐고 외적 내적에 잘 대처했다. 서희는 외교관으로써 친입해온 거란군과 담판해서 가란군을 물러가게 했고, 강감찬은 그 이후 또 처들어온 그 당시 세계 최강의 거란군을 殲滅했고, 윤관은 북쪽에 9城을 개척해서 북쪽의 국방을 튼튼히 했고, 김부식은 요망한 중 묘청의 난을 평정했었다. 서희, 윤관, 강감찬, 김부식은 다 문관 (유신)이었다. 그런대 무신이 집권한후는 국방이란것은 보잘것이 없엇다. 몽고가 처들어 올때 그 당시 무신으로써 집권했는 최씨가 한일은 강화도에서 틀여밖혀 있는것외왼 아무한 일이 없고 본토는 몽골한테 쑥대밭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되는것이 당연한 것이 어느 골빈놈이 특정 무신의 부귀영화 유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는가? 암만 무신이 글좀하고 뺑뺑이 돌려 둘려되는 소위 spin doctor (뺑뺑이 박사?)들을 고용해서 그럴듯한 사이비 大義名分을 만들어 주의를 딴데로 돌려 국민을 현혹시키더라도 일반 국민은 전쟁터와 같은 살든가 죽든가 하는것이 걸리면, 다 지 살려고 하지 정권 잡어 저기들 끼리만 끼리끼리 해먹는 무신 (군발이)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다. 심지어는 초가 삼간 태우더라도 빈대죽는 꼴이 시원하다고 전쟁에 저서 나라 꼴이 말이 안되도 군발이 놈들 죽는것이 시원하다고 일부러 싸움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이성계는 자신히 뛰어난 무장이기 때문 무장들 속성을 잘알어 천성이 무장들을 싫어하는 성격이엇다. 글선비는 安貧樂道란것이 있지만 무관들은 出世가 爲主여서 줄서기를 잘하고 상급자에게 아첨을 잘하고, 경쟁자가 꺼꿀어 지기를 바라고, 서로 시기하고 싸우기를 잘하고, 그중 충직한자는 왕이 어떤 놈이 되든 덥어놓고 충성하는 것을 최고 명예로 생각하고, 대담하고 反骨이 잇는 자는 틈이 생기면 쿠데타를 해서 집권해서 부귀영화를 누릴려고 하는 기질을 잘알어 무신을 좋아 안햇다. 이성계가 특히 혐오하는 것은 문신은 누가 공이 있는데도 억울하게 음모에 걸리면 그 사람을 변호해주는 다른 문신이 있는데 무신은 출세위주로 경쟁자가 꺼꿀러 지기를 바라기 때문 좀 양심이 있는 자도 吾不關焉으로 가만히 있는것이엿다. (이성계는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제거할려고 하는 음모의 대상자였지만, 한번 최영이 변호해주어 살어 남은것외엔 운이 좋아 살어남었는 경력이 있었다.) 그래서 麗末에서와 같은 무신의 발호를 막기위한 이유로 軍을 실제적으로 폐지시켜버렸고 전투경찰이 군을 대신하도록 했다. 고위 관리의 자제가 무관이 되어 이들 父兄들의 비호아래 출세해서 兵權을 쥐고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처들어 올뿐아니라 이들 부형들이 서울에서 내응하는 즉 外攻內應을 막기위해 고위관리의 자제들이 무관이 되지 않는것을 장려했다. 그 대신 병역면제의 특혜를 조금 주었지만 체면과 위신을 중시하는 유교분위기 아래선 이 특혜는 아무 실질적이 못된다. 왜냐하면 영의정 같은 고위관리가 징집령을 내려 일반 백성의 자식들은 졸병으로 고생하고 지 자식은 병역면제로 고생 안시키면 일반 백성들이 욕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 임진란 이전 이이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이 제창되었을 때도 징집을 반대해서 지 자식 남의 자식 다 졸병으로 고생 안하고 놀게했다.
이조 초기 군을 실제적으로 폐지시켰어도 국방문제가 생기지 않은 이유는 무기기술이 몽골, 만주족, 倭 보다 월등히 발달됬기 때문이다. 첫째 세계에서 처음으로 합성물질 (composite material) 갑옷을 개발했다. 창호지를 콩기름에 넣어 콩기름이 스며들게한다음 이를 했볕에 말리는 것을 대여섯번 반복한다음 풀로 이렇게 된 종이 여러겹을 붙여 만든 판으로 갑옷 (armor)를 만들었다. 최강의 활인 조선활로 쏜 화살도 이와같은 여러층 합성 판 (multi-layer composite plate)로 만든 갑옷을 뚫고 갈수없다. 이 갑옷은 철로 만든 갑옷보다 물론 가벼워 철로 만든 갑옷 입고는 이 갑옷입은 조선군을 당해 낼수 없다. 몽골이나 만주족은 철로된 갑옷은 안 쓰고 주로 가죽으로 된 방패를 쓴다. 短兵接戰에서 몽골이나 만주족은 한손엔 방패 한손엔 칼이나 창을 쓰는데 비해 조선군은 두손으로 상대적으로 긴 환도나 창을 쓰기때문 몽골이나 만주족이 상대가 안 되었다
(대영제국은 300년 밖에 안됬는데 영국초기 스코트랜드 반군을 진압한것은 스코트랜드 반군은 일부만이 그당시 총인 鳥銃 (matchlock muzzle loader)이나 flintlock muzzle loader*를 가졋고, 한손에 방패 한손에 칼과 창을 썼는데 비해 영국군은 긴 flintlock muzzle loader 에 총검 (bayonet)을 꽂아 두손으로 잡고 찔러됬다. 총검을 꽂은 총이 길뿐아니라 두손으로 잡었기 때문 한손에 방패 한손에 칼이나 창을 쓰는 스코트랜드 반군이 hand-to-hand 싸움에서 젔다.)
(*미국 독립전쟁때 쓴 총 같은 것인데 조총하고 틀리는점은, 조총은 방아쇠를 당기면 미리 불을 붙힌 심지가 총대롱 옆에 있는 약실에 든 화약을 불 붙히는것이고, flintlock총은 부싯돌(쇠판) 을 때려나오는 불꽃이 약실에 있는 화약을 불 붙힌다. matchlock나 flintlock 총은 똑같이 총구에서 작대기로 화약을 밀어넣어 누르면 화약의 일부분은 총대롱 옆에낸 조그만 투유브(管)을 통해 밀여 나가 옆에 약실에 가게된다. 약실에 있는 화약이 불이 붙고 이 불이 위의 조그만 투우브를 통해 총대롱안에 잇는 화약을 불붙혀 폭발하게 한다.)
두째 최무선이 화약을 만들었다. 이 화약을 가지고 총을 개발못했지만 폭탄과 원시적인 클에이모 지뢰 (claymore mine)인 천자총 지자총을 만들어 倭寇는 간단히 제압할수 있었다.
세째 조선은 고조선 부터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활을 만들엇다. 조선 활은 일본활, 미국 인디언활, 영국 로빈훗드(전설)이 사용한 활등과 틀린다. 조선활을 제외하곤 (물론 요새 나온 사냥용 high tech 활 제외) 모든 세계 다른 나라에서 만든 활은 길다란 가지 (twig)를 꾸부러트린다음 활줄을 걸어 만든것이다. 이 에 비해 조선 활은 일단 꾸부러진 가지를 반대방향으로 꾸부린것에 해당한다. 애초에 꾸부런진것을 편다음 반대방향으로 꾸부린것에 해당하기 때문 變形이 커서 複元力이 크다. 이렇게 조선활은 활 몸통을 편 길이는 작어도 변형은 몸통길이가 훨씬 더 큰 다른 나라 활 (일본 활은 몸통길이가 조선활의 것에 비해 3배나 더 길다)의 것 만큼 된다. 본래 꾸부러진것을 다시 반대 방향으로 꾸부리는 것이 때문 몸통이 가지 하나로 만든다면 부러진다. 그래서 조선 활이나 현재 경기용 양궁은 활 몸통이 3 부분 즉 중앙몸체와 양 날개를 組合(assemble)한것이다. 양궁은 bolt, nut, washer로 한국말로 나사로 조여서 조립하지만 한국활은 끈, 아교 등으로 조립하는데 물론 시간도 오래 걸리고 (수개월 내지 수년) 여러가지 물질이 필요한 超high tech 활인셈이다. 조선만이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활은 작어도 화살이 멀리가 여자들도 쏘아도 157 m 표적까지 간다. 일본활은 조선활보다 3 배나 크기 때문 옜날 몸이 작어 倭라고 불리는 일본인이 힘껏 당겨 쏘아 봐야 뭘리가지 못해 일본인 한텐 유용한 무기가 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 일본인은 한국의 이조 창업자 이성계나 그 휘하 장수 이지란 (이두란 또는 통두란) 같은 명궁이 나오질 못했다.
弩(cross bow)는 화살총이라고 하는것인데 미국 어느 수퍼마켇트 총 파는 파트에도 사냥용 활과 같이 판다. 화살을 당겨 걸어놓았다가 방아쇠를 당기면 화살이 나가도록 되어있다. 이노는 본인생각엔 한국인이 발명 한것인것이라고 본다. 노는 중국서는 춘추 전국시대에도 전쟁에 사용했고 서양보다 1400년 먼저 사용했다. 시저 이후 로마시대에도 노가 있었는데 이노는 한국 중국의 노와 틀려 개인용 무기가 아니고 대포에 해당되는 것인데 테에블크기의 노에서 화살이란보단 큰 작살을 쏘아 적군을 맞혀 살상하는것보단 방패에 꽂아지도록 하는 것이다. 방패에 꽂아지면 낙시바늘 처름 뽑아 내기 어렵게 만들어 방패를 사용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왜 개인용 노를 안 만들었냐면 서양서는 활을 작게 만들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크 시대엔 서양선 전쟁에 쓸만한 활도 못만들엇다. 스팔타군이 침공한 페르시아군을 물리칠때 활을 써지않고 투창을 던저 페르시아군을 죽였다. 요새같으면 그 까짓 투창던저서는 girl scout 한테도 못이긴다고 보겠지만 페르시아군도 역시 스팔타와 마찬가지로 무기다운 활도 없고, 체력도 없고 무술이란것이 없었다.
영국 서는 1066년 Hasting 에서 프랑스에서 친입해온 주로 노르만족인 월리암 군대와 그 당시 영국을 통치하고 잇었든 해롯 왕의 싹손 족이 싸웠는데 싹손 군은 활도 없고 말도 없어 그저 보병군대가 전면에 방패로 벽을 만들어 공격해오는 적을 맞든가, 앞으로 전진하는 데 비해 월리암군은 말 (騎兵)이 있었고 활이 있어 싹손 군대를 완전 패배 시키고 해롯 왕도 죽엿다. 이 후 영국은 노르만 족이 지배했다. 해스팅 싸움후 한 100년 쯤 되어 월리암의 자손인 사자심장왕 (Lionheart King) 리차드가 10자 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무스림부터 예수쟁이 지배로 탈환할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귀국도중 원수 손에 붙들려 고생하다가 인질금(ransom)을 영국의 각 교회(그당시는 개신교는 없음)와 리차드 동정하는 사람들이 내어 석방되어 영국에 돌아와서 복수 하러 프랑스에 가서 원수인 프랑스 북부, 독일 남부지방 영주 (호칭은 황제라고 함)하고 싸우다 지금 프랑스에서 노의 bolt [활에 걸어 쏘는 화살(arrow)은 가늘지만 노에 걸어 쏘는 화살은 굵어 bolt라 부른다]에 맞어 죽었다고 하는데* 이말이 사실이라면 개인용 무기로서 노는 서양서는 12 세기에 나왔다.]
*[리차드가 왜 프랑스에 가서 죽었느냐 정말로 그렇게 죽엇느냐는 학설이 구구하다 [유력한 설에는 리차드는 적의 손에 죽고 그 시체는 갈가리 찢어저서 벌판에 흩어졌다고 한다. 전 생애를 예수쟁이 하는님의 충실한 종으로 봉사했는 리차드가 이런식으로 죽어서는 천주예수쟁이 한테는 안되기 때문 이 이유로 리차드 몸의 한부분 (심장)은 어느 천주쟁이사원에 또 다른 부분은 (팔)은 또 다른 사원에 다리는 또 다른 사원에 흩어져 보관하고 있다고 하고 (실제 그것들이 리차드 몸의 일부라는 증거 전무. DNA 조사는 죽은사람 모독이란 핑게로 기피한다), 갈릴레오 시대까지만 (400 년전) 해도 이태리에서는 리차드가 어떻게 죽었가를 신부가 발설하면 焚형 (십자가에 산채로 묶어놓고 불에 태우는 형)에 처해젔다 한다.]
한국은 활을 작게 만들수 있기 때문 활처름 휴대할수있는 노도 잘 만들었다. 가장 유명한 노 名匠으로 신라의 애국자 진천을 들수 있다. 진천은 그 당시 사정거리가 가장 큰 무기인 개인용 노를 만들었는데 그 기술을 전수해주면 높은 벼슬과 상을 주겠다는 당나라의 유혹을 물리치고 사형을 택한 애국자이시다. 고구려도 노를 잘 만들었기 때문 중국과 싸워 이겼다. 안시성 싸움에서 이긴것은 고구려의 노가 더 강력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전설에는 수 양제를 암살한 무기도 노라고 한다. 수양제의 113만 대군은 을지문덕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에게 거의 전멸했지만 수양제가 군대를 징집해서 복수하러 처들어온다는 소문이 있었었다. 이를 걱정한 고구려 애국자인 고구려 사신은 수양제를 암살할려고 도포 (over coat)안에 아주 小型인 노에 화살을 재고 이를 두루마기 안에 감추고 수양제에게 외교 면담을 하자고 했다. 수양제의 호위병은 물론 아무도 수양제 한테 가까이 못오게하지만 설마 상당히 떨어진 거리 (가령 30 m)에서 노로서 쏠 줄은 예상못해서 대비안하다가 수양제가 고구려 사신이 쏜 노 화살에 죽게했다. 물론 고구려 사신도 호위병한테 죽었다. 이는 野史인데 正史에서는 수양제가 어떻게 죽었는지 확실치 않다. 민중이 바란을 일으켜 그 괴수한테 (우문??) 수양제가 살해 되었다고도 한다.
유교의 선비는 6藝를 익혀야 하는데 6예중 御(말 타기) 와 射(활 쏘기)가 있다. 말타기는 이조의 가난한 평균 선비한테는 훈련하기 어렵지만 射는 ㄸ구멍 찢어지게 가난하지 않는 한 훈련할수 있는데 일부러 장려하지 안했다. 그래도 경제여유있는 일부 선비는 활쏘기를 연습해서 임진왜란때 유용하게 사용햇다. 조총은 사정거리가 50 m [총통안에 그땐 나선형 홈 (groove)을 새길 (carve)줄 몰랐고 흑색 화약은 폭발력이 작어 그렇다]지나지 않고, 화약 총알 장진을 화약을 총구에 넣고 긴 작대기로 밀어 넣은다음 다시 총알을 총구에 넣어 밀어넣기 때문 (이를 前裝 (muzzle loading) 이라 한다) 시간이 걸려 일분에 4발이상 쏠수가 없고 馬上에서는 장진할수 없다. 이에 비해 활은 일분에 16발 정도를 쏠수있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장진하고 쏠수 있고 사정거라가 100 m 가 넘는 이점이 있었다.
어렇게 조선의 무기에서위 우월은 임잰왜란때 까지 한 250년 계속됐다. 이 優位는 임진란부터 깨어젔다. 임진왜란때는 왜가 화란인 (Dutch)이 전래한 조총을 가지고 침입햇고 병자호란때는 청군이 말를 서로 연결하고 말들 위에 판자를 깔고 그 판자에 대포를 싣고 친입했다.
조선은 건국초 부터 망할때 까지위 500년동안 내부 치안은 잘 되었고 초기 300년 동안의 대부분은 뚱당거리고 편안하게 잘 살었다. 치안이 잘되어 팔도강산 유람할수 있었고, 술집에서 술을 늦게 까지 마시기때문 시간을 알려주느라고 보신각 종도 만들어 종을 처서 시간을 알리고 “노들강변 봄 버들 칭칭…” 어쩌고 하는 괭장히 흥겨로운 노래나 불러됐다. 아리랑 같은 애조뛴 민요는 구한말에 나왔지 이조 초 중기는 그런 노래가 국민 정서에 맞지 않해 나오질 못했다. 전쟁을 모르고 편안하게 산것은 다음 두 이야기에서도 볼수 있다.
첫째는 임진왜란 초기에 북상하는 왜군을 막으라고 어떤 인물을 방어사로 만들었다. 그 때 서울 시민은 이 인물이 말에 높히 타고 보무당당한 군대를 지휘해서 남쪽으로 가는것을 볼려고 남대문에 가서 기다렸드니 이 인물이 가마 타고 남대문을 나가더라고 했다.
둘째는 왜군이 친입해서 선조가 의주로 몽진했다는 소문을 듣고 호남지방의 선비들이 勤王兵이 되서 갖써고 도포 입고 길다란 대나무에 다가 근왕병이라고 썬 깃발을 들고 대전에 몰려왔는데 그 수가 자그만치 60만이나 되였다고 한다. 이 60만 대군이 왜군 일개 소대하고 대전근처에서 조우했다. 왜군이 말타고 이 근왕병한테 돌격하니 60만 대군이 까마귀때 처름 흩어젔다 한다.
첫째는 만든 이야기거나 너무 劇化해서 한것같고 둘째는 과장했음에 틀림없다. 일부 한국인은 이 두 이야기가 부끄러운 역사라고 생각하는데 이 본인은 아무 부끄러울것이 없다고 본다. 임진왜란때의 한국인은 할아버지 증조부, 고조할아버지 적어도 3, 4대 이전 부터 전쟁을 경험해본적이 없고 전쟁이란 삼국지, 수호지로 부터 좀 아는것 밖에 없었기 때문 위의 일이 일어난것이다.
외적과 전쟁이 없다고 해서 평화롭게 살게되는것이 아니다. 평화롭게 살려면 식량이 있어야 한다. 중국 곡부근처 어느 대성전 (문묘)에서는 송 나라때 부터 “有米民生“이란 현수막을 걸어났다 한다. 이 ’쌀이 있어야 백성이 산다”는 말은 불교식으로 말해 모든 불평을 막는 大神呪, 大明呪, 無上呪, 無等等呪여서 중국 문화혁명때 홍위병들이 중국에 있는 어떤 절에도 친입해서 불상도 파괘하고 승려를 능욕하는 행위를 했어도 이 “유미민생” 이 걸려있는 문묘에는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서양의 학자들이 공자님 맹자님을 칭찬할래야 칭찬받아야만 할것보다 더 칭찬할수 없는, 인류한테 施惠하신 분들이라고 보는 이유는 “전 국민을 계급차별없이 고육시키라 (Educate the people without class discrimination)” 이 첫째고 둘째는 쌀이 있어야 산다 (“有米民生“) . 쌀이 예수쟁이 말대로 하면 하느님이란 것이다. 이말은 또 “국민의 누구든지 먹도록 만들어라” 는 것이다. 쌀이 있을려면 농사를 지어야하고 농사를 지을려면 농부가 경작할 땅을 소유해야 한다. 맹자님이 께서 하신 말씀 “恒産이 있어야 恒心이 있고 恒心이 있어야 恒産이 있다” 는 것은 농부가 땅을 사유재산으로 소유해야 마음이 평안하고 따라서 농사를 잘지어 소출이 한상 있다는 말이다. 유교 국가에서는 농부한테 경작할 땅을 사유재산으로 소유케 한다. 농부가 지 땅은 어떻게 하든지 경작해서 대 한발, 대 홍수가 일어나지 않는한 지 먹을 것은 만들어 국민이 굶어 죽거나 못먹어 영양 실조로 고생하는 일이 자고로 없다. 유교국가에서는 국가 전체로 봐서 年年히 식량 생산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남어 돌아갔다. 이조시대때 한국은 농사를 중시해서 저수지, 관개, 및 농사기술을 개발해서 고려, 신라때 보다 국민 개인당 식량 샌산량이 훨씬 높고, 또 세계 어느나라보단 단연코 높았다. 남는 곡식은 술을 만들고 떡을 만들어 먹었다. 한국은 설, 보름, 한식, 백종 (백종은 본래 유교명절이지만 불교서는 우란분절로 기념한다), 추석등 명절에 떡, 엿, 술을 만들고, 선조 제삿날에도 술, 떡은 만들고 생일날에 떡 만들어 먹었다. 이해 비해 서양서는 본래 명절이란 것이 없고 아이들이 먹는 단 것 (사탕, 엿)이 없었다 (13내지 14세기에 온 말코폴로가 놀란것 하나는 중국서는 아이들이 가게서 사탕 사 먹는 것이엿다) . 산업혁명전 까지 (러시아서는 100년 전 볼새비키 혁명까지) 농부는 農奴로 지 땅을 소유못하고 영주를 위해 농사만 지었다. 그러니 명절이란 것이 설사 있다하더라도 기념할수 없었다. X-mas 라는 명절에 기념하는 것은 요 100년내지 200년전에 나온것이고, 미국서 Thanksgiving day는 물론 Pilgrimage가 200년전에 미국와서 생긴것이다. 10월 31일 할로웬은 미국 어린아이 만에 해당되는 명절이다. 150년 루크라이나 농노를 보면 평생 명절이란 것은 없고 어쩌다 지주가 선심써서 돼지비게 두 서너 근 주면 그 날이 명절날인 셈이다. 먹을것이 적어도 좀 남어 돌아가야만 명절도 지내고 조상한테 제사도 지내는 것이다.
혁명도 못먹기 때문 일어 나고 성공도 한다. 이조말년에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컸는데 그 구호는 서북사람을 차별해서 높은 벼슬 안준다는 것이지 배가 고프다는 것이 아니였다. 홍경래나 그 일당은 평생에 못 먹은적이 없고 먹을것은 다 먹었다. 구한말 동학난은 그래도 반란 일으키는 이유로서 좀 더 정당 하였다. 貪官汚吏가 지가 치부하기 위해 세금을 너무 많히 매겨 농부가 견딜수 없다는 것이였다. 그 당시는 자작농이 적고 소작이었지만,* 그런 탐관오리한테 시달려도 최소한 굶지는 안했다. 유우롭의 경우는 아주 딴판이다. 프랑스 혁명 전 (루이 16세 와 그의 마누라 마리 안토아네트라 불리는 오스트리아 태생 왕비가 처형되기 전)에 역대 왕들이 쓸데 없이 전쟁을 지가 일으키기도 하고 남의 전쟁에 참여해서 상이 군인을 많히 만들었다. 물론 그당시 농부는 농노 신세였다. 시골 농부가 징집돼서 싸우다 병신이 되서 제대되여 지 고향으로 가면 지주는 노동력없는 상이군인을 재고용 안했다. (한국서는 상이군인은 국가에서 땅을 주거나 해마다 곡식을 주었다. 땅만 있어면 친척이나 이웃이 품을 팔어주어 농사를 지을수 있고 아예 땅을 빌려주어 도조받어 살수있어 상이군인이 서울로 가지 않했다. 물론 전쟁이란 것은 어쩌다 하는 것이 때문 상이용사란 것이 실제적인 면에서는 없다고 볼수있다) 시골서 먹고 살길없는 상이용사는 파리로 가서 귀족들 집에 밤에 가서 도적질, 똥쉬간 청소, 쓰리, pimp, 거지 등 노릇해서 살었다. 200년 전만 하더라도 프랑스 파리의 50 % 이상은 이런 극한 밑바닥 인생들이 사는 소굴이였는데 그 상황은 ’노틀담의 곱추’라는 소설에서 그려놓은것 보다 더 劣惡했다 한다.
[*한국의 소작농이 서양의 농노하고 틀리는점: 어느 전라도 농촌에 김이라는 富農이 있고 박이라는 부농도 있고 이라는 농부가 있다하자. 이의 할애비는 산월이 한테 반해 땅문서 팔어 그 돈을 산월이 한테 줬기 때문, 자기 소유 농토가 없어 소작농으로 농사 짓는수 밖에 없다. 김은 이가 김의 10마지기 논을 소작해서 일년에 쌀 한 가마만 달라고 한다. 박은 이가 20마지기 논을 소작해서 일년에 쌀 두가마니 달라고 한다. 세률은 같다. 이가 보니 김의 논이 원체 좋아 김의 논을 소작하면 많은 수확을 할것 같해 (쌀한가마 빼고도 자기한테 남는 수확이 많다) 김의 논을 부치기로 해버렸다. 서양의 농노 이반은 지주고 영주인 요셉의 논을 자손대대로 농사해서 요셉이나 요셉의 자손이 정한 량의 쌀을 바치고 요셉 허락없이
이사도 갈수없고, 물론 다른 직업도 가질수 없다. 한국의 이는 농사가 잘 안되면 강원도에 가서 화전민이 되거나 백두산에 가서 산삼캐러 다닐수 있다.]
이조가 망한것은 프랑스 혁명 모양 기아때문 들고 일어나서 된것이 아니고 전 국민이 無氣力해서 不條理를 吾不關焉하는 태도가 만연해서 매국노가 결국 나라 팔어먹은것이다. 후에 왜 무기력하게 됬는가를 밝히겠다.
첫댓글 언어을 '놈'이니 '쟁이'니 받침도 바르지 않은 곳이 보이고, 아무리 유교가 우월하다 하시지만 여러 회원들의 조회가 있는 장소이니 바른글을 남겨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